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월드컵 이후 한국의 문화와 문화운동
최원식
문학평론가, 인하대 국문과 교수 cws919@inha.ac.kr
김홍준
영화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hjkim@knua.ac.kr
김종엽
문화평론가,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jykim@hanshin.ac.kr
때: 2002년 7월 5일
곳: 창작과비평사 회의실
최원식 ‘행복한’ 6월은 가고 ‘잔인한’ 7월이 왔습니다. 서해교전으로 축제의 끝이 냉엄합니다. 이번 사건을 월드컵으로 유예됐던 국내외의 산적한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하라는, 즉 한국사회가 월드컵 이후를 제대로 추스르라는 징조로 받아들여야 할 듯싶은데, 이렇게 몸과 마음이 어수선한 시기에 창비 정담(鼎談)에 참석해주신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장밋빛 인생」을 인상적으로 봤던 관객으로서, 요새 부천 판타스틱영화제 때문에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주신 김홍준 감독을 환영합니다. 이 정담은 오랜만에 우리 문화의 현황을 점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마련됐습니다. 아시다시피 최근 우리의 문화지도에 많은 변화가 관찰됩니다. 우선 문화 안에서 문학이 차지해온 중심적 위상이 상대화되었습니다. 영상언어 또는 시각언어가 문자언어를 압도하고 온라인 세상이 하나의 엄연한 현실로 대두하면서 지난 시대의 집합적 표상들, 즉 민족·민중·계급 등에 대한 충성도가 현저히 약화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과 진보를 차분히 이룩하면서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통일시대를 맞이하는 과제, 그것을 문화적으로 번역하면 민족문화론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민족문화론의 현실성은 여전히 절실합니다. 기관포 한방으로 월드컵의 성과가 자칫 퇴색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도래한 것을 보면, 우리에게 한반도 전체를 시야에 넣고 사고하는 훈련이란 거의 써바이벌 게임에 준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절박한 생각도 듭니다. 이 변화된 문화지도와 민족문화론을 마주 세워서 검토하고자 하는 정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월드컵 대회가 열렸습니다. 모든 신문을 스포츠지로, 모든 방송을 스포츠 채널로, 모든 국민을 ‘붉은악마’로 만든 월드컵은 한편으로는 혼란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황홀한 문화적 폭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월드컵에 열광했든 또는 냉담했든 이 폭발은 우리가 자상히 독해해야 할 문화텍스트가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월드컵에 대한 각자의 경험을 풀어내면서 정담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월드컵과 거리응원
김홍준 6월 한달 동안 월드컵의 열기에 제가 어떻게 참여했는지 정리해본다면, 우선은 참여자라기보다는 관찰자였던 것 같아요.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거리응원엔 한번도 나가지 못했고, 집에서 가족들과 텔레비전을 보면서 월드컵을 즐겼습니다. 그러면서 생긴 큰 변화가 있다면 처음으로 저희 부부와 딸 둘이 텔레비전 앞에서 함께 고함을 질러보았다는 거예요. 끌어안기도 하고 말이죠. 저 같은 경우 부천영화제를 준비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하루에 텔레비전을 4, 5시간 넘게 시청하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바람에 몸과 마음과 작업스케줄이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것 같아요. 또 저는 월드컵이라는 문화현상·사회현상이 중요한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인터넷을 많이 뒤져봤어요. 수많은 게시판의 글들을 읽어보면서 네티즌의 다양한 여론에 감탄하기도 했지요.
김종엽 저도 월드컵 기간에 주로 텔레비전을 시청했습니다. 유감스럽게 입장권을 못 구했어요. 구하려는 강한 의지가 없었죠. 제 생애에 한국에서 다시 월드컵이 열릴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표를 구해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나중에 들기는 했습니다. 거리응원을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시내에 나갔다가 응원군중과 마주쳐 그 분위기는 알 수 있었습니다. 16강을 넘어서면서부터 거리응원은 양상이 바뀌었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경기장에 못 간 사람들이 ‘붉은악마’들과 광화문을 점거하면서부터 시작됐는데 그때는 같이 경기를 관람하는 정도였죠. 그런데 나중에는 대중이 스스로 축제를 창출한 형태가 되었습니다. 터키와의 3, 4위전은 경기로서의 매력이랄까 승리에 대한 기대감이 떨어졌는데도 많은 인파가 모였습니다.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는 것도 있었지만 신나게 놀 수 있다는 자의식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4백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다시 쏟아져나온 게 아닌가 싶어요.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기획하지 않은 축제가 벌어졌고, 이는 굉장히 새로운 종류의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한편으로 미디어에 의한 동원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일본의 경우와 비교하면 뚜렷한 차이가 있는데 일본은 우리처럼 방송사 모두가 같은 경기를 중계하지 않고 방송사들이 번갈아가며 다른 경기를 중계했죠. 거기에는 약간의 공안상의 두려움이나 훌리건에 대한 공포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일본은 우리 못지않은 IT 강국이라 거리전광판도 많은데, 토오꾜오 시내의 전광판에서 월드컵 경기를 중계하지 못하도록 행정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군중동원을 부추겼지요. 전광판도 사실은 텔레비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가정의 텔레비전, 거리의 텔레비전, 그걸 보는 군중, 그리고 군중이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모습이 하나의 스펙터클로 재전송되는 이런 순환과정을 통해서 엄청난 군중이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쨌든 월드컵을 계기로 굉장한 에너지를 경험했는데, 이것이 우연적인 사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이를 경험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다양한 세력들 사이에서 그 에너지의 성격을 규정하고 이를 흡수하려는 투쟁이 벌어지고 있고 이런 시도는 앞으로 상당히 지속될 듯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에너지를 승화시킬 수도 있지만 그걸 자기모멸적으로 소모할 위험도 크다는 느낌입니다.
최원식 솔직히 말해서, 저는 평소에 축구를 좀 지루한 게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외국과 할 때는 봐요, 물론 텔레비전으로. 운동장까지 직접 가는 성의는 없었지요. 그러니까 전형적인 민족주의 축구관객, 한마디로 수준 낮은 축구관객입니다. 두 분과 마찬가지로 저도 이번에 어어, 하다가 점점 빨려들어갔어요. 급기야는 포르투갈전을 직접 인천 문학(文鶴)경기장에서 봤습니다. 그 경험은 매우 희한했어요. 그날 시합은 야간에 있었는데 운동장이 아주 커다랗고 아름다운 화면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다가 야간조명의 빛 속에서 운동장의 리얼리티가 홀연히 증발하면서 이것이 물질적 현실이 아니라 혹시 싸이버 현실 또는 이미지가 아닐까 하는 착시가 슬그머니 생겼습니다. 여기에는 야간조명과 함께 운동장 양쪽에 설치된 커다란 화면에서 뿜어져나오는 격동하는 이미지들도 한몫을 했지만, 텔레비전을 통한 간접관람은 물론이고 직접관람도 우리 눈에 이미 장착된 미디어를 통해 본다는 점에서 미디어적이라는 것을 이번에 깨달았어요. 월드컵에 대한 열광에는 바로 미디어시대의 이미지에 대한 열광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대한 군중에 압도됐어요. 경기장 안팎의 응원열기라는 게 정말 대단했고, 특히 꼬마들이 응원하는 것을 보면 예뻤어요. 그런데 제 자신은 거기에서 주춤했죠. 박수는 열심히 쳤지만 ‘대〜한민국’을 외치지는 못하겠더라고요. 그런 틈새에 한편으로는 혹시 내가 꼴로쎄움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저 선수들이 혹시 검투사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등 상당히 복잡한 체험의 미로를 헤맸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우리 선수들과 관중의 폭발력에 본원적으로는 행복했습니다. 요컨대 월드컵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는 미디어의 장악력 또는 포섭력이 아주 강화됐고, 그 속에서 대중의 출현이랄까 대중시대의 도래라는 것이 이제 그냥 하나의 구호가 아니라 현실로 다가왔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월드컵을 통해 출현한 군중현상에는 자본 또는 미디어의 호출과 자발성이 혼효(混淆)되어 있기 때문에 단지 긍정과 부정이라는 양분법에 의거해 파악하는 것은 무립니다. 대중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체제순응성과 그걸 단숨에 깨버리는 양면성, 즉 문화적 폭발이 갖고 있는 양면성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이 문제가 크게 다가왔습니다.
김종엽 원래 축구라는 것이 공격성에 촛점이 맞춰져 있는 경기죠. 코트가 있는 경기들, 예를 들면 테니스나 배구 같은 것에 비하면 현저하게 몸싸움이 많고 공격성이 강한 경기입니다. 전세계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7 대 3의 비율로 축구팬을 형성해요. 그런데 우리의 경우 여성팬이 굉장히 많았어요. 황선홍이 헤딩을 하려고 뛰어올랐다가 이마를 다친 일이 있잖아요. 그때 카메라가 아주 인상적으로 그 장면을 비추었어요. 황선홍이 누워서 손으로 이마를 감싸쥐고 있다가 스르르 손을 내리는데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장면이 중계됐죠. 여자들이 남자보다 축구경기를 싫어하는 이유는 공격성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여자후배에게 그 장면을 어떻게 느꼈냐고 물으니까 뜻밖의 대답을 하더군요. 처음에는 깜짝 놀라고 경악하고 안타까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묘한 쾌락이 느껴지더라는 거죠. 뭔가 진짜 게임의 본질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축구는 아주 원형적인 공격성의 체험이 그 안에 녹아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그것이 대중을 흥분시키는 게 아닌가 싶고요. 한편 몇천명의 사람과 과천시민극장에서 경기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제일 힘들었던 것이 뭐냐면 대한민국을 외칠 때 엄지손가락으로 찌르는 동작이었어요. 저는 이 동작을 통해 이번의 월드컵 군중이 이전의 군중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87년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정치적이었지만 이번에는 비정치적이었죠. 또한 주먹을 불끈 쥐고 구호를 외치는 예전의 동작과 양손으로 찌르는 이번의 동작 사이에는 상당한 문화적 차이가 반영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이 동작이 잘 안되더라고요.(웃음) 이것은 정치적 열망을 표현하려는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구호 탄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홍준 대중이 갖고 있는 폭력성이랄까 야만성 이런 것들을 풀어줌으로써 이것이 다른 방향으로 분출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는 어느 계급사회에서나 존재했습니다. 로마시대에는 그것이 꼴로쎄움이라는 상징물 속에 녹아 있었죠. 아마도 건물의 구조나 객석 배치에서 군중의 함성을 어떤 식으로 반영할 것인지를 당시에도 철저하게 계산했을 거예요. 그것의 먼 후손이 월드컵 축구경기장인데, 축구전용 경기장을 홍보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객석에서 선수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에요. 그건 바로 꼴로쎄움처럼 눈앞에서 피가 튀는 그런 폭력을 간접체험하고 경기에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인데 이번 월드컵에서 특징적인 것은 바로 IT를 이용했다는 것이죠. 길거리응원이 폭발적인 문화현상으로 나타났던 것은 테크놀로지가 받쳐주었기 때문이거든요. 그 테크놀로지라는 것이 한마디로 말하면 전광판과 대형 텔레비전입니다. 텔레비전 모니터와 전광판에서 나오는 이미지는 작은 꼴로쎄움이 온 국토를 뒤덮는 것과 같았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사실 골을 넣는 장면을 본 것이 아니라 집단환상에 사로잡혔던 것이죠. 특히 금년도 월드컵에서 재미있었던 것은 여러 방송사의 화면이 똑같았다는 점이에요. 해설자들의 차이로만 시청률이 달라졌죠. 중계를 피파(FIFA)가 지정한 곳에서 독점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화면을 봤는데, 이는 경기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이미지들을 고정시키는 결과를 낳았어요. 박지성이 골을 넣을 때 카메라 각도가 어디였고 박지성의 모습이 어땠는지, 즉 클로즈업이었는지 롱숏이었는지를 똑같이 기억하는 것이죠. 안정환이 오노 쎄러모니를 할 때 관객들이 기억하는 장면은 코너의 카메라가 선수들이 달려오는 것을 영화처럼 풀숏으로 잡은 것뿐이에요. 다른 각도에서 찍은 것들은 방송에 거의 나오지를 않아요. 만약 뉴스라면 같은 사건이라도 어느 채널에서 봤는가에 따라 기억하는 것들이 서로 다르고, 그래서 사건 자체가 중심에 놓일 텐데 이번 월드컵 중계에서는 이미지가 똑같기 때문에 이미지가 곧 실체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아마도 이번 월드컵은 모든 사람에게 균일하게 강요되다시피 한 이미지들로 남을 거예요. 사람들 머릿속에 똑같은 화보집이 들어 있는 것이죠. 꼴로쎄움과 다른 점이 있다면, 꼴로쎄움에서 서로 싸우고 피를 흘리던 검투사들은 이방인이었다는 점이에요. 그러니까 객석의 관중은 타자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것을 마치 투견게임 보듯이 관람한 것이죠. 하지만 이번 월드컵에서 대표팀 선수들은 타인이 아니었죠. 어떤 분이 왜 여성팬들이 많은지를 얘기하면서 공감할 수 있게 지적하신 바와 같이 월드컵은 전쟁이기 때문에 대표선수에 대한 친밀감은 당연하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남자들, 즉 자기 남편과 애인과 아들이 전쟁터에 가서 싸우는 것을 집에 있는 여자들이 걱정하면서 응원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죠. 한편 전광판 같은 것은 한국 IT와는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돼요. 다만 전광판을 구매하고 소비했을 뿐이죠. 오히려 그것은 획일적인 이미지로 대중들의 자발적인 에너지를 표준화했습니다. 예를 들어 질서를 강조한다거나 거리응원이 끝난 다음에 청소하는 장면을 계속 방영해서 의무사항처럼 만든 것들 말이죠.
