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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교란과 위반, 이야기의 그 무궁한 원천

은희경 『마이너리그』, 창작과비평사 2001

전경린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1·2, 생각의나무 2001

한창훈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 문학동네 2001

 

 

김은하 金銀河

문학평론가. 중앙대 강사. 주요 평론으로 「90년대 여성소설의 세 가지 유형」 등이 있음. zohar@netsgo.com

 

 

1. 삶이 상실하고 결여한 것을 인지하게 함으로써 더 나은 현실에 대한 갈망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소설은 불만의 장르이다.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갈망은 더 큰 고독을 안겨주고 현실과의 불화를 유발할 수도 있지만, 이야기를 통해 미로 같은 현실이 숨긴 길과 억압받고 황폐해진 마음의 연원을 보게 된다면 고독과 불화는 지혜가 될 수도 있다. 지루함을 벗어나기 위해서든 위로에 대한 기대 때문이든 우리가 소설을 읽는 것은 실상 의미를 얻고 그로 인해 자아의 파편성과 왜소성이라는 일상을 짓누르는 공포를 밀쳐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성찰성이 증가한 후기근대에서 개인이 다차원적인 삶과의 협상을 통해 자아를 기획하고, 세계를 재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과 달리 삶의 전통적 규준이 사라짐에 따라 혼란은 그만큼 더 격심해진 게 현실이다. 그래서 주체의 반성은 주체의 분열이 되기도 한다. 또한 후기근대의 유동하는 삶은 수많은 위험과 불안 속에서 정주를 이룰 수 없는 피로와 고통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나름의 나침반에 의지해 관찰과 사색을 통해 세계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게 아닌, 분열증과 왜소증을 앓는 후기근대적 삶속에서 분명하게 인지되는 것은 지속적으로 영혼을 잠식해 들어오는 불안이다. 은희경·전경린·한창훈은 교란과 위반의 상상력을 통해 이렇듯 현실 속에 미만해 있는 불안과 혼란을 요동하는 에너지로 역전시킨다. 과일 속에 박힌 씨앗처럼 고독 속에 틀어박혀 붕괴된 세계의 복원을 꾀하는 이들의 글쓰기는 불안과 혼돈이 새로운 지도를 짜나가는 역동적 원천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은 이야기의 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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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약속이나 한 듯 동네 사진관마다 사내아이들의 돌사진이 내걸리던 시절이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혹은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벌거벗은 사내아이들은 지금 무엇이 되어 있을까? 그들 중 누군가는 영웅이나 재력가가 되어 ‘성공시대’ 출연을 목전에 두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위계화 혹은 구별짓기라는 철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수다한 인생들은 주류가 아닌 비주류이기 쉽다. 생 혹은 인간의 급수가 사회적 지위나 재력으로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은 온당하나 무기력한 항변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은희경(殷熙耕)의 『마이너리그』는 서열화의 법칙이 굳건한 사회에서 주변부에 속한 남자들에 대한 코믹하면서도 서글픈 보고서이다. 그 시작은 장대했을지 모르나, 열등생에서 별볼일 없는 중년으로 그리고 앞으로 한층 더 보잘것없는 말년을 향해 곤두박질치게 될 이 인생들은 저항적 마이너리티도 되지 못하는 오갈데없는 삼류들이다. 그들은 배수아의 주인공이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라고 외치는 대상인 메이저들, 즉 일류대 졸업장과 건강하고 늘씬한 외모, 높은 연봉과 전문직 그리고 적당한 시민의식을 두루 갖춘 부르주아 남성이 아니어서 안쓰럽기도 하지만 연민의 힘으로 끌어안기에는 꺼림칙한 대상이다.

