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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윤성희 尹成姬
1973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설집 『레고로 만든 집』이 있음. hitchike@hanmail.net
거기, 당신?
창이, 가늘게, 흔들렸다. 그녀는 창에 손바닥을 대고, 가만히 숨을 멈추었다. 떨림이 혈관을 타고 심장까지 전해졌다. 15층까지 올라오는 동안 바람은 약간 신경질적이 되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바람이라면, 나뭇가지는 나뭇잎에 상처를 내지 않도록 가만가만 흔들릴 것이고, 구름은 둥근 달을 일그러뜨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움직일 것이다. 그녀는 베란다에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녀의 예감이 맞다면 아랫동네 어느 골목에서 곧 연기가 피어오를 것이다. 지난 한달 내내 동네를 공포에 젖게 만들었던 방화범이 오늘 같은 날을 지나치진 않을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버스정류장의 쓰레기통에 불을 질렀을 때도, 의류 재활용품을 모아두는 상자에 불을 질렀을 때도, 모두 오늘처럼 가만한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베란다에 앉아서, 그녀는 어느 봄날을 떠올렸다. 주인집에서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산 날이었다. 마루는 이내 사람들로 꽉찼다. 동네에서 제법 큰 집에 속했던 까닭에 부녀회원들은 한달에 한번씩 그 집 마루에 모여 국수를 비벼 먹었다. 주인집 남자는 퇴근 후 가볍게 시작한 술자리가 뜻하지 않게 2차 3차로 이어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자기 집으로 사람들을 몰고 왔다. 중학생인 큰아들은 만우절날 선생님들의 슬리퍼에 본드를 칠했다가 일주일 정학을 맞기도 했는데, 늘 몰려다니는 다섯 명의 친구들과 장난을 계획한 것도 그 마루에서였다. 하지만 마루에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적은 없었다. 누군가 안방 미닫이문을 떼어내 마루를 넓혔다. 지붕 위에서 안테나를 설치하던 주인집 남자의 막내동생이 소리를 질렀다. 형, 잘 나와? 잘 나와! 마루에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대답을 했다. 뉴스에서는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의 결승전을 보여주었다. 한국은 한 경기를 내주고 두 경기를 이긴 상태였다. 단체전의 네번째 시합이 시작되었다. 첫 세트는 21:10, 두번째 세트는 21:23. 세트스코어 1 대 1이었다. 이에리사 선수가 날카로운 써브를 날렸고 오제끼 유끼에 선수가 잽싸게 받아쳤다. 두 선수는 한동안 탁구공을 주고받았다. 두 선수가 공을 주고받을 때마다 어머니의 머릿속에서도 2.5그램의 탁구공이 통통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평생 따라다닌 편두통이 시작된 것은 이때였다. 이에리사 선수가 득점을 할 때마다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어머니는 까닭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들키기 싫어 눈물을 안으로 삼켰다. 결혼을 하기 전에 어머니는 가슴속에 눈물주머니를 하나 감추어두었다. 어머니가 눈물을 안으로 삼키자 눈물주머니가 곧 터질 듯 부풀어올랐다. 그녀는 숨이 막혔다. 그래서 왼발로 어머니의 배를 걷어찼다. 그러고는 동네사람들이 모두 모여 박수를 치고 있는 마루로, 세상으로 나왔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은 지 여덟달 만이었다. 그녀가 울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눈물을 멈추었다. 어머니의 머릿속은 옛 기억들로 마구 뒤엉키기 시작했고 그녀의 머릿속은 박하향이 뿌려진 것처럼 환해졌다. 환해진 머릿속에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던 여덟달 동안의 기억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마침내 동쪽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그녀는 창문을 열고는 목을 길게 빼서 연기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연기는 가늘었다. 방화범은 언제나 작은 불을 질렀다. 집을 태우거나 승용차를 태우는 일은 하지 않았다. 착한 사람일 거야. 그녀는 연기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바람이 거친 날 불을 지르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방화범은 바람이 불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곧 연기가 사그라들었다. 바람은 꺼져가는 불에게 이렇게 속삭일 것이다. 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생각해봐. 그러면 불은 채 타지 않은 것들을 마저 태우기 위해 마지막 힘을 다할 것이다. 불이 꺼지면 방화범은 어두운 골목길을 헤매고 헤맨 다음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노곤한 잠을 자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자리에 누웠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그는 짓다 만 건물 앞에 자전거를 세웠다. 작년 겨울 첫눈이 오는 날, 공사는 중단되었다. 그는 몇달 동안 만나오던 여자에게 이런 농담을 했다. 건물이 다 지어지면 전망 좋은 사무실을 하나 줄게. 하고 싶은 거 해. 모든 게 다 괜찮았다. 그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다 지어졌다면 근처에서 가장 근사한 건물이 되었을 것이다. 첫눈이 오던 날 밤, 스물두살 때부터 같이 동업을 해오던 김사장과는 통화가 되지 않았다. 그는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사무실에는 상고를 졸업한 지 일년도 안된 여직원이 퉁퉁 부은 눈으로 앉아 있었다.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그냥 김사장이 시켰을 뿐이라고. 일주일 만에 전화를 받은 사람은 그 새끼 미국으로 날랐어,라는 말만 전해주었다. 그가 갚아야 할 빚은 그가 죽었을 때 탈 수 있는 보험금의 몇배나 되었다. 그는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종아리는 마라톤 선수들처럼 단단했다. 코스는 항상 똑같았다. 고등학교 때 늘 탔던 45번 버스의 노선을 따라 밤길을 달렸다. 고등학교 때 그의 일상은 45번 버스 노선 안에 있었다.
