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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매혹과 냉소 사이, 비평의 존재론
김정란 평론집 『영혼의 역사』, 새움 2001
남진우 평론집 『그리고 신은 시인을 창조했다』, 문학동네 2001
유성호 柳成浩
문학평론가. 한국교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평론집으로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등이 있음. ysh64@chollian.net
1. 비평의 언어는 대상 텍스트를 향한 열정적 매혹과 그것을 분석하는 데 필요한 냉정한 거리감각이 통합되는 지점에서 발생하고 완성된다. 그 점에서 독자로서 가지는 심미안의 섬세함과 판관으로서 가지는 가치기준의 합리성은 비평가에게 불가결한 능력의 일부가 된다. 이같이 본래적 의미에서 비평은 뛰어난 심미적 텍스트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데서 자기 위상을 확보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씌어지고 있는 비평에서 우리는 대상 텍스트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스스로 심미적 텍스트로 화(化)하려는 강렬한 욕망을 종종 읽게 된다. 다시 말해서 비평이 창작에 대한 사후적 해설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예술영역의 시민권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시대의 비평가들은 구체적 작품과 비평이론을 연결시키는 매개적 직능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언어미학을 구축하려는 욕망을 아무 스스럼 없이 내보인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최근에 발표된 비평들에서, 공적 영역의 가치판단과 사적 영역의 자기고백이 혼재해 있는 경우를 자주 목도한다. 빈번하게 반복되는 1인칭 ‘나’의 등장, 비평가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이나 에피소드를 작품해석과 나란히 병치하는 유비적(類比的) 언어들, 논리적 판단보다는 정서적 호오(好惡)로의 귀속성이 더 강해 보이는 선명한 잠언적 자기주장들은, 마치 소설에 사소설이 있듯이, 비평에도 사비평(私批評)적 언어가 가능함을 보여주는 유력한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경향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반영하기 위해서 주체는 사물로부터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사물에 돌려주어야”(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 한다는 권면이나, 비평가는 해부학자의 냉엄함을 지녀야 한다는 오래된 믿음에 비추어보면, 일정하게 비평적 객관성이 이완되어가는 과정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비평에서 나타나는 문체적 심미성과 자기고백성의 점증이 우려할 만한 단계에 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평언어가 이론의 강박을 벗어나 활력있게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기서 발생하기도 하고, 또 비록 소수이겠지만, 비평의 문채(文彩, figure)에 매혹되는 열렬한 애독자도 생길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가 살피게 될 두 사람의 비평가는 비평 자체의 언어미학을 누구보다 선명하고 열정적인 자의식 안에서 수행해온 이들이다.
바로 그 두 사람, 김정란과 남진우의 ‘시 비평집’이 8,9월 나란히 출간되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비평에서 문체적 심미성과 선명한 자기주장을 견고하게 지켜온 것 외에도, 그 활동의 외관에서 비교적 유사한 특성들을 적잖이 지니고 있다. 시 창작과 비평을 아울러 하고 있다는 것, 그것도 적당히 겸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서 독자적인 언어영역과 스타일 그리고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 시를 쓰고 평가하는 안목에서 리얼리즘이나 역사주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섬세하고 내밀한 인식론이나 이미지를 문제삼는다는 것, 그리고 최근 ‘문학권력’ 논쟁을 둘러싸고 발생한 이런저런 콘텍스트에 두 사람 모두 직간접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 등이 그 세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공통점의 나란한 적시(摘示)가, 그들 사이에 엄존하는 (어쩌면 더 본질적이고 커다란) 차이점까지 간과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길지 않은 글에서, 두 비평집에 나타난 이들의 비평적 전언을 제대로 스케치해 보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이 글은 그들의 비평집에서 엿보이는 미학적 관점 몇개를 추출해보고, 비평가가 자신의 관점과 대척점에 위치한 타자들에게 반응하는 방식에 대해 살핌으로써, 우리 비평이 참작해야 할 점을 암시하는 데 그치려고 한다.