최원식 붉은악마의 출현에는 인터넷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관전은 텔레비전을 통해서였습니다. 대형 전광판이라는 것도 일종의 텔레비전이죠. 그런 점에서 대중이 문화권력의 대표적인 계몽장치인 텔레비전에 의존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김홍준 이미지만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런 행사에 대해서 갖고 있는 기억까지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 같아요.
최원식 많은 군중이 질서를 잘 지켰다는 데 대해 자부심도 들지만, 한편으로 그렇게 허무하게 흩어지나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어요.
김종엽 폭력성이 매우 낮은 군중에 대해 전세계적으로 멋있다, 잘한다는 얘기를 하고 심지어는 콜리건(Korligan)이라는 용어까지 생겼다고 합니다. 왜 군중이 그렇게 질서있었는가는 흥미로운 주제인데 거기엔 몇가지 요인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 요인은 여성 등 상대적으로 폭력성이 낮은 집단들이 군중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는 점이에요. 사실 축구라는 것이 군사적 메타포(military metaphor)가 매우 강한 경기여서 국가대항전을 볼 때 전쟁터에 나간 남편이나 애인을 바라보는 심정도 작용합니다. 하지만 오빠부대라고 불리는 여성 팬덤(fandom) 현상이 이번에 처음으로 거리에 진출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여자들이 많으니까 폭력성이 낮아져서 불미스러운 사태가 군중의 규모에 비해 굉장히 낮았던 것이지요. 또하나의 요인은 군중이 모이면 위반을 통한 희열이나 즐거움을 얻으려고 폭력적으로 되는데 우리들의 경우에는 그런 위반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한국축구대표팀이 처음에 16강, 그 다음에 8강, 마지막에 4강까지 갔는데, 4강은 기적처럼 느껴져 일종의 내적 일탈이 일어난 거죠. 일상적 감각으로부터 내적 일탈이 일어나서 이미 쾌락이 넘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추가의 위반이 불필요한 상황이 아니었나 싶어요. 군중의 행동을 알고 싶은 사회학자로서는 조별 예선에서의 미국전 무승부가 아쉬워요. 어떻게 보면 군중의 행동을 1 : 1이라는 스코어가 절묘하게 통제를 한 거예요.
월드컵과 영상기술
최원식 저는 신문에서 일본의 여성팬들이 디지털 카메라, 망원경, 캠코더를 들고 축구선수들을 자세히 관찰하며 찍어대는 장면을 보면서, 이번 월드컵에서 드러난 ‘축구과부’ 현상의 종언을 생각했어요. 한국여성이 제일 싫어하는 게 남자들이 군대 가서 축구한 얘기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였는데 이번 월드컵으로 한국여성의 축구에 대한 열광이 크게 자리잡았습니다. 아까 김감독은 이런 열광을 전쟁터에 나간 남편, 아버지, 오빠, 오랍동생을 걱정하는 일종의 정치성으로 설명했는데, 그밖에 또다른 층위가 있습니다. 여성들이 축구 같은 공격성이 강한 스포츠를 통해 아주 공개적으로 남성의 육체를 발견하고 즐기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 에로티씨즘이 상대적으로 소수에 국한되어 있던 오빠부대의 확산을 불러왔다는 분석을 감안할 수 있지요. 훌리건이 점점 맥을 못 추는 이유가 축구관객의 상당수를 여성이 점유하게 된 때문이라는 분석도 재미있어요. 90년대 초까지의 싸우는 축구, 이기는 축구, 영웅의 축구에서부터 즐기는 축구, 이미지와 스타일의 축구로 변모해온 것과도 관련이 되는데 이건 한편으로 스포츠 자본이 여성을 끌어들이는 전술이기도 하죠. 심지어는 앞으로 여성축구를 활성화하려는 피파의 의도를 거론하기도 하는데, 여성팬의 거대한 출현도 이미지에 매혹되는 대중시대의 도래와 겹쳐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이는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이 과정에서 젠더의 위계가 파괴되는 긍정적 효과도 없지 않거든요. 하여튼 여성팬의 증가에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카메라 기술의 발달이 매우 중요하다는데 김감독께서 한 말씀 해주시죠.
김홍준 그건 사실입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게임은 4년 단위로 중계기술이나 장비의 발달 같은 것들을 테스트해보는 장이 되거든요. 월드컵을 20년 동안 쭉 봐오신 분들은 알겠지만 20년 전의 화면이라는 것은 앵글도 단조롭고 카메라도 고정된 반면, 지금은 경기장을 설계할 때부터 카메라를 고려해요. 모터가 달려 있어서 리모트 컨트롤로 선수가 뛰어가는 것을 그대로 잡을 수 있는 카메라도 있어요. 스포츠 중계를 보면 갈수록 다큐멘터리적인 화면과 극영화적인 화면의 구분이 사라져가요. 하나만 예를 들어보죠. 육상경기나 축구경기를 할 때 선수들이 처음에 죽 서 있잖아요. 예전에는 카메라가 그들을 훑으며 지나갈 때 뉴스 카메라처럼 많이 흔들렸어요. 사람이 들고 찍으니까 그렇죠. 그런데 지금은 스테디캠(steadicam)이라는 장비가 있어서 흔들림이 없어요. 선수들이 서 있는 얼굴을 훑고 지나갈 때의 화면은 영상언어상으로는 극영화의 문법인 거예요. 장비의 발달이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지워버린 것이죠. 가령 황선홍 선수가 피를 흘리는 화면은 고성능 망원렌즈로 잡은 것인데, 20년 전의 축구중계였다면 누가 쓰러졌는데 피를 흘리나보다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거죠. 영화의 경우 그런 장면은 콘티에 넣어서 따로 찍어야 하지만 경기장에선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극영화처럼 편집되어서 나오거든요. 그만큼 이미지가 훨씬 소비하기 좋게, 입맛에 맞게 만들어지는 것이죠. 좀더 견강부회를 한다면 여성팬이 많아지는 이유도 경기의 중계방식 자체가 좀더 정서적·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여러가지 장치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번 월드컵에서 1승, 16강까지는 한국팀의 경기를 보는 것 자체가 현실이었어요. 그런데 16강 이후부터는 점점 판타지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16강에 들었을 때 사람들이 느낀 감정이 목표를 성취했다, 어디를 점령했다, 이런 차원의 희열감이었다면 8강에, 4강에 올라가면서는 현실감이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거리응원은 카니발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87년 6월항쟁 때와는 또다른 경우로, 한국사회가 집단적으로 판타지를 경험한 것이라고 봐요. 문제는 이 경험을 계속 통제하고 지배이데올로기 속에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의 쌈바 축제와 같은 폭력이나 불상사가 없었고 상당히 통제되었다는 점에서 독특한 현상인 것 같아요.
김종엽 다국적 미디어 자본의 관점에서 보면 스포츠는 최고의 문화 콘텐츠인 셈이죠. 외국영화만 하더라도 자막을 봐야 하는데 스포츠의 경우에는 규칙만 이해하면 되니까 언어장벽이 없는 거의 유일한 문화 콘텐츠인 셈이죠. 그러다보니까 자본에 의해 쾌락을 증폭시킬 수 있는 기술이 계속해서 발전해온 것 같아요. 아마 히틀러 시대에 개최된 베를린 올림픽은 그런 점에서 매우 획기적인 것 같은데, 스포츠와 영상기술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김홍준 스포츠를 영상에 담은 기념비적인 작업이라면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바로 1936년 베를린올림픽 다큐멘터리를 꼽을 수 있죠. 히틀러의 절친한 친구로 배우 출신의 여성감독인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은, 최근에도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고 있는데, 당시 철저한 나찌주의자였어요. 이 사람이 「올림피아」라는 베를린올림픽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었는데, 그 특징은 영상에 담긴 걸 보는 사람들이 현실에 직접 참여한 사람보다 오히려 핵심에 더 다가갈 수 있다는 거예요. 스포츠 중계라는 것은 그 영화에서부터 시작된 철학을 계승한 것인데 그 철학은 크게 봐서 두 가지예요. 하나는 어떻게 하면 있는 그대로를 생생하게 보여주느냐, 또하나는 영상을 통해서, 즉 이미지의 선택적 조작 등을 통해서 재미와 의미를 어떻게 강화하느냐 하는 것이죠. 그런데 점점 후자 쪽으로 가고 있어요. 아마 경기장에서보다 화면으로 보면 훨씬 재미있을 수 있는 것이 지금의 축구일 거예요. 그리고 축구 중계는 야구, 배구나 농구 같은 구기종목보다 오히려 육상이나 수영 중계와 가깝다고 생각돼요. 단순한 동작들, 관중 속에서는 잘 놓치는 것들을 영상으로 잡아내고 그럼으로써 이미지를 통해 경기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거죠. 판정시비가 많은 축구에서는 언제나 주심이나 부심의 판정보다는 화면이 정확하잖아요.