자전거를 타면, 그의 머릿속에는 늘 똑같은 영상이 떠올랐다. 체육시간이었다. 새로 부임한 체육선생은 마라톤 선수였다고, 전국체전에서 은메달을 딴 적도 있노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런 의미에서 운동장 열 바퀴. 자, 뛴다. 처음 한 바퀴를 뛰자 등에서 땀이 흘렀다. 끈끈함이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세 바퀴를 뛰자, 너도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혼자 살 수 있겠지? 나는 니 아버질 찾아간다,라는 쪽지만을 남기고 사라진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속력을 냈다.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칠 때마다 어머니의 눈 코 입이 뭉그러졌다. 그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달리다 옆을 보니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반 아이들은 배구장에서 배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다리는 멈춰지질 않았다. 여섯살 때, 그는 잔디 깔린 마당이 있는 이층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 집은 아버지가 십오년을 일했던 신발가게의 사장이 살던 집이었다. 신발가게 사장은 부인이 죽자 재산을 정리해 미국으로 떠났다. 아버지는 이층집을 물려받았다. 그게 퇴직금이었다. 이삿짐을 다 나르고 아버지는 거실 한가운데 가족사진을 걸었다. 그때 집이 흔들렸다. 지진이었다. 그는 소파에 얼굴을 묻었다. 액자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나뭇결 무늬의 마룻바닥에 흠집을 냈다. 달리면 달릴수록 그는 자꾸 어려졌다. 새 집으로 이사를 하자 아버지에게는 서재가 생겼다. 아버지는 한번 서재에 들어가면 며칠이고 밖에 나오질 않았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재주라곤 사람들의 발을 보고 싸이즈를 맞추는 게 전부였다. 이젠 사람들의 발을 내려다보는 게 지겨워. 아버지는 말했다. 자신의 신체 중에서 발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말에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는 미국으로 떠났다. 신발가게 사장이 그곳에서 공장을 차렸다고, 그래서 믿을 만한 공장장이 필요하다고 편지를 보내왔다. 종이 쳤는지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갔다. 인마! 체육시간 끝났어. 체육선생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는 달리기를 멈추었다. 그후 체육시간이 되면 그는 달리기만 했다.
그는 45번 버스의 종점에 도착했다. 버스정류장에 자전거를 두고 그는 걷기 시작했다. 가파른 언덕 때문에 자전거로 오르긴 벅찬 동네였다. 언덕 꼭대기에는 고층아파트가 동네를 굽어보고 있었다. 피아노 학원을 끼고 뒷길로 들어서니 가로등도 없는 후미진 골목길이 나왔다. 전봇대 아래에 라면박스가 놓여 있었다. 그는 성냥을 꺼내 불을 피웠다. 박스가 젖었는지 불은 이내 꺼졌다. 그는 라이터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걸었다. 조금 추워지기 시작했다. 성냥은 한 개비밖에 남질 않았다. 대문 앞에 화분이 버려져 있는 게 보였다. 화분 안에는 뿌리가 드러난 화초가 들어 있었다. 나무는 병에 걸렸는지 잎이 하/다. 그는 우체통에서 편지를 꺼내 거기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나뭇가지에 불을 옮겼다. 나뭇가지가 타면서 매운 연기가 났다. 연기가 눈에 들어가서 그는 눈물을 약간 흘렸다.
그녀는 벽에 걸린 광고포스터를 보았다. 배가 적당히 나온 마음 좋게 보이는 남자가 자기와 똑같이 생긴 어린 아들과 함께 크레페를 고르고 있는 사진이었다. 나라면 저렇게 상상력이 부족한 광고포스터를 만들지 않을 거야. 정은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정은 만일 나라면,이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가끔 그 말에 위로를 받곤 했다. 일본인 관광객이 자주 찾는다는 유명 비빔밥집에 음식 모형을 납품할 때였다. 그녀는 비빔밥, 돌솥비빔밥, 콩나물비빔밥…… 여러 종류의 비빔밥을 만들었다. 그걸 만드는 동안 점심으로 내내 비빔밥을 사먹기도 했다. 하지만 비빔밥집 사장은 고사리가 가짜처럼 보인다고, 달걀노른자의 색이 진하다고, 콩나물이 너무 뻣뻣해 보인다고 반품을 시켰다. 납품했던 물건이 되돌아오던 날 정은 그녀에게 저녁으로 갈치조림을 사주었다. 내가 사장이라면 그 음식 모형을 가게 앞에 진열할 거야. 정은 갈치에 있는 가시를 꼼꼼히 발라내며 말했다. 우리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비빔밥을 먹지 말자.
