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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
자본주의의 기원과 위기
로버트 브레너
캘리포니아대학 교수, 역사학 rbrenner@ucla.edu
정성진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원장 seongjin@nongae.gsnu.ac.kr
때: 2001년 2월 7일
곳: 창작과비평사 회의실
장성진 먼저 바쁘신 중에도 방한하여 대담에 임해주신 데 감사드립니다.1 선생은 세계적으로 저명한 맑스주의 역사학자로서, 특히 1970년대 말에 재개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논쟁의 주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976년 『과거와 현재』(Past and Present)지에 발표된 선생의 논문 「공업화 이전 유럽에서의 농촌의 계급구조와 경제발전」(Agrarian Class Structure and Economic Development in Pre-Industrial Europe)이 바로 제2차 이행논쟁을 야기했지요. 그 논문에서 선생은 자본주의의 발흥에 계급투쟁이 수행한 역할을 강조했는데, 1950년대에 벌어진 돕(M. Dobb)과 스위지(P. Sweezy) 사이의 제1차 이행논쟁에서 돕도 영주와 농민 간의 투쟁을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원동력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행논쟁에서 선생과 돕의 입장이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이행논쟁에서 돕과 구별되는 선생의 독자적 기여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비자본주의적인 농민의 속성
브레너 우선 돕은 매우 독창적인 학자이며, 그의 저작은 분명히 나의 작업에서 기본적 원천의 하나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돕 이전의 맑스주의 전통에서도 아담 스미스(Adam Smith) 식으로 이행과 경제발전을 설명하는 방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도시와 상업은 본질적으로 초기 자본주의적이라고 간주되고, 농민과 영주는 시장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존지향적이라고 가정되었죠. 그러나 농민과 영주가 일단 상업을 하고, 상업에서 이득을 확보할 수 있게 되면, 그들도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인 행위자로 전환되거나 스스로를 그렇게 전환한다고 주장되었습니다.
돕의 기여는 사회적 생산관계 혹은 계급관계를 논의의 중심에 위치지은 것인데, 이는 커다란 함의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돕은 이를 위해 『자본론』 제3권 중 상인자본, 이자를 낳는 자본, 자본주의적 지대의 기원등을 역사적으로 고찰한 장들에서 이루어진 맑스의 논의를 전면에 부각시켰습니다. 돕의 주된 논지는 지배적인 사회적 생산관계 혹은 계급관계가 개인과 계급의 행동을 규정하기 때문에 봉건경제는 자본주의 경제를 비롯한 다른 모든 생산양식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발전유형을 갖는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이 가져온 하나의 근본적 결과는, 돕 자신은 이에 대해 오히려 약간 애매하지만, 봉건제하에서의 도시와 상업의 의미 자체와 의의는 자본주의하에서의 그것과 아주 다르다는 사실이 이해된 것입니다. 실제로 상업과 도시는 봉건제와 전적으로 양립가능했고, 상인들은 봉건질서에 속박되어 있었죠. 돕은 상업의 발흥이 동유럽에서는 봉건제의 강화와 병행된 반면, 서유럽에서는 봉건제의 약화와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돕과 맑스의 이러한 관점은 나 자신의 견해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이었습니다.
나의 견해가 돕과 어떻게 다르냐고요? 우선 나는 돕의 접근을, 그의 전제와 양립한다고 보지만, 돕 자신은 수용하지 않았을 방식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즉, 봉건제와 자본주의 그리고 모든 생산양식에 대해 사회적 생산관계 개념을 확장하여, 착취자와 피착취자 간의 수직적 관계뿐만 아니라 착취자들 상호간, 피착취자들 상호간 또는 직접적 생산자들 상호간의 수평적 관계도 포함시켰습니다. 특히 봉건제에 대해, 봉건영주들이 완전한 생존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농민들을 경제외적 강제를 통해 착취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분권적인 집단들로 조직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요점은 이들 봉건영주 집단이 서로 수평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서로 부와 소득을 재분배하는 수평적인 정치군사적 경쟁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것을 ‘정치적 축적’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봉건제의 진화, 예컨대 시간이 경과하면서 점점 대규모화한 영주집단들 혹은 봉건국가가 출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선생이 지적했듯이, 나는 계급투쟁이 봉건제의 운명을 결정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돕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돕과 나의 해석은 근본에서 아주 다릅니다. 돕의 경우,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농민이 봉건영주를 타도하고 자신들의 자유와 재산을 확보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는 이것이 일단 이루어지면 상업의 충격이 농민층을 분해하여 농민층으로부터 농업자본가와 농업임금노동자가 성립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즉, 상업과 도시의 충격이 농민경제를 자본주의 경제로 전환시킨다는 것이지요. 나는 이러한 돕의 주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설명이 역설적으로 스미스주의를 뒷문으로 다시 불러들이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돕은 농민소유의 사회적 소유관계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돕과 달리 나는 농민은 영주와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비자본주의적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나는 상업과 도시가 존재하게 되면 농민이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트로 전환된다는, 완전히 스미스적인 견해를 부정합니다. 농민들이 비자본주의적인 것은 그들이 생산수단뿐만 아니라 완전한 생존수단, 즉 자신들을 재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소유해 시장에 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존수단의 소유’라는 사회적 소유관계는 근본적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농민들을 시장, 특히 경쟁의 압력으로부터 보호하기 때문이죠.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농민들이 상업의 기회를 갖고 있으며 스스로 시장에 포섭됨으로써(involving) 생기는 이득의 일부를 확보할 수 있지만, 그들은 시장에 의존하고(dependent) 있지 않으므로, 특화를 해야 할 강제(imperative)하에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구별은 한편으로는 시장기회와 시장포섭,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의존과 시장강제(경쟁)입니다.
농민들은 경쟁으로부터 보호되어 있기 때문에, 상업으로부터 이득을 극대화하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자본주의적인 선택 이외의 다른 선택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농민들은 다른 모든 것이 동일하다면 상업에서 충분한 이득을 얻으려 할 테지만, 이를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댓가, 즉 완전히 특화하는 것의 댓가가 너무 큽니다. 일단 특화하게 되면 농민들은 경쟁의 압력에 종속되기 때문이죠. 농민들은 경쟁의 강제에 종속되면 이윤을 극대화해야만 하며, 다른 우선적인 것들을 성취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농민들은 자신의 잉여를 상품화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생존을 위해 필요한 모든 재화와 써비스의 생산에 자신의 토지와 노동 및 도구를 바침으로써 ‘안전 우선’을 추구합니다.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농민들은 그렇게 행동합니다. 농민들은 불확실한 수확에 좌우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식량가격이 급등하고 기아에 직면하기 때문이죠. 또다른 이유들도 있습니다. 이는 농민들이 사회경제적 생활에서 경쟁에 좌우되고 싶어하지 않는 것과 관련됩니다. 농민들은 병들거나 늙었을 때 성인으로 살아남은 자녀들에 의지할 수 있기 위해 대가족을 원합니다. 그런데 대가족이 반드시 ‘경제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경쟁에 노출되었을 때 이를 유지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농민들이 자신의 자식들이 각각 가정을 형성할 수 있도록 상속시 자신들의 보유지를 세분하는 데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보유지의 세분화 역시 비경제적이며 경쟁적 생산과는 양립하기 힘듭니다. 보유지의 세분화에 의존하는 조혼 관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점은 상업이 존재하게 되었을 때, 농민들은 그들의 처지와 목표라는 견지에서 보면 아주 의미있는 일련의 선택, 즉 시장으로부터의 보호와 완전 특화의 기피라는 선택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제 전체의 기초에 대해 갖는 함의는 상업의 기회와 도시가 존재하게 되었을 때 농민들이 자본가와 임금노동자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특화하지 않는 데 따른 생산력의 느린 성장, 점점 축소되는 보유지 규모, 인구증가, 노동생산성의 저하, 이주지역의 확대 등 분명히 비자본주의적인 발전경로를 걷는 농민경제로 귀결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일반적으로 전(前)자본주의적 행위자들, 특히 농민들이 자신을 현재 상태대로 재생산하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본주의 이행에서 핵심적인 것은 맑스가 이른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라고 부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행에서 하나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영주들이 경제외적 강제를 통해 농민들로부터 잉여를 수탈하는 능력을 제거하는 것이며, 이는 농민의 저항에 의해 성취될 수 있다는 돕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또하나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데, 이는 농민이 생존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농민들이 ‘시장의존적’으로 되어야만 자본주의가 출현할 수 있습니다. 즉, 농민들이 경쟁에 노출되어야만 합니다. 방금 농민들이 그들의 생존수단에서 분리된다고 말했는데, 생존수단에서 핵심적인 것은 농민들을 경쟁으로부터 보호하는 토지입니다. 왜냐하면 토지는 농민들이 시장에 가지 않고도 투입재(inputs)를 구할 수 있게 해주며, 그들이 생존을 위해서 이윤을 극대화할 필요성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 선다면, 우리는 농민들이 생존수단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들이 시장의존적으로 되는 선택을 하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돕의 잘못은, 상업의 기회가 농민들 자신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이른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근본적으로 실현시킴으로써, 특화된 자본가들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을 가져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이른바 자본의 원시적 축적에서 결정적인 부분은 농민들이 그들의 생존수단으로부터 폭력적으로 분리된다는 것입니다.
