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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호철 李浩哲

1932년 함경남도 원산 출생. 1955년 『문학예술』로 등단. 소설집 『나상』 『이단자』 『문』 『이산타령 친족타령』, 장편 『소시민』 『남녘사람 북녁사람』 『물은 흘러서 강』 등이 있음.

 

 

 

동베를린 일별(一瞥) 기행, 2003년 가을

 

 

저는 지난 2003년 9월 10일부터 18일까지 독일 베를린 시에서 열렸던 제3차 세계문학인대회의 ‘아시아·태평양 축제주간’의 한국문학인 대표로 초청을 받아 간 길에, 바야흐로 통일 13주년을 맞은 옛 동독지역을 둘러볼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6·25사변 중인 1950년 12월, 만 18세의 나이로 단신 월남해와서 반세기 넘게 애오라지 망향의 꿈을 부여안은 채 글만 써온 72세의 소설가의 눈으로 ‘통일이라는 것이 이뤄지고 13년이 지난 독일이라는 나라의 모습을 속속들이 한번 보아내자’는 것이었습니다만, 체류기간이 원체 1주일 남짓인데다 본행사 틈틈이 이런 일을 해낸다는 것이 당키나 했겠습니까요.

하지만 본행사라는 것은 주로 여덟시 넘어 밤시간에, 독일어판으로 2002년에 나온 연작소설 『남녘사람 북녁사람』 원작자 자격으로 제가 우리말로 한 대목 읽고, 그걸 현지 배우 한분이 독일어로 읽고 나서, 두어 시간씩 질의·응답이 진행되었으니까 저로서는 그닥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어느 하루 낮 오후 세시경 우리나라의 분단문제에 대해 현지인의 사회로 토론자리가 있긴 했으나, 그것도 저로서는 과히 부담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같이 동행했던 영상물 제작회사 ‘인터뷰 코리아’사의 대표인 민병모 형과 함께 베를린에 도착한 이튿날, 동베를린의 한 복덕방을 통해 에버스발데 전철역 근처에 맞춤한 싸구려 민박집 하나를 구했습니다. 물론 현지어로 통역해줄 젊은 사람 하나도 벌써 민형이 서울에서 인터넷을 통해 구해놓았더군요.

이렇게 취재길에 나섰는데, 미리 밝혀두거니와 저는 통일이 이뤄지기 전인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에도 이곳에 한번 와본 일이 있었어요. 바로 1991년이었지요. 그때 마악 공산주의체제라는 것이 무너지기 시작한, 구 소련제국의 모스끄바며 뻬쩨르부르그며, 폴란드의 바르샤바며,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며, 그밖에도 서유럽의 몇개 나라 도시들을 50여일간이나 돌고 나서 1993년에 『세기말의 사상기행』이라는 책자 한권까지 펴냈습니다만, 역시 12년이라는 세월이 엄청나기는 하더군요. 그때하고는 생판 달라졌더라구요. 그때는 주로 동베를린 쪽에 체류하면서 기차로 두 시간 거리쯤 되는 남쪽의 막데부르크라는 곳까지 내려갔는데, 대낮에 현지의 한 주정뱅이가 동독에서 첫 데모가 벌어졌던 라이프찌히로 당장 안내해주겠노라고 엉겨붙어 꽤나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주위가 황량한 속에서도 동독 현지주민들은 거개가 온통 들떠 있더라구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대단히 신바람이 나 있는 사람도 물론 개중에는 있었지만, 태반의 동독사람들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어 보였습니다. 도대체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돌아가는가, 제각기 조용히 지켜보자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한데 그로부터 다시 12년 만에 와보는 동·서독 통일 뒤의 동베를린은?

그 인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우선 12년 전 그때의 황량하던 국면에서는 어느정도 벗어났다, 하지만 동독이라는 공산주의 치하를 살았던 현지인들은 아직도 뭔지 어리벙벙해 있다,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시 딱 부러지게 말하자면, 날이면 날마다 개개인 속으로 깊이 개입해들어오던 강한 정치권력, 공산주의 정치권력이라는 것이 어느날 갑자기 곤두박질치듯이 없어져버리자 모두가 하나같이 훌렁훌렁 휑해졌다고 할까요, 모두가 그 무슨 무중력상태에 함입(陷入)해버린 듯 보인다고 할까요. 오늘의 동베를린 사람들은 하나같이 각자가 평상(平常)의 사람살이로, 본래의 오순도순한 사람살이로 돌아와준 것은 무척 고맙고 대견하지만, 연중 365일 하루 24시간 노상 무겁게 짓눌러오던 공산주의 정치권력이라는 것이 깨끗이 물러가준 것은 당장 날아갈 듯이 시원하고 좋지만……

취재에 나서서 이틀째 되는 날 아침 일찍 우연히 만난 한 오십대쯤 보이는 건설현장의 노동자에게 “옛날 동독 치하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짧게 한마디로” 하고 물었을 때, 극히 잠깐 골똘하게 생각해보고 나서 즉시 돌아온 그이의 대답인즉 “그야 삶의 질(質)은 그전보다 엄청 높아졌지만, 경쟁사회 속을 하루하루 견뎌내기가 무척 버겁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나는 물끄러미 잠시 그 체대 큰 뚱뚱한 건설노동자의 얼굴을 마주 쳐다보면서 나대로 동독 주민들의 일반적인 수준의 높이를 잠시 생각해보았지요. 그렇습니다. 수준의 높이…… 수준, 수준! 어느 모로 보아도 건설현장의 일꾼, 우리 표현으로는 노가다판의 ‘품팔이 일꾼’으로 생긴 사람에게서 즉답으로 저런 말이 나온다는 것부터가 역시 다르구나, 싶어지며 철학의 나라 독일을 새삼 일깨워주더군요.

아무튼 첫 취재길에 나서서 마수걸이로 걸린 것이 우리가 며칠 동안 거처할 민박집을 구해준 복덕방 주인었는데, 이 사람의 사사로운 개인 사연부터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의 취재목표에 쏘옥 들어맞았어요. 조촐한 복덕방 사무실을 물어 물어 어렵게 찾아가 이만저만해서 동쪽 멀리 한국에서 왔노라고 운을 떼며, 동독시절에도 이곳에서 살았느냐, 그때는 직업이 뭐였느냐고 첫인사 삼아 무심하게 묻자, 그이는 대번에 반색을 하며 동독시절에는 건설회사 사무직원으로 있었노라고 하고는 “마침 잘 왔다, 당신들에게 중요한 문건 하나부터 보여줄 것이 있다”면서 서둘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뒤쪽 서류함에서 웬 서류뭉치 하나를 찾아 우리 앞에 내놓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곤 와락 흥분하면서 얼른 보기에는 조금 정신나간 사람마냥 횡설수설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라고 덮어놓고 소리소리 지르는 것 같았는데, 통역을 통해서 전후사정을 자세히 들어본즉, 아닌게아니라 참으로 해괴한 사연이었습니다. 그 종이뭉치들은, 동독 치하 때 보안당국이 본인들 몰래 전국민을 엄하게 감시한 개개 자취들을 담은 것들로, 예를 들면 그 당시 어느 누군가가 자기의 수상해 보이는 언행 같은 것을 본인 몰래 동독 보안당국에 밀고했다면 바로 그 실물 증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동·서독이 통일된 뒤인 오늘에는 떡하니 법으로 정해져서, 피해 당사자가 문건을 보고 싶다고 관계기관에 신청만 하면 열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복사까지 해서 내준다는 겁니다. 아니, 아무리 인권이 좋다지만 세상에, 원 저럴 수가……

그래서 지금 이렇게 동베를린 에버스발데 전철역 근처의 큰길가에서 복덕방을 운영하고 있는 이 사람도 혹여나 싶어 관계당국에 신청을 했는데, 맙소사! 세상에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친누님과 자형이 자기를 밀고했던 증거물이 나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항상 서방세계로 도주할 생각을 먹고 있고 노상 우리 공산체제에 불만을 갖고 있다고 밀고했더라는 겁니다. 물론 자형이나 누님이 열성당원들이긴 했지만, 설마하니 친동생을 당국에 밀고까지 했으리라고 어찌 꿈속엔들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홉살 터울의 누님과는 평소에 의좋은 남매로서 말다툼 한번 해본 일이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 돌아가신 뒤에는 어머니 노릇까지 누님이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누님이 어떻게 자기를 당국에 밀고할 수 있느냐,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그래서 이 사람은 즉각 누님과 아예 인연을 끊었다, 단호히 의절을 했노라는 것입니다.

