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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미당 담론
「자화상」과 함께
고은 高銀
시인. 시집으로 『문의마을에 가서』 『백두산』 『만인보』 『남과 북』 『순간의 꽃』 등이 있음.
세상이여 설사 돌 사람이 입을 열지라도
여전히 혀끝의 속임을 알지 못하리
─염송(拈頌) 25
다음과 같은 까닭이 있었나보다. 하나는 사십구재 이후에나 말하는 것이 덜 거북살스럽겠다는 생각이었고, 둘은 애도와 회고의 찬양들이 가라앉은 다음에나 담담하게 나서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늦었다.
미당(未堂)은 나에게 추억의 대상이기도 하고 단절의 대상이기도 하다. 육친적인 날들과 긴 벼랑 같은 결별이 그것인데, 그 두 가지가 다 이 글의 짐이다.
30여년 동안 세찬 강물의 이쪽과 저쪽이 마주했는데, 특히 1980년 5월 ‘광주’ 이후 영영 돌이킬 수 없게 단절되기 이전까지는 아직도 내 정감 가운데는 그의 음력(陰曆)이 들어 있었고 그의 워낭소리 나는 듯한 마당 깊은 눈길이 이따금 떠오르던 것이다.
저 전후 산천을 떠돌며 살아남은 나에게 불가결의 혈연으로 그 인연은 시작되었다. 유난히 둘 사이의 진한 피에 이심전심도 많았다.
1958년 한국시인협회 설립과 함께 나온 기관지 『현대시』 창간호에 친구가 보낸 내 시 한편이 신인작품으로 발표된 데 이어 어떤 사람의 안내로 시 5편 중의 3편이 『현대문학』에 추천됨으로써 나는 지훈(芝薰)과 미당을 통해서 곡절 많은 이 나라 시의 길에 내보내진 것이다. 이런 추천행사가 스승과 제자라는 조선 사림(士林)의 유습 그대로 도제주의로 굳어져 그런 미풍 겸 폐단이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겨져왔다. 그래서 너는 누구의 제자이고 나는 누구네 문도(門徒)라는 것으로 고질병 같은 시의 문벌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런 나머지 60년대 후반의 어느날 미당은 나에게 말했다. “오늘 동리(金東里)하고 만났더니 너에겐 고은이 있어 좋겠다, 나는 그런 제자가 없다 하더군. 잇히히히.” 이런 것말고도 그는 여기저기서 내 자랑을 자주 했고, 그럴 때마다 왜 편애하느냐라는 불평을 만나기도 한 것을 기억한다. 그만큼 자주 정실적이기까지 했다. 한때는 내 장시간의 웃음증상 때문에 화가 난 그가 가족회의를 열어 출입금지를 선언한 뒤 한달 이상의 절교 뒤에 다시 관계가 회복되어 그전보다 더 진진해졌다. 그 당시 불교적 관심의 친연성도 큰 길인 듯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지훈의 선적(禪的)인 것과 함께 미당의 연기론적인 것의 여울지는 유혹도 그 한몫이었던 것 같다.
1971년 이후 내 문학행로는 그러나 그동안의 강의 끄트머리를 떠났다. 물마루 높은 난바다는 이제까지의 ‘스승’이 차츰 무효로 되어갔다. 어제는 오늘의 부차적인 볼모이기 십상이었다. 어쭙잖게도 나의 문학은 지키는 것보다 고치는 것을 지향해야 했다. 현실의 여러 가녘으로부터 저만치 소개되어 있기보다 돌아쳐 맞서는 산짐승의 태세야말로 달려오는 세계의 절실성을 만나게 하는 원칙이기도 했다.
그 수많은 오늘들은 늘 화상(火傷)을 입을 만큼 뜨겁고 공포의 고비마다 면역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시인에게 파쇼는 반드시 필요했다! 그것에 지면 시는 삭은 낙엽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해서 낙엽이 시 속에서 행여 모독되는 일이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떠났던 미당 근처를 더듬어보고자 한다.
1980년 5월이 지나갔다. 이미 미당은 8할 이상 부정되었다. 1983년 모처럼 내가 세상에 돌아왔을 때 어느 회합에서 그와 마주치게 되었다. 10년 가까이 만나지 않은 처지였다. “왜 안 오시는가, 꼭 와, 오란 말이여”라고 그가 말했다. 그때 내 입에서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한마디 대꾸가 튀어나왔다. “선생님 세상 떠나시면 가겠습니다.” 한동안 그는 내 하반신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나도 돌아섰다. 그는 1915년생이고 나는 1933년생이었다.
80년대 신군부 지배기간은 좀더 지능화된 정보정치로 나아갔고 6월항쟁 뒤의 어설픈 대통령직선제까지 이르렀다. 그럴 무렵 문학에 대한 관심은 문단의 화합을 강조하는 것으로 제법 그럴싸하게 나타나기도 하고 여기저기 모호한 가치중립적인 동작도 있게 되었다. 언론들의 계도도 있었다. 내 이름을 문예지 문인주소록에서도 빼버린 시절이 어느새 다른 시절로 슬그머니 돌아서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미당과 나와의 만남을 요청하는 매체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미당 자신이 전두환의 통로로 얻어낸 자금으로 운영하는 문예지에서 그와의 권두대담을 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몇 신문과 잡지들이 그렇게 미당과 내가 ‘화해’하는 극적인 광경을 포착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권유는 그가 타계할 때까지 열 번 이상 되풀이되었다. 그런 노력들에 대해서 나는 서투른 열중쉬어 자세로 대하다가 미당 별세의 소식을 기자들로부터 들은 이틀 뒤에 빈소의 사진과의 대면으로 그와의 만남을 마감한 것이다.
다행인 것은 그의 영구가 고향의 선영으로 돌아가는 장례행렬에 많은 사람들의 정성이 장엄한 바였다. 그날따라 나에게 미당의 청산 귀의와는 별도로 내가 살고 있는 마을 한 노인의 죽음으로부터 새삼 터득한 바가 있다면, 사람이 이 세상을 자신의 의식 환경으로 삼아 천년 만년 살아갈 것처럼 지내다가 끝내는 한 나그네로 표표히 떠나야 하는 그 죽음의 왕생행로에 이르러서야 이 세상이 내 것이 아니라 내가 하염없는 손님으로 머물다가 떠나야 하는 덧없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더구나 미당은 2백세까지는 살아야겠다고 벼른 적도 있었고 그것을 위해서 무슨 요구르트 선전의 그루지야 지방 풍경을 보고 생각해냈을 러시아 행각도 있었던 것이다.
