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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시와 혁명
김수영 후기시의 ‘난해성’ 문제
임홍배 林洪培
서울대 독문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주체의 위기와 서사의 회귀」 「현실주의 논쟁의 교훈과 노동소설의 진로」 「괴테의 세계문학론과 서구적 근대의 모험」 등이 있음. limhb059@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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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기가 채 되지 않는 우리 현대시의 역사에서 김수영(金洙暎)처럼 집중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시인도 드물 것이다. 근년에 와서 특히 김수영의 시세계에 대한 재조명이 전에 없이 활발해지는 것을 보면 그의 시사적 위치가 그만큼 확고해졌음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럼에도 김수영의 시, 그중에서 특히 4·19의 좌절을 겪은 이후의 후기시는 최근까지도 상당히 엇갈리는 해석을 낳고 있다. 알다시피 김수영의 후기시에서 시적 자아가 집단적 주체의 그것으로 고양되는 절정의 순간들은 4·19 직후 극적 정점을 노래하는 몇편의 시에서만 확인된다. 그런 이유에서 김수영 시의 궤적이 “4·19 직후의 잠깐을 제외하면 ‘비역사’에서 ‘초역사’로 이어졌”1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4·19 이후 김수영의 시를 이른바 ‘풍자’와 ‘해탈’의 이항대립으로 접근하는 그러한 시각에서 보면 김수영의 후기시에서 4·19의 기억은 실종되고 만다. 그와 달리 김수영의 시적 사유를 “삶의 생태학보다는 비극적 실존에 대한 집착으로 자기의식의 재구축 과정을 밟아나간”2 도정으로 파악하는 관점은 김수영의 후기시에서 시와 현실의 긴장이 새롭게 심화되는 과정을 적절히 포착한 것이긴 하지만, 이 경우에도 ‘자기의식의 재구축’은 ‘삶의 생태학’과 맞바꾼 것으로 평가될 소지를 남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김수영의 후기시에 주저음으로 깔려 있는 특유의 자기의식은 현실과 시적 자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치열한 몸부림의 징후로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와 시에 관한 질문이 대등한 비중을 갖는 후기의 ‘난해시’야말로 오히려 ‘삶의 생태학’에 충실하려는 시적 탐구의 소산이 아닐까 한다.
시인 자신의 발언 중에 후기시의 난해성을 이해하는 실마리로 주목할 것은 “진정한 참여시에 있어서는 (…) 참여의식이 정치이념의 증인이 될 수 없는 것이 원칙”3이라고 한 대목이다. 4·19의 체험이 전경에 부각되는 몇편의 시를 제외하면 김수영의 후기시 대다수는 도대체 그 어떤 이념의 ‘증거’로도 읽혀지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성향을 보이거니와, 김수영이 ‘참여시’를 지향하면서도 ‘행동의 도구로서의 시’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행동의 시’를 추구했다는 것은 후기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4 다른 한편 김수영이 “새로움은 자유다, 자유는 새로움이다”5라며 자유와 동일시했던 새로움의 추구는, 그가 말한 ‘자유의 이행’이 곧 ‘완벽한 세계의 구현’을 꿈꾸는 ‘불가능의 추구’임을 다시 상기할 때, 그의 시에 필연적으로 모종의 미완의 성격을 부여한다. 이는 김수영의 시들이 한편의 시로서 완결성이 부족하다는 말이 아니라, 시를 통한 그의 사유가 어떤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고 부단한 자기지양을 시도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시인 자신도 시의 ‘증인’이 될 수 없는 철저한 자기지양의 사유는 김수영에게 있어 적대적 세계와 대면하여 현실의 초탈을 꿈꾸거나, 결국 같은 이야기지만 적대적 세계인식에 갇혀 있으면서 외부세계를 차단하는 순수고독의 추구와는 무관하며, 냉철한 자기점검을 통해 현실인식의 지평을 확장·심화하려는 부단한 고투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이 글에서는 김수영이 4·19의 좌절과 대결하는 가운데 자기성찰의 시적 사유가 객관적 세계인식과 맞물리는 양상에 촛점을 맞추어 시와 혁명에 관한 그의 생각을 살펴보고자 한다.