그이는 그러지 않아도 큰 눈을 부릅뜨며 자신의 이런 행태에 어떤 식으로건 반대 기미를 보이는 사람에게까지 한바탕 행패를 부리려는 듯이 아주아주 격분을 했습니다. 제 쪽에서 슬그머니 겁까지 났을 정도로요. 독일 통일이라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피차 시퍼렇게 살아 있는 상태로 가족 의절을 가져다준 셈입니다. 동·서독이 통일이 안되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이 남매에게 이런 횡액은 애당초 닥치지 않았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래서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은 가도 가도 복잡한가봅니다만, 이런 경우를 닥치니까, 처음에 거론한 그 ‘수준’이란 것도 힘을 쓰지는 못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 ‘수준’과는 또 차원이 엄청 다른 문제더라구요. 실제로 사람들 사는 개개적인 세부세부 국면은 그 ‘수준’보다는 바로 이런 모습으로 개개의 감정 쪽이 더 기승을 부리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어머니 같은 누님이 자기를 밀고했다! 명명백백한 증빙문건이 이렇게 있지 않은가, 어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건 도저히 못 참는다, 당연히 의절이다. 이렇게 길길이 뛰는 그이를 진정시킬 겸 저는 우선 나지막하게 물었습니다.

“그 누님이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고는 있습니까?”

“그야, 알고 있지요. 교외 쪽에 무슨무슨 마을의 단독주택에 살고 있지요.”

“전화번호 같은 것은 알고 있습니까?”

“그야, 알고 있지요.”

저는 우선 이 사람 누님댁의 전화번호와 정확한 집주소부터 챙기고는 차근차근 조심조심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사실은 나도 당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 어쩌면 당신보다 몇배 몇십배 더 어려운 상황에 있다.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날 쳐죽이려고 들는지 모르지만 차라리 내 입장에서는 당신이 부럽기까지 하다. 나로서는 당신처럼 그럴 수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싶다는 말이다. 이것 봐요, 당신 누님은 내가 보기에 나쁜 사람은 아니야.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내가 보기에 누님은 당신을 보호하려고 그런 짓을 한 거야. 누님은 그때 그 체제가 영원히 가리라고 철석처럼 믿고 있었고, 그러니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남동생이 서방으로 내빼다가 보안경찰의 총알에 맞아죽는 것을 막아보려는 일념에서, 당신을 저들 감시하에 묶어두려고 했던 거야. 왜냐, 당신 죽는 것은 도저히 못 보겠기에. 그러니 여보, 내 말 들어. 제발, 내 말 한번만 들어. 내일 다시 올 테니까 당신이 우선 누님에게 전화를 걸어둬. 만날 용건이 생겼으니 내일 몇시에 찾아가겠다고 전화를 해둬. 그렇게 누님댁엘 가보자구. 그렇게 한번 3자 대면으로 모든 얘기를 죄다 털어놓아보자구. 미리 털어놓자면, 그 경우 내 입장은 우선 당신편이지만 당신 누님편도 될 것이야. 왜냐하면 누님도 누님대로 할 말이 많아 보이니까 말야. 오죽하면 당신을 당국에 밀고까지 했겠느냔 말이야. 내 말 알아듣겠어? 내일 그렇게 하자구. 나도 이참에 진정으로 보람있는 일을 한번 해보고 싶단 말이야. 대체 독일 통일이라는 것이 뭐냔 말이야. 통일이라는 것이 대체 뭐 말라죽은 것인데, 멀쩡하게 잘살아가던 당신 집안을, 당신 남매를 생으로 이렇게 찢어놓았느냐, 이거야. 그 옛날 나름대로 오직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제대로 살려내자는 일념에서 한 누님의 그 행태를, 당신 쪽에서 깊이 이해해야 한다고.

상대는 잠시 온 상판이 굳어지며 아래위 입술을 꽉 물고 조금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 같더니, 다음 순간 단호하게 머리를 가로저었습니다.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깊은 앙금을 지닌 채 이대로 간단히 누님과 자형을 만나러 제 발로 찾아갈 수는 없다는 것인가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누님을 찾아가는 것은 자기로선 오불관언(吾不關焉)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알겠다, 일단 누님을 찾아가 만나보고 나서 당신을 다시 찾아오마 하자, 그이는 조금 의아해하며 누님이 과연 당신들을 만나주겠는지, 자칫 헛걸음이나 되지 않을는지, 그 점을 염려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단 부딪쳐보기로 하고 그 복덕방을 나왔습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우리는 그 누님이 살고 있다는 베를린 교외 멀리 있는 동네로 전철과 기차를 번갈아 타며 찾아갔습니다. 그 마을은 제각기 널찍널찍한 터에 그만그만한 집들이 차락차락 가라앉은 주택가였습니다. 우리 기준으로 보자면 대표적인 중산층 주택가였지만, 뭔가 조금 살풍경해 보였습니다. 생동하는 활기가 없어 보였는데, 잠시 뒤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마을 생긴 외양은 그러하지만, 주로 연금으로 먹고사는 늙은 부부가 많다는 것 아닙니까.

어제 그 복덕방을 나와서 곧장 그 누님댁에 전화를 걸었습죠만, 누님의 반응은 시큰둥하더랍니다. 멀리 한국에서 취재차 왔노라고 하며 내일 오전 열시경 댁으로 찾아뵈려 한다고 여쭈었더니, 저편에서 아연 긴장을 하며 경계부터 하는 것이 전화로도 생생하게 느껴지더라는 겁니다. 그러곤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았느냐, 무슨 문제를 취재하려고 날 만나려 하느냐 등등 꼬치꼬치 되묻더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럴수록 이쪽에서는 시원시원하게 적당히 둘러대니, 아무튼 남편하고 의논해서 알려드릴 터이니 내일 아침 여덟시경에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주십사고 하는데, 목소리며 억양이며 말하는 분위기는 표준적인 육십대 여성으로 보이더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튿날 아침에 전화를 걸고 어쩌고 할 것 없이 그냥 기습하듯이 집 앞까지 찾아갔습니다. 집 앞에 이르러서 전화를 걸었더니, 다시 어제의 그 여성이 전화를 받긴 하는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남편과 같이 외출을 하게 되었으니 헛걸음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곤 잘칵 전화를 끊는 것이 아닙니까. 실로 난감하더군요. 핸드폰으로 같은 전화번호를 계속 눌러댔지만 전혀 받지를 않더군요. 이렇게 되면 할 수 없지요. 그 댁까지 어렵게 찾아가서 현관 버저를 눌렀어요. 물론 반응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담 너머로 본즉, 분명히 사람 기척은 있더라구요. 집 안쪽에서도 창가에 바싹 붙어서서 이쪽 동정을 살피는 것이 감으로 느껴지더군요. 아니, 감으로뿐만 아니라 흘낏흘낏 들여다보이더라구요. 대문 너머로 집을 들여다보니 널찍한 마당 잔디밭도 잘 가꾸어져 있고, 전체적인 집관리도 여간 깔끔하지가 않았어요. 집 관리하는 그 솜씨만으로도 어제 만난 그 복덕방 주인의 누님이 틀림없을 이 댁 주부의 알뜰한 사람됨이 짐작되더라구요. 그렇게 저 옛날 동독정부 치하에서는 열성당원으로 체제수호를 위해 혼신으로 성의를 다했으리라는 것도 대강은 느껴졌어요. 그러니까 그 아줌마로서는 동독권력이 그렇게 싱겁게 무너진 뒤의 지난 13년간이 어쩌면 악몽의 나날이었을지도 모르지요. 동생이 옛날의 그 문건을 들고 별안간에 찾아와서 생선처럼 펄펄 뛰며 생난리를 벌였을 때 얼마나 지옥 같았겠습니까. 자기대로도 할 말은 있겠지만, 저렇게 펄펄 뛰는 동생에게는 통했을 리가 없지요. 세상이 어쩌다가 별안간에 이 모양으로 변했는가, 원 세상이 갑자기 이렇게 변해버릴 수도 있는가, 싶지만 어디 누구를 붙들고 하소연할 수도 없었던 것이겠지요. 바로 그겁니다. 통일이 되고 난 독일땅에서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이 아줌마의 하소연을, 저 동쪽 멀리 한국에서 온 제가 속속들이 들어주겠다, 이거예요. 그걸 전혀 몰라주는 저 아줌마가 저로서는 여간 야속하지가 않더라구요. 심지어 냅다 우리말로 소리까지 질러대고 싶더라구요. 지금 나는 당신의 동생편이 아니라 당신편이 되려고, 당신 역성을 들려고 왔다! 그걸 어찌 이렇게도 몰라주느냐, 하고요.

