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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삶의 자리로 본 도시빈민

 

 

김중미 金重美

소년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저자. 현재 인천 만석동에서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음. mansuk99@hanmail.net

 

 

1. 공부방 아이들이랑 자유공원으로 봄나들이를 갔다. 응봉산 서쪽 자락을 타고 기상대로 올라가는 길이 공부방 아이들과 함께 자유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활짝 핀 개나리꽃을 보고 아이들이 반갑다고 소리를 지른다. 같은 또래보다 체력이 약한 공부방 아이들은 중턱쯤에 오르면 숨이 턱에 차 헐떡거린다. 한숨을 돌릴 겸 언덕 위의 난간에 서서 산 아래에 펼쳐진 풍경을 내려다봤다. 자유공원으로 나들이할 때면 아이들은 언제나 이 난간에 기대어 멀리 공장 굴뚝과 지붕 너머로 보이는, 작은 언덕 위의 잿빛 판잣집들 가운데서 제집을 찾아내곤 했다.

“이모, 저기 봐요. 저 아파트가 만석 비취타운이죠? 저 아파트 땜에 우리 동네가 안 보여요.”

한 아이가 손으로 가리키는 쪽을 보니 아직 외벽을 칠하지 않은 고층아파트가 북성포구를 가린 채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여기서 보니까 더 커 보여요. 이모, 저 아파트 땜에 우리 동네에서 노을지는 게 안 보여요. 우리 할머니가 그러는데 저 아파트가 바람길을 막아서 여름에 되게 더울 거래요.”

“기분 되게 나쁘다. 그죠? 저 아파트 땜에 우리집은 이제 낮에도 형광등 켜야 돼요.”

대화를 나누는 아이들의 얼굴이 어두웠다. 몇년 전만 해도 이 난간에 서서 보이는 산 아래는 송월동의 오래된 저층아파트를 빼면 모두 고만고만한 낡은 주택들만 모여 있는 빈민지역이었다. 공업지대인데다가 똥바다에서 올라오는 갯벌 썩은 냄새와 공장에서 뿜어내는 악취로 숨이 턱턱 막히는 이 만석동에 아파트가 들어서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이제 몇달 뒤면 ‘비취타운’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가진 고층아파트가 입주를 시작한다. 최근 1〜2년 사이 만석동에만 영풍아파트와 솔빛마을 주공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리고 만석동과 가까운 빈민지역인 수도국산에도 가파른 비탈길을 따라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이제 인천의 빈민지역도 서울의 빈민지역과 마찬가지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마포나 수유리, 행당동, 신림동, 봉천동 가파른 산자락에는 판잣집들이 오순도순 낮은 지붕을 맞대고 있었지만 지금은 철옹성 같은 고층아파트들이 산등성이를 따라 위태롭게 서 있다. 그런데 판잣집에 살던 가난한 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파트단지마다 영구임대아파트가 들어서긴 했지만 세입자를 비롯한 영세 가옥주들을 다 수용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거나 일자리 때문에 영구임대나 공공임대아파트를 포기하고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니 서울 변두리의 비닐하우스촌이 그들을 다 수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울을 벗어난 위성도시 변두리의 지하방이나 쪽방으로 밀려났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얼마 전 딸이 입학한 만석초등학교에 갔던 ‘공부방 후배’는 그곳에서 만난 학부모에게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여기가 글쎄 그 『괭이부리말 아이들』에 나오는 학교라면서요. 내 아들이 이런 학교에 다녀야 하다니 너무 슬퍼요.”

그 학부모는 만석초등학교 뒤 영풍아파트에 입주한 사람이었다. 한달이 지난 뒤, 그 학부모의 아이가 이웃마을 송현초등학교로 전학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부방 아이들은 같이 입학한 아이가 전학가는 까닭을 어렴풋이나마 알고는 있다.