2. 『영혼의 역사』는 첫 평론집 『비어 있는 중심』(1992) 이후 9년 만에 내는 김정란(金正蘭)의 비평집이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1부에 실린 네 편의 글은 최근 김정란 비평의 동력이 어디서 발원하는지에 대한 명료한 지형을 보여준다. 그것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가 1990년대 이래의 ‘시의 위기’를 부추긴 실질적 책임이 ‘상업주의·중앙·문학권력’에 속해 있는 비평가들에 있다는 강도높은 ‘문학행태론적’ 비판이라면, 다른 하나는 새로운 세기를 이끌어갈 시는 이른바 ‘심층 근대성’을 지향하는 세계에서 구현되리라는 미학적 전망이다.
먼저 김정란은 서문에서 “문학과학주의에 기울어 있는 이론강박증을 가진 비평가들”과 “온갖 저널적 수사를 동원하여 텍스트를 패션화하는 데만 몰두”하는 비평가들을 비판한다(9면). 그러면서 자신은 “텍스트로 하여금 스스로 안에 갖추고 있는 기계장치를 작동시키는 능력을 발견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비평행위를 하려고 애써왔다”(같은 곳)고 말한다. 또한 우리 시에 나타난 위기 담론에 대해서 “죽은 것은 시가 아니라, 시에 대한 비평이며, 더욱더 정확히는 문학정신”(23면)이라고 말한다. ‘문학정신’을 수호하고 개척해야 할 비평가들이 일종의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가 보기에 “우리나라에 시의 위기는 없다(그런 식이라면 늘 위기였다. 비평가들은 권력만 따라다니니까). 있는 것은 시 비평의 위기이다. 새로운 시는 발생하는데, 평론가들이 읽어주지를 않는 것이다.”(57면) 이처럼 그는 시의 위기를 비평(가)의 위기로 진단하며, 나아가 권력 쪽으로 현저하게 기운 안목없는 비평가들에게 지속적인 불신을 표명한다.
그는 참으로 일관되게 “이런(힘을 꿈꾸는─인용자) 비평가들은 새 텍스트를 절대로 발굴하지 않는다. 어떤 상위 권력자들이 인지해주는 텍스트나 수동적으로 추인할 따름이다”(56면)라고 말하면서 문학권력을 형성하고 있는 비평가 집단을 강도높게 비판한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중요한 시인들은 “평론가들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52면) 열심히 자기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으며, “90년대의 한국시는 심화된 근대성을 확보하면서 탈근대적 맥락으로 이동해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비평가들이 이러한 맥락을 짚지 못한다는 데 있다”(54면)는 진단을 이어간다. 또한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비평가들이 오히려 신선한 자기 목소리를 낸다”(56면)거나 “비평가들의 호위를 받는 중앙이 아니라, 오히려 변방을 뒤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타자들만이 미래를 준비하기 때문이다”(81면)라는 진단에 이르면 그가 얼마나 비평가에게 ‘상업주의=중앙=문학권력’이라는 등가적 준거를 일관되게 적용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이는 물론 우리 문학 전체에 대한 발본적 비판의 외관을 띠고는 있지만, ‘상업주의/문학주의’ ‘중앙/주변’ ‘권력/반권력’이라는 다소 자의적인 범주의 적용으로 말미암아 그 함의가 선언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다. 그래서 그가 보이는 “새벽이 어떤 방식으로 밝아오는지 밤을 지샌 자들만이 알고 있다”(57면)는 단호하고 우의적인 염결성(廉潔性) 선언은, 그가 질타해 마지않는 권력의 그물망에서 벗어나 묵묵히 활동하는 비평가들마저 배제해버리는 일종의 선민의식을 유발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 연장선에서 볼 때, “최근 들어서 시와 평론을 겸하는 비평가들이 부쩍 많아지고 있는 현상은 그런 점에서 비평가들의 주목을 요한다.(…)진정으로 의미있는 시들을 살려낼 수 없다는 절박감이 그들로 하여금 시와 평론을 동시에 밀고 나가는 고단한 길을 선택하게 하는 것 같다”(55〜56면)는 언급은 조금 과한 것이 아닐까.