결국 어쩔 겁니까. 우리는 계속 전화를 걸고 현관 버저를 연방 눌러댈밖에요. 그 집 안이 온통 시끄러웠을 거에요. 그렇게 10분 정도나 지났을까, 바로 그 댁의 오른쪽 작은 쪽문이 열리더니 중년사내 한사람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기웃기웃하며 우리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거예요. 얼씨구나 됐다! 하고 우리도 마주 다가갔지요. 제가 악수부터 하자고 한손을 내밀었더니, 상대는 한손을 홱 내저으며 되돌아 들어가는 거예요. 그 뒷모습은 적의가 가득하더라구요. 말 한마디 붙일 틈도 주지 않고 그렇게 도로 쪽문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일단 우리 동정을 살피러 나왔다가 별볼일이 없겠다 싶어 도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였어요. 대강 그 복덕방 주인의 자형 되는 사람이겠다 싶었지만 물론 확실한 것은 모르겠고요. 원체 2,3분 동안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우리는 미처 일정한 엄두를 낼 여유도 없었고, 그렇게 그자가 들어가고 나서야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어안이 벙벙했지요.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도 없어서 그 집 주위를 돌아가며 비디오카메라만 들입다 찍어대곤 했어요.

본시 베를린이라는 곳은 무한 들판의 한가운데에 있어 사방으로 툭 터져 있는 도시예요. 이 점은 1991년 가을 소련이 무너지기 직전에 가본 모스끄바도 비슷했어요. 도시라는 것이 그냥 무한 들판에 동서남북 사방으로 툭 터져 있어서 교외 풍정까지도 아주 비슷했어요.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1991년에 모스끄바 교외 쪽은 공산제국의 우두머리 나라치고는 엘리베이터며 뭐며 꽤나 빈한스럽고 꾀죄죄해 보였는데, 거기에 비하면 동독의 베를린은 종주국인 소련보다도 덜 꾀죄죄했다는 기억이에요. 이 마을 전체로 보더라도 주로 연금생활자인 실업자 마을치고는 집집마다 깔끔하게 잘 가꾸어져 있더라구요.

그건 그렇고 한창 출근 때인 아침 여덟시경이었는데 한길에 이렇게 사람이 없을까 싶을 정도이고 흔한 개 한마리 안 보였어요. 이따금씩 승용차 한대가 지나갈 뿐이고, 동네 전체가 도무지 차락차락 가라앉아 있지 뭡니까. 통일되고 13년이 지났으나 그때의 뜨거웠던 열기는 못되더라도 그런대로 사람들이 모두 신명나 있고 온통 활기차 있을 줄로 알았는데, 그런 건 아직도 분단을 겪고 있는 우리 쪽의 되잖은 선입견이지 실제로 사람살이라는 것은 본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싶어지기도 하더라구요. 통일? 그런 것은 잠깐의 흥분이지 결국은 금방 그냥저냥 본래의 사람살이로 돌아왔구나, 그렇게 고압적인 권력의 굴레에서 모처럼 벗어나 본래의 사람살이로 돌아와본즉슨 남매간에 저런 일이나 터지고 죄다 매가리들이 없이 자질구레한 일상에 몽땅 휘감겨버려 있구나 싶어지기도 하더라구요.

우리는 그렇게 30분 정도나 얼쩡거리며 무슨 방법이 없겠는지 궁리를 해보았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지요. 그러고 있는데 마침 고만고만하게 단층집으로 지은 길 건너 집에서 시장용 그물바구니 하나를 든 오십대 주부 한분이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금방 물에 빠진 사람이 볏짚이라도 잡듯이 그 주부에게 다가갔지요. 그 여인네도 매일 그날이 그날로 심심산천이었는데 이게 웬 횡재냐는 듯이 되레 신바람을 내며 묻지 않는 소리까지 와장창 털어놓더라구요.

한데 이건 또 웬 떡입니까. 바로 티토 시절에 유고슬라비아로 묶여 있다가 작금에 세르비아, 크로아티아로 찢어져서 아웅다웅 내전까지 겪어 전세계 언론의 이목을 모았던 바로 그 크로아티아 여인이에요. 그러니까 지난 2차대전 때는 히틀러 독일의 나찌스 쪽에 붙어 있던 지역이지요. 1945년 이후 티토 치하에는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로 엉성하게 봉합되어 있다가 티토 죽고 나서 그 봉합이 가로세로 찢어지며 생난리를 겪고 있는 나라 여인이 또 어쩌다가 이 머나먼 북쪽 베를린까지 흘러왔을까, 궁금할밖에요.

남편은 바로 크로아티아와 서로 앙숙으로 아웅다웅 내전까지 벌인 세르비아 사람이더라구요. 30년 전 열일곱살에 이쪽으로 흘러왔노라니까 70년대였겠지요. 그때 남편 쪽 부모님들은 왜 하필이면 크로아티아 여자냐고 길길이 뛰며 결혼을 반대했는데, 본인들은 열애 끝에 결혼까지 골인했다나요. 한데 3년 전에 이혼을 했다는군요. 내전이 터진 영향도 없지는 않았지만, 남편이라는 사람이 중년을 넘어서면서 술에 마약에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되어 자기로선 더이상 감당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지금은 독일땅 어디에 살아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오직 무소식을 희소식으로 알고 살아간다는 소리를 하면서도 여자가 아주아주 양명하고 싱싱한 것이 이쪽 기분까지 살려놓더라구요. 아이 둘은 자기가 맡아 이럭저럭 먹으며 말며 살아간다며 한바탕 또 큰 소리로 웃는 거예요.

