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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모더니즘에 대한 오해에 맞서서

 

 

황종연­ 黃鍾淵

문학평론가. 동국대 국문과 교수. 평론집 『비루한 것의 카니발』이 있음.

 

 

1. 루카치의 판례를 좇는 리얼리즘론의 법정

 

문학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은, 인간 문화를 지배하는 이분법적 대립이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차이의 통제에 의존하는 동일성 구축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리얼리즘론은 리얼리즘에서 모더니즘을 배제함으로써 리얼리즘을 정의하며, 모더니즘론 역시 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을 배제함으로써 모더니즘을 정의한다. 전체성을 향한 지향을 강조하는 리얼리즘론은 그러한 지향에 역행하는 경향, 예컨대 경험의 단편에 몰입하는 경향을 모더니즘에 귀속시킴으로써 리얼리즘의 동일성을 정립하는 반면, 현실의 지각과 인식에 있어 주체의 계기를 중시하는 모더니즘론은 그러한 취지에 반대되는 통념, 예컨대 현실은 자명하게 주어진 객체라는 순진한 믿음을 리얼리즘에 전가함으로써 모더니즘의 동일성을 확보한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이분법적 대립에서 그 각각은 상대에 대하여 타자, 즉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려면 부단히 배제해야 하는,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또한 언제나 의존할 필요가 있는 타자이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은 서로 차별하고 종속시키는 관계에 있는 만큼이나 더불어 생존하는 관계에 있다. 따라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은 현대문학에 존재하는 상반되는 충동–––예를 들어 독일 표현주의 논쟁에서 ‘객관적 현실’에 대한 루카치(G. Lukács)의 요구와 ‘체험된 현실’에 대한 블로흐(E. Bloch)의 옹호로 표출된 충동---의 발현이라고 간단히 보아 넘기기 어렵다. 그것은 오히려 현대문학의 상반되고 모순되는 충동을 다만 끊임없이 상연하는, 결과적으로는 근대문학이 생성시킨 자기부정 또는 자기갱신의 다양한 움직임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봉쇄한다는 혐의가 있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으로 현대문학을 범주화한다면 19세기 프랑스 리얼리즘 소설에서 20세기 미국의 생태문학에 이르기까지 문학의식의 저류를 이룬 낭만주의는 어떻게 되는가. 그 나름의 역사와 장르를 축적한 대중문학은 어떻게 되는가. 오랜 망각으로부터 되살아난 여성문학의 풍부한 유산은 어떻게 되는가. 인간문화의 모든 이분법적 대립과 마찬가지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은 상당히 수상쩍은 이데올로기적 구조이다.

사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현대문학을 양분하는 강력한 범주 구실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에 따라 문학작품을 분류하기는 그렇게 용이하지 않다. 예를 들어 플로베르(G. Flaubert)의 『마담 보바리』(Madame Bovary, 1857)는 ‘두 편의 『마담 보바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리얼리즘 작품으로서의 성질과 모더니즘 작품으로서의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다. 또한 토마스 만(Thomas Mann)의 『마의 산』(Der Zauberberg, 1924)은 루카치에게는 비판적 리얼리즘의 전범이지만, 어빙 하우(Irving Howe)에게는 강력한 모더니즘 정신의 표현이다. 한국소설에서도 그와 유사한 예는 적지 않다. 조세희(趙世熙)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은 70년대 한국 산업사회의 모순을 파헤친 리얼리즘 소설로 읽으려는 사람과 낯설게 하기의 장치를 구비한 모더니즘 소설로 읽으려는 사람 양쪽 모두의 기대에 부응한다. 신경숙(申京淑)의 『외딴 방』(문학동네 1995) 역시 한 젊은 여성의 계급과 세대 공통의 집단적 경험의 증언이라는 점에서는 리얼리즘적이지만 진정성의 도덕적 이상에 붙들린, 그리고 그것에 적합한 언어를 찾아 고심하는 작가의 떠다니는 자기의식의 기록이라는 점에서는 모더니즘적이다. 이처럼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문학작품 분류범주로서 때때로 쓸모가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모더니즘의 출현을 리얼리즘의 연속으로 이해한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의 역사적 관점에 동의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세속적 휴머니즘 문화의 발전과 연관하여 유럽 리얼리즘 문학의 역사를 정리한 명작 『미메씨스』(Mimesis: Dargestellte Wirklichkeit in der abendländischen Literatur, 1946)의 마지막 장에서 아우어바흐는 버지니어 울프(Virginia Woolf)의 『등대로』(To the Lighthouse, 1927)를 비롯한 모더니즘 소설에서 현실을 다양한 의식들의 반영으로 분해하는 기법과 같은 몇몇 문체적 특징을 찾아낸 다음, 놀라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착잡한 심정으로 그것이 유럽 휴머니즘 문화의 붕괴에 조응되는 새로운 형태의 리얼리즘임을 인정했다.

그런 점에서 임규찬(林奎燦)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둘러싼 세 꼭지점」(『창작과비평』 2001년 겨울호)과 이어서 나온 윤지관(尹志寬)의 「놋쇠하늘에 맞서는 몇가지 방법」(『창작과비평』 2002년 봄호)은 주목할 만한 글이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적대적이라는 통념을 극복해야 한다는 요구에 응답했을 뿐만 아니라 리얼리즘론과 모더니즘론의 대화를 촉진하는 논제들을 제시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글들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관계를 새롭게 보려면 당연히 필요한 사고의 전환을 기대한 만큼은 이룩하지 못했다고 판단된다. 예를 들면 임규찬은 나의 평론에 대해 논평하는 중에 장정일(蔣正一)과 최인석(崔仁碩)을 ‘비루한 것의 카니발’이라는 측면에서, 신경숙과 윤대녕(尹大寧)을 ‘내면의 탐구’라는 측면에서 묶어 논한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렇게 묶은 작가들 사이의 “근원적인 차이를 무시한 채 단순히 스타일의 유사성이나 기법의 유사성으로 동일성의 논리를 구상”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장정일과 윤대녕의 한묶음이야말로 동일성의 범주에 해당하는 우리 시대의 한 유형”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의 문학은 사회병리현상을 미적으로 변형한 단순재현물이라는 성격을 사회적으로 갖게 된다”는 주장을 편다. 임규찬이 나의 유형화 방법에 반대하는 이유가 되는 그 ‘근원적인 차이’란 요약하면 어떤 행위나 상황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지시가 있는가 없는가를 기준으로 하는 차이이다. 최인석 소설의 ‘기이함’은 장정일의 ‘기이함’과 달리 “사회적 모순이 집약된 사회(…)와 긴밀한 연결을 맺는다”는 것이고 신경숙 소설의 개인은 윤대녕 소설의 개인과 달리 “특수한 사회적 운명”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문학작품을 다루면서 스타일이나 기법보다 사회적인 의식이 더욱 ‘근원적인’ 문제라고 보는 것은 동의하기 어려운 리얼리즘론의 편견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장정일 소설과 최인석 소설에 숨어 있는 유사성을 드러내려던 나의 시도를 그토록 간단히 일축한 판정이다. 누가 보더라도 원한의 정치학과 (포스트)모던한 난동으로 확연하게 갈라지는 소설을 굳이 ‘비루하게 만들기’의 테마와 관련하여 묶어놓은 것은 ‘근원적인 차이’를 교란하려는 어떤 계산된 ‘책략’의 일환이 아니다. 나의 시도가 혹시 어설프게 보였을지 몰라도 리얼리즘의 동일성에 대한 임규찬 자신의 믿음을 잠시나마 유보하고 살폈더라면, 일반적으로 리얼리즘 계열과 모더니즘 계열로 분류되는 경향이 다른 소설을, 그러한 분류의 경계를 넘어 읽고 있다는 것, 그 두 계열의 소설이 90년대의 정치적·문화적 지형 속에서 교차하는 지점을 찾고 있다는 것쯤은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나의 작품읽기에 대한 임규찬의 비판이 상기시키는 것은 선언의 차원에서는 매번 갱신을 다짐하고 있지만 사고의 차원에서는 줄곧 보수(保守)에 머물고 있는 한국 리얼리즘론의 답답한 실정이다. 임규찬은 윤지관의 리얼리즘론이 80년대 리얼리즘론을 답습하고 있다는 요지의 비판을 하면서 “스스로 담지하고 있다는 리얼리즘론을 근원에서부터 재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이 지점에서도 다시 절감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 성실한 반성의 언명을 그대로 믿어도 좋을지 문득 망설이게 만드는, “이미 ‘확립’된” 리얼리즘론에 의지한 비평적 사고를 그 자신이 하고 있다. 장정일과 윤대녕이 진짜 동일유형이라는 그의 판단은 너무나도 익숙한 루카치 공식이다. 장정일·윤대녕 소설에 ‘평범함과 기이함의 이분법’이 있으며 그들의 소설은 “사회병리현상을 미적으로 변형한 단순재현물”이라는 설명은 모더니즘의 세계관을 ‘퇴폐주의’라고 규정한 루카치가 그 근거의 하나로 자연주의에서부터 지속되고 있는 ‘병리적인 것에 대한 강박증’을 거론한 예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1 리얼리즘 지지자가 루카치에게 기대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양극화에 서양의 어느 비평가 못지않게 책임이 있는 그 스딸린주의 협력자의 판례를 여전히 기준으로 삼아 소설을 심판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리얼리즘론의 ‘과감한 환골탈태’란 기적에 가까운 노릇이며, 리얼리즘·모더니즘 이분법의 해소는 더더욱 그러하다. 임규찬과 윤지관이 리얼리즘론과 모더니즘론의 소통을 촉진한다는 취지에서 행한 모더니즘 비판 중에는 그 취지를 오히려 손상시킬지 모를 오해와 독단이 적지 않다. 나는 그들의 글에서 리얼리즘론과 대화할 필요가 있는, 그렇게 함으로써 보충할 필요가 있는 모더니즘론의 당사자로 호명된만큼, 그들의 생각과 차이가 있는 나의 생각을 명확하게 진술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혹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을 해소하기는커녕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지만, 또 나 자신이 수상쩍은 이데올로기적 구조에 갇혀 있음을 스스로 입증하는 꼴이 될지도 모르지만, 차이의 확인은 적어도 좀더 원활한 소통에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2. 버먼은 살아 있다