2
4·19의 좌절이 김수영의 시를 어렵게 만드는 사태의 일단은 ‘신귀거래(新歸去來)’ 연작을 거치며 착잡한 일상으로 하강한 시인이 ‘몸앓이’를 하는 대목에서 엿볼 수 있다.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으로부터
능금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먼 곳에서부터」(1961) 전문
‘먼 곳에서 먼 곳으로 몸이 아프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첫 연에서 독자를 당혹스럽게 하는 그러한 의문은 이어지는 연들의 서술에서 해명되기는커녕 더더욱 요령부득의 수수께끼가 된다. 다시 1연으로 돌아가서 멀다는 말의 시공간적 의미를 상기하면, 시인은 지금 이곳의 가까운 일상 속에서는 결코 점칠 수 없는 요원한 미래에 대한 모종의 열망을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현재의 시공간 속에서 그 미래를 내다볼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지금과는 달라져야 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접을 수도 없기 때문에, 시인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 고통은 2연에서 새로운 희망을 기약해야 할 봄이 기대를 배반하는 정지된 시간의 반복으로 확인되고,3연과 4연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이 살아 있음의 마지막 증거인 욕망조차 거세하고 결실에 대한 기대마저 지워버릴 만큼 폐쇄적인 자기동일성에 갇혀 있음을 거듭 확인시켜준다. ‘여자’와 ‘능금꽃’의 의미없는 나열은 그렇듯 생성의 가능성이 차단된 시간체험의 공간적 환치인 셈이다. 그리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아프다는 것은 그럼에도 현재와 미래를 열린 가능성으로 이어보려는 그 어떤 ‘의식적’ 노력도 결코 나의 현실에 미만(彌滿)한 이 “죽음의 질서”(「말」 1964)를 허물지는 못할 거라는 참담한 고백이지만, 다른 한편 고통을 제어하려는 의식이 개입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아프다는 것은 현실의 질서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몸부림치는 만큼은 역설적으로 시인의 의식이 살아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6
그렇지만 앞의 시가 주관적 자기의식의 폐쇄회로에 갇힐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반면, 똑같은 절망적 사태를 표제로 삼고 있는 다음 시는 미묘한 반전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절망」(1965) 전문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동어반복, 그리고 첫 행이 다시 서로 아무런 연관성도 없이 주어를 바꾸어서 반복되는 황당함은 독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가령 ‘나는 나다’라는 동어반복이 나에 관한 설명은 물론 아무런 정보도 전달하지 않듯이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보다 더 무의미한 동어반복의 서술이며 ‘곰팡’과 ‘여름’의 반복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이러한 무의미에서 의미를 구제하는 것은 ‘반성하지 않는다’는 상황이다. 무의미를 낳는 것은 ‘반성적 의식의 결여’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풍경’과 ‘곰팡’과 ‘여름’이라는 낱말은 치열한 사색을 요구하는 ‘반성’이라는 개념어와 전혀 매개될 수 없는 엉뚱한 사물의 나열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난센스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반성’의 상태를 더욱 절망적으로 환기하는 의미의 작용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풍경’과 ‘곰팡’과 ‘여름’은 반성하는 사유와는 가장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무반성’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나열될 수 있는 낱말은 무한정 불어날 수 있지만, 그것을 무미건조할 만큼 간결한 리듬의 3행으로 압축한 것은 시의 경제를 아는 절도다. 그것은 기계적 시간의 흐름에서 나중에 오는 것이 언제나 먼저 것을 잡아먹으면서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좋은 새것’만 탐하는 무반성적 시간의 타성에 길항하는 요소이기도 하다.7 반성을 모르는 주체의 공허함이 근본적으로는 ‘죽음의 질서’에 사로잡힌 두려움을 견디지 못한 채 삶을 소진하는 미성숙의 징표라면, 현실을 통해 변화되기를 거부하고 기존의 나에만 매달리는 집착 역시 스스로의 성숙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다. ‘졸렬과 수치가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은 죽음을 앞당기고 구원에서 멀어지는 지름길인 것이다. 