이러니 이쪽에서 궁금한 것은 아예 물어볼 틈조차 안 주더라구요. 겨우 틈을 보아 복잡한 소리는 빼고, 우리가 목표로 왔던 그 집을 턱으로 가리키며 저 집 쥔은 뭣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잠시 머엉하게 그 집을 쳐다보고는, 저 집은 육십대 부부가 단출하게 살고 있는데 이웃간에 전혀 상종을 않으며 그 옆집하고만 가까이 오며 가며 살 뿐 동네행사에도 얼굴 한번 안 비춘다고 하면서, 동독 치하 때는 부부가 제각기 체제 쪽에 붙어서 한자리씩 한 사람들이라고 언젠가 풍편으로 들었노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러면 저들이 지금에 와서까지 그 시절을 그리워하겠느냐고 한마디 덧붙이곤, 그런데 머나먼 한국에서 오셨다는 댁들이 저이네에 대해 그토록 관심을 갖는 것은 대체 무슨 이유냐고 거꾸로 물어와서 그냥 어물어물 적당히 둘러댔지요. 이번에는 비록 만나는 데 실패하고 돌아가더라도 혹여 다음 기회가 또 있을는지 모르니, 그때 가서 제대로 취재를 하기 위해서도 저이네가 우리에게 이번 일로 유한(遺恨)을 품도록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실제로 기괴하다면 기괴하기 짝이 없는 이 남매의 문제는 촌각을 다투는 성질도 아니고, 머나먼 한국의 한 작가로서 두고두고 대어들어볼 수도 있는 문학소재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씁쓸한 감회 섞어 발길을 돌렸지만, 이 심정은 비단 그 남매의 문제에 접근하지 못해서만은 아니었지요. 우리 앞에 잠깐 튀어나와주었던 그 크로아티아 아줌마가 단숨에 쏟아낸 사연들도 만만치 않게 깊이 가슴속으로 안겨들었습니다. 바야흐로 21세기에 들어선 우리 인류세계는 개개적으로 바로 이런 모습임을 아주아주 약여하게 보여주는 대목이었으니까요. 글로벌리즘이다 뭐다, 한쪽에서는 장구 치고 북을 쳐대고 있지만, 소련제국과 동구권 공산체제가 무너진 뒤 일극체제로 들어선 현금, 각 지역 단위로, 민족 단위로, 혹은 개인 단위로 벌어지는 국면들은 곳곳에 이렇게 괴이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싶어지더라구요. 그리하여 모든 문제는, 사람의 문제로 귀일되는 것 같기도 하더군요. 어디 어느 때를 불문하고 사람이라는 것이야말로 영원히 알 듯 알 듯 싶으면서도 끝내는 영원히 몰라지는 것인가보아요.

앞에서 통일독일의 첫인상을 ‘수준’으로 들이댔지요. 한데 통일 뒤 13년이 지난 그 깊은 속을 들여다본즉슨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더라구요. 물론 개괄적으로 제각기 그 나라 사람살이의 ‘수준’은 있겠습지요만, 독일사람 한사람 한사람을 접해볼수록 또 천갈래 만갈래더라구요. 간단히 한 수준으로만 묶이지가 않더라구요. 말하자면 개개적으로는 엄청나게 차이가 나 각자의 운명으로밖에, 흔한 팔자타령으로밖에 접근할 수가 없더라구요. 바로 이래서 제대로 된 정치라는 것은 가도 가도 어려운 것인가보아요.

예를 들어 통일되기 전의 동독 국가보안성은 ‘국가 속의 국가’로 불렸을 정도로 그물로 덮어씌우듯 국가 전체를 속속들이 뒤덮었다는 거지요. 이 비밀경찰의 활동은 8만5천명의 스태프와 10만9천명의 협력자로 이뤄졌다는군요. 90만명이 살고 있는 로스토크 시에는 비밀경찰로 3천명 이상의 종사자가 실제로 있었다고 해요. 지금도 구 국가보안성 본부, 노동운동사연구소 등에는 물경 160킬로미터에 이르는 비밀문서가 보관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문서에는 구동독의 약 1천만명과 구서독 8백만명의 개인기록이 보관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밖에도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문서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는 겁니다. 도대체 이런 짓이 정치라는 이름으로 버젓하게 행해졌다니 말이 되겠습니까.

이제 통일이 됐으면 지난날의 그런 찌꺼기, 쓰레기 들은 깨끗이 없애버리는 것이 제대로 된 일이지, 그런 것을 새삼 드러내서 저 아홉살 터울의 오륙십대 남매에서 보듯 가정파탄까지 일으키는 게 과연 제대로 된 처사이겠습니까. 만사를 투명하게 하는 것도 좋고 인권도 뭐도 다 좋지만, 그래도 가릴 만한 것은 가려두고 폐기처분할 만한 것은 버려버리는 것이 온당한 처사가 아니겠는지요.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당시 독일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화제가 된, 옛 동독정권이 극비리에 운영했다던 ‘살인면허부대’의 조직적인 살인행각 같은 끔찍한 죄상은 그냥 감추어둘 수만은 없었겠지요. 독일 연방범죄수사국은 지난 10월 22일 청부살해 혐의로 체포된 위르겐 G라는 자가 옛 동독의 재무장관인 지크프리트 뵘 부부를 1980년에 살해한 것을 비롯, 25차례의 살인범죄에 가담했던 사실을 밝혀냈다고 하더군요. 그 당시 뵘 장관은 불법적인 금융거래에 관여하던 동독 공산당 지도부를 비난하면서 동독정권의 핵심인물들과 심한 마찰을 빚고 있었다나요. 동독 비밀경찰 총수였던 에리히 밀케와 스파이 부대장이었던 마르쿠스 볼프의 직접 지시에 따라 움직인 그 살인청부 부대는 이번에 체포된 G를 포함, 3명씩 2개 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더군요. 당연히 이런 사실들은 13년이 아니라 30년이 지나더라도 응당 밝혀져서 후세에 경종을 울려야 하겠지만 말이지요. 아무튼 그런 짓까지 벌인 동독정권이었으니 끝내 패망의 길로 들어섰을밖에요.

하지만 통일 뒤 13년이 지난 동독, 특히 동베를린의 모습을 보면 일말의 감회도 없지 않더군요. 잘 구획된 거리며 웅장하고 고색창연한 건물들만 보아서는 매우매우 육중해 보입디다. 저 1870년대나 1920,30년대의 비스마르크 시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분위기까지 겨드랑이 속으로 감겨오듯이 감득이 되는 느낌이더란 말입니다. 단적인 예로 전철역도 로자 룩셈부르크 역과 카를 리프크네히트 역이 나란히 있어, 저 옛날 30년대 베를린 거리에서 정치테러에 의해 생으로 죽임을 당했던 자취가 저 같은 사람에게는 일말의 애틋한 감회도 맛보게 하더라는 말입니다. 한데 며칠 묵으며 실제로 겪어본즉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사람들 모습이 황폐해 보이는 게 아닙니까. 저 옛날의 그 활기나 첨예한 문제의식 같은 것, 생기에 넘친 분위기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더라, 그것이에요. 동독이, 동베를린이 어쩌다가 이 지경으로 황량해졌을까 하고 저 같은 사람은 조금 마음이 서늘해지는 느낌이더라구요.

우리가 묵었던 민박집 잡화가게 앞에도 꾀죄죄한 차림의 늙은 사내며 젊은 사내, 비슷하게 꾸정꾸정해 보이는 여인네가 한데 어울려 대낮부터 싸구려 맥주 마시는 것을 매일같이 볼 수 있었는데,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드먼요. 옷차림이며 생긴 것이 허구한 날 빌빌거리는 실업자들로 보였는데, 아무튼 그렇게 매일 싸구려 맥주일망정 마실 수 있는 돈은 어디서 마련하는지 모르겠더라구요. 대체로 사람들이 선량해보이고 표준적인 서방세계 사람들처럼 발랑 까지거나 되바라져 보이지는 않고, 조금 촌스럽고 어리무던해 보입디다. 하루하루 사는 데 이렇다 할 의욕도 없어 보이고, 그냥저냥 하루하루 시간 꺼나가는 것이 지겹다 못해 그저 단순히 소일하는 데만 익숙하고 그런 삶에만 자족하는 듯이도 보이더라구요.

어느 누구를 붙들고 물어보아도 대답은 한결같아요. 현 통일정부 행정당국에 대해 그런저런 불만들이 많은가보더라구요. 주로 더 베풀어달라, 자기들 쪽에 더 돈을 달라는 모양인데, 구서독 사람들로서도 그렇지요, 달라는 대로 주기만 하다가는 끝이 없다는 거예요. 자기들대로 앞으로 잘살 길을 뚫어낼 엄두를 내야지, 그냥 달라는 대로 퍼주기만 하면 버릇만 잘못 들인다는 생각들이지요. 듣고 본즉 정말 그렇겠더라구요.

