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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인숙 金仁淑
1963년 서울 출생.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칼날과 사랑』 『유리 구두』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 장편소설 『먼길』 『우연』 등이 있음. sunis63@yahoo.co.kr
그 여자의 자서전
고양이를 좋아해요?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내게 던진 질문이었다. 나는 긴장한 채 그의 말을 들었다. 그것이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그쪽에서 먼저 나를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불쾌해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 관계에 있어서 파악되고 탐색되어야 할 쪽은 그쪽이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 역시 나를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양이를 좋아하냐니, 이것은 심리테스트의 첫번째 문항을 연상시킨다. 예스와 노에 따라서, 다음 문항으로 넘어가는 화살표의 진행방향이 달라지는 것이다.
아내가 고양이를 좋아해요. 뜻밖에도 그는 내 대답을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아비시니안 종의 회색 고양이죠. 본 적 있어요? 아니, 라는 대답이 이번에는 좀 쉽게 나왔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아내가 그걸 일본에서 사가지고 오기 전까지는 한번도 본 적이 없었죠. 아내는 그걸 일본에서 사가지고 왔어요. 외국에서 고양이를 사가지고 오는 여자라니, 참 기가 막히죠. 짜식이 근사하기는 합디다. 남의 집 고양이라면, 나도 한번쯤은 등을 쓰다듬어주고 싶었을 거예요. 그런데 이게 내 집에 사는 고양이라…… 아내가 싫으면 이혼이라도 하겠지만, 이게 고양이니 어쩝니까. 고양이 없이 편하게 있고 싶을 때, 가끔 이 호텔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전에 같이 일하던 사람하고는 자연스럽게 이 호텔룸에서 작업을 하게 됐지요.
화살표의 진행방향이 엉뚱한 쪽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하긴 고양이에 관한 질문에서 심리테스트 따위를 연상하다니, 내 긴장이 지나친 것일 터였다. 그와 나는 소개팅을 하러 나온 이십대 청춘도 아니고, 인생상담 때문에 만난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도 아닌 것이다. 52세, 이호갑. 현재 내가 그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그의 나이나 이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를 만나기 전 미리 건네받은 자료를 통해,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에 관한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그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그런 정보들은 가변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나와 호텔룸에서 작업을 하고 싶다는 말을, 고양이를 좋아하냐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 52세 이호갑을 나는 다시 한번 신중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나이보다 젊다거나 지나치게 정력적으로 보인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비만은 아니었고 머리가 벗겨지지도 않았다. 외모에서 전해져오는 혐오감이 없다는 것은 일단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객실까지 올라가는 동안, 엘리베이터 안에는 그와 나뿐이었다. 기묘한 느낌이 부드러운 카펫 위에 놓인 내 발바닥을 간질인다. 내가 관계했던 어떤 남자도 ‘나와의 관계’를 위해 이처럼 비싼 투숙비를 지불한 적은 없었다. 이 사람과 일 때문에 만난 게 아니라 관계를 위해 만난 거라면, 지금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으로 올라가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그러나 나는 곧 홀로 머리를 저었다.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정계에 진출하고 싶어하는 한 돈많은 남자의 자서전을 대필하는 일이지 소설적 상상력을 동원하는 일은 아닌 것이다. 23층.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 오후의 햇살이 부드럽게 머물고 있는, 브라운색 카펫의 복도가 정적 속에 길게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그의 자서전 대필을 결심한 이유는 겉으로 어떤 이유를 둘러댄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돈 때문이었다. 이미 그의 자서전 작업을 반 넘어 진행한 선배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 일을 중도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선배는 자신이 받은 선금을 내게 지급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자신이 해온 일체의 작업결과를 내게 넘기겠다고 했다.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와 ‘자서전 대필’ 운운할 때는 ‘이 사람이 날 어떻게 보고 이러나’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통화를 끝낼 즈음에는 ‘한번 생각해보겠다’고 승낙이나 다름없는 대꾸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화를 끊은 뒤, 곧바로 찾아온 것은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이었다. 자서전 대필이라니…… 한 2, 3년 혹은 한 1년만이라도 돈걱정 없이 쓰고 싶은 것만 쓸 수 있기를 바란 건, 이미 10년도 전부터의 일이었다. 그런데 쓰고 싶은 것을 쓰기 위한 매문이라니…… 그런 모멸감에도 불구하고, 자서전 대필로 내가 받게 될 목돈이 지난 10년 동안 내가 벌어들였던 어떤 돈보다도 크다는 사실을 무시할 방법이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여느날이나 다름없이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책상 반대편에 놓아둔 텔레비전에서는 홈쇼핑 광고가 끝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글을 쓰기 시작하면, 책상 위에 묻은 먼지 하나도 견딜 수가 없고, 시곗바늘 돌아가는 소리조차 견딜 수가 없다지만 나는 오히려 정적을 참지 못하는 편이었다. 한동안은 클래식씨디를 틀어놓고 일을 했고, 또 한동안은 라디오 음악프로를 틀어놓았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티브이를 틀었다. 등뒤에서 울려오는 홈쇼핑 광고처럼 내게 더이상 안온한 소음은 없었다. 나는 노트북의 자판을 두들기거나, 책을 읽다 말고 마치 뭣에 잡아채인 듯이 등을 돌려 정신없이 수화기를 집어들곤 했다. 내가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는 순간에도, 침구세트며, 건강보조기구, 신소재 가정용품의 현장판매 숫자가 숨막히게 올라갔다. 걸려라, 걸려. 정해진 차수의 착신자에게는 보너스 사은품까지 지급된다는 광고를 초조하게 바라보면서, 나는 잭폿을 바라기나 하는 것처럼 소리내어 외치기까지 했다. 걸려라, 걸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아무것도 구매하지 않았다. 눈앞에 현실화된 목돈이 느닷없이 내게서 그런 자질구레한 구매충동을 사라지게 하기라도 한 것일까.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하고, 한 페이지의 책도 읽지 못하고, 10장들이 란제리세트를 구매하는 정확하게 오십번째의 고객이 되기 위해 수화기 쪽으로 몸을 던지지도 않은 채, 그 밤이 그냥 그렇게 깊었다.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선배가 내게 넘겨준 자료에 특별히 밑줄표시가 되어 있는 글귀였다. 그 소제목 밑으로, 그의 가족관계와 성장배경, 업적(!) 등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부농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부친이 가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소년기를 참담한 가난 속에서 보낸다–전형적이로군! 그는 쌀집 배달부로 청춘을 시작하는데 그의 뚝심과 성실성을 인정한 쌀집 주인의 후원으로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검정고시로 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몫의 가게를 낼 수 있게까지 된다–이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얘기잖아. 쌀장사로 치부의 기반을 마련한 그에게 다가온 첫번째 행운은 누구한테 거저 가져가라고 해도 거들떠보지 않던 고향땅의 값이 상승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부동산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고, 이것은 그가 엄청난 재산증식을 하게 되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선배는 이 부분에 또다른 색깔의 밑줄을 그어놓았다. 적어도, 겉으로 내세울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얘기다. 뒤늦은 나이에 그는 대학에 입학하는데 그가 선택한 전공은 사회사업학과, 왜냐하면 자신이 증식한 돈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었기 때문에–이쯤 되면 더이상 토를 달 말도 없다! 그후 복지재단과 장학재단의 설립 등등.
