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김영하 金英夏
1968년 경북 고령 출생. 1995년 『리뷰』로 등단. 소설집 『호출』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장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등이 있음. timemuseum@lycos.co.kr
조
1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
시간을 때우려 집어든 영화 홍보물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조는 그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조금은 어색한 번역투의 문장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강렬한 맛이 있었다. 조는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몇번이나 그 문장을 읊조렸다.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은 타락에 관한……
팝콘을 튀기는 냄새가 풍겨왔다. 극장의 어두운 구석엔 거대한 팝콘 봉지를 들고 우적우적 팝콘을 씹어삼키는 사람들이 보였다.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들에게 비만, 체지방 과다라는 판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탄수화물과 지방질의 섭취를 줄이고 규칙적인 운동을 하시오! 죄의식과 싸우며 팝콘을 먹는 자들과 멀리 떨어진 곳엔 건강과 매력을 자신하는 청춘들이 시계를 보며 영화 시작시간을 기다린다. 엉덩이를 탄탄하게 받쳐주는 청바지, 가슴선을 강조하는 최신형 브래지어를 한 여자들 옆엔 멋지게 머리를 빗어넘긴 남자들이 발끝으로 대리석 바닥을 툭툭 차고 있다. 아직 영화가 시작되려면 이십분이나 남았다. 이십분 동안 그들 중 대부분은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라는 광고문구를,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될 것이다. 그러곤 몇시간 후 표백제 냄새 풍기는 여관방 침대에서 몸을 섞게 될 남자 혹은 여자, 지금 바로 옆에서 팝콘을 먹고 있는 바로 그 남자 혹은 여자에 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문을 잠시, 아주 잠시나마 품게 될 것이다. 혹시, 이 남자(혹은 여자) 때문에 내가 타락해버리는 건 아닐까. 아니면 벌써 회복 불능으로 타락해버린 것은 아닐까. 사람에 따라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타락해버린 누군가를, 그런 줄도 모른 채 너무도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2
휴일의 백화점은 국경도시처럼 어지럽다.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엄마의 손을 놓친 아이들이 울고 소매치기 일당이 눈먼 지갑을 노린다. 직원들의 스트레스 지수는 치솟고 진열된 상품들에서 뿜어져나오는 화학물질 때문에 눈이 따갑다. 이렇게 모두가 괴로워하는 휴일, 그것도 바겐쎄일 중인 백화점에서 홀로 즐거운 사람이 있다. 바로 조다. 조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매장과 매장 사이를 어슬렁거린다. 이딸리아제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쥐색 양복까지 걸친 그는, 어찌 보면 고액 연봉의 쌜러리맨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기업체 중역의 운전기사 같아 보이기도 한다. 별 특징 없는 얼굴과 헤어스타일, 옷차림의 그는 우리 안의 코끼리처럼 느긋하게 1층 잡화매장 사이를 돌아다닌다. 하얀 가운을 입은 끌리니끄 매장의 김이 눈인사를 해온다. 조 역시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지난해 여상을 졸업하고 화장품회사에 취직한 갓스물의 청춘이다. 다리가 길고 예쁘니 모델을 하라는 주변의 권유가 많았지만 월급 받는 게 좋아 회사생활을 시작했다는 여자다. 지난달로 카드빚이 천만원을 넘어섰다. 신용카드 일곱 장으로 돌려막고 있지만 화장품 판매원 수입으론 좀 힘들 것이다. 차는 국민차인데 키홀더는 구찌 제품을 쓰고 있고 반지하방에 살면서도 정장은 프라다를 입는다. 매장에 서 있을 날도 얼마 안 남았다. 저 다리를 높이 평가해줄 다른 세계를 찾아 떠나겠지. 아마 그 세계는 월급이 아닌 다른 급여체계를 갖고 있을 것이다. 조는 씩 웃는다. 씩 웃으면서도 그의 눈길은 날카롭게 매장 곳곳을 살피고 있다.
