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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한국영화와 국제영화제
깐느·베니스·베를린 영화제를 중심으로
허문영 許文暎
『씨네21』 기자 moon8@hani.co.kr
“한국 유학생 중에는 왜 이렇게 영화 전공자가 많은가?” 프랑스 빠리에서 유학중인 한국 학생들이 불과 3,4년 전까지만 해도 교수들이나 동료 학생들에게 흔히 듣던 말이라고 한다. 이 질문에는 이런 문장이 생략돼 있다. “한국에는 (일본, 이란, 중국과 달리) 이름난 감독도 없고 영화산업도 크지 않은데……”
유학생들을 곤혹스럽게 만들던 이 질문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이유는 단순한 데 있다. 깐느영화제에 한국영화가 대거 초청됐기 때문이다. 1998년에 「강원도의 힘」 「아름다운 시절」 「8월의 크리스마스」 세 편이 초청됐고, 2000년에는 한국영화로는 최초로 「춘향뎐」이 경쟁부문에 「오! 수정」 「박하사탕」 「해피엔드」가 각 부문에 초청됐다. 이건 세계영화계의 사건이었고 각국의 유력한 영화매체들은 한국영화의 등장을 알렸다.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는 ‘한국영화 돌연 등장’이란 제목을 달아 한국영화의 급부상을 소개했고, 미국의 영화지 『필름 코멘트』는 올해 신년호에 한국영화를 특집으로 다뤘다. 이 모든 걸 깐느영화제 때문이라고 말하는 건 무리겠지만, 적어도 깐느에서의 한국영화 붐이 기폭제가 됐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깐느영화제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권위의 영화제다. 깐느영화제의 초청은 국제영화계에선 예술적 인증서나 다름없다. 상까지 받는다면 그건 거장이라는 라이쎈스를 발급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깐느에는 다소 못 미친다 해도 베니스영화제와 베를린영화제가 가진 위세도 만만치 않다. 이 셋을 묶어 3대 국제영화제라고 부른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베니스는 「거짓말」과 「섬」을 각각 1999년과 2000년 경쟁부문에, 베를린은 올해 「공동경비구역 JSA」를 경쟁부문에 초청함으로써, 한국영화의 국제적 성가를 재확인시켰다. 그밖의 영화제에서도 비슷해 한국영화를 초청하지 않는 국제영화제는 드물다.
그러나 각종 국제영화제에서의 한국영화 붐을 바라보는 시선이 꼭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영화제도 어차피 넓은 의미의 정치와 로비의 장이므로 국제영화제 진출이나 수상 여부에 얽매이는 건 벗어나야 할 후진국 콤플렉스라는 것이다. 국제영화제에 대한 환상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주장은 경청할 가치가 있다. 내세워지는 명분과는 관계없이 어떤 권위있는 영화제도 작품성을 유일무이한 선정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콧대 높은 깐느영화제도 물론 그중의 하나다.
지금까지 깐느영화제에서는 몇가지 작품선정 기준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오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우선 가장 널리 알려진 건 거장우대 원칙이다. 거장을 우대한다는 건 언뜻 당연해 보이지만, 이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깐느가 한번 이상 인연을 맺은 감독들을 눈에 띄게 우대하기 때문이다. 작년 깐느 경쟁부문은 미국 언론으로부터 ‘깐느 패밀리의 잔치’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켄 로치, 코엔 형제, 오오시마 나기사, 왕 쟈웨이, 라스 폰 트리에, 아르노 데쁠레솅, 올리비에 아싸야스, 리브 울만, 미카엘 하네케 등이 그 지목 대상이다. 올해는 더하다. 장 뤽 고다르, 자끄 리베뜨, 마뇰 드 올리베이라, 허우 샤오셴, 이마무라 쇼오헤이, 난니 모레띠 등 이름만으로도 위압적인 감독들의 작품이 경쟁부문에 총집결한 것이다.
주최측의 입장에서 이런 선택이 안전한 잇점도 있지만, 더 주요한 것은 거장들의 신작을 다른 영화제에 뺏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미완성작조차 ‘깐느 패밀리’가 만들었다면 초대된다. 작년 왕 쟈웨이의 「화양연화」는 영화제 개막 전날까지 후반작업을 하고 있었으며, 올해 허우 샤오셴의 「밀레니엄 맘보」는 40분짜리 가편집본만으로 경쟁부문 진출이 결정됐다. 그러다보니 깐느영화제 진출에는, 100%는 아니라고 해도, 일정한 패턴이 지켜진다. 먼저 깐느에 처음 온 감독은 제아무리 걸작을 만들었어도, 일단 비공식 부문(‘감독 주간’ ‘비평가 주간’)이나 공식부문의 ‘주목할 만한 시선’을 거친다. 경쟁부문의 진출 여부는 그 다음 작품에 가서 정해진다. 경쟁부문에 올라 본상을 받거나 주목을 얻으면, 그 다음부터는 깐느 패밀리로 분류돼 웬만한 작품은 가산점을 얻고 들어간다.
이러니 부작용이 없을 리 없다. 미지의 신인 감독이 만든 걸작보다 거장이 만든 범작이 더 존중되는 것이다. 예컨대, 지난해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은 누가 봐도 경쟁부문에 오른 켄 로치의 「빵과 장미」나 올리비에 아싸야스의 「감상적 운명」보다 뛰어났지만 ‘주목할 만한 시선’에 머물러야 했다. 키따노 타께시의 최고작으로 일컬어지는 「소나티네」 역시 1995년 ‘주목할 만한 시선’에 머물렀다. 「하나비」가 베니스에서 대상을 받은 뒤인 1999년이 돼서야 깐느는 키따노의 「키꾸지로의 여름」을 경쟁부문에 올렸다. 키아로스타미는 이미 1990년대 초에 고다르 등으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았지만, 상이 주어진 건 그의 범작에 속하는 1998년의 「체리 향기」다. 그러다보니 깐느영화제 경쟁부문은 ‘발견의 기쁨’을 주는 미지의 명작보다, 거장들의 범작이 절반 가까이 되는 현상이 반복된다.
