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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한국계 미국작가들의 현주소
민족문학의 현단계 과제와 관련하여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현재 미국 블루밍턴 소재 인디애너대학 영문과 방문연구원. 주요 평론으로 「李箱과 식민지근대」 등이 있음. jatw19@ne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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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비에뜨연방 해체(1991)와 사회주의국가들의 연쇄적 몰락 이후 끊임없이 운위된 민족문학의 위기는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면서 이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띠는 듯하다. 돌이켜보면 민족주의문학과 민족문학의 혼동이야 7, 80년대에도 흔했고, 양자를 구별하면서 후자의 ‘태생적인’ 후진성을 질타한 논자 역시 적지 않았다. 그같은 혼동과 오해를 자초한 언설을 과거 민족문학 진영 일부가 숱하게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일부 논자들이 민족문학을 간판처럼 써먹는 것을 찜찜해하면서 그 유효성만은 기를 쓰고 옹호하는 현상 자체가 뭔가 예전만 못한 민족문학의 ‘쓰임새’에 대한 방증이 아닌가 하는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 또한 현재 문단의 실감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발칸반도에서의 ‘인종청소’를 비롯해 보스니아, 르완다, 코소보 등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든, 각지에서 준동하는 민족주의·종족주의의 폐해 및 지역적·혈연적 경계에 기반한, 민족개념을 의심케 하는 인터넷 시대의 본격화와 그에 ‘부응한’ 국내의 민족해체 담론을 보노라면, 민족문학의 위기도 이전 시대와는 차원이 다른 국면으로 돌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이 선다.
국내 문단에서 왕년의 민족문학론자들이 민족문학을 입에 올리기 꺼려하고 시대를 직시하려는 젊은 문학인일수록 한반도의 뜻깊은 변혁을 추동하는 데 일조한 민족문화운동에 불신과 회의를 표명하는 것도 바로 그런 세계적 추세가 강력하게 작용한 결과들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핵심은, 그 불신과 회의가 과연 얼마나 (민족모순이 한층 노골화된) 세계화시대의 우리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는 과정에서 발원한 것인지, 궁극적으로 대안에 이르는 ‘의심’을 우리 나름으로 다그치는 길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모색하는 것이겠다. 예컨대 90년대 한반도의 ‘살아 있는 혼돈’이 지니는 의의를 탈중심성으로 풀면서 “민족을 정치의 중심으로 상정한 민족문학론의 원칙 때문에 그러한 갱신(민족문학의 자기갱신-인용자)은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1고 비판한 외쪽 진단은 그것대로 따져봐야 할 쟁점이 많기는 마찬가지다. 이제는 창신(創新)이 가세하지 않은 과거 민족문학의 대의만으로는 어지러운 세계 및 한반도 정세에 맞서 창조적 돌파구를 찾기 힘들리라는 것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지만, ‘민족을 정치의 중심으로 상정한 민족문학론의 원칙’이라는 발언도 국지적 삶에 충실하되 세계문학의 지평을 꿈꾸면서 이룩된 민족문학 최고수준의 창작 및 비평에 대한 ‘소박한’ 인식의 소산이다.
이런 때 시야를 ‘밖’으로 돌려 탈식민시대의 민족(문학)을 성찰하는 한 방편으로 한국계 미국작가들을 읽어봄이 어떨까? 이는 20세기 근대사가 남긴 우리 문학유산을 간접적으로 되돌아보는 방편도 된다. 조선인들이 하와이에 사탕수수밭 노동자 신분으로 첫발을 디딘 것이 1895년 11월이지만 대한제국(1897〜1910)의 수민원(綏民院)에서 추진한 최초의 공식 이민선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것은 1903년 1월 13일이니, 올해는 때마침 미국이민 백주년이 되는 싯점이다. 하와이에서의 한인 정착과정 자체도 눈물 없이 읽기 어렵지만,2 미국에 뿌리박는 과정에서 태동한 한국계 미국문학은 우리 근대사의 무수한 희망 및 좌절의 복합적 산물이다. 4월혁명 이후 축적된 민족문학의 전통을 진지하게 ‘의심’하는 비평에서 바로 그런 좌절과 희망의 자식인 한국계 미국작가들의 현주소를 찾아가보는 것은, 영어를 모국어로 구사하는 그들이 ‘민족을 작품의 중심으로 상정’한 장본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 세계화시대의 참뜻에 부응하는 우리문학의 진로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해외 동포문학의 기여가 요구되는 상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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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와 민족해방 및 동족상잔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근대사의 명암을 떠난 동포문학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한국계 미국작가의 작품세계를 특징짓는 가장 큰 공통점이 식민체험 및 개발시대의 어두움이라는 사실에서도 그 점은 단적으로 확인된다. 해방 전후 독일에서 활동하며 『압록강은 흐른다』를 내놓은 이미륵(본명 李儀景, 1899〜1950)을 포함하여 일본·러시아·중국 등에 집중된 동포작가들이 주로 그러하듯 조국에 대해 이중적 자아를 내면화한 한국계 미국작가들 역시 근본적으로 20세기 세계체제의 요동이 낳은 문화적 산물이다. 세계체제가 주변부 국가들에 강요한 비극적인 ‘디아스포라’(diaspora, 離散)에서 나이폴(Vidiadhar. S. Naipaul)이나 루슈디(Salman Rushdie) 같은 출중한 작가들이 탄생했거니와, 따지고 보면 “근대 서구문화가 대부분 망명객·이민자·난민 들의 산물”3이다. 우리 교포문학에 열려 있는 ‘세계적 보편성’의 반증을 ‘서구문화’에서 확인하는 셈이다. 또 이런 사실은 다종의 언어로 이루어진 겨레의 이산문학이 우리말 근대문학과 맺는 역사적 고리를 시사한다.
한국에서 이들 작가를 읽는 경험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도 (역사의 가해자이면서도 가해의 과정에서 스스로에게도 불행을 자초한 일본과 미국의 존재가 배후에 어른거리는) 식민지근대라는 한반도의 ‘현재적 과거’가 독서과정에서 끊임없이 환기되기 때문이다. 전래의 구전설화·전설·민담 등이 거의 어김없이 스민 작품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온전한 모국을 느낄 수 없는 이들이 이국땅에서 갈갈이 찢긴 ‘정체성의 충격’4을 감내하면서 쓴 이야기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읽히는 현상은 여타 서양문학의 수용과는 성격을 달리하여 생각해야 할 사안이다. 한편 제3세계의 민중들에게 ‘새로운 땅’의 꿈과 희망을 일깨우면서 때로는 자랑스런 민족애가 꽃피는 현장이기도 했지만 우리들 기억 저편에서 ‘황구의 비명’과 ‘분지(糞地)’를 불러일으키는 나라, 신은 멀고 미국은 가깝다고들 하는 중남미 국가와는 또다른 차원에서 20세기 한반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나라---수많은 이민문학을 탄생시킨 ‘새로운 땅’으로서의 미국에 뿌리내린 한국계 미국작가들이 한반도의 과거에 연루되는 방식은 여타 지역의 동포문학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계 미국작가가 미국문단에 첫선을 보인 경우로는 일제치하에서 유한양행을 설립한 류일한(Il-Han New, 1895〜1971)의 「한국에서의 소년시절」(When I was a boy in Korea, 1928)이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다고 하겠지만, 지명도나 작품성으로 볼 때 효시로는 역시 강용흘(Younghill Kang, 1898〜1972)의 『초가 지붕』(The Grass Roof, 1931)과 연작인 『동양이 서양으로 가다: 동양인 양키의 형성』(East Goes West: The Making of an Oriental Yankee, 1937)을 꼽아야 할 것이다. 『사진신부』(Picture Bride, 1983)로 일약 명성을 얻은 캐시 송(Cathy Song, 1955〜 )이나 『깃발 아래에서』(Under Flag, 1991) 이후 독특한 실험정신을 보여주고 있는 김명미(Myung Mi Kim, 1957〜 ) 같은 주목받는 시인들이 있지만, 소설 분야에 한정하면 출간 당시 미국언론이 크게 주목하고 국내에서도 베스트쎌러가 된 김은국(미국명 Richard E. Kim, 1932〜 )의 『순교자』(The Martyred, 1964)를 포함해 사후에 소수민족문학의 전범으로 떠오른 차학경(Theresa Hak Kyung Cha, 1951〜82)의 『딕떼』(Dictee, 1982), 퓰리처상 후보작에 오른 김난영(Ronyoung Kim, 1926〜87)의 『토담』(Clay Walls, 1987), 메어리 백 리(Mary Paik Lee, 1900〜 )의 자서전인 『조용한 편력: 미국의 한 선구적 한국여성』(Quiet Odyssey: A Pioneer Korean Woman in America, 1990) 등이 대략 1990년대 초까지 나온 대표적인 작품에 속한다.