미당 85세의 생애는 그렇듯이 그가 생전 내내 자처한 ‘떠돌이’로 떠났으나 그와 반대로 그는 세상의 주인이고자 한 집착도 없지 않았고, 세상에는 그에 대한 평가와 맹신이 있는가 하면 다른 쪽의 규탄으로도 얼룩져 있어야 했다. 그런 것 이전에 김수영(金洙暎)은 미당을 체질적으로 싫어한 이유가 셋이었다. 하나는 그 토속성이 견딜 수 없다는 것, 둘은 그의 늘어지는 서정성이었고, 셋은 그의 반동성이 역겹다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미당의 시 한두 편과 삶의 몇군데에 대해서 말하는 동안 모내기철 여기저기 무논에 던져진 모춤 몇개를 풀어 허튼모를 심는 심정이고자 한다. 천도(天道)도 옳으냐 그르냐 물어야 하거늘 지상의 한 시인이 남긴 것들에 대해서도 물어야 한다, 그것이 무언인가를.
50년대 말 미당은 백철(白鐵)의 천민론에 몹시 화를 냈다. 그것은 뒤의 김종길(金宗吉) 영매론에 반발하는 것보다 더 격렬했다. 아마도 그즈음이 미당으로서는 그동안 떠돌았던 ‘병든’ 삶으로부터 가문과 세상에 대한 안착의 품격을 보여주어야 할 때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아닌밤중에 백철이 나타난 것이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外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세햇 동안 나를 키운 건 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詩의 이슬에는
몇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어리며 나는 왔다.
이 「자화상(自畵像)」은 ‘此一篇昭和十二年丁丑歲仲秋作. 作者時年二十三也’라는 좀 현학적인 부기(附記)로 보아 시인의 나이 23세 무렵의 것이다.
그는 18세 무렵 신문의 독자문예란에 작품을 보내기 시작한다. 그런 투고작품의 하나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응모에 편입되어 당선된 「벽(壁)」이다. 그로부터 2,3년 뒤 김동리·이용희(李用熙)·오장환(吳章煥) 들과 함께 ‘시인부락’ 동인회를 결성하고 그 동인지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된다.
이 시는 미당을 말할 때마다 마치 원죄로서의 영예인 듯, 주부(呪符)인 듯 반드시 내세워지는 미당론 생활필수품 같은 텍스트라 하겠다. 또는 이것은 한동안 잠잠하게 가라앉았다가 수면으로 떠오르는 늙어빠진 고래의 오달진 물줄기 같은 시적 진술들의 강한 간주곡이 된다. 백철이 이 시를 두고 시인의 가계가 천민이라고 말한 것이고, 시인은 백철에게 어떤 살의(殺意)까지도 품으며 화를 낸 것이다.
아마도 이같은 천민론이 식민지시대였다면 도리어 그런 신분으로서의 천민에 피압박 민족의 의미라도 가탁되었거나 개인적으로도 위악적인 자기학대에 기여함으로써 “애비는 종이었다”라는 첫행을 시인 자신이 명예로운 사실로 강조했을지도 모른다. 시와 사실의 일치라는 뜻밖의 상징효과를 얻게 되는 줄을 왜 몰랐겠는가.
그러나 백철의 발언이 나온 것은 우선 시인이 전쟁시기의 정신적 난조에서 어느정도 헤어나 가정과 사회에 대한 자신의 위엄을 통상적으로 갖춰갈 때였으므로 그의 폭발은 당연했다.
백철 문학론의 허실에 대한 비판은 정작 다른 곳에서 가능한 노릇이지만 미당으로서는 그의 부친이 상민이나 노비신분이라고 말한 것으로 인해서 백철의 비평행위 전반을 격하하기도 한다. (이는 뒷날 김동리와의 문인협회 이사장 쟁탈전에서 패배한 뒤 이십대 이래의 오랜 친구인 김동리의 문학을 부정하고 그 대신 황순원黃順元을 찬양하는 일과도 상통한다.)
아버지가 상민이냐 종이냐를 말하기 전에 그는 김동리에게 주는 시 「엽서(葉書)」에서는 “목아지가 가느다란 李太白이처럼/우리는 어째서 兩班이어야 했드냐”라 한 것을 보면 시인 자신은 세기말 댄디즘의 기분과 함께 적선(謫仙) 이백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있다.
사실인즉 그의 부친은 고향의 대지주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가의 농사 마름이었던 것이다. 이 마름이란, 가령 김용섭(金容燮)의 지주연구와 관련짓지 않더라도 먼저 지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는 충성의 지속에 조금도 소홀하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이와 함께 광활한 토지에 빌붙어서 살아가는 참담한 생존의 소작인들에게는 지주보다 더 생사여탈의 실세인 것이다. 특히 소작료 이외에도 사사로운 부과가 없지 않아 봉건시대 지방관리의 가렴주구 못지않은 일들이 자주 마름의 손으로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런 존재는 상전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지만 하인에게는 무서운 존재였다. 물론 그중에는 예외의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이런저런 기본 환경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터에 하필 그같은 지난날을 들추어낸 천민론에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미당에게는 태생적일 만큼 그의 생애 내내 지속된 인촌가와의 관련이다. 한국전쟁 직전에 동아일보 사회부장·문화부장으로 특채된 사실도 아버지를 이은 2대의 긴 인연임에 틀림없다.