구두매장의 또다른 김, 여자 고객의 발에 구두를 신기다 조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 눈빛이 흔들린다. 쪼그리고 앉은 자세 때문에 엉덩이가 튀어나와 오리처럼 보인다. 유니폼 상의가 짧아 허리의 맨살이 드러난다. 김은 조의 눈길이 그곳을 훑고 있음을 알아채고는 오른손으로 애써 상의를 끌어내려 드러난 맨살을 가린다. 그럼 이걸로 드릴까요? 생긋 웃으며 아양을 떨어보지만 이십대 후반의 손님은 대꾸 없이 바로 매장을 나선다. 다소 맥빠진 얼굴로 김, 지나가는 조를 노려본다. 백화점에 들어오기 전엔 여행사에서 일했다고 한다. 빠리에 갈 때마다 사온 에펠탑 미니어처가 한 다스가 되던 날,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에펠탑이 보기 싫어 언제나 에펠탑 밑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는 작가 얘기도, 그 별로 우습지도 않은 농담도 도합 열두 번을 한 셈이다. 구두매장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그녀는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무엇보다 구두는 말을 안 시킨다. 아무것도 묻지 않을뿐더러 불평도 없다. 손님들은 이 구두 저 구두에 발을 넣어보다 마음에 드는 걸 집어들고 계산을 한다. 그러곤 굿바이.
구두매장의 김은 카드빚도 없고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백화점 지하 은행에 적금을 붓고 있다. 남자친구가 회사 공금을 횡령해 홍콩으로 도주한 후로는 남자관계가 없다. 남자친구 회사에서 고용한 자들만이 가끔 찾아와 도망자의 행방을 묻곤 한다. 아마 그것 때문이겠지만 김은 정말이지 성실하게 살고 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가끔 억울해할 수도 있을 텐데 김은 흔들리지 않는다. 김은 조도 그들과 한패일 거라고 의심하고 있다. 언젠가 김은 조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약 관계가 있다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어요? 그 새끼는 잊은 지 오래라구요.
조의 발걸음은 천천히 시계매장으로 향하고 있다. 티타늄과 금, 스테인리스 스틸이 일제히 빛을 퉁겨내는 유리 진열장 너머에 그녀, 정이 서 있다. 정은 아름다운 여자다. 보기 드물게 맑은 눈동자, 부드러운 목선, 그리고 유니폼에 어울리는,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 아담하고 탱탱한 엉덩이 아래로 쪽 곧은 다리가 우아하게 그녀를 떠받치고 있다. 가슴은 작지만 그것 때문에 더 새침해 보인다. 장인의 손길을 거친 가죽제품처럼 그녀의 몸에선 유혹적인 기품이 우러나왔다. 검은색 샤넬 슈트를 입혀 티파니 매장에 세워놓으면 딱 어울릴 여자였다. 구두매장의 김은 정을 부러워한다. 시계매장에선 쪼그려 앉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조가 다가가도 정의 표정엔 변함이 없다. 그저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다. 아들에게 선물을 사주려는 중년여성에게 스포츠 시계를 꺼내 보여주면서 동시에 다른 시계에 묻은 지문을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내고 있다. 조는 발걸음을 멈추고 정을 바라본다. 정은 조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조는 씩 웃는다. 그는 지금 정의 가난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신의 예술품인 그녀가 어울리지 않게도 궁핍하다는 사실이 그를 흐뭇하게 한다. 또스까나산 양가죽 코트를 해입는 것도 아니고 여름마다 해외 리조트를 순례하는 것도 아닌데 그녀의 통장에는 돈이 없다. 그것은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말과 자전거를 사랑하는 아버지를 둔 죄다. 주말마다 열리는 말과 자전거의 경주에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털어넣는다. 어느날 그는 경주 시작에 임박해 마권을 사려고 발매창구 앞으로 달려가 초조하게 줄을 서 있다가 앞사람이 꾸물댄다며 가방 속에서 벽돌을 꺼내 뒤통수를 내리쳤다. 가방 속에 그 무거운 벽돌을 넣어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조는 처음 알았다. 정의 아버지는 결국 구속되었다. 그래서 정은 더 가난해졌다.
정의 어머니는 택시운전을 한다. 10년 무사고 운전자이지만 다른 종류의 사고를 자주 친다. 남편이 말과 자전거에만 관심이 있으니 여자만 탓할 것도 아니다. 그녀의 동료들은 그녀 앞에서 자신의 불행을 과장하는 습성이 있다. 그런 불행한 동료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그녀는 가끔 외곽의 모텔로 차를 몰아간다. 택시 두 대가, 그것도 같은 회사 택시가 차례로 모텔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지만 그 운전자 둘이 한 방을 잡는 일이야말로 정말 드문 일이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한번 간 모텔엔 결코 다시 가지 않는다.