최원식 보르헤스(J.L. Borges)가 영국은 축구라는 바보 같은 것을 전세계에 전염시켰다고 비난했다는데, 이는 물론 아르헨띠나의 정치경제적 현실을 호도하는, 축구가 가진 이데올로기적인 기능 때문이라는 점을 이해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군중이나 대중에 대한 엘리뜨적인 공포 또는 경멸이 숨어 있다고 생각돼요. 그러나 축구의 승리를 민족의 저력으로 등치해 부국강병으로 나아가자고 외쳐대는 한국지식인들의 월드컵에 대한 통상적 관점은 성찰적 태도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점에서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지식인들이 보여준 통합주의적 관점의 순진한 낙관론도 문제지만, 그에 못지않게 대중 또는 대중현상을 그 체제순응적인 일면에만 촛점을 맞춰 부정하는 비관론도 적실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월드컵으로 출현한 비정치적 군중과 왕년의 정치적 군중 간의 차별성은 차별성대로 인지하면서 이 군중의 무의식적 정치성, 즉 그 속에 담긴 한국사회의 현재에 대한 판단과 미래에 대한 꿈을 잘 독해해야 한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면 좋겠어요.
김홍준 이 군중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군중 속에는 룸펜도 상당히 있었겠지만 대부분 대학생이나 중고등학생이라고 봐요. 십대·이십대들은 팬덤이나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것이 아주 일상화된 세대잖아요. 그러니까 서태지 이후, ‘포스트 서태지’ 세대라고 볼 수 있는데, 가령 축구선수 누구를 스타로 좋아하고 하는 것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또 어느 선까지는 용인되는 그런 세대라는 것이죠.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이들은 제도교육의 틀에 갇혀 있는 세대예요. 그런데 제도교육이 덜 억압적이고 좀더 청소년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사회에서라면 이렇게 2백만, 3백만은 모이지 않았을 거예요. 다같이 축구에만 열광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억압적인 일상을 보내는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에게는 월드컵 거리응원은 완전한 일탈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죠. 비록 텔레비전으로만 봤지만 거리 군중의 이미지는 굉장히 이율배반적이었어요. 만약 내가 외국인이라면 빨간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 수십만명이 모인 것을 보고 숨이 탁탁 막혔을 거예요. 그 화면은 리펜슈탈이 찍은 나찌 전당대회와 거의 차이가 없어요.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한 방향을 바라보고 같은 동작을 취하는 것은 저거 파시즘 아냐, 하는 생각을 들게 하죠. 그런데 그 개개인을 보면 태극기로 온갖 치장을 하고 페이스 페인팅을 하는 등 다양하거든요. 이 두 가지가 공존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개인들이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음으로써 기꺼이 익명의 군중이 되는 한편으로, 여성팬들을 중심으로 각자 자기를 꾸미고 개성을 분출한다는 측면에서는 유례없는 일인 것 같아요.
김종엽 프로이트가 쓴 개념을 원용하는 게 설명이 될지 모르겠네요. 프로이트는 꿈을, 억압하는 힘과 억압된 욕망 간에 타협 형성(compromise formation)이 이루어진 결과라고 얘기하죠. 저는 이번에 축제 군중이 두 가지 종류의 타협 형성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정치적 타협 형성입니다. 이번 축제를 87년 6월항쟁이나 80년 광주와 연결시키는 지식인들이 많은데 이는 무리한 점도 있지만 타당한 측면도 있습니다. 세종로나 광화문에 1백만명이 운집했을 때 정치적으로 정당성이 없는 정부는 그런 모임을 견뎌내기 어렵습니다. 초기 한국 대 폴란드 경기 당시 50만명이 모였을 때 상당한 긴장이 조성되었어요. 하지만 정치적으로 정당성이 있는 정부이기 때문에 그걸 감당할 수 있었던 거죠. 다른 한편 대중에게도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 통제력이 있었어요. 시민의 자제심과 함께 경찰의 자제심 내지 정권의 자제심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이 군중은 6월항쟁의 성과와 정치적 민주화 덕에 신나게 한판 놀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되고요. 다른 하나는 표현방식에서의 타협 형성입니다.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형성하는 것은 태극기와 빨간 티셔츠였어요. 그런데 이들은 가능한한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태극기와 붉은색을 중심으로 하는 상징이 씌워져 있는데도 그 안에서 개성적인 바디 페인팅을 한다거나 태극기로 스커트를 만들어 입는 등 일탈과 개성을 표현했지요. 이 두 가지의 타협 형성이 군중에 생기를 불어넣은 힘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터넷 문화, 붉은악마, 노사모
최원식 ‘대〜한민국’을 외친 붉은악마 현상에 대해 아전인수적 해석들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진보파는 레드콤플렉스로부터의 해방을 찬미하고 보수파는 태극기가 국기게양대에서 내려와 국민생활 속으로 내면화됐다고 흥분합니다. 그런데 제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80년대의 정치적 열광에 대한 90년대적 반동으로 컴퓨터를 비롯한 IT의 발전에 힘입어 기왕의 집합적 표상들(민족·민중·계급 등)에 대한 충성도가 약화되면서 싸이버 공간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거대한 군중으로 돌아왔다는 점입니다. 90년대적 대탈주의 매개체였던 IT가 오히려 그 대탈주를 다시 역전시키는 역동성 속에 대중과 집합적 표상들의 결합이 순식간에 이루어졌습니다. 서로 충돌하면서 들끓는 이념적 지향들의 혼효를 성급히 해석하기보다는 집합적 표상들의 새로운 차원의 복권(復權)을 잘 따져봐야겠는 생각입니다.
김종엽 붉은악마가 PC통신 동호회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IT 문화, 인터넷 문화와 많이 연결시키는데요. 저는 우리나라 인터넷 문화는 오프라인과 온라인 간의 상호순환이 굉장히 강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점에서 저는,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이번 모임이 전국민적인 ‘정팅’이었다고 생각해요.(웃음) 그렇기 때문에 사실 새롭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최원식 그런 점에서 한국의 인터넷 문화가 참 흥미로워요. 한국문화의 정치적 변용력은 항상 경이의 대상입니다만, 인터넷 문화의 확산과정에서도 그런 특성이 잘 드러났다고 봐요. 아시다시피 인터넷이 처음 상륙했을 때, 한쪽에서는 그 쌍방향성에 주목, 전자민주주의의 실현을 예찬하는 복음론이 나타났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싸이버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숨은 신’으로 편재(遍在)하는 자본의 존재를 환기하며 종당에는 현실마저 지워버리는 싸이버적 파국을 예언하는 묵시록적 논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인터넷 문화는 이런 논의들을 넘어서 생물(生物) 같은 역동성을 확보하면서 이번 월드컵에서 실증했듯이 놀라운 자기조직력을 보여줬습니다. 아마도 이런 역동성은 제1세계적인 것, 제2세계적인 것, 그리고 제3세계적인 것이 중층적으로 결합된 한국 또는 한반도의 현실적 조건이 작동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번에 제가 주목한 것은 붉은악마의 상징이 치우천왕(蚩尤天王)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이것을 붉은악마 집단이 균질적으로 공유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분명히 지도부에서는, 지도부가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치우천왕을 의식적으로 좀더 확산시키려는 의도가 보여요. 여기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려는 분도 있지만 제 생각에 치우천왕이란 상징은 문제적입니다. 치우는 우리나라 공식 사서가 아니라 중국 사서에 일종의 신화로서 등장합니다.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와 탁록((鹿)에서 싸워 패배한, 한족(漢族) 바깥 출신의 군장(君長)이 치우거든요. 우리가 단군의 후손이라고 하듯이 중국사람들은 황제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황제는 중국민족주의의 숨은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치우는 중국민족주의를 비추는 거울이지요. 이 치우를 한국의 국수주의자들은 동이(東夷)의 지도자로 보고 싶어하지만 중국에서는 남방 묘족(苗族)의 영웅으로 보기도 하고 실제로 치우의 후예를 자처하는 묘족의 마을이 있다고 해요. 이 점에서 치우는, 동이든지 아니든지를 떠나서 중국의 문맥 안에 있다고 봅니다. 치우는 단군처럼 자연스런 공유상징이 아니기 때문에 특히 중국에 대해서 충돌적입니다. 이번 대회에서 중국에 대한 공격성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나고 남한성(南韓性)이 두드러지게 강조된 게 한중관계의 악화와 서해교전으로 연결되지 않았는가 하는 엉뚱한 공상을 하게도 됩니다. 군중의 양면성을 얘기했는데 이 군중이 가진 집합적 표상에 대한 새로운 열망은 우리가 충분히 접수해야 하지만 단순 민족주의의 발전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합니다.
김종엽 저도 중국이 자기의 문화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여러 변방의 이민족들을 정벌하는 역사에 치우가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우리가 치우를 거론하는 것은 국조로 단군을 얘기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죠. 굉장히 공격적인 민족주의 성향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민족적인 정체성을 그렇게 상고사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도 흥미로운 현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번 월드컵의 뒤에는 상처받은 민족주의랄까 민족의식이 있다고 생각돼요. 저는 치우천왕으로 상상력이 옮겨가는 것과 관련해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우연적인 선택이라고 보는 거죠. (1983년 청소년 축구팀이 4강에 올랐을 때) 멕시코 현지 언론에서 우리 응원단을 레드 퓨리즈(red furies)라고 했던 것을 우리나라 언론이 붉은악마로 번역하고, 다시 그것이 레드 데블즈(red devils)로 영역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데블은 우리 문화에는 매우 낯선 것일뿐더러 기독교 쪽은 이런 말을 쓰는 것에 딴죽을 걸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통적인 표상 중에서 데블에 가까운 것을 찾다가 도깨비에 이르고, 귀면와(鬼面瓦)의 도깨비가 재야사학에서는 치우의 얼굴이라고 하니까 치우천왕에까지 이르게 된 것으로 봐요. 다른 한편으로 상처받은 민족의식으로 인해 자기 문화의 정체성을 고구려나 치우 같은 공격적인 표상에서 찾는 우려할 만한 국수주의 성향도 엿볼 수 있습니다. 치우가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니라 붉은악마의 저류에 있는 그런 성향의 표현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우연한 선택이었다고 보고 싶은 심정이에요. 그렇지 않다면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런데 대중은 실제로 치우를 그렇게 열광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김홍준 네티즌의 반응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국수주의적 측면을 하나 발견할 수 있어요. 일반 매체에서는 비교적 크게 강조하지 않는 데 비해서 네티즌들이 많이 신경을 쓰고 그들 사이에서 많이 떠돌아다니는 것 중의 하나가 해외의 반응인데, 한국에 대해서 호의적이고, 같이 응원해주고, 한국팀의 승리를 기뻐해주는 나라는 좋은 나라이고, 우리 경기 방송하면서 해설자가 한국팀을 폄훼하고 중상모략하거나 자국 팀이 한국에 졌다고 해서 한국사람에 대해 적개심을 드러내는 나라들은 나쁜 나라가 되는 식이죠. 이런 식의 주장이 인터넷 상에서 많이 확산되고 있어요.