그는 1931년 일시 귀향한 인촌에게 가서 문안인사를 했다. 그때 네시를 ‘넉시’로 말해서 네시면 네시고 넉점이면 넉점이지 넉시라는 조선말은 없다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그런 뒤 해방 시기 “자네가 우리말을 썩 잘 다루는 좋은 시인이 되었다면서? 잘했네 잘했네! 어디, 우리 동아일보 한번 잘 꾸며보아”(「仁村어른과 동아일보와 나」)라는 겸상 대접의 두터운 격려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렇게 인촌일가와 떼어놓을 수 없는 준세습적 인연과 함께 또하나의 인연은 그를 한때 출가시켜 학승으로 만들 생각을 했다가 시인노릇이나 하도록 중앙불전(中央佛專) 무료 학생으로 입학시킨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에 의해서였다. 석전은 이미 육당(六堂)·춘원(春園)에 대해 국학 및 불학의 도체(導體)였고 이와는 달리 만해(萬海)와의 우애는 각별해서 둘 사이의 화답시들이 남아 있기도 하다. 그는 또 신석정(辛夕汀)도 받아들여 중앙불전에 다니는 제자로 두었다. 석전은 호남에서 태어난 큰 학승이며 향토적인 덕망을 두루 갖춘 인물로서 미당의 방황을 선도(善導)했으며 그의 가능성을 일깨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요컨대 이 인촌과 석전이 미당에게는 살아가는 기반을 만들어주었으며 미당의 운명은 그 기반 위에서 잘 활약해온 것이 사실이다.
먼저 「자화상」에 관련해서 그의 시세계 단면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 시를 김우창(金禹昌)은 실패라고 규정하고 그 실패를 한국시 전반에 관련시킨 적이 있다. 이 시 속에는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라는 구절이 명기되어 있다. 그럼에도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그는 세상에 대한 수치가 결여된 체질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서 죄인을 읽고 어떤 사람은 천치를 읽고 있으나 그런 따위의 외부에는 아랑곳할 필요가 없는 자신으로 환원된다. 그래서 뉘우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죄인’ ‘천치’는 시의 진정성을 이끌어내는 탁월한 은유이지만 그것은 강렬한 수사(修辭)이지 깊은 자기성찰이나 ‘회개’의 아픔 같은 것에는 이르지 않는 추상으로 된다. 여기서부터 미당의 체질적인 자기합리화가 능란하게 이어지는데 그것은 자아와 세계의 무속적(巫俗的) 연결을 통해서 한층 더 깊어진다. 그러므로 그의 서술에는 전근대적 설화의 마술이 넘침으로써 사람들에게 아픈 진실보다 습기 많은 정한(情恨)의 질긴 섬유질을 더 많이 내보이는 것이다.
미당에게는 삶에서나 문학에서나 이른바 대응콤플렉스라는 것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은연중 자신을 무오류성에 두게 한다. 세상사를 개괄적으로 깨달은 나머지 세상에 대한 어떤 종류의 자책도 필요없게 된다. 그러므로 고뇌의 소재지가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그는 천우신조라든가 복이라든가 하는, 전래되는 세속적 이익을 믿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실존적 자아의식이나 근대적 역사 사고와는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물세햇 동안 나를 키운 건 八割이 바람이다”라는 유명한 선언은 사실상 그것을 읽는 사람의 심금에 닿는 것에 앞서 시인 자신에게는 과장된 것이다. 왜냐하면 겨우 중앙고보·고창고보를 다닌 뒤의 ‘경성(京城)’시대의 첫걸음이 이십대 초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선언이 과장이 아니기 위해서는 생애 50세 내지 60세쯤 살고 나서 뱉어내는 탄식이 요구될 것이다. 그런데도 기껏 이십대 초의 방황쯤으로 삶의 8할을 바람으로 돌리는 것은 언어 자체가 가지는 허상으로서의 감동유발에 다름아니다.
또한 그에게는 생득적인 수줍음 따위 대신 본능적인 공포가 두드러지는 것 같다. 어부인 외할아버지가 갑오년 해일의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은 기억은, 그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커다란 눈을 닮아 그의 큰 눈의 동공에는 자주 심리적인 공포감이 들어 있었고 그것이 그의 무의식 지층에 행위의 동기로 가라앉아 있었다.
‘자화상’이란 예술가들이 타아와 사물 그리고 자신의 내면 이외의 상황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거울 속에서 대상화된 자아로 돌아가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미당 초기시로서의 「자화상」에서 그의 시 전체에 앞선 암시를 읽어내도 무방하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詩의 이슬에는
몇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어리며 나는 왔다.
이는 그 누구랄 것도 없이 시인 자신의 주관적 자기설명이다. 여기에서 얻어진 상당히 놀라운 울림은 그의 청춘 전신상이 야수파의 실험 같은 화면으로 그려져 있어 더욱 고조되는 것 같다.
그런데 미당시의 주조(主調) 가운데 하나가 개인사적인 세계이다. 서정이란 세계를 자기화한다고 말할 수 있고 거꾸로 자아를 세계화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말고 시인이라 해서 개인의 한계를 무조건 벗어나라는 도식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실지로 일련의 자전시와 시인 자신의 비객관적 회고를 통해서 시간 속의 향토와 다른 지역들에 스며든 그의 감정이입은 압도적이다. 이것은 낭만주의 시들이 곧잘 보여주는 시 속에서 시인 자신이 벌이는 활극과도 무척 가까운 노릇이겠다.
하지만 시세계는 사실의 세계로부터 재구성되는 세계이다. 그렇다면 시 속에서의 시인 자신은 엄연한 화자(話者)로서의 ‘나’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화자는 그 개인의 단계에서 공적인 실재의 단계로 나아가는 의미를 부여받는다. 가령 낭만주의 시인의 실생활로서의 대상만으로 쉽사리 화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 속에 직접 시인 자신이 들어가서 시를 진행시키는 일을 자주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 해서 한 시인의 개인적 정서의 실감을 박제화할 수 없으며 실지로 있게 된 삶의 여러 고비들을 통해서 불멸의 애가를 남기게 될 때도 적지 않다. 그런 가능성을 넉넉하게 승인하고 난 다음 그러나 시인은 시 속에서 일정한 승화단계 없는 작위나 동작을 노출하기보다는 하나의 부재로서의 극한에 반사된 존재일 때가 훨씬 시의 깊이를 더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인의 생애 자체를 소재로 한 서사행위의 이유도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시 속에 너무 많이 시인의 미화된 기억들이 시작(詩作) 질료 이상의 행위로 되어 있을 때 그것을 읽는 사람에게 시와 시인을 판별하지 못하는 정서적 도착(倒錯)으로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시인이 시 속에서 자신만을 알리는 것에 불과하거나 시가 시인의 사생활 언저리만을 맴돌고 있다면, 세계의 온갖 영역의 다양한 꿈과 체험들이 이루어놓을 보편적 가치는 함부로 방치되기 쉽다.