농민들은 일단 생존수단으로부터 분리되면 차지농이 됩니다. 그들은 여전히 도구와 같은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만, 주요한 투입재의 하나인 토지는 시장에서 구매해야만 합니다. 즉 임차해야만 합니다. 이제 농민들은 생산물을 경쟁적으로 판매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이제 경쟁에 종속되며, 더이상 안전 우선으로 선택을 할 수 없고, 대가족을 가질 수도 없으며, 보유지를 세분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이윤을 극대화하고, 상업 이득의 극대화를 추구해야만 합니다.
요컨대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영국에서 일어났는데, 그때 농민들은 경제외적 강제를 통한 영주의 잉여착취 체제를 붕괴시켰으나, 자신들의 생존수단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을 획득할 수는 없었습니다. 도리어 영주들은 농민들이 완전한 소유권을 획득하는 것을 저지하고 그들을 생존수단으로부터 분리시켜 시장의존적으로 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새롭게 출현한 차지농들은 생존을 위해 자본가들처럼 행동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이윤을 극대화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특화를 해나가고, 자본을 축적하고, 최신의 기술혁신을 이뤄내야만 했죠. 그 결과 영국 농촌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프랑스에서도 농민은 농노제를 패퇴시켰지만, 영국 농민과는 달리 프랑스 농민은 생존수단을 완전하게 획득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상업이 존재했지만 자본주의의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중세와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생산, 느린 생산력 성장, 보유지의 세분화, 인구증가, 이주지역의 확대, 노동생산성의 정체 등이 계속되었습니다.
자본주의의 발생은 계급투쟁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
장성진 선생은 방금 자본주의 이행에서 직접생산자가 생산수단이 아니라 생존수단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맑스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직접생산자가 생산수단에서 분리되는 과정으로 정의했습니다. 선생이 생산수단 대신 생존수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브레너 내가 직접생산자의 생존수단─이는 직접생산자들이 생존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으로서, 그들이 자립할 수 있게 하거나 그들을 경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것들을 가리킵니다─으로부터의 분리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생존수단의 소유로부터 생존수단으로부터의 분리로의 전환, 즉 직접생산자의 시장의존으로의 전환이 결정적인 전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생존수단으로부터 분리된 사람들도 농기구·가축·건물 등과 같은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생존수단을 완전히 소유─이는 토지소유를 필연적으로 요구합니다─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의 일부를 시장에서 구매해야만 하며(예컨대 토지의 임차), 그러므로 생존을 위해서 경쟁적으로 판매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발생에서 핵심적인 것은 경쟁에 종속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위자들이 자본가들처럼 행동하도록 하는 데, 즉 특화·기술혁신·축적에 의해 행위자들이 이윤을 극대화하도록 강제되는 데 핵심적인 것은 경쟁에 종속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자본의 원시적 축적에서 흔히 강조되는 측면은 임금노동자의 형성입니다. 그러나 이 측면은 중요하기는 해도, 생산자들이 생존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경쟁에 종속된다는 측면보다는 덜 본질적입니다. 생산자들이 일단 경쟁에 종속되어야 비로소 임금노동자로 구성된 자본주의적 노동시장이 출현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 봉건제하에서는 자본주의 없이도 임금노동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임금노동은 봉건제하에서도 농민들이 자신의 보유지를 과도하게 세분하여 급기야 생존수단과 생산수단을 모두 결여하게 될 경우 흔히 존재했습니다.
장성진 그렇다면 임금노동이 자본주의의 본질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브레너 그렇습니다. 물론 임금노동은 근대자본주의에 중심적이고 규정적인 특징이기는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자본주의를 실제로 형성시키는 것은 무엇보다 직접생산자의 생존수단으로부터의 분리와 시장의존이고, 궁극적으로 그들이 경쟁에 종속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일단 그렇게 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생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장성진 선생은 전(前)자본주의 사회 내부에는 그 어떠한 내재적인 고유한 경향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또 선생은 영국에서 자본주의가 발생한 것을 봉건제하에서 이루어진 계급투쟁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설명합니다. 선생은 세계사에서 자본주의가 출현한 것을 역사적 필연성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선생의 논리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출현은 하나의 우연적 사건입니까?
브레너 내가 봉건제하에서 자본주의로 향하는 내재적 경향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유는, 내가 스미스주의를 거부하고 그것을 사회적 소유관계에 대한 접근으로 대체한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스미스주의는 자본주의가 봉건제에 내재해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상업과 도시는 그 자체 자본주의적이며, 봉건영주와 농민을 자본가로 전환시킨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나의 견해는 앞서 강조했듯이 이것과 아주 다릅니다. 영주의 잉여착취와 농민소유자들에 기초를 둔 경제가 존재한다면, 특정한 진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소유관계가 유지되는 한, 영주들은 정치적 축적에 매달릴 것이며, 농민들은 생존을 위한 생산과 안전우선주의를 선택하고 보유지를 세분하며 대가족을 가질 것입니다. 영주와 농민이 영주적 잉여착취와 농민소유의 결과로 이러한 ‘재생산 규칙’(rules for reproduction)을 선택하는 한, 무기와 사치재에 대한 영주들의 필요에 부응하면서 점점 대규모화하는 국가와 도시, 농촌에 무거운 부담이 되는 도시에서의 비생산적 노동의 증가, 보유지의 세분화, 인구증가, 노동생산성의 저하와 느린 생산력 발전─이들은 결국 봉건위기를 가져옵니다─등으로 특징지어지는 봉건제의 장기적 발전유형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러한 봉건위기를 돌파하는 사회적 소유관계의 변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경제외적 강제에 의한 영주착취와 농민소유 체제가 유지될 것이며 이전과 동일한 장기적 발전유형이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사회적 소유관계의 변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영국에서 자본주의가 발생한 것은 중세말 봉건제의 위기국면에서 이루어진 계급투쟁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 주장했습니다. 농민들은 봉건지대와 봉건적 속박을 줄이고, 자유를 얻고 소유권을 확보하기 위해 농노제 타도를 원했습니다. 농민들은 부분적으로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영주들이 더이상 경제외적 강제를 통해 잉여를 착취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영주들은 곤경에 빠졌습니다. 영주들의 유일한 희망은 경제적 방식으로 지대를 수취하기 위하여 농민들을 생존수단에서 분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영주들은 스스로 경제외적 강제에 의한 잉여착취를 상업적 차지(借地)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 아니라, 농민들의 성공적 저항의 결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전환은 처음에는 영주에게 아주 나쁜 선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봉건위기의 여파로 인구가 아주 적었고, 도시로부터의 수요도 아주 작아서, 상업적 지대율이 매우 낮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것은 영주들의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것말고는 농민들이 경제외적 강제에 의한 잉여착취 체제를 타도하는 데서 더 나아가 토지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을 획득하도록 허용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영주들은 자신을 재생산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상의 과정에서 우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중세 영국에 존재했던 봉건제의 매우 특수한 형태와 계급들의 세력균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들이 매우 특수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오로지 영국(과 아마도 네덜란드 북부)에서만 봉건위기와 이에 수반된 계급투쟁으로부터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이죠. 대부분의 다른 지역에서는─절대주의, 즉 서유럽 대부분의 조세관청국가(tax-office state)와 동유럽의 재판농노제에서 보듯이─봉건위기와 계급투쟁에도 불구하고 경제외적 강제에 의한 잉여착취와 농민소유가 이러저러한 형태로 존속했으며, 따라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봉건적 발전유형과의 단절도 없었습니다.
이로부터 세계사를 일반화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전자본주의 지배계급과 농민은 농민을 생존수단에서 분리시키고 시장에 의존하게 하며 경쟁에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즉 이른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전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의 출현은 통상적인 발전은 아니었습니다.
자본주의로의 이행에서 ‘새로운 상인’의 역할
장성진 이제 선생의 근작 『상인과 혁명』(Merchants and Revoluti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3)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보지요.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은 자본주의 이행논쟁에서 표명된 선생의 주장이 이 책의 주장과 근본적으로 모순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 이행논쟁에서는 영국 농촌에서 일어난 계급관계의 변혁이 자본주의 발생의 물꼬를 텄다고 주장한 선생이, 『상인과 혁명』에서는 새로운 상인계층이 자본주의 발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는 지적이지요. 선생이 이 책을 통해 자본주의 이행에서 상인들이 수행한 혁명적 역할을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의 기원을 농업관계의 변혁에서 찾는 선생의 이전 입장의 변화를 뜻하는 것입니까?
브레너 나는 『상인과 혁명』 말미에 첨부한 후기에서 『상인과 혁명』의 결론과 이행 문제에 관한 나의 이전 결론 간의 관계를 해명한 바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 논의를 다시 되풀이할 시간은 없지만, 17세기 영국혁명을 낳은 정치적 갈등이 영국에서의 자본주의 이행의 직접적 소산임을 간략하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영국에서의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영주와 농민 간의 계급투쟁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발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봉건지배를 타파했으며, 영주들은 자신들을 영주로서 계속 재생산할 수 있기 위해 농민들을 생존수단에서 분리시켜야만 했습니다. 요점은 영주들이 농민소유자들을 자신들에게 상업적 지대를 지불하는 시장의존적인 자본주의 차지농으로 전환시켰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영주는 상업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주는 차지농의 자본주의적 발전에 의존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많은 이득을 보았습니다. 즉, 영국에서 자본주의는 지주제의 외피 속에서 발전했습니다.