조는 정을 다시 바라본다. 태생과는 관계없이 고결한 외모를 선물받은 사람들이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부시도록 청순한 모습을 갖게 된 이 미운 오리새끼들은 어느날 문득 거울을 보다 소스라치는 것이다. 불량하게 올려붙인 깻잎머리는 풀어내려 단정하게 뒤로 묶고, 씹고 있던 껌은 휴지통에 뱉어버리고, 한 듯 안한 듯 가벼운 투명 메이크업으로 분위기를 바꾸고 나면 자신을 오리라 믿고 살아온 백조가 거울 속에서 미소짓고 있는 것이다. 정이 바로 그런 여자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청순해져버린 여자. 구정물 속의 연꽃. 조는 그런 여배우를 한명 알고 있었다. 다니던 여고에선 일진이었고 일진 중에서도 짱이었고 물론 지역사회의 골칫덩어리였던 그 여고생은 어느날 길을 가다 눈밝은 캐스팅 에이전씨에 픽업돼 몇달 후 잘 나가는 발라드 가수의 상대역으로 뮤직비디오에 출연했고 그걸로 운명이 바뀌었다. 청순가련의 대명사였던 그녀, 그녀의 연기력은 자신을 배신하고 떠난 남자들을 공격할 때 가장 빛을 발했다. 널 죽여버릴 거야! 스스로를 배신한 얼굴이 또다른 배신을 향해 표독스러운 살의를 드러낼 때 조는 그녀의 희극적 운명에 일말의 연민을 느낀다.
3
조는 좀도둑을 사랑한다. 사시미칼을 휘두르는 조폭이나 아내를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질러버리는 무도한 놈들은 질색이다. 좀도둑은 긴장을 즐기는 자다. 결행 직전 뇌를 질식시키기라도 할 듯 뿜어져나오는 아드레날린 분수를 사랑하는 자다. 그래서 좀도둑들은 술이나 마약을 하지 않는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영화 「순수의 시대」에 출연했던 여배우 위노나 라이더는 그토록 순결한 얼굴로 베벌리힐즈의 한 호화 백화점에서 4760달러 상당의 옷을 훔치다 경비원에게 검거되었다. 운 좋은 놈! 백화점 경비원은 평생 그 일에 대해 떠들 것이다. 위노나 라이더의 흔들리는 눈빛과 무의미한 저항, 부조리한 변명에 대하여! 같이 가시죠, 왜 이러시는 거예요? 가방을 열어주시겠습니까? 계산대로 가는 중이었다니까요! 계산대는 이미 지나오셨습니다. 완벽하게 장악된 사냥감, 목덜미를 물고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맹수, 절정의 순간이 지연될수록 사냥꾼의 즐거움은 커진다. 그것을 모르는 일급 여배우는 끝까지 고개를 저으며 상황을 부인한다. 그러다가 칵, 이빨이 들어와 사냥감의 대동맥을 끊어놓는 것이다.