선배의 노트는 정리가 어찌나 잘되어 있던지 오래 읽어가면서 곱씹을 필요도 없었다. 선배의 노트를 뒤적이면서 내가 곱씹은 것은 그의 경력들이 아니라, 오히려 선배가 밑줄을 그어놓은 소제목 ‘전형적인 자수성가형’이라는 글귀였다. 선배는 아마도 자신이 써나가게 될 자서전의 방향을 그런 식으로 잡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우리 사회에 깔고 앉은 땅의 값이 폭등해 치부의 밑바탕이 되고 인생의 소중한 교훈이 되어, 내친김에 부동산투자에 전념, 졸부가 되는 케이스처럼 ‘전형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고작 쌀집 배달부였을 뿐인 청년이, 쌀부대에서 떨어진 낟알들을 한알 한알 모아 마침내 자신의 쌀부대를 다 채우고도 남아 복지재단과 장학재단까지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거액의 돈을 들여 자서전을 대필시킬 정도로 부자가 됐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는 확실히 비전형적인 일일 것임에 틀림없다.
얼마 동안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갑자기 복권에라도 당첨된 것인지 거의 다된 일을 내게 넘기면서 했던 선배의 말처럼, 정말이지 어려울 것은 없어 보였다. 그에 관한 자료들은 이미 전부 녹취되어 있었고, 버려야 할 것과 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별도표시들도 일목요연했다. 오십대 남자의 자서전을 여자작가가 대필하는 일이 의뢰인에게 만족스러운 일이겠는가 싶었으나, 오히려 여자작가를 원한 것은 그쪽이었던 모양이다. 52세 이호갑의 인생역정 중에 유일한 불행은–그 자신에게가 아니라 그의 자서전에 있어서 말이다–공식적으로만도 이혼을 두 번씩이나 한 경력이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다 그 세세한 사연들을 전부 밝히고 싶어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여성유권자들에게 야기될지도 모를 오해를 막기 위해 그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집필을 시작한 지 한달 만에 그에게 초고를 보여주었을 때, 그가 가장 만족스러워했던 것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사실 나는 몇명인지도 알 수 없는 그의 아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알고 있는 게 있다면, 외국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유명상표의 향수나 핸드백이 아니라 아비시니안 종의 회색 고양이를 사들고 왔다는, 현재의 아내에 대해서뿐이었다. 나는 최근의 추세를 감안하여 그녀를 동물애호가로, 그런만큼 사랑과 헌신이 풍부한 여자로 묘사했다.
그러나 아무리 일이 순조롭다고 해도, 넘기 힘든 부분은 있는 법이다. 자서전에서 그가 가장 잘 표현하기를 바라는 핵심적인 부분은 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 자신의 ‘민주주의에 대한 기여’였다. 이 경멸스럽기 짝이 없는 조어는, 그 나름대로는 고심끝에 만들어낸 것인 모양이다. 그는 애석하게도(!) 감옥에 가본 적이 없고, 지난 세기의 그 어떤 정치적인 사건에도 연루된 바가 없는 사람이다. 더욱 애석하게도 그는 정치적으로 가장 엄혹한 시기에 그의 재산 대부분을 축적했다. 그는 세 번의 이혼을 감상적인 묘사로 슬쩍 넘기기를 바랐던 것과는 달리, 이 부분만은 어떤 방식으로든 명확하게 표현되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그의 재단에서 지원을 한 단체 중에 재야단체가 있었다는 것, 그 재야단체의 유명한 누군가에게는 비밀리에 사적인 지원을 한 바도 있다는 것, 물론 극도로 엄혹했던 시대의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그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는 것, 그랬음에도 재단 이사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원을 결정한 것은 그 일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앞당기는 데에 있어서 매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
나는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했다. 시대는 변했고, 이제 변화한 시대의 이력서에는 과거의 운동경력이 명문대학의 졸업장만큼이나 필수적인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내가 하는 일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다. 나는 내가 쓰고 있는 게 그의 전기가 아니라 자서전이라는 사실을 반복해 떠올렸다. 그러니 글을 쓰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내 손일 뿐이었다. 내게는 그가 원하는 무엇이든, 그것이 설령 진실이 아니고 사실도 아니라고 하더라도 써야만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나는 밤을 새워 쓰고 또 썼고, 그러면서 이 일이 빨리 끝나 내 손에 목돈이 들어와주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그 부분에 관한 한은 내 원고에 쉽사리 만족하려고 들지 않았다.
“이봐요, 작가양반.”
그는 늘 나를 그렇게 불렀다.
“작가들이란 게 없는 말도 잘 불려서 하더구만, 있는 일에 살도 못 붙인단 말이요?”
