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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주체의 위기와 서사의 회귀

황석영의 근작소설

 

 

임홍배­ 林洪培

서울대 독문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현실주의 논쟁의 교훈과 노동소설의 진로」 「괴테의 세계문학론과 서구적 근대의 모험」 등이 있음. limhb059@snu.ac.kr

 

 

1

 

황석영(黃晳暎)이 『무기의 그늘』(형성사 1988) 이후 십수년만에 내놓은 『오래된 정원』(창작과비평사 2000)과 『손님』(창작과비평사 2001)은 1989년의 방북 결행과 더불어 그에게 강요된 오랜 망명과 유폐의 시절이 혹독한 산고의 진통기였음을 확인시켜준다. 독자에겐 안타까운 침묵의 공백기로 보였던 그 시기를 작가가 온몸으로 살아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세계사적 격변의 소용돌이가 우리에게 던진 화두를 치열한 내성으로 천착하여 그 자신의 작품세계에서도 의미심장한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 변화의 징후를 짚어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지만,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두 소설이 나온 싯점과 작품 속의 시간을 두루 관통하는 착잡한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두 소설 모두 역사의 급류에 거슬러서 멀고도 가까운 과거의 체험을 되새기는 양상을 띠거니와, 그처럼 시간을 역류하면서 바로 그 역류에 힘입어 다시금 현재의 의미를 되묻는 서사의 기본동력은 우리의 현대사를 짓눌러온 안팎의 위기에 대한 절박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손님』의 배경이 되는 한국전쟁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운명을 규정하는 위기의 진원지로 남아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작품 발표 직후 세계를 강타한 9·11테러의 역풍으로 북한이 이른바 ‘악의 축’으로 지목되고 전쟁의 위협마저 가해진 것은 한국전쟁과 더불어 굳어진 냉전체제의 와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가 여전히 열전의 취약한 고리로 묶여 있음을 섬뜩하게 일깨워준 사건이다. 이로써 민족자존의 평화통일을 제약하는 일차적 요인이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외세라는 사실이 거듭 확인된 셈이지만, 그럴수록 남과 북을 막론하고 우리 자신에게 구조화된 적대의식을 극복하고 주체적 역량을 강화할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진다. 전쟁의 참상을 통해 내면화된 폭력성을 주체형성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해부하는 『손님』은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처한 위기의 뿌리를 되짚어보고 그 극복가능성의 주체적 조건을 탐색하는 소설이다.

『오래된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시대적 외연은 한층 더 착잡하다.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한 7, 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이 일단 정권을 바꾸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그 싸움의 주체들은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지난날의 열정과 변화된 현실 속의 일상 사이에서 몸과 마음이 함께 찢어지는 분열을 어떤 형태로든 겪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정의를 위한 고투 자체만으로도 삶이 충만했던 과거의 기억을 곱씹는 것이 현재의 상실감을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수많은 후일담 소설의 종적이 말해준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대안적 이념’의 모색은, 각기 다른 처지에 있는 타인들과 공유할 만큼의 넉넉한 품을 마련하기 전에는 타락한 현실로부터 자기 양심을 지키려는 자구책에 그치지 쉬운 것도 사실이다.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이 혼란을 망명지에서 혹은 감옥의 쇠창살 너머로 지켜보면서 황석영은 “우리가 겪은 일들을 미래나 예견에 사로잡힌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현실 변화를 이끌어내오기 위한 구체적인 과정”(『오래된 정원』 후기)으로 그리겠다는 생각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퇴로가 차단되고 앞날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그러한 구상은 ‘현실의 변화’를 기획하려는 의도가 앞설 때 ‘미래나 예견에 사로잡힌’ 주체의 정당화로 다시 회귀할 악순환의 위험을 안게 마련이며, 그것은 후일담 소설이 예외없이 빠져든 함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작가가 그 함정을 지혜롭게 비켜가면서 과거로의 아슬아슬한 여행을 끝까지 밀고 가는 비결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에게 친숙한 ‘리얼리스트’ 황석영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2

 