하지만 ‘민족을 작품의 중심으로 상정한’ 재미 한인작가들에 대한 국내 학계의 연구는 이제 시작단계인 듯하다.5 미국비평계에서 한국계 소수민족 작가들이 순전히 작품성만으로 주목받은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그 때늦음을 탓할 일만은 아니라고 본다. 김은국을 비롯한 몇몇 한인 작가에게 쏟아진 찬사 중 많은 부분은 지금 한창인 아시안 미국학(Asian American Studies) 분야의 발흥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바,6 현재 캘리포니아 지역 중심의 소수민족 문화 및 문학 연구가 무시 못할 비중을 차지하는 미국학의 성격규정을 놓고 ‘본토’에서도 논란은 분분하다. 한국계 미국문학이 미국문단에서 소수인종문학으로서 차지하는 위상이 애매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국내독자들을 위해서라도 단순한 소개를 넘어 옥석을 가려야 할 만큼 수적으로 많아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일본계나 중국계 미국문학에 비하면 아직껏 미국문단의 변방을 제대로 탈피했다는 인상을 받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점증하는 이들의 활약은 미국에서 하나의 분과학문으로 당당히 자리를 잡아가는 한국학의 일부다. 한반도의 분단체제가 어떤 방식으로 해소되는가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 틀림없는데 향후 전망도 결코 어둡지 않다.
한국의 독자들이 이런 한국계 미국작가를 동포의 애정으로써 읽는 행위가 간단하달 수는 없다. 남의 나라 이야기로 돌리기 힘든 곡절이 켜켜이 쌓여 있기는 하지만 번역으로 접하기 마련인 대다수 독자에게 이들 작품은 영어라는 장벽이 가로놓인 엄연한 외국문학이다. 동시에 이들의 이질적 근대체험은 동포니까 이해하고 포용한다는 자세 정도로는 올바로 수행하기 어려운 ‘독법’을 요구하기까지 한다. 망국과 일제시대, 6·25, 60년대 보릿고개 등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한국근대사를 고스란히 담은 1세대 작가들에 관한한 언어의 장벽을 넘어 20세기 한국근대문학의 일부를 형성하며, 이들을 잇는---세계화시대에서 난마(亂麻)처럼 얽힌 민족·국민·인종적 현실과 그 혼란의 실상을 실감케 하는---2세대의 작품은 분단체제에서의 민족을 대국적으로 생각하는 데 남다른 암시를 줄 수 있다는 인식도 단순한 동포애 이상을 지향할 때 비로소 구체적인 내실을 확보할 수 있다.
지난 30년간 쇄신을 거듭해왔고 세계화시대를 맞아 위기국면에 접어든 민족문학에 뜻깊은 암시와 북돋움을 줄 수 있는 동포의 문학자산들을 한국근대문학의 적자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기는 비평작업이 절실하다고 판단한 데는, 이들이 되살린 역사의 진실이 분단체제 극복에 종요로운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1세대의 경우만 해도 망국의 설움과 몰락하는 전통 지식인계급의 절절한 형상화가 주를 이루는 『초가 지붕』을 비롯하여 ‘기계시대’를 선도하는 미국문명에 대한 매혹과 ‘동양적인 것’에 대한 향수를 동시에 드러낸 『동양이 서양으로 가다』, 6·25의 비극을 기독교적 실존주의 시각으로 묘파한 『순교자』, 1920년대 LA를 배경으로 이후 동란 전까지의 (그 자체가 식민지 조선의 착잡한 정세를 비추어주는) 이민사(移民史)를 한눈에 조감케 하는 『토담』, 3·1운동에서 6·25, 광주민중항쟁으로 이어지는 한국사를 파격적인 형식실험을 통해 한바탕의 해원굿처럼 노래한 『딕떼』 등은 우리 근대사의 생생한 현장증언이다.7 “망명은 민족의식의 산실”8이라는 말의 속뜻도 거기에 있지 않겠는가! 민족모순에 근대주의의 질곡마저 겹친 분단체제의 정치적 현실에서 이민은 사실상 망명과 구분하기 힘들었으니, 국가 또는 민족공동체의 구성요건에서 국적의 비중이 약화될 것이 분명한 세계화시대일수록 정체성과 탈식민성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필요함을 재미 동포작가들을 읽는 과정에서 거듭 확인하게 된다.
요컨대 세계화의 도도한 대세에 국민국가 단위의 ‘민족문학들’이 점차 주변으로 밀려나고 그에 따라 지난 30년간 축적된 우리 민족문학의 종요로운 유산이 망각되고 급기야는 민족이라는 범주 자체의 폐기 주장이 우리 지식인사회에서 성급히 터져나오는 현싯점에서 ‘민족’을 염두에 두면서 미국의 한인작가들을 읽는 것 자체가 민족문학에 대한 진지한 ‘의심’과 그 시효만료 운운하는 논자들에 대한 도전의 성격을 겸하는 것이다. 1세대 작가들과의 연속 및 단절 양면을 모두 함축한 최근 등단한 1.5 또는 2세대 작가 중에서도 한반도의 어두운 과거에 묻힌 진실을 밝히는 작업을 작가적 과업으로 삼으면서 미국시민으로서의 확실한 자기의식을 내면화한 이창래(Chang-rae Lee, 1965〜 )와 쑤전 최(Susan Choi, 1967〜 )의 작품에 촛점을 맞추는 것은 바로 그런 ‘의심’과 도전을 다함께 수행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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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창창한 작품활동이 기대되는 신인이기는 하지만, 지명도와 작품성 양면에서 이창래와 쑤전 최는 대략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각 중국계와 일본계 미국문학 작품인 킹스턴(Maxine Hong Kingston)의 『여전사: 유령들과 함께한 소녀시절의 회상록』(The Woman Warrior: memoirs of a girlhood among ghosts, 1976)와 존 오카다(John Okada)의 『노노 보이』(No-No Boy, 1957)가 중대한 이정표로 평가되는---아시안 미국문학 르네쌍스(Asian American Renaissance)9의 일부로 자리매길 만한 작가들이다. 뉴욕을 생활근거지로 삼고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처녀작인 『네이티브 스피커』(1995)와 『외국인 학생』(1998)10으로 작품성을 폭넓게 인정받고 등단한 이창래와 쑤전 최의 또하나 공통점은 이산문학의 근원적 형식이라고 해야 할 자서전적 양식을 탈피했다는 데서 찾아야 할 듯하다. 작가의 분신으로 내세우는 피붙이나 화자와의 거리를 의식하지 않고 자전적 자화상에 몰입하기 일쑤인 이산문학의 그런 지배적인 장르로부터 벗어난 것 자체가 작품의 됨됨이를 보장할 수는 없겠지만, 양자 공히 미국에서의 고단한 이민체험담이나 정착과정에서의 설움, 복고적인 한과 향수, 뿌리찾기 등 소위 민족주의적 정서에서 벗어나 미국작가로서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소수민족이 처한 국지적 현실을 여실하게 재현하면서 이곳의 우리와도 동시대적으로 호흡하는 면이 있음에 일단 촛점을 맞춰 생각해봄직하다.