그의 자서전 원고를 쓰는 동안에도 내 등뒤의 티브이에서는 낮이고 밤이고 홈쇼핑 광고가 방영되었다. 순조롭게 글이 씌어지던 동안에는 내용을 구분할 수 없는 그저 편안한 소음으로만 들리던 광고가 일이 꼬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다시 충동적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홈쇼핑에서 사들인 물건들은 옷장 속이나 씽크대 안, 심지어는 신발장과 침대 밑에도 가득했다. 충동적인 구매를 억제하기 위해 나는 방안의 전화기를 거실로 옮겨놓았다.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리다 말고 거실까지 뛰어나가는 동안 방문턱에 걸려 넘어지듯,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충동구매에 관한 한은 기대 이상의 효과가 있었지만, 다시 노트북 앞으로 돌아와 앉았을 때는 더이상 자판을 두드리고 싶은 욕구도 사라져버렸다.
그즈음에 늘 그게 그거이던 홈쇼핑 광고 중에, 뜻밖에도 전집류의 서적 판매광고가 방영되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한 옥타브쯤은 높은 목소리를 지닌 쇼핑호스트들이 날카롭고 선정적인 음성으로 그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얼마나 문학적인지, 또한 얼마나 지적인지 선전하는 것을 나는 귀가 먹먹해지도록 들었다. 내게는 전혀 필요도 없는 남성정력제 광고에조차 간혹 충동구매욕을 느끼던 내가 무슨 까닭인지 그 광고에 대해서는 아무 구매욕이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티브이를 껐고, 잠시 후에는 노트북도 꺼버렸다.
어린시절, 내 가난한 집의 마루에 놓여 있던 책장에는 위인전이나 역사소설 따위의 전집류들이 가득했다. 아버지는 책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다. 그는 한가한 시간마다 책에 쌓인 먼지들을 닦아내고, 혹시 순서가 뒤바뀌어 꽂혀 있는 책들이 있으면 그걸 정성껏 바로잡아 가지런히 해놓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그가 그 책들을 꺼내 읽으면서 손끝에 묻어 있던 침을 책갈피 사이에 적셔놓는다거나, 어느 한 귀퉁이에라도 접힌 자국을 만들어놓는 것을 본 적은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독서광이었다기보다는 수집광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어렸던 아들을 그 전집류의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 앞에 불러 앉혀놓고 말하곤 했다.
–책을 읽어야 한다. 바로 이 안에 세상이 있고 진리가 있고 길이 있단 말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렇게도 말했다.
–아버지가 너희들한테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들도 이 안에는 있단 말이다.
책 속에 들어 있는 세상과 진리와 길을 이야기할 때와는 달리, 이런 말을 할 때의 아버지의 목소리는 조금 슬프게 들렸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든, 어린 소년이 듣기에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연설일 뿐이었다. 쉬 끝나지 않는 아버지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오빠는 허리를 비틀고 다리를 꼬았다. 딸이어서 그런 연설을 들을 필요가 없었던 나는 오히려 아버지의 그 길고 장황한 연설이 듣고 싶어서 애가 달았다. 나는 그때부터 이미 작가가 되고 싶었고, 내 책이 언젠가 아버지의 책장에 꽂히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깊은 밤, 마당에 있는 화장실에 갔다가 마루로 올라설 때, 아버지의 빛나는 책장 한칸에 오두마니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사람들이 책꽂이에서 나를 꺼내어, 내 삶의 책갈피마다 담뱃내가 풍기는 손냄새나 들척지근한 침을 적셔주기를 바랐다. 침이 묻고, 접혀지고, 끝내는 나달나달해져가는 내 생은, 그러나 온갖 빛나는 사건들로 화려하리라고 믿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작가가 아니라 책이었던 것일까. 그리고 아버지는 그걸 알아차렸던 것일까. 내가 작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의 말은 이러했다.
–시집이나 가라니까, 팔자 사납게 글은 무슨…… 돈도 안되는 것을 직업이라고, 어쩌겠다는 건지……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혀차는 소리가 집안의 정적 속에서 짯짯, 울리는 것 같다. 그 환청을 참을 수가 없어서 리모컨을 들어 다시 티브이의 전원을 켜는데, 동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홈쇼핑입니다, 어떤 물품을 구매하시려는지요? 수화기를 집어드는 내 손이 습관처럼 경쾌해졌다.
“여보세요.”
수화기 속에서는 곧바로 말이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여보세요, 했다. 어떤 물품을 원하시는지요? 만일에 불로장생 신비의 영양제를 원하신다면 당신은 백번째의 구매고객으로, 정력팬티 한세트를 보너스로 받게 됩니다. 그러나 굳이 정력팬티를 구매하시겠다면, 당신은 역시 백번째의 구매고객으로 불로장생 신비의 영양제 한세트를 보너스로 받게 되겠군요.
“여보세요?”
“……나다.”