이처럼 시의 행간에 스며드는 ‘언어의 작용’을 거친 끝에 비로소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는 말이 성립된다. 동어반복의 정지된 시간에 매몰된 나에게 다른 삶의 기미를 실어오는 바람은, 다시 말해 구원의 가능성은, 나의 기대와 예측까지도 넘어선 다른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을 때만 나의 삶에 뿌리내릴 수 있고, 그것이 곧 극한의 절망적 상황에서도 희망의 담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에 그쳐도 안이한 ‘변증법적 종합’에 안주하기 쉽다. 그래서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는 마지막 시행을 통해 예기치 않은 순간에 겨우 감지되는 구원의 예감도 다시 더욱 철저한 방법적 회의의 대상이 되며, 이 시의 문제제기는 원점에서 새로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만이 영원한 동어반복의 삶을 이길 수 있는 길이다. 이처럼 김수영의 시는 절정의 순간에도 모순과 대립의 해소에 안주하지 않고 철저하게 부정적 변증법을 지향한다. 이 시에서 확인되는 바 “대상을 의식하는 나를 의식하고 다시 그러한 자기를 의식하는 의식의 순환”8은, 김수영이 “시만 남겨놓은 절망을 하지 말고 시까지도 내던지는 철저한 절망을 하라고”(389면) 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정직한 양심의 발로인 것이다. 같은 제목의 「절망」(1962)에서 말하듯 ‘나의 시는 영원한 미완성’이라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이 시에도 해당되며, ‘시’의 자리에 ‘미완의 혁명’을 놓고 읽어도 마찬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이 시는 시와 혁명에 관한 메타 텍스트인 셈이다.
김수영의 60년대 시 전체를 놓고 보면 ‘먼 곳에서 먼 곳으로 몸이 아픈’ 좌절의 체험이 ‘열렬한 사랑의 절도’(「사랑의 변주곡」,1967)에 의해 극복되는 과정은 순차적인 진화를 거쳐 어느 한순간에 완성된다기보다는 매순간 다시 시작하는 끊임없는 모험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김수영의 시적 사유가 결코 미리 정해진 목표를 지향하는 법이 없고 시인 자신의 기대까지도 부단히 벗어던지는 치열한 자기성찰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기성찰의 심화과정과 맞물려서 김수영의 시는 후기로 갈수록 ‘언어의 서술’(언어의 의사소통적 차원)보다는 ‘언어의 작용’(언어의 자기성찰적 차원)에 치중하는 쪽으로 긴장을 고조시키며,9 김수영의 시가 어려워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의사소통적 언어가 교환가치의 매개물로 전락한 현실에서 의사소통적 언어의 거부를 통해 타락한 현실에 맞서려는 현대시의 일반적인 경향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시적 언어와 소통적 언어의 모순이 극대화될 때 모든 시는 시의 전부를 거는 한판 도박이 된다.”10는 아도르노의 말처럼, 그런 경향의 시가 든든한 현실감각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시를 잃고 무의미의 포즈만 남게 될 위험은 상존한다. 김수영의 시가 어려워지는 까닭이 그런 ‘사이비 난해시’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시와 현실의 관계에 관한 치열한 성찰에 기인한다는 것을 앞의 인용시에서도 엿볼 수 있다.
3
김수영의 ‘난해시’ 중에서 시와 혁명에 관한 운산(運算)이 좀더 역동적으로 부각된 시로 「꽃잎(1)」(1967)을 들 수 있다.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
모르고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 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 같고
혁명 같고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 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고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 같고