지주는 더이상 지대를 수취하기 위해 폭력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으며, 폭력이 왕정의 수중에 독점되는 것을 즐겁게 지켜보았습니다. 지주들의 이상은 폭력을 독점한 왕정이 자신의 사유재산을 방어해주고 자신의 자본주의적 방식으로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당시 왕정이 거대한 봉건영주였고, 그렇게 기능했다는 사실입니다. 왕정은 자신에 대한 정치적 지지의 댓가로서, 내가 ‘정치적으로 형성된 사유재산’(politically -constituted private property)이라고 말한 것을 확대함으로써, 즉 특권을 봉건적 방식으로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독자적 기반을 구축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특권과 ‘정치적으로 형성된 사유재산’의 재원 조달방법인 ‘수탈’ 혹은 잉여착취는 당연히 ‘경제외적’ 성격을 지녔으며, 이는 왕이 폭력을 독점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왕에 대한 최대의 지지는 ‘정치적으로 형성된 사유재산’─이 경우에는 십일조 등의 재원으로 유지되던 관직─의 과실을 향유하던 교회령 관직 보유자들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나─이것이 핵심인데요─왕에 대한 핵심적 지지는 또 왕이 부여하는 해외무역 독점권에 의존하던 런던의 거대 상인들로부터 나왔습니다. 이러한 특권 때문에 상인들은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이 가능했고, 이를 통해 이윤을 획득할 수 있었죠. 간단히 말하면, 런던의 상인계급은 왕의 가장 강력하며, 신뢰할 수 있는 지지자들이었습니다.
17세기 영국혁명으로 귀결된 갈등은 자본주의적 지주계급과 왕정 간의 갈등이었습니다. 왕정은 영국에서 절대주의 국가를 수립함으로써 자신의 독자적 권력을 구축하려 했으며, 지주의 사적 소유를 위협했습니다. 특히 왕은 지주의 동의 없이 세금을 징수하려 했습니다. 왕은 지주에 맞서는 대항수단으로서 교회를 키웠습니다. 왕은 마치 봉토처럼 부양자들과 지지자들로 자리가 채워지는 관직을 창출하려 했습니다. 왕은 외국과의 동맹을 추구하여 지주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고, 궁극적으로는 절대주의 국가를 구축하여 지주의 주요한 대의기관인 의회를 제거하려 했습니다. 17세기 영국혁명은 절대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왕의 시도를 지주들이 패퇴시키고, 자본주의적 소유와 의회주권의 확립을 통해 자본주의적 지주에 의해 경영되는 자본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농업에서의 이행에 관한 나의 생각들과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장성진 그렇다면 선생이 『상인과 혁명』에서 ‘새로운 상인’(new merchants)으로 표현한 계층은 이 시기에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브레너 우선 런던의 전통적 상인계급의 핵심은 왕이 부여하는 무역특권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전자본주의적 상인 일반에 관한 나의 분석과 부합하는 것인데, 이들은 다른 모든 구질서 지역에서 대다수 상인들처럼 구체제를 지지했으며, 전혀 혁명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반혁명적이었습니다.
내가 연구한 다른 상인집단을 나는 ‘새로운 상인’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들은 특권기업에서 배제된 상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종 상점주인이나 선장에서 출발했는데, 아메리카 식민지를 개발하여 재산을 축적했습니다. 그들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플랜테이션 생산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동인도회사 같은 전통적 상인의 독점에 도전했습니다. 이 새로운 상인들에게서 일반적으로 중요한 점은 이들이 전자본주의 사회의 상인계급과는 전적으로 다른 유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질서를 대표하는 지주와 유사했습니다.
정말이지, 이 상인들은 혁명적이었습니다. 새로운 상인들과 런던의 상점주인들 및 런던의 수공업자들이 결합해, 의회에 대표자들을 보낸 지주계급과 동맹을 맺었는데, 이러한 결합과 동맹 덕분에 의회세력은 왕을 패퇴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회의 지주들과 런던의 비회사 상인(non-company merchants), 무역업자, 상점주인 및 수공업자들 간의 동맹을 구축하는 데 있어 새로운 상인들의 결정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나의 이전 주장들과 양립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선 투쟁은 의회의 계급들이 주도했습니다. 그것은 절대주의 국가의 수립을 의도하는 봉건 왕정에 대항하여 자본주의적 지주계급의 권력과 재산을 보장하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투쟁의 결과 17세기말경 (네덜란드를 제외한다면) 유럽에서 유일하게 자본주의적 지배계급과 자본주의 국가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유럽의 다른 모든 곳에서 지배계급은 전자본주의적이거나 봉건적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동유럽처럼 새로운 봉건적 농노제의 영주이거나, 절대주의 서유럽처럼 절대주의적 조세로부터 이득을 보는 관직을 보유한 귀족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곳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급진적인 도시계급과 이들의 반항이 중세 및 근대초에 걸쳐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이 계급들은 자본주의나 자본주의 국가를 견고히하는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일어나지 않아, 자본주의적 지주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새로운 상인들은, 몇가지 흥미로운 방식에서 그 자신이 자본가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들은 북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에서 담배와 설탕 플랜테이션의 개발에 종사함으로써 자본가가 되었습니다. 방금 전에 말했듯이 그들은 분명히 표준적인 상인들은 아니었으며, 상인계급 주류에 속하지 않았고, 새로운 질서를 대변했습니다.
영국혁명의 자본주의적 성격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 지주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이는 그들과 동맹을 맺은 새로운 상인들의 자본주의적 성격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영국혁명에 대한 나의 해석이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나의 해석과 양립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자는 후자의 적용입니다.
제3세계의 자본주의 맹아론의 문제점
장성진 그러면 제3세계에서의 자본주의 발생 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선생은 봉건적인 사회적 소유관계 태내에서 자본주의 맹아가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상당수 좌파 역사학자들은 19세기말 서유럽과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이 시작되기 전 한국에서도 봉건제의 틈새에서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같은 자본주의의 맹아가 제국주의의 착취와 억압에 의해 유린됨으로써 한국경제의 저발전과 종속이 초래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선생은 이처럼 서방 제국주의 침략 이전 제3세계에서 자본주의의 맹아가 존재했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브레너 글쎄요. 나는 한국처럼 내가 연구하지 않은 나라의 특수한 역사발전 사례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3세계에서 ‘자본주의 맹아’(capitalist sprouts) 혹은 ‘시초 자본주의’(incipient capitalism)가 존재했다는 생각에는 흔히 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점은 상업과 도시의 발전을 자본주의적 발전 자체와 흔히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상업과 도시가 자본주의를 형성시킨다거나, 자본주의를 반드시 가져온다고 보지 않습니다.
우선, 도시와 상업은 수많은, 아마도 대부분의 전자본주의 농업사회를 매우 왕성하게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전자본주의 농업사회와 전적으로 양립할 수 있습니다. 전자본주의 농업사회의 지배계급은 통상 농민에게서 폭력적으로 잉여를 수취하며 군수품과 사치재를 구입하기 위해 그 잉여를 사용합니다. 그리하여 도시 수공업자 계급은 전자본주의 지배계급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성장하며, 도시 상인계급은 지배계급과 도시 수공업자의 중개자로서 식량과 농업 원자재를 완성된 사치품 및 군수품과 교환하기 위해 출현합니다. 기타 재화와 써비스의 공급자들이 수공업과 상인의 수요에 조응하여 출현합니다. 한편, 수공업자와 상인계급은 보통 다른 이들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이윤을 확보할 수 있게 하는 경제외적 영업권을 기초로 하여 자신들을 재생산합니다. 이러한 경제외적 권리를 부여하고 보호하는 것은 지배계급이며, 어떤 경우에는 강력한 자치도시입니다. 그래서 공업과 상업 및 이들을 보조하기 위한 금융써비스는 전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아주 통상적으로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 경제행위자들 중 시장의존적이면서, 자유롭고, 경쟁의 압력에 대응할 수밖에 없으면서 또, 이를 위해 이 사업에서 저 사업으로 이동할 수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구체제에 반대했던 수공업자와 상인들은 극소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질서가 부여한 특권에 의존하여 자신들을 경쟁에서 보호하고 그럼으로써 자신들을 재생산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농촌에서 농민들은 그들의 경작지가 생존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하게 세분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상업활동에 깊이 끌려들어가는 경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생산자들은 자본가로서는 기능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항상 매우 궁핍했으며, 상업작물과 영세수공업 같은 노동집약적이고 생산성이 낮은 벌이를 해서 생존했습니다. 이들 중 누구도 잉여의 체계적 재투자를 통해 더 많고 더 좋은 생산수단의 구입, 발전에 필수적인 생산성 상승, 그리고 상대적 잉여가치의 증가를 이뤄내지 못했습니다.
장성진 제3세계에서는 도시 상공업뿐만 아니라 농촌 상공업에서도 자본주의 맹아를 발견하기 힘들다는 말씀인가요?
브레너 그렇습니다. 첫째, 모든 전자본주의 세계에서 상업과 도시의 발전과 함께 자본주의 맹아가 거의 보편적으로 성장했으며, 제국주의의 침략이 없었다면 완전히 만개된 자본주의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급진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면, 맑스가 아닌 아담 스미스의 대열에 서게 됩니다. 봉건영주나 절대주의 국가와 같은 기생적 정치세력이 방해하지 않는 한, 상업과 도시가 발흥하면 자본주의 발전이 필연적이라고 본 사람은 바로 아담 스미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맹아라는 개념이 함축하는 것은 농업사회에서도 상업과 도시가 거의 보편적으로 존재하며, 스미스의 관점에 따르면, 이들이 자본주의적 발전으로 인도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세계 어디에서나 보편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행과 발전에 관한 나의 연구의 대부분이 반박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와같은 주장입니다.