만석동에서 하루가 다르게 쇠하여 없어져가는 집들을 볼 때마다, 아파트 입주를 앞두고 들썩거리는 골목에 설 때마다, 더이상 몸뚱이 하나 제대로 누일 땅이 없어지고 점점 밀려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운명을 그냥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건지 고민을 하게 된다. 이제 도시빈민들은 더이상 집단으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흩어져 사회적으로 더욱더 소외되고 차별받는 존재로,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1를 당하는 존재로 남게 되었다. 도시의 가난한 이들은 그렇게 밀려나고 배제되어 잊혀져가는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2. 서울시를 비롯한 대도시마다 대규모 빈민지역이 발생한 것은 저곡가·저임금정책을 바탕으로 한 수출지향적 공업화정책이 시작된 1960년대 후반부터였다. 근대화 과정에서 도시빈민은 값싼 노동력의 원천이었다. 10년 전만 해도 빈민지역 주변에는 제조업 위주의 영세사업장(하청업체)들이 산재해 있었고, 지역주민들은 하청업체의 노동자로, 또는 하청의 가장 밑바닥 구조라고 할 수 있는 가내수공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또 빈민지역을 중심으로 재래시장이나 건설노동자들의 인력시장이 형성되면서 도시빈민들의 경제적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마땅한 기술이나 자본이 없이 이농한 도시빈민들에게 산동네는 그저 값싼 주거환경만을 제공하는 곳이 아니라 경제적 고리를 이어주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재개발사업은 이런 도시빈민들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버리고 말았다. 당시 정부는 점점 심화되는 주택문제의 대안으로 무조건 주택을 많이 공급해 무주택자의 비율을 줄이기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기업은 재개발지역에서 발생하는 큰 이윤에만 관심이 있었다. 재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도시빈민들은 삶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고 이에 정부와 기업은 강제철거를 강행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무자비한 폭력으로 철거민 가운데 32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었고, 백여명의 도시빈민들이 범법자가 되었다. 그렇게 목숨을 건 싸움을 통해 도시빈민들은 영구임대아파트를 확보해내거나 임시 이주단지를 제공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마저 정확한 실태조사나 도시빈민에 대한 이해 없이 탁상행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대규모 아파트단지 내의 공공임대아파트나 영구임대아파트는 도시빈민들의 실질적인 주거 대안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오히려 가진 자와 가난한 자를 분리하는 정책이 되고 말았다. 현재 대단위 재개발지역 안의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은 또다시 소외를 당했던 것이다. 민영아파트와 가까이 있는 임대아파트 안의 초등학교가 농촌의 초등학교처럼 학급수가 줄어들어 분교처럼 되어가고 있는 현실은 가진 자와 가난한 자들의 벽이 얼마나 심각해지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제 서울에서는 더이상 대규모의 달동네를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도시빈민들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도시빈민들의 문제는 집단성을 잃은 채, 도시의 변두리로 밀려나면서 철저히 사회로부터 배제되어가고 있다. 거기다가 IMF를 거치면서 도시빈민들의 실업문제나 불안정·불완전 취업상태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동안 도시빈민들은 의료, 교육, 문화, 정치 등 각 영역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아온 적이 없다. 오히려 도시빈민들을 게으르고 무능력하다고 보는 사회적 편견과 무관심, 냉대로 인해 스스로 일어서려는 자활의지마저 빼앗겨왔다. 현재의 사회적 변화들은 도시빈민을 비롯한 가난한 이들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세계화, 탈(脫)자본주의사회, 지식기반사회로의 진입은 교육이나 문화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사회적 배제를 더욱더 가속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3. 서울 빈민지역의 변화는 서울에 비해 재개발이 늦게 진행되고 강제철거나 대규모 재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인천의 빈민지역까지 영향을 미쳤다. 인천의 대표적인 빈민지역인 만석동도 서울의 빈민지역과 마찬가지로 90년대 중반 이후 큰 변화를 겪었다. 현지개량방식으로 재개발이 결정된 뒤, 90년대 후반부터 소방도로가 나고 만석동 어귀부터 빌라들이 한채 두채 들어서면서 만석동의 상징이던 미로 같은 좁은 골목과 판자촌은 2번지, 9번지, 6번지와 43번지 일부에만 남았다. 겉모습만 본다면 불량주택들이 헐리고 번듯한 건물이 들어섰으니 주거환경 개선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거환경 개선사업은 소방도로를 내는 것만 지방자치단체에서 맡고 주거개선은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자기 집을 증·개축하는 것을 뼈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지지부진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토지소유가 명확하고 가옥주가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경우는 건축업자들과 계약을 맺어 서민형 공동주택인 빌라를 지었다. 그러나 구제금융시기를 거치면서 영세한 빌라 건축업자들이 부도를 맞자 빌라에 세들었던 주민들은 전세금마저 잃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만석동 9번지 일대

