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화평
한국영화산업 시대의 명암
흥행영화를 둘러싼 문제들
이용관 李庸觀
영화평론가 yong@kofic.or.kr
한국 영화평단에서 지지를 받는 작품이 흥행에 참패하는 경우는 자주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드문 일도 아니다. 반대로 평단의 비판을 받은 작품이 흥행에 성공하는 경우는 자주 있어왔다. 문제는 한국 영화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비평과 대중의 반응에서 불일치가 점점 더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영화비평의 몰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영화문화의 특성으로 이해하기에는 복잡한 구석이 있다.
문화산업 시대에 가치평가의 기준을 찾는 것은 그래서 어려운 일이다. 얼마 전 평단이 예상하지 못한 흥행가도를 달리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조폭 마누라」는 대중의 기호, 언론의 비평, 배급의 구조 등의 문제가 뒤섞여 다양한 반응과 평가를 이끌어냈다. 그중 가장 부정적인 견해는 한국영화가 산업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작품의 질적인 측면에서도 상승기류를 이루고 있는데, 「조폭 마누라」의 흥행은 이러한 상승곡선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조폭 마누라」의 가벼움이 한국영화 전선에 한랭 기류를 끌어온 것일까.
이것은 여러 측면에서부터 세밀히 따져볼 문제이다. 「조폭 마누라」는 조직의 여자 보스가 언니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결혼을 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코믹과 액션을 적당히 버무린 혼성 장르의 영화다. 눈물도 있고, 코믹도 있고, 액션도 있다보니 마치 “누더기를 엮은” 영화 같다는 평가도 나온다. 강한 여성상이라는 캐릭터 역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뒤바꾼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은 고스란히 이전의 히트작인 「엽기적인 그녀」에게도 적용된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전지현은 옛 애인을 잊지 못하는 여성으로 나온다. 그러나 그녀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다혈질적인 기질도 있다. 어느날 지하철을 타고 술에 취해 귀가하는 그녀에게 한 남자가 얽히면서 사건은 시작되고, 두 주인공은 통념적인 남녀의 성역할을 바꾸어가며 교제를 시작한다. ‘엽기적인 그녀’라는 이름하에 전도된 남녀의 역할 속에는 눈물도 있고, 코믹도 있고, 액션도 있다. 그러나 「조폭 마누라」와는 달리 상당수의 언론은 「엽기적인 그녀」를 새로운 청춘영화의 등장이라며 호평했다.
두 영화는 이데올로기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엇비슷한 특성을 지녔음에도 초반 평가는 사뭇 달랐다. 어째서일까. 문제는 바로 등장인물들에 대한 심리적인 저항감인데, ‘엽기적인 그녀’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조폭 마누라’라는 강렬한 이미지의 구현은 불안감을 형성하는 것이다. 농담처럼 표현하자면, 강력한 ‘엽기적인 그녀’인 조폭 마누라는 여전히 한국사회가 허용하지 않는 범주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최근 깡패·건달·조폭 등이 등장하는 한국영화들에 가해진 주된 비판의 논지 중 하나였다. 이들 영화는 폭력성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친구」 「신라의 달밤」에 이어 「조폭 마누라」 「킬러들의 수다」에 이르기까지 작품이 흥행될 때마다 영화의 폭력성 논란이 따라다녔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산사로 숨어든 조폭들의 좌충우돌을 그린 「달마야 놀자」, 건달 세계에 몸담고 있는 두 여자들의 버디 무비 「피도 눈물도 없이」의 완성에 이어, 고교에 입학한 조폭을 소재로 한 「두사부일체」와 같은 작품들이 한창 촬영중이라는 사실이다. 소위 기획영화 씨스템을 도입한 충무로가 ‘조폭’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키워드라고 상정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조폭영화들의 수위와 범위의 다양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제작과 수용과 평가의 모순인데 「박하사탕」이 보여주었듯 역사적 폭력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한국사회가, 한편으로는 문화의 표현 속에서 자연스럽게 폭력의 내면화를 가져오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상들을 단순한 폭력 비판론으로 환원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어떤 부분을 비춰주는지는 되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대중문화가 하나의 거울이라는 슬라보예 지젝의 말처럼, 한국사회의 어떠한 현실이 이러한 영화들을 선호하고 대중들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폭력영화들의 양상에 덧붙일 또 한가지 중요한 측면은 요즘의 조폭영화는 리얼리즘 영화의 틀을 갖추었던 「초록 물고기」나 이전 흥행작 「친구」와는 달리 유머를 앞세운다는 것이다.