 

리얼리즘·모더니즘을 다시 비평의 쟁점이 되게 만든 최근의 계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을 둘러싼 담론싸움을 그만두고 작품으로 귀환하자는 최원식(崔元植)의 제안이다. 하지만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관계설정은 최원식의 ‘회통’론 훨씬 이전부터 민족문학론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지고 민족문학론의 정당화에 끊임없이 이용되어온 주제이다. 민족문학의 ‘세계문학’과의 연관을 해명하기 위한 담론의 중심에는 리얼리즘·모더니즘 대립문제가 놓여 있으며, 민족문학론의 주요 프로그램 중에는 리얼리즘에 의한 모더니즘의 극복이 들어 있다. 「리얼리즘에 관하여」 「모더니즘에 관하여」 「모더니즘 논의에 덧붙여」 등과 같은 80년대의 주요 평론에서 백낙청(白樂晴)은 ‘사실주의’와 ‘리얼리즘’ 구분법을 다듬는 한편 모더니즘이 자체논리의 전개에 의해 파산에 이르렀다고 주장함으로써 리얼리즘의 선진성을 믿는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백낙청은 최원식의 ‘회통’론이나 윤지관의 ‘통합’론이 생겨날 소지를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가 가지고 있는 리비스(F.R. Leavis)적 비평감각의 결과이겠지만 그는 “20세기초 모더니즘 운동의 실제 업적은 모더니즘의 이념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적어도 작품의 층위에서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경계 넘기가 가능함을 시사했다.2 하지만 그 경계 넘기는 결국 모더니즘의 업적을 리얼리즘의 이념으로 흡수하여 리얼리즘의 판도를 넓히는 일종의 제국주의적 팽창이다. 백낙청 이론의 지도 속에는 모더니즘이 그 고유의 영역과 형세를 유지하며 존립할 여지가 전혀 없다. 제국에 합병된 국가가 이미 국가가 아니듯 리얼리즘에 합병된 모더니즘은 이미 모더니즘이 아니다.

모더니즘으로부터 그 자주성을 박탈하는 논법은 마샬 버먼(Marshall Berman)의 모더니즘론에 대한 백낙청의 비판에서도 확인된다. 버먼의 모더니즘론은 냉전시대 영미학계에서 정전의 지위를 얻으며 이데올로기화된 모더니즘에 대한 추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바탕에 급진적 개인주의와 휴머니즘적 맑스주의의 복합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따라서 백낙청이 배격하는, 미국의 신비평(new criticism) 같은 종류의 모더니즘 ‘이념’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것은 오히려 백낙청이 리얼리즘이라는 범주로 포괄하고 있는 인간해방의 비전을 근대에 특유한 인간생활의 현실적 조건과 가능한 형태에 대한 성찰을 통해 쇄신한 작업이다. 그럼에도 백낙청은 그것의 의의를 단지 근대문학의 모든 위대한 성과는 리얼리즘으로 수렴된다는 명제 증명을 보조할 ‘작품’론 수준에서 인정한다. “그것은 우리가 리얼리즘의 위대한 성취로 꼽음직한 작품들을 포용하면서 자칫 리얼리즘론에서 간과되기 쉬운 낭만주의 또는 현대주의 계열 작품의 리얼리즘적 측면에 대한 풍성한 논의마저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버먼의 성공에 대한 인색한 인정은 한 문장 안에서 실패에 대한 다급한 지적으로 이어진다. 버먼은 “근대화의 와중에서 무엇을 긍정하고 무엇에 반대할지 판별할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며, 일단 근대가 시작된 후로는 ‘모든 고정된 것이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명제가 영구불변의 진리인 듯이 말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끝없는 파괴성이 극복된 상황을 사유하는 일 자체를 어렵게 만든다.” 버먼의 모더니즘론이 어쩌면 문학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으로 표현된 근대정신의 모순에 한 해법을 제공할지 모른다는 것을 백낙청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백낙청의 최종 논평. “결국 ‘모더니즘이 곧 리얼리즘이다’라는 그의 발언은 모더니즘 옹호자치고는 드물게 포용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정도지, 모더니즘 및 모더니티의 극복을 지향하는 리얼리즘론과는 뚜렷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3

백낙청의 버먼 비판은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의 유명한 버먼 비판에 의존한다. 앤더슨의 비판 중에서 ‘전형적인 근대화 패러다임’을 낳을 위험과 모더니즘의 역사적 인식에서 ‘종합국면’을 간과한 잘못에 대한 지적을 골라 참조한 다음 백낙청은 “혁명의 임무는 근대성을 지속시키거나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성을 철폐하는 것이다”라는 앤더슨의 결어를 인용한다. 그리고 리얼리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앤더슨의 버먼 비판을 놀랍게도 리얼리즘의 당연함에 대한 반증으로 변환시킨다. “가령 버먼의 말대로 근대성의 체험에 충실하면서 버먼보다 더 확실하게 근대의 극복을 지향하는 예술이념으로서의 ‘리얼리즘’은 앤더슨의 버먼 비판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됨직하지 않은가.”4 ‘근대성의 철폐’나 ‘근대의 극복’ 같은 어휘들은 자본주의의 야만을 충격적으로 학습하며 자본주의체제의 총체적 변혁을 꿈꾼 세대에게는 특별히 호소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대혁명의 이론밖엔 진정한 정치학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형이상학밖엔 확실한 인생의 지혜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별로 차이가 없다. 버먼의 모더니즘 정치학은 인간사회의 장엄한 서사와 거대한 체제를 관념상으로 장악하는 능력이 있는 극소수 엘리뜨 지식인의 책상 위에 놓인 대혁명의 씨나리오가 아니라 그러한 서사와 체제를 헤아릴 재주가 없는 보통사람들의 일상생활 체험에서 생성되는 자유와 존엄과 연대의 서사시이다.5 백낙청은 버먼이 “자본주의의 끝없는 파괴성이 극복된 상황을 사유하는 일 자체를 어렵게 만든다”고 말하고 있으나 지금까지 자본주의 이후에 관한 사유가 부족해서 자본주의가 사멸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버먼도 즐겨 인용하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라는 맑스의 말 정도면 그 유토피아적 ‘이후’에 관한 사유에 충분하지 않은가. 아이러니를 모르는 해방의 논리가 얼마나 압제적인 체제를 낳게 되는가는 계몽이성의 변증법이 빚어낸 인류재앙의 역사를 통해 배울 만큼 배우지 않았는가.