만석동 9번지 일대

 

그런데 최근 구청에서 주거환경 개선사업이 지지부진한 만석동을 두고 고민하다가 6~9번지 일대에 공공임대아파트를 짓는 사업을 타진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계획은 저소득층을 위해 마련된 공동주택기금을 활용하여 이 일대를 재개발하겠다는 것인데 계획대로라면 공동주택기금은 이미 지어진 빌라를 보상해주는 데 다 들어가야 할 형편이다. 이미 빌라가 들어선 지역을 철거하지 않고서 아파트를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이미 몇년 전 주택공사가 사업성이 없다는 까닭으로 공동주택사업을 반려했던 곳이다.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현실이나 의견을 무시한 채 책상에 앉아 새로운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려는 이들의 발상은 또 한번 가난한 이들을 삶의 자리에서 내모는 것이고,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국민주택기금을 낭비하는 것과 같다. 지역주민을 위한 재개발이나 공공주택 개념을 무조건 고층아파트로만 생각하는 편협한 사고도 문제이지만 만석동 주민들이 원하는 개발의 모델이 어떤 것인지, 만석동 주민들의 삶의 양태에 가장 적합한 모델이 무엇인지 실태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이런저런 사업계획을 수립하는 탁상행정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주거문제는 삶의 문제이다. 삶의 자리를 고려한 재개발은 바로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해야만 가능하다. 만석동의 주거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만석동 주민들의 실태를 몇가지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에서 소개할 네 사례에는 결손가정이나 소년소녀, 아예 경제활동능력이 없는 노인들은 제외했다.

 

<사례 1> 사십대 여성인 김씨는 동일방직 계약직노동자다. 잔업과 특근까지 해서 받는 월급은 60만원 미만. 그동안 집에서 굴 까는 부업을 해왔지만 수입이 일정하지 않아 돈이 모이질 않았다. 그래서 월급이 적더라도 공장에 다니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해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지금 2년이 다 되어간다. 남편은 용접노동자이지만 일이 일정하지 않고 일이 없는 때도 있다. 재혼가정이라 아이들이 네 명이나 되고 당뇨를 앓는 시어머니도 모시고 있다. 그리고 이혼한 시누이네 아이들이 옆집에 사는 형편이다. 다행히 아이들 셋은 초등학생이고 동네에 있는 공부방에 다니기 때문에 사교육비가 들지 않고 고등학생인 큰아이 등록금도 공부방을 통한 후원자의 도움을 받는다.