물론 1.5세대, 즉 한국 태생으로 미국에서 성장한 헨리 박(Henry Park, 한국명 박병호)이라는 인물이 화자로 등장하는 이창래의 『네이티브 스피커』에도 작가의 자전적 삶이 어느정도 투영된 것은 사실이다. 처녀작이라면 으레 작가의 개인사가 중심소재로 취급된다고들 하지만, 헨리의 성장과정과 부모와의 착잡한 관계 및 이들 가족의 미국 동화과정이 특히 생생한 것은 ‘뿌리의식’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그만큼 진중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나, 역사가들 가운데 가장 타락한 속물”(18면)로 스스로를 소개하는 화자가 자아에 대해 아이러닉한 거리를 두는 이창래의 세련된 기교도 선배 한인작가에 비하면 한결 ‘느긋한 객관성’을 획득한 느낌이다. 이 작품은 주요 무대인 뉴욕 플러싱(Flushing)가 한인지역을 배경으로 소수인종공동체의 복잡한 사회상을 세심하게 포착한 것 외에도 헨리와 그 백인 부인인 릴리아(Lelia)의 문화적 충돌 및 부모 세대와의 애증 섞인 복합적 교감을 섬세하고 다각적으로 재현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과거 특정시대 생활상으로 국한되는 앞세대의 자전적 기록문학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한두 마디의 소개로 그칠 수밖에 없지만, 『네이티브 스피커』의 그런 면모는 이창래와 엇비슷한 연배인 90년대 젊은 한국계 미국작가들의 작품과 대비해보아도 확연하다. 물론 아버지와 함께 미국땅에 ‘버려진’ 한 소녀가 작가로서 미국땅에 동화되는 감동적인 성장과정을 (고향의 기억은 기억대로 살리면서) 학교숙제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절제있게 담아낸 패티 킴(Patti Kim)의 『릴라이어블이라는 이름의 택시』(A Cab Called Reliable, 1997)나 ‘바나나’(속은 백인 겉은 동양인) 같은 존재로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유리벽 같은 인종주의사회의 다양한 실상을 캘리포니아의 가상무대인 로자리타 베이(Rosarita Bay)를 배경으로 건조하고도 속도감있는 문체로 묘파한 던 리(Don Lee)의 소설집 『옐로우』(Yellow, 2001)도 따로 논해볼 만한 성과이긴 하다.
하지만 대개가 개발시대인 60년대에 한국에서 태어나 어릴 때 미국으로 건너간 1.5세대 작가들의 작품, 가령 일제시대부터 1990년대까지 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헬리 리(Helie Lee)의 『벼가 있는 정물화』(Still Life with Rice, 1996)나 1960년대 서울의 가부장적 중산층가정의 풍속도인 헬렌 킴(Helen Kim)의 『장마』(The Long Season of Rain, 1996), 부평 미군기지촌에서 혼혈아로 성장한 설움과 고난을 기록한 하인즈 인수 펭클(Heinz Insu Fenkl)의 『유령 형님에 대한 기억들』(Memories of My Ghost Brother, 1996), 자아의 상실감을 고향인 한국 및 그 역사로의 여행을 통해 극복하는 과정을 담은 자전적 스케치인 미라 스타우트(Mira Stout)의 『천 그루의 밤나무』(One Thousand Chestnut Trees, 1998) 등 이제까지의 대다수 젊은 세대의 작품은 한결같이 민족얼과 참자아 찾기로, ‘기원으로의 회귀’로 귀결된다.11 하와이 한인노동자들의 절절한 꿈과 그 역사적 진실을 파헤친 게어리 박(Gary Pak)의 『종이 비행기: 호랑이와 혁명의 나라로의 꿈의 여행』(A Ricepaper Airplane: A Journey of Dreams, to the Land of Tigers and Revolution, 1998)도 그 범주에 속한다.12
이민문학의 가족사소설로 명명할 법한 이들 작품에서 특히 생생한 것은 20세기 한국의 사라진 풍속과 혈친적 감수성이다. 반면에 그에 비례하여 ‘잡종’으로 살아가는 이른바 코메리칸들의 생활현장과 고뇌는 뒤편으로 물러난다. 물론 이들이 피붙이의 목소리와 기억으로써 되살린 한반도 식민지근대의 실상과 진실은 외면할 수 없으며, 우리말 근대문학과의 대비도 극히 흥미로운 연구주제다. 반면에 주로 소박한 민족의식 및 정체성 회복에 촛점이 맞춰지는 이들 작품에서 소수인종으로서 살아가는 코메리칸들의 생활상을 우리 당대의 문제로 절감하기는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은가 한다. 결과적으로 후일담 성격을 제대로 떨쳐버리지 못한 이들 작품과 『네이티브 스피커』를 대비한다면 일단 정체성 탐구라는 다소 낯익은 주제를 이창래는 휠씬 포괄적이고 교포사회를 포함한 소수민족의 실상에 근접하여 다룬다는 실감이 강하게 드는바, 그가 단 한편의 처녀작으로 헤밍웨이재단상을 비롯한 각종 문학상을 거머쥐고 미국 주류문단에 진입하는 데 성공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네이티브 스피커』는 헨리 박을 중심으로 세 층위의 각기 다른 세계가 반복적으로 교차·삼투되면서 전개된다. 먼저 그의 아내로 표상되는 백인세계의 질서인데, 그 질서로의 편입과정에서 백인 중심의 가치관과 충돌하고 화해하는 헨리의 의식이 표면화된다. 다음으로는 헨리를 키워낸 ‘뿌리의 세계’이다. 부모와 한국에서 온 가정부, 특히 아버지와의 미묘한 정서적 반감 및 유대가 재현된다. 그 어중간한 지점에 화자의 암약(暗躍) 반경인 뉴욕 이민사회의 풍경이 펼쳐진다. “떠나는 날 아내는 내가 누구인가를 적은 목록을 나에게 건네주었다”로 시작하는 서두부터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아내가 홀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건네준 바로 그 쪽지, 즉 헨리의 정체를 규정한, “당신은 은밀한 사람”에서 시작해 “이방인, 추종자, 배신자, 스파이”로 끝나는 목록이다. 이는 자신이 편입한 주류 백인사회에 의해 이른바 황화(黃禍, Yellow Peril)를 불러오는 존재로 규정되는 동양인 인텔리로서는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심리적 단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에 정착한 아시아인을 비롯해 동유럽·중동·지중해·중남미·아프리카인 등 제3세계인들을 상대로 첩보 및 정보활동을 벌이는 기업의 정보원인 헨리의 임무에서 그런 정체성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그 목록의 의미가 황화라는 틀로 온전히 해명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작가는 헨리가 몸담은 ‘회사’ 내의 주로 인간적인 관계에 촛점을 맞추면서 그 정치적 함의는 피하고 있지만, 돈과 권력을 손에 쥔 익명 의뢰인의 청탁을 받은 그의 정보활동이 우회적으로 암시하는 것은 미국 내의 실세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작품이 그 점을 파고드는 것도 아니며, 미국의 패권이 어떤 식으로 문화적으로 구축되는지를 보여달라고 작가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문화의 스파이”(a spy of the culture, 206면)로서의 그의 활동이 미국의 국익과 직·간접으로 연관맺고 있음은 우리로서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데, 거기서 부각되는 것도 동화의지와 뿌리의식 사이에서 흔들리는 그의 정체성을 둘러싼 갈등이다. 릴리아와의 결혼생활부터가 그의 내면이 정신적 균열로 가득 차 있음을 끊임없이 환기하는바, 아들 미트(Mitt)의 불의의 사고사가 있기 전부터 고조되기 시작한 아내와의 정신적 갈등 및 백인주거지역으로 진출했으되 그 문화에 온전히 동화되지 못한 아버지와의 불화는 “두 개의 세계를 모두 배반했거나 (그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정체성의 상실---이것이야말로 한국인의 정체성이 아닌가”13 하는 자기의문의 실례인 것이다.
그같은 이중의 정체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헨리의 심리적 갈등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의 고국귀환운동에 연루되고 이후 의문의 사고사를 당하는 필리핀계 정신과 의사인 에밀 루잔이라는 인물의 정보를 캐내는 공작에 그가 실패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그는 정보를 캐내야 하는 대상에게 거꾸로 자신의 내면을 열어 보인 것이다. 간암으로 죽은 어머니를 오랜 세월 대신한 식모의 이름조차 모르는 상황을 두고 벌어지는 아내와의 갈등은 말할 것도 없고 그가 자기도 모르게 정신과의사의 환자가 되어버리는 것은 가면을 씀으로써 여러 사람의 역할을 다중인격적으로 연출할 수 있음을 자신하는 인간에게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인 일종의 정신분열 현상이다. 하지만 『네이티브 스피커』의 세 층위에 걸친 내러티브들이 한 점으로 집약되면서 이민사회를 움직이는 정치적 암투의 내부실상이 파헤쳐지는 결정적 계기는, 루잔 공작에 실패한 화자가 자원봉사자로 가장하여 존 쾅(John Kwang)이라는 한국계 정치가의 조직과 그 배후를 캐는 일에 착수하면서부터다.