동독 공산치하에서 살던 사람들을 두고 비아냥거리는 우스갯소리 하나가 있어요. 그쪽에서 사는 데 길들여진 사람은, 가령 화단에 매일 물 주는 일을 생업으로 맡고 있다면, 억수로 비가 오는 날에도 물 주어야 할 시각이 되면 우의를 쓰고 나가서라도 물뿌리개로 물을 주어야 한다나요. 설마 정말로 그랬기야 할까만은, 그쪽 공산체제에서 상부 명령대로만 사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정말로 그럴 수도 있겠더라구요.

그리하여, 행정당국에 대해 그 정도로 불만이 많으면 아예 옛날 동독시절로 돌아갔으면 하고 원하지는 않느냐고 들이대면, 이 점에 대해서만은 백이면 백 죄다 즉각 머리를 가로 흔든다는 말입니다. 이 점에서는 거의 예외가 없더라구요. 강권체제에서 풀려나고 각자가 일단 평상(平常)의 사람살이로 돌아온 것만은 대견스러워하면서도 자기 삶을 틀어잡고 대어드는 자세는 도무지 화끈하지가 않고 매가리들이 없어요.

1989년 9월 라이프찌히에서 첫 데모가 터지던 때는 전혀 이렇지가 않았는데 어쩌다가 사람들이 죄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하고 여간만 의아해지는 것이 아니었어요. 이 사람들을 보면서 저는 저대로 14년 전 그때,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정도로 화끈하게 대어들던 이 사람들을 혼자서 가만가만 반추해보지 않을 수가 없더라니까요.

1989년 9월부터 동독 시민들은 데모 행진에 나서면서 자기들 의지를 처음으로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거리나 광장에서의 토론에서 정치개혁 주장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이를테면 ‘데모 민주주의’ ‘거리 민주주의’가 등장을 하고, 바로 이 ‘데모 민주주의’의 성장과 함께 동독체제는 위협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해 9월 4일 베를린 다음으로 큰 도시인 라이프찌히의 니콜라이 교회 앞에서 시민들은 “서방으로의 대량탈출이 아니라 여행의 자유”를 요구합니다만, 6일 뒤인 10일에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해 사흘 동안에 동독인 1만5천명이 이곳을 통해 서독으로 내뺍니다. 그뒤 10월 1일 동독 피난민들은 동독을 경유하는 열차로 대량 출국을 시작합니다. 이튿날 10월 2일 라이프찌히에서 대규모 데모가 벌어지는데 이때의 슬로건은 “우리는 이곳을 떠나겠다”에서 “우리는 이곳을 지켜내겠다”로 바뀝니다. 그러나 이틀 뒤인 4일에는 동독을 경유하는 열차로 피난민들의 대량 출국이 다시 이어집니다. 다시 그 사흘 뒤 7일에는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식에서 소련의 고르바초프를 맞아 동독 당 우두머리 호네커가 연설을 합니다. 이때 고르바초프는 “늦으면 인생에서 벌을 받는다”라고 완곡하게 정치개혁을 촉구합니다. 같은 날 개혁을 요구하는 동베를린 시민의 데모는 경찰 등 치안부대에 의해 강제로 해산됩니다. 이튿날 8일에는 동독 제3의 도시로 일컬어지는 드레스덴에서 데모가 터지고 다시 그 이튿날 바로 1989년 10월 9일에는 라이프찌히 환상(環狀)도로에 목숨을 건 시민들 7만명이 운집하게 됩니다. 이때의 슬로건은 어느새 “우리들은 주권자인 국민이다. 비폭력”으로 바뀌어집니다. 그리고 그 1주일 뒤 10월 16일에는 1953년 6월 17일의 ‘인민봉기’ 이후 최대의 항의데모가 여러 곳에서 행해지며 라이프찌히 시에서만도 12만명이 떨쳐일어납니다. 이어 18일에는 호네커가 건강을 이유로 물러나고, 23일에는 라이프찌히에서 동독 역사상 최대인파라는 30만명이 드디어 자유선거를 요구하며 나섭니다. 그리고 11월 4일에 이르면 동베를린에서 약 100만명이 출판·언론·집회의 자유와 자유선거를 요구하며 나섭니다. 이렇게 동독 역사상 최대인파를 다시 갱신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그해 11월 9일에는 끝내 베를린의 벽이 헐리게까지 되는 겁니다. 도대체 그때의 그 영웅적이었던 동베를린 시민들은 지금 죄다 어디로 증발했단 말입니까. 어디로들 갔단 말입니까.

구서독이나 구동독을 막론하고 통일 뒤 오늘의 독일 표정을 단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독일통일이라는 것이 구경(究竟)적으로는 오늘을 살아가는 저런 모습으로 귀일되더라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끝내 심오하면서도 그지없이 범상하더라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본래의 사람살이 그것으로 되돌아온 모습이었어요.

바로 이 점은 동독 처녀 하나를 만나면서도 새삼 느낀 점입니다. 스물다섯살이라고 했으니까 그때 통일의 소용돌이를 열두살의 나이로 겪었던 셈이지요. 목사 딸이었어요. 할아버지도 목사였다니까 신교 쪽의 목사 집안인가보아요. 아주아주 선량한 아가씨였어요. 대학원에서는 철학과를 나왔지만 간호사 시험을 치르기 위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는데, 베를린 교외의 한 병원에 보조간호사로 나가고 있노라면서 친구 하나와 자취를 하고 있다더군요. 금방 이사를 해 방이 어수선하다면서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우리가 간절하게 청하자 순순히 인터뷰에 응하여 전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고 그 먼 베를린 교외의 자기 자취방까지 안내를 하더군요. 아버지는 북쪽 뮌스터의 교회 목사라나요. 그 아버지는 동독체제 밑에서도 그 교회 목사로 계셨는데, 자기는 원체 어렸기 때문에 잘은 모르지만 당국의 감시는 노상 받았으나 나름대로 눈에 띄게 미움 살 일은 안했던 것 같다고 하더군요. 저 라이프찌히 데모 때는 어디에 계셨느냐니까, 그야 뮌스터에 계셨지만 아버지는 일반신자들 이상으로 데모에 열을 내지는 않았던 것 같다나요. 그렇게 그녀는 그쪽 초등학교 때의 교과서도 꺼내 보여주었는데 시종 담담하더라구요. 딱히 집어서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녀의 언행에서는 13년 전 동독체제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것은 전혀 안 보이더라구요. 목회를 하는 아버지나 자기는 옛날 체제 밑에서도 그럭저럭 살아낼 자신이 있었다는 식이었어요. 아주아주 선량한 그녀 성품으로 미루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겠다는 생각도 들고, 나름대로 이해도 되더라구요. 원체 어린 나이로 그쪽 체제를 겪어서도 그렇긴 하겠지만, 체제다 뭐다, 좌다 우다, 진보다 보수다 하고 왜 이리 야단법석들인지 자기는 도통 모르겠노라는 반응이었으니까요. 그러면 옛날에는 원체 어려서 몰랐다고 하지만 지금은 철학과 대학원까지 나온 성인으로서 혹여 옛날 체제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느냐니까,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옛날 자기 어릴 적 그 체제를 죄다 헐뜯어대기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말의 저항을 느끼노라고 대답하는 데에는 차라리 내 쪽에서 조금 무안해지더라는 말입니다. 그렇구나, 이런 처녀아이도 있긴 있구나, 싶어지며 조금 숙연해지기까지 하더군요. 소위 동독체제라는 것이 무너지고 그렇게 강한 권력에서 놓여나 본래의 자연스러운 사람살이로 돌아왔을 적의 가장 표본적인 인간형 같은 것을 이 처녀아이에게서 보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모름지기 사람이라는 게 잡스러운 욕심들을 죄다 걷어낸 뒤의 모습은 마땅히 저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저는 한참 동안이나 골똘해졌지요.