보잘것없는 사건을 계기로 형준·조국·승주·두환은 오랜 시간 동안 마이너리그의 동료로 관계맺는다. 자신들의 인연을 악연이라 부르며 각자 자신만은 마이너가 아님을 주장하는 이들의 관계는 얕지만, 나름의 주기와 사건을 가진다. 미모의 명문여고생 소희를 향한 욕망으로 서로를 견제하고 두환이 소희와 도주해버린 후의 열패감을 암묵적으로 공유하며 유지되던 이들의 관계는 한심하고 울적한 중년의 술친구로 시들해지다가 두환의 재등장이 계기가 되어, 마이너 탈출과 메이저로의 화려한 입성을 꿈꾸는 ‘평산 엔터테인먼트’의 동업자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들의 인연을 칡넝쿨처럼 얽어대는 것이 주류에 속하지 못한 열외집단이라는 점은 두환의 어이없는 죽음과 주류들의 합법적 사기에 의해 셋이 결국 패자부활전에서 패잔병으로 남게 된 현실에서 드러난다. 이들의 인생 여정은 결국 “삶의 여정이란 것이 사실로도 칡처럼 하잘것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17면)이라는 비애스러운 결론을 확인시켜준다. 비록 이들이 게으르고 무능하며, 허위의식에 가득 차 있는 삼류라 할지라도 여기에는 손쉽게 흘려버릴 수만은 없는 수다한 곡절과 사연이 있으며, 그 복잡함의 속내를 뒤적이다보면 결국 사는 일이 “저 자신이 알게 모르게 사회 속에서 모양이 만들어지고 구부러지고 닳아가는 과정”(「작가의 말」)임을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마치 인물화의 배경처럼 흐릿하게 스쳐가는 현대사─유신, 새마을운동, 긴급조치 9호, 12·12사태, 80년의 광주 등─는 이 마이너 인생들을 주조해내는 이면의 얼굴일 수 있다. 얼핏 이 굵직한 역사의 사건들은 이들의 인생이 모양지어지는 과정과 무관해 보이기 쉽다. 이들이 거대사와 얽히는 방식은 마치 사소한 우연이 불러온 어이없는 파장처럼 코믹한 것이기 때문이다. 포장마차 주인인 두환이, 단골손님이 간첩으로 밝혀져 모진 고문을 당하거나 평소 잘 씻지 않던 조국이 삼청교육대원을 색출하는 군인들에 의해 더러운 몸을 공개당하는 치욕을 겪는 식의 에피소드가 그 예이다. 즉, 누구도 현대사에 주체적으로 개입하거나 그럴듯한 형태로 연루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고교 동창인 김부식의 화려한 변신과, 그와 세 사람이 관계맺는 방식을 좀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꼬마병정’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리며 교련시간이면 동정과 멸시를 한몸에 받던 김부식은 시간이 지난 후 극우 언론의 핵심부로 도약한다. 그가 마이너에서 메이저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약육강식의 생존논리와 위계질서의 이분법을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메이저, 마이너라는 위치 바깥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반공이념을 축으로 진행된 조국근대화 사업과 군사주의 문화의 합작품인 위계와 배제의 정치논리는 이 서열화 법칙을 주조해온 것이다. 따라서 메이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이너가 필요하며 주류로 편입되기 위해서는 마이너를 짓밟을 수밖에 없다. 스포츠지 기자로 밀려난 김부식이 출세를 위해 언론사에 형준이들의 사업정보를 넘겨주는 것은 이러한 공식을 잘 보여준다.