첫 연의 의미는 비교적 분명하다. 삶의 준거가 되고 힘이 되는 그 무엇에 대한 존중은 의도적 작위의 개입 없이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것이어야 하며 표나게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이다. 2연에서는 삶을 변화시키는 어떤 힘의 생성과 발현이 그것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등치되고 있는데, 그러한 힘의 작용은 힘을 행사하는 주체의 의지나 예견을 벗어나 있다는 것이 핵심적 전언이다. 삶의 이치로 말하면, 모든 깨달음은 뒤늦게 오고 더더욱 예견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역사인 것이다. 1연에서 ‘머리 숙이는’ 대상을 삶에서 의지하는 신념으로 대입해본다면, 신념에 대한 과신도 금물이다. 예측불허의 다른 가능성들을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의 의지나 믿음이 어떤 결실을 거두는 순간에 마냥 환호작약하는 것도 금물이다. 「사랑의 변주곡」의 ‘눈을 떴다 감는 기술’처럼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11 마는 절도가 요구된다. 그런데 위의 시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3연이다. 앞의 연에서 삶을 변화시키는 힘의 발현을 꽃의 개화에 비유한 것은 자연스럽게 읽히지만, 3연에서는 그 꽃의 행방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우선 ‘임종의 생명’이 걸린다.죽음을 앞둔 삶의 비장함을 느낄 수도 있고, 고단한 삶을 온전히 살아낸 자의 아름다운 죽음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꽃의 생리에 비추어서 평이하게 읽으면 꽃의 아름다움은 결코 영속적이지 않다는 말도 된다. 그런 뜻을 모두 포괄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다음 행에서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은 「사랑의 변주곡」의 ‘폭풍을 일으키는 고요함과 사랑’을 연상케 하거니와, 여기서도 바위를 무너뜨리는 힘과 꽃의 개화를 매개하는 것은 ‘바람’이다. 자연을 운행시키는 힘으로서의 바람은 꽃을 피어나게 하는 동시에 그 아름다움이 제 몫을 다했을 때는 다시 낙화의 힘으로도 작용하며, 그것이 거대한 바위를 만들고 다시 부수는 자연의 풍화작용이기도 한 것이다.‘언뜻 보기에는’ 서로 아무런 연관성도 없이 진행되는 꽃의 개화와 바위의 낙반에 작용하는 근원적인 힘은 동일하다는 통찰이다. 그렇게 해서 꽃잎이 바위를 뭉개는 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252면)은 자연의 순리에서 보면 결코 기적이 아닌 셈이다.
하지만 자연의 역사에서도 그저 때가 되면 피었다가 지고 마는 꽃잎은 바위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면서 제 몫의 업을 반복할 뿐이다. 하물며 그에 비할 바 없이 불균등하게 진행되는 인간의 역사에서 개체의 운명은 더도 덜도 아닌 ‘한 잎’의 꽃이다. ‘한 잎의 꽃잎 같고/혁명 같고’의 절묘한 대치는, 시시각각 저마다 다르게 피어나 지천에 널려 있는 꽃을 ‘한 잎’으로 한정하면서 정작 ‘혁명’의 수식어는 여백으로 비워두는 보이지 않는 긴장을 통해, 장구한 세월의 역사에서 나의 삶이 수없이 반복된 뒤에도 가까스로 성취될까 말까 한 “혁명은/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푸른 하늘을」, 1960) 깊은 침묵으로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 모르고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 모르듯이’ 그 바람의 힘으로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도 그런 사연을 헤아릴 길 없는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에겐 결코 위안이 되지 않는다. 바위의 낙하가 경천동지의 혁명적 사태를 지칭한다면, 그것은 다시 ‘한 잎의 꽃잎’이 수없이 떨어져내리는 기나긴 과정을 거쳐서만 완수될 수 있는 것이다. 3연의 마지막 행을 다시 반복한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 같고’의 단행이 당당히 하나의 연으로 성립될 뿐 아니라, 모든 개체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저마다의 소명을 다함으로써만 매순간 다시 시작될 역사의 새로운 기점을 환기하는 비장한 울림을 갖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김수영이 “모든 시는 어떻게 자기 나름으로 죽음을 완수했느냐의 문제를 검토하는 방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407면)라고 한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죽음의 보증’을 통과한 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시가 어떻게 ‘자유의 이행’인가 하는 시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이 시에 대한 방법적 성찰로 무르익은 시다. 모더니즘을 표방하는 현대시의 일반적인 경향에서 ‘시에 관한 시’의 ‘자기지시성’(autoreferentiality)12은 흔히 ‘시의 알레고리’가 됨으로써 현실로부터 격절되는 양상을 보이지만, 김수영의 ‘시에 관한 시’는 현실과 역사에 대한 치열한 모색의 과정에서 힘겹게 얻어진 것이다.