그 다음날 렌트카로 베를린 남쪽 세 시간 거리 정도 되는 포츠담 근처의 농촌에서 한 농부를 만났을 때도 똑같은 것을 느꼈어요. 아시다시피 포츠담은 2차대전이 끝나기 직전 전후처리를 위해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 그리고 소련의 스딸린 등이 만나 회담했던 곳이고, 우리나라의 분단이 저들 강대국 몇몇 나라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그 현장이라서 저도 일말의 감회가 없지는 않더군요. 5,6층쯤 되는 백색 건물들이 가지런히 서 있는 모습이며, 널찍널찍한 큰길이며, 차락차락 가라앉은 것이 옛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겠구나 싶더라구요. 그때 그이들은 이미 죄다 저승으로 가버렸지만, 그이들이 살아생전에 서로 이마를 맞대고 흥정하듯이 지도 위에다가 38도선이라는 것을 경계선으로 획정해 우리나라의 분단이 생겨났구나 싶으니까, 저도 모르게 지그시 아래위 입술을 힘주어 다물며 울컥 울분 같은 것이 솟구칩디다만, 지금에 와서 그런 걸 혼자서 곱씹어본들 내 입술이나 아팠지 부질없는 짓이 아니겠습니까요.

암튼 그 포츠담 교외의 농촌을 이러저리 훑다가 아 여기다! 싶은 한 농가와 직통으로 마주쳤어요. 그러니까 우리 평수로는 만평 정도 될까요, 그런 농지에다 가지가지 작물들을 심었는데, 마침 늙은 부부가 감자를 캐고 있더라구요. 그 곁에는 큰 셰퍼드 한마리가 있는데 보기와는 달리 아주 양순한 개더군요. 우리를 보고도 전혀 짖지를 않고 조금 흥분한 듯이 밭 속을 냅다 왔다리 갔다리 달리는 거예요. 밭 울타리 가로는 적당히 칸막이를 하고 닭들을 기르는데 그 닭들만 낯선 우리를 보고 꼬꼬댁거리며 야단들이구요. 저는 개라는 것은 대개 그 집 쥔을 닮는다는, 어릴 때 시골서 얻어들은 소리를 혼자서 반추하며 요행이라는 생각 섞어 울타리 너머로 쥔장에게 알은체를 했지요. 쥔은 즉각 저편으로 돌아서 밭 안으로 들어오라는 거예요. 들어갔지요.

대강 인사를 여쭈며 한국에서 왔노라고 하니까, 남쪽 한국이냐 북쪽 한국이냐고 되묻습디다. 남쪽 서울에서 왔다니까, 당연히 그럴 테지 하는 표정으로 비시시 웃는데, 역시 그지없이 선량한 농민이더라구요. 어제 그 스물다섯살 먹은 처녀아이를 만났을 때도 초장에 느꼈지만, 구동독 쪽 사람들에게서 대강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이것이 대체 뭘까? 저는 일순 이런 생각을 혼자서 조금 했어요. 이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 서방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거개가 너무너무 발랑 까지거나 영악스럽지 않을까 싶더라구요. 물론 사람 나름이기는 할 터이지만, 이 점에는 조금 깊이 천착해볼 만한 중요한 어떤 것이 분명히 도사리고 있을 것 같더라구요. 하지만 당장 이 자리에서 그런 것만 골똘하게 생각할 수는 없겠고, 저는 궁금한 것부터 대강 물었지요. 예순여덟살로 저보다 네살 아래더라구요. 그이 쪽에서는 비시시 웃으며 그러냐, 나이치고는 배도 안 나오고 날씬해 보인다라고 치하부터 해주더군요. 그래서 내가 그이 아랫배를 툭 치며 늘 농사일을 할 터인데 어찌 그렇게 아랫배가 나왔느냐니까, 이게 맥주살이다, 우리 독일맥주가 원래 유명하지 않느냐고 너스레 떠는 것이 사람이 무척이나 편하고 좋아 보이더라구요. 사실 처음 만나 인사를 트자마자 상대의 아랫배를 툭 치는 것은 매우 실례되는 행태일 터인데, 그이는 전혀 그런 쪽으로 자존심을 챙긴다든지 그러지 않더라구요. 그렇게 외모도, 마음씨도 순종 독일의 농민입디다. 이러고 나서 그이는 저켠에서 감자를 캐고 있는 부인을 부르더군요.

그 부부는 본시 1944년 미·영 등 연합군에 독일이 패망한 직후 폴란드에서 이쪽으로 나온 사람들이더라구요. 그러냐 하고 저는 반색을 하며, 나도 2차대전 전후처리의 일환으로 우리나라가 분단이 되고 나서 북에서 남쪽으로 나온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만리 넘어 떨어져 살망정 피차에 피장파장이니 이제부터는 나를 형님으로 모셔라고 했더니, 그이도 순순하게 그러겠노라며 악수를 청해와서 한바탕 또 두손을 마주잡고 육칠십 노인들답지 않게 요란하게 어깨까지 위아래로 흔들어댔지요.

부인은 폴란드에 살 때는 큰 지주였다나보아요. 전후처리로 죄다 내버리고 몸만 달랑 빠져나왔다고 해요. 저도 어릴 때 북한의 농가에서 자랐는데 큰 지주는 아니었지만 소위 토지개혁 때 댁네들처럼 당했노라고 하자, 악수를 하자고 대어들지는 않았지만 부인도 반색을 합디다. 남편 쪽이 조금 주책기가 있는 데 반해 부인 쪽은 첫인상부터 훨씬 품격이 있드먼요.

딸 둘에 아들 하나가 있는데, 아들은 베를린의 모 일본 전자회사의 직원으로 있으면서 나가서 살고, 자기들은 큰딸네와 한데 같이 살고 있다나요. 큰딸은 학교 선생이고 사위도 회사를 다니는데 큰손자가 대학생으로 그 밑으로 셋이 쪼르르 있구요. 손자들하고 사는 재미가 그럭저럭 쏠쏠해서 좋고, 다만 작은딸은 한번 결혼했다가 금방 이혼을 하고는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니며 사는지, 이따금 가뭄에 콩 나듯이 집에 얼굴을 비추기도 하지만 근황을 꼬치꼬치 캐어묻지는 않는다고, 캐어물은들 어쩔 것이냐고, 산다는 게 이렇게 각자 생긴 대로 타고난 팔자대로 사는 게 아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런 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 사람이 헤겔, 칸트, 맑스 등 대철학가들이 즐비한 독일사람인지, 아직도 샤머니즘이 판을 치는 우리네 동양사람인지 조금 알쏭달쏭해지기까지 하더군요.

“그래 그건 그렇고, 혼자서 이 많은 농사를 감당하자면 만만치가 않을 것인데, 대강 견딜 만은 하냐, 농사짓는 재미는 괜찮으냐?”

하고 내가 묻자 그이는 대번에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었습니다.

“재미는 무슨 놈의 재미. 옛날 그때는 농사짓기도 그럭저럭 괜찮았어요. 우선 잔신경을 안 써도 됐으니까요. 생산물을 당국이 몽땅 사갔으니 아주아주 편했지요. 한데 요즘 농산물 가격이라는 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외국농산물들이 싼 가격으로 들어오니 당최 못해먹겠어요. 정말 때론 화가 난다니까요. 원, 이럴 수가 있는가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저 심심풀이로 하면 모를까, 농사에만 목줄을 매달았다가는 굶어죽기 딱 알맞지요.”

“그러니까 지금은 심심풀이로 농사를 짓는다는 이야긴가요?”

“완전히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그렇지 않다고 하기도 조금 뭣하네요.”

