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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2002 한일월드컵과 동북아 국제정치

 

 

이근 李根

서울대 국제지역원 교수. 저서로 『동아시아: 위기의 정치경제』 등이 있음. gnlee@snu.ac.kr

 

 

1. 상호인정의 국제정치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반면에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선 마음이 불편하고 상대방이 있다는 것 자체가 견디기 힘들다. 이러한 경우 대부분 서로 얼굴을 보려 하지 않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상대방을 제거하려고까지 한다. 이렇게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게 되면 불편하고 힘든 삶을 쓸데없는 데 허비하면서 살게 된다. 사람들은 상호분업과 협력을 통하여 혼자서 할 때보다 훨씬 많은 가치를 평화롭게 창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그러한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인종·종교·신분의 차이 등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너무나 다양하다. 그런데 어떠한 이유에서건 배타적인 상호관계가 사회 안에서 개별적인 수준에서 생겨나면, 비교적 정당하게 무력을 독점하고 있는 정부가 개입하여 권위적으로 서로간의 관계를 조정해주고, 서로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 정부는 살인을 용납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같이 어울려 살도록 다양한 수단을 동원한다. 하지만 문제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일이 국가들 사이에서 생겨날 때이다.

국가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의 조치를 취할 수 있다. 하나는 상호교류를 최소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국가를 제거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 서로 접촉하여야 할 필요가 원천적으로 크지 않으면 별 문제가 없지만, 지리적으로 가깝거나 공동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경우에는 상당한 긴장관계가 유발될 수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대개 힘이 강한 국가가 전쟁을 일으킨다. 그런데 국가간의 전쟁은 국내문제와 달리 무력을 정당하게 독점하여 사용하는 세계정부가 없기 때문에 문제가 상당히 복잡해진다.

물론 국가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바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외교적인 방법을 통하여 관계를 원만히 복원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으며, 전쟁방지를 위하여 군사동맹을 맺거나 군사력을 증강시키기 때문에 비록 긴장관계는 지속되지만 바로 전쟁이 터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훨씬 생산적이고 행복한 삶을 국민들에게 가져다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데에 있다. 전쟁이 안 일어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여 더욱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는 것이 매우 안타까운 것이다.

동북아시아에는 넓게 잡아 일곱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한국·일본·중국·북한·대만·러시아·몽골 그리고 때때로 미국이 포함된다. 그런데 이들 국가 중에서 서로를 인정하는 국가와 인정하지 않는 국가들이 매우 미묘하게 얽혀 있다. 한국·일본·미국은 북한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중국을 의식하여 대만에 대해서도 매우 미묘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반면 북한도 한국·일본·미국과 수교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다고 대만과 수교한 것도 아니다. 또한 중국·러시아는 북한을 인정하고 있지만 동시에 북한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일본·미국과 수교하고 있다. 한편, 한국과 일본은 공식적으로 서로를 인정하지만 상호간의 역사문제로 인하여 서로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렇게 동북아 국가들은 서로의 존재에 대해서 매우 복잡한 인식과 관계를 형성해왔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모두가 함께하는 상호협력이 처음부터 매우 어려웠다. 이는 동북아 국가들이 협력을 통하여 성취할 수 있는 것이 무한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계속 바라만 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국가들이 이처럼 서로 불편하게 얽혀 있지만 사실상 엄연한 정부와 국민과 영토를 가지고 있는 실체로서 모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관계를 비폭력적인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서로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관계로 서서히 변화시켜나갈 필요가 있다. 한국과 일본의 경우에는 한국이 일본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관계이지만 사실상 민간영역에서의 교류가 활발하며,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공유하는 가치가 비슷하기 때문에 서로간의 협력이 더욱 열린 자세에서 이루어지면 이전보다 훨씬 큰 가치를 공동으로 창출해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은 일본을 가장 싫어하는 나라의 하나로 지목하고 있다. 누구도 감히 공식적으로 일본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물론 그 저변에는 신뢰감을 충분히 주지 못하는 일본의 태도가 깔려 있다. 그러나 자유시장경제체제를 공유하면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협력하면 좀더 평화롭고 풍요로운 미래가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호인정의 정도가 약하여 그 가능성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호인정의 문제를 풀 창의적인 방법은 없는 것일까?

 

 

2. 스포츠의 마술

 

아주 단순화하여 구별하면 스포츠는 크게 직접 경기에 참여하는 사람과 경기를 관전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방송통신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스포츠가 영상매체를 통하여 더 많은 사람에 의해 소비될 수 있는 문화상품으로 변화하여서, 현대스포츠에서는 ‘보는 사람’의 비중이 매우 커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월드컵처럼 크고 중요한 행사에서는 ‘보는 사람’의 비중이 더욱 커진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생각해보면 근대국가체제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스포츠는 매우 희한한 마술을 부린다고 할 수 있다.