문제의 저서 『단단한 것은 모두 녹아 날아간다』(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The Experience of Modernity, Penguin 1988)의 제목이 「공산당선언」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는 사실이 말해주듯 버먼의 모더니즘에서 맑스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경제 및 정치에서의 근대화와 예술 및 문화에서의 모더니즘을 구분하는 미국학계의 관행에 맞서서 그 양자를 변증법적 관계로 파악하는 버먼의 시각은 그 자신이 강조한 바대로 맑스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버먼의 맑스 해석은 서구 및 러시아 맑스주의의 전통에서 보면 한마디로 이단적이다. 그는 부르주아사회에 대한 맑스의 관찰로부터 부단한 변화와 동요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성을 적확하게 탐지한 ‘녹이는 비전’을 발굴하는 한편, 그 근대성이 산출하는 역동적인 에너지는 공산주의사회 건설이라는 맑스 자신의 ‘단단한 비전’마저 녹여버릴지 모른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처럼 근대적인 삶을 일종의 ‘영구혁명’으로 이해하는 배경에는 근대의 근대다움을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가능한 모든 조건의 부단한 창출에서 찾는 정치철학이 있다. 사실, 버먼의 정치학은 루쏘(J.J. Rousseau)에 촛점을 맞춘 그의 계몽사상 연구에 드러나 있다시피 ‘진정성’이라는 도덕적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급진적 개인주의에 기울어 있다. 한 개인이 다름아닌 자기자신인 상태, 그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로 체험하는 상태를 지칭하는 그 진정성에 대한 욕망은 버먼에게 “정치적으로 가장 폭발적인 인간 충동 중의 하나”이며 19세기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에서 1960년대의 뉴레프트(New Left)운동에 이르는 근대 정치문화 발전의 동력원이다.6 그러나 어쨌든 맑스가 발견한 근대적 자유의 이야기, 즉 프롤레타리아들이 바로 그들의 존재를 창조한 부르주아사회를 변혁할 세력으로 성장한다는 이야기는 버먼 모더니즘의 원형에 해당한다. 버먼은 근대성의 경험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어떤 창조적 활동도 아이러니에서 면제되지 않으며, 어떤 형태의 모더니즘도 최종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성들 및 여성들을 근대화의 객체이자 동시에 주체가 되게 하려는 시도” 또는 근대의 삶을 그 열려 있는 전체성에 충실하게 살려는 시도가 버먼이 제시한 모더니즘의 핵심임에는 틀림이 없다.7

버먼의 모더니즘론이 이론상으로 난점이 있는 근대(성)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앤더슨의 비판을 통해 충분히 입증된 사실이다. 버먼의 논의에 무반성적으로 전제된 ‘평면적인 발전관’은 근대의 역사 자체 내에 존재하는 변화와 단절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근대를 시대구분 범주로 간주한다면 버먼의 개념설정보다 앤더슨의 개념설정이 당연히 낫다.8 하지만 버먼에게 근대는 무엇보다도, 그의 저서 권두에 명시되어 있듯이, ‘경험’의 한 양식 또는 형태로서의 근대이다. 근대적이라는 것은 어떤 ‘시대정신’을 그 본질로 하는, 유기적으로 통일된 세계에 거주하는 것이나 어떤 생산양식을 기초로 수립된 활동과 기구들의 고정된 체계에 소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모험·권력·기쁨·성장, 우리의 자아와 세계의 변혁을 약속하는, 그런 동시에 우리의 소유 전부를, 우리의 지식 전부를, 우리의 존재 전부를 파괴하려 위협하는 환경에 처하는 것이다.” 근대적이라는 것은 천국의 약속과 지옥의 저주가, 성취의 영웅시와 상실의 엘레지가 함께 있는 세계를 우리 자신의 유일한 세계로 삼는 것이다. 근대에 대한 버먼의 묘사는 경험에 호소하는 모든 담론이 그렇듯이 진실을 오인하게 만들 위험을 안고 있다. 하지만 근대 특유의 경험을 비범한 통찰과 놀라운 박력으로 그려내는 가운데 버먼이 근대의 근대다움을 설명하는 한가지 중요한 모델을 확립하는 데 공헌했음은 강조할 필요가 있다. 탈근대론의 미래파적 흥분이 얼마간 가라앉은 지금, 많은 철학자와 이론가들은 탈근대라고 불리는 것이 실은 새로운 버전의 근대임을, 스스로를 성찰하는 근대임을, 또 하나의 근대임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단단한 것은 모두 녹아버린다는 근대의 항구적 특징이 작금의 근대에 이르러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역사적 근대의 성립과 함께 형성된 개인들의 상호작용과 상호의존의 단단한 질서가 해체되고 이에 따라 개인들이 사회적 결정성이 약한 삶을 살아가는 상태, 삶의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허다하고 심오한 변화를 겪게 되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고 한다. 바우만은 사람들의 개인적·사회적 삶에서 견고성과 엄격성이 두드러진 역사적 근대와 유동성과 유연성이 두드러진 새로운 근대를 구별하고, 전자를 ‘고체 근대’ 후자를 ‘액체 근대’라고 부른다.9 버먼이 묘사한 근대는 바우만이 말하는 액체 근대를 그 특수한 역사적 시간성을 무시하고 근대 일반으로 확장한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버먼이, 맑스의 ‘단단한 비전’을 ‘녹이는 비전’의 제물로 만드는 그의 해석이 예증하듯이, 고체 근대를 액체 근대 속으로 용해시켰다는 점이 아니라 액체 근대에 적응하는 방법과 함께 저항하는 방법을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제기했다는 점이다. 그의 모더니즘론은 새로운 유동성의 근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현실에서 느끼는 매혹과 공포를 이해하고 현실과의 싸움을 지속하는 데에 필요한 용기와 영감을 제공한다. 그의 모더니즘론이 이론상의 온갖 오류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효력을 가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새로운 근대의 와중에 있는 문학의 난민

 