일곱 명이나 되는 가족이 월평균수입 백만원으로 살 수 있는 까닭은 주거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김씨네 집은 10평짜리 시멘트 블록집인데 방 두 개와 입식부엌이 있는 마루, 그리고 판자로 올린 다락이 있다. 좁고 낡긴 했지만 자가소유이고 수리를 한다고 해도 이웃들의 손을 빌리거나 스스로 하기 때문에 주거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또 도심과 가까워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닐 수 있다. 시어머니가 시집올 때부터 살았던 동네여서 이웃끼리 도와가며 지낸다. 그리고 일이 꾸준하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남편의 용접일도 동네 사람들끼리 알음알음해서 생기는 경우가 많아 이사를 가는 것은 어렵다. 김씨는 집이 좁고 불편해도 아파트로 들어갈 생각은 없다. 임대아파트라고 해도 달마다 들어가는 임대료를 내기도 벅차고, 넓이도 지금 집에 비해 더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주거비로 들어가는 비용을 아껴 아이들 교육에 투자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례 2> 75세 된 이씨는 월남민이다. 황해도 근처의 섬에 살던 이씨는 전쟁이 났다는 소리에 남편과 함께 고기잡이배를 타고 피난와 만석동에 정착했다. 처음엔 전쟁이 끝나면 곧 돌아갈 생각으로 쓰레기더미 위에 움막을 짓고 살았지만 휴전이 되자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이씨와 가족들은 쓰레기를 흙으로 다져 집을 만들었다. 남편은 고기잡이를 나가고 이씨는 조개를 주워 시장에 내다팔았다.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뜬 뒤에도 이씨는 굴을 까고 조개를 캐 팔아왔다. 그렇지만 그것으로는 생계를 간신히 이어갈 수 있었을 뿐 자녀들을 제대로 교육시킬 수는 없었다. 그것 때문인지 자녀들은 아직도 제 혼자 살아가는 것이 벅차다. 이씨는 몸이 아프거나 아쉬워도 자식들에게 연락을 할 수 없다. 아예 어디서 뭘 하고 지내는지 알지 못하는 자식도 있다. 이씨는 자식 덕을 보는 것은 포기한 지 오래다. 이씨는 아직도 여름에는 마늘, 겨울에는 굴을 까서 생계를 잇는다. 기초생활보호대상자라도 되면 힘든 일을 그만 하고 싶지만 이번에 정책이 바뀌면서 수급대상에서 탈락되었다. 아들들이 있기 때문이다. 혈압이 높지만 병원에 한번 제대로 가본 적이 없다. 혈압 약은 보건소에 가서 타다 먹고 가끔 침도 맞는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이 공원자리로 지정돼 철거당하게 되었다. 피난와서 손수 짓고, 세금까지 내면서 50년을 살았는데도 무허가라는 이유로 보상금이라고 해봤자 이사비용만 받은 채 이사를 해야 한다. 싼 월세방을 찾아보아야 하는데 문제는 이사간 뒤의 먹고살 일이다. 굴이라도 까서 월세를 물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만석동을 떠날 수 없다.

 

<사례 3> 최씨가 아침에 일어나니 벌써 아이들은 학교에 갔고 아내도 출근을 했다. 최씨는 어젯밤 일을 기억하려고 애쓰지만 잘 기억이 안 난다. 어렴풋이 아내와 아이들을 때린 기억이 날 뿐이다. 최씨는 며칠 동안 지방에 있는 건축현장에서 일을 하다 그만두고 와버렸다. 딱히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같이 일을 나갔던 동네친구들이랑 십장이랑 마음이 안 맞아서 그랬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최씨가 없는 동안 아내가 집을 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으로 일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을 하다가도 몇번씩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아내가 공장에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최씨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친구들을 불러 화투판을 벌였다. 일거리가 없어 빈둥대는 친구들이 많기 때문에 언제든지 판을 벌일 수 있었다. 심심풀이로 시작하지만 끝나는 시간은 언제나 새벽 한두시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술이 거나해진다. 단칸방 한구석에는 아이들이 졸고 있고 아내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한다. 솔직히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지만 그까짓 것도 참지 못하고 투덜거리는 아내나 아이들을 보면 화가 치민다. 집안의 주인은 남편이며 아버지인 최씨가 아닌가. 아내나 아이들은 자신을 무능하다고 깔보거나 반항하는 것처럼만 보인다. 그래서 한번씩 가장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폭력을 휘두른다.