“그러니까 먹고사는 것은, 다시 말해서 주업은 농사가 아니라는……”

“글쎄, 딱 그렇다고 말하기는 대단히 힘든데 말임다. 사실 먹고사는 것은 딱히 이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저것도 아니고,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이 서쪽체제라는 게 그럭저럭 굶지는 않게 되어 있는가보아요. 실제로 우리가 먹고사는 주업은, 딱 부러지게 현금 위주로 말하자면, 딸과 사위가 받아오는 봉급이 되겠지요. 그거야말로 가장 확실한 우리집 수입이니까.”

“그렇다면 솔직히 말해보오. 그 옛날 그 체제 밑에서도 농사지은 당신으로서는 차라리 지금보다는 옛날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없습니까?”

하자, 그이는 대번에 펄쩍 뛰며 어쩌다가 이야기가 또 거기까지 이르게 되었느냐는 듯이 머리를 설레설레 가로저으며 금방 혐오의 표정까지 드러내더군요.

“천만의 말씀, 그건 안되지요. 옛날 그때요, 그건 말 그대로 바보천치의 삶이었어요. 모두가 깡그리 바보로 살았다니까요.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어찌 그 정도로 모르고도 살 수가 있었는지, 요즘은 때로 의아해질 때가 있어요. 완전히 캄캄했으니까요. 그 시절로 돌아간다? 그건 말도 안되지요. 안되구말구요.”

그밖에 참, 우리가 일주일 넘게 묵었던 그 민박집 아줌마 이야기가 빠져 있군요. 훤칠한 키의 사십대 미인이었어요. 아주 젊어 보이고 남자들깨나 녹여냈을 듯하게 첫눈에도 끼가 있어 보이는 여인이었지요. 앞에서 말한 그 복덕방을 통해 알선을 받았는데 복덕방비가 5유로였던가 3유로였던가, 매우 쌌어요. 그녀는 첫눈에 보기에도 그랬지만 이혼녀였어요. 역시 그랬구나 싶었지요. 연애결혼을 했더라구요. 그것도 열일곱살엔가, 옛날 그 동독시절에. 사람살이의 그런 면은, 그 동독 강권으로서도 막아낼 길은 없었던가보지요. 우리 용어로 도화(桃花)살을 타고 났으면 그걸 당자가 어떤 식으로든 풀어내야 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체제를 가리지 않고 대동소이 하나보아요. 아들 하나 낳고 금방 이혼을 했더라구요. 남편은 같이 살면서 보니 개망나니더래요. 일찌감치 서쪽으로 내뺐는데, 통일된 지금 죽었는지 살았는지 통 소식을 모른다나요.

그 아들은 자신이 맡아 기르고 있는데 세월 가는 것이 지나고 보면 눈 깜짝할 사이여서 어언 스물다섯살이라나보아요. 제 아비를 빼닮아서 반은 날건달이고 축구에 미쳐 있으며, 본인 말은 통계학을 전공한다고 하지만 실은 회계사 면허를 따려고 학원엘 다니고 있다더군요. 가게문을 닫은 후 남쪽 교외 끝의 아줌마 살림집엘 가보았는데 밤이 늦었는데도 아들은 아직 안 들어와 있고, 3층 아파트는 오순도순한 가정집이라기보다는 그 무슨 우중충한 술집 분위기더라구요. 사는 집이 분위기로 느껴지던 이 여편네 팔자와 어쩌면 그렇게도 비슷하던지요.

그러고 보니까 그녀의 주업은 잡화가게 경영이었어요. 우리가 묵고 있던 그 5층빌딩의 맨 아래층을 세내어서 뒷방은 복덕방을 통해 그때그때 민박 손님을 받고, 한 길가에다가는 잡화상을 차려서 술이며 뭐며 잡동사니를 팔고 있더라구요. 그러니까 그 후줄그레한 사람들이 노상 떠들썩하게 마시던 그 싸구려 맥주도 이 가게에서 파는 것이더라구요. 하지만 언제 한번인들 그녀가 그 패거리에 섞여서 같이 마시는 것은 보질 못했어요. 술은 팔면서도 그 패거리들을 내심으로 경멸하고 있는 것이 훤히 보이더라구요.

그 방에 묵고 있는 동안 대낮에 그 가게에도 두어 번 드나들었는데, 여남은살 아래 연하의 남자와 동업을 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남자는 주로 도매상에서 물건을 떼오는 등속의 일을 하는 것 같았어요. 대강 그러저러하게 서로 딴 재미도 보는 사이라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더라구요. 결혼상대냐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무엇 때문에 결혼 같은 것을 하냐고, 더이상 말을 붙일 수가 없게 딱 잘라매더군요.

한데 친정아버지는 동독시절에 행정관서들이 있는 근처에서, 우리식으로 말한다면 영빈관 지배인을 오랫동안 하다가 정권이 무너진 뒤에는 거의 칩거하고 있다더군요. 도통 나다니지를 않는가보아요. 달이면 두어 번씩 들여다보긴 하는데 부녀간에도 별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는군요. 딱히 서로 할 말도 없는데 어거지로 무슨 말을 나눈다는 것도 피곤한 일이 아니냐고, 사십대 아줌마답지 않게 제법 도통한 소리도 하더라구요. 제가 슬그머니 물었지요.

“한때는 사는 재미가 꽤 있었을 터인데, 아버지께서는 내심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녀는 즉각 받더군요.

“잘은 모르지만 그야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걸 아무에게나 드러내놓고 표시야 할라구요, 지금이 어느 땐데. 자칫 몰매나 맞기 쉽지.”

“당신은 어때요? 그래도 한창 자랄 때 아버지가 그런 자리에 있었으니 나름대로 호강을 누렸을 텐데.”

“그러긴 했겠죠. 그러니까 화끈한 연애도 해보고 그랬겠죠만……”

“그랬겠죠만? 어떻다는 거죠? 뒷얘기는 왜 하려다가 멈추지요?”

“다아 덧없는 거죠 뭐. 화끈한 연애도 해보고, 오죽하면 열일곱살에 결혼까지 했을라구요. 한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끝내는 요 모양 요 꼴이 아닙니까요. 하지만 옛날 그 체제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혼자서 은밀히 그리워할 테고, 지금 이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놓고 좋아하는 게고, 다아 제각각이 아니겠어요. 사는 형편, 살아온 형편만큼 제가끔일 테고 다르겠죠 뭐.”

그렇습니다. 이 아줌마가 비록 아무렇게나 던진 한마디지만, 바로 동독체제 속을 살아냈던 사람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 어떤 핵심을 찌른 것처럼 여겨져, 저는 혼자서 잠시 가만가만 그 말을 반추해보았습니다. 옛날 그 체제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혼자서 은밀히 그리워할 테고, 지금 이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놓고 좋아하는 게고, 다 제각각이 아니겠느냐……

물론 그 점은 틀림없이 그래 보이지만, 포츠담 근처의 농촌에서 만난 일흔살 가까운 농민 부부와, 스물다섯살밖에 안된 대학원을 갓 나온 목사 딸이라는 처녀아이와, 그리고 일주일간 묵었던 민박집의 사십대 아줌마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진 구동독 사람들의 중요한 어느 한 면이 시종 마음 한구석에 두루뭉술한 어떤 것으로 끈질기게 남아 있었는데, 이것들은 서울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마음속에서 서서히 하나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며 일정한 윤곽으로 자리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셋을 관통하고 있는 것, 그것은 옛날 동독시절 저들 삶에 대한 전폭적인 거부, 일도양단식 부정만이 아니라, 그 시절 자신에 대한 따뜻한 연민의 감정, 그 어떤 어루만짐과 완화 같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 대목은 흔한 말 몇마디로는 해내기가 무척 어렵습니다만, 불교 용어로 원융(圓融)이거나 융통무애(融通無碍) 같은 것이 되지는 않을는지요.