결국 남자답게, 즉 주류로 사는 일이란 군사문화적 폭력성을 내면화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이 과정에서 밀려난 삼류 남자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아쉽게도 이 작품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또다른 하위 계급인 여성이 항상 마이너로 대기중이기 때문이다. 남자들과 “나는 아직도 불완전한 도중(道中)에 있다”(「작가의 말」)라는 말에서 여성작가의 자의식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맥락 때문이다. 이렇듯 위계질서의 이분법은 수많은 마이너들을 호출해낸다. 그럼으로써 마이너들은 자신은 결코 마이너가 아니라는 허위의식을 갖게 되고, 허위는 체제의 안전한 유지에 봉사한다. 짧은 순간 연민의 대상일 수는 있지만 공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마이너들의 존재방식은 자연스럽게 비극이 아닌 희극 형식을 끌어오게 한다. 그러나 웃음보를 터뜨리다가도 무서운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은희경 소설의 희극화 전략이 가진 날카로움이다. 또한 이 희극화 전략은 무시무시한 거대사마저 코믹한 것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역사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게 한다. 농담은 지성적 위반의 증거인 것이다. 그러나 농담의 유쾌함은 예기치 않은 어느날 뒤통수를 맞는 참담함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게 농담이 내장한 한계일 수 있다. 특히 현실의 교활함과 음모를 정치하게 간파하지 못할 때 농담은 자족적인 유희 이상이 되기 어려우며, 허위와 착오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이 생존의 무거움을 감당하는 소시민들의, 날내나는 삶 안쪽의 다채로운 모습을 부당하게 단순화할 수도 있다. 사악한 질서에 대한 부정과 위반의식에도 불구하고, 대상에 대한 긴장의 해소를 유도하는 농담은 현실의 복잡성과 인간 삶의 가파른 속내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결여하기 쉬운 것이다. 이 작품이 손쉽게 읽혀지는 것은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만은 않을 듯하다. 작가 특유의 미학적 개성은 그것대로 소중하지만, 자기갱신의 필요성 역시 긴요한 것이다.

 

3.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서도 침윤되지 않은, ‘나’의 욕망으로만 이루어진 삶에 대한 열망은 전경린 소설의 여주인공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자아주의자’라는 낯선 명명을 부여할 정도로 자기 정립에 몰두해 있는 이 여성들은 자기와의 깊숙하고 강건한 접속에 어려움을 겪는다. 여성적 리얼리티가 부재한 세계 속에서 내면 역시 점령당했거나 상처받고 무기력한 채로 유기되어왔기 때문이다. “산산이 깨어져 내가 나의 복부를 가르고 영원히 밖으로 나가버리고 싶은”(『염소를 모는 여자』 40면) 충동을 내보일 만큼 강렬한 이 자기해체의 욕망에는 내면 속의 기율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경린 소설의 여자들은 신성과 광기에 붙들려 ‘집’을 떠나고(「염소를 모는 여자」), 몸에 새겨진 아버지의 문자를 해체하기 위해 에로티시즘에 몰입하며(『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부계질서와 공모 혹은 협상하는 초자아를 버림으로써 상징계 바깥으로 내밀리면서도 자아의 고유성을 지켜내려 한다(「메리고라운드 서커스 여인」). 이러한 자기로의 귀환을 향한 시도가 사회적 질서에 반하는 급진적인 일탈을 경유한다는 점은 전경린 소설이 가진 매우 논쟁적인 측면이다.