최씨는 가끔 자신의 삶이 왜 이렇게 엉망이 되었는지 생각을 한다. 아버지가 일찍 집을 나가지만 않았다면, 엄마가 자기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집을 나가지 않았을 것이고 공고라도 마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마땅한 기술이 없어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야 하는 거나, 아내를 목재공장으로 보내야 하는 거나 뭐 하나 마음에 드는 일이 없다. 아이들만은 자기처럼 키우고 싶지 않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지금이라도 뭔가 기술을 배우고 싶지만 마흔이 다 된 나이에 남의 밑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는 것도 쉽지 않다. 최씨는 골치 아픈 생각을 하기 싫어 휴대폰을 챙겨들고 동네 앞에 있는 당구장으로 친구들을 찾아간다.

 

<사례 4> 이씨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배운 유압기술로 돈을 모아 작은 하청공장까지 세울 만큼 성공했다고 자부해왔다. 그런데 IMF 때부터 공장 사정이 영 나쁘더니 일감이 뚝 떨어져버렸다. 일거리를 주는 회사에서 단가가 싸게 먹힌다는 이유로 하청공장을 중국에 있는 공장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이씨는 고민고민하다가 꽃병을 만들기로 했다.

공장 직원들과 몇달을 씨름해서 새 상품을 만들어 상가를 돌아다녔지만 촌스럽다고 퇴짜만 맞았다. 직원들이 하나 둘 떠나고 이씨는 가끔씩 들어오는 하청일로 그나마 먹고살지만 이제 공장을 접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친구들보다 나은 편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태어나고 자란 동네를 떠나지 않은 덕분에 집을 늘리느라 진 빚 따위는 없으니까 말이다. 기술만 있으면 그래도 굶지는 않고 살 거라는 믿음으로 살아왔지만 이제 자기가 가진 기술이 쓸모없다는 허탈감에 빠져 있다. 공장을 접으면 다시 노동자로 살아야 하는데 세 아이의 교육비를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나마 요새 집을 헐고 공공주택을 짓는다는 말이 돈다. 이씨는 동네 앞 아파트 건물이 다 올라가자 불안해진다. 벌써부터 빌라주택에 사는 주민들은 이씨가 살고 있는 9번지 일대를 공원으로 만들라고 민원을 한다고 한다. 이씨네 동네 때문에 집값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아파트가 들어서면 그때는 지금보다 더할 것이다. 그래서 걱정이 많다. 이씨는 아이들이 아파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따돌림이라도 당할까 걱정이 되지만 집이 헐리고 아파트가 지어지는 것도 달갑지 않다. 좁아도 내 집에서 살고 싶지 빚더미에 앉아가며 아파트에 살고 싶지는 않다.

 

4. 또다시 철거·재개발에 들썩거리는 만석동은 일제시대의 토막민(土幕民)에서부터 시작하여, 6·25 이후에는 도시빈민의 삶의 터전이었다. 만석동에 남아 있는 주민들은 습지와 쓰레기더미를 손수 메우고 터를 다져 마을을 이루었고, 값싼 노동력의 원천이 되어 산업화에 기여했던 이들이다. 만석동의 재개발은 이들이 주체가 되어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한 다음 이루어져야 한다. 만석동을 근거지로 경제활동을 하는 이들이 계속해서 일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노인들이 국가의 공공부조를 받지 않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굴까기나 조개채취를 하는 작업장이 필요하다. 또 젊은이들의 자활의지를 키워갈 자활쎈터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고령자와 결손가정이 많은 만석동에서는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공공임대주택은 대안이 될 수 없다. 또 생활보호대상자들에나 가능한 아파트형 영구임대주택은 만석동 주민들의 삶의 방식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도시의 가난한 이들에게 집은 재산이나 재테크 수단이 아니다. 집은 삶의 터전이고, 마을은 가난한 이웃들이 모여 함께 일하고 정을 나누는 지역공동체이다.