자수성가한 한국계 미국인의 한 전형이자 아시아계 이민들의 성공신화를 상징하는 존 쾅은 『네이티브 스피커』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형상화된 인물 중 하나다. 2차대전 직전에 태어나 전란으로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 미군장성의 하우스보이로 미국으로 건너온 존 쾅의 이력은, 60년대에 단돈 200달러를 손에 쥔 채 남한땅을 떠난 헨리의 아버지처럼, 1세대 한국 이민자들의 선망의 대상인 동시에 한인 2세의 자랑스런 모범으로 제시된다. 흥미로운 점은, 소수인종으로서 ‘미국의 꿈’을 성취한 한 전형으로 제시되는 그의 정치적 기반이 계(契)라는 한국 특유의 공동체적 발상에 근거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토담』에서도 계모임을 통해 한인사회의 끈끈한 공동체의식이 유지되는 생활현장이 여실히 그려진 바 있고, 그같은 친목 겸 신용단체는 아시아계 미국인사회에서는 폭넓게 존재하지만, 존의 ‘계조직’은 그와는 성질을 달리한다. 그것은 뉴욕의 수많은 불법체류자들을 포함한 소수인종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조직이다. 이는 헨리의 아버지가 고집한 (철저하게 한인 중심의) 배타적 집단의식과 민족의식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 점에서 이창래가 작품 앞머리에 휘트먼의 시 일부를 인용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사실상 그는 계라는 이름으로써 평등한 초인종적 풀뿌리협동체라는 이념을 꿈꾸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런 이념을 표방하는 존 쾅의 정치적 신념이 ‘위대한 아메리카’를 노래하다가 허위의식에 빠져든 휘트먼의 특정 면모, 즉 모든 살아 있는 문화적 차이들을 하나의 이념을 위해 무차별 녹여버리는 미국인 특유의 관념에서 과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위계에 기반한 유교(儒敎)적 윤리를 내면화한 그의 이념이 휘트먼 식의 도가니(Melting Pot) 개념을 탈인종주의의 구도로 각색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드는 마당에 그런 물음은 야무지게 제기할 필요가 있겠다. 이를테면 사해동포주의를 내세우는 한편 철저하게 미디어 조작과 정략적 계산을 따르는 그 조직의 선거전략 및 운동방식이 기성 백인중심의 정치문화와 사실상 차별성이 없다는 사실도 독자의 의구심을 더 깊게 하는데, 계라는 형식으로 그러모으는 정치자금이라는 것이 세무당국에 사실상 포착되지 않을뿐더러 사적으로 유용한 혐의까지 암시되는 검은돈인 것이다.
헨리가 존 쾅의 세계에 빨려들어가는 와중에 뉴욕 시장의 물망에 오르는 그의 조직을 와해시키는 사고가 터짐으로써 작품은 긴박한 반전을 맞게 된다. (존 쾅의 실토대로 사실상 그가 고용한 것으로 드러나는) 괴한의 사제폭탄으로 선거운동 사무실에서 일하던 최측근이자 자금관리책인 (스페인계) 에두아르도 페르민과 (독일계) 청소부 헬다 브란다이스가 질식사한다. 이후 이야기의 전개는 부패와 추문이라는 다소 낯익은 저널리즘의 사건보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에두아르도가 고급아파트를 소유하고 야간대학생 자원봉사자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호화생활을 했음이 폭로된다. 탈세와 횡령 등의 혐의로 언론의 집중적인 공세를 받는 와중에 존 쾅은 음주운전으로 함께 탄 접대부인 미성년 한국처녀를 죽게 하는 사고를 내고 만다.
백인중심주의뿐만 아니라 소수인종들 사이에도 숱한 문제가 얽혀 있음을 실감케 하는 존 쾅의 정치적 행로에서 핵심은, 그의 몰락을 추적하는 화자의 복합적인 시선이다. 동포인 존 쾅의 약점을 캐내야 하는 스파이로서 자원봉사자를 가장한 이중적 상황 자체가 그같은 복합적인 시선을 유도하는 셈이지만, 그 함의는 무척이나 착잡하다. 루잔의 경우와는 또 다르게 공작이 진행될수록 헨리는 점차적으로 아버지의 과거와 겹쳐지는 존 쾅의 현재 및 오늘날 한국계 시의원을 있게 한 처절한 그의 과거를 이해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진지한 고민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선거운동 사무실이 피습당한 후 퍼민의 일을 인계받은 그가 기부자명단을 훑어보면서 떠올리는 상념도 그중 하나다.
존 쾅처럼 나도 그들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바라든 바라지 않든 난 그들, 그들의 배우자, 자녀, 직업, 수입, 삶 등을 소유한다. 보면 볼수록 그들의 이야기가 한결같음을 나는 기억한다. 그것은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가 어떻게 비행기편으로, 배편으로, 담을 넘어서 오는가. 여기에 도착하면 나는 일을 한다. 마침내 나 자신을 위해 일하는 날이 올 수 있도록 일을 한다. 나는 너무도 열심히 일을 해서 결국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고 만다. 나는 아내도 자식도 잊는다. 그래서 이제는 나의 오래된 모국어마저 잃어버렸다. 그리고 내가 떠나온 이역만리 저 고향땅 선산, 찾는 이 없이 쓸쓸히 버려진 조상의 산소까지 망각한다. (279면, 강조는 인용자)
많게는 500달러에서 적게는 10달러에 이르기까지 존 쾅에게 기부한 소수민족 시민들의 인적 사항이 적힌 명단에서 헨리 박이 자신의 잊혀진 뿌리를 상상하는 상황 자체가 “현실적인 불평등과 착취와는 상관없이 민족·국민은 언제나 하나의 깊고 수평적인 동지애로 인식된다”14는 사회학 논제의 실증적인 예를 문학이 제시한다고 혹자는 주장할지 모른다. 실제로 이 대목은 ‘새로운 땅’에서 한국인이든 누구든 단일한 인종적 정체성을 고집하는 일체의 언설이 얼마나 편협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명도 된다. 자신의 기원을 망각해가면서까지 ‘새로운 땅’에 뿌리내린 소수인종들의 설움과 수모는 역설적으로 미국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 것이다. 무일푼으로 뉴욕 시의원이 된 촉망받는 정치지도자인 현재의 그에게서 헨리 박이 부모와 같은 무수한 소수민족들의 미래를 보는 것은 극적·심리적 개연성이 충분한데, 이는 그 자체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그에게도 치유적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모든 사건의 책임을 견인주의(堅忍主義)적으로 떠맡는 존의 비장한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군중들이 매도하는 그의 편에 서려는 헨리 박의 심경을 독자로서는 애정을 가지고 헤아리게 된다. 그가 존 쾅의 조직에 깊이 개입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꿈’을 좇아온 무수한 이민자들과 정신적 일체감을 느끼면서 아내와도 점진적으로 화해하고 종국에는 아버지의 과거까지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작가의 감상(感傷)만으로 몰아세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헨리의 그같은 동류의식이 존 쾅의 허위의식에 대해서조차 연민과 동정에 바탕한 인간애로 번져가는 순간, 우리는 ‘수평적인 동지애’의 기만성을 심문하지 않을 수 없다. 영웅적으로 자신의 몰락을 감내하는 듯한 그를 통해 헨리가 혼란스런 자기정체성을 정리하는 과정이 흔쾌하지 않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무엇보다 작가가 그 동포정치가의 이념과 과오에 대해 엄정한 거리를 둔 것 같지 않다. 에두아르도의 진실을 둘러싼 대목의 해명도 독자의 혐의를 짙게 한다. 존 쾅은 자식처럼 보살핀 에두아르도의 배신(자금횡령)을 감지하고 중국계 조직폭력에게 ‘청소’를 부탁했는데, 그에 대한 해명이라면 누구보다도 그 자신의 자기비판이 선행되었을 법하다.15 그가 헨리를 오히려 정치적 목적에 이용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복잡미묘하게 얽힌 이들의 심리적 상황을 치밀하게 재현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소설에서는 정치적 희생양으로서 사태를 비극적으로 인고하는 그의 모습이 줄곧 강조될 뿐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사해동포주의의 비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형제애와 평등을 호소하면서 인종주의사회의 착잡한 모순을 자기증오로 푸는 존 쾅의 대중연설(151〜52면)이 60년대 흑인민권운동의 수사(修辭)를 답습한 것임은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다.