홍보팀의 P과장은 한 시간 후에 나왔다. ‘크레페 세상’에서 판매하는 크레페는 모두 여섯 종류였다. 전국에 백개가 넘는 체인점이 있고, 현재도 계속 체인점을 모집하는 중이다. 계약만 된다면 육백개의 크레페 모형을 납품할 수 있다. 정은 P과장에게 음식 모형이 있는 경우와 음식 모형이 없는 경우 매출이 얼마나 차이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담배 한대 피우시겠습니까?
정은 결정을 못하고 머뭇거리는 P과장에게 담배를 한대 내밀었다. P과장은 담배를 입에 물고는, 양복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라이터를 찾았다. 그러다가 무엇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물고 있는 담배를 빼서는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담배는 합성수지로 만든 모형이었다. 진짜랑 똑같죠? 저희는 크레페도 그렇게 만들 수 있어요. 정의 장난이 재미있었는지 P과장은 유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괜찮네요. 저 주세요. P과장은 은으로 만든 담배케이스를 꺼내더니 거기에 모형 담배를 넣었다.
차가 정지신호에 서자, 정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흰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보행기를 끌고 횡단보도를 지나갔다. 그날 이후로 정말 비빔밥을 한번도 안 먹었어? 운전을 하던 정에게 그녀가 물었다. 정은 그녀가 무엇을 묻는지 몰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피자 먹고 일해요! 사무실 문을 열면서 정은 소리쳤다. 난 피자 싫은데, 다른 거 사오지. 춘권에 노릇노릇한 색을 입히고 있던 윤이 투덜댔다. 윤이 가장 자신있어 하는 것은 방금 튀긴 듯 바삭바삭한 느낌이 나게 색칠을 하는 거였다. 그래서 윤의 별명은 군만두였다. 메추리알 부품이 다 떨어졌잖아. 창고에서 박이 소리를 질렀다. 박은 창고에만 들어가면 말이 많았다. 피자 먹고 일해요. 정이 창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박의 목덜미를 잡고 나왔다. 창고에는 달걀노른자부터 팽이버섯의 모형까지 이백개가 넘는 부품들이 있었고, 박은 그 부품들의 위치를 모조리 외우고 있었다. 그래서 박의 별명은 부품이었다. 해파리, 하고 정이 말하자 C칸의 50번, 하고 박이 대답했다.
정말 맛있는 피자예요. 이 집이 얼마나 유명한데요.
그녀는 박에게 피자 한쪽을 내밀었다.
이거 어디서 샀냐? 퇴근하는 길에 사가야지.
박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난 피자가 싫다 그랬잖아. 이걸 어떻게 먹어.
윤이 투덜거리며 피자를 바닥에 내던졌다.
너 이 아까운 걸 왜 버려. 이래봬도 치즈 크러스트 피잔데.
그녀는 빵 사이에 들어 있는 피자를 가리켰다.
저녁에 가끔 음식 모형을 놓고 회식을 하곤 했다. 처음에는 정의 장난으로 시작되었다. 회사를 차리고 한달 내내 아무 일이 없자, 네 명은 조금씩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박은 시골에 있는 땅을 팔았고, 윤은 집을 담보로 대출을 얻기도 했다. 그녀는 사십년 이상 음식 모형을 만들어온, 국내에서 가장 알아주는 회사에서 십년을 일했다. 그녀가 사표를 내자 사장은 이년만 지나면 제작부 실장 자리를 주겠다고 말했다. 모두들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자 정은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 여기 동영빌딩 302혼데요, 짜장면 둘, 양장피 하나요. 중국집 배달원이 음식을 가지고 왔다. 양장피에 겨자쏘스를 붓다가 그녀는 그것이 음식 모형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중국집 배달원은 202호에서 일하는 남자였는데, 정은 수고비 대신 가짜담배를 한갑 만들어주었다.
그녀는 피자를 입에 넣고는 먹는 시늉을 했다. 핫쏘스가 없어서 맛이 없네. 그녀의 말에 사람들이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선반에 진열되어 있는 모형들을 보았다. 그 가운데, 돼지머리 모형이 그녀를 보고는 웃었다.