머뭇머뭇 소심하게 울려오는 목소리가 오빠의 것임을 확인하는 순간, 수화기를 잡고 있던 내 손목에서 경쾌함이 바스라졌다. 오빠가 이렇게 머뭇머뭇 전화를 걸어올 때의 용건이란 뻔했다. 이번엔 또 뭔가 했더니 난데없이 영업정지 운운이다. 지난밤 오빠네 통닭집에 느닷없이 경찰들이 들이닥쳤는데 하필이면 그때 홀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애들이 미성년자였다는 것이다. 경찰서에서 밤새 조사를 받고 나오는 길이라는데, 영업정지는 물론이고 벌금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얘기였다. 더듬더듬 사정을 얘기하면서 오빠는 몇번이나 ‘걔들이 미성년잔지는 정말 몰랐어’라고 반복했다. 오빠가 내게 그렇게 몇번이나 반복해 말하지 않더라도, 내가 오빠를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내게든, 누구에게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늘 정해진 대로만 살았고, 그의 삶은 늘 가난한 정답으로만 가득 찼다. ‘너한테 정말 미안하다.’ 그 고지식한 남자는 내게 늘 그렇게 말했다. 미안하기도 할 것이다. 그의 고지식한 삶의 댓가가 그 자신에게는 물론이거니와 가족들에게 얼마나 지긋지긋한 짐인지, 그 역시 모를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나는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곧 목돈이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별수 없는 일이니 가급적 다정하게 말하려고 애를 쓰기는 했으나, 가슴속에서는 노여움과 분노가 벌레처럼 버글거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내 대학학비를 전부 대주었고 고향집을 처분했을 때는 그 몫을 떼어, 비록 전세 반지하 연립이나마 내 몫의 집까지 마련해주었던 오빠였다. 그때마다 한번도 선의에 찬 표정을 지우지 않았던 오빠였으나, 어쩌면 오빠도 매순간 몸속에서 벌레가 버글거리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번 꼬이기 시작한 원고는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호갑이 불만스러워하는 부분을 도대체 어떻게 채워넣어야 할지도 알 수가 없는데, 설상가상으로 그의 첫번째 아내라는 여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기까지 했다. 간혹 이호갑의 비서에게서 전화를 받기는 했지만 이호갑의 아내에게서, 그것도 전부인에게서 걸려올 전화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내가 영문을 모른 채 네, 네 하고 있는 동안 여자가 쏟아붓듯이 한 말은, 이호갑이 천하의 사기꾼이라는 것, 인간말종이라는 것, 심지어는 사람을 죽여도 여럿 죽인 살인마이기까지 하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네, 네 했지만 나중에는 아무 대꾸도 없이 수화기를 들고 있기만 했는데, 여자는 그런 내 반응이 모욕적으로 여겨지기라도 했던 것일까.
“돈 몇푼에 그런 인간의 전기를 쓰겠다고 나서다니, 부끄럽지도 않아?”
느닷없는 반말과 함께 전화가 탁 끊겼다. 전화가 끊기고 나서도 나는 한참 동안이나 수화기를 든 채로 멍하니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자 내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좀 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뻔히 끊긴 줄 알고 있는 전화기에 대고 여보세요, 했다. 여보세요, 내가 쓰고 있는 건 그의 자서전이지, 전기가 아닌데요. 게다가 자서전을 쓰는 건 그 사람이지, 내가 아닌데요.
그러나, 그렇다면 나는 뭔가.
“이봐요, 작가양반.”
그의 전부인에게서 이상한 전화가 걸려왔었다는 얘기를 했을 때, 이호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언제나 그렇듯이 나를 어색하기 짝이 없는 호칭으로 불렀다.
“작가양반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도 없지요. 안 그런가요? 이제는 어쩌면, 나 자신보다도 더 날 잘 아는 사람이 작가양반일지도 몰라요. 그러니 작가양반이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그게 아마 나에 관한 진실이겠지요.”
이상한 전화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묻지도 않은 채, 그는 그렇게 말하고 더 해명해야 할 말이 있느냐는 듯 의연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호갑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혹시 정계에 진출하기 위한 준비로 어디 웅변학원 같은 데서 화술을 배운 적이 있지 않은가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이호갑이 내게 진실 운운하는 말을 했을 때 비로소 나는 문제는 화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두통이 시작되면서 머릿속이 쿵쿵 울렸다. 이호갑, 그와 나의 관계에 있어서 나는 뭔가. 이것을 해명해야 할 상대는 이호갑의 전부인이 아니라 바로 이호갑 본인에게서였고, 또는 나 자신에게서였다. 나는 대필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내가 받는 댓가는 그것에 관한 것뿐이라는 것, 적어도 내게는 그의 진실을 감당할 이유 같은 건 없다는 것, 그러니 당신이 천하의 사기꾼이든 살인마든, 그런 건 내가 알 바 아니라는 것…… 그중의 어느 한마디라도 똑똑히 해둬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기껏해야 생각일 뿐이었다. 두통에 이어 속이 메스꺼워지는 기분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날 내가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선배는 강의 준비중이라고 했다. 느닷없이 무슨 강의인가 했더니 실은 모교에 자리가 생겨서 일주일에 몇시간씩 강의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복권이라도 당첨되었나 했더니, 선배의 복권이란 게 기껏해야 정식 교수 자리도 아닌 일주일에 몇시간짜리 시간강사 노릇이었다. 그러나 번번이 정식 교수 자리를 따내는 것에 실패한 선배로서는, 어쨌든 서울의 중앙에 있는 대학에서 강의경력을 쌓아가는 게 중요한 일이기도 한 모양이었다.
나를 만나자마자 그는 내 얼굴이 안 좋아 보인다고 했다. 얼굴이 안 좋아 보이기는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소설을 몇편 쓰기도 했고,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출판사의 기획위원이기도 했고 무슨 시민단체의 명목상 집행위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갖고 있는 여러가지 명함 중에, 진정으로 그를 만족시키는 것은 아직 없는 듯했다. 그에게 정식 교수 명함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에게 가장 행복한 명함이 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두번째 마누라는 안 나타났나?”
이호갑의 첫번째 아내라는 여자에게서 기분 나쁜 전화를 받았다고 내가 말했을 때 선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렇게 내 말을 받았다. 농담을 참 재미없게 하는구나 하며 기분이 언짢아지려고 하는데, 선배의 말은 정작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두번째 아내라는 여자는 자기 전남편을 세상에 둘도 없는 파렴치범이라고 하더라. 공식적인 부인은 아니었던 모양인데, 어쨌든 자기랑 헤어지기도 전에 이미 딴 여자랑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구. 그러고는 툭하면 자기를 두들겨팼다는 거야. 그때 떼어놓은 진단서가 열두 장이라나 열세 장이라나……”
내 얼굴이 질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선배가 가벼운 말투를 접으면서, 비로소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엔 그들이 원하는 건 한가지야. 이호갑의 자서전에 자기들이 등장하지 않기를 바라는 거지. 이호갑이 어떤 인물로 그려지는가가 문제인 게 아니라 그 속에 등장하는 자신들의 이미지가 걱정이란 거야. 그런데 그들한테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란 게 없어. 이호갑을 나쁜 놈으로 만드는 것밖에는 말이야.”