임규찬의 비판에 답하여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명쾌하고도 강력하게 개진한 글에서 윤지관은 리얼리즘으로의 모더니즘 통합이라는 민족문학의 테제에 충실한 그의 입장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겉으로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리얼리즘일 수밖에 없다”는 그의 말은 그것만 놓고 보면 모더니즘의 ‘반(反)리얼리즘’적 입지가 얼마나 가당치 않은가를 알려주는 너무나도 명백한 진실을 지시하는 듯하다. 모더니즘이라는 범주에 포괄된 수많은 문학예술운동의 추진자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리얼한 것’을 추구한다고, ‘리얼한 것’의 요구에 충실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버먼만 해도 “우리 모두에게 모더니즘은 곧 리얼리즘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윤지관이 말하는 리얼리즘은 그렇게 리얼한 것에 대한 모든 종류의 관념, 모든 유형의 접근을 포용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모더니즘이 궁극적으로 리얼리즘과 동일하다는 그의 발언은, 그가 좋아하는 용어를 쓰면, ‘당파성’의 표현에 불과하다. 물론 윤지관은 모더니즘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다. 그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이 살벌하게 날카로웠던 80년대에도 정지용(鄭芝溶)과 이상(李箱)을 다뤘고 90년대에도 장정일과 신경숙에게 주목한, 리얼리즘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문학그룹에서는 모더니즘 작품에 대해 읽을 만한 글을 쓰는 그리 많지 않은 비평가 중 한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앤더슨의 ‘종합국면’이나 블로흐의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 가리키는 사회적·문화적 상태가 어떤 종류의 문학과 예술을 발흥시키는 조건인지 오판하지 않고 20세기 후반 이후 한국사회에는 “모더니즘의 예술적 에너지가 발현될 가능성이 살아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모더니즘에 대한 그의 관용은 어디까지나 리얼리즘의 영토 확장에 나선 원정대장이 베푸는 자선이다. 그의 모더니즘론은 리얼리즘제국 건설의 사명에 성실하게 복무한다. 한국 모더니즘론의 당면과제는 “우리에게서 과연 모더니즘 문학의 가능성은 어떠한지 묻는 일”이라는 그의 진단은 이렇게 계속된다. “이것은 한국 모더니즘의 성취가 리얼리즘의 실현에 얼마나 근접해 있는지를 묻는 일과 통한다.”

윤지관은 장정일·백민석(白旻石)에 대해 언급하면서 “가난 체험까지 포함한 삶의 현실적·심리적 질곡에서 감행하는 자아형성의 모험이 모더니즘의 실험정신과 맺어져 추구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시도는 주목할 만하다”고 평하는 식으로, 모더니즘 경향의 어떤 작품에 호의를 표시하기는 해도 모더니즘 그 자체를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에게 모더니즘 작품은 아무리 리얼리즘에 근접한다고 해도 모더니즘적이기 때문에 결국 한계가 있다. 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작품의 장점이 아니라 오히려 단점이 되는 이상한 논리가 그의 평론에서는 성립한다. “장정일과 백민석의 파괴로서의 실험성이 결국 ‘낯설게 하기’로 요약되는 모더니즘의 중심기법에 붙들려 있고 (…) 기성관습을 깨뜨림으로써만 생명을 얻는 모더니즘의 기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 이들의 비극이 있다”는 진술은 윤지관이 실은 모더니즘의 존재 자체를 마뜩치 않게 여기고 있음을 실토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윤지관이 지목한 낯설게 하기나 파괴주의는 물론 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이게 하는 주요 자질이다. 그러나 그것을 ‘기법’이나 ‘기제’라고 지칭하는 가운데 그것이 작품에 다루어진 경험과 분리가 가능하고 그 경험과 상관없이 작동하는 자동화체계처럼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 기법의 영역에서든 관념의 영역에서든 모더니즘이 기본적으로 반(反)관습적, 반(反)전통적인 것은 모더니즘이 관여하는 근대의 경험 자체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단단한 것은 모두 녹아 날아간다’는 구절이 가리키는 그 근대 특유의 경험에 충실하려면 언어의 상투화, 지각의 고정화, 인식의 정형화에 대한 저항이 당연히 필수적이다. 이것은 사실상 모더니즘 문학만이 아니라 근현대문학 전체에 따라붙는 조건이다. 윤지관이 짐짓 모르는 체하고 있지만, 리얼리즘 문학 역시 낯설게 하기에 상응하는 탈각(脫却)의 기제를 가지고 있다. 유럽문학에서 리얼리즘은 현실에 대한 정의를 통제하는 언어적·사상적 관습을 파괴하는 작업과 함께 시작되었다. 리얼리즘의 주요 기능은 많은 소설이론가들이 말했듯이 탈신비화 혹은 최신 용어로 하면 탈코드화이다.10 모더니즘은 궁극적으로 리얼리즘이라는 윤지관의 말이 암시하는 것은 리얼리즘 원론주의자의 강직한 신념이라기보다 모든 것이 녹아버리고 날아가는 근대의 와중에서 뭔가 단단한 것을 붙잡으려 애쓰는 문학적 난민(難民)의 심정이다.

그러나 그 난민의 심정은 윤지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근대의 와중에서 문학의 자리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다만 윤지관은 단단한 것에 대한 집착이 지나칠 뿐이다. 얼마나 지나친가 하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근대 자체가 단단하다고 믿고 있을 정도이다. 그는 “중간계급을 중심세력으로 하는 꿰뚫기 힘든 기성질서를 지칭하는 비유”인 ‘놋쇠하늘’을 가지고 자본주의체제를 지칭하고 그 비유의 취지는 “사물화의 지배와 자본의 지구화로 현상하는 탈근대사회에 대한 제임슨의 관찰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놋쇠하늘’이라는 비유는 자본의 ‘전일적 지배’의 막강함을 강조하는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탈근대 또는 새로운 근대생활을 묘사하기에는 적당치 않다. 탈근대사회에서는 문화가 상대적 자율성을 상실하고 사회 전역으로 확장된다는 제임슨의 설명만 보더라도 새로운 근대는 사회의 분화된 영역들의 경계가 희미한, 그런만큼 개인이나 집단의 삶에 유동성이 우세한 상태이다. 윤지관은 자본의 전일적 지배에 따라 ‘안과 밖의 경계’가 무너졌음을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목적은 새로운 유동성의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체제의 강고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가 매슈 아놀드(Matthew Arnold)에게서 따온 그 ‘놋쇠하늘’은 베버(M. Weber)의 ‘쇠우리’(stahlhartes Gehäuse)나 푸꼬(M. Foucault)의 ‘원형교도소’(Panopticon)와 마찬가지로 이미 전성기를 지난 ‘고체 근대’의 이미지에 속한다.

윤지관처럼 자본주의를 단단한 ‘체제’로 간주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옳을지도 모르고 정치적으로 유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단한 것에 대한 그의 집념은 모더니즘 작품해석과 평가에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한다. 백민석의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문학동네 2001)에 대한 그의 논평을 보면, 어쩌면 ‘놋쇠하늘’ 같은 근대 관념에 따라 동시대의 현실을 정의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암시하는지도 모를 작품에 대해, 그러한 암시에 주의하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자신의 단단한 근대 관념을 해석과 평가의 기준으로 삼고 궁극적으로는 그 관념 자체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있다.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은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난 한 젊은 남자가 십구년 전 도시 주택가와 유흥가 인근의 거대한 정원에서 주급 심부름꾼으로 일한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는 이야기이다. 그의 기억에서 중요한 것은 장원주의 아들 aw와 그 자신의 현격한 차이에 대한 충격적인 발견, 그리고 aw의 목소리, 표정, 자세, 그리고 문장 ‘베끼기’를 통해 그가 시도한 변신이다. 그 ‘베끼기’를 통한 변신은 자아형성을 지배하는 모방의 구조 또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작품의 주제는 그 구조의 막강함 또는 불변성이 아니라 잃어버린 기억의 회복을 통한 그 구조에 대한 인식과 함께 시작되는, 그 구조로부터 탈출하려는 개인의지의 태동에 있다. 그 탈구조적·일탈적 의지의 표현이 바로 작중인물이 장원에 대한 기억과 함께 회복하는 ‘뛰기’ 능력, 즉 장원에서 심부름을 하며 ‘교양’을 쌓으려고 노력한 이후 그가 잃어버린 야생의 능력이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대립이 있다면 그것은 윤지관이 생각하듯이 ‘부자/빈자’의 대립이 아니라 ‘교양/야생’의 대립이다. 기성의 권위있는 모델에 따라 형성된 자아를 스스로 폐기하려는 개인의 의지가 중심주제를 이룬 작품을 두고 윤지관처럼 계급갈등의 모티프를 이야기하고 그것이 제대로 발전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리얼리즘에의 충정을 감안하더라도 납득하기가 어렵다. 윤지관의 백민석 비판의 핵심은 “‘쇠로 만든 우리’ 같은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의 안팎 없는 지배를 확인하고 그 관념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지만, 그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의 ‘절대적인 힘’을 나타내는 작품 속의 상징인 장원은 작중인물에게, 그곳을 떠난 지 십구년이 되는 현재, “포크레인이 훑고 지나간 공사현장에서 우연히 모습을 드러낸 지난 세기의 폐허처럼”(12~13면) 나타난다. aw는 죽었고 장원의 권위도 죽었다. 작중인물이 살고 있는 현재는 심부름꾼 소년의 생활 초기에 도덕의 경계를 넘어 그에게는 격리된 또는 금지된 영역(유원지·윤락가)을 ‘뛰어다니’던 순간의 유목민적 야생이 소생하기 시작한 상태이다. 그 현재는 유동성의 삶이 시작된 새로운 현재, 새로운 모더니티(근대)이다. 백민석 작품에서 ‘놋쇠하늘’의 다른 버전인 ‘쇠우리’를 보고 있는 윤지관의 작품읽기는 자기동일성의 논리에 굴복한 비평의 한 예이다. 백민석의 모더니즘 작품에서 윤지관이 읽어내고 있는 것은 그의 타자가 아니라 그 자신이다.11