전락한 하우스보이에 대한 헨리의 심리적 투사가 좀더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소수인종 정치가로서 존 쾅이 품은 정치적 비전과 그 조직의 한계를 소수인종사회의 실제현실과 밀착해서 좀더 포괄적으로 직시해야 했다는 비판이 가능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기성정치인들의 정략을 답습하는 과정에서 초래된 존의 몰락을 하얗게 달아오른 돌멩이 위를 걷는 순교자의 고난에 빗대어 묘사한다거나, 소수인종 출신의 특정 정치가가 저지른 과오와 무책임이 무엇인가를 묻기보다는 존 쾅의---그 나름의 진정어린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고뇌를 인간의 보편적 약점으로 얼버무릴수록, 그에게 부여된 면죄부의 효력은 떨어진다. 그 점에서 헨리 박의 이야기가 탈인종주의의 꿈을 꾸기에는 아직 때가 이르다는 경고를 준다고 볼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겠지만, “『네이티브 스피커』가 탈인종주의적 유토피아 내러티브로 읽혀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적 유토피아를 냉소적이고 반동적으로 막아버리고 안전하고 개인화된 공간으로의 퇴각을 드러낸 이야기로 읽혀야 하는가?”16라는 양자택일적 물음은 오히려 책임있는 작품평가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정당한 면죄부인가 하는 것보다 더 핵심적인 사안은, 헨리가 존 쾅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기부자명단을 어쩔 수 없이 상관인 데니스 호그랜드에게 넘겨주고 에두아르도의 죽음에 관한 진실은 자기만의 것으로 함으로써 존 쾅과 데니스가 대변하는 이념과 조직 모두에서 놓여난다는 결말의 의미다. 무수히 이질적인 언어의 도시 뉴욕 거리의 활력은 활력대로 포착하면서 이민 2세들을 위한 아내의 발음교정수업을 ‘말 도깨비’(Speech Monster)로서 도와주는 것으로 끝맺는 결말은 이중스파이로서의 그의 삶이 청산되었음을 뜻한다. 아버지가 묶여 있던 과거 및 이념의 수렁에 빠진 존 쾅의 현재 모두에서 멀어지면서 마침내---‘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아이들을 건강한 미국시민으로 키우는---일상의 희망을 독자로 하여금 공유케 하는 끝맺음은 손색이랄 것이 없다. 또 이 작품이 최근에 뉴욕시 권장필독서 물망에 오른 것도 기뻐할 일이다. 다만, 그 희망을 희망답게 품기 위해서는 ‘계’라는 발상으로 다인종적 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한 동포정치가에게 이끌린 헨리의 자기물음은 더 통렬해야 했고, 아버지와의 화해도 단순한 이해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는 아쉬움만은 끝까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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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국경을 초월한 ‘러브 스토리’로 소개되고 현지에서도 대체로 그렇게 알려진 쑤전 최의 『외국인 학생』17은 『네이티브 스피커』와는 무척이나 대조적인 작품이다. 추리소설 양식을 활용하면서 생기발랄한 시사(時事)적 구어와 독특한 잠언적 문체를 구사하는 『네이티브 스피커』와는 달리, 『외국인 학생』은 내러티브 구도나 언어 면에서 격조높은 사실주의적 재현에 기반을 둔 작품에 가깝다. 쑤전 최는, 앞으로 격동의 6, 70년대 미국 젊은이들이 어떤 이유로 안락한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체제에 의문을 제기하고 정치적 투쟁에 뛰어들었는가를 밝혀보겠다고 한 바 있지만, 『외국인 학생』만 봐서는 그가 자신의 특정한 신념을 작품에 직접적으로 투사하는 작가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대번에 알 수 있다.
모두 14장으로 구성된 『외국인 학생』은 두 남녀의 내밀한 심리적 개인사를 중심으로 해방 이후부터 1950년대 초·중반의 한반도 상황과 동시대 미국 남부 테네씨주 스워니라는 소도시의 풍경이 번갈아 교차된다. 일제치하에서 영문학 교수를 지낸 아버지---쑤전 최는 최재서(崔載瑞, 1908〜64)의 손녀다---를 둔 안 창(Ahn Chang)과, 인디애너주 출신인 작가 자신과 전혀 무관하달 수는 없는 백인처녀 캐서린 먼로의 해후에 이들이 처한 역사적 현실이 따라온다. 어긋나고 만나는 두 남녀의 정신적 방황이 병치되면서 한국남성과 미국여성이 바로 그 시대상황에서 겪음직한 삶을 중심으로 각각이 처한 역사적 현실, 즉 전란에 휩싸인 20세기 중반의 한국과 인종주의가 내면화된 미국 남부가 재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첫 장편을 내기 이전의 여러 단편에서도 심상치 않은 싹수를 보인 쑤전 최지만 우선 놀라운 점은, 이제 갓서른을 넘긴 작가가 한국동란을 안 창의 파편적 기억이 아닌 그의 현재상황으로 재현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1950년대 한국은 영어로 씌어진 부실한 역사책이나 현재 싸우스 벤드(South Bend) 소재 인디애너대학 수학과 교수인 부친의 회고로밖에는 접할 수 없는 과거다. 또한 1967년생인 작가에게 1950년대 남한 상황과는 질적으로 다른 과거임이 분명한 동시대 스워니 지역이나 레스턴 부인과 크레인 등 남부인들의 면모 역시 하나의 인상적인 풍속화다. 남북이 전쟁으로 치닫는 과정에 휘말리는 한 젊은이의 고뇌를 세밀하게 추적하는 한편 남부 소도시의 사회상을 풍부하게 재현한 『외국인 학생』을 연애소설이라고 한다면 그 역시 제한적인 정의가 될 수밖에 없다. 미국땅에서 조우한 두 남녀 사이에서 기적처럼 싹트는 사랑의 추이를 따라가는 동시에, 그 사랑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들의 ‘전형적 상황’을 그리면서 전혀 다른 두 시공간을 넘나드는 너름새도 보통이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인종의 벽을 넘어 ‘인간적 공감’의 차원에 도달하는 두 인물의 조우는 거시적으로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낀 한국의 해방공간 및 1950년대 중반 미국의 남부라는 전혀 이질적인 두 세계를 만나게 하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외국인 학생』이 완벽하다는 말은 아니다. 삶에서든 비평에서든 완벽이라는 평가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음은 두말할 나위 없지만, 생판 공부해야 되는 한국의 해방공간과 그와는 또다른 과거인 1950년대 미국의 남부지방을 상상할 수밖에 없는 경우, 아무리 다부진 재능이라고 해도 불만스런 점이 없을 리 없다.(하지만 작가가 몸으로 부대낀 미국 남부지역의 재현이 동란 전후의 서울 묘사와는 다른 질감으로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안 창과 깊은 우정을 나누는 것으로 그려지는 사회주의자 김재성의 행적과 성격도 그중 하나다. 모호하고 불확실한 ‘터치’에다가 낭만적 혁명주의가 들씌워진 그의 면모는 해방 직후의 구체적인 정국과는 겉돈다. 이는 해방공간을 무대로 설정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삶의 구체적 현장감을 불어넣을 수 없는 작가의 한계다. 또한 남북의 착종된 모순과 외세의 다각적인 개입이 얽혀드는 분단상황에 대한 인식도 어떤 총체적 상상력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정보를 집약한 면이 더 강하지 않은가 한다. 쑤전 최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해방공간을 재현했다는 비판은 물론 아니다. 역사소설에 값하는 상상력이라면 사실 자체의 엄밀성도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인데, 『외국인 학생』에서는 그 엄밀성에 집착한 나머지 오히려 한국전쟁을 둘러싼 제국주의 세력의 복잡한 이해관계 및 한반도의 책임을 너무 제한적으로 상상하지 않았는가 한다. 『외국인 학생』의 이런 한계는 가령 분단모순을 온몸으로 감내한 이태준(李泰俊)의 단편 「해방 전후」(1946)에 비하면 더 두드러진다.
그러나 한국계 미국작가의 작품을 평가하고 그것이 어느 정도의 성취인가를 가늠하는 데는 역시 동시대 한국계 미국작가들의 작품도 거론해야 좀더 공정하지 않을까? 그 가운데서도 이창래의 두번째 작품인, 종군위안부의 문제를 다루면서 『외국인 학생』과 유사한 시점 및 배경의 변주를 인상적으로 선보인 『어떤 제스처 인생』(A Gesture Life, 1999)을 대비해보면 어떨까? 한국인으로 일본인 가정에 입양되어 일제의 군의관으로 복무하다가 결국 미국시민으로 귀착된 프랭클린 하타(Franklin Hata)의 심리를 따라가면서 1980년대 베들리 런이라는 미국의 한 소도시와 2차대전 미얀마의 일본군 주둔지라는 전혀 다른 두 시·공간이 병치되는바, 하타와 백인여성인 메어리 번즈의 사랑이 전면에 깔리는 것도 『외국인 학생』을 연상케 하는 내러티브 구도다. 하타의 한국인 입양아 써니를 비롯해 베들리 런의 사회풍속 및 다양한 인물군상, 미얀마에서 하타가 사랑한 조선여성 끝애 등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개성적인 인물을 창조했고 위안부 문제를 단순히 도덕적 차원에서 단죄하지는 않은 『어떤 제스처 인생』은 『외국인 학생』 못지않은 긴장을 유지한다.