물론 이를 두고 김정란 스스로의 고백이자 다짐으로 보면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시와 비평을 겸하는 이들의 증가를 시인의 비평가에 대한 불신의 결과로 등치하는 것은, 비유의 차원이라 해도 바르지 못하다. 비평과 창작의 겸업이 그의 말대로 ‘고단한 길’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선택은 개개인의 언어적 욕망의 파장에 따라 다른 것이지 스스로 현장에 뛰어들어 작업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의미있는 시들을 살려낼 수 없다는 절박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리고 김정란이 비판하는 이른바 ‘문학권력’ 중에도 창작과 비평을 겸업하는 이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김정란이 ‘상업주의·중앙·권력’이라는 준거를 분명하게 촛점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특정 매체, 특정 에꼴, 특정 비평가에 대한 실물적 비판의 매개를 거치지 않은, ‘상업주의·중앙·권력’에 속해 있는 비평(가) 일반에 대한 비판은 실체가 없는 공허한 냉소로 이어질 수 있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김정란의 관점에서 볼 때 의미있는 비평적 실천을 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실물적 메타비평까지 수행되어야 그가 말하는 ‘비평(가)의 위기’에 대한 진정한 대안적 모형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김정란이 비판적으로 다루는 대상은 적잖이 익명화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김정란이 이번 비평집을 통해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내재성을 거쳐 초월성에 이르려고” 하며 “존재 깊은 곳에서 발성되는 신성함의 요구”(41면)를 중시하는 “창조로서의 시”(30면, 김정란은 ‘창조’와 ‘제조’를 구분한다)를 쓰는 시인들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과 평가에 있다. 이 부분이 바로 책의 2부를 구성한다. 바로 이러한 “시인과 작가들은, 성미 급한 비평가들이 그렇게 단정을 내리고 싶어하는 것처럼 만만한 존재들이 아니다.”(58〜59면) 이들에 이르러 “시인들은 비로소, ‘시적인 것’을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방식이 아니라, 영혼의 방식으로 파악하는 방법을 익혀가기 시작”(80〜81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정란의 비평적 안목은, 로고스의 억압을 벗어나고 재현의 법칙을 뛰어넘어 시적 비의를 함의한 시들로 향한다. 그들의 시에 나타난 것이야말로 “현재형으로 쓰인 미래에 대한 인식”(296면)이고, 그들의 시적 전언은 “왜곡된 근대화 과정에서 탈락되어버렸던 심층 근대성의 확보와 연관”(28면)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김정란은 이러한 자신의 비평적 독해를 서문에서 “모성 비평, 꼼꼼히 읽고 멀리 바라보고 크게 사랑하기”(5면)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텍스트를 대하는 비평가의 이같은 꼼꼼함과 스케일과 사랑의 힘은 이 책에서 명료한 일관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말처럼 “너무 열심히 나무를 보느라고 숲을 잘 보여주지 못하는 맹점”(11면)도 갖는데, 그것은 그가 텍스트의 심층을 열정을 다해 읽어냄으로써 하나의 대상에 오랜 동안 시선을 붙박은 채 움직일 줄 모르는 경향을 노출하기 때문이다. 그가 옹호하는 시인들은 한결같이 ‘계몽적 언어’로부터 자신을 밀어내면서 언어의 표층성과 물질성을 넘어서는 ‘심층 근대성’을 간취해낸 시인들이다. 이들을 분석하고 있는 김정란 비평에 나타나는,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활달한 상상력과 풍부한 전거는 그 자체로 눈부신 바 있다. 특히 1부의 두번째 글 「지금, 여기에서 시는 우리에게 무엇인가?」에서 행하고 있는 목수 예수에 대한 상징적 해석은 그의 통찰과 비유, 그리고 인식과 문채가 잘 통합된 사례이다. 그러나 그의 비평에서 우리 시에 나타나는 형식 미학에 대한 고려, 역사적 상상력의 결과로 산출된 작품들에 대한 관심, 근대문학사의 유산들과의 유추적 연관은 매우 빈곤하다.
이처럼 그의 비평을 일별할 때, 우리는 김정란 스스로 말한 “텍스트는 참으로 기묘한 사물이다. 그것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은폐하면서도, 기어이, 몇개의 조약돌을 길바닥에 떨어뜨려놓는다”(153면)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그 은폐의 포도(鋪道)에 떨어진 ‘몇개의 조약돌’로 김정란은 다양한 심미적 성채를 쌓는다. 그의 비평에 무수히 등장하는 ‘나’라는 1인칭 주어는 그 조형의 주체이자, 그 ‘몇개의 조약돌’에 열광하고 도취해버리는(“그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열광했었다. 아름답다!”〔320면〕) 순수한 독자이자, 비평의 권력화 현상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수행하는 여성비평가로서의 김정란이다.