조가 좀도둑을 처음 잡은 곳은 은행이었다. 휴가철 금융기관 특별경계 기간이었다. 두 군데의 은행이 무장강도들에게 털린 후여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때는 조도 신참이었으니 더했을 것이다. 잡지를 펼쳐들고 쏘파에 몸을 파묻고 객장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별다른 동향은 없었다. 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객장 한쪽 구석에 놓인 정수기를 향해 걸어갔다. 종이컵을 뽑아 물을 받아마시는 그의 눈과 한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고등학생이었다. 짧은 머리에 얼굴엔 여드름이 가득했다. 쏘파에 앉아 잡지를 보다가 가끔씩 고개를 들어 주변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조는 그의 뒤쪽에 앉아 잡지를 펼쳐들고 동정을 살폈다. 수상하기는 했지만 뭘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총을 가진 것 같지도 않았고 짝패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고등학생은 계속 주변을 살폈다. 이윽고 행동이 시작되었다. 그는 보던 잡지를 천천히, 뱀이 개구리를 삼키듯 자신의 티셔츠 속으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잡지를 다 삼킨 고등학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은행을 나갔다. 조는 그를 뒤따랐다. 은행 앞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에 불러세웠고 고등학생은 순순히 멈춰섰다. 뱃속에 뭐가 들었는지 좀 볼까? 더운 여름이었다. 고등학생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조는 그의 뱃속에서 잡지를 끄집어냈다. ‘휴가철 섹스테크닉’과 ‘오르가즘의 신천지 지스팟 대탐구’ 같은, 사춘기 남성에게 너무도 유용한 정보들이 빼곡히 들어 있는 여성지였다.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플라스틱 판에 붙여놓아 부피는 더 컸다. 조는 여성지를 들어 고등학생의 머리를 딱 한대 내리쳤다. 가봐. 고등학생은 쭈뼛거리며 태양이 작열하는 거리를 뛰다시피 걸어 달아났다. 조는 여성지를 든 채로 혼자 남겨졌다. 처음으로 획득한 장물이 주부 대상의 여성지고 그 범인이 여드름 난 고등학생이라는 걸 조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4
조는 백화점을 나선다. 밀려들어오는 사람들을 부드럽게 비켜가면서도 표적을 놓치지 않는다. 표적은 백화점 앞에서 흘깃 손목시계를 본다. 미행이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그녀의 은빛 페라가모 썬글라스가 햇빛을 그에게로 퉁겨보낸다. 표적은 지하철역 입구로 향한다. 조는 표적과의 거리를 좁힌다. 지하철역은 번잡하다. 어떤 표적들은 그야말로 연기처럼 휙, 사라져버린다. 너무 늦기 전에, 표적의 아드레날린 분비가 지속되는 동안 덮쳐야 한다. 발걸음이 빨라지는 조. 그러나 표적도 드디어 조의 존재를 눈치챘다. 역 입구 계단을 황급히 내려가는 표적. 그러나 턱을 땅에 대고 자비를 구걸하는 걸인 앞에서 여자는 조에게 팔목을 잡힌다. 물큰. 팔을 뿌리쳐보지만 조의 의지는 완강하다. 자유로운 왼손으로 경찰 신분증을 꺼내 표적의 코앞에 들이대자 여자의 저항은 약해진다. 여지를 두지 않고 조, 여자의 손목을 홱 잡아채 백화점 쪽으로 다시 끌고 올라간다. 백화점 쪽으로 가다가 주차장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여자를 끌고 간다. 빨간 모자를 쓴 주차요원들이 호루라기를 불고 있다. 덜컹거리며 철판 위를 지나 주차장 입구로 들어서는 자동차들. 보스의 호출에 맞춰 허겁지겁 달려온 졸개들처럼 자동차들은 열을 지어 지하로 내려간다.
여자의 백 속에선 많은 것들이 쏟아져나온다. 조는 묵묵히 물건들을 꺼낸다. 씰크스카프, 브로치, 초콜릿에 팬티까지. 조는 그녀가 훔친 것들을 다시 백 속에 넣는다. 영수증 없으시죠? 단정한 옷차림의 여자는 이제 더이상 비굴하지 않다. 영수증 없는 것도 죄가 되나요? 조는 활짝 웃었다. CCTV에 다 찍혀 있습니다. 조는 엄지손가락으로 백화점의 정문을 가리켰다. 들어가서 볼까요?
여자가 백을 다시 집어들며 말했다. 원하는 게 뭐예요? 백을 움켜쥐는 여자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겠죠? 그게 어쩐지 오늘이리라는 막연한 불안감도 들었을 거구요. 그런데도 에르메스 스카프는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웠겠지요. 그러니 그 스카프를 천천히 손아귀에 말아쥘 수 밖에 없었던 거죠. 이보세요, 아가씨. 백화점은 좀도둑 천지고 나는 타락한 경찰입니다. 조는 사냥감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당신한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조는 이죽거렸다. 알래스카의 배부른 곰들은 연어의 눈알만 먹고 버린답니다. 그게 가장 맛있으니까요.
여자는 눈을 감았다.
