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거인의 임종 모습
김학철 산문집 『우렁이 속 같은 세상』, 창작과비평사 2001
이호철 李浩哲
소설가 pamir32@hanmail.net
김학철(金學鐵) 선생과 나는 동향(同鄕)으로 강원도 원산이 고향이다. 더구나 선생이 태어난 용동(龍洞)과 내가 태어난 현동(現洞)은 2킬로미터 거리나 될까, 서로 빤히 건너다보인다. 용동은 원산 거리의 남쪽 초입이고, 현동은 그보다 남쪽의 들판 너머, 안변군과 경계를 이루는 산자드락 밑의 농촌 마을이다.
다 알다시피 원산은 1876년 한일수교조약 이후 5년 뒤인 1880년에 정식으로 개항이 되고 일본인 장사치들이 밀려들면서 급팽창한 도시로, 본디부터 원산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본래의 원산은 덕원군 현면 원산리로 자그마한 포구(浦口)였는데, 그 개항 이후 엄청 커지면서 1941년에는 아예 원산이 덕원군을 통째로 잡아먹어 ‘원산시’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상 대대로 원산 사람은 극히 드물고, 태반은 원산 포구가 항구로 바뀌면서 시류 따라 밀려들어온 외지 사람들이다.
김학철 선생을 처음 서울서 뵈었을 때도 나는 십중팔구 그러려니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윗대 조상들 고향은 어디셨습니까?” 하고.
“나? 본시 원산이지 뭐. 덕원군 현면 용동리!”
“아 그러세요. 저두요. 덕원군 현면 현동리!”
“음 그렇구먼. 보매기 아래……”
“맞습니다. 우리네 토속 이름으로는 전산이었지요.”
“맞아 맞아. 그 건너쪽은 가는골이 있었고……”
하고 잇대어서 하시는 김선생의 다음 한마디인즉 나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그나저나, 내 조상은 안 좋은 직종에 있었어. 증조부께서는 덕원군 하의 무관 쪽 아전(衙前)이었다는가봐.”
나는 잠시 멍하게 선생을 쳐다보았다. 그러곤, 와락 반색을 하며 말했다.
“그으러세요!? 하지만 선생님은 진짜로 대애단하십니다. 저는 월남 뒤, 이 남쪽 세상에서 선생님처럼 정직하게 또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씀 하시는 분 지금 처음 뵙습니다. 정말입니다! 이 남쪽 세상에선 대개가 우선 그런 것부터 속이고 들더먼요. 한데, 역시 듣던 대로, 선생님이십니다. 정말정말 대단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김학철 선생과의 초면 자리에서 주고받았던 대화였다.
이렇게 그분과 교분을 튼 이후 지난 10여년 동안, 같은 고장 출신 선배님으로 남달리 자별하게 지내왔으며, 별별 기이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까지 죄다 들었다. 집에까지 모셔서 우리 고장 특유의 가자미구이 반찬 곁들여 점심 대접도 하였고, 선생과 우리 내자도 아주 친숙해졌다. 그렇게 노구를 이끌고 서울 오실 때마다 어김없이 연락을 해주어 만나뵙곤 하였다. 심지어 한번은 부인께서만 연길 쪽 부인들 모임에 끼여서 서울 오셨다가도 기별을 하여 내자와 같이 호텔로 가서 만나뵌 일까지 있었다. 그때도 사모님께서는 그쪽의 요상하게 생긴 한약재들을 한 보따리나 안겨주었다. 외아들인 해양(海洋)형과도 응당 예외일 수가 없이 별일 아닌 일로도 장거리 전화를 일삼곤 했다.