『오래된 정원』을 이전의 황석영 소설과 비교해볼 수 있는 얼마간의 단서는 『무기의 그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소설을 7, 80년대 황석영 리얼리즘의 정점에 놓을 수 있다면 그것은 베트남 전쟁의 총체적 성격을 정확한 역사적 원근법으로 재현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이 ‘사업주체’로 나서서 벌이는 베트남 전쟁의 제국주의적 실상은 일찍이 브레히트(B. Brecht)가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에서 전쟁을 ‘치즈 대신 탄약을 사용하는 장사’라고 갈파한 것보다 훨씬 더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으며, 제국주의에 대항해 싸우는 베트남 해방전사들의 움직임이나 미군에 의해 양민에게 가해지는 야만적 잔혹행위 또한 한국인의 눈으로는 최대치의 극적 단면들로 포착되어 있다. 팜꾸엔·팜민 형제처럼 한 집안의 형은 부패한 먹이사슬의 꼭대기를 노리는 남베트남군 장교로, 그런가 하면 동생은 장사꾼으로 위장한 해방전선 투사로 갈라서 있는 기구한 사정도 그저 재미를 더하기 위한 소설적 허구가 아니라 프랑스의 식민지배 이래 베트남의 해방투쟁은 언제나 외세를 등에 업은 반민족세력과 그에 맞서온 민족세력 사이의 집안싸움이기도 했다는 처절한 민족사적 비극의 축도이다. 또한 실력가 팜꾸엔과 위장결혼을 해서라도 팔자를 고쳐보려는 오혜정은, 가령 황석영의 단편 「몰개월의 새」(『세계의 문학』 1976년 가을호)에 등장하는 마음씨 고운 기지촌의 작부가 자신을 파멸시킨 전장을 기회로 삼아 발버둥치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숙명의 굴레를 짐작케 한다.

빈틈없이 구축된 이러한 입체적 조형성은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작가가 작중의 모든 인물에게 이 전쟁이 일방적으로 강요한 몫의 운명만 허용한 결과이다. 이 소설의 한계로 지적되어온 ‘방외인의 시각’이라는 것도 그렇게 보면 작가의 세계관적 한계라기보다는 오히려 고공시각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전지적 작가의 개입에 따른 것이다. 가령 안영규가 투이의 처형에 분노하면서 탐민을 쏘아죽이는 장면도 그렇다. 안영규의 용병노릇을 하는 투이가 해방전사들에게 처형당하는 욕된 죽음은 똑같이 용병으로 끌려온 영규 자신의 욕된 처지를 되비추는 거울이며, 뒤이어 탐민의 아지트로 달려가 대상 없는 표적을 향해 총을 난사하는 조건반사적 공격성의 분출은 따라서 투이에 대한 복수라기보다는 자기를 비추는 거울이 깨진 뒤에도 영원히 살아남을 치욕에 몸부림치는 발작이다.1 순결한 영혼의 해방투사 탐민의 죽음이 그처럼 자학과 가학이 뒤엉킨 광기의 폭력에 희생된 무수한 베트남 인민들의 비극적 초상임은 물론이다. 독자로서는 안영규와 탐민의 이 유일한 만남이 조금이라도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길 애타게 소망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의 역할이 무엇이었는가를 냉철하게 묻는 작가의 양심적 자기검열은 객관적 리얼리티에서 벗어나는 어떠한 일탈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 엄정한 객관정신이 우리에게 친숙한 리얼리스트 황석영의 장인적 면모이다. 물론 황석영의 빼어난 중단편에는 작가의 시선까지도 흡인하는 아득한 서정적 소실점들이 작품의 리얼리티를 감싸는 아우라로 작용하기도 하며, 『무기의 그늘』에서도 그런 대목이 진가를 발휘한다. 해방전선으로 떠나는 탐민이 애인 소안과 처음이자 마지막인 밤을 보내는 방공호 속에서 둘의 눈에 비치는 창공의 별, 그리고 조직의 결정에 따라 전선에서 탈주한 것처럼 위장하여 귀향한 탐민이 소안에게도 속을 터놓지 못하고 영영 떠나보내야 하는 슬픈 장면들은, 바닥 모를 오물통 속에서 목이 잠기도록 허우적거리는 안영규의 참담한 현실과는 대극적 위치에 응축된 비장한 숭고의 순간들로서, 해방투쟁의 숭고한 당위를 환기시키는 서사적 구도의 유기적 일부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90년대의 싯점에서 작가가 회고하는 이 소설의 ‘미흡함’이나 ‘미완의 요소’란 작가의 생각과 달리 베트남 민중의 삶과 투쟁의 정당성을 온전히 부각하지 못한 데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상처받은 개인의 내면 따위’(창작과비평사 1992년판 서문)와 선택적 대립의 문제로 파악한 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인에 대한 한국인의 죄책감이 통제하는 이 완강한 자의식이야말로 방외인의 시각으로는 넘어서기 힘들었을 실질적 한계이다. 가슴이 찢어지는 상실의 아픔을 맛보았을 탐민과 소안의 내면풍경이 돌아서서 떠나는 자의 뒷모습 이상으로 그려지지 않는 것도 그런 사정에 연유한다. 물론 싸움의 끝이 보이지 않는 절박한 상황에서 그들의 상처까지도 희망의 담보로 간직했을 해방에의 목마른 기다림이 더 절실하다는 것도 충분히 공감되고, 그러한 역사적 균형감각이 전쟁 이후를 넘보지 않는 이 소설의 절제된 시간대에 부합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쟁에 짓밟힌 영혼들이 과연 그 숭고한 투쟁의 기억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은 해방전선의 투사로 살아남은 베트남 작가의 소설에서도 통절하게 확인되거니와,2 정작 해방투쟁에 승리한 베트남인 자신들에게 전쟁의 승패보다 오래 지속되는 것은 다름아닌 그 승리를 위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더욱이 육신과 영혼을 송두리째 거덜낸 현재의 폐허는 그 기억을 더욱 집요하게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기의 그늘』은 이야기의 시간대를 넘나드는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을 좀더 풍부하게 내장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무기의 그늘’에 가려진 이 숙제는 시공간을 절하여 우리의 당대 현실로 돌아온 작가의 과제로 이월된다.