근작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전2권)에서 지방방송국의 작가인 은령은 나르씨스트 유경과 사십대의 염세주의자 이진을 동시에 사랑함으로써 가속도 붙은 파멸의 국면에 접어든다. 특히, 낭만적 사랑의 울타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유경과의 관계보다 의사소통이 아닌 성충동이 앞서고 매혹만큼이나 짙은 혐오의 양가 감정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이진과의 사랑은 이 전락의 꼭지점에 위치한다. 성폭력의 형태를 띠며 시작되었음에도 은령이 관계에 사로잡힐 뿐만 아니라 성교 후 돈을 받는다는 점에서 둘의 관계는 매매음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이진과의 관계는 은령을 성적 쾌락만이 아닌 값비싼 상품과 초콜릿, 아이스크림 같은 단 음식에 대해 집착하게 한다. 이러한 설정은 충격적이지만 모든 여성에게는 창녀 기질이 있다거나 여성은 사치스러운 허영덩어리라는 식의 악의에 찬 마초적 발상과는 거리가 멀다. 퇴폐에 탐닉하는 은령의 내면을 성별화된 삶의 억압적인 경험과의 관계 속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은령의 자기방기적인 몰입이 시작되는 작품의 초반부에 중산층 집안의 모범생인 선모와의 결혼이 거절당하는 과정과 노동체험이 놓여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혼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는 나이인 스물다섯살의 은령은 조악하지만 손쉽게 단절할 수만은 없는 사회적 질서와 대면한다. 가부장적 중산층 가족이념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재혼한 어머니와 늙은 양부를 둔 사회적으로 취약한 은령의 가족관계와 자의식 없는 남성권력자에 의한 성희롱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노동현실은 자아의 존엄성을 훼손하기에 충분하다. 산책자의 자유마저 훼방하며 축축한 눈길로 보행을 가로막는 익명의 사내들처럼 공사영역 모두 여성의 창조적 삶의 충동을 앗아가 영적으로 굶주리는 상태로 몰아가기는 마찬가지이다. 허기가 가져다준 슬픔과 또 그것만큼의 갈망 때문에 은령은 독 묻은 쾌락과 급속히 연루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은령의 전락이 불우한 피해자의 자해적 반응으로만 해석될 수는 없다. “어떤 종류이든, 욕망에 빠져드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넘쳐보지 않고, 자신을 바닥까지 뒤집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2권 196면)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에는 성과 사랑 그리고 관계와 성숙 모두를 내면의 열기에 기대어 투신함으로써 자기만의 언어로 재인식하려는 시도가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은령의 성적 몰입, 상품과 단 음식에 대한 중독의 징후는 성찰성이 증가한 후기 근대사회에서 개인이 겪는 혼란의 부정적 증거이기도 하지만 부권, 도덕, 종교적 이념 속에서 구축된 규범적 여성상을 교란하는, 위반의 의미를 갖는다. 은령은 ‘양부’의 집을 떠난 뒤 소도시의 낯선 공간에서 유일하고 바람직하며 정상적이라고 규정되는, 집과 관계 그리고 그것들과 깊이 연루된 규범적 여성성에 대한 급진적인 대면을 통해 분열적이고 소외된 자아를 극복하고 지난한 성장의례를 일단락짓는다. 자기분열 상태에서도 지속되었던 ‘레이스 짜기’는 일탈이 새로운 자아의 구축을 위한 것이며, 서른이 된 은령이 니트 디자이너가 되어 있다는 것은 자기정립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옷짓기라는 그녀의 노동이 전통적으로 여성의 노동이라는 점은 여성적 자아를 획득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타자화된 여성의 역사와 심리 현실을 고려해볼 때, 본원적 자아나 여성적 자아란 한번도 그 맨얼굴을 드러내 보인 적이 없는, 강렬한 기원이 불러낸 ‘환(幻)’일 수 있지만 진정한 생을 원하는 한 불가피하다. 이로 인해 이 여정은 구불대고 끊긴 길 위를 떠돌며, 어둡고 습한 세계로 침몰하는 하강의 시간에 접어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지도에 없는 길 찾기의 지난함으로 인해 전경린의 글쓰기는 객관과 이성의 언어가 아닌 감각과 직관의 언어를 끌어온다. 감각은 자기 언어를 강탈당한 침묵하는 여성자아가 온몸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항의하는, 부계질서에 의해 식민화되지 않은 작은 틈새이기 때문이다. 이는 대문자 바깥에서 자기 욕망을 담은 언어를 찾는 여성 글쓰기의 특징적 일면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전경린의 소설은 마치 페미니즘 이론 위에서 구축된 듯 강한 관념성을 띠며, 점차로 추상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여성작가로서의 강한 자의식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성의 갈등상황을 인지하고 내파해나가는 방식일 수 있지만, 강고한 현실의 법칙을 뒤흔들기에는 무력할 수도 있다. 여성의 자기정립이 현실과의 절연 혹은 유배의 결과로 귀결될 수 있음을 이미 새장에 갇힌, ‘메리고라운드 서커스 여인’을 통해 보았으니 말이다. 자기 글쓰기의 성별성에 대한 집요한 인식을 통해 가부장적 현실을 밀쳐내며 내면 속으로 직파해가는 전경린 소설은 여성문학의 매우 희귀한 자산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내면에 대한 경사로 인해 전경린 문학은 성별을 주조하는 현실의 문맥들에 대한 확장적 시선을 결여하고, 상형문자와 같은 난해한 혹은 조금은 진부한 경구로 현실을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이야기가 관념화되는 것은 물론이고, 여성 현실 혹은 여성문학이 독자화되어버릴 소지마저 안게 된다. 이 ‘여성’작가의 모험을 좀더 지켜볼 일이지만 말이다.