세계에는 오직 나만 있다는 그런 혹심한 이기주의나 무례한 자아군림주의는 또 무엇이겠는가. 바로 이 점에서 「자화상」으로부터 「내 아내」 등에 이어지는 수많은 사어(私語)로서의 시세계에 대한 문학 내적 비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미당은 이같은 문제에 대해서 그의 무르익은 듯하면서도 서투른 자기긍정을 지양하지 않고는 아무런 수정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자화상」 이후의 자취를 따라가보려 한다.
미당의 무르익은 언어감각을 단숨에 정의한다면, 그것은 남도 판소리 계면조와 조선후기 4·4조, 한말 이래의 3·4조 등의 음률에 아주 익숙한 상태이다. 그 마이너존은 음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가 교과서를 통해서 널리 퍼져갈 수 있는 원인도 바로 그런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의 가락이 이같은 전통음조에 유전적으로 충실함으로써 어떤 의미로는 그가 ‘시인’이기보다 ‘가인(歌人)’이고 그의 시 속에 나오는 ‘상가수(上歌手)’인지 모른다. 그의 고향 언저리에서 귀기울이는 청각작용에 자주 육자배기 가락이 자리잡은 것도 그 때문이다.
소월(素月)의 음조가 민요와 만나 피어난 여심(女心)의 들꽃이라면 미당의 그것은 조선후기 호남 일대를 메운 산조(散調)로서의 기악과 소리로서의 성악이 능청스럽게 어우러지는 뛰어난 청승 많은 박수의 경지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 이전의 낯익은 향토 가락을 통해서 한국 서정의 본향적 가능성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근대시의 조형적 형식과 내용을 통한 시적 형상화에서 일단 무엇이 문제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매우 진지한 의심으로만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아니 그것에 대한 신랄한 비판 가운데는 ‘노예의 리듬’이라는 지적도 있고, 이미 내정된 상태로 작가와 독자를 뒤섞어버린다는 지적도 있어야 한다. 아니 그 가락 자체가 일단 청산된다 하더라도 그런 현상은 근대문학의 시와 소설들의 여러 군데에 스며드는 멜로드라마적 바이러스인지 모른다. 결국 그런 관점으로 시가 현실에 대한 실천적 저항력의 약화를 초래하면서 식민지시대의 역사 정체와 만나는 것이다.
시의 내재율에 관해서, 미당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때 내재율이란 반드시 종족적이거나 풍토적인 것이 아닌 근대인간의 자아발견과도 연결되어 마땅한 표현의 규범이다. 이는 서구시 수용에서 정형(定形) 개념을 이식하는 일과는 또다른 문제이다.
여기서 미당의 언어는 지용(芝溶)의 언어에 어느만큼 빚지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월의 시가 음악이고 지용의 시가 회화라는 단순비교론 따위가 아니더라도 지용의 한 측면에서 미당을 상대화시킬 이유가 분명해진다.
이와 함께 미당 시는 거의 이야기시의 범주 안에 포함시켜도 된다. 「자화상」을 비롯해서 중기의 「국화 옆에서」도 이야기시의 효과를 착실하게 발휘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표제음악(標題音樂)과 밀접하다. 이야기란 농경사회의 전통적인 야화(夜話)로 이어져왔다. 지난 시대의 입담 좋은 할머니들이 등잔불 아래 또는 화롯가에서 풀어놓는 옛이야기와 살아온 세월에 대한 사회전기적(社會傳記的)인 구비(口碑)들이 그것이다. 이런 친화력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 문학을, 가령 60년대 후반 참여문학의 주요한 과제로 드러난 농민문학을 그 당시 박정권에 의해 확산된 새마을운동에 관련된 문학과 뭐가 다르냐고 말하는 경우와 반대로, 향토적 정서를 가득 담은 것을 민중문학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실지로 『질마재 신화』(1975)의 시세계를 민족문학론자들과는 달리 민중문학으로 명명한 사례도 얼마든지 있겠다.
또한 그의 신라시에서 보여주는 『삼국유사』의 사화(史話)적 요소 혹은 야담 형태를 가창(歌唱) 가락으로 전이시키는 완만한 서술과 묘사의 기능도 불교의 윤회·연기에의 자아 연장이라는 이야기의 지속성을 낳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미당의 경우 거의 시적 결말에 이르기까지 객관화될 만한 계기가 없이 매우 주관적이며 몽롱한 감정이입으로 처리된다. 그래서 시 속의 나는 화자 내지 작중인물의 의미 따위와는 절연된 상태로 사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의 시 속의 ‘나’나 제1인칭은 결코 공적 존재가 아니다. 가령 소월 시의 ‘나’는 그것이 소월 자신일 수도 있고 모든 사람의 대칭(代稱) 또는 범칭이기도 하지만, 미당의 ‘나’는 미당이라는 독보적 서정의 임의로 된 시인 자신에 불과하다. 이 말은 ‘보바리 부인은 나다’라는 명제와는 또다른 사유물로서의 시적 체질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미당 시의 자유는 정의나 현실설정에 대한 의무가 거의 필요없는 책임부재와 손잡은 이미지의 원초적 반복성으로 나아가는지 모른다.
미당은 식민지시대 초기시의 야수파 또는 악마주의의 관능 속에서 시인 자신에 관련된 사항을 원색으로 표현함으로써 『화사집』(1941)의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보여주었고, 그것이 30년대 남과 북의 젊은 시인으로 그와 이용악(李庸岳)이 함께 갈채받는 대상으로 되었다. 이 초기시와 중기시 사이에 그의 업장(業障)인 친일시기가 생애를 줄곧 따라붙는다.