계단은 가팔랐고,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어깨가 벽에 닿을 정도로 폭이 좁았다. 다방 안은 음침했다. 어항 안에 들어 있는 물고기들조차도 바닥에 붙어 꼼짝하지 않았다. 한참 전에 왔는지 W 앞에 놓인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그득했다. 차 마셔야지. W가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칡차 두 잔. W는 그에게 묻지도 않고 칡차를 시켰다. 커피는 몸에 안 좋거든. W가 흰 이를 드러내고 힘없이 웃었다. W는 칡차에 띄워져 있는 잣을 건져 재떨이에 버렸다. 그도 칡차를 한모금 마셨다. 썼다, 미간이 자기도 모르게 찡그려질 정도로. 소문 듣고 왔어요, 여권이 필요해서. 비자도…… 그는 들릴락말락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이제 그 일 안하는데. W는 건너편에 앉아 있는 중년의 남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W의 시선을 따라 그도 건너편 탁자를 바라보았다. 아래턱에 꿰맨 자국이 있는 남자가 눈밑에 기미가 거뭇하게 낀 여자에게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가짜 아놀드파마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원래 우산에는 보라색은 없지?
W가 말했다.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아닌가요?
그가 대답했다.
돈이 많이 들 거야, 특히 미국 비자는. 근데 누구한테 내 이야기를 들었지?
Q요.
W는 고개를 끄덕였다. Q는 그에게 W의 연락처를 알려주면서 이 바닥에선 W가 최고의 브로커라고 했다.
Q는 요즘 어떻게 지내나.
잘 지내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사실 그는 Q를 잘 몰랐다. 처음엔 심부름쎈터를 하는 중학교 동창에게 A라는 사람을 소개받았고, A라는 사람이 H라는 사람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전화를 받은 것은 목소리가 날카로운 여자였다. 도대체 그 사람 전화가 아니라고 몇번이나 말했어요. 여자는 그에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는 전화를 끊었다. 다시 A에게 연락을 했지만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심부름쎈터를 하는 중학교 동창에게 도가니수육과 설중매를 사주었다. 중학교 동창은 Q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그는 Q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는 Q일지도 모릅니다. 장난기가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Q는 그에게 W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이백, 오백이야.
그는 W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한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여권은 이백이 들고, 비자는 오백이 들어. W의 말이 들렸는지 턱에 상처가 난 남자가 이쪽을 쳐다봤다. W는 종업원에게 칡차를 한잔 더 시켰다. 특별히 싸게 해주는 거야. W의 말이 끝나자마자, 가짜 아놀드파마를 입은 여자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다방은 여자의 울음소리로 이내 꽉찼다. 에이! 구질구질한 건 딱 질색이야. 그렇게 말하며 W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미는 그의 손을 W는 잡지 않았다. W가 가고 난 다음에 칡차가 나왔다. 그는 잣을 건져 재떨이에 버렸다.
다방을 나오자, 비가 왔었는지 바닥이 축축했다. 그는 버스정류장과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그는 팔 수 있는 것들을 헤아려보았다. 자동차는 삼백만원은 족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통장에 백오십만원이 있으니 이백오십만원만 구하면 되었다. 건물 사이로 해가 지고 있었다. 약재상이 근처에 있는지 한약 달이는 냄새가 났다. 다닥다닥 지어진 건물들은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건물들은 약간 피곤해 보였다. 이제 그만 쉬고 싶다고 그에게 말하는 듯했다. 상자들은 건물 귀퉁이마다 쌓여 있었고, 바람은 스웨터의 성긴 올을 뚫고 그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냈다. 그러고는 불을 댕겼다. 손이 따뜻해졌다.
뭐 드실지 결정했어요? 그녀는 곱창전골과 해물전골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오른편에서 보는 어머니의 얼굴과 왼편에서 보는 어머니의 얼굴은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느낌이 달랐다. 편두통을 앓을 때마다 어머니는 한쪽 얼굴을 찡그렸고, 세월이 흐르자 찡그린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왼쪽 눈은 오른쪽 눈보다 치켜올라갔고, 왼쪽 이마가 오른쪽 이마보다 주름이 많았다. 그녀는 우울한 날엔 어머니의 왼쪽에 서지 않았다.
곱창전골 먹자.
해물전골 들고 싶다 그러셨잖아요.
마음이 바뀌었어.
그녀는 곱창을 씹지도 않고 삼켰다. 음식 모형을 만들면 만들수록 음식을 씹지 못하고 삼키는 날이 많아졌다. 음식들이 합성수지로 만든 모형처럼 느껴졌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일을 배울 때, 그녀는 함박스테이크를 만들다가 저녁에 진짜로 함박스테이크를 사먹기도 했다. 영덕게, 복어회, 누룽지탕…… 그녀는 매일매일 먹어보지도 못한 음식들을 만들었다. 밤마다 그 음식들을 게걸스럽게 먹는 꿈을 꾸었다. 자기도 모르게 식욕이 늘었다.