물론 깐느가 거장들의 확보에만 눈멀어 있는 건 아니다. 언뜻 고고한 작가주의적 원칙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깐느는 어떤 영화제 못지않게 화려한 외양과 비즈니스에도 공을 들인다. 미국 내 행사를 제외한다면 가장 많은 스타들이 모이는 곳이 깐느이고, 그건 깐느의 자랑이다. 그러니 깐느는 스타들의 저수지인 할리우드 영화를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작가주의 존중과 할리우드 배려는 쉽게 어울리기 힘들다. 개막작을 화려한 스타들이 나오는 대작으로 정하는 건 이 때문에 나오는 고육책이다. 폴 버호벤의 「원초적 본능」(1995), 뤽 베쏭의 「제5원소」(1997), 올해의 「물랭 루주」 개막작 선정은 그런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선택이다. 한편, 경쟁부문에 오르는 미국 영화의 편수는 제한될 수밖에 없는데, 때로 주최측과 미국 언론은 이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
작품 선정에는 치열한 계산과 배려가 작용하지만, 수상작 결정은 깐느도 심사위원들의 자체 결정을 존중한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따라서 심사위원들의 구성, 특히 심사위원장의 선정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마틴 스콜쎄지, 리브 울만 등, 이른바 작가주의 감독들이 최근 몇년간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됐다. 그러나 작년엔 이례적으로 유능한 상업영화 감독 뤽 베쏭이 임명돼 파란이 일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대중성이 높은 「어둠속의 댄서」에 대상이 주어져 논란을 불러왔으나 대상 외의 수상작들엔 그다지 이견은 없었다.
베니스 영화제와 베를린 영화제는 양과 질 면에서 깐느에 확실히 밀린다. 베니스는 깐느와 마찬가지로 작가주의 노선을 견지하지만 작품 확보 경쟁에서 밀려 거장들의 초청 빈도는 훨씬 떨어진다. 그러나 오히려 이 점이 베니스에게 망외의 소득을 안겨주기도 한다. 깐느가 거장들을 쫓느라 소홀히 한 미지의 걸작과 예비 거장들이 베니스에서 빛을 보는 것이다. 키아로스타미를 발견한 영화제는 로카르노이지만, 허우 샤오셴을 처음 발견하고 그에게 대상을 안겨준 영화제는 베니스였다. 키따노 타께시, 라스 폰 트리에, 차이 밍량도 깐느 패밀리이기 이전에 베니스가 먼저 축복한 인재였다. 문제는 이들도 상을 받은 뒤엔 깐느로 가버린다는 점이다. 마켓도 없고 스타들을 대거 동원한 화려한 행사도 적어 베니스는 상대적으로 위축돼 있다는 느낌을 준다. 최근엔 깐느가 주목하지 않은 문제작들, 깐느에 일정을 맞추지 못한 영화들이 베니스로 가는 경우가 많다.
베를린 영화제는 형식미보다는 전통적인 이야기체 영화를 존중하고, 영화의 사회성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앞의 두 영화제보다는 대중적인 편이다. 할리우드와의 관계도 비교적 좋아 베니스보다 외양이 훨씬 크고 화려하다. 이 때문에 할리우드 영화가 상을 비교적 자주 받는 편이고, 그럴 때마다 메이저 스튜디오의 로비설이 나돌기도 한다. 그러나 로비가 전무한 영화제는 없고 3대 국제영화제에서의 수상이 미국 내 흥행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는 점에서 로비의 강도를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 한때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베를린은 장이모, 리안 등 중국계 감독의 발견에 앞장섰으나 90년대 중반 이후론 발굴성과나 중후함의 양면에서 모두 부진한 느낌이다.
어떤 영화제도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지적은 맞지만, 그렇다고 3대 국제영화제를 무시하는 것도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예술적 창의성으로 영화를 만드는 건 지구 곳곳에서 점점 춥고 배고픈 일이 돼가고 있다. 영화제가 없었다면, 그 존재만으로도 영화를 풍부하게 하는 허우 샤오셴과 장 뤽 고다르가 무대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감독들 편에서도 마찬가지다. 영국 사회주의자 켄 로치는 주책맞게도 신작만 만들면 늘 깐느 경쟁으로 오는 단골 중의 단골인데, 그의 깐느 행은 세계 배급을 위한 일종의 프로모션이다. 많아봤자 3만 달러인 가격으로 이 나라 저 나라에 팔아 제작비를 회수하고 다음 영화의 제작비를 마련하는 것이다. 영화제 참여 여부는 그에게 생존과 관계된 일이다. 국내 흥행에서 참패한 「춘향뎐」은 상을 받지 못했지만, 유럽 곳곳과 미국 개봉으로 제작비를 거의 회수할 수준이 됐다. 깐느 경쟁 부문 진출이 아니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다.
모든 잡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제는 영화를 예술이라고 믿는 감독들과 관객들의 마당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상품론에 질식된 영화가 숨쉬는 해방구, 혹은 문화산업론에 밀려난 비주류 영화인들의 게토이다. 우리 영화가 왜 아직 상을 못 받느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상을 받기 직전의 인지 단계에 와 있든가, 아니면 우리 영화가 아직 서구 영화인을 설득할 만한 미학적 혁신성을 보여주지 못했든가 두 가지 중 하나다. 어느 쪽인지 아직 답하기에 이르다. 우리 영화는 이제 겨우 영화제를 발견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