 

 

3

 

『오래된 정원』에 관해서는 작품의 비중에 값하는 평문들이 상당수 나와 있지만, 이야기 방식의 특징적 변화가 80년대를 반추하는 작가의 문제의식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충분히 주목받지 못한 것 같다. 이 소설이 황석영의 이전 작품과 뚜렷이 대비되는 특징은 이야기의 유기적 통합을 간섭 내지 유예하는 일종의 불연속면들이 도처에 편재한다는 것이다. 우선 연대기적 시간대로 보면 앞뒤로 연결되어야 할 서술의 두 축이 제각기 자신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한윤희와 오현우 각자의 1인칭 시점 안에 머물면서 끝까지 평행선을 이룬다. 그것은 물론 윤희의 기록으로 재현되는 18년의 세월 동안 현우가 감옥 안에 있었고 발신자의 사후에야 접수된 편지를 통해서만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시공간적 격리와 단절의 다른 표현이다. 이처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확인하는 데서 출발하여 서로가 잃어버린 삶의 흔적을 더듬고 결국 그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결말로 귀착되는 이야기의 처음과 끝은, 회상 속의 이야기에서 그 어떤 극적 고양이나 발전의 플롯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들며, 이 소설을 그런 기대치에 따라 읽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더구나 기억의 울타리 바깥에 있는 현재의 현우에겐 윤희가 그의 부재를 견디며 살았던 18년의 삶을 불과 닷새 동안의 독서로 추념하는 ‘독자’의 역할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서술형식의 이러한 내적 제약은, 현우 자신이 변혁운동에 투신했던 가파른 연대의 기억들이 그것과 갈등을 일으키는 윤희의 체험적 현재에 비해 연대기적 시차보다 훨씬 멀어 보이는 원경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과 맞물리면서, 지난날 변혁운동의 주체가 이제 냉정히 승인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좌절에 의한 것임이 드러난다. 물론 현우의 삶에 각인된 민주화운동과 노동현장의 체험은 그 열정을 집어삼킨 역사의 격류에도 결코 씻겨 내려가지 않을 소중한 기억들이다. 그러나 감옥에 유폐된 현우의 지난날을 감옥 바깥의 일상에서 살아내야 하는 윤희에게 단절을 이어줄 유일한 소통코드인 그런 나날의 기억은 좀처럼 현재의 삶에 닻을 내리지 못하며, 그 기억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녀의 안쓰러운 노력은 좌절을 거듭한다.3 송영태 일행이 그녀를 운동권의 조력자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도 엉거주춤 몸은 따라가지만 그들의 생경한 관념성은 이질감을 안겨줄 뿐이며, 뒤늦게 최미경을 통해 그나마 인간적 친화력을 느낄 즈음에 이르러서는 복직투쟁 끝에 분신한 미경이 한줌의 재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여기서 윤희가 빠져드는 비분은, 이를테면 「객지」(『창작과비평』 1971년 봄호)의 마지막에서 싸움의 막다른 골목에 몰린 동혁이 다이너마이트를 입에 물고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고 비장한 결의를 다졌던 것과 달리, 그 어떤 희망의 불씨도 지피지 못한 채 회한의 감정으로 사그라든다. 「객지」와 『오래된 정원』 사이의 이 넘을 수 없는 간극은 요컨대 목숨과 맞바꾼 숭고의 순간조차도 이제는 고난과 갈등 저 너머의 이상향을 꿈꿔온 역사적 거대서사의 날줄로 교직될 수 없는 사태의 뼈저린 고백이기도 하다. 출옥 후 옛 동지들의 씁쓸한 후문을 전해듣는 현우의 상념에서 더 분명히 확인되지만, 맑스(K. Marx)가 ‘역사의 기관차’라 일컬었던 혁명이 ‘좌초한 폐선박’의 흉물스런 몰골로 드러난 현실에서 지난날 변혁을 위해 산화했던 무수한 익명의 동혁들이 물려준 희망의 불씨는 ‘정지된 섬광’의 그것으로 얼어붙고 마는 것이다. 실패한 혁명들을 역사의 비상 브레이크로 밟게 된 현우의 독백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어렴풋이 짐작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람에 조금씩 부서져나가는 흙메처럼 모양이 달라지면서 우리가 하려고 애썼던 일들은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게 세상에 흔적을 남긴다. (『오래된 정원』 상권 50면)

