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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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姜恩喬

1945년 함남 홍원 출생. 1968년 『사상계』로 등단. 시집으로 『허무집』 『어느 별에서의 하루』 등이 있음.

 

 

 

도장 파는 남자

 

 

비가 오고 있었다, 그 비의 끝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백화점 옆 약국 귀퉁이, 누군가 내버린 간판이 문이 되어 있었다, 밧데리에서부터 도장지갑, 스카치테이프, 아 복권, 이 시대의 복권, 볼펜, 라디오, 열쇠고리, ……도장 파는 기계 등등,

 

비의 바깥, 길의 안쪽, 모든 죽은 이들은 나의 도장 속에 있어요, 비바람이 분다, 그는 도장 속에 숨는다, 자기가 만든 도장 속에, 그의 머리는 대머리가 되어가고 있다, 검은 개량한복을 입고 있다, 그러나 단추는 시뻘겋다, 가슴을 도려낸 것처럼 시뻘겋다, 그는 다 된 도장에 그 가슴을 묻힌다, 시뻘건 피가 묻는다, 그것이 그의 인주이다.

 

 

 

사과껍질

향가풍으로

 

 

아침의 식탁 앞에서 훌훌 껍질을 벗기우는 너

순식간에 흰 살의 집을 잃어버리는 너

식탁의 의자 위로 하얀 피 철철 흘리는 너

그러나, 그러나

껍질을 벗기우고도 더 달콤한 너.

 

 

 

가야

그 두번째

 

 

     1

그때도 사람들은 다리를 건너다녔으리

그때도 사람들은 웅덩이를 건너다녔으리

소나무들은 응큼스럽게 금빛 날개의 새들을 안아 키우고 있었으며

나무들의 어깨는 떡 벌어졌으리

파도들은 은빛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고 있었으리

물고기들은 푸른 지느러미를 출렁이고 다니며 수초 사이에 알을 낳았으리

 

     2

그러면 가자, 아이여

가야의 아이여

 

그 다리를 지나

그 웅덩이를 지나

그 소나무의 푸른 가지를 지나

그 파도들의 은빛 머리칼을 지나

그 새의 금빛 날개를 지나

그 물고기의 푸른 지느러미를 지나

그 물고기의 알들이 반짝거리며 박힌 울타리들을 지나

 

     3

    ‘모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노래’

    저기 심연 깊이 앉으려고 하는 뿌리를 따라

    껑충껑충 산길을 넘고 있는 뿌리를 따라

    노을에서 노을로 건너가며 눈물 던지는 뿌리를 따라

    눈부시게 달려오는 뿌리를 따라

 

    새 한 마리 불쑥 일어서네

    먼지를 털며 일어서네

 

     4

그런데, 저기 한 여자가 앉아 있네요, 칠현금 앞

그 여자의 손끝이 출렁거리기 시작하는군요

그 여자의 허리가 출렁거리기 시작하는군요

노래가 넘기 시작하는군요, 노을을

보세요, 노을 하나가 달려오는군요

보세요, 노을 하나에 노을 둘이 달려오는군요

보세요, 노을 둘에 노을 셋이 달려오는군요

 

그 여자의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면

달은 키큰 나무가 되고

그 여자의 손가락이 나무를 가리키면

나무는 허리 굵은 바람이 되며

 

모든 왕의 무덤을 만지는 소리

모든 왕의 무덤의 풀들을 만지는 소리

모든 왕의 무덤의 풀들의 뿌리를 만지는 소리

 

모든 자궁을 쓰다듬는 소리

모든 자궁의 아기들을 쓰다듬는 소리

 

     5

그러면 기다리리, 모든 나무들이 모든 지상의 새들의 날개를 품는 순간을

너의 손가락 끝에서 모든 구름들이 모든 빗방울들의 꿈을 깨우는 순간을

 

그러면 기다리리, 모든 모래들이 강 하나를 떠메고 오는 것을.

그러면 기다리리, 모래 하나가 바다 하나를 떠메고 달려오는 것을.

그러면 기다리리, 바람 한올이 산 하나를 가슴에 품고 날아오는 것을.

너의 손가락을 비추었던 노을이 나의 손가락을 비추기를.

 

오오, 네가 부르는 노래가

지금 영산홍 속에 불타오른다.

 

가야여

가야의 여자여

지금도 그 길의 모래에 감기는 노을의 피를 쓰다듬고 있는 여자여

지금도 그 길의 눈썹을 허리춤에 넣고 있는 여자여

지금도 그 무덤의 허리를 은빛 별로 물들이고 있는 여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