5
조는 알고 있다. 정은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있다. 아름다운 여자를 가만히 놔두겠는가. 손님에게 언제나 친절하도록 교육받은 저 판매용 로봇들만 노리는 치들이 있다. 그들은 시계를 골라달라고 말하기도 하고 전에 산 걸 들고 와 바꿔달라고 하기도 한다. 어떻게든 정에게 말을 붙인 후엔 노골적으로 치근덕거린다. 이 거머리들의 특징이 바로 뻔뻔함이다. 잘 믿기지 않겠지만 이 세계에선 뻔뻔한 자들의 성공확률이 더 높다. 뻔뻔하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드러내놓고 한다는 것인데 상대가 그 뻔뻔함에 호응하기만 하면 거래는 그 자리에서 성사된다. 호색한들이 노골적인 까닭은 간단하다. 그게 그들에겐 훨씬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어서 다른 상대를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까페 카사블랑카는 영화 속에나 있다. 호색한들의 은밀한 요구에 정은 놀라운 참을성으로 웃으며 거절한다. 어쩌면 백화점은 그녀를 천천히 집어삼키는 개미지옥인지도 모른다. 저 남자친구 있어요. 너무도 집요한 어떤 남자에겐 심지어 이런 말까지 해야 했다. 굴욕적이지만 그 굴욕에서 오는 쾌감도 있다. 그 쾌감은 반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번엔 조금 더 뻔뻔해진다. 뻔뻔한 자들을 다루는 법을 알아가게 되면서 그녀는 그들을 조금씩 닮아간다. 치근덕거리는 남자들에게 값비싼 시계를 팔아넘길 수 있는 경지에도 이른다. 남자들은 집요하게 그녀의 아름다움은 화폐와 등가교환, 때로는 부등가교환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러면서 그녀는 조금씩 무너져간다.
말하자면 옷벗기 게임 같은 것이다. 처음 티셔츠를 벗을 때가 가장 어렵다. 눈 깜짝할 사이 팬티와 브래지어만 남는 것이다. 그래도 부끄럽지 않다. 아직은, 아직은 아닌 것이다.
하루는 시계매장으로 어떤 남자가 찾아와 엠뽀리오 아르마니 시계를 사면서 말했다. 필리핀으로 떠난 남자가 있었습니다. 벌을 치는 사람이었죠. 다른 양봉업자처럼 트럭에 텐트와 벌통을 싣고 꽃 따라 이 산줄기 저 언덕빼기 다니다가 문득, 필리핀에는 겨울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필리핀에 사촌이 살거든요. 그렇다면 일년 내내 꿀을 딸 수 있다는 게 아닌가. 남자는 벌통을 들고 사촌이 있는 필리핀으로 건너갔습니다. 그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꽃은 일년 열두달 지천으로 피어 있었고 벌들은 쉴새없이 꿀을 따모았습니다. 다음해, 그는 가진 돈을 몽땅 털었습니다. 그러곤 한국에서 더 많은 벌통을 수입해 더 크게 판을 벌였습니다. 남자는 자비를 구하는, 중년남자들 특유의 그 불쌍한 표정으로 정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녀가 물었다. 남자는 한숨을 푹 쉬었다. 엄청난 손해를 보고 말았습니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거지요.
말벌들의 습격을 받았나봐요? 말벌 한 마리가 꿀벌 수백 마리를 물어 죽인다면서요? 아름다운 정이 값비싼 시계를 산 손님에 대한 써비스 차원에서 물어주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해가 지나자 이 약삭빠른 벌들이 필리핀엔 겨울이 없다는 걸 알아버렸습니다. 겨울이 없다면 그토록 부지런하게 일할 이유가 없는 거지요. 안 그렇습니까? 겨울이 없는데 뭐 하러 꿀을 모으겠습니까? 손님은 포장이 끝난 시계를 받아들었다. 그의 욕망이 다소곳이 시계를 건네주는 정의 귀밑머리와 목덜미의 솜털과 가지런히 자라난 검은 눈썹을 응시한다. 정은 목을 살짝 움츠린다, 포식자를 만난 자라처럼.
돌아서는 남자의 목덜미가 검게 빛났다.
6
타락에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별다른 이유가 없다. 첫눈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일이 가능하듯 멀쩡히 삶을 영위하던 사람이 돌연 타락해버리는 일도 가능하다. 두 가지가 한 가족 안에서 거의 동시에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달, 조의 표적이었던 여대생의 경우가 그러하다. 자기 대학의 교수였던 그녀의 어머니는 성적처리가 한창이던 6월의 어느날, 수영강사와 함께 달아나버렸다. 그녀의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고 여대생은 백화점에서 머리핀을 훔치고 있었다. 폐품처럼 버려졌음 좋겠어. 누군가 넌 정말 쓸모없는 계집애라고 말해줬음 좋겠어. 군대에라도 갔음 좋겠어. 아아악.