 

인간을 살아 있게 해주는 역사적 진실의 개진은 언제나 지상의 시간 제약에 의해 차연(差延)의 형태로만 체험된다는 이 말을 뒤집어 읽으면, 그러한 시차에 둔감한 모든 진보의 기획은, 기획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기 운명을 감당해야 하는 모든 개체의 삶으로 육화되는 과정을 염두에 두지 않을 때 정지된 시간의 다른 이름인 역사의 종착점을 향한 눈먼 질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역사의 주체는 미지의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미완의 존재이며, 그러기에 조급하게 완성을 꿈꾸는 시도는 자폭의 위험을 안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깨달음은 언제나 뒤늦게 온다는 것 또한 역사와 인생에서 경험하는 실감이라면, 역사적 소용돌이의 가장자리를 맴돌며 그 중심의 속도에 현기증을 느끼는 윤희에겐 더더욱 그럴 것이다. 윤희의 좌절들을 ‘실패한 분리’ 즉 자아구축의 실패로 단죄하는 결과론적 해석보다는 좌절을 견디며 살아내는 과정 자체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현우의 부재를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확인하면서 자신의 삶을 찾아가려는 윤희의 시도, 이를테면 이희수와의 만남이, 현우의 부재를 상쇄하는 성공적 결합에 이르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녀가 마냥 현우를 기다리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싱거운 가설이다.4 희수와의 관계가 그의 돌발적 사고사로 어이없이 끝나는 것도, 희수가 제시하는 생태주의적 세계관의 미흡함에 관한 알리바이 혹은 현우로부터의 탈주에 대한 징벌이라기보다는, 베를린장벽 붕괴로 상징되는 거대한 역사적 필연의 불가항력에 부딪힌 개체의 운명에 관한 디스토피아적 서사의 일부일 뿐이다. 죽음을 예감하며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그녀의 성찰이 모성적 사랑의 환기로 이어지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소진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 그러한 파괴적 힘들과 대비됨으로 해서 설득력을 얻는다. 비운의 투사 로자 룩셈부르크도 억척어멈 케테 콜비츠도 아닌 윤희의 삶이 고유한 독자성을 갖는 것은 아무도 넘보지 못할 대단한 인생을 살아서가 아니라 바로 좌절의 연속인 삶을 죽음에 이르도록 견뎌낸 데 있는 것이다. 현우와의 운명적 만남에서 얻은 딸을 사생아처럼 방치한 고난의 나날을 차분히 되짚는 윤희가 마지막 그림 속의 초상처럼 현우의 삶을 어머니의 시선으로 돌아보는 것은, 그녀의 내면적 성숙이 신고의 삶에 음각된 기억의 흔적으로만 침전되어 있음을 말해준다.5 그러나 성급하게 미래를 끌어오는 것도 과거를 서둘러 청산하는 방식이라면, 지상의 무상한 시간을 견디고서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는’ 것들을 알아보는 그 기억의 힘이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또 한번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오래된 정원』 하권 308면)