4
앞의 시와 연작을 이루는 「꽃잎(2)」(1967)는 시에 관한 물음이 시의 의미작용에 대한 언어적 실험으로 나아간 경우다. 좀 길지만 전문을 인용한다.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가는 소란을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삐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삐뚤어지게
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
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영원히 떨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
보기 싫은 노란 꽃을
이 시에서 ‘꽃’이 ‘시’에 상응한다는 것은 이미 여러 평자들이 지적한 바 있다. 그렇게 보면 1,2연에서 ‘꽃을 주세요’라는 말은 시에 대한 독자의 기대지평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꽃을 주세요’라는 말 뒤에 ‘~을 위해서’라는 목적지향의 어사가 등장하는 것도 그 점을 뒷받침한다. 역으로 3연에서 ‘꽃을 받으세요’라는 말은 시인이 자기 시를 통해 독자에게 모종의 의미를 전달하려는 시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먼저 3연까지 읽어보면,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독자의 기대지평이 좌절하거나 오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1연에서 2연으로의 변화는 독자의 기대가 배반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 까닭이 무엇인지 1연과 2연만으로는 짐작하기 쉽지 않다. 유일한 단서는 1연의 ‘꽃’이 2연에서 ‘노란 꽃’으로 바뀌었다는 것이지만, 마지막 연의 ‘보기 싫은 노란 꽃’을 읽기 전까지는 이 말에 미리 부정적 의미를 부가하긴 어렵다. 다만 ‘꽃’에 대한 기대가 ‘노란 꽃’에 대한 요구로 한정되는 양상에 주목하면, 꽃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독자의 특정한 시각으로 ‘착색’해서 보려는 태도가 곧 꽃을 망가뜨리고 생기를 빼앗는다는 추정은 가능하다. 그리고 김수영이 자신의 시에서 특정한 메씨지의 돌출을 곧잘 ‘소음’에 비유하는 것을 상기할 때13 독자의 과잉기대가 ‘소란’을 증폭시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3연에서 시인은 독자의 그러한 요구에 전적으로 부응하여 ‘노란 꽃을 받으세요’라고 하면서 엉뚱하게도 ‘거룩한 우연’을 들먹이고 있다. 이 연극적 제스처는 다시 2연의 상황과 맞물려 있다. 독자는 기대의 과잉에 함몰될수록 꽃을 꽃으로 보지 못하는 맹목상태에 빠져들게 마련이며, 그래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르는 채 ‘금이 간 꽃’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독자의 그러한 자기최면에 힘입어 3연의 현혹이 연출된다.‘넓어져가는 소란’이 ‘거룩한 우연’에 대한 허황한 기대를 부추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처럼 3연까지가 독자의 그릇된 기대와 시인의 작위가 불행하게 결합된 사태를 예시하고 있다면,4연은 시인 나름의 교정책이라 할 수 있다.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라’는 말은 시의 바깥에 있는 일체의 것을 잊어버리고 시를 있는 그대로 보라는 주문일 것이다. 그래서 시가 바로 보이도록(‘꽃의 글자가 삐뚤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 시인의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의도가 ‘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 하려는 집착과 구분되지 않을 때, 다시 말해 시인의 자기주장을 단도직입적으로 전달하려는 욕구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는 시인의 의도를 배반하여 시가 일그러진다.‘꽃의 글자가 다시 삐뚤어지게’ 되는 것이다. 2연에서의 눈먼 독자와 마찬가지로 시인 역시 자기주장을 앞세워서 시를 망가뜨리는 사태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5연은 시인의 과잉욕구를 다시 연극적 어조로 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못 보는 글자’나 ‘떨리는 글자’를 믿으라는 말은 시의 표면에 언표되지 않은 행간의 뜻을 읽어달라는 정직한 호소로 볼 수도 있지만, 그런 독법을 차단하는 것은 ‘노란 꽃’의 반복이다. 행간에 숨은 뜻도 어디까지나 시인이 주장하려는 ‘노란 꽃’의 확장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원히 떨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은 작가적 의도의 포획물인 ‘노란 꽃’으로 환원되지 않을 ‘모든 꽃잎’의 배제를 통해 ‘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이라는 메씨지가 성립되었음을 실토하는 것이다. 그처럼 꽃 자체가 함축하는 의미의 다양성과 다채로움을 희생해 얻어진 믿음은 당연히 공허할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독자에게 믿음의 대상으로 강요되는 ‘노란 꽃’이 누구보다 시인 자신에게 ‘보기 싫은’ 것이다.
