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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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창비시선 200’ 기념 특집

 

최하림 崔夏林

1939년 전남 목포 출생.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등이 있음.

 

 

 

마애불을 생각하며

 

 

고요하게

눈을 뜨고 마애불이

산 아래로 달리는 그림자를

보고 있다 날아오르는 검은

꽁지의 새들을 보고 있다

날이 저물어 침엽수들은 하나

둘 어둠속으로 들어가고

아무도 모르게 달려온 시간들이

들녘에 깔려 밤을 재촉한다

길게 울며 언덕을 내려가는

염소들은 이제 밤을 볼 것이다

구름들은 추억을 볼 것이다

더욱 급하게 시간들은 들을

뒤덮고 염소와 나무들은

어둠속에 있다 우리는

모두 어둠속에 있다

걸어온 길의 발자국을 기억하는데도

우리는 숨가쁘다 대지는 신음으로

가득하다 언제 우리는 밤과 함께

독이 될 수 있으리요

 

 

 

겨울 월광

 

 

공기를 타고 오르는

가창오리들이 날개를 치며

공중으로 가는 들녘으로

여러 길들이 뻗어 있고

얼어붙은 버드나무들이 앙상히

늘어선 지방도로로 짐차들이

스노 타이어를 낀 채 달린다

한 농부가 논둑을 걸어 강으로

가고 다른 농부가 담배를 피운 채

가는 농부를 본다 강에서는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난다 지난달에도 농협빚에

시달린 농부가 빠져죽었다 그들은 그

농부를 생각하며 겨울을 본다

밤에는 티브이를 켰다

노동자들이 붉은 띠를 두르고

거리를 무섭게 행진하고 있다

농부들은 채널을 돌린다

농부들은 꿈결 같은 소리로 달이

어둠을 헤치고 솟아올라 금강에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농부들은

꿈속에서도 달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