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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촛점 | 팔레스타인 노트

 

 


팔레스타인 노트

 

■ 편집자주

2002년 3월 12일 이스라엘이 엄청난 병력과 무기로 요르단강 서안 팔레스타인 자치지역 라말라(Ramallah)를 공격해 수십명의 팔레스타인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국제작가회의(International Parliament of Writers,IPW)는 600명이 넘는 전세계 작가들의 동의를 얻어 팔레스타인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러쎌 뱅크스(Russell Banks), 크리스띠앙 쌀몽(Christian Salmon), 월레 소잉카(Wole Soyinka), 브러이턴 브러이턴바흐(Breyten Breytenbach), 뻬이 따오(北島), 빈첸쪼 꼰쏠로(Vincenzo Consolo), 후안 고이띠쏠로(Juan Goytisolo),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 등 8명이 주축이 된 대표단은 2002년 3월 24일부터 5일간 팔레스타인을 방문했다.

여기에 소개하는 「우리에겐 희망이라는 치유할 수 없는 병이 있습니다」란 글은 국제작가회의 대표단을 맞이하는 팔레스타인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Mahmoud Darwish)의 감격스런 환영사이다. 팔레스타인을 다녀온 작가들은 국제작가회의 웹싸이트(www.autodafe.org)의 ‘Palestine notebooks’에 글을 올리고 있으며, 러쎌 뱅크스의 「점령지를 다녀와서」와 빈첸쪼 꼰쏠로의 「국제작가회의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방문기」는 그 세번째와 네번째 글이다. 크리스띠앙 쌀몽의 「말[言語]의 학살」은 팔레스타인 방문시 라말라를 아우슈비츠에 비유한 주제 사라마구의 발언과,4월 초 팔레스타인 예닌(Jenin)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사건을 계기로 씌어졌다.

국제작가회의는 1994년 박해받는 작가들을 지원할 기구가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여러 나라의 작가 300여명의 서명으로 탄생했다. 이후 국제작가회의는 전세계의 작가와 지식인 들이 참여해 이슬람 작가들의 연대구축을 비롯하여, 창작의 자유가 위협받는 세계 각지에서의 검열사례 조사 및 연구활동을 벌였다. 국제작가회의의 사무총장은 크리스띠앙 쌀몽이며, 초대 의장은 살만 루슈디(Salman Rushdie),2대 의장은 월레 소잉카, 현 3대 의장은 러쎌 뱅크스이다. 명예의장으로는 전임 의장들을 비롯해 아도니스(Adonis),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 에두아르 글리쌍(Edouard Glissant) 등이 있다.


 

 

우리에겐 희망이라는 치유할 수 없는 병이 있습니다

 

 

마흐무드 다르위시 Mahmoud Darwish

팔레스타인 시인. 1941년 출생. 1948년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가족과 함께 레바논으로 피신했다가 1년 뒤 갈릴리 근처의 다이루 알아싸드(Dayru al-Assad)에 정착. 1972년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에 가담. 1987년 PLO의 간부로 임명되었으나 1993년 오슬로 협약에 반대하여 그 자리를 사임함. 1969년 로터스상(Lotus Prize) 수상. 대표작으로 『올리브 나뭇잎』(Awraq al-Zaytun, 1964),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Ashiq Min Filastin, 1966) 등이 있음. 이 글의 원제는 “We have an incurable malady: hope”임.

ⓒ IPW 2002 / 한국어판 ⓒ 창작과비평사 2002, Reprinted with permission from IPW

 

*(국제작가회의–––옮긴이) 대표단이 라말라(Ramallah)에 도착한 것은 특히 이 여행에서 만나려고 한 주요인사인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켰다. 3월 25일, 칼릴 사카키니 문화쎈터(the Cultural Center Khalil Sakakini)에서 마련한 모임이 열리는 동안에 다르위시는 문학뿐만 아니라 도덕에도 몰두해 있는 ‘말의 대가들’(masters of words)에게 경의를 표하는 연설을 했다. 그것은 세계문화 속에 팔레스타인을 각인하는 상징적 방식이다.–––원문의 도입글

 

 

유혈이 낭자한 이 봄에 이땅, 사랑과 평화의 땅이라는 옛 명성을 갈구하는 이땅에서 여러분을 환영하는 일이 제게는 커다란 기쁨이고 영광입니다.