 

4. 존재의 시원 찾기와 에로티씨즘에 대한 과도한 수사로 넘쳐나는 댄디들의 세계에서 서글프면서도 활달하고, 걸쭉하면서도 서정적으로 애면글면한 주변부 인생을 담아온 한창훈(韓昌勳) 소설은 이채롭다. 그의 세번째 창작집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에서는 여전히 전작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불우와 고독을 이끌고 방랑중이거나 완전한 정주를 희망하지만 그것을 쉬 이룰 수 없는 인물들이 등장한다(「지상에 남은 마지막 밤」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강물은 흘러 어디로 가는가」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 이들의 삶은 생존 혹은 상실의 고통을 이유로 가파르기만 하다. 농촌공동체를 배경으로 삶과 죽음, 행운과 불행이 교차하는 삶의 난해함을 끌어안는 「춘희」를 제외한 작품의 인물들은 대체로 뭍에서 온전히 정박하지 못한다. 그로 인해 등 떠밀리듯 뭍을 떠나온 이들이 마주한 바다는 상처받은 삶의 마지막 귀착점이자, 재생에 대한 갈망이 안타까이 드러나는 공간이다. 이번 소설집에서 작가의 관심은 고단한 인간사의 자잘한 면모를 관찰하고 드러내기보다 치유와 생성의 원천으로서의 바다에 경도되어 있다. 물에서 왔지만 불의 뜨거움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해가는 게 인생이라는 삶의 치명적 진실 앞에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피폐해진 삶은 원초적 향수를 자극하며 재생의 터전인 바다=자궁으로의 귀의를 재촉한다.