조에게 잡힌 것이 절도면허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는 다음날에도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백화점에 나타나 물건에 손을 댔다. 조도 어쩔 수 없는 날이 있다. 그가 경찰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날, 그러니까 그가 백화점에 올 수 없는 그 어느날, 검은 양복을 입은 경비업체 직원들이 그녀를 정중하게 끌고 갔다. 비번이었더라도, 그래서 조가 매장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더라도 별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조가 근무하는 경찰서로 인계되었다.
조는 그녀의 피 흘리던 가랑이를 생각하고 있다. 자기 엄마가 바람이 났기 때문에 도둑이 되었다는 변명은 온당치 않다. 마찬가지로 도둑질 때문에 처녀를 잃었다고 말하는 것도 비약이다. 그녀는 그저, 타락한 것이다. 어느날, 더벅머리 소년이 술을 배우듯 그녀는 타락을 배웠고 그 순간 인생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그녀에게서 빠져나갔다.
처녀막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7
정이 말을 걸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조형사님, 오늘 비번이시죠? 시간 좀 내주세요, 영업시간 끝나구요. 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조의 생각만큼 빨리 흐르지 않았다. 자신의 초조함을 드러낼 만큼 어수룩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조는 백화점에서 나가 거리를 쏘다녔다. 백화점 앞 노점에서 지갑을 슬쩍하는 좀도둑 한 명과 3인 1조의 소매치기들을 보았지만 내버려두었다. 타워레코드로 들어가 헤드폰으로 쌤플 CD들을 들었다. 테스토스테론이 그의 내부에서 더 큰 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그는 볼륨을 올렸다. 아직 제 아름다움의 가치를 잘 모르는, 그러나 정말로 눈부신 여자와 저녁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는 사실이 그를 흥분시켰다. 그녀는 뭔가 부탁을 하겠지. 남동생이 누군가의 옆구리를 식칼로 찔렀을 수도 있고 택시기사 엄마가 교통사고를 일으켰을 수도 있겠지. 사람들은 그럴 때 경찰을 찾는다. 그녀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단지 그녀가 설명해야 할 상황이 아주 복잡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럼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이 오물거리는 것을 오래 볼 수 있을 테니까. 조는 또, 그녀가 해야 할 부탁이, 그녀로서는 정말이지 자존심 상하는 것이었으면, 굴욕적인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정이 나타난 것은 밤 열시가 다 되어서였다. 조는 위스키를 시켰다. 정은 위스키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을 위해선 쏘다를 주문했다. 아름다운 여인에게 어울리는 음료다. 정은 핸드백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놓더니 천천히 포장을 풀었다. 플라스틱 상자 안에서 불가리 시계가 나왔다. 조와 정의 눈길이 마주쳤다. 조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2주일 전에 매장에서 도난당한 시계예요. 조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가 덧붙였다. 제 월급보다도 비싼 거고, 글쎄, 이런 말씀 드리면 오해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도 무척 갖고 싶었던 물건이에요. 그녀는 시계의 표면을 만지작거렸다. 잘 어울립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희고 가느다란 손목에 은빛 불가리 시계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그런데 이 시계가 저희 집으로 배달돼온 거예요. 이렇게 포장까지 해서 말이죠. 정은 조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조는 몸을 뒤로 젖혔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매장에서, 그것도 아주 깊숙이 조심스럽게 진열해두는 불가리 시계를 슬쩍하고선 태연하게 당신에게, 그것도 당신 집으로 보냈다는 얘기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두번째예요. 지난번에는 구찌였어요. 정은 빨대로 쏘다를 빨아올렸다.
만약 누군가의 장난이라면, 아주 질이 나쁜 장난이지요. 조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시계가 없어졌다면 정은 필시 모욕적인 몸수색과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을 것이다. 물론 금전적인 책임도 어느정도는 져야 했을 테고 동료들의 의심도 받았을 것이다. 조는 그녀가 손목에 차고 있는 싸구려 패션시계를 바라본다. 가죽끈의 봉제선에서 올이 풀려나가고 있었다. 비극이다. 정은 저런 싸구려를 차서는 안될 여자다. 그런데도 그녀는 안간힘을 다하여 버티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에 조는, 위스키를 권하듯 타락을 권한다.
