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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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동 金奎東

1925년 함북 경성 출생. 1948년 『예술조선』으로 등단. 시집 『나비와 광장』 『생명의 노래』, 시선집 『깨끗한 희망』 등이 있음.

 

 

 

느릅나무에게

 

 

나무

너 느릅나무

50년 전 나와 작별한 나무

지금도 우물가 그 자리에 서서

늘어진 머리채 흔들고 있느냐

아름드리로 자라

희멀건 하늘 떠받들고 있느냐

8·15 때 소련병정 녀석이 따발총 안은 채

네 그늘 밑에 누워

낮잠 달게 자던 나무

우리 집 가족사와 고향 소식을

너만큼 잘 알고 있는 존재는

이제 아무 데도 없다

그래 맞아

너의 기억력은 백과사전이지

어린시절 동무들은 어찌 되었나

산 목숨보다 죽은 목숨 더 많을

세찬 세월 이야기

하나도 빼지 말고 들려다오

죽기 전에 못 가면

죽어서 날아가마

나무야

옛날처럼

조용조용 지나간 날들의

가슴 울렁이는 이야기를

들려다오

나무, 나의 느릅나무.

 

 

 

근황

 

 

1

 

공부해라

테레비 보지 마라

컴퓨터 그만 해라

부모는 얼굴만 맞대면 이렇게 당부하고

잠이 부족한 너는

언제나 넋 나간 얼굴이다

얘야, 그렇다

다 집어던지고

나와 겨울바다로 가자

속초나 변산반도

그 바닷가에 가 앉아

우리 둘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꼭 두 시간 동안만 앉았다 오자

큰 바다 앞에서

깊은 가슴속으로부터

일렁이며 번져오는

바다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귀나 기울여보자.

 

 

2

 

2년 살고도 아직 9개월 남았다는

어린 죄수 용준아

시인은

네 편이지 다른 편이 아니다

헛 배운 것이 너무 많은 이 늙은이

너를 위한

시 한줄 쓸 줄 모르는구나

허나

나를 믿어다오

내 장담하거니

너는 틀림없이

이 다음에 큰사람 되리라

세계를 꿰뚫어보고

세상을 바꿔놓는 산이 되리라

큰 산 되리라.

 

 

3

 

남들은 공부도 하고

스포츠라는 것도 한다지만

가난 때문에

공장 한 귀퉁이에서

한창 때의 아까운 시간 다 바치고

그렇다 다 바치고

얄팍한 월급봉투 받는 것을

진심으로 고맙게 여기는

착한 소년가장아

오, 평화

너는 평화를 구현하는

부처다

살아 있는 오늘날의 부처다.

 

 

나뭇가지 사이로 흐르는 것은 구름이다

 

 

50년 만에

만나기는 했으나

울어보기는 했으나

우리 피눈물 어디로 갔나

바다냐 산이냐 하늘이냐

쭉 갈라진 땅이다

쭉 갈라진 하늘이다

이래가지고도 만나 울어보는 것은

좋은 세월 다 놓친

형제의 설움이라

남녘 북녘 잘못이냐

역사의 잘못이냐 운명의 갈림길이냐

원수의 가슴 향한 칼을

너도 놓고 나도 놓는다

둘러싼 시퍼런 저 유령들의 군무

달에서 별에 이르기까지

유령의 그림자 여전히 어찔거리거니

알 수 없어라

사무치는 원한 그대로 남아

그리움이여 추억이여

50년 공산주의 교육 받은

북녘 조카들아

꿈에라도 헛소리할까

조심하고 사는 핏줄들아

남녘에서 50년 동안

시 공부밖에 못한

이 큰아버지 어떻게 할 거냐

함께 살고 싶다

인제는 다 털어버리고 함께 살고 싶단다

50년 만에 만나

얼싸안고 울어보기는 했으나

우리 피눈물 어디로 갔나

나뭇가지 사이로 흐르는 것은 구름이라

오, 구름뿐이라

백골과 더불어 일어서서

춤을 춘다

미친 춤 추어보는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