그렇지만 연작 단편 「돗 낚는 어부—남쪽 섬」과 「접붙이는 여자—남쪽 섬」에서처럼 욕망에 기갈들린 인간에 의해 바다는 왕성한 번식력을 잃고 기근을 겪고 있다. 그 바다에 젖줄을 대고 살아가는 어촌 역시 젊은이들은 떠나고 죽음이 넘쳐나는 불모지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바다가 앓고 있는 대재난은 곧 인간 삶에 불어닥친 위기인 동시에 오만한 이성으로, 허천난 욕망으로 대자연을 죽음으로 몰아간 인간행위의 결과이다. 이로 인해 생명을 되돌리기 위한 제의가 인간의 대속행위를 요구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마을 사람들을 다 먹여살릴 수 있다는 전설 속의 ‘돗’과 함께 바닷속으로 사라져버린 어부의, 풍성한 축제의 날들을 위해 필요한 것은 생산이 아닌 자신의 육신을 바다 생명들에게 ‘되돌려주기’라는 생각이 그 증거이다. 오랫동안 이야기를 통해 전수된 물고기 ‘돗’은 자연의 신성한 힘에 대한 상징이다. 비록 어부는 ‘돗’을 건져올리지 못하지만, 문명에 의해 강탈당한 신화와 전설에 대한 믿음은 ‘돗’과의 만남을 통해 확인된다. 이는 바다에 경도된 한창훈 문학이 문명에 대한 위반과 야생의 복원이라는 구도를 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파탄나고 상처받은 삶의 치유에 대한 기원은 성의 제의를 이끌어오기도 한다. 한창훈 문학에서 성 혹은 성교는 권태에 빠진 삶에 순간적인 열기를 가져다주는 허위가 아닌 재생과 치유에 이르는 통로이며, 여성은 신비한 치유력을 내장한 부드러운 살의 존재이다. 육덕 좋은 여자로 표현되는 ‘춘희’는 현실의 고난 속에서도 활달한 생명력을 잃지 않으며(「춘희」), 선원이 상실한 낙원의 시절에는 죽은 ‘누이’와 누이의 살에 대한 기억이 놓여 있다(「지상에 남은 마지막 밤」). 「변태」는 성에 대한 갈망은 곧 여성에 대한 갈망이며, 여성에 대한 갈망은 위로와 구원을 향한 갈망임을 십대 남아의 불우한 성장담을 통해 보여준다. 구원으로서의 성교와 낡아가는 작부의 살을 욕망하는 소년에게 충만한 것은 “결핍과 죽음”이다. 단순한 삶을 살아도 좋을 나이의 소년을 병들게 한 것은 죽음으로 넘쳐나던 오월 광주에서의 경험이다. 불가항력적인 경험으로 인해 소년은 여성을 통해 위로와 구원에 이르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여성=구원자라는 공식은 기근들린 바다를 회생시키는 성적 제의를 주관하는 제사장이라고 불러도 좋을 질네(「접붙이는 여자—남쪽 섬」)에게서도 드러난다. 이렇듯 여성에 대한 사랑과 숭배에 바쳐진 한창훈 문학은 훼손되지 않은 현실에 대한 과도한 갈망에 빠질 때 여성을 신비의 존재로 이상화해온 동시에 타자화해온 오래된 문화적 관념을 반복한다. 제사장 ‘질네’보다, “너도 가, 이 새끼야. 쬐끄만한 게 까져갖고”(「변태」)라고 말하는 작부가 훨씬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은 여성에 대한 낡은 관념을 극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노회한 작부의 말이 위로에 대한 병적 탐닉이 아닌 자기 정신과의 대면을 통한 성장을 재촉하는 말일 수 있다고 한다면 과도한 해석일까? 「변태」에서 작부의 일갈 다음에 이어지는 “내 옷이 벗겨지지 시작했다”는 짧은 문장은 정신의 낡은 옷을 벗는 거듭된 시도 없이 성장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암시한다.

「변태」가 거론된 다른 작품들보다 돋보이는 것은 이렇듯 관념과 추상을 통한 이야기 구성보다는 재현 자체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한창훈의 전작들에서와 달리 늘어난 사설과 관념에 의해 구성된 이야기들은 메씨지의 전달에는 적절할지 모르나, 생생함을 잃고 진부해지고 있어 아쉽다. 여성과 생명에 대한 발견은 값지지만, 다면체인 현실과의 긴장관계가 느슨해질 때 온당한 인식이라 할지라도 아니 온당할수록 상투성과 피상성의 혐의를 쉬이 벗어나기 어려운 게 아닐지.

 

5. 은희경·전경린·한창훈은 각기 다른 스타일을 가진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교란과 위반을 소설의 역할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해 보인다. 은희경은 마이너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상 주류들이 주도해온 사회의 허위와 치부를 드러낸다. 경쾌하고 발랄하게 역사와 정치 그리고 메이저들의 비속함이 폭로되는 과정을 통해 이들에 대한 터무니없는 신성화와 공포는 교정되고 지워지는 것이다. 전경린은 욕망의 생산적 에너지를 길들이고 억압하는 사회적 세력에 대한 급진적인 위반을 통해 젠더 이데올로기를 교란한다. 성과 사랑 그리고 가족의 경계를 벗어난 여성의 모험은 분열중인 주체가 생성중인 주체로 전화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창훈은 바다에 대한 지속적인 회귀 의지를 통해, 욕망과 생산 그리고 발전의 이념에 대한 환멸을 표현한다. 여성과 생명에 대한 경도는 남성성을 통해 구축되어온 문명에 대한 본원적인 위반 의지인 것이다. 각각의 편차는 있지만 이렇듯 다양한 현실의 역동적 긴장관계를 놓치지 않는 이들의 작품은 개인과 세계의 비극적인 대립구도를 깨뜨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