일찍이 「꽃(2)」(1956)에서 김수영은 “꽃은 과거와 또 과거를 향하여/피어나는 것”이라는 묘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말을 앞의 인용시와 연관지어 과거에 대한 거듭된 반추와 숙고를 통해서만 꽃의 개화, 즉 진정한 의미의 생성과 소통이 가능해질 거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인용시의 이면에 감춰진 의미는 좀더 분명해진다. 시를 뒤집어서 읽으면, 자신의 주관적 욕구나 의도에 의해 배제되고 추방된 다른 삶의 가능성들을 되짚어가면서 현재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자기성찰의 준거로 삼을 때 비로소 오늘과 다른 내일의 가능성도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처럼 작가적 양심에 충실한 정직한 자기성찰을 통해 김수영은 섣부른 영웅대망론이나 유토피아적 사고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4·19혁명이 제기한 미완의 과제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김수영의 시가 어려워지는 대목들은 기성의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는 고독한 싸움의 지난함을 환기해주거니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집단에의 귀속성이 개체적 정체성의 담보가 되기 힘들어지는 오늘날 그의 시가 단지 한 시대의 기념비에 그치지 않고 여전히 독자의 사유를 촉발하는 근거도 그 점에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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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인 『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 소명출판 2002, 266면.↩
- 유성호 「타자 긍정을 통해 ‘사랑’에 이르는 도정」, 『작가연구』 5호(1998년 상반기) 220면.↩
- 김수영 「참여시의 정리」, 『창작과비평』 1967년 겨울호 634면. 이 글의 서두에서 김수영은 靑馬의 「칼을 갈라」를 ‘행동의 도구’로 쓰인 ‘참여시’의 표본으로 인용하면서, 이 시에 동원된 “‘環刀’와 ‘匕首’와 ‘식칼’로는 이승만은 처리될 수 없었다”고 단언하고 있다.↩
- 백낙청 「김수영의 시세계」, 황동규 엮음 『김수영의 문학』, 민음사 1983, 41면 참조.↩
- 『김수영 전집 2: 산문』, 민음사 1981, 196면. 앞으로 이 판본의 인용은 본문에서 면수만 표기함.↩
- 이 시에서 ‘자기반복적 운동’이 모종의 ‘역동적 정지성’으로 전화될 수 있는 근거도 그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김상환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 김수영론』, 민음사 2000, 35면 이하 참조.↩
- 김수영 시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형태소의 반복’은 이 시에서 ‘의미소의 대립’을 격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김혜순 「문학적 『장자』와 김수영의 시 담론 비교연구」, 김승희 편 『김수영 다시 읽기』, 프레스21 2000, 159면 참조.↩
- 염무웅 『민중시대의 문학』,창작과비평사 1979, 219면.↩
- ‘언어의 서술’과 ‘언어의 작용’에 관한 다음 발언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전자(언어의 서술)의 가치의 치우친 두둔에서 실패한 프롤레타리아 시가 많이 나오고, 후자(언어의 작용)의 가치의 치우친 두둔에서 사이비 난해시가 많이 나온 것을 볼 때, 비평가의 임무는 전자의 경향의 시인에게 후자의 경향을 강매하거나 후자의 경향의 시인에게 전자의 경향을 강매하는 일보다도 오히려, 제각기 가진 경향 속에서 그 시인의 양심이 살려져 있는지 아닌지를 식별하는 일에 있는 것이라고 믿어진다.”(193면)↩
- Th. Adorno, Noten zur Literatur, Frankfurt a. M. 1974, 57면.↩
- 여기서 ‘꺼진다’는 말은 지금의 어법으로 보면 무척 생소한 표현인데, 「적」(1962)에도 ‘더운 날 눈이 꺼지듯 적이 꺼진다’는 말이 나온다.‘더운 날 눈이 꺼진다’는 것은 무더위에 지쳐서 일순간 의식이 혼미해지고 시야도 흐려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위의 시에서 꺼진다는 말은 꽃의 아름다움에 일순간 넋이 나간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렇게 읽으면 깨어난다는 말과도 자연스런 대구가 된다.↩
- F. Jameson, A Singular Modernity, London/New York 2002, 159면 참조.↩
- 가령 「풀의 영상」(1966)에서 시인이 ‘엉클 쌤에게 학살당한 월남인이 되기까지도 했다’는 말을 김수영 스스로 ‘소음’의 표본으로 꼽으면서 ‘래디컬리즘에 혼이 빼앗긴 과오’(308면)라고 자책하는데, 김수영이 밝히는 자책사유는 그런 식의 ‘허세’에 들뜬 태도를 가라앉혀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