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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감각’과 ‘기억’의 미학적 차원

고재종 시집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 시와시학사 2001

장석남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작과비평사 2001

김철식 시집 『내 기억의 청동숲』, 문학동네 2001

 

 

유성호­ 柳成浩

문학평론가. 서남대 국문과 교수. 저서로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등이 있음. ysh64@chollian.net

 

 

1. 가장 개인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양식으로 간주되는 서정시에서 일정한 사회적 연관성을 찾아 그것을 “사회적 모순과 갈등의 주관적 표현”이라고 정의한 사람은 아도르노(T. Adorno)이다. 그는 나르씨시즘이라는 일차적인 서정시의 창작동기를 짐짓 모른 체하고, 서정시의 가장 궁극적인 직임을 사회적 억압이나 문화적 독소와 싸우는 일로 설정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비판이론가인 마르쿠제(H. Marcuse) 역시 근대성의 포위망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근대인들을 ‘일차원적 인간’이라고 규정한 후, 이 거대한 자기재생산적 권력의 그물망 속에서 그들에게 ‘위대한 거부’라는 부정정신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이같은 서구 미학자들의 야심에 찬 반성적 자기인식과 부정(negation)의 상상력은 순수서정과 실천적 참여의 양진영이 끊임없이 적대적 갈등을 되풀이해온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특정한 역사적 문맥을 철저히 떨군 채 구축되는 언어적 구성물이나, 경험적 시간 속에 한정된 실천적 열정의 시편들이 하나같이 일정한 불구성을 면키 어렵다는 균형과 통합 지향의 전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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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근 우리 시단에서 이러한 균형과 통합 의지를 높은 수준에서 구현하고 있는 실례를 발견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특정한 화두나 소재를 중심으로 한 기획시편들이 범람한다든가, 상투적인 생태적 포즈나 여성적 언어의 전위들이 넘실댄다든가 하는 현상에서 그같은 균형과 통합 의지를 읽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가운데 매우 독자적인 상상력과 언어적 구성력으로 자신들만의 시적 성채를 오롯이 쌓아올린 고재종, 장석남, 김철식의 시집을 읽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시에서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것이 바로 이러한 통합의지의 상대적 빈곤인데, 그것은 그들이 일정한 미적 편향 속에서 자신들의 세계를 완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각’(경이·통증·상처)이나 ‘기억’(추억·그리움)의 미학적 차원에서 구축되는 어떤 간절한 세계이다.

 

2. 고재종(高在鍾)의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는 ‘자연’이라는 상관물을 심미적 시선으로 채색한 여러 폭의 화첩이다. 시인의 ‘눈’은 자연의 세목 하나하나가 내뿜는 고유한 빛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표현하는데, 자연스럽게 시인은 사유 주체로서보다는 그 잔광(殘光)을 채록하는 역할을 주로 떠맡고 있다. 이때 시인이 행하는 자연 몰입은, 주체와 대상이 수평적 혹은 호혜적으로 상호 이입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고유성이 주체의 감각과 사유를 규율하면서 생겨나는 주체의 소외현상과 구조적인 유사성을 띤다.

요컨대 이 시집은 첫 작품인 「장엄」의 첫 구절인 “저”(시집 전체에 시인이 바라보고 친화하는 대상이 대개 ‘저’라는 지시관형사의 지배를 받고 있다)와 마지막 작품 「수평선」의 마지막 구절인 “먼 곳까지”의 사이에 있는 세계이다. 그래서 ‘저 먼 곳’에 신성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자연’은 시인의 내면과 유추적 등가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우주의 미세하고도 장엄한 활력을 보여주는 역할로 한정된다.

 

이 봐라, 이 봐라, 입 딱! 벌게는 중얼거리며

빨갛게 볼을 밝히고 있을 능금알들의 황홀

(…)

내가 능금밭 앞에서 여전히 두려운 것은

시방 무슨 장한 기운이 서리서리 둘러치는

저 금기의 신성의 공간, 그것을

내 차마 좀팽이로도 바잡는 마음 다하여

아직도 몰래 훔치고 싶은 이 황홀한 죄, 죄 때문!