2002년 한국사회에서 볼 수 없었던 중요한 문화·사회 현상으로 특히 인터넷에서 가장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 ‘노사모’와 붉은악마인데요. 그 두 집단의 공통점 중 하나는 인터넷에서 시작했다는 것,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교호, 그리고 비정치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이라는 겁니다. 또한 두 집단은 네티즌 문화를 삼십대 이상, 그리고 남성들에까지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아요. 저는 지난 4월에 노사모 게시판 보느라고 밤을 몇번 새웠고(웃음) 6월에는 월드컵 관련 게시판들 보느라고 밤을 새웠는데 저와 같은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노사모와 붉은악마는 우연하게 발생한 것만도 아니고 또 많은 부분에서 연결고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가령 민주당의 국민경선 때 자발적으로 노무현을 응원한 것과 월드컵에서의 거리응원은 분위기로 볼 때 거의 큰 차이가 없거든요.
김종엽 둘 다 인터넷 문화란 측면에서 유사성이 있고, 조직의 운영방식이나 단기간에 열풍을 일으켰다는 점에서도 비슷한데요. 두 현상의 공통점 중에서 저는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열망이 가장 크다고 봅니다. 노사모는 노무현이 지닌 정치적 이미지와 지도자상을 중심으로 조직된 거고, 월드컵 응원에서는 히딩크라는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열망이 표현되고 있죠. 이번 월드컵으로 좋은 지도자만 있으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국민들 속에 확산되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니까 대중이 새로운 리더십을 원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리더십만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런 것이 노사모와 붉은악마에 흐르고 있는 대중적 열기의 근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중의 출현과 지식인의 무기력
최원식 월드컵 얘기를 이제는 접고, 좁은 의미의 문화얘기로 들어갑시다. 왕년의 정치적 대중과는 일정한 차별을 보이는 비정치적 대중의 출현이 과연, 건국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족문화 또는 민중문화 운동의 물질적이고 정치적인 힘으로 전환될 통로가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눴으면 좋겠어요. 민족문화론의 직접적 기원은 해방 직후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을 겁니다. 우익은 물론이고 좌익도 민족문화론을 제기했습니다. 아마도 조선공산당의 ‘조선민족문화건설 테제’는 대표적 문건일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일제시대 공산주의운동은 식민지라는 현실을 깊이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민족문화론을 우익적이라 낙인찍었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면서 조선공산당은 과거의 오류를 자기비판하고 조선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단계, 즉 근대적인 국민국가 혹은 민족국가의 건설로 조정합니다. 임화(林和)가 명쾌하게 정리했듯이, 해방 직후 건국운동의 열기 속에서 ‘지금은 민족적이냐 계급적이냐가 아니라 민족적이냐 비민족적이냐가 핵심모순’이기 때문에 민족문화건설론으로 선회했던 겁니다. 내적으로 차이는 있지만 좌우익이 공동으로 제기했던 해방 직후의 민족문화론은 국내외적 환경의 악화 속에서 6·25라는 국제적 내전을 겪으면서 단절되고 맙니다. 60년 4월혁명을 획기로 반독재민주화투쟁이 발전하면서 민족문화론은 부활합니다. 물론 70년대 이후의 민족문화운동은 해방 직후의 민족문화론에 대해 계승적인 동시에 탈계승적인 측면이 두드러집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전통적인 좌우대립과 6·25 이후 남북의 이항대립조차도 넘어서는 분단체제극복론으로 심화되면서 자본주의와 20세기 사회주의를 횡단하는 진정한 의미의 제3의 선택이라는 인식과 실천을 강화해온 것이죠. 광주항쟁세대의 등장으로 70년대 민족문화론의 틀 밖으로 탈주하는 급진적인 흐름들이 80년대에 나타났지만, 크게 보면 이 역시 민족문화운동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6월항쟁(1987), 서울올림픽(1988), 베를린장벽의 붕괴(1989)를 고비로 생활세계의 혁명적 변화와 맞물려 민족문화론으로부터의 대탈주가 감행되었습니다. 그런데 탈냉전시대의 도래 속에서 완강하던 분단체제가 97년 IMF사태를 고비로 급속히 흔들리면서 ‘탈주의 90년대’를 반성하는 기운이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통일시대를 여는 새로운 건국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족문화건설론은 여전히 유효한 테제입니다. 물론 새로운 상황에 즉해서 발본적 재창안이 요구되지만 말입니다. 이 분기적(分岐的) 상황에서 출현한 월드컵 대중을 민족문화운동에 한번 대입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김홍준 90년대 내내 민족문화론에 대해서 판단이나 논의를 유보하는 듯한 암묵적인 분위기가 계속됐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리고 그 공간을 일종의 대중문화론이라는 것들이 대체해왔어요. 대중문화론의 흐름도 국가권력이나 자본의 주도에 의해서 어느 틈엔가 문화론에서 산업론으로 바뀌어버렸어요. 제가 몸담고 있는 영화 부문만 하더라도 그래요. 최근 몇년 동안 한국영화가 산업적으로 르네쌍스를 맞으면서 정부의 정책에서도 산업논리가 주도하고 있어요. 그리고 관료들이나 주류 매체에서 영상문화를 얘기할 때 결국은 산업논리로 귀결이 돼요.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 투쟁이나 영화진흥정책에 관여하는 과정에서 이런 점을 굉장히 많이 느끼게 되는데, 그것이 답답하기도 해요. 말하자면 문화를 산업논리와는 무관하게 일종의 문화적 정체성,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국민들의 문화향수권 등의 차원에서 지원·보호·육성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아직도 상당히 약해요. 당장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이 성과를 국가 브랜드 강화로 연결해 한국제품의 수출시장을 개척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면서 결국은 경제논리로 가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분위기도 없고, 그렇게 되면 좋은 게 아니냐 하는 생각만 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되는 데는 민중의 주체적인 의지나 자발성을 간과해버린 채 결국은 대중을 소비자로 머물게 만든 지식인들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해요. 지금 지식인은 월드컵 같은 사회현상에 대해 많은 해석들을 하지만 저는 그들 자신이 무기력한 느낌을 받지 않을까 생각해요. 이걸 어떻게 해석하고 문화적인 동력으로 가져갈 것인가에 대해서 저희들이 난감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전과 달리 싸이버 공간 등에서 정보의 공유, 정보의 투명성, 그리고 투명성이 담보하는 일종의 도덕성에 대한 요구는 그것이 지도자에 대한 것이건 기존의 여러 국가기구나 체제에 대한 것이건간에 이제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선수단에 대한 포상금을 차등지급하느냐 균등지급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결국은 균등지급으로 결정이 났잖아요. 차등지급이 발표되는 순간 인터넷에서는 온갖 육두문자가 난무하면서 난리가 났어요. 그런 여론이 상당히 압박을 주었기 때문에 균등지급을 하게 됐는데 이것이 과연 4년 전이라면 가능했겠느냐는 것이죠. 축구협회 주도의 관행을 뒤집어버렸다는 것은 월드컵 과정에서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한 대중이 거둔 작은 성과라면 성과라는 생각도 들어요.
최원식 대중의 출현에 대한 지식인들의 무력감을 고백한 김감독의 말씀에 근본적으로 공감합니다. 대중은 지식인들의 논의를 곧잘 추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대자적(對自的) 민중과 즉자적(卽自的) 대중이라는 양분법을 다시 따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양분법의 안경을 벗고 20세기 한국 근현대 문화운동사를 큰 시야에서 돌아보면 새로운 문화열은 항상 대중 또는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표출되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 대중은 서구적 의미라기보다 불교적 의미의 대중, 즉 비구(남성승려) 비구니(여성승려) 우바새(남성신도) 우바이(여성신도)를 통틀어 4부대중이라고 부르는 유기적 대중에 가깝고, 대중문화도 고급문화에 대비되는 서구적 의미의 대중문화라기보다는 대중의 정치·문화 욕구가 의식적·무의식적 차원에서 결합된 그런 역동적 군중현상과 연관됩니다. 이 점에서 1919년 3·1운동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대중의 출현을 처음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3·1운동 자체가 말하자면 근대 문화운동이자 정치운동이었죠. 3·1운동의 정치적 열망이 좌절되자 곧바로 신문학운동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 폭발이 일어났어요. 신문학운동의 발전과정에서 민중적 성격이 강화된 1920년대 중반 이후의 프로문학운동의 근저에도 3·1운동에서 출현한 거대한 군중의 자태가 숨쉬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3·1운동이 일제시대 문화운동의 뿌리라면 해방 후 남한 문화운동의 근저에는 4월혁명(1960)이 놓입니다. 신동문(辛東門) 시인이 “신화처럼 나타난 다비데군(群)들”이라고 예찬했듯이 4월혁명이야말로 또 한번 거대한 군중의 신비로운 계시였습니다. 4월혁명이 5·16 쿠데타(1961)로 좌절되자 4월세대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문화운동이 폭발했습니다. 70년대 이후의 문화운동이 그것이죠. 거대한 군중체험 뒤에는 반드시 문화운동이 폭발했던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번 월드컵에 출현한 군중현상을 예사로 보아 넘길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이 대중은 앞시기의 정치적 대중, 즉 지식인의 자기복제적 성격이 짙은 민중과 달리, 시장에 포섭된 정도가 강한 불가해한 타자적 성격이 뚜렷합니다만, 비정치적인 정치성이 감지됩니다. 그 때문에 더욱 이 대중의 숨은 정치성을 제대로 읽고 이에 대해서 좀더 적극적으로 간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김종엽 한국 근현대사에 역동성을 부여해온 것은 대중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에 참여하여 행동하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편에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참여한 사람들은 자기가 뭘 하는지 모르는 상태라 하더라도 문화의 지형도를 바꿔놓습니다. 그리고 바뀐 지형에 대해서 해석자들이 개입하여 그것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어보려고 하지요. 하지만 다음 순간 대중은 전혀 다른 형태로 다시 등장했던 것 같습니다. 3·1운동이나 4·19도 그렇지만 가까운 예로 87년 6월항쟁의 경우만 보더라도 대중이 그렇게까지 갑자기 대규모로 출현하여 정치지형을 바꾸리라는 것을 예상하기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후 여러가지 요인이 겹쳐서겠지만 대중은 탈이념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월드컵 군중은 지난 10년 이상의 탈이념화 속에서 아주 새로운 대중의 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를 해석하려는 여러가지 시도가 있겠지만 대중은 다음 순간에 완전히 또다른 방식으로 공적 공간에 진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테면 대중이 지식인 내지 해석자를 초월하는 현상이 또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최선생님께서 대중의 시대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사실은 민중이라는 단어와 대비하면 대중이라는 표현 자체가 지식인의 무력감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뭔가 분할하기도 어렵고 쪼개기도, 설명하기도 어렵기 때문이죠.