“그럼 선배의 말은, 이호갑이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소린가요?”
내 말에 선배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게서 그런 질문을 받게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는 듯이 그는 좀 어이가 없다는 듯한 목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물려받은 재산도 없는 빈털터리가 지금 그 정도로 부자인데다가, 더군다나 정치를 하겠다고 꿈꾼다면, 대답은 간단한 거 아니니?”
그럴까, 대답은 간단한 것일까. 내가 선배에게 묻고 있는 것이 그의 인간성에 관한 진실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럼 뭔가, 라는 질문에는 다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한동안 커피잔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선배가 말을 이었다.
“넌 이호갑이 너한테 말한 것 중에 몇 프로나 사실일 거라고 생각하니? 부친이 가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쌀집 배달부로 청춘을 시작했다는 거, 그게 사실일 거라고 생각해? 그럼 고등학교 검정고시는? 대학졸업장은? 그리고 재단은? 그런 재단이 실제로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무슨 뜻이에요?”
“그 인간에 대해서 뭘 알고 싶어? 이호갑은 그냥 이호갑일 뿐이야. 네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니라구.”
나는 좀 멍한 표정으로 선배를 바라보았다. 이호갑이 내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니란 건 나도 안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이 소설이 아니란 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니고 내가 쓰고 있는 게 소설이 아니라면, 현실은 무엇이고 소설은 무엇일까.
“자서전은 왜 그만둔 거예요?”
나는 미심쩍은 목소리를 감추지 못한 채 선배에게 물었다. 시간강사 자리를 따냈다고는 해도, 그것이 이호갑의 자서전 작업을 포기하게 할 정도로 바쁜 일은 아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선배는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할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가 화병이 나서 돌아가실 뻔했다는 얘길 한 적이 있지?”
어렴풋이 기억이 날 듯도 했다. 선산과 관계된 이야기였던 것 같다. 평생 땅 일구는 재주밖에는 없던 선배의 아버지가 어느날 나타난 서울 사람들이 밥 사주고 술 사주고 하자 재미에 빠져 얼마 동안 신선놀음을 하고서는, 손에 쥔 돈도 없이 선산만 뺏기게 됐다는…… 그러나 화병으로 죽을 지경이었다던 사람은 선배의 아버지가 아니라 선배 본인이 아니었던가. 그러잖아도 선배는 선산을 팔아 돈을 챙기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미련한 아버지’ 때문에 헐값으로 사라져간 선산을 생각하면 화병이 나 죽을 지경이었으나, 그런 일이 없었다면 선산이 돈으로 변하는 것은 결코 구경도 못했을 선배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 할 만했다. 당시 선배는 열평이나 넓은 아파트를 구입해서 이사를 했었다.
“근데 하필이면 그게 이호갑의 재단하고 관계가 됐던 일인 모양이야. 내가 이호갑의 자서전을 쓴다는 걸 아시고는 노인네 어찌나 길길이 날뛰시는지……”
“선배는 몰랐던 거예요?”
선배는 대답 대신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도 더이상은 묻지 않았다. 선배는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한 일이다. 이호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이호갑의 자서전에 대필자의 이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을 거니까.
나는 홈쇼핑에서 구매한 고성능 주방세척제를 싸들고 오빠를 만나러 갔다. 오빠랑 한바탕 싸움이라도 한 걸까,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은 올케가 가게의 쪽문을 따줬다. 생색도 내지 못한 채 주방세척제를 테이블 위에 슬몃 내려놓았다가, 잠시 후 그걸 도로 테이블 아래로 감추었다. 일이 생길 때마다 나 같은 동생한테밖에는 전화를 걸 데가 없는 오빠나, 그런 오빠를 찾아오면서 주방세제 따위나 싸들고 오는 나나, 한심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올케에게 영업정지에 관해서는 물을 엄두도 나지 않아서 다시 쪽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더니, 상가 한켠의 평상에 앉아 있는 오빠가 보였다. 손에 담뱃갑을 든 채로 우두망찰 달리는 차들만 바라보고 있는 오빠의 옆모습이 오래 전의 아버지와 꼭 닮아 있었다.
–씨는 못 속인다고, 지 애비만 똑 닮아가지고……
고지식한 오빠가 답답하게 여겨질 때마다 어머니가 했던 말이다. 아버지 살아 생전에도 어머니는 툭하면 그런 말을 하곤 했는데, 어머니가 뭐라고 하든 아버지는 가타부타 대꾸가 없었다. 아버지의 그런 침묵은 어머니의 모욕적인 언사에 대한 동의처럼 여겨졌다. 그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아들을 키웠고 아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컸으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흡족하지 않은 것 같았다. 툭하면 어린 아들을 불러 앉혀놓고 책 속의 길을 설파하던 아버지는, 그러나 아들이 그 길 속의 길을 봐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위인들은 어떻게 위인이 되었나.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은 위인들의 삶이 아니라 그들이 마침내 거머쥔 명예와 출세와 돈이었다. 위인은 가난할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은 위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 위인은 성공을 부정할 수 있지만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위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무능한 인간은 절대로 전집류의 책에는 등장할 수 없다는 사실…… 당신의 아들이 책 속에서 배우기를 바란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정년이 되기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평생 동안 시골 읍내 중학교의 서무직원이었다. 아버지에게 그 직업은 만족스러운 것이 못되었다. 아버지는 평생 교사가 되기를 꿈꿨고, 평생 교원자격시험 준비를 했다. 그러나 책장 가득히 꽂혀 있는 전집류의 책들을 읽지 않은 것처럼 아버지는 교원자격시험의 예상문제집을 풀지도 않았다. 아버지 본인만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아버지가 진실로 꿈꿨던 것은 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진심으로 꿈꾸고 있었던 것은,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봤더니 깔고 앉은 알량한 몇십평짜리 낡은 구옥의 집값이 갑자기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있다든가, 그가 깨알 같은 글씨와 숫자들로 가득 채워놓은 노트 속의 사업계획서가 현실화되어 돈이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온다든가 하는 따위의 일들이었다. 평생 성실하기만 했던 시골 읍내 중학교의 서무직원에게 그렇게 꿈 같은 행운이 나타나줄 리가 없었다. 아버지가 전집류의 책을 사모으고 교원자격시험을 준비하고 했던 것은, 적어도 자식들에게만큼은 당신의 초라한 삶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는 자식들에게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고, 그렇게 되기 위해 평생 스스로 당신 자신을 속였다.