윤지관이 고집하는 ‘단단한 것’의 대표적인 예가 ‘민족’ 범주와 함께 그의 리얼리즘론의 관건을 이루는 ‘계급’ 범주이다.12 그에게 계급에 대한 인식은 문학작품에 구현된 리얼리즘의 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의 하나이다. 계급분화와 갈등의 현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그리느냐는 백민석의 모더니즘, 나아가서는 한국 모더니즘 일반이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느냐를 판단하는 확고한 기준이 된다. 조세희와 백민석을 대비한 논의에서도 윤지관은 전자가 ‘비루한 것의 원형’이 되는 세계를 다루되 그것을 “70년대 산업사회의 한 특정국면에서 야기되는 계급적 간극에 대한 의식과 맺어두고” 있는 반면에, 후자는 그 세계에 잠재된 계급갈등의 계기를 ‘상황의 무서움과 기괴함’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변환시키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계급은 윤지관 비평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렇게 단단한 범주가 아니다. 루이 알뛰쎄르(Louis Althusser)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이 속류 맑스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행한 이론적 노력을 통해서 계급은 정치경제학의 여타 범주들과 마찬가지로 ‘리얼한 것’에 접근할 특권을 확보하게 해주는 개념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니꼬스 뿔란차스(Nicos Poulantzas) 이후 계급론의 동향을 약간이나마 아는 사람이라면 계급은 객관적인, ‘아프리오리’(a priori)한 실재가 아님을 이해한다. 자본주의사회의 계급들은 생산양식이 교체되는 경우를 제외한 모든 역사적 변화로부터 독립하여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집합적 주체가 아니다. 그것들은 오로지 생산관계 내에서의 위치와 같은 구조적 기준에 의존하여 성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로지 그러한 기준에 의해 혁명적 주체성을 획득하지도 않는다. (예컨대, 산업프롤레타리아는 그 자체로 혁명계급이 아니다.) 계급 주체는 다른 주체들과 마찬가지로 사회관계의 총체성 내부에 존재하는 경제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관계들의 변화하는 접합을 통해서, 자본주의 자체의 발전에 따라 불연속적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현대 맑스주의는 경제적 관계 속에서 혁명성을 타고난 계급을 말하는 대신에 자본에 대한 투쟁을 수행할 새로운 계급구성을 따진다.13 백민석 소설이 성취한 리얼리즘 또는 정치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밝히기 위해 거기에 계급모순이 부각되어 있는가 부각되어 있지 않은가를 문제삼는 것은 이론적으로 정교한 논법이 아니다. 계급 범주를 가지고 백민석 소설을 말하기로 한다면 거기에 나타난 유목민적·자기분열적 주체성이 동시대 한국 자본주의사회의 계급구성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서열제적·가부장제적 자본주의사회에 대항할 계급 및 계급문화 구성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 물어야 한다.

계급 범주에 입각한 모더니즘 비판을 끝내면서 윤지관은 “모더니스트의 질문이 이 망각된 계급의 구조에까지 닿을 때, 모더니즘은 우리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윤지관의 계급개념 용법과 상관없이 경청할 만한 주장이다. 90년대 한국 모더니즘에서는 새로운 유동성의 근대와 대결하려는 노력보다 그것을 영접하는 흥분이 우세했다. 모더니즘 계열의 여러 작가들은 계급을 비롯한 기존의 크고 작은 단단한 집합체들이 해체되어가는 사태를 문학적으로 입증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새로운 유동성의 사회에서 개인은 굳어진 관습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을지 몰라도 그의 자유를 실현하지는 못했다. 그는 법률상(de jure) 개인이지 사실상(de facto) 개인은 아니다. 개인주의화가 철저하게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유동성의 사회에서 개인은 자아의 보존과 발전에 필요한 수단을 그 자신 이외에 어디에도 가지지 못하게 되고 개인 각자의 삶은 혼자서 대면하고 싸워야 하는 ‘위험’들로 가득 차게 된다. 90년대 모더니즘 소설에 출현한 나르씨시즘 문화는 자유의 자랑스러운 명패가 아니라 곪아터진 상처이다. 장정일·김영하(金英夏)·백민석 같은 모더니스트들의 정치적 계시는 삶의 위험을 완화시킬, 개인적 자유를 증대시킬 개인들 사이의 제휴에 대한 관심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불완전하다. 그런 점에서 ‘계급의 구조’에 대한 ‘망각’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윤지관의 생각은 유효하다. 계급은 개인의 존재를 규정하는 사회적 관계를 파악하는 방식인 동시에 개인적 자유의 실현을 위한 연대의 지점이다. 삶을 위한 자원이 부족한 개인들에게는 특히 그렇다. 그러나 새로운 유동성의 사회에서 계급은 다른 집합적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개인에게 충성을 요구하기에는 너무 허약하며 계급간의 경계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계급이 이미 자명하게 주어지는 실재가 아닌 사회에서, 계급구성 자체가 유동적인 사회에서 계급에 대한 관념이 그 자체로 정치적으로 유효한 재현 또는 대의(代議)를 문학에 보장한다고 믿는 것은 그야말로 독단주의에 속한다. 더욱이 계급과 같은 집합적 정체성의 범주를 가지고 문학의 법령을 제정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옳지 않다. 개인의 모든 사회적 관계를 본질적으로 임시적인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새로운 근대성의 시대에 진정성 혹은 자율성의 이상이 개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계급이든 민족이든 성별이든 기성의 굳어진 정체성에 충성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자신을 위해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다. 문학적 글쓰기는 그러한 의미 창조의 활동에 모델을 제시할 책임이 있다. 작가는 법전을 베끼는 자가 아니라 자유롭게 새로 쓰는 자이다.