김홍준 영어로는 매스(mass)잖아요, 덩어리.(웃음)
김종엽 대중이라는 표현 속에는 해석자들의 지적인 자신감 상실이 나타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중이라는 표현 자체가 현상의 내부에 들어가서 이것이 알맹이다,라고 말하기 힘든 상황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민중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알맹이가 있죠. 그러나 민중이라는 단어는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민중문화운동이 7, 80년대를 이끌었지만, 그것은 다분히 계몽적인 성격이었죠. 그런데 대중은 스펀지처럼 말없이 흡수하다가 어느 순간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지식인들은 그것에 놀라는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대중이라는 것 안에는 뭔가 창조력이 있고 모든 것을 초과해서 뛰쳐나오는 힘이 엿보입니다. 그것이 한국사회에 역동성을 부여해왔는데 이런 것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중이라는 표현을 넘어서려면 상당한 지적 혁신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홍준 저는 지난 몇년 동안에 매우 흥미로운 현상을 목격했습니다. 영화 쪽을 얘기하자면 한국영화의 변화과정과 한국사회의 변화과정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 같아요. 영화인들이 정치적인 행위를 위해서 집결한 것은 스크린쿼터 수호투쟁이 사실상 처음이었어요. 전략·전술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로비나 읍소가 아니라 여론이나 집단의 힘으로 정부와 언론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그 투쟁이 최초였는데, 그때가 IMF 시기였어요. 국가적 자존심이 완전히 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인데 그래서 여론이 호의적이었던 것 같아요. 이것까지 죽이려고 하느냐 그런 거죠. 그리고 터진 것이 바로 「쉬리」예요. 「쉬리」가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바로 직전에 있었던 스크린쿼터 수호투쟁이 상당히 기여하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에요. 제작하신 분들은 영화가 잘돼서 그런 것이지 스크린쿼터 수호투쟁과 무관하다고 주장하시는데 많은 영화인들은 「쉬리」가 그 덕을 본 면이 있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쉬리」가 담고 있는 내용이 민족주의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기묘한 결합이란 점이에요. 우선 남북관계라는 민족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소재로 끝나버리고 말거든요. 그런가 하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문법과 관습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거기에 익숙한 사람들이 편하게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 영화가 당시에 한국영화를 잘 안 보던 사람들의 입맛에 딱 맞았던 거예요. 「쉬리」가 기폭제가 되어서 한국영화에 투자자본이 들어오고, 나름대로 외피를 불릴 수 있었어요. 그런 동안 한국영화 바깥에서 벌어진 일은 끊임없는 일종의 우경화였던 것 같아요.
노무현 현상이 벌어지기 직전 지식인들 사이에는 패배주의나 체념이 팽배했잖아요. 그러던 것이 ‘노풍’이 불면서 이게 도대체 뭐지 하다가 그것이 잦아드는 순간 월드컵이 터졌어요. 이런 흐름으로 본다면 대중이라는 개념과 민중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보면 무화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지식인의 역할이 지식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상당히 축소되어 있는 것 같아요. 80년대 민족문화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대부분 지식인이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정말 바닥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어요. 인터넷이라는 것을 보면 저는 그람시(A. Gramsci)가 얘기한 ‘유기적 지식인’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아요.(웃음) 어느 단체에 소속한 것도 아니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데 정말 전문적이거든요. 스스로의 훈련으로 널려 있는 정보에 대한 해석능력을 갖게 된 것이죠. 그 단적인 예로 노풍이 불고 있을 때 각종 게시판에서는 지금은 회사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80년대 정세분석 문건의 문체와 구성을 그대로 따른 글을 올리는 거예요.(웃음) 반면에 월드컵 쪽과 관련한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네티즌들의 요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그 요구를 하나의 여론으로 만들어가요. 더이상 정보의 통제가 불가능해졌고, 정보를 흡수할 뿐만 아니라 분석하고 해석하고 더 나아가 생산해내기까지 하는 그런 대중집단이 출현한 것이지요. 이 사람들을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의문이에요. 지금까지는 서구나 제3세계 국가들에서 발생한 비슷한 일을 참조해 우리 현상을 해석해왔잖아요. 그런데 IT나 인터넷 같은 것은 우리가 앞서 나가고 있어서 우리의 상황이 다른 사람들에게 참조가 될지언정 우리가 참조할 것은 없어요. 네티즌 문화랄지 붉은악마랄지 이런 현상이 도대체 없거든요. 그렇지 않아도 무기력한데 어디 참고할 것도 없기 때문에 더 무기력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어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본격적으로 활기있는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는 천재일우의 조건 속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대중한테서 배우자
최원식 변혁운동을 꿈꾸던 사람들이 몽매에도 그리던 군중이 출현했는데 지식인들은 아무 준비 없이 맞았어요. 그때 변혁을 꿈꾸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아마도 우리가 이 대중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다면 지식인들의 탁상공론을 아무렇지도 않게 추월해버리는 대중의 선진성에 당황한 탓일지도 몰라요. 우리 축구가 이번에 압박축구 또는 조직축구를 통해 서구의 스타축구를 압도했지만 한단계 더 넘어서기 위해서는 걸출한 플레이어가 출현해야 하듯이, 문화지식인들은 이 독특한 유기적 대중집단의 출현 앞에서 무기력에 빠질 것이 아니라 대중의 힘을 제대로 보고 그걸 새롭게 자기 내부로 받아들여 갱신을 도모하는 피나는 수련이 필요해요. 도산(島山)의 말씀이 생각나네요.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 될 공부를 아니하는가?” 이번 현상을 보면서 그동안 우리가 방치했던 민족문화론 또는 민중문화론을 대중의 출현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즉해서 창조적으로 재구축하는 작업을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반성을 많이 하게 됩니다.
김종엽 제 자신이 답이 없는 상태입니다만, 그런 창조적 담론의 형성을 위해서는 월드컵 군중의 형성 기제와 비슷한 모범을 따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월드컵에 여성이 활발히 참여한 것처럼 지적 담론의 장에 사회적 소수자들의 참여를 확대한다거나, 월드컵 군중이 그랬듯이 지적 담론 또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활발히 연계하여 전개해나가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사실 월드컵에서 나타난 열광에 버금가는 지적 열광이 있을 때에만 대중의 에너지를 담을 수 있는 담론이 창출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점에서 누구보다도 월드컵 후유증을 심하게 앓아야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월드컵에 담긴 에너지에 형식을 부여하려는 시도들은 순탄한 작업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다분히 사회집단간의 투쟁을 유발하기도 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런 투쟁의 1차적인 대상은 역시 지도자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후보가 된 다음의 노무현씨는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쇠진시킨 측면이 있고 새로운 리더십을 못 발휘하고 있는데, 그것을 히딩크주의가 채울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히딩크 리더십의 본질이 뭐냐 하는 것이 아마 가장 갈등을 일으키는 해석의 장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히딩크주의에 관해 냉소적인 반응 중 하나는 그것을 선진 기술과 우리 노동력을 결합하여 만들어낸 신상품처럼 보는 것, 혹은 더 냉소적인 반응은 일종의 고액 쪽집게과외처럼 보는 것일 겁니다. 이런 냉소적 반응을 넘어서 히딩크주의를 신자유주의적으로 전유하려는 시도가 있겠지요. 능력과 경쟁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인 히딩크주의는 기업과 국가관료를 통해서 상당한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아무튼 히딩크에 대한 국민적 열광 배후에 있는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열망을 제대로 포착하고 어떻게 하면 대중이 스스로 리더십을 창출해나가도록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겠고, 그것을 국가·기업·관료들이 쉽사리 자기 식으로 재단하는 것을 제어하면서 담론의 장을 열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이번 월드컵에서 분출된 대중의 에너지를 담는 형식의 하나로 광장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에 월드컵 군중은 광장 없는 사회에서 스스로 광장을 창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대중의 에너지를 결집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회 성원이 자신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고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광장이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제도적 공간으로서 광장이 있어야만 대중의 에너지가 10년 단위, 15년 단위로 분출되는 현상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김홍준 이번 월드컵 현상에서 대표적인 상징물 세 가지를 꼽으라면 당연히 첫번째는 붉은악마이고 두번째는 태극기라고 생각해요. ‘대한민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상징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오늘 아침 재미있는 뉴스를 들었는데 정부가 “품위를 손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태극기를 문양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국기 관련 조항을 고치기로 했다더군요. 그러니까 태극기로 의상을 만든다거나 하는 것이 법 자체로 금지되어 있었는데, 이번에 군중들이 이 규정을 깨버린 거예요. 어떻게 바꾸냐면, ‘품위를 손상하는’이라는 말 앞에 ‘현저히’라는 세 글자를 넣기로 했다는 거예요.(웃음) 그렇게 바꾼다는 것은 일종의 상징적 제스처인데, 사실 태극기라는 것을 국수주의, 배타적 민족주의, 그리고 성장 이데올로기의 상징물로 여기는 것이 저희 세대잖아요. 그런데 이번에 많이 달라졌어요. 세번째 상징은 리더십을 포함해서 바로 히딩크라고 생각해요. 히딩크 리더십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참 공감하는 바가 많은데, 그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프로페셔널리즘이에요. 히딩크가 갖고 있는 유럽축구에 대한 정확한 정보, 오랜 지도자 생활을 통해서 다져진 스포츠 과학에 대한 이해 등을 하나로 집약하면 프로페셔널리즘이거든요. 선수 때 뛴 경험 가지고 정신력을 강조하면서 밀고 나가는 것이 오히려 아마추어리즘이라면 히딩크 리더십은 프로페셔널리즘이라는 것을 기저에 깔고 있죠. 두번째 핵심은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선수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갖도록 히딩크가 유도한 것은 서로 친하게 지내라는 의미가 아니고 그렇게 해서 커뮤니케이션을 하라는 거죠. 선후배끼리 전술을 얘기하고 전수해줄 것은 전수하고 말이죠. 히딩크 자신이 굉장히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 사람이에요. 아주 간결한 언어로 자기의 의사를 표명하죠.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이른바 주류 사회의 지도자라는 사람들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이번에 대중들은 느꼈죠. 네티즌들이 올린 글들 가운데는, 한국의 경기에 대한 해외언론의 편파판정 얘기가 나올 때 우리나라 언론들은 침묵한 반면 외신 기자들 앞에서 유창한 언어로 설명하고 설득한 사람은 히딩크밖에 없었다는 의견이 있어요. 평소에 잘난 척하던 언론은 다 어디 갔느냐는 말이죠. 커뮤니케이션과 프로페셔널리즘이 지도자의 덕목이라는 것은 사실 상식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 숙지가 늦었고 IMF 이후에야 기업에서 많이 강조되고 있죠.
