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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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훈 鄭世薰

1955년 충남 홍성 출생. 1990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시 발표. 시집 『그 옛날 별들이 생각났다』 『맑은 하늘을 보며』 등이 있음. borihanal@hanmail.net

 

 

부화

 

 

새끼거북들이 첫 노동을 한다

 

무덤처럼 모래더미가 짓누르고 있는

바닷가 백사장 바다거북 산란장 웅덩이

알에서 부화한 새끼거북들이

모래더미를 헤치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

 

위쪽에 자리한 놈들은

머리 위에 덮인 모래들을 헤쳐내고

양 옆쪽에 자리한 놈들은

서로를 가로막아놓은

모래벽을 허물어뜨리고

아래쪽에 자리한 놈들은

무너져내리는 모래들을 밟아

발판을 단단히 다져가면서

 

묻어놓은 거북알 중에서

기껏해야 한두 놈만 부화된다면

세상 밖으로 나올 확률이

거의 희박하다는 새끼거북들

함께 부화되어, 헤쳐내고, 허물고, 다져가는 사이

모두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

 

완패와 완승을 거부하는 바다로 나아간다

 

 

 

동행

 

 

비둘기 한떼가 우르르 몰려왔다가 몰려가고 난

마당 한구석에서 녀석이 절뚝이었던 것이다

묶였다 간신히 헤어난 듯 아직도 절뚝이는 다리에

한뼘 길이 올가미줄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는데

이 녀석 옆에 말짱하게 생긴 또다른 비둘기 한 녀석이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있었던 것이다

 

말짱한 녀석이

다들 날아간 청청한 하늘로 성큼 떠나지를 못하고

먼지 날리는 마당 한구석에서 절뚝이 녀석에 붙어

절뚝이 녀석이 계단으로 가면 계단으로 따라가고

담장 위로 올라가면 담장 위로 따라가고

처마 밑으로 가면 처마 밑으로 따라가고

다시 마당으로 내려오면 마당으로 따라 내려가고

모이를 쪼으면 덩달아 모이를 쪼으고

그러다가 틈만 나면 절뚝이 녀석 다리의 올가미줄을 쪼아대고

하는 것일까 내심 의아스러웠던 것인데

 

이 녀석들 두 녀석이 마당가에 마주서서

서로의 뾰족한 부리를 우로 좌로 연신 비벼대면서

뽀뽀하다가 뒤뚱뒤뚱 짝짓기를 하고

또 좌로 우로 연신 비벼대면서

뽀뽀하다가 뒤뚱뒤뚱 짝짓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 사랑하는 짓이 우리네 사랑하는 것보다

왠지 절실하고 순전하고 황홀하게 보이는 것이어서

사랑을 제법 볼 줄 아는 나이라는 사십 중반 이내 마음이

괜스레 얼굴 붉어지는 것이었다

 

이윽고! 몰려갔던 비둘기 한떼 우르르 다시 마당가에 내려앉고 있었다

 

 

 

다시 시작─죽기로 마음먹은 사랑

 

 

옥수수 알갱이들이 튼실하게 영글어가는

옥수수 잎사귀 위에서

사마귀 한쌍이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그 사랑이 이미 오랜 시간 진전되어왔는지

암놈이 수놈의 몸뚱어리를

거의 다 먹어치워가고 있었다

 

사마귀가 사랑을 나눌 땐

태어날 새끼들을 위해

죽기로 마음먹고 시작한다지 않는가

그리하여 수놈이 암놈의 먹잇감이 되어

암놈이 수놈을 다 먹어치워야

그 사랑이 비로소 끝난다 하지 않는가

 

죽기로 마음먹은 사랑을 한 끝에

홀로 된 저 암놈 역시

머지않아 이 옥수수 잎사귀 위에

제 몸 스스로 새끼들의 먹잇감이 될

알집 하나 남겨놓고 생을 마감할 것이다

 

그리고 계절이 한 순배 돌고 나면

죽기로 마음먹은 그 사랑을 이어갈

새끼사마귀들이 하나둘 태어나

옥수수 알갱이들이 튼실하게 영글어가는

옥수수 잎사귀 위에서

 

죽기로 마음먹은 그 사랑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