야식으로 족발을 먹을 때였다. 그녀는 상추에 족발을 싸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쩜 진짜랑 똑같이 생겼을까. 그리고 그 쌈을 먹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어쩜 맛도 진짜랑 똑같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직원이 소주 한잔을 그녀에게 주었다. 당연하지, 진짜니까. 그날 이후로 그녀는 음식을 씹지 못하고 삼켰다.
어머니는 가방에서 고무망치를 꺼내 머리를 두드렸다. 식당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이 신기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가방에는 십년이 넘도록 변함없이 들어 있는 물건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고무망치였고, 하나는 인삼맛이 나는 껌이었다. 고무망치는 편두통이 찾아왔을 때 사용했고, 인삼맛 껌은 멀미를 했을 때 씹었다. 어느 겨울인가, 아버지가 군고구마를 사왔을 때였다. 군고구마 봉투는 철 지난 잡지로 만든 것이었다. 고구마를 먹고 체해서 죽은 사람을 보았다며 어머니는 고구마를 먹지 않았다. 그녀가 고구마를 먹는 동안 어머니는 봉투를 펴서 기사를 읽었다. 기사에는 고무망치로 두통을 치료한다는 사람이 나왔다. 고무망치로 어떻게 두통을 치료한다는 것인지는 기사가 잘려 알 수 없었지만, 한 남자가 고무망치로 머리를 두드리고 있는 사진을 보고 어머니는 모든 것을 추측했다. 망치로 머리를 두드리는 거야. 그러면 두통이 사라지지. 다음날 어머니는 사진 속에 있는 망치와 똑같은 망치를 만들었다. 어머니가 망치로 머리를 두드리는 날이 많아질수록,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도 많아졌다. 아버지는 통통거리는 그 망치소리를 견딜 수 없다고 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해해요. 그녀는 어머니가 고무망치로 머리를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 박자에 맞춰 영어단어를 외웠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 어머니는 노래를 불렀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어머니는 시에서 주최한 주부노래자랑에 나가 장려상을 받은 적이 있다. 뱃속에 있던 그녀도 따라서 그 노래를 불렀다. 어머니는 행복해했고, 그녀도 따라서 웃었다. 동네 부녀회에서 단체로 응원을 나왔다. 장려상 상품이 뭐였어요. 응, 뭐였더라. 기억이 안 난다. 어머니는 언덕길을 가뿐하게 올랐다. 그녀는 약간 숨이 찼다.
새벽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는 눈을 떴다. 이제 생각났다. 석유곤로를 받았어. 어머니의 얼굴에는 베갯자국이 나 있었다. 예, 이제 그만 주무세요. 그녀는 안방으로 건너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방문을 닫다 말고, 그런데 내가 노래자랑에 나간 걸 니가 어떻게 알았니?라고 어머니가 말했다. 그녀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그녀는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차가 모두 몇대인지를 세어보았다. 아버지가 야근이라도 하는 날이면 어머니는 밤새 벽지에 새겨진 꽃송이를 헤아렸다. 방문을 열면 바로 마당이 보였는데 그 마당을 넋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어머니는 텅 빈 마당을 도화지 삼아 눈으로 무엇인가를 그렸다. 어머니의 눈동자가 움직일 때면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림들이 새겨졌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동물들이었다. 동물들은 전부 날개를 달고 있었다. 15층 아파트로 이사를 오고 난 다음,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때 어머니가 그린 동물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베란다에서 뛰어내려도 그녀는 죽지 않을 것 같았다. 우울해질 때마다 그녀는 몸속에 숨겨진 날개를 생각했다. 아랫동네에서 희미하게 연기 같은 것이 올라오는 듯도 했지만, 불이 난 것인지 아닌지 짐작할 수도 없을 정도로 금방 사라졌다.
그는 메뉴에 적혀 있는 스파게티의 종류를 모두 외웠다. 점심시간에 오겠다고 약속한 L은 오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나가고 뒷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나갔다. 동창들은 L이 억대의 연봉을 약속받고 회사를 옮겼다고 했다. 알짜 기업으로 소문난 중소기업의 외동딸과 약혼을 했다는 말도 들렸다. 학창시절에 L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아이였다. 학기가 다 끝나갈 무렵, 담임선생님이 L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물었다. 근데 니 이름이 뭐였니? 담임선생님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 다음부터, L은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S시에서 가장 유명한 학원에 등록을 했다. 수업이 끝나는 저녁 여덟시에서 밤 열두시까지 학원에서 국, 영, 수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일년이 지나자 L은 전교 5등으로 석차가 올랐다. 그러고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던 선생님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제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시겠죠.