둘째, 나는 ‘도시와 상업’이라는 데 대해서는 대립되는 것으로서, 어떤 곳에서는 진정한 자본주의적 발전이 농촌지역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토꾸가와(德川) 시기 일본 농촌지역에서 진정한 자본주의적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가설은 그럴듯하게 보입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한 핵심적 요소를 구성한 것은 양조업·직물업과 같은 농촌공업을 조직하는 데 종종 관여한 자본주의적 농업가였다는 가설 역시 그럴듯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와같은 발전은, 역사적으로 또는 현재의 다른 개발도상국 세계에서도 일어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회적 소유관계의 변혁에 따른 자본주의적 발전과, 시장의존과는 대립되는 농촌생산자의 시장포섭을 낳는 단순한 상업의 성장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적 발전의 관계
장성진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유럽을 제외한 다른 세계는 이에 대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선생은 중심부에서의 자본주의의 출현을 제3세계 수탈의 산물로서 설명하려 했던 월러스틴(I. Wallerstein)이나 프랭크(A.G. Frank) 같은 세계체제론자 혹은 종속이론가들을 신스미스주의자들(Neo-Smithians)이라든지 제3세계주의자들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선생의 설명에서 자본주의의 발생이 유럽적 사실,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영국적 사실, 즉 영국 농촌의 사실로 간주되는 것은 부인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선생은 정말 제3세계 민중에 대한 착취가 없었어도 서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지요?
브레너 글쎄요. 선생은 내가 자본주의는 영국 농촌의 환경에서, 즉 오로지 영국적 환경에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고 비난하시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런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영국자본주의의 발전이 (오해를 야기할 수 있는 용어인) 상업자본주의라고 불리는 전유럽적 규모의 상업체제와 분업이 이미 존재했으므로 가능했음을 항상 강조해왔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중세와 근대초 유럽에서는 매우 정교한 국제적 상업과 금융 및 공업 체제가 존재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정교한 분업체제─이를 ‘세계체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의 성립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플랑드르 지역과 북서유럽 및 이딸리아의 다른 곳에서 공업생산자들은 유럽 전체의 지배계급을 위한 고품질 사치재와 군수품의 생산에 자신들을 특화시켰습니다. 그들은 그대신 영국에서는 양모와 같은 원료를, 씨칠리아 등지에서는 곡물을 공급받았습니다. 그런데 월러스틴 등이 범한 잘못은 이 체제가 아예 완전히 자본주의적이라고 생각하고, 이 체제가 직접적 생산자들의 체계적 특화와 잉여의 재투자(자본축적) 및 체계적 기술혁신을 통해 자본주의적 발전으로 나아가는 내재적 경향을 지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체제는 어디에서든 전자본주의적인 사회적 소유관계─봉건영주, 경지를 소유하고 있는 농민, 특권회사 상인, 길드의 수공업자─에 기초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발전을 낳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만약 세계체제─분업에 기초한 무역─가 내재적으로 자본주의적이었다면, ‘중세 세계체제’를 경유한 자본주의 발전 같은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근대 초기에 출현한 세계분업, 즉 월러스틴이 ‘근대 세계체제’라고 말한 것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그 어떤 세계체제로부터도, 즉 중세 세계체제로부터도, 혹은 그것에 뒤이어 나타난 근대 세계제체로부터도 자본주의적 발전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세련된 상공업과 금융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체제상 비자본주의적이었으며, 그 어떤 것도 자본주의적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본주의가 영국에서 발생한 까닭은 유럽 ‘세계시장’을 겨냥한 상공업의 발흥이 영국에서는 농촌에서의 사회적 소유관계의 변혁을 수반했기 때문입니다. 농촌에서의 사회적 소유관계의 변혁이 농업생산성을 향상시켰으며, 이는 다시 토지를 떠나 공업에 종사하는 증가 추세의 사람들을 부양할 수 있게 했습니다. 농촌에서의 사회적 소유관계의 변혁은 국내시장의 성립도 가능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생존수단으로부터 분리된 농업생산자들은 시장에서의 구매를 통해 자신을 재생산해야만 했기 때문이죠. 이로부터 국내시장은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농업생산성의 상승 결과 식량가격이 저렴해져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득을 식량을 구매하는 데는 덜 쓰고 다른 종류의 재화나 써비스의 ‘재량적’(discretionary) 구매를 위해 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전자본주의 유럽의 위기에 직면하여, 유럽의 거대 모직물 산업 대부분은 수출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기에 빠졌습니다. 여기에는 17세기 유럽의 주요한 모직물 수출업자들이었던 영국의 거대 모직물 수출업자들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영국의 산업, 특히 영국의 모직물 산업은 17세기 전기간을 통해 팽창할 수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농업자본주의 발흥의 기초 위에서 성장하고 있던 국내시장에 의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성진 그렇다면 영국자본주의의 발생에 영국제국주의는 어떤 중요한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말씀인가요?
브레너 영국자본주의의 발전 배경은 물론 부분적으로는 이른바 세계 상업체제─즉 근동과 극동, 아프리카 및 아메리카 식민지와의 영국 무역─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대한 관계, 그리고 이들로부터의 부의 탈취에 의존했다고 주장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1700년쯤 되면 자본주의는 영국의 농업과 공업 부문에서는 매우 잘 확립됩니다. 그러나 그 당시 노예무역과 설탕무역 및 담배무역은 자체로는 분명히 중요했다 해도, 영국자본주의 발전에 불가결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는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그후 아메리카의 면화와 아프리카의 노예들은 영국 면공업의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죠. 그러나 이러한 사실, 혹은 설탕무역과 노예무역으로부터 획득한 이윤이 영국의 공업투자로 유입되었다는 사실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대한 영국의 관계가 이미 진행되고 있던 영국자본주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말해줄 뿐이지, 그것이 영국자본주의의 출현과 확립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한편 아메리카에 대한 진정으로 대규모적인 약탈은 스페인인들이 주로 귀금속 채굴을 통해 자행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스페인에 축적된 엄청난 부는 그곳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을 촉발시키는 데 실패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스페인은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메리카에서 약탈한 엄청난 부를 자본축적과 자본주의적 발전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할 수 없었다는 것이죠. 스페인은 그 부를 전형적으로 전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즉 제국을 건설하고 상실하는 과정에서 소요되는 전쟁 및 관리 비용으로 탕진했습니다. 스페인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은 이른바 진정한 자본의 원시적 축적과정의 발생, 즉 직접생산자의 생존수단으로부터의 분리와 경제외적 강제에 의한 봉건적 잉여착취 체제의 파괴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의 축적과 자본의 축적을 구별해야 합니다.
요컨대, 영국제국주의는 확실히 영국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즉 그것을 가속화하고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제국주의로 영국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유럽의 자본주의와 이후 미국 및 일본의 자본주의는 분명히 제3세계를 약탈했습니다. 하지만 주변부로부터 중심부로 이루어지는 부의 이전이 저개발의 재생산에서 중심적 요인이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저개발이 재생산되는 이유는 자본주의적 발전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심부가 어떻게 제3세계를 저개발 상태에 결박하는지 이해하려면 우선 선진자본주의 제국의 침투로 인해 발전과는 대립된 계급관계와 국가(및 국가정책)가 정치적·경제적으로 유지되는 방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실제로 유럽 팽창의 대리자들과 현지의 지주계급(예컨대 라틴아메리카에서 지주와 원료생산자들에 의해 지배된 국가) 간에 밀접한 동맹이 존재했습니다.
전후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미국의 정책은 발전의 필요와 충돌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정책은 미국의 다국적기업과 금융의 침투를 제한하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국가들을 약화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미국의 정책은 중심부 자본의 침투에 대항하여 국내산업과 국내시장을 강력하게 보호하고 국내시장과 세계수출시장에서 국내산업을 지원하고자 하는 국가들을 약화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동아시아는 예외적입니다. 이는 미국정부가 일본과 한국, 타이완이 자국에 미국 다국적기업과 금융이 침투하는 것을 제한하는 국가정책─국내적으로 또 세계시장을 향해서 공업의 성장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정책, 그리고 국내금융을 규율해 국내산업을 지원하도록 감독하는 정책 등─을 채택하는 것을 예외적으로 허용했고, 이로부터 이들 나라가 혜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체제의 무정부성 및 무계획성
장성진 전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과 관련된 논의는 이 정도로 마무리짓고, 이제 현재로 넘어와 오늘날의 세계경제 위기에 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선생을 중세와 근대초 유럽경제사를 전공한 맑스주의 역사가로만 알고 있던 한국의 많은 독자들은 1998년 선생이 『신좌익평론』(New Left Review) 5·6월호에 발표한 현대자본주의의 축적과 위기에 대한 본격적인 경제분석인 「세계경제위기의 경제학」(The Economics of Global Turbulence)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1976년 선생이 『과거와 현재』에 발표한 논문이 자본주의 이행에 관한 국제적 논쟁을 재개했다면, 1998년에 쓴 이 글은 소련과 동유럽 진영의 붕괴 이후 퇴조하는 듯하던 맑스주의 경제이론, 특히 공황론에 대한 관심과 논쟁을 세계적으로 부활시킨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도 알다시피 맑스주의 경제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이윤율 저하이론, 과소소비설, 이윤압박설 등 다양한 입장에서 자본주의 공황에 관한 수많은 이론적·실증적 연구를 축적해왔습니다. 이미 축적된 방대한 맑스주의 공황론 연구를 감안할 때, 선생의 이번 작업이 독창적으로 기여한 부분은 무엇입니까?