─「능금밭 앞을 서성이다」 부분

 

왜 시인은 “능금밭 앞을 서성이”는 자신의 행위를 ‘황홀한 죄’라고 하는가? 이 형용모순은, 그 능금밭이 “금기의 신성의 공간”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죄의식과 “빨갛게 볼을 밝히고 있을 능금알들의 황홀”로 인하여 비롯되는 경이로움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저’ 금단의 공간은 고재종이 시종 표현하는 ‘자연’(대상)과 ‘나’(주체) 사이의 거리이다. 마치 소월이 노래한 “저만치”의 건널 수 없는 실존적 거리가 시인과 ‘자연’ 사이에 깊은 심연으로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의 응집과 확산 과정을 통해 생명의 장엄함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장엄」은 이 시인의 선명한 시적 축도(縮圖)가 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고재종의 시는 ‘삶’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현저하게 관조적 심미성을 중심으로 채워지고 있다. 『새벽 들』(1989)에서 보여준 농민적 삶의 사실적 기록과 저항의지는 우주가 내뿜는 애액에 젖어 위축되거나 행간으로 은폐된다. 오직 밝은 귀를 가지고 자연이 들려주는 묵언(默言)을 들으며 시인은 대상을 향한 한없는 도취와 황홀감을 노래한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한 자기완결성을 가진 자연에 비해 시인이 끊임없이 왜소한 자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같은 경이로움(대상)과 왜소함(주체) 사이의 심연은 “아, 아득해져서/너와 나 고개 들어 바라보는 산”(「은어떼가 돌아올 때」)이나 “세상은 또 어린 경이에 닿는구나”(「나락밭에 純金이 일면」)에서처럼 반복되는 ‘아득함’과 ‘경이로움’의 감정에 의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자연에 거하는 신성의 편재성(遍在性)을 절정·감동·황홀·장엄 같은 커다란 스케일로 표현하는 그의 시에 사실적 경험의 세부가 은폐되거나 소멸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에게 ‘서정’은 대상을 주체의 내면으로 수용하여 등가적으로 표출하는 원리가 아니라, 대상의 형식을 그대로 승인하고 기록하는 순한 육체이다. 그래서 삶의 세목에서 길어올려진 게 틀림없을 것 같은 주체의 슬픔이나 그리움조차 역사적 차원이 아닌 미학적 차원의 것이 된다. (무수히 반복되는 첩어형의 조어 역시 이러한 정서의 미학화를 음악적으로 돕고 있다.)

그러나 고재종이 노래하는 자연의 분위기가 ‘환함’(「방죽가에서 느릿느릿」 「보름밤, 그 어둡고 환한 月光曲」)이라는 감각과 만날 때는 대부분 생기로 가득 찬다. “포르릉,/날아가버리는 저 숲 위로/환한 길이 난다”(「교감」)거나 “몸의 상처론 환히 열리는 서러움들”(「상처에 대하여」)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그의 시에 나타나는 “외로운 자는 소리에 민감하다”(「달밤에 숨어」) 같은 경험적 표현이나, “보아라, 저 유장한 강물보다/더한 그리움의 속절들 있어/서러운 나라와 폐허의 마음을 딛고/꽃을 바라보는 사람들”(「꽃 터져 물 풀리자」) 같은 노동과 그리움의 서사, 황홀감이나 장엄함을 노래하면서도 감정 과잉을 철저하게 경계하는 형식에의 견고한 의지 등은 이번 시집에도 여전히 관철되고 있는 고재종 시만의 미덕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허투루 뱉는 태작이나 감상 취향의 시는 그의 몫이 아니다.

고재종의 시는 그의 심미 편향만큼이나 아름다운 표현과 단단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그 견고함을 가지고 자연의 신성을 적극 추인하는 것보다는 혼돈에 가까운(‘환함’과는 대극에 있는) 삶의 그늘을 긴장과 균형 속에 구축해가기를 우리가 바란다면, 또 시인 스스로 말한 “삶의 경험적 진실에서 멀어진”(「자서」) 것에 대해 자계(自戒)가 절실한 싯점에 시인이 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처럼 ‘감각’의 미학적 차원을 아름답게 쌓아올리며 “구도의 꿈”(「자서」)을 힘겹게 지속하고 있는 그의 속사정을 도외시한 게 될까.