그는 L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안하다. 바빠서 못 나가겠다. 너무 오래간만이지. 그래, 그동안 뭐했어. 결혼은 했구. L이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물어봐서 그는 무엇을 먼저 대답해야 좋을지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나는…… 그가 말을 하려 했을 때 전화기 저편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알았어. 곧 갈게. L의 목소리는 피곤해 보였다. 나는 잘 지내. 그냥, 니 얼굴이 보고 싶어서 왔지. 아직 결혼은 안했어. 그는 L이 그랬던 것처럼 한꺼번에 모든 것들을 대답했다.
달리면 뭐가 좋아? 언젠가, 체육시간마다 달리기만 하는 그에게 L이 물은 적이 있다. 세상에 내 편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돼. 그는 약간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가끔 L은 그를 따라 운동장을 달렸다. 아버지가 떠나고 난 다음, 어머니는 서재에 틀어박혀 지냈다. 동네사람들은 서재에 귀신이 있다고들 했다. 신발가게 사장의 부인이 죽은 것도 서재였다. 신경안정제 과다복용, 자살이었다. 어머니가 떠난 후에는 그가 서재에서 잠을 잤다. 서재에서 잠을 자면 언제나 새벽 두시쯤에 잠에서 깼다. 면도칼이 순식간에 그의 가슴을 훑고 지나간 것처럼 통증이 왔다. 그런 날이면 그는 책상에 앉아 아침이 될 때까지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L이 같이 운동장을 달려준 날이면 그는 불면증에 시달리지 않고 잠을 잘 수 있었다.
내가 너 좋아했던 거 알지?
그렇게 말해놓고 보니, 그는 L이 그리웠다. 나는 있잖아, 이렇게 숨이 찬 게 참 좋다,라고 말하며 순진하게 웃곤 하던 L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자식! 얼마가 필요한 거야. 말해봐.
그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해물스파게티와 쌜러드를 시켜 남김없이 다 먹었다. 그는 동네에서 신발이 가장 많은 아이였다. 아버지가 일하고 있던 신발가게의 사장은 그가 신고 싶은 신발은 전부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생일날 그에게 분홍색 카드를 주었는데 평생 무료 신발 교환권,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장은 친절한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늦도록 귀가하지 않는 날이면 어머니는 그를 신발가게에 보냈다. 문 닫은 가게 안에서 아버지와 사장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난로에는 언제나 김치찌개 아니면 부대찌개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술에 취하면 아버지는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라는 말을 자주 썼다. 어린 그는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하고 아버지의 말투를 흉내내곤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에게 막걸리를 한모금 먹여주었다. 미국으로 떠난 아버지는 선물을 보내왔다. 버튼을 누르면 탬버린을 치는 원숭이 인형이었다. 온도에 따라 엉덩이 색이 변하는 인형을 보내기도 했고, 뒤집으면 다른 동물로 변하는 인형을 보내기도 했다. 중학생이 된 그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중학생이 되었으니 다른 선물을 보내주세요. 하지만 더이상 선물은 오지 않았다.
그는 45번 버스의 노선을 세 번이나 왕복했다. 버스정류장에는 45번 버스의 노선이 바뀐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새로운 노선은 그가 다녔던 고등학교와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산책을 했던 중앙공원을 지나가지 않았다. 그는 골목길을 뛰기 시작했다. 대문에 쌓아놓은 신문뭉치에 불을 붙였던 집은 아직도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의류 재활용 상자는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그는 가지런히 주차된 차들을 보았다. 저 차에 불을 지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치솟아오르자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자동차 앞유리에 끼워져 있는 광고지들을 빼내기 시작했다. 동네를 한바퀴 돌자 꽤 많은 양의 종이를 모을 수 있었다. 그는 거기에 불을 붙였다. 비키니를 입고 요염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여자의 몸이 타들어갔다. 그 여자만이 자기를 위로해주는 듯했다. 그는 약국 앞에 쪼그리고 앉아 전화를 걸었다. 누구야, 이 밤에. L이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는 삼백만원이 필요하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크레페 세상’의 P과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은 정이 손가락으로 OK표시를 했다. 체인점이 모두 백이십개라고 했다. 박은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돌솥비빔밥에 삶은 달걀을 넣었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서 성냥갑에 들어 있는 성냥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었다. 왜 안 기뻐? 정이 다가와 말을 건네자 그녀는 그제야 뭐가? 하고 되물었다. 크레페 세상에서 전화왔었다구. 돈까스에 빵가루를 입히다 말고 윤이 소리를 질렀다. 아! 그거. 기뻐. 그녀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숙여 성냥개비 고르는 일에 열중했다. 성냥개비 모형을 만드는 일은 쉬웠다. 콩나물을 만드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한 성냥갑에서 골라낸 열다섯개의 성냥개비를 가지고 틀을 떴다. 주물에 합성수지를 부어 오븐에 굽는 것도, 완성된 모형에 색을 입히는 것도 다른 것들에 비하면 단순했다. 그녀는 이백개가 넘는 성냥개비를 만들었다. 그것들을 성냥갑에 담자 더 진짜처럼 보였다.