하지만 예기치 않게 온 해방공간에서 시집 『귀촉도』(1946)가 나오는데 이것은 식민지시대에서도 해방에서도 동떨어진 동양회귀이다. 이 동양이란 매우 수상한 피난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50년대 이후에나 가능했던 『신라초』(1960) 『동천(冬天)』(1968)과 같은 불교와 전통적 사념의 세계까지는 아직 어림도 없었기 때문이다. 실지로 표제시 「귀촉도」는 내가 보기에는 황당무계한 작품이다. 그뿐 아니라 그 시집 안의 적지 않은 시들이 거기에 눌어붙은 점액질의 언어기교밖에는 볼품이 없어 보인다.
이 「귀촉도」에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실패작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빌미가 많고 그 점이 바로 미당 중기 이후의 세계에 대한 숙명적인 동기를 부여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귀촉도』 출판기념회를 위해서 시인 자신은 모처럼 실크 와이셔츠도 맞춰입었는데 이용악이 그 와이셔츠를 담뱃불로 지져버리며 오랜 친구인 「귀촉도」의 시인과 헤어져버렸다. 도대체 ‘육날메투리’나 ‘서역 구만리’ 따위의 엉뚱한 시 소도구들은 아무런 절실성도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가 조금만 그 자신을 떠나도 시가 허황해진다는 것, 그런 처지에서는 농도 있는 원색도 무력하게 된다는 것을 밝혀주기까지 한다.
이런 시세계와 함께 순수문학의 행방인 권력의존적 생존이 다시 진행되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가 일제든 해방 이후의 집권세력이든 권력의 편에 존재함으로써 시인의 특장인 음풍농월(吟風弄月)의 가락 속에 일신의 안보(安保)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92년에 쓴 「일본헌병 고 쌍놈의 새끼」는 1940년 만주방랑 시절의 한 기억을 실토하고 있다.
1940년 그 넓은 南滿洲 가을의 황토빛 황혼을
余는 어느만큼이라도 좀더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
圖們驛 밖의 한 곳에서 한바탕 흔쾌히
실컨 오줌을 싸갈기고 계셨는데,
여기까지를 어떻게 눈여겨서 염탐해온 것일까?
핏빛 모자 테두리를 한 고 일본헌병 쌍놈의 새끼 하나가
재빠르게는 쫓아와서
나를 끌고 가 즈이들 모이는 곳에 몰아넣고는
다짜고짜로 구둣발질을 해대는 것 아닌가?
‘꼬라! 시네! 시네!(이놈! 죽어라! 죽어라!)’ 하며
내 정강이뼈가 다 녹초가 되도록
연거푸연거푸 구둣발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잘 누시어서 시원하시겠습니다’
한마디 인삿말쯤 나올 줄 알았더니
그런 말은 이字도 없이
고 쌍놈의 새끼가
내 정강이에다 대고
구둣발질만 이어서 해대고 있는 것 아닌가?
이 한심스러운 시에는 미당 면모의 여러 측면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 속의 화자는 시와 자신일 뿐 그 누구도 아니다. 또한 시인 자신도 ‘나’가 아닌 ‘余’이다. 여(余)란 무엇인가. ‘나’를 스스로 높이는 익살스러운 과시의 의미이며, 황제의 짐(朕)이나 제후의 과인(寡人)과 같은 지배자의 자칭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런 자만의 ‘나’는 두만강 도문역 언저리 방뇨금지구역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틈에 소변을 배설하는 자신을 “어느만큼이라도 좀더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 운운으로 궤변하고 있다. 이것을 애교라 하기에도 여간 미안한 노릇이 아니다.
용변의 쾌감을 ‘어느만큼이라도 좀더 자유롭게 된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수작인가. 그것은 식민지시대의 조선과 괴뢰제국 시대의 만주를 통틀어 피압박민족 지역으로 인식하고 그 질곡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는 것인가. 도무지 말이 안된다. 또한 ‘잘 누시어서 시원하시겠습니다’라는 인사말쯤 나오는 것을 기대한 것은 무엇인가.
이는 80년대 내내 그의 친일 족적에 대한 규탄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을 무렵이었으므로 ‘신군부 충성문인’으로서의 처지에서 이런 해학적인 어조로라도 그 자신이 일제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강변하는 의도가 엿보이지 않는 바도 아니다. 기껏 경범죄에 해당하는 오줌싸기를 어떤 거사(擧事)라도 하는 것처럼 “여기까지를 어떻게 눈여겨서 염탐해온 것일까?” 하고 자못 너스레를 부리고 있다. 이렇게 하노라면 그 자신이 ‘요시찰 대상’의 양심범이라도 되어가는 것처럼 자신을 과장하는 화법이 제격이겠다. 시의 끝에 그의 시제목 그대로 ‘고 쌍놈의 새끼’라는 저주를 퍼붓는다. 마치 이런 저주로 지난날의 생각을 다 씻어낸 다음 새로 항일혁명가라도 된 기분이 바로 미당 시의 어디서도 잘 나타나는 그 능청과 그 능청의 골짝에 숨겨진 증오가 함께하는 것이다.
왜 80년대에 그의 친일이 문제가 되었는가. 한마디로 단정하자면 그것은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신군부에 밀착된 것에 대한 사회적 탄핵의 소급성 때문이다.
만약 그가 진작 친일에 대한 사죄를 보이거나 채만식(蔡萬植)·윤극영(尹克榮)과 같은 반성의 표시가 있었다면 그에 대한 단죄는 낡은 것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또한 그의 친일 이후의 체제의존적 삶과 문학의 몇가지 행태가 아니었다면 친일의 의미 자체도 확대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그 두 기회를 그의 우유부단한 지략 때문에 영영 놓쳐버린 것이다.
한 시인의 영욕을 통해 새삼 확인하는 바는 시인의 문학적 과오는 사라지고 없어지는 과거의 화석이 아니라 곧잘 현재의 동작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시 또는 문학이라는 이름의 서술행위는 그 어떤 것도 회상 속의 얼굴로 나타나는 행복이 아니라 현재의 삼엄한 화면에 비춰지며 새겨진다.
