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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가해자로서 과거청산, 피해자로서 과거청산
I. 부루마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 한겨레신문사 2002
송충기 宋忠起
서울대 서양사학과 강사 ms2991@hotmail.com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는 끔찍한, 그래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러나 기억해야만 하는 과거에 대한 상징이다. 전자는 다름아닌 6백만 유태인들의 대량학살에 대한 기억이고, 후자는 원자폭탄 투하로 순식간에 폐허가 된 도시에 대한 기억이다. 그 생생한 기억으로 인해 두 사건은 ‘과거로 돌려지지 못한 채’ 여전히 현재로 남아 있다. 그런데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에 대한 기억은 또한 독일과 일본의 아주 상이한 과거청산이 남긴 산물이기도 하다.
‘과거청산’이라 할 때 으레 떠오르는 것은 두 나라의 서로 대조적인 모습이다. 일본은 계속 전쟁책임을 부인하는 태도로 일관하면서 망언을 일삼는 반면, 독일은 과거사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앞장서서 행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런 모습의 절정을 우리는 이미 1985년에 경험한 바 있다. 그러니까 전후 40년, 곧 전쟁 당사자들의 시대가 마감되고 전후세대가 다수로 등장한 바로 그 즈음에, 바이쩨커(R. v. Weizsäcker) 독일대통령은 과거사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유명한 연설을 남긴 반면, 나까소네(中曾根) 일본 수상은 전범을 추도하는 야스꾸니(靖國) 신사를 공식 참배했다. 이렇듯 독일과 일본은 그들의 과거사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The Wages of Guilt: Memories of War in Germany and Japan, 정용환 옮김)는 이에 대한 답변을 모색한 책이다. 저자 이안 부루마(Ian Buruma)는 1951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태어나 70년대와 80년대를 일본에서 지냈으며 이후 런던에서 주로 생활하면서 세계 유수의 신문에 기고하고 있는 널리 알려진 저널리스트이다. 영어·독어·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고 하니, 이 질문에 대한 답변자로서는 제격이다. 게다가 그가 태어난 나라인 네덜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점령된 경험이 있는 유럽국가이고, 또 지구 다른 편에서는 일본군의 ‘대동아전쟁’과 직접 조우한 적이 있던 나라가 아닌가?
물론 저자는 이에 대한 답변을 구하면서 기왕에 나와 있는 베네딕트(R. Benedict)의 글을 우선 활용한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이라는 저서에서 서양문화와 일본문화를 비교하면서 서양의 죄의식과 일본의 수치심을 대비시켰다. 곧 서양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신에게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에 대한 용서를 적극적으로 구하고자 하는 데 반해, 일본인들은 잘못된 행위를 수치심으로 느껴 될수록 그것을 타인에게 감추려고 하며, 만약 알려지면 자신의 체면이 깎이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런 문화적 차이로 인해 독일인들은 잘못된 과거에 대해 속죄를 하고, 일본인들은 그냥 덮어두려 한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부루마는 이 해석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일단 양국이 보이는 추모의 문화에 촛점을 맞춘다. 독일인들에게는 아우슈비츠가 추모의 대상이다. 일본인들에게는 대학살이 감행된 난징(南京)이 아니라 원폭투하의 현장인 히로시마가 그 추모의 대상이다. 독일인들은 이로써 가해자로 계속 남는 반면, 일본인들은 희생자로 둔갑한다. 물론 독일인들도 드레스덴(Dresden) 폭격---영국군은 전쟁 종결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싯점에서 드레스덴을 대량폭격함으로써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냈다---을 기억할 때는 자신들을 희생자로 여긴다. 그러나 그들은 아우슈비츠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고, 벗어나지 않았다.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부루마는 우리를 다시 미군정의 점령정책으로 이끈다. 그는 뉘른베르크재판과 토오꾜오재판의 차이를 설명한다. 부루마에 따르면, 미국은 전자를 통해서 독일 국민을 ‘일벌백계’하는 데 성공했지만, 후자에서는 자국의 이해관계에 가려 천황의 전쟁책임을 면제해줌으로써 이후 일본인들이 전쟁책임을 통감할 여지를 없애버렸다. 홀로코스트(holocaust)라는 엄청난 죄악에 가려져 일본의 난징대학살 사건이나 731부대의 범죄가 상대화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홀로코스트의 부담이 없는 일본의 죄과는 주로 ‘반인륜범죄’라기보다는 단순한 ‘전쟁책임’의 문제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연합군 측이 이러한 전쟁범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사실도 한몫 했다. 게다가 전후 냉전구도 속에서 미국은 자신들이 일본에 ‘강요한’ 평화헌법을 스스로 파괴함으로써 일본에게 면죄부를 발행해주었다.