하지만 미얀마와 베들리 런이라는 각기 다른 정글에서 살아남은 하타의 ‘제스처 인생’에서 이루어지는 도덕적 성찰이 좀더 넓은 역사적 현실의 맥락에서 벗어나는 현상은 쑤전 최에게서는 발견하기 힘들다. 정신대의 진실들이 하타의 실존주의적 ‘라이프 스타일’을 치장하기 위해 동원되는 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소위 종군위안부의 숨겨진 진실은 이미 노라 옥자 켈러의 『종군위안부』(Comfort Woman, 1997)와 테레즈 박(Therese Park)의 『천황의 선물』(A Gift of the Emperor, 1997)에서 다뤄진바, 한국여성의 수난을 그리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이창래의 관념적 경향은, 직정(直情)적인 고발과 도덕주의적 소망성취로 경도된 『천황의 선물』보다는 『종군위안부』와 대비할 때 더 분명하다. 한국전쟁의 ‘당사자’인 미국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나 위안부들의 몸서리쳐지는 한을 온몸으로 구현하는 아끼꼬(Akiko)라는 여성의 회상을 통해 밝혀지는 그 진상의 처참함도 어느 자연주의적 묘사 못지않게 독자를 전율케 한다. 조선이름 효순을 감추고 살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아끼꼬와 과거의 저주에서 벗어나기를 염원하는 딸인 백합(Bakhap)의 시적인 성숙과정, 그리고 두 모녀의 간단치 않은 애증관계를 통해 위안부 문제에 접근한 켈러의 필사적인 글쓰기에 비하면, 하타와 끝애의 다분히 심미주의적인 사랑이 전면에 깔리면서 등장하는 미얀마와 베들리 런이라는 사회는 단순한 배경 이상의---다시 말해 작중 인물들을 그렇게 존재케 하는---살아 있는 생활공간이라는 실감이 덜한 것이다. 각도를 달리하면, 『어떤 제스처 인생』이 작가의 역사공부와 상상력이 결합된 집중도에서 『외국인 학생』에 비하면 더러 손색이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아버지로부터 듣고 역사책에서 읽은 것이 전부인 50년 전의 한국근대사와 나름대로 씨름한 쑤전 최의 한무릎공부가 괄목하다고 하겠다.
그런 씨름의 흔적은 물론 안 창과 캐서린에게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안 창은 일제치하 때 일본 유학을 한 지식인이다. 영문학 교수인 부친의 영향으로 미군정 치하에서는 통역·번역을 한 그가 휴전 이후 한국을 떠나는 것은 20세기 한국지식인 형성의 전형적인 경로 중 하나를 예시한다. 해방 전 오오사까 기숙학교에서 유학하면서 민족차별의 수모가 뇌리에 박히는 상황도 그러하거니와, 미국 선교단체의 장학금을 받고 스워니에 정착해서조차 부지불식간에 일본어가 튀어나올 정도로 일제의 잔재가 내면화된---동시에 미공보부(USIS) 요원의 편리를 위해 창(Chang)에서 척(Chuck)으로 ‘개명’당한---그가 남과 북의 이념 어느 쪽에도 공감하지 못하고 조국을 버리는 상황 역시 6·25의 비극이 한국지식인에게 남긴 상처다. 남부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한국전쟁의 실상을 소개하는 그가 조국에 대해 질문을 받는 순간마다 보이는 ‘실어증’은 그같은 내상(內傷)을 웅변하는 것이다.
안 창이 조국을 등지는 것도 그런 상처에서 비롯된다. 그가 인공(人共) 치하의 서울에서 살아남는 장면도 생생하지만, 미군정 책임자들에게 차례로 이용당하는 과정에서 김재성을 찾아나섰다가 우연찮게 4·3사태의 현장인 제주도로 흘러들어가고 거기서 빨치산으로 몰려 혹독한 고문을 당한 것은 식민지 한반도의 전란이 어떤 방식으로 한 개인의 삶에 집중되는가를 예증한다. ‘새로운 땅’인 미국에서도 악몽으로 남는 기억은 제주도에서의 참극이 배면에 깔리는 고문에 관한 것이다.
그후 그에게 남아난 것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고문관들처럼 그도 도와달라는 자기 몸뚱이의 울부짖음을 듣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몸뚱어리를 쇠사슬, 전화선, 사지 사이의 브릿지(전기의 용량, 저항, 유도 등을 측정하는 기구---인용자)를 통해 더 많이 알게 되었고, 전선줄이 친친 감길 때 육체에 대한 사랑은 더 커졌다. 전선과 밧줄로, 브릿지로 몸뚱어리는 조각조각 베어지고 폭발하고 입과 사타구니는 절개되고 사지는 떨어져나갔다. 그는 더이상 오줌을 지리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 자체의 경계 너머로 내던져진 그의 육체는 세상과 자신 사이의 어떤 구분도 할 수 없었다. (309〜10면)18
한국의 식민지근대와 이어진 동족상잔이 남긴 생생한 이데올로기적 모순이 안 창의 육체에 생생하게 각인된다. 남과 북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정신적 난민으로 미국을 향하는 그는 여러모로 최인훈 장편 『광장』(1960)의 이명준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안 창은, 최인훈 스스로 고백한 “저 빛나는 4월이 가져다준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4·19의 싸움을 기억하고자 하는 독자와 함께 충분히 나누었다고 보기 힘든, 지식인의 정교한 회의주의가 상대적으로 두드러지는 이명준과는 다른 면모도 있다. 갈매기의 자유를 그리워하는 4·19세대의 그 지식인 자화상이 여전한 감동을 준다고 해도, 파국으로 치닫는 남북 모두에 공감할 수 없을수록 오히려 더 커지는 안 창에 대한 읽는이의 공감대는 최인훈의 그 지식인 상이 주는 갑갑함과는 차이가 있지 않나 싶다. 각기 고문의 기억을 뒤로 한 채 자신을 만신창이로 만든 조국땅을 미련없이 버리고 ‘새로운 땅’을 선택하는 그들에게 민족의식을 요구하는 것이 오히려 관념적 지식인의 한낱 사치로 느껴지고 한국지식인의 정신적 이산의 한 탁월한 전형이 바로 그런 조국을 등지는 과정에서 구현된다는---또한 사랑을 통해 허무를 극복하려는---점에서는 일치할지 모르지만, 이명준은 지적 회의주의로부터 끝내 한걸음을 더 내딛는 안 창의 도정에서 탈락한 지식인이라는 느낌을 씻기 힘들다.
다른 한편 한국의 정신적 난민과 천신만고 끝에 ‘영혼의 공감’에 이르는 캐서린 먼로라는 미국여성은 어떤 인물인가. 작품 서두부터 독자를 사로잡는 것은 남부의 번듯한 가문에서 고명딸로 자란 캐서린의 정신적 공허감과 반항심리다. 이는 물론, 영어표현대로 하면 ‘어색한 나이’(awkward age)인 사춘기에 찾아오는 ‘증상’의 일부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그 자체로 캐서린이 처한 안락한 계급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은 병리적 현상이다. 사교계의 주요인사인 어머니 글리와 아버지 조 먼로의 규범화된 가족생활에서 아무런 삶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정해진 삶의 코스만을 따라가는 남자친구 커틀린과도 또래의 교감을 이룰 수 없는 상황에서 발원하는 심리적 공황인 것이다. 아버지의 대학동창이자 영문학 교수인 찰즈 에디슨(Charles Edison)과 ‘치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것도 바로 그같은 공황상태에서 비롯된다. 스워니 지역의 명사처럼 군림하는 그는 안 창과 일종의 연적(戀敵)이 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가령 『여전사』나 에이미 탄(Amy Tan)의 『조이럭 클럽』(The Joy Luck Club, 1989)처럼 여성해방의식이 짙게 투영된 중국계 미국문학과도 구분되는 『외국인 학생』의 독특한 면모는 캐서린·찰즈의 일탈이나 3각 관계의 미묘함, 캐서린의 반발심에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도 재능을 인정받지만 진지하게 살아내야 하고 진정으로 즐겨야 하는 삶에 대해서는 불구에 가까운 찰즈의 내면에서 백인지식인 남성의 파괴적 욕망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쑤전 최는 그런 그를 향한 캐서린의 집착 역시 기본적으로 백인여성이 그 당대 사회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삶의 박탈감에서 기원한 것임을 치열하게 추적하는 것이다.