그는 “한국의 문단권력자들이 상업주의와 영합함으로써 어떻게 가능성있는 작가들을 파묻고 있는지 차근차근 보이도록 하겠다”(343면)는 말로 책을 매듭짓고 있다. 다소 선언적이고 적대적이기까지 한 이 다짐은, 한국문학이 전체적으로 정론성을 탈피하여 내면으로의 경사가 급격해지는 즈음에, 비평의 정치성 복원이라는 역류(逆流)를 택한 김정란의 최근 의욕을 대변한다. 그러나 이렇게 “작가들을 파묻고 있는” 권력자들을 문학행태론적 시각으로 비판하고 냉소하기보다는, 좋은 작품들을 찾아 그것을 세밀하게 향수(享受)하고 표현하는 데서 김정란의 특장이 관철되리라고 나는 본다. 그도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창조’로서의 시에 건다”(30면)고.
3. 『그리고 신은 시인을 창조했다』는 남진우(南眞祐)가 오랜 동안 써온 시인론을 모아놓은 비평집이다. 다소 평면적인 체재에다가, 글 각각의 발표시기도 10년 간격을 넘나들어 치열한 현재형으로 평가되기에는 여러모로 난점이 많다. 더구나 이 비평집에는 남진우가 지닌 비평적 입장이나 현금의 시사적 지형 파악보다는 개개의 시 텍스트에 감응하는 섬세한 필치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번 비평집에서 비평의 존재론에 대한 메타적 탐색이나 논쟁적 성격이 빈곤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남진우 비평은 자신이 가장 매혹당한 텍스트에 대한 한없는 경의 표시이자 그것의 논리적 추인이다. 서정주에서 황동규, 정현종, 강은교, 유하, 윤의섭에 이르는 노장청(老壯靑) 시인 20명의 시를 세밀한 시선으로 분석한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사적 영역에서 받은 감동의 차원과 공적 영역에서 내리는 평가기준이 고스란히 겹쳐질 수 있음을 특유의 흡인력있는 문체로 보여준다. 특히 서정주나 황동규 같은 대가들에 대한 비평은, 비평가가 이 시인들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가를 일체의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서정주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 문학적 훈련을 쌓고 언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폭넓으면서도 은밀한 경험의 정련과 인식의 비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체감할 수 있게 해주는 행복한 시간으로의 초대이다”(14면) “(황동규의 『풍장』은─인용자) 무려 70채에 달하는 크고 작은 별들로 이루어진 찬란한 성운을 형성하고서야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32면)와 같은 절정의 상찬과 자기고백의 어조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비평가가 대상 텍스트에서 받은 감동의 열도와 그것을 논리화해보려는 비평적 자의식을 동시에 가진 실례를 접하게 된다. 특히 정현종을 다룬 「행복의 시학, 유출의 수사학」은 밋밋한 작가론적 구성을 탈피해, 정현종의 담론적 특성에서 “유출과 범람의 이미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의 영역을 확장한다는 의미인 동시에 우주의 총체적 성화(聖化)를 겨냥한 상상적 작업이기도 하다”(95〜96면)는 점을 읽어내는 역작이다.