겨울도 없는데, 뭐 하러 이렇게 힘들게 삽니까?
8
목덜미가 검게 그을린, 실패한 양봉업자는 계속 정을 찾아왔다. 가족을 위한 시계를 다 사고 나서는 마라톤용 시계, 스쿠버 다이빙용 시계, 고도계가 달린 산악용 시계를 샀다. 정은 묵묵히 시계를 팔았다. 팔목 발목까지 다 차고도 남을 시계를 사고도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한 남자는 슬픈 얼굴로 돌아섰다. 정은 돌아서는 남자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조가 그의 뒤를 따랐다. 주차장에서 조는 남자를 따라잡았다. 그 여자, 그 여자 때문에 미치겠지?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를 무시하고 자기 차를 향해 걸어갔다. 지금은 한남동에서 낚시용품점을 하고 있다는 그 실패한 양봉업자는 거의 뛰다시피 빨리 걸었다. 조는 그의 등뒤에 대고 쏘아붙였다. 돈이 한정없이 들지? 내가 그 여자 잘 알아. 그 여자하고 자고 싶으면 시계 같은 걸론 안돼. 그럴 돈 있으면 모두 모아 차라리 단 하루, 그 여자를 유혹하는 데 다 써버려. 최고급 레스또랑을 예약하고 백화점 앞엔 리무진 택시를 대기시키라고. 남자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자동차 열쇠를 꺼냈다. 티파니 목걸이를 준비했다가 디저트가 나올 때 걸어주는 거야. 디저트 써브가 끝나면 미리 예약해둔 호텔방의 카드키를 내밀어. 그 여자는 당신이 이 모든 돈을 어떻게 마련했을까, 의심할 거야. 부정하게 마련한 돈이라는 인상을 풍겨야 돼. 공금횡령을 밥먹듯 하는 자의 미소로 승부수를 던지는 거야. 오늘밤 당신과 자고 싶다. 그뿐이다,라고.
남자는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쾅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고 시동이 걸렸다. 거친 소음과 함께 남자의 차가 주차장 출구를 향해 내달렸다. 끼기기긱, 바닥과 타이어가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다른 자동차들도 열을 지어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조 역시 뚜벅뚜벅 자기 차가 세워져 있는 구역을 향해 걸어간다.
9
백화점으로 들어서는 조. 밖은 푹푹 찌고 있지만 매장 안은 시원하다. 강력한 에어커튼이 마치 살균이라도 하듯 백화점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몸을 훑어내린다. 조는 에어커튼 아래 잠시 서 있다가 백화점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눈에 익은 경비업체 직원 하나가 눈인사를 해온다. 그러곤 습관처럼 무전기를 들고 뭔가를 뇌까린다. 처음 무전기를 받으면 누구나 저렇다. 별 시답잖은 얘기도 무전기로 하게 되는 것이다. 어른들의 장난감인 셈이다. 평소의 코스대로 조는 1층 매장을 훑는다. 넥타이 매장에 들러 새로 나온 라이썬스 제품들을 살펴본다. 별로 쓸 만한 것이 없다. 형사가 무슨 넥타이냐며 반장은 어이없어한다. 목이라도 졸리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나 조는 넥타이를 사랑한다. 그리고 넥타이를 훔쳐가는 좀도둑들을 더 사랑한다. 그 좀도둑들 덕에 조의 집엔 아름다운 넥타이들이 많다.
구두매장의 김은 창고에 내려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끌리니끄의 김은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화장품회사 소유였던 그녀의 다리는 이제 카드회사 소유가 되었다. 그녀는 카드회사를 위해 일하고 술 마시고 쎅스할 것이다. 카드회사는 그녀를 사랑한다. 언제나 연체이자를 물어주고 수수료가 높은 장기할부, 회전결제까지 하는 그녀를 어떻게 미워하겠는가.