그걸로 뭐하게.
정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창고로 들어가 맥주 두 잔을 가지고 나왔다.
자 이거 마시고 화 풀어.
그녀는 건배를 했다.
화난 게 아니야. 근데, 왜 넌 기뻐하지 않는 거지?
나도 정말 기뻐. 근데 기쁘다고 반드시 웃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정은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히고는 진짜 맥주를 마시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녀는 그런 정이 고마웠다. 정은 유쾌한 사람이었다. 정은 새벽에 깨어나도 다시 잠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걸 참기 위해 이에리사가 득점할 때마다 박수를 치던, 주인집 마루에 모인 동네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보곤 했다. 그런 사실들을 말하면 정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 사람들의 얼굴이 기억나?
몇건의 화재가 생긴 이후로 동네사람들은 쓰레기 버리는 것을 조심했다. 가게들은 박스를 길거리에 쌓아두지 않았고, 가정집에서는 불에 타지 않는 쓰레기만 밖에 내놓았다. 그녀는 가로등이 드문드문 있는 후미진 골목길을 따라 동네를 돌아다녔다. 거리는 깨끗했다. 불에 탈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편지함에서 편지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고지서나 청첩장이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편지들도 보였다. 군대에서 보낸 편지도 있었다. 그녀는 그런 편지들은 다시 편지함에 넣고는, 전화요금 고지서나 신용카드 영수증 같은 것들만 챙겼다. 오늘은 방화범이 나타날 것이다. 그녀의 짐작은 틀린 적이 없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니 아버지 온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면 영락없이 몇분 후에 아버지가 초인종을 눌렀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죽음을 알아차리기도 했다. 그녀가 어머니 뱃속에 있은 지 세달하고 며칠이 더 지났을 때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뒷산에 있는 약수터에 가는 중이었다. 그 물을 먹고 아들을 낳았다는 동네사람이 여럿이었다. 물을 마시다 말고 어머니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약수터에서 너무나 많이 울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장례식장에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뱃속에서, 그녀가 대신 울었다.
그녀는 골목길에 주워모은 고지서들을 버렸다. 그러고는 사거리에 있는 약국 앞에 앉아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곳에 앉아 있으면, 버스정류장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택시가 한대 지나갔다. 택시에서 내린 남자는 그녀를 한번 노려보고는 한약방이 있는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모자를 쓴 사람이 찻길 건너 편의점에서 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은 아닐 것이다. 바람이 은은하게 불었다. 어디 열이 얼마나 있나 볼까? 바람은 그렇게 속삭이고는 그녀의 이마를 만져주었다. 어디선가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구두 뒤축이 닳을 거야. 그녀는 발소리를 들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기다란 그림자가 그녀 앞에 섰다. 가로등을 등지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 당신인가요?
W를 처음 만났던 다방은 내부 수리중이었다. W와는 통화가 되지 않았기에 그는 할 수 없이 다방 입구에 서서 W를 기다렸다. 시간이 꽤 흐른 다음에 전화가 왔다. 약속장소를 바꾸죠. W는 다급하게 말했다. 다음 장소에서도 W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W를 소개해준 Q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직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목소리의 소년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번호는 맞지만 Q라는 사람의 전화는 아니에요. 어린 소년은 자동응답기처럼 대답했다. Q를 찾는 전화가 자주 걸려온 모양이었다. 그는 심부름쎈터를 하는 중학교 동창에게 전화를 걸었다. Q? Q가 누군데? 아! 난 그 사람 잘 몰라. 나도 다른 사람한테서 소개받은 거야. 중학교 동창은 Q에 대해서, 그리고 W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다음날 신문에는 전문적인 여권위조단이 잡혔다는 기사가 실렸다. W의 얼굴도 조그맣게 실렸다. 너무도 작아서 그게 W였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W의 사진 위에 그보다 몇배는 큰 사진이 있었다. 신의 손이라고 불린다는 사람의 사진이었다. 신문에는 신의 손이 만든 여권은 전문가가 아닌 이상 가짜인지 진짜인지 판별해낼 수 없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중학교 동창이 처음에 소개해준 A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A에게 그는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다른 사람이 받았다고 말했다. 여자가 받았죠? H의 마누라예요. 성격이 지랄같죠. 술 먹고 카드를 긁거나 노름해서 돈을 잃으면, 휴대폰을 빼앗거든요. 다시 해보세요. A는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는 H에게 전화를 걸었고 H가 잔뜩 경계하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때가 때이니만큼 한동안은 죽어지내야죠. 일주일 뒤에 다시 걸어주세요.