 

 

4. 리얼리즘, 너무도 고상한 당신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리얼리즘을 고수하는 것은 시대에 뒤진 고집이라는 비판에 대하여 윤지관은 리얼리즘이야말로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대응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주장으로 맞선다. 포스트모던한 시대에는 오히려 리얼리즘의 심화가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의 주요 논거 중 하나가 한국 리얼리즘론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새로운 리얼리즘’론이다. 1930년대 독일에서 일어난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의 고전적 문헌을 모아 영어로 옮긴 책자의 후기 「결론적 성찰」에서 제임슨은 한때 자본주의사회에 대항적이었던 모더니즘이 자본주의사회의 최근 형태인 소비사회에 이르러 “상품생산의 지배적인 양식이 되었고, 갈수록 속도를 높이고 요구를 늘려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상품생산 기제의 불가결한 성분이 되었다”고 관찰한 다음, “모더니즘의 궁극적인 갱신, 이제는 자동화된, 지각혁명 미학의 자동화된 관습들을 바꿀 최종적인 변증법적 전복은 그저 리얼리즘 그 자체가 아닐까” 한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 모더니즘의 변증법적 전복으로 도래하는 새로운 리얼리즘의 핵심은 루카치적 의미에서의 ‘총체성’ 범주의 재발명이다.14 백낙청을 위시한 한국의 리얼리즘론자들이 거듭 제임슨을 참조하는 것은 아마도 그가 리얼리즘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유일하게 언급한 현대 맑스주의의 대가(大家)이기 때문일 것이다.15 그러나, 백낙청이나 윤지관이 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듯이, 제임슨적 의미의 리얼리즘과 70년대 이후 한국 리얼리즘에는 이론상으로 상당한 간극이 있어서 그가 말한 모더니즘의 변증법적 전복을 한국 또는 제3세계 리얼리즘의 진보성 증명에 동원하는 데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제임슨의 개념에 충실하게 말하자면 서양에서 리얼리즘은 봉건제적·서열제적·마법적 환경을 파괴하며 발전한 자본주의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시장체제의 요구에 합치되는 문화혁명, 즉 탈신성화·탈마법화된,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현실의 범주들을 창출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리얼리즘은 자본주의의 초기 단계, 국가자본주의나 지역자본주의 단계에 우세한 서사양식이자 문화논리이다. 따라서 독점자본주의 또는 제국주의 단계인 20세기 전반기 유럽사회에서 루카치처럼 부르주아리얼리즘의 전통을 부활시키려고 하는 것은 제임슨의 관점에서는 비역사적인 사고에 불과하다. 제임슨의 리얼리즘론은, 한국 리얼리즘론의 주요 근거 중 하나가 부르주아리얼리즘의 진보적 전통에 대한 루카치의 옹호인만큼, 한국 리얼리즘론과 양립하기가 어렵다.16 또한 그가 말한 ‘새로운 리얼리즘’은 “소비사회에 존재하는 사물화의 힘에 저항하고 총체성의 범주를 재발명”하는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한국 리얼리즘론이 추구하는 ‘인간해방의 서사’와 이념적으로 합치되고, 사물화의 구조에 대한 저항에 유익한, ‘맹렬한 지각 갱신’의 모더니즘 예술을 병합하는 미학이라는 점에서 모더니즘 ‘작품’의 성취를 포용한다는 한국 리얼리즘의 논리와 상통하지만, 백낙청이나 윤지관이 올바르게 비판한 바와 같이 한국 리얼리즘 문학에 뭔가를 시사하기에는 그 실상이 너무 막연하고 ‘당위’의 확인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제임슨이 나름대로 총체성 범주를 재발명한 결과인 ‘인식지도 제작’은 공교롭게도 새로운 리얼리즘 문학이나 예술의 기능이 아니라 그의 맑스주의적 해석학의 기능이다. 요컨대, 루카치와 제임슨을 결합하여 한국에서는 리얼리즘이 다른 어떤 문학양식보다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론적 정합성이 부족한 입론이다.

한국의 리얼리즘론자들은 서양문학사나 문학이론을 한국문학의 사정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주체적’ 입장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것은 서양이라는 권위를 리얼리즘의 정당화를 위해 편파적으로 이용하는 비평전략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때때로 자아낸다. 그들은 앞에 인용한, 소비사회에서의 모더니즘의 운명에 관한 제임슨의 발언처럼, 모더니즘의 생명력이나 창조력을 부정하는 저명한 비평가의 발언은 민첩하게 접수하지만 모더니즘이 서양에서는 이미 전성기가 지났다고 할지라도 그 전(全)역사를 통해 문학적 현대성의 중요한 모델을 창시했음을 알려주는 비평이나 이론은 묵살하기 일쑤다. 예컨대, 제임슨이 문학의 영역에서 사물화에 저항하는 미학의 범례를 찾아내고 있는 곳은 어떤 ‘새로운 리얼리즘’ 텍스트가 아니라 본격 모더니즘의 대표적 텍스트인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율리씨즈』(Ulysses, 1922)이다. 그는 『율리씨즈』 전편을 통해 사건들과 인물들이 유비적 관계를 띠며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특징에 주목하여, 텍스트 자체가 단단하게 굳어져 “서사상의 육중한 표층이 되려는 동시에 성취되어 코드화된 상징적 질서가 되려는 경향”을 영원히 유예시키는 공정이라고 해석하고, 그 공정을 ‘탈사물화’(dereification)라고 부르면서 조이스 소설의 더블린 시(市)에 독특하게 보존된 고전적 근대도시의 통일된 생활과 연관지었다.17 한국의 리얼리즘론자들은 리얼리즘이 총체성의 복원을 추구하며 그런 점에서 파편화를 반영할 따름인 모더니즘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지만, ‘총체성’의 서사가 지구적 근대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는가를 시사하는 가장 중요한 사례 역시 모더니즘 텍스트이다. 유럽 모더니즘 문학 해석의 획기적인 업적인 『근대 서사시』에서 프랑꼬 모레띠(Franco Moretti)는 모더니즘을 중심 언어, 중심 관습을 지닌 어떤 통일체로 보는 통념을 뒤엎는 한편, 『율리씨즈』가 서사시적 영웅의 형식을 변화시켜 소비의 세계라는 근대의 사회적 총체성을 장악하고 있음을 논증했다.18

제임슨이나 모레띠의 ‘율리씨즈론’은 어쩌면 한국 리얼리즘론자들의 오류를 입증하는 근거가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리얼리즘은 모더니즘의 ‘이념’은 배격해도 ‘작품’의 성취는 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율리씨즈』 같은 작품까지도 그러안는 리얼리즘론을 상정하게 되면 그것은 리얼리즘이라는 용어가 문학작품을 분별하고 문학의 기준을 만들려는 노력에 별로 쓸모가 없음을 스스로 밝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70년대 이후 한국의 리얼리즘론자들은 ‘리얼리즘의 승리’라는 원칙을 고수하는 가운데 리얼리즘 개념을 지나치게 확장해 혼란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그들은 리얼리즘을 문학양식(Literary mode)의 차원에서보다 정치적·도덕적 실천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들의 리얼리즘론은 종종 전략론이나 수양론의 일종이 되곤 한다. 예컨대, “어디까지나 창조성이 먼저고 실사구시(實事求是) 지공무사(至公無私)가 먼저이며 ‘재현’은 그에 따라오는---각 분야마다 다른 방식과 비중으로 따라오는---성과임을 기꺼이 인정하는 리얼리즘론”을 말하는 백낙청의 생각은 그것이 루카치류의 반영론을 극복하기 위한 착상임을 감안하더라도 리얼리즘 논의를 결국 문학의 실질적인 문제들과 유리되게 만드는 것이다.19 백낙청의 말은, 아주 무식하게 부연하면, 리얼리즘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다. 그것은 ‘근대의 성취와 극복’이라는 원대한 이중과제를 수행하느라 심신이 지친 리얼리즘제국의 사병들을 격려하는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문학 창작과 비평의 활로를 열어달라는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 감히 주장하건대, 리얼리즘의 개념은 다시 구성돼야 한다. 그것이 7, 80년대 민족운동과 한바퀴를 이룬 문학운동 이념으로서 구비한 대역사, 대체제, 대문학의 관념에서 해방시켜 한국문학의 시대 조류와 함께 변천하는 개념으로, ‘리얼한 것’을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문학적 노력을 기술하기에 적합한 개념으로 다시 구성해야 한다.20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국 리얼리즘론자들은 90년대 이후 한국문학에서, 특히 성장하는 세대의 문학에서 번번히 리얼리즘에 미달한 자연주의만 발견할지 모르고, 그 결과 리얼리즘은 좀처럼 실현되지 않는 고상한 이상으로 남아 있게 될지 모른다.