 

3. 장석남(張錫南)의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은 이성적 분석보다는 심미적 공감을 우선적으로 견지해야 접근 가능한 세계이다. 이번 시집 역시 그동안의 그의 시가 그러했듯이, ‘기억’과 ‘감각적 현존’의 대위법의 산물이다. 이를 일러 ‘사유의 감각화’라고 칭할 수 있을 텐데, 이는 ‘감각’의 구체를 통해 자신의 시적 욕망을 완성하려는 이 시인의 일관된 방법적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이처럼 언제나 ‘감각’과 ‘기억’을 견주고 빗대는 상상력의 가파른 전위에 서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언어가 파르르 떨리는 그 초월의 순간을 갈망하면서 그 순간을 시적으로 완성하는 집요한 의지를 숨기지 않는다. 장석남 시의 중심이 ‘기억’에 의존하고 있음은 첫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1991)부터 확연한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과거를 향한 ‘기억’이 현저하게 현재의 ‘감각’으로 이입되면서, 시적 주제를 ‘그리움’에서 ‘아름다움’으로 전이시키고 있다.

이같은 ‘감각’은 주체(인간)와 대상(우주) 사이에 상호연관성을 부여하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삶의 비극성과 우주적 심미성 사이를 진자운동하도록 돕고 있다. 그 사이에는 사실적인 인과관계나 유추관계가 없고, 따라서 합리성의 육체를 부여하는 이른바 ‘산문적 해명’(paraphrasing)의 여지 또한 매우 적다.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배를 밀며」 부분

 

‘배를 밀어보는 아주 드문 경험’을 하면서(사실 시인의 고향이 서해의 한 고도라는 점에서 그것이 드문 경험은 아닐 것이다)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두는 상상적 행위는 마음의 움직임을 몸의 그것으로 바꾸는 시적 상상력의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같은 상상적 행위 속에서 존재 초월의 순간을 잡아채는 데 그는 이제 어떤 경지에 접어든 느낌을 준다. 이처럼 배의 밀고(“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당김(“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이라는 상징적 제의(祭儀)를 통해, 그는 운명과 사랑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간극과 그 하릴없는 비극성을 노래하고 있다.

계속 이어지는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위의 흉터”라는 표현에 주목하면, 요컨대 그의 시는 ‘흔적’(자리, 자국)의 세계이다. 그가 통증을 느끼는 것이 “꽃나무가 있던 자리”(「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를 바라본 까닭이고, 등단작 「맨발로 걷기」로부터 지속되고 있는 “발자국”(「여름산」) 이미지는 “거기 두고 온 크고 작은 몇개 발자국”(「새벽달과 신발장」), “저 蓮잎 같은 발자국/발자국”(「蓮잎 같은 발자국」), “모래 위를 걸어가면 뒤에 남겨지는 발자국들”(「鳴砂山에서」) 등에서 여전히 부활하고 있는데다, “본래 연못이었”(「연못이 있던 자리」)던 자리나 “하늘에 우리를 꿰매 감친 굵은 실밥, 자국들”(「살구꽃」), “향기의 자죽”(「시월 보름」), “물 길으며 길바닥에 흘린 물자국”(「水墨 정원 3」) 같은 ‘자국’(흔적)들 또한 그의 시 안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일관되게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흔적’이란 지금은 비록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지만, 어느 순간 하나의 실체가 자신의 현존을 완성하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가장 명료한 감각적 물증이다. 따라서 “그곳에 우리를 되비치는 시간의 얼굴들”(「운조루 소견」)이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제 그에게 고향 ‘덕적도’는 유하의 ‘하나대’처럼 문명의 반대편에서 손짓하는 시원의 세계도 아니고, 황지우의 ‘솔섬’처럼 가난했던 유년의 서사가 농축된 공간도 아닌, 시인의 현재적 ‘감각’을 구성하게끔 하는 ‘기억’의 흔적(자리)으로 존재한다.