 

윤희의 마지막 편지를 끝맺는 이 질문에 현우는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오. (…) 당신이 살고 겪어온 길을 따라”(같은 책 312면)라고 답한다. 윤희와 함께 갈뫼를 마음의 고향에 묻고 세상 속으로 걸어가는 현우에게 윤희가 물려준 기억의 유산은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 함께 일궈야 할 앞날의 과제일 것이다.

 

 

4

 

『손님』이 분단문제를 다룬 종래의 소설과 뚜렷이 구별되고 황석영 소설의 계보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진정한 새로움은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전쟁의 폭력으로 구조화된 분단의 고착과정을 주체형성의 위기와 결부지어 파악하려는 시도에 있다. 이러한 해석은 언뜻 보면 작가의 의도와는 상충하는 면이 있다. 「작가의 말」에서 ‘손님’은 우리 민족의 자주적 근대화를 가로막은 달갑지 않은 손님 즉 ‘외세’의 뜻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읽으면 한국전쟁의 내전적 양상에 촛점을 맞춘 작품의 기본구도가 희석될뿐더러 분단극복의 내적 전제조건으로 작품이 지향하는 화해의 의미 또한 반감되는 결과에 이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국전쟁의 기원이 근본적으로는 8·15 해방과 더불어 자주적 민족국가 수립의 기회를 맞은 한반도가 다시 열강에 의해 분할 점령된 것에 기인한다는 역사적 사실, 그리고 전쟁이 외세의 강압에 의한 개항 때부터 우리에게 부과된 역사적 숙명의 파국적 결과였다는 엄연한 사실을 외면하자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작품의 바탕이 되는 역사인식도 그것이다. 가령 ‘예수쟁이’가 된 자식 손자들을 가리켜 “사람언 조상얼 잘 모세야 사람구실을 하넌 거야. 놈에 구신얼 모시니 나라가 못씨게 대고 망해버렸디”(『손님』 39면)라고 개탄하는 증조할머니의 항변은, 와해된 전통에 파묻힌 자의 눈으로 보기에도 외세에 종속된 근대화가 망국의 화근이었을 뿐 아니라 또다른 재난의 뿌리임을 예감하는 발언이며, 그러한 인식은 작품에서 식민지 시대와 개항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배경의 설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소설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황해도 신천 대학살처럼 진상규명을 둘러싸고 아직까지 좌우 쌍방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을 다룰수록 소설가는 역사가의 임무를 동시에 떠맡을 수밖에 없으며,6 역사적 사실과의 대결을 소홀히 할 때는 작품의 치명적 결함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소설가의 역할이 역사적 사실의 규명과 평가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역사서술과 다른 차원에서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50년 만에 북조선의 고향땅을 밟은 요섭이 신천학살 역사기념관에서 생존자의 증언을 차례로 듣고 나서 끝모를 헛증을 느끼는 대목에서 작가의 의중을 엿볼 수 있다.

 

악몽은 사실이지만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 생생함을 잃어버린 말은 또한 얼마나 가벼운가. 수십 수백번 거듭된 말은 마치 타버린 책의 종잇장처럼 검게 일그러져 허공에 떠서 나풀거리고 있었다. 거기 찍혔던 활자와 의미는 재가 되고 먼지가 되어버렸으리라. (108면)

 