그렇지만 이같은 설명만으로 두 나라의 과거청산 양상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전후 초기에는 독일의 상황도 일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철리히(Mitscherlich) 부부가 『애도하지 못한 독일인』(Die Unfähigkeit zu trauern)이라는 저서에서 지적했듯이,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독일에서 과거청산 과정은 순탄하지 못했다. 아데나워(K. Adenauer) 정권하에서는 오히려 ‘재나찌화’라는 용어가 등장할 정도로 ‘과거와의 타협’이 눈에 띈다. 1950년 독일에서 ‘탈나찌화’에 대한 여론의 지지율은 20%도 채 못되었으며, 그 당시 중앙부처 과장급 관료 가운데 과거에 나찌당원이었던 이들의 비율이 절반을 휠씬 넘었다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요컨대, 독일의 과거청산은 1960년 이후에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1960년대 이후인가?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제시될 수 있다. 가령 전쟁범죄에 직접 책임이 없는 전후세대가 등장했다든지, 서독이 경제부흥을 달성하고 민주주의적 전통을 확립하여 과거문제에 대한 여유가 생겼다든지, 아니면 「홀로코스트」라는 드라마가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든지 하는 등등이다. 또한 1960년대에 일어난 ‘문화혁명’이 거론되기도 한다. 곧 예전에는 소수집단을 그냥 ‘약자’로 인식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에 대한 배려가 문화적으로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것이다. 혹자는 ‘역사상 누가 더 핍박받았는가를 놓고 우승자를 가리는’ 올림픽이 열리고 있고 거기에서 유태인이 승리했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지만, 사실 역사적 사건의 희생자들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때로는 독일의 친유태적인 과잉반응이 도리어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독일연방의회 의장이었던 예닝어(P. Jenninger)가 1989년 포그롬(Pogrom)---원문이나 번역문에는 ‘수정의 밤’(Kristallnacht)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이런 표현은 나찌가 만들어서 사건의 의미를 희석했던 측면이 있기 때문에,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이제 ‘유태인 학살’을 뜻하는 포그롬이란 용어가 더 자주 쓰인다---50주년 기념식에서 행한 ‘불운한’ 연설이 그런 사례에 든다. (그는 그 댓가로 이틀 후 연방의회 의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최근에 홀로코스트가 상업화되고 그 지나친 반응으로 인해 객관성과 정의를 잃고 있다는 소위 ‘홀로코스트 산업’에 대한 논쟁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주로 양국의 문화를 다채롭게 보여주면서 양국에서 진행된 과거청산의 과정을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그렇지만 독일과 일본을 비교하는 수준은 균형을 잃고 있다. 저자는 독일의 과거청산을 논의할 때는 작가 및 예술가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철학자나 역사가의 ‘진지한’ 논의를 자주 언급함으로써 그 분석을 심도깊게 진행하고 있으나, 일본의 경우에는 대체로 현장체험 답사기를 소개하거나 소설 및 영화를 분석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를 일본에서 과거청산에 대한 담론이 아직은 인용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