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이중적 글쓰기의 힘
김수영 시집 『오랜 밤 이야기』, 창작과비평사 2000
박수연 朴秀淵
문학평론가 QKRTK@chollian.net
김수영(金秀映)은 『오랜 밤 이야기』에서 검은 우물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이미 그의 첫시집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에서도 그랬는데, 거기에서 그는 “끊임없이 솟아도 결코 차오르는 법 없는/밑바닥 없는 구멍”(「검은 우물」)을 이야기했다. 김수영이 검은 우물을 계속 문제삼는다는 것은 그가 그곳에 욕망의 흔적을 묻어두고 있다는 점을 암시할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서시 「책」은 내용상으로 『오랜 밤 이야기』의 출발점이며 형식상으로 종점이다. 「책」은 추억에 바쳐지는 시집 전체의 가두리를 징후적으로 구성한다. 이후의 시는 추억의 「책」으로부터 나오고 「책」으로 들어가는데, 이로써 한권의 책인 이 시집은 겉이 속이고 속이 겉인 표리일체의 차원을 이룩하였다. 이것은 상상과 삶이 합쳐지는 행복의 순간이지만,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책」)의 순간을 예감하며 페이지를 넘길 때, ‘작은 책’은 그러나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같은 곳)의 캄캄한 속살을 들이대기 시작한다. 책 속에 있는 것은 꽉찬 행복의 시간이 아니라 “마음의 맨 아래, 그 바닥을 비춰내는 어둠”(「구불구불한 낭하를 걷고 있는 고양이」)이고 그것을 “해부하기 위해 흉부를 열자 그곳은 텅 비어 있”(「모래 속에 누워 있던 여자」)는 것이다.
시집은 그 행복과 불화를 겹쳐놓지 않고 나란히 놓는다. 그것들이 서로의 옆자리에서 시인의 시선을 계속 끌고 당기고 밀어낸다는 점에서 시는 환유의 수사학을 구성한다. 젊은 시인들이 90년대에 보여준 검은 정서의 한 축이 김수영에게도 나타나는데, 그의 특징은 그것이 시집 전체의 배치도로서 드러난다는 점이다. 1부는 어둠에, 2부는 밝음에, 3부는 대립의 중간에 걸치면서 서로서로 의미의 기원을 탐색하고 그 과정에서 어둠은 밝음으로 혹은 그 역으로 의미작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원에 이른 듯하다가 다른 세계로 미끄러져 가는 과정, 그것이 『오랜 밤 이야기』의 형식적 배치이다. 기원의 의미를 추구하되 그곳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시인의 운명적인 어둠이라면, 겉과 속이 하나인 시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 어둠을 감수해야 한다. 근대사회 이후 서정시인의 운명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런데, 시인이 「책」에서 겉과 속을 하나로 압축시켜놓는 것은 이후 시들의 환유적 운동 속에서 ‘기원-속’ ‘표상-겉’을 하나로 포개놓으려는 열망의 표현일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 부재하는 것에 대한 욕망일 텐데, 그 부재의 세계가 김수영의 첫시집에서부터 ‘구멍’의 이미지로 다루어져왔음을 주목해야 한다.
구멍은 모든 존재들이 없는 듯하면서 있게 되고 있는 듯하면서 없게 되는 무규정의 영역이다. 그곳으로 들어가려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다. “어두운 그곳에서 맑은 물이 솟는/공백으로 남아 있는 마음의 맨 밑/가끔 그 어두운 물밑을 본다/갈증을 삼키기 위해 고개를 드리우면/나를 잡아끌던 물의 태반”(「검은 우물 2」). 그곳이 시인의 기억을 묶어두는 장소이다. 그 어둠은 그러나 불임의 어둠일 뿐만 아니라 ‘눈부신 흰소가 태어나는 검은 구멍’(「흰소가 오는 밤」)이기도 하다. 이로써 시집은 서시 「책」으로써 표현되는 표리일체의 차원, 즉 ‘책’의 행복의 세계가, 추억의 속살들로 몸을 바꾸며 미끄러지는 환유의 수사학이 된다. ‘추억이라는 책’은 시집의 2부에서 집중적으로 묘사되는 것처럼 때로 시인이 노닐던 따뜻한 기억의 담수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외로이 날았던 허공”(「무지개 그림자 속을 날다」)이기도 하다. 즉 그는 「책」을 통해 겉과 속을 압축하는 은유를 지향하지만 그것의 속살을 열자마자 추억의 이동인 환유로 언어를 바꾸는 것이다. 3부는 그것의 형식적 배치로 이해될 수 있다. 김수영의 시적 전략은 이 ‘공백-어둠’과 ‘생성-밝음’의 이중적 글쓰기에 있다. 이 이중적 세계가 은유와 환유로써 서로 끌고 밀어내고 당긴다는 것은 그 각각의 안에 이미 서로가 포괄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김수영의 이중적 글쓰기는 그러니까 하나의 글쓰기 안에 또하나의 글쓰기가 존재하는 상태를 정확히 가리킨다. 시는 자신의 심층에 다른 시를 이미 묻어둔다. 우리는 그 두 세계를 동시에 읽어야 한다.
김수영이 90년대의 젊은 시인들이 보여주었던 불모의 환유적 연쇄 이미지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시는 다른 젊은 시인들의 시가 풀어지거나 요령부득의 세계에 빠져 있는 동안 언어적 심미성을 완성하였다. 이 심미성은 그러나 언어로써 완성되되 언어 외부를 만들어낸다. 검은 구멍, 즉 부재의 세계로부터 시인을 호명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 다른 시인들이 보여주었던 것은 그 검은 목소리에 압도되는 언어였고, 이때 그들의 시는 언어 안에서 자기 공명하는 목소리의 집합이었다. 동일한 검은 구멍을 그려내면서도 김수영은 하나의 글쓰기로 또하나의 글쓰기를 포괄하면서 그 글쓰기들의 충돌로써 시적 긴장을 만들어낸다. 무릇 생성은 긴장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김수영의 시에서 언어를 통한 언어 외부의 생성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검은 우물로써 생성을 이야기하는 순간, 일찍이 오정희가 「옛 우물」에서 보여주었던 것, 지금은 메워졌으나 여성의 몸 안에 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 생성의 근원이 김수영에게 와서 반복되는 듯하다. 그러나 그 반복은 동일한 반복이 아니라 전도된 반복이다. 보라. 구멍은 어머니의 세계만 표상하는 것이 아니다. “호수 위에, 검은 구멍을 뚫어 놓”(「흰소가 오는 밤」)은 것도 아버지이고 새로 태어나는 것도 아버지이다. “눈송이처럼 어디론가 끝없이 흩날리고 싶은 밤//마음에 숨긴 무수한 잔금들까지 얼어버린/아버지 돌아오시다/돌밭을 헤매듯 얼음투성이 마음속을 헤맨/정적 속에서 태어난 눈부신 흰소가 되어”(같은 시).
김수영이 이룬 참된 독창성은 무엇보다도 상상의 세계에서 아버지의 영역을 찾아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 ‘아버지-흰소’가 어떤 구체적 현실태를 가리키는지는 그러나 지금은 분명치 않은 듯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그 세계에 자신의 언어를 입혀놓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다. 싸움을 걸면서 그 세계를 눈앞에 그려놓는 것, 그것이 첫시집과 두번째 시집의 동일성으로부터 참된 새 세계를 솟아나게 하는 길이 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