학살의 참극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 참극의 현장에 기념비를 세워서 외부의 적에 대한 전의를 다지고 자신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되뇌는 것만으로 과연 분단의 장벽을 허물 수 있을까. 반공의 국시에서 정당성을 찾은 가해자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될 이 질문은, 북한의 공식입장이나 반공우익의 주장 사이에서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결코 능사가 아님을 시사한다. 반세기 동안 남북이 함께 쌓아올린 장벽 앞에서 그런 식으로 일방의 입장을 강변하는 것은 “우리가 함께 저질렀던 악몽의 즉물적 잔재들”(103면)에 자신의 정체성을 의탁하는 부질없는 짓이며, 역사적 업보의 굴레를 승인하는 것일 뿐이다. 이 소설에서 이념적 갈등의 문제를 가해자/피해자의 위신투쟁과는 다른 차원에서, 쌍방을 잔혹한 폭력의 광기로 몰아간 악령에 홀린 주체의 문제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한 문제가 가해자의 모습에서 더욱 선명히 부각되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 역시 작가의 역사의식이 놓칠 리 없는 역사적 진실의 일부이다. 빨갱이 사냥에 앞장선 요한 일행의 가계도를 보면 일제 치하에 척식회사의 하청농장을 경영했거나 그에 버금가는 지주 혹은 공장주 등으로 설정되어 있거니와, 그들이 ‘사탄의 무리와 싸우는 성전’의 소명을 내세우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억눌린 자들의 항거에 대한 폭력적 응징이 하느님 앞에 누구나 평등한 인간의 존엄을 이중으로 짓밟는 야만임을 감추는 구실일 뿐이다. 그에 비하면 짐승처럼 천대받던 까막눈의 머슴 박일랑이 ‘토지개혁’이라는 활자에 눈뜨고 그 해방감을 실행에 옮기려는 일련의 행동들은 단지 주인자리를 넘보는 노예의 인정욕구로 폄훼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인간다운 대접과 평등한 삶을 바라는 뜨거운 열망의 표출로 이해된다. 서로 죽고 죽이는 참극의 막바지에 요한이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보복당할 것이 뻔한 갓난아이와 아내를 버리고 월남하는 비정함과 달리, 똑같은 처지에 내몰린 일랑이 처자식과 함께 죽음을 감수하는 데서도 일랑이네의 요구가 계급적 갈등 못지않게 더욱 근원적인 인간애에 바탕을 두고 있음이 드러난다. 요한의 입장에서는 그처럼 명분이 공허할수록 폭력은 더 맹목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일랑에게 코뚜레를 끼워 십자가 대신 전봇대에 달아매는7 요한은 ‘하느님의 천벌’ 운운하며 그의 이름을 점지한 계시록의 각본을 들이대지만 정작 ‘마귀가 번성하게 될 지옥’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것은 그 자신이다. ‘동지’로 지내온 봉수가 단지 요한의 매부가 당원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누이를 죽인 것에 대한 보복으로 다시 봉수의 애인 자매를 죽이는 대목에 이르러 폭력의 광기는 결국 자멸의 파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요컨대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 죽음을 재촉하는’8 식의 이 극한적 자기모순의 파괴충동은 피의 투쟁으로 얼룩진 역사 속에서 인간의 생존욕구가 평등을 지향하는 상생의 터전을 찾지 못할 때 공멸의 극한적 권력투쟁으로 치닫는 경위를 말해준다. 소설에서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지만 신천에서는 물론 한반도 전역에서 요한네 반대편의 잔인함 또한 그들에 못지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편가르기’의 시각으로 그 어두운 과거를 들추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극한상황에서도 인간적 양심과 도리를 지키려 했던 거의 유일한 인물인 외삼촌이 요한의 유골을 들고 고향을 찾아온 요섭에게 들려주는 다음 말은 요한과 일랑처럼 적으로 갈라섰던 사람들 모두에게 똑같이 해당될 것이다.

 

우리는 양쪽이 모두 어렸다고 생각한다. 더 자라서 사람 사는 일은 좀더 복잡하고 서로 이해할 일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되어야만 했다. (…) 야소교나 사회주의를 신학문이라고 받아 배운 지 한 세대도 못되어 서로가 열심당만 되어 있었지 예전부터 살아오던 사람살이의 일은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176면)

 