‘보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스포츠의 마술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바로 ‘동일화현상’(identification)이다. 한국과 일본의 권투선수들이 시합을 해서 한국선수가 이기면 한국의 ‘보는 사람’은 그동안 일본에 대해서 쌓였던 울분이 해소되는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즉 ‘보는 사람’은 스포츠를 통하여 자기와 근대민족국가를 동일화하고 선수간의 스포츠경기를 국가간의 경기로 인식한다. 또한, 만일 한국과 미국의 경기에서 심판이 일본인이고 그가 미국에 유리한 판정을 하게 되면 한국인의 반일감정이 치솟는다. 얼마 전 동계올림픽에서 김동성 선수에 대한 실격판정으로 인하여 미국의 오노 선수가 금메달을 가져갔을 때 한국에서 생겨난 반미감정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즉 스포츠를 통하여 ‘보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애국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스포츠를 통하여 애국자가 되는 현상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국가간의 관계가 어느정도 성숙되어 스포츠경기의 결과와 국가감정이 분리되어 처리될 수 있다면 스포츠를 통한 애국심이 내부적 단결을 가져와 사회통합이라는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간의 관계가 성숙되어 있지 않을 때에는 자칫 잘못하면 스포츠경기의 결과가 국가관계의 악화를 가져온다. 즉 스포츠를 통한 동일화현상이 국가중심적인 민족주의로 연결되어 배타성을 강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성이 현실화된 가장 대표적인 예가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전을 치르면서 발생한 엘쌀바도르와 온두라스 간의 축구전쟁이다. 이 두 나라는 이전부터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는데, 양국간에 벌어진 월드컵 예선전에서 고취된 민족주의가 유혈사태를 일으킴에 따라 마침내 1969년 7월 13일 새벽 엘쌀바도르가 온두라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국가간 관계에서 성숙의 척도는 시민사회가 얼마나 발전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 시민사회가 발전되어 있는 경우 스포츠가 부리는 마술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는 다른 차원의 성격을 띠게 된다. 같은 동일화현상을 가져오지만 그것은 국가 수준에서의 동일화가 아니라 더욱 다원화된 시민사회 수준에서의 동일화로 연결된다. 시민사회의 발전 정도는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국가에 의해서 통제되지 않는 시민사회의 다원성을 의미한다고 하자. 이렇게 다원성이 커지고, 그렇게 다원화된 시민사회간의 교류가 국가간의 교류로 발전하게 되면, 시민사회의 구성원이 갖게 되는 동일화는 국가주의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초국가적인 다원성을 갖게 된다.

한국의 선동렬 선수가 일본의 프로야구팀에 소속되어 경기를 하면 한국의 선동렬 팬은 그 팀이 일본팀이고, 일본사람이 소유한 팀이며, 선수의 대다수가 일본사람이라는 것에 상관없이 그 팀을 응원한다. 한국의 최용수 선수가 일본의 J리그에서 경기를 하면, 최용수 팬은 그 팀이 일본팀이라는 것에 개의하지 않고 그 팀을 응원한다. 한국사람이 박찬호 선수가 소속된 미국 야구팀을 응원하고, 위성방송으로 중계되는 경기를 밤을 새면서 보고, 그 팀이 이기면 좋아하는 현상도 마찬가지의 동일화현상이다. 시민사회의 수준에서 소속팀이나 선수를 중심으로 동일화현상이 일어나면 국가주의나 애국주의가 국제주의와 섞여들어가 묘한 결과를 낳는다. 그러한 묘한 결과의 한 예가 바로 일본의 열성 축구팬이 한국에 와서 한국대표팀을 응원하는 현상이다.

일본의 경우 이미 스포츠가 시민사회적 다원성이 활성화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J리그에서 뛰고 있는 한국선수의 일본팬들이 그 선수가 한국대표팀에서 뛰게 되면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대표팀을 응원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는 사람들의 동일화현상이 국가를 중심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팬클럽과 같은 시민사회적 집단을 중심으로 생겨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동일화의 중심이 국가가 아니고 초국가적인 시민사회가 된다면, 그리고 그 정도가 증대된다면, 그러한 국가간의 관계는 상호간의 존재가 섞여버리는 일종의 탈근대적인 현상으로 인하여 서로 받아들이는 정도가 심화된다고 말할 수 있다.