그 목사 딸이라는 처녀아이에게서 생생하게 보이며 자연스럽게 전해져오던 바로 그것, 그것은 참으로 귀한 어떤 것이었습니다. 체제다, 이념이다, 또 뭐다 하는 것들을 일거에 훌쩍 넘어서서 그 뭐랄까요, 자기 자신의 어릴 적 여남은살까지의 삶과 그 당대까지를 포함해 따뜻하게 아끼며 보듬는, 어루만지는 자세랄까요. 그것은 그 아이가 철학과 대학원을 나와서가 아니라, 그전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더 본원적인 삶의 지혜 같은 것으로 저에게는 깊이 다가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이 나라 사람들의 ‘수준’ 같은 것으로도 보였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그 아이의 아버지는 저 북쪽 뮌스터에서 교회 목사이고, 할아버지며 증조 할아버지며 그 윗대들도 줄줄이 목회에 종사했다던가요, 그 점도 새삼스럽게 확인이 되는 느낌이더라구요.

실제로 그 목사 딸을 만난 날 저녁에는 마침 베를린에서 장기 상영되며 현지 사람들의 화제가 되고 있는 「굿바이 레닌」이라는 영화를 관람했는데요. 이 영화에서도 방금 거론한 문제와 깊이 상통하는 그 어떤 것을 저대로 감지하면서 묘한 감회를 맛보았습니다. 독일말을 못 알아듣는 저로서는 전체 영화의 진행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음에도 일단 화면에서 풍겨오는 따뜻한 맛은 감지되었는데요, 더러더러 서울에서 본 동구권 영화에서 대체로 맛보던 것이었습니다. 두 시간 정도 되는 그 영화를 끝까지 관람하니 폭력만이 난무하는 작금의 할리우드 영화들에 비해 질박하게 감겨오는 인간미가 느껴지더라구요. 영화관을 나와서 지난날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경계였던 알렉산더 광장에서 마침 휘영청하게 중천에 떠오른 열나흘 달을 올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큰숨이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통역자를 통해 전체 스토리의 윤곽을 들으면서 저는 새삼스럽게 화들짝 놀랐고, 방금 본 영화의 첫 장면부터 다시 생생하게 되떠올려보았습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바로 1989년의 그 첫 데모였어요. 그러니까 라이프찌히 시였는지 드레스덴 시였는지 혹은 당시의 동베를린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그거야 어디였건 별 상관은 없지만), 아무튼 데모에 나선 청년들을 경찰이 나서서 마구잡이로 경찰 트럭에다 싣는 장면이었는데, 바로 그때 우연히 그 옆 인도를 지나던 곱상하게 생긴 여인 하나가 자기 아들이 잡혀서 트럭에 실려가는 것을 보고 그 충격으로 한길에 쓰러집니다. 그 여인인즉 당시 동독의 열성당원으로 그 지역당의 요직에 있었던 사람이었어요. 결국 아들은 경찰서에서 그 여인의 친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져 쉽게 풀려나와요. 이렇게 시작되는 영화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여인과 데모에서 풀려나온 그 아들 그리고 딸 등의 자잘한 움직임이었어요. 그러니까 아시다시피 그때 바깥세상은 온통 야단법석이 아니었습니까요. 동독이라는 체제가 송두리째 뒤집어지는 판국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오누이는, 오로지 아슬아슬 위국은 넘겨 다시 살아났다곤 하지만 여전히 병원침대에 누워 있는 어머니가 또다시 충격을 받아 쓰러지지 않도록만 하는 데 신경을 쓰는 겁니다. 그렇게 바깥세상 돌아가는 실황을 병석의 어머니에게는 철저히 차단하는 데만 공력을 들이는 겁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두 자식들에게 끝까지 속은 채로 세상을 떠나는데, 다만 동·서독이 통일되었다는 것만은 알고서 이승을 마감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끝처리가 실로 묘했어요. 어머니는 실제 정황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줄곧 바라던 그런 쪽으로, 그러니까 동독이 서독에 먹히면서 통일이 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서독에서 혁명이 일어나 끝내 동독에 무릎을 꿇은 것으로요. 어떻습니까, 묘하지 않습니까요. 영화의 그 끝처리가 실제 현실 돌아가는 것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있고 황당했지만, 그 오누이의 어머니에 대한 성심만은 따뜻하게 다가오지 않습니까요.

저는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 수입될 때 꼭 일착으로 가서 제대로 볼 작정이었지만, 이 영화가 지금 동서 베를린을 통틀어 인기리에 몇달째 상영되고 있다는 것부터 조금 묘하지 않은가요. 그 점, 저로서는 무언지 기분이 흐뭇하더라구요. 공적(公的)으로 돌아가는 세상이 있듯이 사적(私的)으로 돌아가는 세상도 엄연히 있는 겁니다. 그 사사로운 영역까지 따뜻하게 보듬고 살리는 데서 사람사는 세상은 넉넉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요.

그렇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점은 그 스물다섯살 처녀아이, 포츠담 근처의 농촌에서 만났던 그 농민 부부, 그리고 우리가 며칠 동안 신세졌던 그 민박집 아줌마에게서 공통적으로 감도는 그 어떤 것이었습니다. 끝내는 사람살이에서 이런 것들이 참으로 귀한 것이 아니겠는지요.

끝으로 몇마디만 더 덧붙이자면, 독일 통일 13년이 지난 뒤의 현 동베를린을 며칠 동안 겉핥기식으로 흘낏 보아낸 그 총체적인 인상으로 말한다면, 기대했던 것에 비해 도무지 매가리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통일되던 무렵의 그 활기는 죄다 어디로 갔다는 말입니까. 너무너무 모두가 범상 속에만 송두리째 함몰되어 있어 보였습니다. 시장바구니를 들고 지나가는 저 아줌마나 큰 셰퍼드를 끌고 아침산책을 나온 저 할아버지나 점포에 앉아 멍하게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저 사람들 한사람 한사람을 찬찬히 보십시오. 얼마나 무심들 한가요. 그런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우리는 노상 통일, 통일 하며 너무 부황하게 큰 것들만 떠들고 있고 떠들어왔지 않은가 싶어지기조차 하더라구요.

실제로 독일 통일 13년 뒤의 동베를린 풍정(風情)에서 보이는 것들은 어이없을 만큼 평상(平常)의 사람살이로만 송두리째 가라앉아 있어 보인다는 말입니다. 애당초의 사람살이라는 것이 본시 저런 것이기는 할 터이지만, 저 1989년 드레스덴의 크로이츠 교회, 동베를린의 사마리아, 시온, 겟세마네 교회, 그리고 영웅도시라는 호칭까지 붙은 저 라이프찌히의 니콜라이 교회 등등에서의 열정과 열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정말로 어이가 없었지요.

대표적으로 한가지만 예로 든다면, 독일에는 전철 안이고 한길이고 개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천지로 널려 있다시피 많은데, 무섭게 생긴 우람한 셰퍼드가 특히 많아요. 전철 안에서 셰퍼드들은 거개가 입마개를 하고 있드먼요. 더러는 셰퍼드가 같은 전철칸에 탄 사람을 별안간에 물어 말썽을 일으키기도 하여, 개를 끌고 전철을 탈 때에는 개에게 입마개를 하도록 아예 법으로 정했는데, 바로 얼마 전에는 5천여명의 인파가 머리띠 어깨띠 등을 두르고 포츠담 광장에선가 데모를 했다더군요. 그들의 주장인즉, 내가 보기에는 참으로 희한꼴랑 하더라구요. 셰퍼드들의 그 입마개를 벗겨주자는 데모였어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견권(犬權), 개들도 제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 인권만 문제가 아니라 견권도 보장하라는 데모였다고 하질 않습니까. 그야말로 웃기는 이야기더군요. 하지만 저는 왠지 그냥 웃기만 할 수가 없더라구요. 저게 대체 뭣하는 짓들인가 싶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