이처럼 날선 예각과는 무관한 연성(軟性)의 상상력과 미시적 움직임마저 남김없이 포착하는 소우주(microcosm)가 장석남의 고유 브랜드이다. 그래서 그의 상상력 속에서는 감각의 ‘번짐’(「水墨 정원 9」)만이 유일한 기율로 작용하고 모든 형이상학적 국면들은 부차화된다. 그러나 그 ‘감각’의 치밀한 구체성이 오히려 “오, 사랑해야 하리/이 세상의 모든 뒷모습들/뒷모습들”(「마당에 배를 매다」)에서 보이는 시인 내부에 쌓여 있는 윤리적이고 인생론적인 욕망을 지나치게 억압하고, 나아가 시인의 존재와 의식을 일정하게 갈라놓을 개연성을 높이고 있다는 점은 지적될 만하다.

한가지 첨언. 그의 시가 실체보다는 잔상(殘像)의 미세한 움직임을 선호하듯이, ‘께’나 ‘쯤’ ‘몇’ ‘녘’ ‘틈’ 같은 근사치의 표현이 그 안에 줄곧 나타난다는 것은 인상적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장석남 과(科)의 표현 자질인데, 그것은 그에게 “삶은 저렇듯 명료한 것도 아니”(「水墨 정원 4」)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시는 개념적 규정이라는 것이 사물들의 무수한 감각(떨림)들 앞에서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를 실감케 하면서, ‘흔적’과 ‘께’(쯤)의 상상력을 치밀하게 구성해낸 세계인 것이다.

 

4. 김철식(金哲植)의 첫시집 『내 기억의 청동숲』은 ‘기억’으로의 퇴행과 역진을 가장 적극적인 미학적 배경으로 하는 내면의 풍광들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시인은 그것을 단순히 그리움의 색조로 물들이는 것이 아니라 가장 보편적인 생의 형식으로 치환하고 은유한다. 무엇보다 이 시집에서 인상적인 것은, 시인 스스로 겪은 삶의 기원과 내력이 송두리째 드러나는 정직성인데, 그가 전하는 어떤 전언보다도 그 천연스러운 정직성이 더욱 선명한 까닭은 기꺼이 생의 주변을 택한 불우한 ‘그림자’(shadow)가 실질적인 시의 화자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단색의 음화(陰畵)를 방불케 하는 이 시인의 일관된 ‘기억’ 탐닉의 시편들은 ‘묵시록적 시대의 글쓰기’라는 명명으로 한 시대의 역설적 우화(寓話)를 자임했던 일련의 ‘죽음’ 시편들과 주제와 정조를 같이하면서도, 그것을 철저하게 미학화하는 과정에서 김철식만의 구체적이고 고유한 음색을 실현한다. 그는 ‘죽음’을 사유하거나 견디는 시인이 아니라 ‘죽음’을 생의 선험적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거기로 미적인 망명(퇴행)을 시도하는 시인이다.

 

내가 퇴행을 각오하면서까지

너의 네 줄 가로무늬를 주술처럼

지니고 있는 이유를 나는 모른다

(…)

하여, 장마철 나의 힘겨운 산란은

너를 위한 아름다운 퇴화가 되고

너의 네 줄 무늬는

치욕으로 잉태한 나의 기적이 된다

─「달팽이」 부분

 

이처럼 ‘퇴행’과 ‘퇴화’라는 가장 부정적인 변이형식을 ‘아름다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관능과 폐허를 삶의 은유적 형식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 폐허에 들어서는 가장 구체적이고 분명한 사건은 ‘죽음’일 텐데, 그는 ‘죽음’의 이런저런 흔적들을, 지나간 시간에 대한 섬세하고 격렬한 추억들을 통해 형상화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문학적 진정성과 고통의 밀도의 상관성”(김수이)을 실물적으로 보여주는 선명한 사례로 등극한다.