단순한 일탈의 재현이었다면 파악하기 힘들었을 낭비된 두 삶의 심연이 드러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즉, 십대 소녀와 사십대 대학교수와의 성적 관계가 노골적으로 그려질수록 한편으로는 캐서린이 저버린 삶의 가능성들이 분명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가 지닌 생의 활력에 기생한 찰즈의 지적 딜레땅띠슴(dilettantisme)이 부각되는 것이다. 찰즈와의 관계를 알아버린 어머니와 교신이 단절된 채 데림추처럼 정부(情夫)의 주변을 맴도는 그녀가 그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관성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문케 하는 ‘황폐한’ 안 창에게 끌리면서부터다. 반면에 번듯한 백인여자의 사랑을 감당하기에는 심신이 너무나 망가졌음을 의식하면서 내면으로 움츠러드는 안 창이 캐서린의 다가섬에 살금살금 반응하는 태도도 때이른 정신적 고사(枯死)에 저항하는 풋풋한 젊음의 생기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나름으로 역사의 멍에를 짊어진 두 남녀의 ‘떨림’이 하나의 화음으로 합쳐지는 과정이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 이들의 과거에 대한 쑤전 최의 해명이 감상주의를 떨친, 인간의 감정에 대한 곡진한 인식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 이들의 사랑은 작가가 이들의 황폐한 삶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대면하는 과정에서만 비로소 움틀 수 있는 갱생의 기운이다. 안 창과 캐서린의 아슬아슬한 다가섬이 작가의 손을 떠나서 이루어지는 듯 보이는 것도 바로 그런 인식이 철저하기 때문이다. 안 창과 캐서린의 사랑이 십수년이 지난 싯점에서 불치병에 걸린 어머니 글리와 캐서린의 ‘산문적인’ 화해를 불러오는 것도 훈훈하지만, 그 사랑이 두 남녀가 각기 처한 각다분한 처지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으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이야말로 연애소설로서 『외국인 학생』이 이룩한 뜻깊은 성취 가운데 하나라 하겠다. 이 둘의 사랑이 독자에게 아무런 장밋빛 기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마무리되는 결말도 이 작품의 독특한 면모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주어진 현재를 감내하면서 한발씩 다가서는 두 남녀가 마침내 어떤 공감에 다다르는 과정---캐서린을 쟁취하기 위한 안 창의 모험---에 낯익은 듯하면서도 결코 진부하지 않은 시적 서정이 담기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여름방학을 맞은 안 창이 시카고의 한 제본소에서 비상근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캐서린과 찰즈의 결혼소식을 듣고서 잊고 있던 예사로운 일정을 기억이라도 한 것처럼 스워니로 돌아온다. 1955년의 이 ‘현재’ 사건은 김재성을 찾아나섰다가 예기치 못하게 제주도에 흘러들어가는 1950년의 ‘과거’ 이야기와 겹쳐지면서 점진적으로 한 점으로 모아진다. 그 과거는 사고무친의 빈털터리인 그가, 찰즈와의 삶에 체념하려는 캐서린을 찾아나서는 현재 여정과 합쳐진다. 친구를 만나려다가 빨치산으로 오인받아 악몽에 빠져든 안 창의 처절한 몸무림이 캐서린의 ‘낡은 자아’가 해체되는 고통과 어우러지면서 새로운 삶의 예감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면, 이 작품이 연애소설 이상의 지평에 도달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프랜이라는 늙다리 백인여자에게 (책갈피에 숨겨진 눈먼 돈을 찾아내라는) 시달림을 받다가 파지(破紙)작업 중 발견한 10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달랑 집어들고 제본소를 뛰쳐나오는 대목에서 발휘되는 쑤전 최의 유머감각도 일품이지만, 찰즈와 약혼한 상태에서 안 창의 그런 대책없는 결단을 받아들이는 캐서린의 심리를 그리는 작가의 솜씨도 사랑에 안달복달하지 않는 느긋함이 있다. 작품은 어렵사리 성사된 이들의 해후를 열정적이지만 담담하게 그리면서 사지를 찢는 고문 끝에 서울로 돌아온 1950년의 안 창을 묘사하는 것으로 끝난다.
어머니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 가족에 대한 그의 의무도 다했다. 그리고 그동안 은밀하게 간직한 수치감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심, 즉 이것은 그의 삶이 될 수 없다는 것, 이 전쟁이 그를 결코 정의할 수 없다는 생각이 마침내 옳았음이 판명되었다. 그날 밤 어머니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음식을 갖다주고 더러운 옷을 빨아주고 그가 잠들 때까지 손을 부여잡고 앉아 계셨지만, 그리고 다음날 부산 미공보부에 찾아가 일자리를 얻고 이후 휴전까지 2년간 전보문을 번역하면서---마치 새로운 어휘가 새로운 사고의 틀이라도 만들어줄 수 있는 것처럼 전보문을 소화하면서---세월을 보냈지만, 그는 벌써 그 순간에 떠나버린 것이다. 그는 이미 자유였다. (324〜25면)
안 창의 놓여남은 작품의 서두, 즉 안 창이 미국땅에 첫발을 내딛는 장면으로 돌아가는 도돌이 결말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자유주의적인 충동이 아니다. 당할 만큼 당하고 견딜 만큼 견딘 인간만이 얻을 수 있는 자유의 권리다.19 그렇게 조국을 등질 수밖에 없는 청춘의 시련과 불확실한 미래에 맡겨지는 사랑의 간절함이 있기에 독자로서도 오히려 자유를 예찬할 수 없거니와, ‘새로운 땅’에서 새출발하는 두 연인의 미래도 순전히 남의 일로만 생각하기 힘들다. 사랑을 통해 이들이 입은 영혼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기를 비나리하는 것은 독자 모두의 마음일 테지만, 다른 한편 역사의 질곡을 떨친 이들 만남의 의미를 우리는 분단체제라는 한반도의 ‘국지적’ 현실로 불러들여 되새겨보는 것이다.
5
세계화시대가 각 민족·국민들에게 열어놓는 가능성은 그것대로 탐구해야겠지만, 그 속성상 개별 민족의 창조적 문화유산을 소비주의로 포섭하고 전통의 무차별한 망각으로서의 근대주의를 조장하는 면모가 더 노골화되었음을 간과해서도 곤란하겠다. 우리의 이산문학을 읽는 행위가 각별한 것은 그런 시대를 폭넓은 시각으로 조망케 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아무리 세계화가 진전되어 설령 일종의 단일 세계정부 비슷한 것이 성립된다고 하더라도 지역과 인종·문화·언어 등의 공통된 요인을 중심으로 결집되는 중·소 공동체가 지속되리라는 것 또한 인류의 경험적 상식인바, 이에 비추어도 한국계 미국문학은 좀더 긴 호흡으로 연구해야 할 주제가 되는 것이다.20 분단체제의 와해가 우리 노력여하에 따라서 파국과 상생 가운데 어느 한 방향으로 치달을 것이 더욱 분명해지는 이때 문학분야에서도 과거 민족유산을 충분히 이어받지 못하고서는, 또한 코메리칸 작가들의 ‘장거리 민족의식’(long-distance nationalism)21이 갖는 진정한 뜻을 우리 것으로 소화하지 못하는 한, 지식인의 책무를 다할 수 없는 현실이 아닌가! 이는 한국계 미국작가들이 작품으로써 우리에게 직접·간접으로 일러주는 진실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존 쾅으로 대변되는 소수민족들의 꿈도 각 민족공동체의 구체적인 생활현장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허황한 세계시민주의에 경도되는 순간 아메리카니즘이라는 이데올로기와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네이티브 스피커』가 예술적 한계의 형태로서 일러주는 전언이며, 다른 한편으로 안 창 개인이 겪은 민족적 비극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캐서린이 속한 인종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이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외국인 학생』의 성취와 두 연인의 사랑이 갖는 깊이도 그만큼 제한되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남음이 있는 것이다.