주제를 순수한 국제정치적인 차원으로 바꾸어도 스포츠의 마술은 계속된다. 국가간 스포츠경기는 승부가 바로 결정되는 일종의 국가간의 육체적인(physical) 경쟁이다. 특히 국가대표선수들이 뛰는 경기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스포츠가 자주 전쟁에 비교되고, 스포츠용어에 ‘싸우는’ 표현이 많다. 그런데 스포츠의 묘미는 이러한 육체적인 경쟁이 국가간에 평화롭게 진행된다는 데 있다. 즉 국제정치적으로 볼 때 국가간의 스포츠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 상징성은 바로 스포츠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같이 몸을 부대끼면서 경쟁을 해도 그 방법이 평화적이며 그러한 경기를 국민이 지켜본다는 의미는 그 국가간의 거리가 상당히 가까워졌다는 것을 말한다. 1971년 4월 미국의 탁구팀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미·중 수교의 물꼬를 튼 이른바 ‘핑퐁외교’(pingpong diplomacy)는 그러한 상징성을 이용한 대표적인 외교 사례로 꼽힌다. 즉 서로를 인정하기 위해서 상징적인 도구로 스포츠가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간의 스포츠교류는 앞에서 말한 세 가지의 마술이 함께 작용한다. 국가간 스포츠교류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애국주의가 발현될 수 있고, 반면에 시민사회의 스포츠교류가 활성화되면 국가주의, 민족주의가 좀더 긍정적인 의미로 약화될 수 있다. 그리고 스포츠교류를 통하여 국민들이 상대방 국가를 서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이러한 모든 효과는 상징조작(symbolic manipulation)과 관련이 있다. 이는 또한 국가나 시민사회가 스포츠라는 상징을 어떻게 조작하여 정치적으로 어떠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따라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협력을 통하여 더욱 많은 가치를 평화적으로 창출한다는 목표 아래 국가와 시민사회가 스포츠라는 상징을 활용할 때 앞에서 언급한 동북아의 가능성이 새로 열릴 수 있다.

 

 

3. 한일월드컵과 동북아 협력의 미래

 

한일월드컵은 한국에게 다양한 기회를 줄 것이라는 담론이 많다. 그런데 그러한 담론의 대부분은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기회 등에 집중되어 있다. 월드컵에 대한 홍보자료를 보더라도 주로 월드컵의 경제적 가치가 얼마나 되는가를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과거 스페인과 프랑스의 사례를 들면서 그러한 경제적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이러한 기회를 적극적으로 잘 활용해서 한국의 경제적·문화적 수준을 한층 더 끌어올리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에게 주어지는 기회이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는 이미 상당히 발전했다. 이들은 민주화·세계화·탈냉전시대를 대변하는 다원성의 표상이다. 아직 건전한 비판의식을 충분히 키워내지 못한 부분도 있고, 때때로 과도한 민족주의에 휩쓸릴 때로 있지만 이들 시민사회는 경도된 국가주의에 의하여 휩쓸리지 않을 만한 역량을 갖추어나가고 있다. 특히 이들은 세계화시대의 교류증대와 정체성(identity)의 다원화를 동반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 초보적이지만 초국가시민연대(超國家市民連帶)의 가능성까지도 열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이러한 발전된 시민사회가 이번 월드컵 행사를 주도하고, 이것이 앞에서 말한 신뢰구축의 ‘스포츠의 마술’로 증폭된다면 한일관계가 더욱 성숙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번 우익 역사교과서 채택률이 0.4%정도에 불과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시민사회는 국가주의에 대해 상당히 건전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시민사회도 민주화를 주도한 주역으로서 다원화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들간의 신뢰구축은 한일관계를 더욱 성숙하게 재구성하여, 올바른 역사의식과 상호인정의 기반 위에서 협력을 통한 좀더 다양한 가치창출에 기여하리라 기대된다.

동북아시아는 상호인정이 매우 빈약한 불안정한 주권국가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세계화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전진기지, 그리고 세계화에 대한 국가 안전망(national safety net)의 역할을 하는 지역협력체가 생겨날 수 없다. 지역협력체는 이미 세계화시대에 또다른 세계의 조류가 되고 있다. 선진국들은 지역협력체를 통하여 최첨단산업을 위한 시장확보와 세계화의 충격을 완충해줄 지역시장을 구축하고 있다. 세계의 3대경제권이라고 할 수 있는 미주와 유럽, 그리고 아시아 중에서 오직 아시아만이 이러한 독립적인 지역협력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세계화와 지역협력이 동시에 진전되는 새로운 시대에 대비하여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이룩해내야 할 가장 급한 과제 중의 하나는 상호인정의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스포츠교류가 그 과제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스포츠가 부리는 마술을 우리는 활용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마술의 국가주의적인 부정적 측면을 제거하기 위하여 한국과 일본의 발달한 시민사회가 상호인정의 환경을 만드는 책임을 짊어져야 할 것이다. 이번 한일월드컵을 계기로 생겨날 그러한 기회를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는 놓쳐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러한 기회가 한일관계에만 국한되지 않고 더욱 넓은 동북아시아로 확산될 수 있도록 같이 노력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