그가 “패륜의 생애를 남겨놓고 달아나는 기억”(「개의 자서전」)을 말하거나 “추억은/알지 못하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죽음으로의 진화를 그리워한다”(「그날 한낮의 섹스」)고 노래할 때, 그 파격성과 도저한 ‘기억’ 편향은 그만의 고유한 구체적 육체를 드러낸다. “그때 이후 나날의 糧食은 그날의 기억이지요 내 안에 흐르는 것은 기억뿐이고 모든 것이 정지했”(「무정란」)다는 시인의 고백은 말하자면 ‘기억의 생애화’를 도모하는 시인의 일용할 의식(儀式)의 반영이고, “순결한 기억은 아무것도 없”(「별곡」)다든가 “일할의 추억도 간직해서는 안돼”(「별곡」)라든가 하는 역설적 외침은 그만큼 추억이 질기고 강한 생의 형식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외침과 함께, “기억은 존재의 어두운 슬픔, 저 궁창같이/태어날 때부터 내 안에 심어진 소멸의 꽃씨”(「수꽃」)라고 그가 말할 때, 그 ‘기억’은 “너무나 투명한 그러나 깊디깊은 어둠의 기억”(「이런 날 시나 한편 써봐? 1」)이나 “과잉!”(「트라우마」)된 기억 등으로 몸을 여러 차례 바꾸면서 자신의 현재적 삶을 구성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이때 들뢰즈(G. Deleuze)가 말한 것처럼 “비록 추억은 과거의 것이지만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모습으로 현존(現存)하는 것”이 된다.

자연스럽게 그에게 “내 유년의 앞마당은 성스러운 세계”(「옆집 대청마루가 보이는 은행나무 집」)가 되고, 자신은 “너무도 빠르고 강한 통증 (…) 罪의 흔적”(「개의 자서전」) 때문에 “추억의 핵심, 그 바깥으로”(「몽유」) 밀려난 채 “기억 속 푸른 돌밭 사이사이 잠복한/깊고 작고 어두운 소리들이 깨어날 때”(「그 여름의 측백나무」) “추억을 호명하”(「냄새의 방 2」)는 자신의 존재형식을 실현한다. 이처럼 ‘추억’(기억)과 ‘죽음’이 동시에 서식하는 곳이 바로 그의 삶이고 시간인 셈인데, 그의 시가 파멸의 예감보다 더 섬뜩하고 더 위태로워 보이는 것은 바로 그 ‘추억’과 ‘죽음’이 주고받는 상호역동성과 그 안에 숨겨진 예리한 아이러니의 칼날 때문이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 시인의 추억 편향, 죽음 탐닉의 경향은 메마른 사막을 난파된 채로 건너는 생의 형식을 비유하는 것으로는 한시적 효용성을 가지지만, 그것이 단조로운 자기 노출의 언어로 축적될 경우, 시적 비의(秘意)가 점진적으로 소멸되면서 이미지의 힘겨운 타성과 복제를 가져올 것 같다는 말을 사족처럼 덧붙여본다. 그래서 그는 이제 온몸이 내뿜는 진정성의 흡인력과 미학적 균형을 애초에 포기한 퇴행 편향의 사이에서 이행기적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5. 신이나 자연 같은 외재적 삶의 질서에 예속되어 있던 인간이 스스로 삶의 주체임을 선언한 것이 근대적 논리의 기초라면, 서정시는 확실히 ‘근대의 저편’을 응시하는 어떤 양식이다. 그래서 서정시는 현실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다른 현실이 아니라, 꿈과 상상력으로 구성되는 시적 현실이라고 믿는 편이다. 물론 이는 ‘현실/꿈’의 접점에서 형성되는 긴장과 균형 속에서 자신의 미학과 윤리학을 완성한다.

이제 우리는 이같은 접점의 마인드를 가지고, 우리 시대의 시에 만연해 있는 자연 과잉, 유년(기억) 편향에 대한 근원적이고 비판적인 검토가 필요한 싯점에 와 있다. 물론 그것이 이 무모한 탈(脫)주체 시대에 맞서는 일정한 미적 전략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문제는 그것의 과잉이고 섣부른 대안화(代案化)이고 평균적 범속화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시인들이 삶의 경험적 실감보다는 섬세한 상상적 미감을 줄곧 택하고 있다는 것은 한편 아름답고 한편 위태롭고 한편 힘겨워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도 가속이 붙으면 자기반성을 결(缺)한 스타일리스트의 그것으로 정착할 개연성이 없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는 시인들의 간단없는 자기검색과 성찰이 요구되는 때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