아버지에겐 불행이었는지 다행이었는지, 오빠는 진심으로 아버지를 존경했고 아버지가 서무직원으로 살았던 것처럼 자신도 공무원이 되어 평생 성실하게 사는 것이 꿈이었다. 작가가 되겠다는 내게 혀를 차던 아버지는 그런 오빠에게 ‘딸년만도 못하구나’ 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오빠는 자신의 무엇이 아버지를 실망시키는 것인지 몰랐다. 학창시절 내내 단 한해도 빼놓지 않고 개근상장을 받았던 오빠, 숙제를 안해간 적도 없는 오빠, 평생 딱 한번 ‘나쁜 친구들의 꼬임’에 빠져 학교수업을 한시간 빼먹고는 그게 괴로워서 아버지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던 오빠, 그런 오빠……
“왔니?”
뒤늦게야 곁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오빠가 화들짝 놀라 아는 체를 했다. 오빠의 옆자리 평상에 앉자 바람이 시원했다. 오빠가 그랬던 것처럼 차도만 바라보다가 내가 문득 물었다.
“오빠, 옛날에 그 고양이 말이야.”
오빠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난데없이 고양이라니…… 그가 듣고 싶은 얘기는 내게 돈이 준비됐는지, 아니면 얼마나 기다리면 되겠는지, 그런 이야기들일 텐데…… 나는 말을 멈추고 다시 차도를 바라보다가 애써 명랑하게 말했다.
“한 열흘 정도, 그쯤 기다려볼래? 책이 하나 나오거든. 초판을 많이 찍는다더라. 잘 팔릴 거 같다구.”
나를 보던 시선을 거두고 묵묵히 땅바닥만 내려다보던 오빠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어려운 말을 할 때면 늘 그런 것처럼 머뭇머뭇,
“나는 말이다…… 항상 네가 자랑스러웠어.”
돈 때문에 미안해서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거짓말을 못하는 오빠, 아버지가 읽으라고 건네준 책 속에서 거짓말을 해도 좋다는 구절 같은 건 한번도 발견해보지 못했던 오빠, 그런 오빠의 말이니까 말이다.
고양이를 좋아해요? 자서전이 아니라 소설 속에서, 그렇게 묻는 사람은 이호갑이 아니라 나다. 소설 속의 주인공 ‘나’는 이호갑이 대답하기 전에 먼저 말한다. 소설 속에서의 ‘나’는 이호갑에게 말할 기회 같은 건 주고 싶지 않다. 나도 고양이를 기른 적이 있어요. 비록 아비시니안 종의 회색 고양이는 아니지만, 예쁜 새끼고양이였죠.
그랬다. 예쁜 고양이였다. 게다가 그 고양이는 당시 나와 관계하고 있던 남자가 준 선물이기도 했다. 어느날 술에 만취해서 내 집을 찾아오는데, 한밤중의 거리에서 개와 고양이를 파는 행상이 보이더란다. 그는 택시를 세우고 그중에서 가장 예뻐 보이는 강아지를 한마리 샀다. 술에 잔뜩 취한 그가 내 집의 초인종을 누르고는, 내가 문을 열자마자 아이 같은 음성으로 ‘써프라이즈!’ 하고 내민 선물은 그러나 강아지가 아니라 고양이였다. 그는 강아지와 고양이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고, 얼마나 취해 있었으면 자기가 그날 그 늦은 시간에 반드시 나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가 나와 헤어지기 위해서라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그날 밤, 그는 마지막으로 내 다리를 베고 누워 내 소설의 줄거리를 들었다. 말해봐, 어떤 걸 썼어? 처음에 남자가 그런 말을 했을 때, 나는 모욕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이 남자는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경계도 모른단 말인가.
그러나 모든 관계는 길들여지기 마련이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더듬더듬 내 소설의 줄거리를 말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그에게 들려주기 위한 이야기들을 새로 지어내기도 했다. 내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내 다리를 베고 누운 그는 잠에 빠져들었고, 때로는 코를 골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야기를 끝낼 때쯤이면 어느틈에 눈을 뜨고는 한마디했다.
–좋은 소설이다. 그렇지만 잘 팔리지는 않겠어.
당시 나는 팔리는 소설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내 남자에게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은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나는, 내 남자에게 내 소설의 줄거리가 아니라 내 소설 속의 길을 말해주고 싶기까지 했다. 내가 원하는 것, 내 삶, 내 행복과 고통의 전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나는 글 속의 허구로 변하는 듯했고, 그 허구는 진짜보다도 더 빛나거나 더 가혹했다.
고양이를 사가지고 왔던 남자가 떠나버린 후, 나를 한동안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나와 나 아닌 것이 섞여 흐려진 먹물 같은 혼돈이었다. 내 집, 반지하 연립주택, 그 비현실적인 공간에 고양이 한마리가 있었다. 나는 그 고양이를 어찌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려서 집마당에 개를 키워본 적은 있었지만 고양이가 내 집에 있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개와 달리 고양이는 귀여워해달라고 조르지도 않고, 자기가 몸 바깥으로 내보낸 배설물을 뻔뻔스럽게 마당이나 마루 한복판에 놓아두지도 않고, 씻어달라고도 하지 않고, 산책을 가자고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독립적인 동물은 단지 자기 쪽에서 내가 필요할 때, 내가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다가 정이 들면, 그 까끌까끌한 혀로 손등을 핥기도 하고, 병들어 누워 있는 주인에게는 자기가 먹다 남긴 생선뼈다귀를 물어다가 가만히 베개 옆에 놓아주기도 한다고.