브레너 먼저 내 접근의 주요한 요소들을 간략하게 말해보겠습니다. 나의 출발점은 자본주의체제의 무정부성 및 무계획성입니다. 자본주의체제의 핵심적 문제점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생산자들이 경쟁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용을 절감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이윤추구 행위가 다른 자본가들과 체제 전체의 이윤창출 능력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조금 부연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본가들은 비용을 절감하고 가격을 낮출 수 있는 발전된 기술을 도입하지만, 이로 인해 덜 강력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예전의 생산수단을 소유한 다른 자본가들의 투자는 거의 실현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비용절감을 위해 기술혁신을 수행한 기업들은 시장에 ‘자신들이 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들 수 있는 한, 어떤 산업에 진입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이전 수준의 이윤율을 획득할 수 있으면서도, 그 산업의 기존 생산자들 일부를 구축·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낮은 가격을 매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는 기존의 생산자들 일부가 그들의 유동자본─그들이 플랜트와 설비와 같은 고정자본을 가동시키기 위해 필요로 하는 노동, 원료 및 중간재─에 대해서조차 평균수익률을 거둘 수 없게 됨에 따라 산업에서 퇴출될 정도로 낮은 가격을 매길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면, 혁신을 수행한 신규 진입자는 그 산업에 잔류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판단하는 그 산업의 기존 생산자들─이들은 일반적으로 신규 진입자가 새로이 정한 낮은 가격 때문에 더이상 총자본에 대해 이전 수준의 이윤율을 획득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유동자본에 대해서는 적어도 평균이윤율을 여전히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산업에 잔류할 것을 선택합니다─과 시장을 분할하게 됩니다. 어쨌든 그 산업의 기존 생산자들은 플랜트와 설비(고정자본)에 대해 이미 비용을 지불했으며, 그래서 만약 그 플랜트와 설비를 가동하는 데 필요한 유동자본에 대해 적당한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면, 그 플랜트와 설비를 그냥 사용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윤율은 저하합니다. 혁신을 수행한 신규 진입자는 이전 수준의 이윤율을 획득할 테지만, 기존의 생산자들은 이전 수준보다 낮은 이윤율을 획득할 것이기 때문이죠. 이렇게 되면 이 산업에는 이제 과잉설비와 과잉생산이 압도적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어진 수요─나는 수요가 변하지 않는다고 가정합니다─에서, 모든 생산자들이 이전 수준의 이윤율을 획득하기에는 너무 공급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 산업에서 이윤율의 저하가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그러면 경제 전체의 이윤율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윤율 저하의 영향을 받는 산업 외부에 있는 자본가들이, 영향을 받은 산업 내부의 이윤율 저하를 야기한 가격하락으로부터 이득을 본다면, 체제 전체의 이윤율 저하는 없을 것입니다. 영향을 받은 산업에서 발생한 자본가들의 손실은 그 외부에 있는 자본가들의 이득에 의해 상쇄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가정은 대부분의 경우, 특히 제조업처럼 영향을 크게 받는 산업의 경우, 영향을 받은 산업에서 생산된 재화들은 부분적으로 노동자들이 소비할 것이며, 그 결과 노동자들은 실질임금 상승을 얻는다는 것이죠. 이때 영향을 받은 산업부문에서 발생한 자본가들의 손실은 그 외부에 있는 산업의 이득에 의해 상쇄되지 못하고, 경제 전체의 이윤율은 저하할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과정이 1960년대말과 1970년대초 제조업 부문 전체의 이윤율 저하를 가져왔으며, 장기간에 걸친 국제경제의 침체를 초래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일본과 서유럽의 생산자들이 세계시장에 진입하여 가격을 하락시켰으며, 세계 제조업의 이윤율 저하를 가져왔습니다. 이는 처음에는 대체로 미국의 생산자들에 영향을 주었지만, 1971〜73년 달러의 평가절하와 이에 상응한 엔화와 마르크화의 절상 이후에는 일본과 독일 및 다른 서유럽 생산자들 역시 수익성 저하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장성진 선생의 후반부 주장, 즉 경제 전체의 이윤율 저하가 노동자의 실질임금의 상승으로 초래되었다는 주장은 1970년대 이후 신(新)리카도주의 경제학자들이 주장한 임금상승=이윤압박 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브레너 외관상으로 나의 주장이 이윤압박 이론과 비슷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임금상승=이윤압박 이론─여기에서 이윤율 저하는 생산성보다 빨리 상승하는 임금에 의해 야기됩니다─에서 특징적인 것은 이윤압박의 원천이 노동자의 힘과 압력의 증대라는 사실입니다. 노동자들은 노동시장의 상황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혹은 스스로 더 잘 조직되었기 때문에, 혹은 다른 어떤 이유로 힘이 강해졌을 수 있습니다. 즉, 이윤율 저하는 노동과 자본 간의 계급권력의 균형 변화로부터 초래됩니다. 그러나 나의 주장에서는 단지 격화된 경쟁이 노동자들에게 혜택을 주는 가격하락을 야기했기 때문에 이윤율이 저하합니다. 어떠한 계급권력의 균형 변화도 요청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윤율 저하에도 불구하고, 영향을 받은 산업 외부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상승했다고 해서 노동자를 공격할 어떠한 이유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는 노동자들이 얻은 이득이─노동자들의 권력 혹은 압력의 증대를 차치한다면─자본가들의 손실을 댓가로 해서가 아니라 단지 이윤율이 저하된 산업의 가격하락으로부터 발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의 이론적·실증적 문제점
장성진 그렇다면 선생의 공황이론은 경쟁 격화가 이윤율 저하를 초래한다는 아담 스미스의 이론에 실질임금 상승이 이윤율 저하를 초래한다는 리카도의 이론을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생은 이윤율 저하를 중심개념으로 해서 전후 세계경제의 장기침체를 분석하는데, 그러면서도 선생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가 이윤율 저하를 초래한다는 맑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생은 맑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에 대한 오키시오(N. Okishio) 같은 신리카도주의 경제학자들의 비판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샤이크(A. Shaikh), 까르체디(G. Carchedi), 뒤메닐(G. Duménil)과 같은 저명한 맑스주의 경제학자들은 선생이 제시한 데이터 자체가 맑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의 타당성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선생을 비판합니다. 예컨대 선생의 데이터에도 ‘산출자본비율’(output capital ratio)의 하락이 이윤율 저하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가 이윤율 저하를 초래한다는 맑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경험적 증거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선생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브레너 먼저 이론에 대해 간략하게 논의하고, 그 다음 경험적 증거들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고전파의 이윤율 저하이론의 출발점은 아주 올바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이론의 결론은 출발점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 이론은 기업들이 경쟁의 압력하에서 비용을 절감하는 신기술을 도입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기업들은 이를 위해 노동자 1인당 플랜트와 설비의 양을 증대시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재화를 생산하기 위한 노동과 비교해 자본의 상대적 양이 증가한다 해도, 재화를 생산하기 위한 노동비용과 자본비용의 합계는 화폐 단위로 계산하든 노동시간 단위로 계산하든 저하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다시 강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절약되는 것은 노동비용만이 아니라, 노동비용과 자본비용의 합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단지 노동생산성만이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총생산성도 상승한다는 것, 즉 주어진 자본과 노동의 합계에 의해 생산될 수 있는 재화의 양이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어떤 기업이 비용을 절감하는 신기술을 도입하면, 그 산업의 다른 기업들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덩달아 그 신기술을 도입해야 합니다. 그 결과는 재화를 생산하는 비용이 일반적으로 하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론은 실질임금이 불변인 채 상승하지 않는다고 가정합니다. 왜냐하면 이 이론은 노동자의 임금이 향상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윤율이 저하함을 입증하려고 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만약 재화의 생산비용과 가격이 하락하는데, 실질임금이 불변이라면, 화폐임금 즉 명목임금은 반드시 저하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명목임금이 저하한다면, 이윤율은 반드시 상승할 것입니다. 즉, 이윤율의 저하 경향 이론이 함축하는 것과 정반대 사태가 발생할 것입니다. 직관적으로 간단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신기술 도입의 결과 특정한 산업의 산출(output)을 생산하는 비용이 하락하면, 경제 전체의 이윤율은 어찌되었든 저하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이를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실질임금이 상승하지 않는다면, 이윤율이 저하하는 유일한 방법은 생산성이 하락하는 것, 즉 그 산업에서 자본투입과 노동투입을 모두 합산한 상태에서 재화를 생산하는 비용이 상승하는 것입니다.