한국문학에서 리얼리즘은 이제 끝났다는 말은 옳지 않다. 한국문학은 분명히 서양문학과 다르다. 무엇이 정말 현실인가를 지각하고 인식하게 하려는 열정은 속출하고 있으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접경’에서 리얼리즘 계열이든 모더니즘 계열이든 우수한 작품이 나온다는 백낙청의 판단은 앞으로도 한동안 유효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쌓아올린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유산이 믿음직한 상속자를 만날지, 제2의 염상섭, 제2의 황석영이 나올지는 의문이다. 문학을 둘러싼 작금의 사회적·문화적 환경은 리얼리즘의 가망을 오히려 어둡게 한다. 리얼리즘을 뭐라고 정의하든 그것을 서사의 주류 또는 문화적 우세종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리얼한 것의 개념과 범주를 공유하는 문화공동체의 존재이다. 리얼리즘은 그러한 공동체를 창조하고 보존하는 데에 기여하면서 아울러 그러한 공동체에 의존하여 번성한다. 한국 리얼리즘 문학에 닥친 불운은 그처럼 중요한 문화공동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족·마을·계급·민족 등에 공통된 삶의 기억과의 유기적인 연관 속에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시장이 제공하는 다국적 상품의 만화경 속에서 쾌락을 추구하고 행복을 도모한다. 성별·세대·연고·계급이 다른 개인들을 내면적으로 묶어주는 공동감각은 그들의 개인적·집단적 삶의 필요와 상관없이 산출되고 조작되는 추상적 지식으로 대체되고 있다. 근대적인 삶의 한국적 형식 속에도 단단한 공동체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 리얼리즘론자들은 개인의 경험이 역사·계급·장소에 굳건히 뿌리박은 구체적 형상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요구하지만 그것은 작가 개인의 의지나 노력만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의 한국소설에서 우리는 어쩌면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칭송되는 수많은 삶의 표상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며 더불어 살아온 가난한 사람들의 체험, 민족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하는 개인과 집단의 연대기, 정직하게 노동하고 성실하게 살림하는 남녀의 위엄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새로운 리얼리즘을 표방하고 나온 신작소설에서 온갖 공허한 환상의 파노라마만을 접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일찍이 맑스가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역사는 그 나쁜 측면을 따라 발전한다고.