이 터무니없는 포위공격이 벌어지는 동안의 여러분의 용감한 방문은 그 포위공격을 깨뜨리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여러분이 이곳에 있음으로써 우리는 더이상 고립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덕택에 우리는 여러분이 명예롭게 대표하는 국제적 양심이 여전히 살아 있고 저항할 수 있으며 정의의 편에 설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자유를 위한 싸움과 인종차별주의에 맞선 싸움에서 작가들이 여전히 값진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신시켜주었습니다.

인간운명에 대한 책임은 문학텍스트에서만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상사태와 인간의 재난의 상황에서 작가는 다른 여러 형태의 공적 활동방식을 통해 도덕적 역할을 수행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문학적 온전성을 공고히하고 고결한 가치들---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입니다---을 중심으로 대중의 의식을 집결시키는 역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여러분이 우리에게 준 고귀한 메씨지, 연대와 공감의 메씨지에서 우리가 읽어낸 것입니다.

유혈참극 앞에서 말의 대가들에게는 수사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은 우리의 권리만큼이나 단순합니다. 즉 우리가 이땅에서 태어났고 이땅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조국도, 이땅 외의 다른 모국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너무도 많은 역사가 존재하고 너무도 많은 예언자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다원주의란 감방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용하는 공간이며 그 누구도 땅이나 신(神)이나 기억을 독점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역사란 공정하지도 우아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우리의 임무는, 우리가 역사의 희생양이자 그 창조물인만큼, 역사를 인간화하는 것입니다.

여기가 우리의 나라이며, 이 조그만 땅이 우리 조국---신화상의 조국이 아니라 진짜 조국---의 일부라는 팔레스타인 사람의 진실과 팔레스타인 사람의 권리보다 더 명백한 것은 없습니다. 신성한 권리라는 명분을 아무리 많이 늘어놓는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의 점령은 점령의 보편적인 정의를 벗어날 수 없는 타국의 점령입니다. 신은 그 누구의 개인적 소유물도 아닙니다.

‘두 민족 두 국가’라는 틀 안에서 이땅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원칙에 근거한 정치적 해결책들을 우리는 수용해왔습니다. 우리는 동예루살렘을 포함하여 1967년 이후 점령당한 땅에서 하나의 독립국가를 이루고 살아갈 정상적인 삶, 난민문제에 대한 공정한 해결, 그리고 식민주의적 정착(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관할인 가자 지구와 웨스트 뱅크 내에서의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을 뜻함---옮긴이)의 종결 등을 요구할 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피의 악순환을 끝내고 평화로 나아갈 유일한 현실적 방향입니다.

현재의 사태는 자명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정부가 그려내려고 하듯, 두 존재 사이의 ‘그들이냐, 우리냐’ 식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점령을 끝내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점령에 저항하는 것은 권리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노예상태에서 자유상태로 변혁시키는 민족적^인간적 의무이기도 합니다. 더이상의 재난을 피하고 평화에 도달하는 지름길은 팔레스타인 민중을 점령상태에서 해방하고 다른 민족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으로부터 이스라엘 사회를 해방하는 것입니다.

점령은 우리에게서 자유의 기본조건을 앗아가는 데 만족하지 않고 나아가 우리의 몸과 우리의 꿈, 이 민족과 가정과 나무들에 대해 지속적인 전쟁을 선포하고 전쟁범죄들을 저지름으로써 존엄한 인간적 삶의 가장 필수적인 요소조차 앗아가고 있습니다. 점령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은 인종격리제도(apartheid system)와 영혼을 패배시킬 칼의 권능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희망이라는 치유할 수 없는 병이 있습니다. 해방과 독립에의 희망 말입니다. 영웅도 희생양도 아닌 정상적인 삶을 사는 희망. 자식들이 안전하게 등교할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 임산부가 군 검문소 앞에서 죽은 아기를 낳는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 살아 있는 아기를 낳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 우리 시인들이 피가 아니라 장미에서 빨간색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될 날에 대한 희망. 이땅이 사랑과 평화의 땅이라는 원래의 이름을 되찾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 우리와 더불어 이 희망의 짐을 나눠진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曺興根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