장성진 선생은 방금 맑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에 대한 오키시오의 비판을 반복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후 주요 자본주의 국가의 데이터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가 이윤율 저하의 배후에 있다는 맑스의 이론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브레너 동의하지 않습니다. 데이터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보여줍니다. 첫째, 이윤율 저하이론의 지지자들이 관심을 집중하는 전후 시기에 제조업 부문의 이윤율은 저하하지 않았습니다. 제조업 이윤율은 1948년 말에서 1960년 초까지 (대략 11년간에) 이르는 경기순환 동안, 그리고 1960년 초에서 1969년까지 (대략 10년간에) 이르는 경기순환 동안, 거의 정확하게 같은 수준이었습니다. 둘째, 나를 비판하는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이윤율이 저하하기 시작한 1965〜73년 동안 산출자본비율은 하락하지 않았습니다. 제조업 부문의 실질 산출자본비율, 즉 가격변동이 고려된 산출자본비율은 이 시기에 전혀 하락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제조업 부문의 명목 산출자본비율─이는 가격변동이 고려되지 않은 산출자본비율입니다─은 이윤율이 저하한 1965〜73년 시기에 확실히 크게 하락했고, 이는 이윤율 저하의 핵심적 요인이었습니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이윤율이 저하한 것은, 제조업 분야에서 나타난 국제적 경쟁의 격화가 제조업 산출가격에 대해 강력한 하방(downward) 압력을 낳았고, 이를 통해 명목 산출자본비율이 하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국제적 경쟁이 제조업 산출가격에 대해 하방 압력을 낳았다는 사실은 제조업 외부에서 발생한 사태를 제조업 내부에서 발생한 사태와 비교하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조업 외부에서는 1965〜73년 시기 상대적으로 극히 미미한 이윤율 저하만이 있었으며, 명목 산출자본비율도 거의 하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제조업과는 달리 비제조업 기업들은 국제적 경쟁이 초래한 격화된 가격 하방 압력에 직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비제조업 기업들은 그들의 산출가격을 제조업자들보다 훨씬 많이 올릴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산출자본비율과 이윤율이 큰 폭으로 저하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제조업자들은 1965〜73년 매년 2.3% 정도씩밖에 가격을 올리지 못했지만, 비제조업자들은 가격을 그보다 거의 두 배 빠르게, 즉 매년 4.25% 정도씩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965〜73년 제조업 이윤율은 43.5% 저하했지만, 제조업 외부에서는 15% 정도밖에 저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비제조업 이윤율 저하의 많은 부분은 이 시기 비제조업의 간접기업세 부담이 크게 늘어난 데 연유합니다. 이는 임금이 실제로 제조업에서보다 비제조업에서 더 빨리 상승했으며, 생산성도 제조업에서보다 비제조업에서 더 느리게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습니다. 이윤율 저하에 결정적인 것은 과잉설비와 과잉생산으로 귀결되는 격화된 국제적 경쟁 때문에 제조업자들이 가격을 올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거품에 의해 지탱된 90년대 미국경제의 호황
장성진 맑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의 이론적 및 실증적 타당성 문제에 관한 논의는 이 정도로 하고 최근의 세계경제 및 미국경제 상황에 관한 논의로 넘어가겠습니다. 바로 얼마 전 ‘신경제’가 종식되기 전까지만 해도 1990년대 이후의 정보통신기술혁명 혹은 디지털혁명의 의의를 강조하면서,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일종의 ‘새로운 산업혁명’을 경험하고 있다는 주장, 혹은 1990년대 미국의 ‘신경제’ 호황이 이른바 디지털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주장 등이 유행했습니다. 일부 맑스주의 경제학자들도 디지털혁명이 비생산적 자본을 감소시킴으로써 이윤율을 상승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최근의 세계경제를 분석하면서 디지털혁명이나 ‘신경제’와 같은 개념에 중요한 의의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신경제’ 호황의 종식은 선생의 분석과 예측이 정확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브레너 나도 오늘날 중요한 기술혁신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중요한 기술진보가 자본주의의 게임룰을 본질적으로 변화시켰다거나, 특히 이윤창출 조건을 변혁시켰다는 생각에는 회의적입니다.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1990년대, 혹은 심지어 1990년대 후반 이러한 신기술의 적용은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지 못했으며, 또 특출하게 양호한 경제성과를 내지도 못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미국 대통령경제자문위원회가 ‘2001년도 대통령경제보고서’에서 표현했듯이 신경제가 이른바 ‘특출한 경제성과’를 의미한다면, 신경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호황의 절정기였던 1995〜2000년 5년간 노동생산성의 증가율은 1948〜73년 25년간의 그것보다 15%나 낮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주요 경제지표들─국내총생산의 성장률, 투자 혹은 자본주식(capital stock)의 성장률, 임금상승률, 실업률, 인플레이션 등─을 보아도, 1995〜2000년 동안은 1948〜73년 동안보다 좋지 못했습니다. 만약 1995〜2000년이 신경제라면, 1948〜73년은 도대체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장성진 선생은 버소(Verso)사에서 곧 출판될 신작 『호황과 거품』(The Boom and the Bubble)에서 1990년대 이후 미국경제의 호황을 거품에 의해 지탱된 것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2000년 중반 이후 미국경제의 금융거품이 꺼지고 있습니다. 미국경제의 향후 전망에 대한 선생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브레너 나는 주식시장 붕괴의 충격이 매우 심각할 것이라고 봅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 이유는 1990년대말 이후 주식시장이 거의 전적으로 미국경제의 호황을 끌고 갔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 전반 미국 제조업 부문의 수익성이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대폭 회복되었습니다. 1973년 이후 약 20년간 미국경제가 경험한 장기침체와 수익성의 장기적 위기가 제조업 부문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와같은 제조업 부문의 수익성 회복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는 미국의 호황 초기에 그에 대한 강력한 기반을 제공했으며, 미국경제는 정말로 1993년말 이후 괄목할 만큼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제조업의 수익성 회복은 미국과 독일 및 일본 정부의 달러 가치 절상 합의가 이루어진 1995년 이후 곤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엔화 가치는 사실 그 이전 10년 동안 꾸준히 상승했으며, 1995년에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1달러=80엔까지 상승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경제는 경쟁력을 크게 상실했고, 1995년경에는 심각한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독일경제도 마르크화의 절상 결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95년 이른바 ‘역플라자 합의’(reverse Plaza Accord)가 엔화와 마르크화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달러화의 가치를 올림으로써 일본과 독일을 구제했습니다.
그런데 일본과 독일에 도움이 된 달러화의 가치 상승이 미국에는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사실 낮은 달러화 가치는 지난 10년, 즉 1986〜95년에 이루어진 미국 제조업의 경쟁력과 수익성 회복의 결정적 기초였습니다. 그러나 1995년 미국이 달러화 가치 상승으로 경쟁력을 상실하자, 1987년 이래 그래도 꾸준하게 상승해온 제조업 이윤율의 상승도 중단되었습니다. 수익성 문제는 1997년말 동아시아에서 금융위기가 시작되어 세계 많은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상승하는 달러화 가치 때문에 이미 곤란을 겪고 있던 미국 제조업은 동아시아와 일본 시장의 위축에 직면했으며, 또 동아시아와 일본의 값싼 재화가 세계시장에 범람하는 사태에 직면했습니다. 그 결과는 매우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1997〜2000년 미국 제조업 이윤율은 무려 20% 가량이나 저하했으며, 비금융법인기업 이윤율도 10% 가량 저하했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미국의 호황이 절정에 도달하자 수익성은 실제로 하락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윤율은 저하하는데 호황이 가속화되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주식시장 붐 때문입니다. 기업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아서, 기업들은 차입이나 주식매각을 통해 자금을 쉽게 조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회사들은 이윤율이 저하하는데도 불구하고, 차입과 주식매각을 기초로 하여 엄청난 투자 붐을 연출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부자들은, 특히 소득수준이 상위 20% 이상인 사람들은 주식시장 붐의 결과 증가한 장부상의 부를 이용하여 소비를 엄청나게 늘릴 수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저축을 감소시키고 차입을 증대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아무런 의미 없는 엄청난 양의 투자가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이윤도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것은 틀림없는 과잉투자였습니다. 증대된 투자의 상당부분은 주식시장이 그만큼 소비를 부추겼을 경우에만 이윤을 낳을 수 있었습니다. 주식시장이 일단 붕괴하자 소비증가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그 투자 역시 과잉투자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주식시장은 정말 붕괴했습니다. 그 결과는 매우 나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한편으로 투자와 소비를 주도한 것이 주식시장인데, 다른 한편으로 주식시장의 거품이 과잉투자로 판명될 수밖에 없는 많은 투자를 부추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상할 수 있는 결과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주식시장 붕괴의 결과로서 투자와 소비가 대폭 감소하는 것, 즉 반대방향으로의 자산효과. 둘째, 엄청난 양의 과잉설비가 나타나 이윤율을 한층 더 억누르고, 투자와 소비를 억누르는 것. 1997〜2000년 수익성 저하에 직면한 회사들은 이제부터 더 큰 압박을 느낄 것이며, 투자를 중단할 것입니다. 그들은 투자의 성장을 둔화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투자를 정말 급격하게 감소시킬 것입니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면, 나선형의 하강이 시작될 것입니다. 투자가 감소하면, 생산성 성장이 감소하고, 이윤은 임금 때문에 더욱 압박을 받을 것입니다. 투자가 감소하면, 실업, 기업 도산, 채무불이행이 증가할 것입니다. 즉, 순환적 하강국면에서 특징적인 나선형의 하강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경제는 심각한 문제점에 직면해 있으며, 세계경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미국경제가 세계경제의 추이를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1999년과 2000년에는 주식시장이 미국경제의 호황을 주도했고, 미국경제의 호황은 다시 세계경제의 상승을 주도했습니다. 이제 이 모든 것들이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1997〜98년 아시아 금융위기의 원인