전후좌우를 다 헤아린 실리주의적 친일의 육당이나 새 가정과 작품발표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춘원의 친일말고 이도저도 아닌 시대에 대한 고소공포증에 가까운 굴복으로 되었던 미당의 친일이었다. 또한 일제말까지 철저한 친일로 내달은 파인(巴人)과도 다른 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에게 시대에 대한 전진적인 지혜가 없었던 사실은 “절망은 기교를 낳는다”는 이상(李箱)의 메씨지와 어울리고 있으므로 그의 언어는 여전히 기교와 기교 사이로 이어져 『화사집』과 『귀촉도』 그리고 그 이후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의 자전시편 『팔할이 바람』(1988)은 후기의 시인이 마음을 다잡아 쓴 야심작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느 작품에서보다 종횡무진의 활달한 필치로 되어서 차라리 방자하기 그지없다. 그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친일을 직접 노랫가락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어쩌면 건너뛰고 싶은 부분인데 마지못해 그랬으리라.
40년대초 친일문예지 『국민문학』 편집책이 되고 조선인 지원병 송가를 쓰고 직접 지원병 훈련소에 가서 찬양하던 일들은 도리어 이 작품에서 증발해버리고 만다.
이전에 그는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깨어버리는 카미까제 자살특공대 찬양’을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로 마감질했다(「마쓰이 伍長 송가」). 그밖에서 8편 이상의 친일문학 흔적을 남기는 동안 ‘성전(聖戰)’ 강조와 일장기에 대한 그의 절절한 충의의 심정은 너무 적나라했다.
이런 사실들도 적당히 추상화되거나 삭제됨으로써 자신의 억울한 연장전 같은 감회만으로 다음과 같은 작명(作名)까지 꾀하는 것이다. 즉 ‘친일’은 그에게 눌어붙어서는 안될 이름이었다. 그보다 ‘부일(附日)’쯤으로 말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려다 그것도 싫어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라는 기괴한 ‘순일’로 자신을 꾸미게 된다. 실로 이 이상의 궁상떨기가 없겠다. 말하자면 그의 친일은 ‘하늘이 이 겨레에 주는 팔자다’라는 전제로 된 것이다. 그의 창씨개명까지 굳이 들추어내 친일을 분석할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식민지 조선인 대부분이 일본식 개명으로 생존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을 갈 놈!’이라는 전근대적 자존심으로서의 성리학적 혈통주의에도 불구하고 타의에 의한 일본식 성명달기는 춘원의 선도적 창씨개명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나는 그 가까운 1945년 8월의 그들의 패망은
상상도 못했고
다만 그들의 100년 200년의 장기 지배만이
우리가 오래 두고 당할 운명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니,
─「從天順日派?」 부분
그는 30년대 후반 이래 조선 거주의 일본인 시인들과도 친밀하게 사귀었고 해방 뒤의 공덕동 주택도 일본 시인의 소유였던 것이다. 아마도 일본어로 시를 씀으로써 장차 일본어 시의 시대에도 대비할 작정이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점은 친일행위로부터 자기를 관리해온 김동리의 은거나 황순원의 관망과 매우 대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식민지시대의 지식인 대부분이 일제 패망을 점치지 못하고 있기 십상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시대를 통찰하는 인사들은 일제의 한계를 예상하는 경우도 상당한 것이었다.
미당에게는 역사의식으로서의 자아가 가능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의 조선지배는 50년 미만이 아니라 아득히 1백년 내지 2백년 이상으로 생각했다. 그 생각 자체가 이미 일제에의 분명한 굴복과 그의 의지박약이 한데 어우러진 상태였다.
그에게는 뜻밖에 와버린 해방도 감격의 사건이기보다 당황해할 사건이었다. 하지만 해방공간의 저질이 난무하는 정치현실은 아직 문학의 문제 따위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기 십상이었다. 이러한 시대로 무사하게 된 시인은 이승만의 동산에서 목단꽃이 피어나기를 바라다가 그 꿈이 어이없게 무산되고 말았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쓴 『이승만전』의 폐기가 그것이다.
그런 다음 청년문학가협회의 시인에게 이번에는 전쟁의 시련이 닥쳐왔다. 그는 시대의 정면에서 약한 존재이고, 시대의 측면에 기탁함으로써 존재의 회로를 찾아내는 곡신불사(曲身不死)의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따라서 한 음률 전공자에게 역사는 너무나 거센 장벽이었다.
외세의 지배에 잇는 전쟁이라는 재난 앞에서 드디어 그는 정신적 착란이 시작된다. 한 시인의 치열한 시정신이 이러한 시대에 맞서는 그 투혼으로서의 아름다운 영혼 대신 그 시대에 맨 먼저 상처받는 영혼의 행방이 미당의 몫이었다. 시인에게 어찌 강하기만 바라겠는가.
그는 이미 대전 일대에서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를 조직 운영하면서 갖가지 후방 선무공작에 열중하는 동안 대구 부산에 이르게 된다. 심지어는 그 자신이 총을 들고 전선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도 한동안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그가 의지해야 할 체제에 대한 불안요인이 그의 심리적 이상(異常)으로 되고 만 것이다.
부산시절이나 환도 후의 수도, 그리고 다시 1·4후퇴 이후의 폐허 복귀의 한계상황에서 공중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그를 협박하는 소리였다. 그러고는 참모총장 정일권이 그를 체포할 공작을 서두르고 있다는 소리도 들렸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읽어내는 ‘독심기(讀心器)’ 사건이 있게 되고 그 자신이 육군본부 어딘가에 알아보기도 했다.
시적 과대망상이 일상적 피해망상으로 전화되고 또한 피해망상 증세가 과대망상 증세로 역전하는 일이 그의 공중 텔레파시 사건이었다. 이러한 텔레파시로서의 환청 내지 환각은 매우 시적일 수도 있겠으나 시대의 온갖 시련의 압력을 거절하는 광야의 시정신과는 먼 현실도피에 자동적으로 연결된다.