그렇게 선생 가족들과 자별하게 지내면서도 나는 줄곧 선생과의 첫만남에서 들었던 그 이야기가 머리끝에서 떠나지가 않았다. 말하자면 그 한마디 실토야말로 김학철이라는 사람의 핵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니었던가 싶은 것이다. 크고 작은 일에서 절대로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 당신 본 대로 거리낌없이 털어놓고, 뿐만 아니라 몸소 실천에 옮기는 사람. 주위 눈치나 보며 우물쭈물하는 것과는 애당초에 거리가 먼 사람. 본 대로 느낀 대로 단 한방에 장작 빠개 보여주듯이 선연하게 보여주는 사람. 그 어떤 강한 권력에도 절대로 굽히지 않는 사람. 경우 차리는 데 있어서도 앞뒤가 분명한 매사에 결곡한 사람. 이런 사람이었으니, 그 평생은 명실상부하게도 파란만장했을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이번에 마지막 저서로 출간된 당신의 산문집 『우렁이 속 같은 세상』도 편편마다 그렇게도 편하게 읽히면서 낄낄 혼자서 웃음짓게도 하지만, 죄다 읽고 나서 가만가만 생각해보면 문득 숙연해진다. 역시 김학철이라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이었구나’ 싶어지며, 첫만남 자리에서 들었던 당신의 그 첫 한마디가 새삼 농축이 되어 다가드는 것이다.
지난 7월 10일경이었다. 서대문의 번역원에서 막 나오다가 해양형과 딱 부딪쳤다. 그러곤 기겁을 하게 놀랐다. 어쩜 이렇게 우연히 만나질 수 있느냐고 서로가 놀라워하였다. 부친께서는 밀양의 김원봉 선생과 석전 선생의 추모 모임에 초청을 받아 오셨다가 겨드랑이 쪽이 불편해, 서영훈 선생의 알선으로 지금 적십자병원 1501호실에 입원해 계신다지 않는가. 득달같이 달려가본즉, 그러지 않아도 전화를 걸 참이었노라고 비시시 웃으시는데, 조금 수척해 보이긴 하였지만 여전히 강건해 보였다. 당신께서도 “뭐 별건 아닌가보아. 한 닷새 있으면 퇴원해도 된대. 15일쯤 돌아갈려구……” 하여,
“그럼요. 별것일 리가 있나요. 선생님께서야, 두고 보세요, 백수를 넘긴다니까요. 이건 제가 백번 천번 장담할 수 있어요. 그럼요.”
하고 나도 조금 호들갑스럽게 떠들었는데, 순간 문득, 어? 싶으며 흘낏 쳐다보니 선생은 묵묵부답일 뿐만 아니라 전혀 표정이 없으셨다. 아니, 착 가라앉은 얼굴로 그냥 멍히 마주 바라보았다. 지금 이 글을 몇자 끄적거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묘하게 그 지극히 짧았던 한순간의 선생 표정이 새삼 밟힌다. 그리고 묘하게 걸린다. 그러니까 그때 당신께서는, 이승 한가운데 속을 여전히 살고 있는 나와, 이미 저승에 한 발 들여넣고 있는 자신과의 아득한 상거(相距)를, 아슴아슴 부지불식간일망정 느끼고 계셨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40분 가량 이 얘기 저 얘기 하는 동안에도 담당의사와 간호사가 번갈아 드나들어 별다른 얘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흔히 이런 일은 지나놓고 보면 더구나 그렇지만, 그때가 당신과 나의 이승에서의 마지막이었다는 것이 여간만 아쉽게 걸리지가 않는다. 되레 여느때보다도 더 잡(雜)얘기만 나누었던 것 같다. 그 일이 그분께서 운명하시기 불과 두달 전이었다는 것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
임종 전 9월 5일에 작성한 유언장부터가 평소의 그분답게 약여(躍如)하다. 바로 며칠 전 현지로부터 입수한 유언장인즉, 다음과 같다.
“남기는 말,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더는 연연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 병원주사 절대 거부. 조용히 떠나게 해달라. 김학철.”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김학철 구술. 김해양 기록. 2001년 9월 9일(금식 닷새째).”
그리고 그 장례행렬의 맨 앞에는 다음과 같이 적힌 깃발이 들려 있었다.
“元山 앞바다行 김학철(홍성걸)의 고향 가족 친우 보내드림.”
그렇게 임종하시기까지 꼭 스무날간의 금식과정의 자취(외아들 김해양 형이 기록)도 명실공히 86세의 늙은 혁명가답게 한치도 빈틈이 없고 거인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