어떤 관계든 최초의 길들이기가 중요했다. 그러나 내 새끼고양이에게는 길들여질 의사가 전혀 없는 듯했다. 그의 손에서 놓여나자마자 마치 바람처럼 방안의 책장 위로 몸을 숨겨버린 고양이는, 적어도 내가 보는 앞에서는 절대로 그곳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책장 위에 쌓여 있던 먼지들이 방바닥에 덩얼덩얼 굴러다녔다. 의자를 갖다놓고 고양이를 끌어내리려고 했지만, 손등만 날카롭게 할퀴어졌을 뿐이다. 비린 생선을 책장 아래에 갖다놓고 유혹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고양이는 내가 외출할 때 아니면 절대로 먹이를 건드리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날이 눅눅한 날은 온 집안이 고양이 오줌냄새로 지린 듯했다.
내게는 방법이 없었다. 고양이를 굶어죽게 하지 않으려면 매일같이, 그놈의 식사 때마다 집을 비워주어야 했지만 남자와 헤어진 후, 내겐 갈 곳이 별로 없었다. 나는 밤마다 고양이가 숨어 있는 책장의 맞은편 침대에서 잠들어야 했다. 한밤중에 뭔가가 와당탕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놀라 눈을 뜨면, 우르르 쏟아져내린 책들과 함께 배가 고파 내려왔다가 다시 부리나케 책장 위로 올라가버리는 새끼고양이가 보였다. 그러고는 노란 눈의 집요한 응시……
그때 나는 그 새끼고양이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싫어했다는 게 아니다. 적어도 그 고양이에 관한 한은 내게 아무 방법이 없었다는 것, 그러니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었다는 것. 여기에 진실 같은 건 없다. 수십번, 수백번을 생각해봐도 내게는 방법이 없었다는, 누구에게도 말할 필요가 없는 진술이 나올 뿐이다.
그런데 그 고양이는 내 집에서 어떻게 사라졌을까. 오빠의 얼굴이 겹쳐진다. 말단 공무원 월급으로는 애들 대학도 못 보내겠다는 올케의 성화에 못 이겨 이른바 사업을 시작한 오빠는 그즈음 툭하면 내 집엘 들르곤 했다. 그냥 지나던 길에…… 내 집을 방문할 때마다 오빠가 하는 말은 한결같았다. 비좁은 연립주택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책들 사이에 앉아서 오빠는 커피도 마시고 내가 깎아놓은 사과도 먹곤 했다. 방안이 형편없이 어지러워 앉을 자리가 마땅찮을 때에는 쌓인 책더미 위에 엉덩이를 놓기도 했다. 그는 편안해 보였고, 그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휴식공간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의 방문이 잦을 때면, ‘이러려고 내게 집을 마련해줬나’ 심술이 날 때도 있었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오빠가 답답했다. 오빠가 돌아가고 나면 나는 창문을 열었고, 오빠가 나 모르게 1, 2권의 순서를 가지런히 맞춰놓은 책들을 다시 흩뜨려놓았으며, 반지하 습기찬 공간 속에 가득 고여 있던 곰팡내 스민 책냄새들을 바깥으로 내보냈다.
그날 오빠가 내 집에 들렀을 때, 나는 다른 때와는 달리 커피 한잔도 내놓을 수가 없었다. 고양이와의 동거는 나를 죽도록 피곤하게 만들었다. 안색이 좋지 못한 나를 보고 오빠가 무슨 일이냐, 물었을 때 나는 저 고양이 때문에 글을 쓸 수가 없어, 라고 화를 냈다. 그러나 그때 내가 화를 낸 것은 고양이에게가 아니라 오빠에게였다. 오빠라도 그렇게 답답하게 안 살았으면, 나한테 이런 반지하 연립이 아니라 좋은 아파트 한채를 사줬더라면, 아니, 다 관두고라도 그렇게 한심한 얼굴로 나를 찾아오지만 않는다면……
의자도, 방석도 놔두고 하필이면 고양이가 떨어뜨려놓은 책더미 위에 오빠가 엉덩이를 붙이는 것을 보면서 나도 잠깐 침대에 앉았는데, 어느틈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새벽녘에 깨어났을 때 어두운 방안에는 오빠도 없었고 고양이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오빠가 앉았던 책더미와, 그 책들의 갈피마다 적셔놓은 고양이 오줌이 보일 뿐이었다. 전화를 걸기에는 적당치 않은 시간이었으나 그날 새벽 나는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오래 울리기 전에 오빠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오빠가 내 집을 방문할 때마다 하는 말처럼 그냥 걸었다고 했다. 그리고 오빠는 내게 잘 자라고 했다.
끝내 나는 오빠에게 내 고양이 얘기를 물을 수가 없었다. 오빠가 내 고양이를 가져갔느냐고, 그래서 밤의 공원이나 시장 한 귀퉁이에다가 내다버렸느냐고, 내가 밤마다 꿈꾸었던, 견딜 수 없이 참담한 욕망과 슬픔으로 몸이 달았던 그 일을 오빠가 대신 해주었느냐고, 날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생겨서, 살아 있는 것을 버리던 그 순간이 기쁨이었느냐고…… 그러나 나는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을 뿐이었다.