만약 그에게 선적(禪的)인 정신적 긴장이 가능했다면 그의 어떤 단계에서 부딪히는 위기의식에 자신을 내던지기도 했을 것이고, 자신의 시와 삶의 궤적에 대한 맹렬한 자기부정적 체험도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럴 경우 미당을 어떤 기만도 허용되지 않는 서사적 인간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런 장엄한 예술가로서의 부성(父性)의 교향악보다는 자기초월에 너무 쉽게 길들여짐으로써 모성적 굴절의 혐의가 걸리게 된 것이다.
그가 4·19를 전후한 보신책을 지나면 다시 한번 이승만 대신 새로 등장한 박정희에게 기울어질 작정이었으나 박정희는 미당 대신 박목월(朴木月)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는 문단 지도자로서 월남참전을 앞장서서 고무찬양하면서 그 길밖에 살길이 없다고 시류 그대로 노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에게는 역사보다 ‘영원’이 편했고 자아로서의 공세적 단련이 아닌 미국 그리고 현재 확립된 정권만이 그의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그런 다음 1980년 이래 전두환과 밀착되어 제 세상을 만난 듯이 광주학살을 당연한 것으로 공인하고 그 처연한 시민항쟁을 북한 공산당의 짓거리로 규탄하는 한편, 전두환을 단군 이래 5천년 만에 처음으로 만나는 미소의 인간으로 말하며 그 정권 쪽에서 얻어진 자금으로 문예지도 창간하고 범세계 한국예술인회의라는 어용단체를 만들어 그 이사장으로 활약했다.
그는 72세 당시 56세의 전두환 생일 축시 「처음으로」를 발표한다. ‘처음’이란 하나의 기원(紀元)을 말하고 있다. 태초의 단군이나 그밖의 건국에 대한 진정한 출발을 뜻하기도 한다. 바로 그런 ‘처음’으로 그의 찬양이 펼쳐진다.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얻으셨나니(…)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이 ‘축시’만으로 미당의 모든 시적 업적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에게 ‘명작’은 많고 이런 ‘졸작’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미당에 대한 시와 행적의 분리주의를 신비평이론을 강제 적용해서 묵인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그의 시 전부를 깡그리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어서 긴 세월이 지나서 마치 크롬웰 혁명과 관계된 장님 시인 밀턴(J. Milton)을 『실낙원』 『복낙원』의 작자로만 알게 되듯이 미당 역시 ‘100년이나 200년이나’ 지나간 뒤에 그의 현혹적으로 만개한 꽃의 시세계와 상투적인 너스레에도 불구하고 심금을 건드리는 그의 음악적 명향성(鳴響性), 그리고 으밀아밀하게 그늘진 밀어, 한여름날 담을 넘어가는 노련한 파충류와도 같은 그의 언어 미각만으로 남겨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런 시 자체만을 문학유산으로 남기는 문학사적 결산은 시기상조이고 이 시기상조론은 내일모레 빨리 마른빨래처럼 거둬들일 수도 없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프랑스 비시(Bichy)체제 아래 나찌를 지지한 2백자 원고지 6장 정도의 친독행위가, 그 정부의 특혜로 백만장자가 된 경제인이 5년 정도의 감옥살이로 끝난 것과는 달리, 사형에 처해진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잔인하기까지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문사 원고료 몇푼으로 처형되는 것과 친독 재벌이 된 사람이 가볍게 살아나는 것의 차이가 너무 가혹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글이란 뭣인가라는 뜨거운 질문이 일게 된다.
글이란 역사 속에서 결코 돈과 견줄 수 없는 가치로 발전하는 생명체임을 그 사례에서 배울 수 있다. 그래서 기원전의 헤시오도스(Hesiodos)는 오늘의 이름이 되었으나 그 당시의 아테네 부호에 대한 기억은 거의 불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미당의 친일이나 그 이후의 납득하기 어려운 행적 역시 그의 언어가 부리는 마술과 요술의 힘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기간 소멸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토속적 흡입력을 자랑하는 좌장적(座長的)인 권위와 숙달된 모국어 구사의 형상능력으로 그의 자취를 호도할수록 도리어 그의 문학 자체가 손괴당하기 십상이다.
한반도 근현대사는 아직도 미완의 역사 혹은 불행의 역사를 진행시키고 있으며, 지금 당장으로는 근대 국민국가에의 늪에도 세계화라는 뜬구름에도 동시에 난관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시대의 한 추이가 탈근대 문화를 지향함으로써 역사적 명제에 대한 의미 해체를 일삼기도 한다.
그런데 역사는 시대의 의상이 아니다. 역사는 인간존재와 사회가 지속되는 한 그것들의 총체로서 혹은 묻히고 혹은 묻혔다 파헤쳐지는 과거이기도 하고 현재가 요구하는 과제로 숨쉬는 삶의 동작이기도 하다. 역사의 종언을 말하고 진작 근대를 넘어서 새로운 전환을 시도하는 담론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근대의 재근대화’라는 명제를 제시하는 쪽이다.
근대 이후의 ‘메타 역사’의 하나로 그동안 장구한 시대에 걸쳐 자리를 독점하고 문학과 예술의 개인적 우월론이 굳어진 상태를 반성하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럴수록 대책없는 온정주의와 함께 상투적인 탈근대 문화의 시각에서 아직도 친일 따위를 거론하고 있느냐는 비아냥도 없지 않은데 나는 친독에 대한 프랑스의 역사청산이 지금도 진행중인 사실에 우리 자신을 비춰보는 것을 무방하다고 믿는다.
하나의 진실이 제대로 승인되기까지는 1백년이 걸리는 일이 보통이다. 동학농민운동이 합법화되기까지, 드레퓌스 사건이 최고재판에서 승소할 때까지 걸린 시간도 그런 진실회복에 다름아니다.
역사학으로 근대이고 사회학으로 현대인 우리 근현대사의 고행 가운데서 아직도 역사의 진실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삶과 문화의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화적·미학적 명예를 담보할 때는 반드시 그것의 토대로서의 왜곡과 반성 부재를 들어내야 함이 마땅하다.