피차 ‘사람살이의 일’도 추스르지 못할 만큼 약체였던 그네들을 감당하기 힘든 시련에 빠뜨렸던 위기의 상황은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다. 남과 북이 남북한 민중의 숱한 희생을 감수하며 맞들고 있는 화약고를 당사자의 마음이 통해도 내려놓지 못하는 기막힌 현실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북을 막론하고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일체의 적대를 불식하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유형무형의 억압들을 극복하여 우리 스스로 자신의 온전한 주인으로 거듭나도록 힘쓰는 것이야말로 실패한 역사에서 배워야 할 교훈일 것이다. ‘언제나 승리해온 적 앞에서는 죽은 자도 보호받지 못한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벤야민이 말했듯이 “지나간 일을 역사적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원래 있었던 일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가는 기억을 장악하는 것”9이라면 그것은 독자를 우리 역사의 캄캄한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는 『손님』이 현재형의 소설로 읽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품에 귀신이 등장하고 굿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도 난데없는 형식실험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의식과 유기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고향땅을 피로 물들인 요한에게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원귀가 출몰하고 죽어서도 그의 천도행이 가로막히는 것은 당연하며, 또 과거의 참극을 잊지 못하는 산 자들의 마음속에 온갖 헛것이 들끓는 것도 당연하다. 기억의 잔여물은 그것이 만들어진 과정을 망각하려 할수록 더 견고해지게 마련이라면, 산 자든 죽은 자든 과거의 망령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망령은 그냥 헛것이 아니라 전쟁의 참극이 오늘의 우리에게 풀어야 할 업으로 물려준 역사의 짐이라는 점에서 생생한 현실이기도 하다. 예컨대 마르께스(G. Márquez)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조상의 유령이 실명의 후손인물로 거듭 되살아나는 불가사의한 가계도가 단지 마술적 환영이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은 수탈과 억압에 짓눌려온 과거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절박한 현실인식의 산물이요, 그런 의미에서 “역사 그 자체가 바로 맞서 싸워야 하고 내쫓아야 하고 이용하고 극복해야 할 유령”10이라면, 『손님』의 귀신들 역시 그러한 사태의 반영물인 것이다. 그 귀신들을 부리는 굿의 형식 역시 그저 전통적 민족형식으로의 복귀라고 볼 것만은 아니다. 죽은 자의 넋이 신격(神格)의 저승사자를 따돌리고 산 사람과 해후하는 굿의 형식은, 그 신격의 절대적 권위를 참칭하며 숱한 인간을 희생시킨 역사의 맹목적 필연을 해체해 인간의 시간으로 되돌려주는 소설의 본령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문학의 죽음이니 서사의 종말이 회자되는 현실에서 타고난 이야기꾼 황석영은 그럼에도 우리가 늘 새롭게 이야기를 쓰고 읽어야 하는 이유를 작품으로 확인시켜준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역사의 연옥 저 너머로 언뜻 비치는 평화의 땅을 포기할 수 없는 한, 그와 우리 모두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저 아래 희게 드러난 강물의 띠와 마을의 불빛이 보인다.

(…) 멀리서 소 우는 소리며 목에 걸린 워낭이 딸그랑대는 소리도 들리고 닭이 알을 낳고 꼬꼬댁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들판에는 사람들이 논에서 모심기를 하면서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린다. 풍물을 치는 빠른 북소리에 꽹매기 두드리는 경쾌한 쇳소리가 얹혀 있다. 어머니가 아이를 부르는 소리도 들려온다.