그러나 비평가 자신의 매혹의 깊이가 비평의 심도를 낳는 경우와는 반대로 작가론의 일종으로 씌어진 글들에서는 그러한 문체적 떨림과 어조의 강렬함이 약화되고 있다. 시인의 진화론을 다룬 ‘오세영론’이나, ‘몸’이라는 담론적 차원의 관심을 시적으로 수용한 것을 평가한 ‘정진규론’, 그리고 그밖에도 자신이 적극적으로 택하고 구성한 텍스트가 아닌 경우, 거기 나타나는 비평적 어조는 그리 열렬하지 않다. 그만큼 남진우 비평은 그 스스로 텍스트에서 받은 매혹이 문체적 특성으로 그대로 나타나는 남다른 속성을 지닌다. (어느 비평가나 그렇겠지만 남진우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각별하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김형영이나 고진하처럼 종교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는 시인을 다룬 글에서 남진우의 비평적 개성은 단연 빛난다. 왜냐하면 거기서 남진우 개인의 사인적(私人的) 감각과 비평가로서의 심미적 문체가 행복하게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강은교의 시에서 “밀도높은 몰락과 허무와 비애의 파토스”(155면)를 읽고, 조정권에게서는 “우주의 영적 의미를 탐구하고자 하는 노력”(182면)을, 김영석에게서는 “작아짐-갇힘, 내려감-묻힘의 상상력”(201면)을 섬세하게 읽어낸다. 또한 윤의섭의 시에서 “죽음의 현상학, 삶의 고고학”(332면)을 읽고 그것의 방법론을 ‘묘사’와 ‘우화’로 풀어내는 안목과 솜씨는 참으로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그런데 다소 엉뚱하게도, 완성도와 심미성에서 일급의 위상에 놓이는 이같은 비평들과는 달리, 이번 비평집에서 우리의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는 것은 다름아닌 ‘서정주론’의 보유로 씌어진 ‘고은 비판’과 ‘김언희론’의 보유로 실린 ‘김정란 비판’이다. 스무 개의 정연한 논리 속에 불편하게 삽입되어 있는 이 두 편의 글은 당연히 이 책의 중심이 아니다. 원래 ‘보유(補遺)’라는 것이 주류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독자들의 무의식은 이 ‘보유’를 향한다. 이 두 편의 보유가 관심을 끄는 일차적인 까닭은, 남진우 비평의 특장이라 할 수 있는 섬세한 감각과 텍스트에의 충실성 그리고 심미적 문체와는 다른 지점에서 씌어졌기 때문이다. 이 글들은 상대를 향한 강렬한 비판과 냉소와 적대감의 표현을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하고 있다. 이는 언뜻 보면 남진우에게 예외적인 언술방식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하지만, 나는 이같은 다소 파격적인 비판적 어조와 기획이 어느정도는 남진우 비평의 현재적 필연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먼저 고은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자. 남진우는 이 글에서 미당의 어처구니없는 정치적 오류를 비판적으로 적시하는 일련의 논의를 “일차원적이고 즉물적인 반응”(30면)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이 매혹당한 텍스트에 대한 비판을 못 견디는 일종의 자기방어이자 그 텍스트에 대해 비판적인 타자들에 대한 불관용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특히 고은의 「미당 담론」이 “선배 시인의 강한 영향력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는 후배 시인의 ‘어두운 욕구’”(27면)라거나 “시적 후예로 출발해서 시적 아비의 살해를 천명했다”(27〜28면)는 냉소와 독설은 매우 이례적이다. 물론 이 글에서 남진우가 제시한 고은 비판의 준거 중 전거의 불충실성 같은 것은 예리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거기서 한발 나아가 고은을 두고 정신분석적 차원의 비판을 한다든가, “미당에게서 전수받은 시적 문법의 틀은 거의 변함없이 유지한 채 거기에 민중주의적 포즈를 가미”(30면)했다는 등의 품평을 하는 것은, 그 스스로 경계한 ‘서로의 복잡한 애증관계’만 재생산하는 데 일조할 뿐이다. 이러한 어조는 미당을 “어떻게 균형감있게 수용하여 우리 문학의 자산으로 활용할 것인가 하는”(26면) 과제와도 거리가 있다.