조의 발걸음은 천천히 시계매장을 향하고 있다. 멀리, 정의 뒷모습이, 단정하게 틀어올린 머리가 보이면 조는 행복해진다. 테스토스테론이 파티를 벌이는 시간이다. 아직도 의연히 시계를 팔고 있다. 유혹자들은 무릎을 꺾었다. 사랑스런 그녀는, 불행히도 바보다. 너의 미모를 시장에 내놓아라. 경매에 붙여라. 구매자들의 애를 태우고 눈에서 총기를 빼앗아라. 조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녀에게 충고한다. 그러나 그 충고는 그녀의 귀에 가닿지 못한다. 뒤통수에 와닿는 시선을 느낀 듯 그녀도 뒤를 돌아본다. 그녀가 조를 보고 씩 웃는다. 너무도 환한 웃음이어서 조는 다리에 힘이 풀린다. 그때 누군가 조의 옆구리를 슬쩍 건드린다. 백화점의 안내방송은 미아를 찾고 있다. 빨간 원피스에 노란 모자를 쓴 세살짜리 여자 어린이를 찾습니다. 조의 반대쪽 옆구리도 누군가 건드린다. 그리고 동시에 곧 양쪽 옆구리로 팔이 들어와 강하게 조를 압박한다. 양쪽에서 팔짱을 낀 두 사람의 남자, 자세히 보면 그와 늘 눈인사를 나누던 경비업체의 멀끔한 직원들이다. 누가 찾습니다. 매장 밖 비상구를 지나 복도를 거쳐 삼십 미터쯤 걸어가면 그들의 사무실이 나온다. 사무실 안에는 조가 근무하는 경찰서의 정보계장이 앉아 있다. 직속상관도 아닌 자가 왜 백화점에서 자기를 찾는지 조는 의아하다. 정보계장은 CCTV 모니터를 보고 있다. 본청에서 나왔다고만 밝힌 짧은 머리의 남자도 조의 뒤에 와 선다.
조는 이해할 수 없다. 계장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계장은 자기 앞에 놓인 누런 봉투를 거꾸로 쏟았다. 불가리 시계가 떨어졌다. 정이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시계인 것 같다. 그렇게 함부로 다뤄서는 안되는 시계라는 생각에 조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는다. 뻗은 그의 손으로 수갑이 날아든다. 미안하게 됐네. 피해자는 없으니 옷 벗고 변상하는 선에서 끝날 수도 있어. 그러니 조용히 가지.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조가 잘 안다. 정보계장의 휴대폰이 울린다. 그래, 응, 그래, 시건장치 다시 잘 확인하고 장물만 챙겨서 철수해. 정보계장은 폴더를 접었다. 알지? 순서대로 다 가는 거야. 집이 좀 어지러울 거야. 수색도 끝났고 나올 것들도 다 나온 모양이야. 이 사람, 하려면 크게 한건 할 일이지, 이게 뭔가.
조는 도둑을 잡았고 그 도둑에게서 시계를 빼앗아 아름다운 정의 집으로 보냈다. 그 시계는 정말이지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도둑은 사라졌고 이제 조가 도둑이 되었다. 백화점 간부들과 직원들이 열린 문틈으로 그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구두매장의 김도 동료들과 쑥덕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정은 어떻게 조가 그 시계를 보낸 것을 알았을까. 조는 새삼 그녀가 무서워졌다.
10
구치소의 차가운 바닥에 앉아 조는 많은 생각을 한다. 책을 읽고 신문을 보지만 그의 머릿속엔 백화점뿐이다. 아름다운 정과 CCTV와 구두매장의 김, 바람난 여교수의 딸을 떠올린다. 에어컨 바람에 실려오는 화학섬유의 매캐한 향과 백화점 특유의 나른함. 망설이는 좀도둑들의 눈빛과 피곤에 지친 직원들의 모습. 비상계단에 앉아 종아리를 두드리는 어린 여자들.
조는 후회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다. 대신 오래 전 영화관에서 마주친 구절을 조용히 읊조린다.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자 구치소가 어두운 극장처럼 느껴졌다. 조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아름다운 정이 낚시용품점 사장과 함께 피크닉을 떠나는 모습이 보인다. 바람난 여교수가 딸과 함께 옷을 사러 의류매장을 돌아다니는 모습도 정겹다. 구두매장의 김은 남자친구를 찾아 홍콩으로 떠나고 끌리니끄의 김은 베네똥의 모델이 되어 국제공항 로비에 전시된다. 그러나 조가 눈을 뜨자 모든 것이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