얘들아, 밥먹어라. (25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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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런 의미에서 투이에 대한 안영규의 자기동일시는 “이 전쟁에서 한국인이 처한 곤혹스럽고 모순된 처지를 극명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김철 「제국주의와 정치적 무의식」, 『구체성의 시학』(실천문학사 1993) 93면 참조.
  2. 바오 닌 『전쟁의 슬픔』(박찬규 옮김, 예담 1999). 전쟁의 폭력 속에 참혹하게 일그러진 주체의 분열을 문제삼는 이 소설의 주인공 꾸엔이 “내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약간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미래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추억의 힘 때문”(63면)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쟁으로 파괴된 것들의 기억을 극복하지 않고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다는 참담한 역설의 표현이다. 또한 꾸엔의 애인 프엉에게 순결한 성녀와 슬픈 창녀의 이미지가 하나의 인격 속에 수시로 교차하는 것도 전쟁의 비극이 외부의 적과의 싸움에 이긴 것만으로 결코 해소되지 않음을 아프게 일깨워준다.
  3. 이러한 좌절의 반복은 윤희가 겪는 체험의 전과 후를 유기적 인과관계로 엮어낼 수 없는 서술형식의 단속적 어긋남을 낳고, 이러한 단절적 시간체험은 예컨대 이희수와의 관계에서 드러나듯 공간적 이동과 연동된 새로운 만남을 통해서도 해소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윤희의 동선에서 드러나는 서사의 교란은 예컨대 로만 야콥슨이 언어장애와 결부시켜 설명한 서사의 두 유형, 즉 시간적 연쇄의 혼란을 초래하는 ‘연속성 장애’(continuity disorder)와 사물들의 유기적 공존 및 결합을 방해하는 ‘유사성 장애’(similarity disorder)가 착종된 양상을 보여주는데, 그로 인한 서술의 단층들은 진화론적 역사서사 속으로의 상징적 합일이 불가능함을 시사하는 은유의 파편들이다. R. Jacobson, On Language (Havard University Press 1995) 115~33면 참조.
  4. 자아구축의 좌절과정 자체에 주목했던 프로이트(S. Freud)는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로 멜랑꼴리에 침잠한 자아의 자기회귀에 대하여 ‘자아로의 도피를 통해 사랑은 지양될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묘한 말을 남겼는데, 여기서 ‘지양’(Aufhebung)이라는 말은 본래 의미인 ‘폐기’와 ‘극복’의 이중성을 갖는다. 그에 따르면 사랑하는 대상의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은 다른 대상을 통한 대체에 만족하기보다는 ‘조국’ ‘자유’ ‘정의’ 등의 보편적 실체로 전이하려는 경향을 띠지만, 그러한 보편으로의 상승은 현실의 충족을 동반하지 않을 때 자아를 더욱 공허하게 만드는 거대 추상물에 대한 완고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잃어버린 대상의 ‘극복’과정에는 항상 자아‘상실’(폐기)의 위기가 동반되며, 현실을 돌보지 않는 거대이념에의 집착이 흔히 내면의 황폐화를 거쳐 자기연민으로 귀착되는 것도 그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게 보면 이념에 포획되어 늘상 현실을 앞질러가던 송영태가 소설 마지막에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아오지행’을 택하는 것이야말로 조국과 민족에 대한 그의 충정이 일상적 삶과의 극단적 괴리로 치달은 실패한 분리의 종착점을 보여준다.
  5. 그러나 이 기억의 힘을 막연히 ‘낭만적 자아’의 그것과 동일시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물론 현우에 대한 윤희의 기억은 그의 현실적 부재와 그것을 가리는 환영(‘미망’)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하며, 이 부재와 미망의 갈등에 소진되는 정념은 가령 워즈워스가 말한 ‘환상’과 ‘상상력’ 사이의 미묘한 긴장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W. Wordsworth, The Prose Works III, Oxford 1974, 36면: “환상Fancy은 인간 존재의 시간에 얽매인 부분을 가속화하면서 위장하는 구실을 하며, 상상력Imagination은 영속적인 것을 고무하고 받쳐준다.”) 그러나 윤희에게 현우의 부재를 견디게 하는 힘은 낭만적 초월의 동력인 기억의 영속성이 아니라, 낭만적 초월의 가능성이 차단된 환멸의 현실에서 심적 에너지를 일상 속으로 내재화하려는 노력에 연유한다.
  6.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이 좌우익의 입장에 대한 추상적 양비론으로 비켜나 있지는 않음을 오늘의 시각에서 설득렸있게 분석한 글로는 홍승용 「미래의 조건―황석영의 ‘손님’」, 『진보평론』 2002년 여름호 참조.
  7. 소설의 곳곳에서 마주치는 끔찍한 주검들은 벤야민이 30년전쟁의 암흑기를 배경으로 생성된 바로끄 비극의 시체들을 역사라는 잔혹극의 ‘원형적 알레고리’ 혹은 ‘엠블렘’으로 해석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W. Benjamin, Der 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 (Frankfurt a. M. 1978) 193면 이하 참조.
  8. S. Zizek, Terrying with the Negative: Kant, Hegel,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Durham 1993) 76면.
  9. W. Benjamin, Iitlclluminationen (Frankfurt a. M. 1977) 253면.
  10. L. P. 사모라 외 『마술적 사실주의』(우석균 외 옮김, 한국문화사 1995) 33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