  1. Georg Lukács, The Meaning of Contemporary Realism, trans. by John and Necke Mander (London: Merlin Press 1963) 30면. 이 책의 독일어 원제는 ‘리얼리즘에 대한 오해에 맞서서’(Wider den mißverstandenen Realismus)이다. 임규찬과 윤지관의 루카치에 대한 신뢰는 아무래도 지나치다. 윤지관은 앞의 글에서 “루카치를 20세기 모더니즘을 배격하고 19세기 리얼리즘을 옹호한 인물로 정리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자 오해이다. 오히려 그는 리얼리즘 정신으로 당대에 지배적이었던 모더니즘의 혁신을 도모한 모더니즘의 진정한 친구였다”고 쓰고 있다. 루카치가 ‘모더니즘의 진정한 친구’라니! 1930년대 독일문학의 표현주의운동에 대한 루카치의 비판은, 그 대표적 문건(「표현주의의 위대성과 몰락」, 루카치 외 지음 『문제는 리얼리즘이다』(홍승용 옮김, 실천문학사 1985)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듯이, “모더니즘의 혁신을 도모한” 충고가 아니라 독일 파시즘의 사상적 선구자에 대한 공격이었으며 반(反)파시즘 투쟁을 위한 인민전선구축 작업의 일환이었다. 루카치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건전과 퇴폐’ ‘인간주의와 야만주의’ ‘건강한 예술과 병든 예술’ 같은 용어로 일관되게 양극화했다. 자신은 건전한 정신이자 휴머니스트라 확신하고 상대는 정신병자이자 원조(元祖) 파시스트라고 매도하는 사람이 어떻게 ‘진정한 친구’인가. 리얼리즘·모더니즘 통합도 좋지만 도덕적 분별은 지켜야 한다.
  2. 백낙청 「모더니즘 논의에 덧붙여」,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II』(창작과비평사 1985) 464면.
  3. 백낙청 「문학과 예술에서의 근대성 문제」, 『창작과비평』 1993년 겨울호 21면.
  4. 같은 글 22면. 임규찬은 앞의 글에서 백낙청의 버먼론을 기준으로 삼아 필자의 버먼론을 비판하면서 앤더슨이 분석한 ‘종합국면’, 버먼이 강조한 근대화의 양면성, 제3세계 문학의 성장을 연관시킨 논의를 반박하고 그것을 “뒤집어 이야기하면 (모더니즘의) 초기 단계와 최근 제3세계가 보여주는 문학성은 역으로 근대성의 체험에 충실하면서 근대의 극복을 지향하는 리얼리즘의 정당성을 확인케 해준다”고 주장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건 억지다. 앤더슨이 ‘종합국면’ 분석으로 밝혀낸 특이한 문화적 상황, 즉 상이한 역사적 시간에 연결되는 경험·가치·이념의 복합체는 모더니즘 발생의 조건이지 리얼리즘을 정당화하는 근거는 아니다. 앤더슨 자신, “제3세계가 모더니즘에 영원한 청춘의 샘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조건을 달고, 제1세계 모더니즘을 발생시킨 조건과 유사한 조건이 제3세계에 존재하며 그래서 마르께스(G. Márquez)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나 살만 루슈디(Salman Rushdie)의 『한밤중의 아이들』 같은 모더니즘 대작이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페리 앤더슨 「근대성과 혁명」, 페리 앤더슨·테리 이글턴 외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오길영·윤병우 외 편역, 이론과실천 1993) 165〜66면.
  5. 버먼은 앤더슨의 비판에 응답하는 중에 이렇게 말한다. “(앤더슨은) 정치에서 세계사적 대혁명만을, 문화에서 세계 수준의 대걸작만을 본다. 그는 형이상학의 높은 곳에 그가 차지한 자리를 감시하느라 그밖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자기를 낮춰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Marshall Berman, “The Signs in the Street,” Adventures in Marxism (London: Verso 1999) 168면.
  6. Marshall Berman, The Politics of Authenticity: Radical Individualism and the Emergence of Modern Society (New York: Atheneum 1970) xix면. 내가 가끔 구사하는 진정성 개념은 버먼의 개념과 대체로 비슷하다. 「진정성, 개인주의, 소설」(『창작과비평』 1997년 겨울호) 등의 여러 평론에서 나는 때로는 루쏘와 관련해서 진정성을 말하는 식으로 그 용어를 도덕적, 정치적 개념으로 쓰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도 김명환(「90년대문학 성찰의 좌표를 찾아서」, 『창작과비평』 2001년 가을호), 박성창(「비평과 진실」, 『세계의문학』 2002년 봄호) 등은 내가 사용한 진정성이 ‘진짜’ ‘진심’ ‘진실’ 같은 의미의 격식 차린 표현이나 아니면 ‘문학적 진정성’ 같은, 개념상으로 공허한 유행어와 동일한 것으로 제멋대로 취급하고 어처구니없는 타박을 했다. 그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비판이다. 나의 진정성 개념을 비교적 정확히 알아본 평자인 정정호(「동시대 문화 비평: ‘비루한 것’과 ‘카니발’의 문화 정치학」, 『비평』 2001년 겨울호)는 그 개념을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연관지었다. 하지만 버먼의 예에서 보듯이 그것은 자유주의적이지만은 않다.
  7. Marshall Berman,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The Experience of Modernity (New York: Penguin 1988) 16면.
  8. 피터 오스본(Peter Osborne)은 버먼의 근대 개념이 동질적 연속체를 이루는 역사시간을 가정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근대와 전통’ 같은 패러다임에 의존하는 무반성적인 근대성의 사회학 전통 속에 머물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오스본에 따르면 앤더슨의 근대 개념에도 문제가 있다. 앤더슨에게서 근대는 역사과정의 식별과 분석에 이용하기에는 결함이 많고 생각을 오도하는 범주로 취급되는 동시에 한 역사적 현실에 대한 정당한 명칭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두 근대 개념이 공존하기 때문에 앤더슨은 한편으로는 생산양식의 시대구분, 계급들의 상승과 하강 등에 기초한 맑스주의적 역사발전론을 내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를 두고 ‘지속’ ‘완성’ ‘철폐’ 같은 말을 사용한다. Peter Osborne, The Politics of Time: Modernity and Avant-Garde (London: Verso 1995) 5〜9면.
  9. Zygmunt Bauman, Liquid Modernity (Oxford: Polity 2000) 참조.
  10. 방증의 부담을 덜기 위해 프레드릭 제임슨의 발언만 짧게 인용한다. 소설은 “형식이라기보다 공정(工程)”이라고 전제한 다음 제임슨은 이렇게 말한다. “정말로, 리얼리즘에 대한 아주 많은 정의들이 주장하듯이, 그리고 소설의 토템 같은 선조인 『돈끼호떼』가 상징적으로 입증하듯이, 서사적 모방이나 리얼리즘적 재현이라고 여러가지로 불리는 저 공정 조작은 애초에 그 공정에 주어진 재료인, 전통으로 물려받은 또는 신성한 기존의 서사적 패러다임들에 대해 철두철미한 기반 약화와 탈신비화를, 세속적인 ‘탈코드화’를 행했다는 데 그 역사적 기능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소설은 부르주아 본연의 문화혁명이라 부를 만한 일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 Fredric Jameson, The Political Unconscious: Narrative as a Socially Symbolic Act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82) 152면. 리얼리즘을 부르주아적 또는 자본주의적 문화혁명의 일환으로 보는 제임슨의 시각은 리얼리즘에 관한 그의 생각을 보다 충분하게 발전시킨 이후의 저작에서도 변함이 없다. Fredric Jameson, Signatures of the Visible (London: Routledge 1992) 162〜67면 참조.
  11. 백민석을 비롯한 젊은 세대의 모더니스트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인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윤지관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나를 비판하면서 90년대 문학에는 유목민이 없다고 말한 누군가의 황당한 소리와 달리 90년대 문학의 실정에 맞는 지적이다. 나 자신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포스트구조주의에 의존한 90년대 모더니즘에 대해 지나치게 너그러웠던 게 아닌가 반성하는 중이다. 하지만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같은 알레고리는 어차피 관념의 게임이다. 어떤 이론으로부터 영감을 얻는 알레고리 작가의 행동을 ‘종속’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다소 엄혹하게 들린다. 90년대 모더니즘 작품들의 진짜 문제는 유행사조에 편승했다는 점이라기보다는 종종 너무 뻔한 알레고리라는 점이다.
  12. 한국에서 계급, 민족과 함께 정체성 범주의 트로이카를 이루는 성별(gender)이 윤지관의 리얼리즘론·모더니즘론에는 빠져 있다. 단단한 근대에 대한 그의 집념과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결락이다.
  13. 계급이론을 상세히 논의하는 것은 나의 목적이 아닐뿐더러 나의 능력을 벗어난다. 본문에 제시한 주장을 뒷받침할 논의 중 하나만 예시한다. Stanley Aronowitz, The Crisis in Historical Materialism: Class, Politics and Culture in Marxist Theory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0, 2nd edition) 104〜50면.
  14. Fredric Jameson, “Reflections in Conclusion,” Ernst Bloch, et. al., Aesthetics and Politics (London: Verso 1980) 209, 211면.
  15. 이론적으로 정교한 맑스주의 비평가 중 제임슨이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믿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은 좀더 강조될 필요가 있다. 제임슨은 현대 비판이론에 다방면에 걸쳐 심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제임슨과 같은 방식으로 루카치적 총체성 개념을 구사하는 사람은 그를 제외한 현대 미국 및 유럽의 비평가들, 적어도 일급의 비평가들 중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총체성에의 지향을 재현의 근본으로 간주하고 모든 문학적·예술적 재현물을 맑스주의적 대서사의 맥락에서 풀이하는 그의 해석학은 ‘총체성에 대한 항전’이라는 포스트구조주의의 표어를 신뢰하지 않는 비평가들 사이에서조차 논란이 많다. 제임슨은 “나는 맑스주의자로 남아 있는 소수 중 한명이라는 느낌이 자주 들었다”고 말한 적도 있다. Fredric Jameson, “Cognitive Mapping,” Cary Nelson and Lawrence Grossberg (eds.), Marxism and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 (London: Macmillan 1988) 347면.
  16. 제임슨의 리얼리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단계론에 따르면 리얼리즘이 가장 진보적이라는 주장은 아무리 한국적·제3세계적 특수성을 내세워 변호한다 해도 이론적으로 허약하다. 그래서 백낙청은 제임슨 단계론 중의 리얼리즘을, 그것이 ‘부르주아 문화혁명’이라는 제임슨의 해석에 괘념치 않고, 현실의 모사(模寫)라는 의미의 ‘사실주의’라고 번역하고, 리얼리즘은 “사실주의에 일부 뿌리를 두었지만 모더니즘의 기법들도 유연하게 수용하면서 모더니즘적 파편화에 지금도 맞서 싸우고 있는 운동”이라고 설명한다.(「모더니즘 논의에 덧붙여」,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II』, 459면) 그러나 리얼리즘의 정당성을 보강해주는 듯한 제임슨의 구절을 번역할 경우에는 리얼리즘을 사실주의라고 옮기지 않고 리얼리즘이라고 옮긴다. 새로운 사실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식으로. 동일인이, 그것도 엄밀한 이론체계 속에서 사용하는 동일 용어가 그렇게 의미가 판이하게 번역되어도 괜찮은지 모르겠다. 물론, 70년대 및 80년대 리얼리즘론을 이렇게 이론적 정합성의 차원에서 따져 얻은 결과만으로는 온전한 평가에 이르지 못한다. 누구나 알다시피, 한국 리얼리즘론은 단지 그 개념의 엄밀성을 추구한 학술담론이 아니라, 그때그때마다 전략적 사고가 필요한 정치운동의 일환이었다. 그럼에도 변화된 사회적·문화적 환경에 적합한 리얼리즘론의 모색을 위해서라도 지금쯤은 이론적 반성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17. Fredric Jameson, “‘Ulysses’ in History,” W.J. McCormack and Alistair Stead (eds.), James Joyce and Modern Literature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82) 132〜35면.
  18. Franco Moretti, Modern Epic: The World System from Goethe to García Márquez (London: Verso 1996) 142〜143, 200〜201면. 『근대의 서사시』(조형준 옮김, 새물결 2001) 223〜24, 310〜11면.
  19. 백낙청 「로렌스 소설의 전형성 재론」(『창작과비평』 1992년 여름호) 91면. 90년대 중반 버먼의 모더니즘론을 활용하여 리얼리즘·모더니즘 이분법을 넘어설 방법을 모색한 진정석(陳正石)은 같은 구절을 예로 들어 리얼리즘을 ‘정신’이나 ‘태도’ 등으로 규정한 70년대적 사고가 90년대에 ‘복권’되었음을 지적한 한편, 그러한 폭넓은 정의에 근거한 리얼리즘론의 개념적 엄밀성에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진정석 「민족문학과 모더니즘」, 『민족문학사연구』 11호(1997년 하반기) 30〜31면.
  20. 실은 이런 취지에서 졸고 「탈승화의 리얼리즘–––윤성희와 천운영의 소설」(『문학동네』 2001년 가을호)을 썼지만 어설픈 시작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