골목에는 모퉁이마다 종이가 버려져 있었다. 대부분 전화요금 고지서였다. 그는 영수증을 들여다보았다. 어느 집은 한달에 전화요금이 십만원이 넘게 나왔다.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는 집일 것이다. 밤마다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저녁 반찬은 무엇을 먹었는지, 담임선생은 숙제를 왜 이리 많이 내주는지 수다를 떨겠지. 일반전화 요금보다 국제전화 요금이 더 많이 나온 집도 있었다. 유학을 간 아이가 있나? 숫자는 많은 이야기들을 감추고 있었다. 카드값이 칠십육만원. 내역서를 보니 모두 똑같은 곳에서 카드를 긁었다. 남편은 카드 고지서를 부인이 먼저 받을까봐 며칠을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그는 봉투에 적힌 주소를 보았다. 다시 편지함에 넣어놓을까? 그런 장난스러운 생각이 그의 뇌리에 잠깐 스쳤다.
그에게는 어린시절의 사진이 남아 있질 않았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그는 마당에 나가 사진을 한두 장 태우곤 했다. 사진을 태우면 사진 속에 담겨 있던 영상이 어둠속에서 살아움직였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많아질수록 앨범은 점점 얇아졌다. 재는 바람이 불면 금세 사라졌다. 사진 속의 그는 가보지 못한 세계로까지 날아갈 수 있었다. 앨범에 사진이 더이상 남지 않게 되자 그는 벽에 붙은 영화포스터를 태우기 시작했다. 영화포스터에는 종이 한장에 다 적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 이야기들은 재가 되어 먼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종이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불을 붙였다. 전화요금 고지서가 탈 때는 누군가 그의 귀에 대고 해독할 수 없는 말들을 웅얼거리는 것 같았다. 숫자 안에 감추어져 있던 이야기들이 종이에서 풀려나와 하늘로 날아갔다. 이야기들이 하늘로 날아갈 수 있도록 바람이 가만히 불어주었다. 금세 하늘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는 보물찾기를 하듯 골목에 버려진 요금고지서들을 찾아 헤맸다. 다음 골목 모퉁이에는 청첩장과 범칙금 고지서가 있었다. 그는 청첩장을 들고, 거기에 적힌 주소를 찾아 골목길을 돌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축복받을 사람들은 축복받아야 했다. 그는 청첩장들을 도로 편지함에 넣었다. 자신이 우편배달부가 된 듯했다.
자전거를 처음 타봐요. 그녀가 말했다. 뒷좌석에 누군가를 태우는 건 처음이에요. 그가 말했다. 트럭이 자전거를 스치듯 지나갔다. 그는 자전거가 흔들리지 않도록 손목에 힘을 주었다. 저 트럭을 따라가봐요. 그녀가 말했다. 꽉 잡아요. 그는 힘껏 페달을 밟았다.
그는 정거장을 지나칠 때마다 그녀에게 말을 했다. 여기 정거장 이름은 남부시장이에요. 하지만 여기엔 시장이 없어요. 웃기죠? ……저 옷가게 보이죠. 내가 사는 동네에도 저런 옷가게가 있거든요. 두 가게가 헷갈려서 버스에서 잘못 내릴 때도 있어요. 하하. ……이 공원에서 처음으로 술을 마셨어요. 여기서 잠을 잔 적도 있죠. ……저기 붉은 벽돌로 된 이층집 보이나요? 큰 건물 뒤에 가려서 잘 안 보이죠. 좀더 가까이 갈게요. 자, 여기가 내가 사는 집이에요.
그는 이층집 앞에 자전거를 멈추었다. 우리 어머니는 이런 이층집에서 살아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한번은 길을 가다, 마당에 잔디가 깔려 있는 이층집을 보고는 대뜸 아버지에게 화를 내기도 했어요. 아! 어머니가 바라던 집이 바로 이런 집이었어요. 얼마나 잔디가 푸르렀는지 내 눈까지 푸른색으로 물들 지경이었어요. 그녀는 잡초가 무성하게 웃자란 마당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녀는 그에게 커다란 성냥갑을 주었다.
이걸로 이 집을 태워요.
이 집은 이제 내 집이 아니에요. 은행으로 넘어갔죠.
저 집안에 있는 물건들을 잊을 수 있어요?
그는 성냥을 꺼내 불을 댕겼다. 하지만 불꽃은 일지 않았다.
어때요. 진짜랑 똑같죠? 선물이에요.
어! 고마워요, 하하. 정말 맘에 들어요.
그는 성냥 모형을 품에 안았다.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에 붙어 있는, 타다 만 종잇조각을 떼어냈다.
그녀는 다시 자전거 뒷자리에 앉았다. 그는 그녀에게 곧 미국으로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45번 버스가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저 버스를 따라가볼까요. 그가 말했다. 그의 허리를 꽉 잡고, 그녀는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여덟달 동안 얼마나 외로웠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가만히 그의 등에 귀를 대보았다. 난 당신의 말을 믿어요. 그의 몸속에서 그런 말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