최원식 지금 말씀에 대개 공감하는데, 히딩크가 한국선수들을 보고 놀란 것이 있다잖아요. 돈독 오른 서구선수들과 달리 한국선수들이 돈보다는 애국심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순수함에 히딩크가 매료됐다고 하거든요. 그런 것을 보면 히딩크식 축구가 단순히 서구 프로페셔널리즘의 이식만은 아니라는 것이죠. 어쩌면 동도서기(東道西器)의 한국식 퓨전축구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우리 사회가 ‘히딩크식’을 몰랐던 것은 아니잖아요? 뻔히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은 거죠. 히딩크식을 각 분야에서 받아들일 실천적인 의지가 과연 있는 것인지, 조건이 열악하다면 그것을 어떻게 마련해낼 것인지, 그것이 지금 가장 중요합니다.
김종엽 한국축구의 발전은 사회문화적인 발전과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세계 4강에 이른 두 대회, 그러니까 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와 이번 월드컵을 비교해보면 잘 드러납니다. 축구는 어떤 경기보다 개인기(개인주의)와 집단적 협력(사회적 연대)의 조화를 필요로 하는 경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전에 멕시코 청소년축구대회에서 박종환 감독의 리더십이라는 것은 박정희의 개발독재와 비슷합니다. 개발독재형 축구였어요. 예컨대 몇가지 공수 패턴을 정해서 훈련을 받고 경기중에는 감독이 손신호에 따라 정해진 패턴대로 패스 등을 했던 것인데, 그에 비하면 이번 히딩크 축구는 연대와 개인주의가 동시에 갖추어진 형태의 경기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론에 많이 보도되었듯이 히딩크는 홍명보와 황선홍 같은 선배선수가 들어오면 후배선수들이 군대 내무반에서 병장이 들어올 때처럼 모두 일어나는 그런 문화에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 개인주의와 수평적 연대의 전통이 미약하다는 증거이지요. 그러나 히딩크가 한국팀을 개인주의와 연대 모두에 입각한 팀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은, 다른 한편 우리가 그런 리더십을 수용할 수 있는 토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히딩크 리더십이 우리 사회의 사회문화적인 성숙을 반영하는 동시에 우리 안에 남아 있는 한계를 돌파한 측면이 있다는 겁니다. 히딩크 리더십이 비록 수입된 리더십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저력이 있었음을 긍정하고 이에 희망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싶군요.
월드컵 이후의 한·중·일
김홍준 월드컵 얘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가 다른 화두를 던지겠습니다. 월드컵 열기에 묻혀서 얼렁뚱땅 넘어간 뉴스가 하나 있는데 다름아니라 일본 대중문화의 전면 개방이에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현재 분위기는 월드컵으로 화해무드가 형성된 이참에 아예 이 문제를 해결해버리자는 것이 정부의 의도인 것 같아요. 일본 대중문화가 거의 개방됐지만 핵심적인 것들은 개방되지 않고 있거든요. 영화의 경우에 국제영화제 수상 감독의 작품이 아니면 18세 관람가 이상은 안된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의 경우 극장 상영은 되지만 텔레비전 상영이나 비디오는 안된다, 하려면 한국어 더빙을 넣어야 한다는 제한이 있죠. 지금까지는 제한적이고 단계적이었어요. 일본영화가 처음에 부분 개방됐을 때 사재기를 한 수입업자들은 거의가 파산지경에 놓여 있어요. 일본영화가 80년대 홍콩영화 정도의 점유는 하지 않겠느냐 하는 예상이 빗나갔는데, 대중가요나 방송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또 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일본의 영상물이 한국에서 틈새시장을 노릴 수 있는 것은 사실 비디오 시장이에요. 앞으로는 DVD가 되겠죠. 그런데 영화개봉 같은 것은 배급회사를 거쳐야 하고 마케팅 시장이 크기 때문에 통제하기 쉽죠. 그러나 비디오는 밑으로 침투하는 것이거든요. 50만, 60만명의 관객을 예상해서 마케팅하는 것과 5천장, 1만장 깔리는 것을 생각하면서 마케팅하는 것은 달라요. 최근 몇년 동안에 성장한 한국의 음반산업, 영화산업, 방송 등 고유의 콘텐츠 시장에서 일본 것들이 개방됐을 때 어느 정도 점유하고 들어올 것인지 상당히 궁금해요. 저는 방송이 가장 큰 변수라고 생각해요.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해서 정부가 개방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되는데 텔레비전에서 일본 프로그램을 공공연하게 볼 수 있게 된다면 젊은 시청자들의 호응이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요. 그런데 영화의 예를 본다면 감수성이 상당히 달라요. 우리 관객들이 영화를 소비할 때 기대하는 것과 일본의 대중문화가 갖고 있는 감수성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저는 아직까지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흥미로운 사실은 월드컵의 와중에서도 진행되고 있는 상황들이 있다는 거죠.
최원식 월드컵 이후 동아시아의 미래도 낙관만 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만 월드컵 공동개최가 한일관계에 새로운 전기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냉전시대의 한일관계를 근본적으로 규정해온 1965년의 한일협정은 동아시아 반공 포위망에서 일본의 역할을 강조하는 한미일 삼각동맹의 구축을 골자로 삼고 있습니다. 탈냉전시대가 도래했어도 부시의 등장에 고무된 한일의 우익들은 여전히 65년 체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월드컵 공동개최가 한일간의 시민적 연대를 한단계 높이고 탈냉전시대의 한일관계로 연착륙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은 분명하죠. 그런데 우리 언론에서는 일본이 한국을 좋게 보는 것들만 주로 보도하는데 그에 못지않게 일본 우파들의 경계심리가 상당히 강화된 것 같아요. 일본 친구의 말에 의하면, 일본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문제가 곧 제기된답니다. 그래서 일본 대중문화의 전면적 개방은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감독 말씀처럼, 규제를 풀어도 이제 큰 영향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문제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속도를 조절했으면 해요. 몇년 전에 대통령이 일본에 가서 한일공동선언을 하면서 과거사에 면죄부를 주는 바람에 오히려 교과서 문제로 곤욕을 치르고 선언의 선의가 왜곡된 경험이 있잖아요? 한국의 속도조절이 일본의 시민운동에도 도움을 줄 거예요. 또한 월드컵으로 뜻밖에, 수교 이후 호혜적(互惠的)이었던 한중관계가 현재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한국의 16강 진출때까지는 괜찮았대요. 그런데 8강으로 가면서부터 집중적으로 반한(反韓) 보도가 강화되었는데, 그리 된 데는 우리 쪽 잘못도 없지는 않은 것 같아요. 첫째는 탈북자 문제로 한국 시위대가 중국대사관 앞에서 데모를 하면서 오성홍기를 불태운 것, 둘째는 중국 대 터키 경기에서 우리가 터키를 열렬하게 응원한 것, 그 다음에 10만을 예상했던 중국인의 한국 입국비자를 3만 5천으로 제한한 것도 영향을 미쳤대요. 최근 중국에서 월드컵으로 격앙된 국민적 감정을 비판하는 자성의 소리가 확산되고 있다고 하니 기대해봐야죠. 그런 점에서 저는 한국이 4강에서 그치기를 잘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한일관계의 진전에 악령처럼 따라붙는 65년 한일협정체제도 그러하지만, 잘 나가던 한중관계를 뒤틀리게 만든 탈북자 문제를 감안할 때, 그 근원에는 한반도의 분단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물론이고 동아시아의 미래를 위해서도 분단체제의 극복이 중요합니다. 사실 서해교전도 결과적으로, 월드컵이 북을 배제하고 치러진 것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거든요. 태극기와 대한민국의 내면화가 남한사회 통합을 위해서는 플러스 효과가 있지만 남한주의라고 할까, 이런 것의 강화로 비춰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부산아시안게임이 이번 월드컵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북과 중을 포함하는 아시아 전체의 축제로 치러지기를 기대합니다.
김종엽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평화와 우호가 매우 결정적인데, 이번 월드컵은 동아시아 내에서의 시기심과 경쟁심리를 자극한 측면이 많습니다. 여러가지 요인이 겹쳐서 표현된 것이지만 중국 언론의 반한 감정은 그 대표적인 경우인데, 그 이유를 좀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의 대국주의에서 볼 때, 한국 축구가 그들에게 콤플렉스라는 점입니다. 중국에서 전국적인 스포츠는 축구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탁구나 육상 같은 운동은 세계적인 수준이긴 해도 한 성(省)에서나 인기있는 경기입니다. 그런데 전국민적인 스포츠인 축구의 경우 국가대항전에서 한번도 한국을 이긴 적이 없기 때문에 바둑에서의 이창호 콤플렉스 같은 것을 축구에서도 갖고 있죠. 이런 점은 우리 책임은 아닙니다. 하지만 두 가지 점에서 우리의 책임도 상당한데, 하나는 중국 대 터키 경기에서 한국 관중이 일방적으로 터키를 응원한 일입니다. 이 일은 사실 우리 대중의 상상력 안에 여전히 한국전쟁의 우방 개념이 그대로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데, 중국 입장에서는 매우 불쾌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월드컵 기간 중에 일어난 탈북자 문제였습니다. 중국인들은 북한이 어려운데도 남한은 자기 동포를 전혀 돕지 않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 동포들이 굶고 있는데 남는 쌀과 전력도 안 주는 나라가 뭐가 그렇게 말이 많냐는 것이죠. 탈북한 사람들이 중국에서 먹고사니까 그들의 살림을 떠맡고 있는 것은 중국인 셈인데 일부 종교인이나 시민 단체들의 탈북기획 때문에 중국이 인권을 탄압하고 외교적으로 무례한 나라로 인식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한국에 대한 악감정을 부추긴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확실히 월드컵을 동아시아의 축제로 승격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스포츠의 평화화 효과를 극대화하여 동아시아 평화와 분단체제 극복에 활용할 방안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동아시아 축구리그를 창출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국가 대항이 아니라 유럽처럼 클럽 대항전 형태의 동아시아 리그를 만드는 거죠. 그러면 국가간 경기에서 나타나는 과열도 줄고, 동아시아 내의 지역간 교류도 매우 활발해질 것입니다. 적절한 싯점에서 북한이 여기에 동참한다면 동아시아 평화에 큰 기여가 되겠지요. 물론 현재는 그런 리그를 만들어내기 좋은 상황은 아니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축구를 정치적으로 중립화하려는 대중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축구 연고지가 대한민국, 딱 하나이고 부천·안양·포항 등은 아직 축구 연고지가 아닌 셈인데 진정으로 연고지 문화를 만들어서 축구의 국민적 성격을 일정정도 약화시키고 축구리그를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 무드에 기여하도록 노력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김홍준 일본 선수가 K리그에서 뛰고 중국 선수가 J리그에 가고, 이렇게 되면 분명히 대중들에게는 그런 효과가 있겠죠.