서울의 빈민지역은 재개발 이후 공동체가 와해되고 근거지 내에서의 경제활동도 불가능해졌다. 또 합동재개발이나 민간기업의 이해에 따라 주도되는 공공임대주택의 경우는 주택투기, 재개발 뒤 외지인의 독점, 원주민 재정착 불가능의 문제가 드러났다.

지역의 주거개발은 지역의 특수성에 따라,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삶과 의견을 반영해서 진행되어야만 한다. 빈민지역에서 무조건 아파트만 지으려는 까닭은 그것이 영구임대아파트나 공공임대아파트라 하더라도 건설업체의 이윤을 담보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재개발은 지역과 주민특성에 따라 다가구·다세대형 주택의 공급 등 다른 방법이 고려되어야 한다. 도시빈민들에게 맞는 주거환경 개선이란 주민들의 참여와 비영리적 조직에 기반하여 주민들이 계속 생활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지역에 맞는 주거대책을 세우는 일은 우선 지역에 대한 면밀한 기초조사와 현황파악이 이루어져야 하고, 아울러 정부와 민간기업의 주도로 이윤이 목적이 아닌 ‘파트너십(partnership)의 적용방식’2이나 ‘참여협동형 방식’3 등을 선택해 지역주민들을 위한 재개발 방법을 모색해가야 할 것이다. 이미 부산의 빈민지역 가운데 하나였던 물만골의 경우 친환경마을로 재개발이 되면서 지역주민과 전문가세력이 연대한 새로운 지역개발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가난을 극복한다는 것은 부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빈민들이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공동체성을 살려 가난한 이들끼리의 집단적 유대를 지켜가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권익과 주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늘려 정치적 빈곤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이다.

이제까지 도시빈민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가난과 불평등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비인간적인 폭력철거에 맞서 싸워왔지만 정작 그들이 돌려받은 것은 사회적 냉대와 편견이었다. 이제까지의 도시빈민정책이나 주거정책이 정작 지역주민과 가난한 사람들의 정책이 되지 못했던 것은 사람과 그 사람들의 삶을 중심으로 놓고 보지 않은 경제적 관점의 정책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가난한 도시빈민들이 선택하고 획득해나가야 할 권리는 임대아파트 한칸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를 되찾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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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적 배제는 다양한 형태의 배제가 결합된 다차원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형태의 배제란, 의사결정이나 정치과정에의 참여로부터의 배제, 고용과 물적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로부터의 배제, 공동의 문화적 과정에 통합될 수 있는 기회로부터의 배제 등을 말한다. 이 요소들이 결합되었을 때, 어떤 특정 지역이 공간적으로 차별받는, 심각한 형태의 배제현상을 낳게 된다.”(신명호 「세계화와 사회적 배제」, 『도시와 빈곤』 2001년 1-2월호)
  2. 파트너십의 적용방식은 최근 유엔(UN) 등 국제기구에서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는, 인간정주 문 제 접근에 있어 필수적인 방식이다. 이는 종래의 주택개발(재개발 등)에 있어 정부 주도적 혹은 민간업체 주도적인 것에서 탈피하여 정부, 민간기업, 해당 주민, 해당 지역사회 주민조직체, 그리고 NGO의 참여, 협조, 공동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공공주택 전문기관인 주택공사는 NGO, 지역사회 주민조직체와 파트너십을 형성하여 시범적 사업을 추진해보는 것도 권장할 만한 일이다. 대한주택공사 「주거빈곤가구의 실태와 최저주거기준 달성방안」, 2000년 12월.
  3. 참여협동형 방식은 파트너십의 정신 아래 주민 스스로의 역할과 노력을 증진시키는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소위 주민주도적 주택문제 접근방식으로 자조주택(self-help), 협동주택(cooperative housing), 공유주택(shared ownership housing) 등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시도해보지 못한 프로그램들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