세계화 및 지구화라는 문짝 없는 환경도 그 세계화·지구화가 미국 중심으로 되는 것이라면, 가령 미국경제의 부침 그대로 세계 여러 지역의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불황을 막기 위해서도 진영적(陣營的) 정체성이 있게 마련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랫동안 단련되어온 문화의 자기완성을 근대 이후를 향한 여러 동향에서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이 표류가 아닌 조타능력을 발휘하는 문화운동의 여러 수확물로 축적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식민지 기여론의 배경과 함께 식민지 문학의 굴욕들을 미래학적 인식틀로 재점검하는 이유가 있게 된다.
특히 그 잔재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채 새로운 제국주의적 발상을 드러내는 역사왜곡으로 치닫는 일본에 대한 우리의 대응에서도 친일행위의 재생산을 뿌리뽑아야 한다. 바로 이 점이 「마쓰이 오장(伍長) 송가」를 말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더이상 미당 친일에 대해 분석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것들이 당대로 끝나지 않고 그후에도 다른 형태로 이어짐으로써 그의 후기 생애를 떳떳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그의 시적 성취가 부수화(負數化)되는 것을 역설적으로 방어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긴 불화를 지나 화해를 실현하는 아름다움을 꿈꾼다. 그러나 그 화해는 아픔 없이는 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배워야 한다.
미당을 만난 50년대 후반 나는 그의 초기시 몇편밖에 읽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미당에 대한 육친적 발심과 함께 그의 시에 대한 심취는 그 누구보다 더한 바 있었다. 김수영이 죽은 뒤 참여문학권 친구들이 와서 동참을 권유할 때도 나는 미당 다음은 몰라도 수영 다음은 싫다고 말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런 배짱이라는 것도 근대 시문학사에의 무지와 병행됨으로써 겨우 소월의 시 몇편밖에 아는 것이 없었고 만해라는 이름으로만 만해를 알고 있는 정도의 딱한 내 형편에 다름아니었다. 이런 궁핍으로서의 동시대에 나는 미당을 만났던 것이다.
60년대 일련의 국학 탐구와 식민지사관 극복과정에서 문학사 속의 망각도 하나하나 발굴되기 시작한다. 그러는 동안 나는 70년대 이전까지의 미당을 시인부락의 추장으로 여겼고 그것을 좀더 웅변으로 장식함으로써 그를 ‘또하나의 정부’라고 말한 적도 있다. 이것은 우리네 실정으로 생존작가의 전집이 거의 없었던 그 당시 미당의 문학전집이 나온 데 대한 서평 주문에 따른 것이었다. 실지로 그는 그 전집을 박정희·김종필에게 보낸 것말고 박재삼(朴在森)과 나에게만 주었다. 그때까지의 미당과의 관계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게 아교질로 응결된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이런 ‘고향’으로부터 떠나야 할 가차없는 자기변모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와 나 사이는 차츰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서로 원경(遠景)이 되었다. 유신 말기를 지나 8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내 안의 어느 내장에도 미당은 들어 있지 않았다.
미당과 관련해서, 문제는 순수문학으로서의 무죄가 참여문학으로서의 유죄라는 등식이다. 이 경우 한국 현대시의 순수노선은 일체의 정치적 이념적 개입의 문제로부터 격리되어 시의 현실부재를 지향한다. 그런데 여기서 현실의 모순에 대해서 전혀 간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 순수와 체제와의 무갈등 내지 친체제화로 되는 것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참여문학은 어떻게 이해되는가. 순수란 문학의 문제로나 인간 또는 종교적인 가치의 문제로나 가장 눈부신 승화단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순수문학의 노선이 아니라 문학 자체의 순수한 상태, 순수성으로 말해야 한다. 그것은 방법론적이다. 나는 참여만이 문학의 본보기라고 강변하지 않는다. 모든 참여가 진정한 의미의 전율로서의 초월과 끊임없는 상호운동을 할 때 그 문학은 완성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80년대 후반 이래 확대개념으로서의 리얼리즘 또는 참여에 현대문학 백년의 순문예적(純文藝的) 성과를 조응시킬 것을 주장하기도 한 것이다.
거기에는 미당 시의 일정한 합류도 포함될 수 있다. 그럴수록 미당의 지리멸렬한 예찬들이나 대중적 추앙의 대안(對岸)에서 미당 비판도 변증법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왜 문학이 권력에 종속되는가. 왜 시와 시인이 시대에 대한 저항적 자아를 성립시키지 못하는가.
시인이란 어떤 시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개척적 상황에 진입함으로써 일체의 이데올로기적인 명분들이 철수된 시대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초상으로서 어떤 현세성에 추수(追隨)하지 않는 시혼으로서의 투혼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물론 비정치적인 환경 안에서도 말이다.
만약 미당과 내가 한반도에서 태어나지 않은 시인이었다면 그런 가정 속의 나는 지금 지하로 돌아간 미당을 한없이 기리는 사람일 것이고 후기의 미당 생전에 자주 행복한 대작(對酌)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폴란드의 시인이라면 하나는 러시아 쪽과 독일 쪽에 붙고 하나는 그 쪽들과 맞서 피를 흘리는 분열이 있게 된다.
지난번 유네스코 주최의 델포이 신전 ‘세계시인의 날’ 행사에도 그리스 시인들은 두 갈래로 갈라져 그 한 갈래는 불참하고 있었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시인사회란 점점 사회적 게토로 되어가고 있는 삭막한 시대에 시인들끼리 얼싸안는 삶이란 또 얼마나 절실한가.
그럼에도 문학은 하나가 아니다. 문학은 둘이고 셋이어야 한다. 문학의 일생을 사는 동안 거기에 절교도 있고 같은 종(種)으로서의 미개인 같은 서러운 할거도 있어야 한다. 내 나라를 떠나는 비행기 창으로 내려다보면 한반도는 산들이 늙은 짐승의 젖꼭지처럼 일어서 있다. 나는 그 산들의 여러 신(神)을 사랑하며 그 신들과 함께 존재한다. 만약 문학이 어느 하나만으로 되어 있다면 그런 곳에서 무슨 문학의 생수의 골짜기들이 있겠는가.
한 시대는 미당을 마감하고 또 한 시대의 현장은 그 이후의 시와 시인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그의 시 「다시 비정(非情)의 산하에」의 두 행이 있다.
脫色과 漂白은 아직도 덜 되었는가?
白衣同胞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