한국문학의 세계적 지평을 대국적으로 성찰하는 데 중요한 암시를 주는 작품의 그런 한계와 성취에 주목한다면 미국이민 백주년을 맞는 이 싯점에서 한국계 미국작가들을 진지하게 읽는 행위도 민족문학의 유산 계승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련될 수밖에 없다. 모국의 민족적 비애를 보듬으면서 미국작가로서의 자기의식을 작품으로 지켜내려는 이들의 노력은 근대의 적응과 극복이라는 이중과제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근대 적응 및 극복이라는 과제가 2002년 분단체제의 상황에서 특별히 미묘한 위험을 안고 있음도 기억함직하다. 20세기 변혁·반체제운동의 실패가 절실하게 깨우쳐주는 사실 중 하나가 분단체제에서도 적응과 순응을 구분해줄 수 있는 기계적인 척도는 없다는 점이 아니던가. 근대의 극복 역시, 과거 사회주의권 붕괴의 궤적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본주의 극복을 자신하는 바로 그 순간 오히려 체제의 동력으로 전락한 숱한 전례들을 떠올리고, 오직 적응과 극복이 하나로 일치되는 경지를 일상의 삶에 근거를 두고 지향할 때에만 분단체제의 위기를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의 과거 아픔을 이겨내면서 미국의 현실에 힘겹게 뿌리내린 미국이민 100년사와 백만을 헤아리는 교포사회에서 성장한 한국계 미국작가들을 우리 역사 및 민족문학의 일부로 당당하게 받아들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들이 참다운 미국작가가 되어주기를 희망하는 것도 그같은 이중과제가 현단계 우리문학의 숙제로서 엄연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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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종연 「살아 있는 혼돈을 위하여–––최원식 평론집 “문학의 귀환”을 읽고」, 『문학동네』 2001년 겨울호 460면.↩
- 이에 대한 육성증언은 申星麗 「하와이 사탕밭에 세월을 묻고–––韓國女性 北美 初期移民 實話」,『창작과비평』 1979년 봄호 269〜97면 참조.↩
- Edward W. Said, Reflections on Exile and Other Essay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173면. ↩
- 이에 대한 인상적인 성찰은 Meena Alexander, The Shock of Arrival: Reflections on Postcolonial Experience (Boston: South End Press 1996) 참조.↩
- 그중 발품이 돋보이는 최근 국내 연구로는 유선모 『미국 소수민족 문학의 이해–한국계 편』(신아사 2001) 참조.↩
- 2차대전 이후 냉전질서 유지의 일환으로 채택된 지역학(Area Study)의 성격을 띠면서 60년대 제3세계운동의 성과라는 양면이 있는 아시안 미국학에 대해서는 특히 추(K. Chuh)와 시마카와(K. Shimakawa)가 공동 편집한 Orientation: Mapping Studies in the Asian Diaspora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1) 1〜21면 참조.↩
- 그러므로 소수인종으로서의 차별과 수난 및 적응과정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는 중국이나 일본·대만·필리핀·베트남 등 미국 내 여타 동아시아 작가들과 상통한다고 하겠지만, 망국과 식민체험에서 비롯된 한국계 미국작가들의 변별성은 좀더 엄밀하게 규정될 필요가 있겠다.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는 주요 동아시아 작가들의 소개로는 특히 Emmanuel S. Nelson (ed.), Asian American Novelists: A Bio-Bibliographical Critical Sourcebook(Greenwood Press 2000)이 참고할 만하다.↩
- Benedict Anderson, The Spectre of Comparisons: Nationalism, Southeast Asia, and the World (London: Verso 1998) 59면에서 John Dahlberg-Acton의 발언 재인용.↩
- 이에 대한 간명한 소개는 John K. Roth (ed.), American Diversity, American Identity (New York: Henry Holt and Company 1995) 588〜90면 참조.↩
- 텍스트는 각각 Native Speaker (New York: Riverhead Books 1995) 및 The Foreign Student (New York: HarperFlamingo 1998)로 하되 인용은 괄호 안에 면수만 표기하며 그 번역은 모두 필자의 것이다. 국내에서도 두 작품은 이미 『네이티브 스피커』(현준만 옮김, 미래사 1995)와 『외국인 학생』(최인자 옮김, 문학세계사 1999)으로 소개되었다.↩
- 이들 작품에 대한 포괄적인 소개는 Elaine H. Kim, “‘These Bearers of a Homeland’: An Overview of Korean-American Literature, 1934〜2001,” Korea Journal 2001년 가을호 149〜97면 참조.↩
- 또한 게어리 박을 포함해 캐시 송(Cathy Song)이나 노라 옥자 켈러(Nora Okja Keller)와 같은 재능있는 작가들이 하와이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배경에는 바로 그런 뿌리내리기가 있다.↩
- 김현택 외 『재외한인작가연구』(고려대 한국학연구소 2001) 21면.↩
- 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London: Verso 1991, 개정판) 7면.↩
- 딸린 식구들이 많은데다가 장래도 불확실한 에두아르도가 어디까지나 무보수로 봉사했고 자기는 그에 합당한 미래의 비전을 제시했지만 결국 배신당했을 뿐이라고 강변하는 존 쾅의 허위의식은(311면) 좀더 냉철한 비판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의 맹점을 헨리 박이 심각하게 심문하지도 않는다.↩
- David Palumbo-Liu, Asian/American: Historical Crossings of a Racial Frontier (Standford University Press 1999) 320면.↩
- 필자가 알기로 『네이티브 스피커』와는 달리 『외국인 학생』이 서평 이상의 주목을 받은 경우는 아직 없는 듯하다. 주로 주간·일간지를 통해 소개된 서평들은 Comtemporary Literature Criticism, vol. 119 (Detroit: Gale Research Co. 2002)에 재수록되어 있다.↩
- 이 대목의 기존 번역도 불만스럽다. 가령 “After this there was very little left of him”이라는 문장만 해도 “그후에 일어난 일들은 거의 기억에 남지 않았다”(248면)라고 옮겨졌는데, 이는 기억의 문제가 아니다.↩
- 이런 결말의 의의에 비추어보면 안 창이 결국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상태로 “의도적으로 잘못된 정보”가 지배하는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일레인 킴의 논의는 너무 일면적인 소개가 아닌가 한다. Elaine H. Kim, 앞의 글 180면.↩
- 민족개념 및 민족문학 전통의 동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의심과 비판이 확산되는 최근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물론 문학운동에서 발휘될 수 있는 민족적 역량을 세계문학의 상황에 비추어 좀더 엄밀하게 분별·탐구하는 자세와 결합하지 않는 한, 그런 의심과 비판도 한낱 치심(侈心)과 다를 것이 없다. 동지적 애정으로 읽은 윤지관의 「놋쇠하늘에 맞서는 몇가지 방법」(『창작과비평』 2002년 봄호)도 적어도 그같은 분별은 다소 미흡하지 않은가 한다. 지구화시대가 “민족문제를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리게” 한다는 입론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지만, “프루스뜨(M. Proust)나 포크너(W. Faulkner) 등 각 민족문학을 대변하는 모더니스트들” 같은 섣부른 표현도 그렇고,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 같은 제3세계문학을 “모더니즘의 민족문학적 발현”(269면)으로 규정하는 태도도 말이 앞서는 경우가 아닌가 싶다.↩
- 이 용어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것이다. The Spectre of Comparisons: Nationalism, Southeast Asia, and the World에서도 이 용어가 구사되지만, 좀더 간명한 논의는 “Western Nationalism and Eastern Nationalism: Is there a difference that matters?,” New Left Review 2001년 5-6월호 31〜42면 참조. 그는 이 용어를 인터넷과 전자통신망의 급격한 발전으로 인해 과거의 국가·민족 단위 폐쇄적인 민족주의가 사라질 때 드러나는 것으로 규정하고 서구와 동양의 차이가 없어지는 세계화시대의 문화적 징후로 파악한다. 그러나 민족의 강제적 이산으로 점철된 20세기 세계사에서 테크놀로지의 발달만이 아닌 식민시대의 역사적 기억이 갖는 현재성 및 탈식민시대의 유대로 다져지는 동아시아 지역 특유의–––지역 차원의 경제협력체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실정이지만 바로 그렇게 때문에–––‘장거리 민족의식’을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