장성진 1997〜98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 위기에 관하여 다양한 해석들이 제출되었습니다. 암스덴(A. Amsden)이나 웨이드(R. Wade) 등은 1997〜98년 한국의 이른바 ‘IMF 위기’의 원인은 199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정책이 신자유주의로 선회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한국 좌파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견해이기도 합니다. 선생은 1997〜98년 아시아 금융위기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브레너 금융위기는 아시아 위기에서 중심적이었습니다. 자본시장의 규제완화, 자본통제의 종언은 금융위기를 촉진하는 데 결정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동아시아의 거품을 낳은 엄청난 자본유입과 그 거품을 붕괴시킨 엄청난 자본유출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분석이 여기에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왜 금융규제 완화가 발생했는지를 따져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나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한국경제가 직면한 현실적 문제들과 이 시기 한국에도 영향을 미친 세계경제 전체가 직면한 문제들을 동시에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1980년대 말 한국경제는 세계시장에서 경쟁력 약화의 문제에 직면했다고 봅니다. 특히 노동자의 저항과 민주주의 운동의 엄청난 폭발 이후 국내에서 비용이 상승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한국은 동남아시아, 특히 중국과 같이 노동력이 훨씬 저렴한 지역으로부터 증대된 경쟁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다른 한편 한국의 산업이 경쟁력을 임금비용에 그다지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첨단기술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이른바 ‘제품수명주기’의 상부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일본·미국과 같은 매우 힘든 경쟁자들과 경쟁을 벌여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경제를 자유화하고, 경제분야에서 자신의 지시적 역할을 줄이려 했습니다. 동시에 정부는 재벌이 더 경쟁적으로 되는 것을 도우려 했습니다. 재벌 자체도 자본통제의 종식을 원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재벌은 세계시장에서 자금을 저렴하게 차입할 수 있고, 부대조건이 달리지 않고 정부의 감독을 받지 않아도 되는 융자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금융규제 완화는 한국의 대자본이 세계시장에서 더 잘 경쟁할 수 있도록 투자 증대에 필요한 자금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경제가 1980년대 말 심각한 경쟁력 약화의 문제에 직면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한국경제는 이같은 문제 외에 더 일반적이고 더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는데, 이것이 1990년대 후반 한국이 경제위기에 빠진 것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문제는 세계경제 전체를 괴롭히던 제조업에서의 과잉설비와 과잉생산입니다. 한국은 한동안은 원화를 달러와 연계시킴으로써 특수한 경쟁력의 문제─중국 및 동아시아의 저임금과 일본 및 미국의 첨단기술 사이에서 압착되는 것─와 동시에 국제 제조업의 과잉설비와 과잉생산이라는 일반적 문제에 봉착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1985〜95년 달러화의 가치는 엔화와 마르크화에 비해 곤두박질쳤으며, 따라서 한국의 원화 가치도 급락했습니다. 원화의 가치 감소는 이 시기 한국 제조업의 수출 증대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엔화 가치 때문에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던 일본과 비교해볼 때 한국산업의 경쟁력을 급격히 강화시켜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95년이 되면 앞서 언급했듯이 미국은 달러화의 가치를 올리는 데 동의하게 됩니다. 한국은 물론 원화와 달러화의 연동을 해제할 수도 있었지만, 세계 금융시장에 대한 접근이 위협받을까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원화의 가치는 1995년 이후 급상승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한국의 위기를 촉발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때부터 원화 가치가 상승하면서 자본이 한국으로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죠. 이는 한국 자산의 가치가 국제적 기준에서 보아 증가했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바로 원화 가치가 상승했기 때문에, 한국은 특히 감소하는 엔화 가치를 즐기던 일본 생산자들과 비교해 엄청난 경쟁력 약화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명목수출과 이윤율은 급속도로 저하했고 제조업의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1997년 초 많은 한국기업들이 곤란에 빠졌고, 1995년부터 쏟아져 들어온 핫머니가 빠져나가기 시작했으며, 경제는 위기에 빠져들었습니다.
레닌의 제국주의론의 적실성
장성진 선생은 「세계경제위기의 경제학」에서도, 『호황과 거품』에서도 레닌(V.I. Lenin)의 ‘제국주의론’은 원용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는 선생이 오늘 세계자본주의를 설명하는 데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별로 적실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까?
브레너 나는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내가 「세계경제위기의 경제학」에서 묘사한 불균등발전과 국제적 경쟁의 과정과 관련하여 여전히 많은 타당성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는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약간 수정했습니다. 레닌은 제국주의 단계가 집적과 독점, 금융과 산업의 융합, 금융자본의 지배, 자본의 수출 및 제국주의로 특징지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러한 특징들은 일반적으로 어느 하나의 경제에서 동시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만약 레닌이 당시의 영국처럼 지배적이고 일찍 발전한 경제는 국내 제조업에 해로운 금융적 이해관계와 자본수출에 좌우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면 그의 입장은 더 강화되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독일과 미국처럼 뒤늦게 발전한 나라들은 세계시장에서 경쟁하고 선발국가들을 추격하기 위해 금융과 산업의 융합, 산업적 집적과 국내시장에서의 독점 및 보호주의에 의존했습니다.
「세계경제위기의 경제학」에서 나는 또 불균등발전과 자본가간의 경쟁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나는 2차대전 이후 시기 각 국민경제들의 배열은 레닌이 분석한 시기인 1차대전 이전 시기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945년 이후 지배적이고 일찍 발전한 자본주의인 미국경제는 국내 제조업을 건설하는 것보다는 (특히 전후 유럽에 대한) 대규모 해외투자를 수행하기 위해 다국적자본과 국제금융을 강화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금융부문의 득세를 수반하는 미국자본의 엄청난 국제화 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 독일 및 이후의 한국, 타이완처럼 뒤늦게 발전한 나라들은 제조업과 금융자본의 융합을 장려하고(즉, 금융자본의 자율적 발전을 억압하고), 제조업에 대해 산업적 집적과 수직적·수평적 통합을 지지하고, 모든 종류의 보호주의와 산업에 대한 국가지원 조치를 취함으로써 발전을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불균등발전과 국제적 경쟁은 1차대전 이전과 마찬가지로 2차대전 이후 시기에도 중심적인 과정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큰 차이점은, 전후 시기에는 식민지나 지도적인 자본주의 국가들간의 전쟁이 이들 국가의 관점에서 의미가 없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이 자국의 군사적·정치적 우위에 의해 어떤 이득을 얻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미국이 자신의 정치군사적 지배를 일본 및 서유럽 자본과 경쟁하는 미국자본을 위해 더 큰 경제적 힘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장성진 이와 관련하여 1965〜73년 이후 시작된 세계경제의 위기가 미국의 세계적 헤게모니의 약화를 수반했다는 월러스틴이나 아리기(G. Arrighi) 등의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브레너 나는 정반대로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미국보다 정치적·경제적으로 더 헤게모니적인 권력은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방금 말했듯이, 나는 군사적·정치적 권력이 쉽사리 경제적 우위로 전환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세계의 석유에 대한 통제와 같은 경우는 예외겠지요.
장성진 레닌의 제국주의론이나 구소련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 혹은 바란(P. Baran)과 스위지의 『독점자본』(Monopoly Capital)과는 달리 선생은 독점이 아니라 경쟁 개념을 중심으로 현대자본주의의 축적과 위기를 설명합니다.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브레너 선생도 알다시피, 독점자본주의 이론의 현대적 형태는 1960년대 중반 바란과 스위지의 『독점자본』에서 제시되었습니다. 그 책의 핵심적 주장은 자본가들이 독점적 지위를 바탕으로 생산성 상승으로 얻어지는 이득의 대부분 혹은 전부를 확보할 수 있도록 가격을 설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차대전 이후 자본은 분명히 노동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를 누린 것으로 보입니다. 핵심적인 것은 바란과 스위지의 그 유명한 잉여의 증가 경향입니다. 그러나 간단히 말해서, 이 이론의 난점은 잉여의 증가 경향이 공황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자본가들이 계속 더 많은 이윤을 만든다면, 그들이 곤경에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이윤을 쓸 방법을 항상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독점자본』에서 공황에 관한 논의가 없는 것, 또 공황의 도래를 예측하지 않은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이론에서 갈등과 불안정 및 자본에 대한 도전의 원천은 체제의 가장자리─제3세계 반란과 흑인혁명─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체제의 내적 모순으로 인해 발생하는 공황은 이 이론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경제 위기와 미 테러사태
장성진 앞에서 선생은 미국 경제의 ‘경착륙’을 예측했는데, 이는 적중한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에는, 예컨대 만델(M. Mandel)의 『인터넷공황』(The Coming Internet Depression)에서 보듯이, 일부 주류경제학자들도 현재의 세계경제 위기를 1930년대 세계대공황과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선생은 오늘날의 세계경제 위기가 1930년대 세계대공황 정도로 심각해질 것으로 보십니까?