6·13지방선거의 충격
최원식 어느 원로 지식인이 월드컵 이후에 빨리 정치토론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씀을 했다는데 저도 공감해요. 이번 월드컵 기간중에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의 하나는 지방선거입니다. 정치권에서는 지방선거 참여율이 낮은 것을 월드컵에 갖다붙이지만 솔직히 얘기하면 월드컵이 지방선거 참여율에 끼친 영향은 미미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자기가 찍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축구 아니라 축구 할아버지가 있다 하더라도 가서 투표하고 볼 것이거든요. 이것은 결국 지방선거를 비롯한 우리나라 정치가 대중의 자발적 열광을 끌어낼 소지가 적다는 것을 웅변한다는 점에서 월드컵 이후 정치개혁의 문제는 핵심적인 사안으로 떠오르리라 봅니다. 그런데 월드컵이 올림픽과 다른 점은 후자가 한 도시에 집중되는 것에 비해 전자는 지방분산성을 가지는 것 아니겠어요. 이 점이 월드컵을 국민적 축제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는데 이게 월드컵 이후 한국의 왜곡된 중앙·지방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합니다.
김홍준 기득권층이 끊임없이 획책하는 것은 주로 젊은 유권자층에게 정치 허무주의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소수의 똘똘 뭉친 보수 경향의 표가 여론인 것처럼 만들어 정치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지방선거의 경우 상당히 복합적인 모습이 보였는데 월드컵의 열풍에 묻혀서 제대로 분석들을 안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가장 궁금한 점은 누가 민주노동당을 찍었는가 하는 것이에요. 이번 선거에서 비례대표제를 실시했는데 서울만 해도 민주노동당의 득표율이 10% 정도 돼요. 그런데 이 득표율은 투표율이 낮은 와중에 투표한 사람 중에서 10% 이상이라는 점에서 고무적입니다. 민주당에 대한 실망감에서 민주노동당을 많이 찍었다고 하는데 좀더 정치한 분석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누가 투표를 했으며, 투표한 사람 중에 과연 어떤 성향의 사람들이 그쪽으로 갔는지, 그리고 이것이 민주노동당의 본격적인 진출로 봐야 하는 것인지, 이것 역시 길거리 응원처럼 일시적인 현상은 아닌지 분석하는 것 말입니다. 사족이지만 유세기간에 정말 실망스러웠던 일은 각 후보들이 보여줬던 홍보방식이에요. 대중가요 가사를 바꿔부르고 조그만 픽업 트럭을 개조해서 ‘게릴라 콘써트’ 식으로 유세하는 것은 4년, 8년 전만 해도 신선하고 참신하게 보였는데 이제는 아주 촌스러워요. 길거리 응원에 참여해본 사람에게는 월드컵과 너무나 비교되겠죠. 그런데 민노당이나 군소정당으로 분류되는 분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유세를 하는 거예요. 대학생으로 보이는 자원봉사자들이 율동을 하는데 참 초라해 보였어요. 대중들에게 호응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그들만의 리그 또는 시대착오라는 느낌도 들었어요. 이를 뛰어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야 할 사람들이 기성의 방식에 안주해 있구나, 그것이 선거운동의 표면에 드러난 일시적인 현상이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김종엽 지방선거의 투표율이 낮았던 것은 후보가 많고 인물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죠. 지방선거의 투표율 하락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지방선거를 할 때는 지방자치시대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어요. 하지만 너무도 많은 인물이 쏟아져 나오다보니 선관위에서 보낸 봉투 안에 든 후보자의 이력만 보고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죠. 그런 상황이 투표율을 낮추고 있습니다. 또 지방의 재정자립도나 정치적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바꿔봐야 별 효과가 없었다는 경험이 거듭되면서 투표율을 낮추었다고 생각해요. 낮은 투표율에는 유례없는 언론의 무책임 탓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텔레비전의 경우,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에는 그래도 선거방송을 계속했어요. 그렇지만 선거를 열흘 정도 앞둔 싯점에서 방송을 월드컵으로 도배하다시피 했습니다. 언론이 자신의 임무를 방기함으로써 유권자들은 정보 부재에 허덕였고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죠. 정당투표에서는 민주노동당이 승리를 거뒀다고 할 수 있어요. 민주노동당의 득표율이 세번째로 많으니까 굉장한 거라고 생각됩니다. 득표지역이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어서 가능성은 보여주었지만 문턱을 넘을 만큼의 응집력은 없어 보이고 또 그 표를 다 민주노동당 지지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민주당에 대한 실망표, 탈민주당의 표만으로 해석하기도 어려운데 새로운 정치질서의 형성에 대한 욕구와 민주당에 대한 실망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민노당이 자신의 정당 득표를 모두 자신을 지지하는 것으로 여기기보다는 그 안에 표현된 열망을 담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홍준 가장 바람직한 득표 분포는 녹색당·민노당·사회당 등이 골고루 표를 가져가면서 그 합친 표가 상당한 것일 거예요. 그런데 이번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일단 한걸음 나아간 것이라고 생각돼요. 지방의회 같은 경우에 들어가서는 안될 사람들이 들어가서 앞으로 상당한 마찰이 있을 거예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빨리 시민소환제를 만드는 데 노력을 집중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문화가 기본이 되는 지방자치
최원식 지방선거가 대선의 대리전처럼 치러진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지방선거 후에 대선후보를 뽑았으면 지방선거의 일정한 고유성이 그래도 살아났을 텐데 중앙정치의 위기를 지방자치의 희생으로 돌파하려고 한 중앙정치권이 한심합니다. 그동안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한국사회가 나름대로 지방자치의 경험을 축적해왔는데 이번 지방선거를 통해서 그나마의 싹도 거의 잘라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북분단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지방문제가 해결돼야 하잖아요. 남의 서울, 북의 평양만 우뚝하면 전국민적 협의와 실천이 모여야 진전이 가능한 통일사업이 제대로 되겠어요. 괴테는 일찍이 베를린 하나만 남고 지방들이 죽는 그런 독일 통일은 원치 않는다고 했는데, 지방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지방자치에 대해서 본격적인 토론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방자치를 연구하는 학자들 얘기는 지금의 지방자치는 행정의 분권화이지 권력의 분권화가 아니라고 해요. 분권화를 통해서 지방주민들이 지방정부를 정치적 비전, 생활의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자신들의 정부라고 생각하면 문제가 달라져요. 그동안의 지방정부는 개발독재의 거점인 서울을 모방해 개발주의로만 질주했어요. 중앙의 복제인 지방정치는 중앙·지방의 차별을 강화하면서, 지역에 맞는 지방자치의 구축이 아니라 역으로 토호적인 지방정치를 심화시키고 있는 실정이에요. 김감독은 지방의 축제인 부천 판타스틱영화제와 연관해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아요. 지방자치야말로 정치가 아닌 문화가 기본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김홍준 부천영화제 일을 하면서 자연히 지방자치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리고 지역에 존재하는 여러 문화역량들 또는 단체들과의 관계도 고려하게 되고, 그 관행도 경험하게 됐어요. 모든 문화가 서울에 집중되다보니 서울에서 활동하면 잘 나가는 것이고 지방에 있으면 뭔가 뒤떨어진 것 같다는 일종의 열등감이 있어요.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원들이 있는데, 문화에 대한 지원이 참 적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나마 있는 문화에 대한 지원이 능력있는 사람들에게 그리 많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개발독재 시대부터 관과 유착해서 그런 지원들을 일회성 행사에 소모한다거나 혹은 자기들의 단체를 존속시키는 데 쓰는 관행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요. 이는 다른 분야가 다이내믹하게 변화하고 민주화하는 것에 비하면 일종의 사각지대라는 생각이 들어요. 문화운동의 역량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 특히 진보진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런 지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있어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활동을 해나가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지원이 없을 것이라고 미리 생각해버리거나, 또 자기들은 자격이 없거나 더 나아가서 그것을 받는 것 자체를 타협하고 굴종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어요. 그래서 뭔가 지원이 필요하게 되면 제일 먼저 단체의 중앙을 바라봐요. 그런데 사실 지역단위에서는 활용할 수 있는 자원들은 굉장히 많아요. 가령 지방자치 단체나 의회 등을 설득하고 캠페인을 벌여 여론을 만들어내면 굉장히 좋은 것들을 할 수 있고 또 그런 예들이 많아요. 작은 축제들 중에서 성과를 내는 것들이 있죠.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인적자원이 됐건 지원제도가 됐건 있는 자원을 좀더 적극적으로 견인하거나 따내는 것에 대해서 서로의 경험들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어요. 말하자면 네트워크가 없는데 이런 네트워크가 상당히 필요한 것 같아요. 저는 부산영화제, 부천영화제, 전주영화제, 여성영화제에 참여하는 실무자의 네트워크를 만들려고 해요. 그래야 정보를 공유하고 자기들이 현장에서 겪었던 여러가지 시행착오들을 되풀이하지 않고 인력도 공유할 수 있지요. 이런 노력들이 각 분야별로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기 단체 차원에서 활동하는 것 더하기 중앙 지향적인 것에서 탈피하고 사고를 전환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80년대 문화운동가들이 시대에 아직 적응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원식 좋은 지적이신데 기존의 재야 문화단체들이 민주화의 진전으로 제도권에 편입되면서 기존의 관변 문화조직과 차별성이 없어지는 부분도 있어요. 이걸 방지하기 위해서도 아래로부터의 네트워크, 다른 지역 문화운동들과의 네트워크를 짜나가면 좋은 효과를 발휘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김홍준 제도권 안에 들어갔다가 포섭되거나 변질되면 어떻게 하나라는 우려 때문에 바깥에 머물려는 경향들이 있는데 소극적인 생각이고 자신감의 부족 같아요. 물론 기존의 관변단체들이나 이른바 제도권 단체들이 갖고 있는 관행을 답습해서는 안되죠. 그런 점에서 저는 영화제 역시 문화운동이라는 강변을 하는데, 자화자찬 같지만 영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젊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편이에요. 상당히 큰 규모의 지역축제이면서도 투명성이나 효율성에서 잡음이 덜한 것이 영화제예요. 이른바 지방마다 지역축제라는 것이 많은데 끝나고 나면 환경파괴도 있고, 심지어 비리로 인해 줄줄이 쇠고랑 차는 일도 있어요. 이런 일들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는 게 영화제거든요.
김종엽 일반시민의 관점에서 보면, 일상적으로 문화프로그램을 잘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 지방 문화행정의 큰 문제점입니다. 극장이나 시민회관 등이 있지만 일상적인 문화프로그램을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가 사는 지역을 좋아하게 되는 계기가 제가 보기에 대표적으로 좋은 교육과 문화, 의료시설인 것 같아요. 지역 문화행사를 보면 일과성 축제가 많고, 그나마 규모가 큰 것들만 관심을 받고 살아남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 것들은 지역민의 참여가 미미해요.
재외교포와 외국인 노동자의 정체성
최원식 나라 밖으로 눈을 돌리면 재외 교포와 동포 들에게 미친 월드컵의 효과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어느 신문에 실린 재일교포 2세의 글을 재미있게 봤어요. 1세들이 고국에 대한 열렬한 충성을 갖고 있다면 2세들은 일본사회에 편입될까 말까 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는데 그때 아버지가 한일 축구경기에 데리고 갔대요.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한국이 골을 넣자 일어나서 환호를 한 거예요. 주위에 있던 일본 사람들에게 “죄송합니다” 하니까 그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는 일화도 재미있어요. 어린시절 아버지와 함께 봤던 축구 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그리고 이번의 월드컵 축구가 전세계의 교포나 동포 2세, 3세들에게 자기와 같은 경험, 정체성의 혼란을 정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거라는 감동적 글이었습니다.