바로 다음날, 나는 내 뱃속에서 거의 다섯달 가까이나 머물고 있던 아이를 없애버렸다. 넉달이 넘어 위험할 줄 알았더니, 이전의 몇번처럼 간단하고 수월한 수술이었다. 병원 아래층의 식당에서 나는 설렁탕을 사먹었다. 국물 하나 안 남기고 다 먹을 작정으로 그릇 밑바닥을 숟가락으로 긁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살아야지, 감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꼬리곰탕 그릇의 밑바닥을 긁는 것처럼. 감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 생각을 해야만 했으나 살아야지, 따위의 생각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보다도 더 나빴다. 그러나 그것말고는 더이상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잠시만, 하고 양해를 구한 뒤 화장실에 갔던 이호갑은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돌아오는 대신 아무 말 없이 침실로 들어가버렸다. 마지막 원고를 다시 한번 손보면서 삼십분 정도를 기다렸으나, 그는 좀처럼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내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잠이라도 들어버렸단 말인가? 아니면, 내 원고가 여전히 부족하다고 여겨져서, 버럭 화를 내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기라도 한 것일까. 그가 화를 낸다면 목돈을 챙기는 날이 조금 더 늦어지긴 하겠지만, 이젠 더이상 두려울 것도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가 원한다면 독립투사의 일생이라도 쌤플링해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지 일단 시작하고 나면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이호갑이 원한다면, 아니 돈을 챙기기 위해서라면 나는 그를 하느님으로라도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삼십분쯤을 더 기다리다가 더이상은 안되겠어서 침실문을 노크하려고 할 때 완전히 닫히지는 않았던 침실문이 마치 바람에 밀리듯이 조용히 미끄러져 열렸다. 그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서 있었다. 그의 옆모습이 붉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래도 그는 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난 정말 힘들게 살아왔소.”
물기를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로 그가 돌아보지도 않고 문밖의 내게 말했다.
“사람들이 내게 뭐라고 욕을 하든…… 그런 건 상관없소. 난 정말 힘들게 살아왔단 말이오. 그걸 대체 누가 알 수 있겠소.”
그가 나를 보고 있지 않았음에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걸 누가 알겠는가. 어린시절의 참담했던 가난, 고작 쌀집 배달부로 시작해야만 했던 청춘, 그리고 몇번이나 갈아치워야만 했던 아내, 자신을 인간쓰레기, 살인자라고 몰아붙이는 험담, 그리고…… 그리고, 결코 좋아할 수가 없는 아비시니안 종의 회색 고양이…… 그걸 누가 알겠는가. 살인자에 파렴치범이고 부도덕한 욕망덩어리인 그를…… 누가 알겠는가.
그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조용히 그의 방문을 닫았다. 화를 내는 대신 울음을 터뜨리는 것을 보면, 원고는 더이상 손볼 것이 없으리라.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으나 더는 할 일이 없었으므로 나는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는 창을 등지고 있던 의자를 돌려놓고 앉아서는 이호갑이 바라보던 창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어느새 일몰 무렵이었다. 가로등이 희미하게 점등되기 시작하는 강변의 도로가 보였다. 언젠가 가난한 연인과 함께 가로등이 점등되기 시작할 무렵의 도로를 달린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아직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 버린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던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버리는 것은 버려지는 것이란 것, 타인으로부터가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으로부터…… 그런 생각은 언제나 슬픔을 동반한다. 만일에 내가 앉아 있는 이곳이 호텔의 스위트룸만 아니라면, 나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조금쯤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순간 나는 마치 이 객실의 주인과 같은 기분이 든다.
가로등이 점등되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밖이 야경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저물 무렵의 회색빛 하늘이 검게 물들고 가로등이 빛나는 불빛으로 퍼져나가고 현란하기 짝이 없는 고층빌딩들이 숨막히는 유혹의 불빛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스위트룸의 창밖, 서울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다움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소유할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생의 숨가쁜 어느 한순간의 표상과 같았다.
아버지가 꿈꾸고,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꿈꾸었던 것 역시 바로 이러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책장을 가득 채웠던 전집류의 책들이 떠오른다. 허구가 진실이 되는 때에 이르면 진실도 허구가 되는 거라고, 아버지의 책장에 가득 차 있던 전집류의 책 중에는 그런 구절이 있었을 것이다. 홍루몽, 아마 그 책의 서문이 아니었던가? 어린 자식들에게 읽히기에는 적당치 않았던 그 중국고전은 침 묻은 흔적이나 접힌 자국 대신에 먼지 하나 없이 반들반들 윤을 내는 겉장 속에, 그런 말을 감추어두고 있었다.
–아버지가 너희들한테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들도 이 안에는 있단 말이다.
아버지의 슬픈 음성을 떠올리며, 나는 아버지의 책장에 이호갑의 자서전이 꽂히는 것을 상상해본다. 전집류가 아닌 책을 좋아하지 않던 아버지였으니, 이호갑의 자서전은 1편 2편 계속되는 여러 권이어야만 할 것이다. 그 책장 앞에 서 있는 어린 오빠와 내가 보인다. 어려서부터 착하고 온순하기만 했던 오빠는 하루종일 졸라대는 어린 여동생의 청을 이기지 못하고는, 전집류 중에서도 가장 두꺼운 책을 한권 꺼낸다. 나는 그 책갈피 사이에다가 나뭇잎을 말릴 작정이다. 책을 사모으기만 할 뿐 읽지는 않는 아버지였으니, 오빠가 걱정하듯 그런 불경스러운 일을 들킬 염려는 없다. 오빠와 나는 매일 한번씩 그 책을 꺼내 나뭇잎이 얼마나 말랐는지를 들여다본다. 연초록색 나뭇잎의 물기가 다 빠지고, 살아 있던 생명의 주름이 조금씩 가시면서, 그것은 실제보다 더 아름답고 실제보다 더 영원하다. 오빠와 나는 집마당에 있는 온갖 꽃잎들과 온갖 나뭇잎들을 뜯어, 책갈피 사이마다 끼워넣는다. 책갈피에 노랗고 빨갛고 푸른 물이 여리게 스며든다. 밤이면 마루에 놓여 있는 책장에서 꽃냄새가 퍼져나와 온 집안을 향기롭게 적신다. 밤마다 오빠와 나는 좋은 꿈을 꾼다. 그런 밤에는 도둑고양이의 울음소리도 다정하다. 어린 오빠와 어린 내 얼굴에, 선량하고 따듯한 미소가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