고은에 대한 비판은, 남진우가 매혹의 대상이 되는 작품에 대한 열렬한 추인 못지않게 적대적인(미학적 차원이든 정치적 차원이든) 대상에 대한 냉소 또한 강렬하게 갖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사례로도 읽힐 만하다. 사실 남진우 비평에서 “1980년대를 휩쓴 민중과 해체의 주역들도 결국은 상아탑이 키운 사생아들이 아닌가”(99면) “리얼리즘을 신봉하는 그들의 시가 관념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뼈아픈 역설”(231면) “우리 사회를 보다 진보적인 방향으로 추동하고 싶어하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 보기엔”(241〜42면) 같은 ‘민중성·리얼리즘·진보’에 대한 냉소적 표현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다른 글은, 김정란이 행한 ‘절차의 부도덕성’과 김정란이 보여준 ‘김언희 시에 대한 비판의 내용’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 비판은 그 나름의 일정한 타당성과 논리 정합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소녀적인 자기애와 관념 편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를 주로 쓰고 좋아하는 김정란”(327면)이나 “김씨에게 페미니즘은 자신과 자신이 편애하는 작가 시인들에게 그럴싸한 후광을 부여하고, 싫어하는 작가 시인을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데 더없이 유효한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330면) 같은 표현에 이르면, 남진우처럼 이지적인 비평가에게도 칼날 같은 적의(‘냉소’ 차원이 아니다)가 내재해 있다는 사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 외의 효과는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극심한 긴장과 피로가 요구되는 일종의 ‘인물비평’에 남진우가 자신의 역량을 쏟고 있는 것은, 입장 차이의 첨예함과 상대에 대한 가차없는 적의가 어지럽게 얽혀 있는 현재 우리 사회의 담론적 현실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이 비평의 존재론과 어긋난다라는 생각의 반영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비평가에게 맡겨진 것은 ‘주저하며 세계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비평가는 발견에 봉사하는 사람이지 심판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주와 비의 세계에서」, 『문학동네』 2001년 여름호 381면)라는 지론을 밝힌 바 있다. 그 점에서 나는 남진우 비평이 여전히, ‘심판’의 언어보다는 ‘발견’의 언어에서 순금의 권역을 형성할 것이라고 본다. 그의 비평은 장인(匠人)의 비평이지 논객의 그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진우가 자신의 비평집에 이와같은 두 편의 글을 삽입해넣은 것은, 앞으로 그가 우리 문학의 논쟁형식에 어떻게든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자기암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합리성과 탈주술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서구 중심의 믿음들에 대한 미학적 비판과 그것의 심미적 표현이 그의 비평의 근본적 흡인력이라는 점은 재차 지적해야겠다.
4. 우리는 세련된 미학적 시선으로 좋은 작품에 대한 내재적 비평을 꾸준히 해왔던 비평가들의 적공(積功)을 숱하게 기억한다. 그들은, 낱낱 작품의 전언과 미학을 적출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안목이 부재한 ‘좋은 비평’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비평의 최종심급은 작품을 ‘보아(읽어)내는 능력’에 있다는 것을 묵묵히 실천해왔다. 우리가 살핀 두 사람의 비평가는 자신만의 단단한 안목과 주관, 그리고 독자적인 언술방식으로 이러한 담론적 실천을 해온 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는 텍스트에 이론적 체계를 부여하려는 ‘랑그’(langue)가 아니고, 스스로 텍스트가 되려는 자의식을 숨기지 않는 ‘빠롤’(parole)이다. 그 점에서 이 비평집들은 이같은 비평의 존재론을 증언하는 최상의 심미적 텍스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비판적으로 눈여겨본 것 중의 하나는, 두 사람의 비평가가 자신이 매혹된 텍스트에 대한 헌사와 그 반대편 입장에 대한 냉소적 비판 사이에 공히 보여준 확연한 비대칭적 구조이다. 또한 두 사람의 글에(일부의 글이기는 하지만) 암암리에 깃들여 있는 공격적 자기방어 심리 역시 그들의 비평을 분석가가 아닌 논객의 그것으로 이끄는 요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비평은 비평가가 대상 텍스트에 매혹되는 높은 열도가 좋은 비평에 유력한 전제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자신의 미학적 프리즘에 포획되지 않는 불편한 관점들에 대해 비평가가 적절한 이해와 관용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는 가장 최상급의 범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비평은 문학에 대한 자의식이자 반성적 행위의 소산이다. 따라서 비평이 타자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냉소적이 될 때, 우리는 ‘차이’에 인색하다는 우리 비평의 고질적 아킬레스건을 치유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비평적 주체들의 다양한 미학적 분화를 승인하는 동시에, 결국 “타자의 의식을 객체가 아니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주체”(바흐찐)로 바라보는 이른바 ‘대화성’을 증폭시킬 필요성과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된다. 그것과 성실하게 마주칠 경우 ‘비평의 위기’라는 상투적이고 자기모멸적인 수사는 그 한시적 효용성조차 지켜내기 힘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