브레너 오늘날의 위기와 1929년 주식시장 붕괴와 함께 시작된 위기 간에는 흥미로운 유사점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지난 20년 동안 세계자본주의 대부분이 탈규제를 하고 있고 많은 측면에서 국가의 역할을 줄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모든 자본주의 경제들이 이전에는 국민국가가 수행해온 자본통제, 특히 금융자본에 대한 통제를 없애며, 국가의 재정적자에 의해 제공된 수요완충장치도 없애고 있습니다. 1970년대까지 그리고 그후에도 한동안 엄청난 재정적자가 있었으며, 이는 체제를 안정화하는 데 얼마간 기여했습니다. 금융은 억제되었습니다. 그래서 금융기관은 특정한 지리적·기능적 영역에 한정되었습니다. 자본의 국제적 이동성이 통제되었습니다. 이자율도 규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 동안의 엄청난 탈규제와 국가 역할의 제한 결과 우리는 이제 어떤 의미에서는 20세기 초반 30년 동안의 규제되지 않은 경제로 되돌아갔습니다. 금융은 자유롭게 오가고 있으며, 국가는 안정성을 위해 재정적자를 통한 수요 안정화를 더이상 제공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1950년대 이후 어느 때와도 달리, 1990년대의 호황은 국가의 재정적자에 의해서는 전혀 주도되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재정적자는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감소했고 실제로 소멸했습니다. 1990년대의 호황은 전적으로 민간투자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민간투자는 그 자체 회사와 소비자 차입에 의해 거대하게 부풀려졌습니다. 그래서 민간차입이 정부차입을 대체했습니다. 그 민간차입은 다시 미국 주식시장의 거품주가 때문에 엄청나게 팽창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1990년대말 세계경제를 미국이 주로 주도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직면해 있는 상황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러나 1990년대 투자 증가의 배후에 있는 두 힘들─즉 제조업 수익성의 회복과 주식시장 거품─이 모두 소진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1995년 이후 미국 제조업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과잉설비의 하중에 시달리고 있으며, 2000년이 되면서 이윤율은 20%나 저하했습니다. 한동안은 주식시장의 거품이 투자를 촉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조업과 주식시장 모두 투자 증가의 원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미국 산업 전체에 걸쳐 과잉설비는 일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히 회사와 가계의 엄청난 부채를 감안할 때, 앞으로 무엇이 세계경제를 끌고 갈 수 있을지 알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악화되는 투자의 완전한 좌절로부터 비롯된 엄청난 하방 압력, 어두워지는 기업환경에 직면해 자신의 재무구조를 회복하려는 기업과 가계의 노력으로 인한 차입의 감소, 투자 감소의 결과로 나타나는 생산성 성장률의 저하,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다고 조금도 덜 중요하지 않은) 소비자 수요를 감소시키는 실업 증가 등입니다. 이와 동시에, 미국에서 경기침체가 시작되면서 유럽과 동아시아의 경기침체가 더 심화되고, 이는 다시 미국의 수출을 격감시키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와 미국의 경기침체가 더욱 심화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현재 상황의 심각성은, 지난 1997〜98년 매우 심각했던 동아시아와 국제 위기로부터 세계경제가 탈출한 것은 오로지 미국 주식시장이 주도한 미국 호황이 가일층 과열됨으로써 가능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분명합니다. 이제 미국 주식시장도 붕괴했고 호황도 끝났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경제를 구출할 주식시장의 거품도 없는, 진정한 의미에서 위기의 연장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장성진 선생은 지난 9·11 테러사태가 이미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경기침체를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반대로 9·11 테러사태가 군비지출과 같은 거시경제 부양책을 가동시켜 경기침체에 대한 하나의 출구를 제공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브레너 깊이 생각해보면, 9·11 테러사태는 경제에 대해 피상적인 중요성만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경제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중장기적 및 단기적 추세들이 9·11 테러사태 훨씬 전부터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거의 대부분의 주요한 자본주의 기업들은 9·11 테러사태 전에 미국경제가 이미 본질적으로 경기침체에 들어갔음을 인정했습니다. 물론 9·11 테러사태는, 만약 그것이 불확실성을 계속 증가시키고, 예컨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상황이 악화되고, 혹은 추가적인 테러공격이 발생한다면, 경제에 대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만약 국제적인 군사적 불확실성이 나타나거나 추가적인 국내 테러가 발생한다면,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 이제 실행되기 시작한 혹은 앞으로 실행될 거시경제정책들은 효과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판명날 듯합니다. 그것들은 결코 경제회복을 가져올 것 같지 않습니다. 이제 실질이자율은 제로 수준으로 낮아져 있지만, 이것이 그다지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회사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플랜트와 설비를 갖고 있습니다. 즉, 엄청난 과잉설비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아무리 저렴하게 자금을 빌릴 수 있다 해도 투자를 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케인즈가 유동성 함정이라고 표현했던 상황입니다.
적자재정, 특히 군비지출의 증대에 기초를 둔 적자재정에 대해 말한다면, 이는 경제를 어느정도 자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큰 효과를 거둘 것 같지 않습니다. 첫째, 적자재정 규모가 매우 클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 추산되기로 적자지출은 국내총생산의 1.25% 정도일 듯합니다. 둘째, 그것은 가계와 회사의 민간차입 감소로 인해 그보다 더 큰 폭으로 상쇄될 것 같습니다. 1990년대말 국내총생산에 대한 민간차입의 비중은 기록적 수준으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경제가 정체되고 수축되면서 민간차입은 대폭 감소할 것이며, 이는 정부차입의 증가를 상쇄할 것입니다.
생산의 사회적 관계와 생산력의 발전유형
장성진 선생은 당대 제일급의 맑스주의 역사가일 뿐만 아니라 ‘연대’(Solidarity)와 같은 뜨로쯔끼주의 경향의 사회주의 정치조직에서도 활동하고 있는 혁명적 맑스주의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생의 이론적 입장이 예컨대 존 로머(John Roemer)와 같은 ‘분석맑스주의’ 혹은 ‘합리적 선택 맑스주의’와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실제로 선생의 세계경제 위기 분석의 중심개념인 경쟁이나, 자본주의 이행논쟁에서 선생이 강조하는 계급투쟁이, 맑스의 역사유물론적 개념보다는 분석맑스주의의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브레너 그러한 지적에 수긍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분석맑스주의의 두 가지 주요한─그러나 상호 모순되는─이론, 즉 코헨(G.A. Cohen)으로 대표되는 생산력 발전에 의한 결정론과 존 엘스터(J. Elster)로 대표되는 합리적 선택 맑스주의를 모두 거부했다는 것은 자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적 결정론에 대해, 나의 저작의 전체적 목적은 내가 사회적 소유관계라고 부르는 생산의 사회적 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유형을 결정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생산력의 발전유형이 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봉건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하에서 생산력의 발전유형은 그 자체 계급투쟁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서, 직접적 생산자들의 생존수단으로부터의 분리를 수반하는 사회적 소유관계의 결과인 개별적인 생산단위들에 대한 경쟁의 강제의 결과로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다름아니라 사회적 소유관계를 나의 출발점으로 설정함으로써, 경제활동이 신고전파 경제학의 효용극대화와 이윤극대화의 맥락에서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방법론적 개인주의나 합리적 선택 이론과 같은 생각에 체계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상이한 사회적 소유관계 체제─이는 그 자체 정치적 공동체, 개인들, 가족들의 집합적인 정치적 행동에 의해 재생산됩니다─에서, 계급들이 경제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즉 ‘재생산규칙’으로 선택하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봉건영주 집단이 재생산하는 경제외적 강제를 통한 잉여착취하에서, 영주는 자신들의 소득을 증가시키기 위해 더 많고 더 좋은 생산수단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농민과 다른 영주들로부터 소득과 부를 더 잘 재분배(수탈)할 수 있는, 더 크고 더 강력하고 응집력이 강한 정치집단이나 봉건국가를 건설해 자신의 정치적 능력 구축에 대한 투자로 그들 영지의 산출을 증대시키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농민소유하에서, 농민들은 최선의 선택이 상업으로부터 이득을 완전하게 확보할 수 있는 특화에 의한 소득 극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언급했듯이 생존을 위해 생산하고, 잉여만을 시장에 팔고, 대가족을 유지하고, 보유지를 세분화하고, 아들을 조혼시키는 것 등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두 가지 근본적인 점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합리적 선택이나 방법론적 개인주의 접근과는 상충되는 것입니다. 첫째, 나는 사회구조 즉 사회적 소유관계가 집단적으로 재생산되며, 그럼으로써 개인, 가족 및 집단의 행동에 대한 한계와 가능성이 설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 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일반적으로 말하면, 사회가 먼저 성립하고, 이것이 인간들이 서로 관계하고 자연에 관계하는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맑스가 말했듯이, 인간이 역사를 만들지만, 그들이 선택한 대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배후에 깔린 요점은 모든 주어진 사회적 소유관계 구조는 그 자체 최소한 역사적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것에 선행한 구조들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합리적 선택과 방법론적 개인주의 접근이 실패한 것은 그들이 개인 혹은 집단행동에 대한 구조적 제약을 설명할 수 없었고 이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제약은 그 자체 개인의 합리적 선택의 총체적 결과로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개인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항상 참조해야만 하는 구조를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 제약적인 사회구조가 주어진다 해도,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합리적 선택 접근은 실패하는데, 이는 그들이 개인과 집단의 ‘선호’, 즉 개인과 집단행동이 지향하는 목표를 설명하지 못하고, 자신들도 인정하듯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농민들이 상속시 경지를 세분하는 것과 같은 목표는 합리적 선택 접근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장성진 오늘 대담에서 다루어진 주제들이 이론에서 역사, 현상분석에 이르기까지 워낙 광범위하여 관련된 쟁점들을 깊이있게 다루려면 책 몇권으로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기원과 역사 및 오늘날의 세계경제 위기에 대한 선생의 방대하고 독창적인 연구성과들을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개관해주신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리며, 오늘 대담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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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대담은 대표적 맑스주의 역사학자 로버트 브레너가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초청으로 올 2월 3〜10일 한국을 방문했을 때, 정성진 교수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여기 번역된 내용은 2월 7일 대담과 그후 전자우편으로 이루어진 추가 질문과 답변을 10월 중순 로버트 브레너 교수가 직접 요약 정리한 것이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