김홍준 아니할 말로 교포들이 기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죠. 미국 같은 경우 재미교포들 대부분이 소상인이고 주로 상대하는 사람이 주류 백인사회가 아니라 흑인이거나 히스패닉인데, 이번 월드컵으로 한국의 인지도와 위상이 많이 높아졌을 거예요. 문제는 그다음이죠. 전세계에서 제2의 유태인이라는 말을 쓸 정도로 화교말고 우리만큼 널리 퍼져 있는 민족도 없거든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어요. 재외동포들, 적어도 미국 시민권자가 아닌 한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부재자 투표를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해외동포가 줄잡아서 5, 6백만명 정도가 된다면, 유학생을 포함해서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교민들이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선거권의 행사는 지금 단계에서 아주 중요해요. 이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니에요. 폴란드는 해외 교민들에게 다 투표권을 부여하고 있는데 바웬사가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시카고에 선거유세를 오더라고요. 바르샤바 다음으로 폴란드계가 많이 살고 있는 도시가 시카고예요. 우리도 재일교포 2세, 3세가 한국 국적을 갖고 있을 때 대통령 선거 등에서 투표권을 행사하게 한다면 이는 그들에게 실질적인 정체성을 갖게 하는 것이거든요. 월드컵이라는 국제행사를 치르면서 우리도 코스모폴리탄적인 시각이 생겼잖아요. 해외언론의 반응이나 교민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요. 여기엔 양면이 있는데, 하나는 해외 교민들에 대해서 정서적인 일체감이나 단일민족인 것만 말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국민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얘기할 때가 됐다는 것이에요. 또 하나는 국내의 외국인 노동자들인데,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팀을 응원하는 것을 보니까 한심한 건지 좋은 건지 슬픈 건지 판단이 안 서더라고요. 속으로는 참 뭉클하고 순수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죠. 어느 언론에서도 지적을 했지만 한국사람들의 배타적 민족주의가 이번에 강화될 뻔했는데 그걸 막아준 사람이 히딩크라는 거예요. 국가대표 감독이 한국 사람이었으면 우리 민족의 우월성 하면서 난리가 났을 거예요. 터키에 대해서 매스컴에서는 부지런히 형제국을 강조해요. 터키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애정이 있더라고요. 돌궐, 발해까지 올라가는…… 그것을 터키에서는 교육까지 하는 모양인데요.
최원식 돌궐이 고구려의 형제국이거든요.
김홍준 그런데 사실 6·25 때 터키가 우리를 도와줬기 때문에 고마워하는 것은 젊은 세대의 정서가 아니에요. 한국전쟁에 대한 생각이 달라요. 그리고 우리는 터키인을 아시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팀은 또 유럽팀이에요. 여러 제도언론을 통한 일종의 상징조작들은 있지만 어쨌든 국내 외국인 노동자와 재외교포 문제는 결국 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최원식 그렇습니다. 통합이라는 것이 그늘을 만드는 통합이 돼서는 안되죠. 재외교포 문제도 민족주의의 확대 차원으로만 봐서는 안되겠지요.
김홍준 일상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재외교포들에게 배려를 하지 않고 국내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어울려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통일이 돼도 같은 패턴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거죠.
최원식 재외동포들이 한국으로의 흡수통합이 아니고 다중적 정체성을 가지고 그 사회에서 사는 게 중요하죠. 사실 그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어떻게 살겠어요? 자기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한국인의 후예라는 의식을 가지고 그 나라 시민으로 제대로 사는 것이 한국 또는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서도 좋은 것이거든요. 이런 다중적 정체성의 획득은 국외는 물론이고 국내 사람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종엽 시민규정과 민족규정이라는 것을 모순없이 공존시킬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그와 관련해 가장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재일동포라고 생각해요. 중국 같은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민족규정과 시민규정이라는 것이 분리되어 있고 공존할 수 있어요. 저는 가능한한 해외동포에 대한 많은 교육이나 지원, 영사관 등을 통해서 한민족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 전체 우리 사회에 생기를 불어넣고 성장하고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런 소중한 자원을 놓친다면 문제가 될 거예요. 그러려면 그들이 살아가는 그 땅에서 한국인이라는 민족규정이 우호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하고 스스로 자긍심을 가져야 하는데, 월드컵이 좋은 기능을 했다고 생각해요. 다른 한편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도 가능하면 한국 국적을 가지고 싶어한다거나 결혼하고 싶어할 때 시민권을 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가급적 받아들여야 해요. 그런데 간헐적으로 보도되는 것을 보면 귀화조건이 너무도 까다로워요. 프랑스나 미국도 까다롭기는 하지만 그 나라의 시민이 되고 싶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 일정한 절차를 거치면 얻을 수 있는 데 반해, 우리는 혈통과 문화적 학습을 지나치게 따지는 편이죠.
김홍준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외적인 민족경험을 했거든요. 다른 나라는 대개 다민족 사회예요. 여기에서 민족의 의미는 네이션(nation)이 아니라 영어로 말하면 에스닉(ethnic)이죠. 미국이 그렇고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다민족이죠. 한 나라 안에서 언어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존하는 네덜란드나 벨기에의 경우도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이민자, 혹은 식민지 출신의 사람들이 들어와서 섞여 살아요. 물론 그런 사회에는 인종주의와 민족간의 갈등이 존재하지만 적어도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인종이나 민족에 의해서 차별받지 않도록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귀화조건을 비롯해서 제도적 차별이 너무나 많이 있는 거예요. 역사가 전개됨에 따라서 한국사회마저도 일종의 다민족 사회로 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아요. 이미 외국인과의 접촉이나 외국인 노동자와의 결혼 등을 통해서 민중적 차원에서는 이미 단일민족이라는 허상이 깨져나가고 있죠.
민족문화론의 새로운 발견을 위해
최원식 이제 좌담을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대중의 출현이 갖고 있는 양면성을 잘 성찰하면서 민족·민중 또는 기왕의 거대담론과 이를 접목해 어떻게 한국사회의 개혁, 한반도 전체의 평화를 위한 힘으로 바꿔나갈 수 있을지 지식인들이 겸허하게 성찰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무엇보다도 크고 작은 문화운동, 정치운동이면서 문화운동인, 그런 형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두 분이 각자 자기의 분야에서 새로운 토론을 일으키고 구체적인 문화작업으로 풍성한 결실을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김홍준 저는 활동가는 아니지만 문화현장에서 여러 정책과 대중을 접하면서 작은 개혁들이 참 중요한 시대라고 느꼈어요. 80년대를 돌이켜본다면 인문적인 교양을 갖고 문화적으로 훈련되어 있으며, 또 자기희생이 따라붙는 엘리뜨들에 의한 문화운동은 그 시대의 조건에서 맞을 수밖에 없었고 일정정도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성과들 뒤에 나타난 여러가지 실망이나 후유증들은 애당초 그것이 엘리뜨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는 한계 속에 이미 있었던 것 같아요. 90년대에는 일종의 대중추수적인 경향들이 도처에서 드러나고, 일상성에의 매몰이나 전망 부재, 타협, 투항, 투기, 체념, 나아가서 냉소가 지식인 사회에 만연했습니다. 대중들의 힘이 결집되었을 때 얼마나 자발적으로 다이내믹한 코리아가 가능한지를 이번 월드컵은 보여주었고 이는 우리가 중요하게 새겨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지식인들의 역할과 성분도 달라진 것 같아요. 정보의 민주화, 감성의 대중화, 그리고 국제적인 시각의 획득 등은 굉장히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인층이 출현하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80년대의 여러가지 단체·모임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이 노사모와 붉은악마라고 봐요. 노사모의 지도부가 있을 것이고 붉은악마의 지도부가 있을 것이고, 거리응원의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있을 텐데, 이들을 조직화하는 것은 위로부터의 커다란 힘이 아니라, 지역이라는 개념을 원용하든, 문화의 각 장르라는 개념을 원용하든간에 작은 분야 내에서의 리더십이라고 봐요. 전략과 전술을 유연하게, 그러면서도 정확한 원칙을 가지고 선례를 쌓아나가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너무나 상투적인 말이지만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것인데, 미시적인 것이라고 간과되어온 것들, 혹은 포기되었던 것들을 다시 되찾는 과정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진정성의 복원이 필요한 때가 된 것 같아요.
김종엽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는 엘리뜨주의의 개입 없이 대중이 스스로 분출할 수 있음을 강렬하게 경험했습니다. 그런 것에는 보이지 않는 자잘한 진화와 축적의 역사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평소에 그런 자잘한 변화, 개혁, 혁신, 진화, 축적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했기 때문에 대중이 마치 도약한 것처럼 보이죠. 결국 앞으로 대중의 호흡에 착근해서 관찰할 때만 근사치라도 예견하고 에너지를 모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어쩌면 이 에너지를 어떻게 끌어갈 것이냐 하는 논의 못지않게 어떻게 이런 에너지가 분출됐는가에 대해서 오랫동안 숙고하는 것이 지금의 일차적인 과제일 것입니다. 대중을 이끌기보다는 대중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변화해나가는가를 지식인들이 파악하고 대중이 스스로 자기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굉장한 열기를 통해서 모든 표상을 집중시킨 것은 ‘대〜한민국’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묘한 언어의 율동 안에 뭔가 새로운 것이 싹트고 있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엿보입니다. 그것이 어떤 집단에 의해서 왜곡되지 않고 동아시아 평화와 한반도 통일, 그리고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이 평등하게 사는, 대중이 일상적으로 욕망하는 세계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도록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원식 그동안 문학과 다른 예술분야 사이의 소통이 그렇게 원활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이 점에서 문예부흥기를 맞이하고 있는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김감독과, 대중문화를 비롯한 문화 일반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보여준 김교수의 참여가 뜻깊습니다. 이 소통의 자리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 문화운동의 출발점인 민족문화론에 대한 비판적 토론을 다시 시작해보자는 것입니다. 새로운 수준에서, 대중의 출현이라는 새로운 상황과 마주하면서 이를 발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창조적으로 재구축할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비유적으로 얘기하면 민족문화론은 대동세상(大同世上)으로 가는 징검다리로서의 소강(小康)이 아닐까요? 대동세상은 유교의 유토피아인데 천하위공(天下爲公)의 세계입니다. 사적 소유의 근원인 일부일처제도 폐지되고 남녀차별·빈부차별·지방차별·국가차별 등 모든 차별이 사라지는, 인류사 이래의 큰 염원이 실현되는 게 대동세상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는 너무 엄청난 세상이니까 공자가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중간에 제시한 것이 소강이에요. 소강세상은 천하위가(天下爲家) 즉 천하를 자기 집으로, 패밀리로 생각하는 거예요. 민족문화론은 아마도 보존하면서 폐기하는 일종의 방편입니다. 대동세상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중간단계로서 민족문화론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장시간 진지한 토론에 임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