「조폭 마누라」의 인기비결도 당연히 코미디를 앞세운다는 것인데, 황당한 설정들이 영화를 폭력적으로 느끼게 하기보다는 가벼운 엽기행각으로 만든다. 가령 이 영화의 미성년자 관람불가 장면(?)인 신은경의 손가락 애무행위 따위는 현실성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주는 충분한 효과를 누리고 있다. 현실성 없는 자극이야말로 「조폭 마누라」의 승리비결이다. 일상화된 내재된 폭력을 가볍게 즐기는 것, 이러한 태도는 군대의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가하는 폭력의 형태와 유사하며, 우리 사회구조의 모순을 재현한다. 이들 조폭영화는 한국사회가 지닌 상징폭력을 다양한 캐릭터와 상황 위에 흥미롭게 공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조폭영화는 일종의 상징폭력이나 상징행위처럼 읽힌다. 이것은 단순한 비판 이전에 우리 사회를 측정하는 하나의 바로미터로 독해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폭력을 다루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폭력의 표현방식이며 어째서 폭력이 점점 더 가볍게 묘사되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현실적인 문제는 배급의 구조이다. 그것은 관객들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한국 배급망의 선택이기도 하다. 올해의 가장 뛰어난 데뷔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40개 이상의 스크린을 첫 주에 걸었던 「고양이를 부탁해」는 흥행성적이 좋지 않자 1주일 만에 스크린 두 개 외에는 대부분을 「킬러들의 수다」에게 내어주었다. 현재의 배급체계로서는 좋은 영화를 제대로 평가할 기회를 관객들에게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영화 투자사나 제작사들의 태도인데, 「조폭 마누라」나 「친구」와 같이 적은 자본을 들여 가벼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무사」와 같이 많은 자본을 들인 영화들보다 흥행성적이 좋다는 단순한 결과를 놓고 제작방향을 가벼운 코미디로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까지 다양한 영화들이나 소재들이 추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급한 결과론은 영화 장르의 편식을 낳을 우려가 크다.
그러나 「조폭 마누라」의 질주를 무조건 질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고양이를 부탁해」를 제작한 오기민 대표는 흥행 참패에도 불구하고 「조폭 마누라」와 같은 장르의 영화도 선전해야 한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는데,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다. 과거 극장가는 할리우드 대 한국영화의 양상으로 이루어졌지만, 지금은 한국영화 대 한국영화의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물론 여기에도 함정은 있지만 과거보다 나은 구도 속에서 영화산업 구조가 신장하고 있음은 오히려 다행한 일이다. 한국영화 중흥기라 불리는 60년대에도 작가주의 영화가 많이 있었지만 다양한 장르의 상업영화가 그만큼 활력소가 되어준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러한 점에서 충무로는 좀 이례적인 구조를 형성하는 셈인데, 명필름과 같은 메이저 제작사에서 블록버스터 영화도 만들지만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같은 작가주의 영화도 후원을 하는 것은 한국 영화산업의 나름의 균형감각과 건강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하나의 사례로 이해해도 괜찮을 듯싶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사안은 「고양이를 부탁해」의 사례에서 보듯이 다양한 영화를 지속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의 확보이다. 이 점은 국가가 영화를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과 현대 자동차를 비교하는 단순한 수치로 이해하지 말고, 하나의 문화로서 인식하는 태도가 절실함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충무로 바깥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독립영화들을 위한 공간은 전무하다. 책이 읽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듯 영화 역시 보여지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관객들은 오랫동안 볼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독립영화 전용관의 필요성이나 좋은 영화를 사시사철 상영할 수 있는 특권화된 공간은 오늘날과 같은 영화산업 시대에는 더욱 절실하다.
최근 충무로는 자본의 대규모 유입으로 인해 감독과 씨나리오와 배우의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 역시 독립영화와의 교류와 소통을 통해 어느정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객들이 냉정히 영화를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는 공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이는 한국영화를 살찌우는데 필요한 촉매제이다. 한국영화의 중흥만큼이나 곳곳에서 우려와 시기의 목소리가 높다. 이러한 때에 가장 필요한 작업은 영상문화의 기초를 닦을 기반을 다지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한국영화 점유율 50%의 신화를 거품으로 만들지 않을 유일한 방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