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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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공지영 孔枝泳

1963년 서울 출생. 1988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소설집 『인간에 대한 예의』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장편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봉순이 언니』 등이 있음.

 

 

 

네게 강 같은 평화

베를린 사람들 2

 

 

1

 

테겔공항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안개처럼 가느다란 비였다. 그는 여행가방을 끌고 공항 대합실을 나왔다. 비둘기 가슴털처럼 옅은 회색빛 하늘이 낮은 건물들에까지 내려와 있었다. 습기찬 대기는 온화했고 서안해양성 기후 특유의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는 검은 외투를 습관처럼 여미며 담배를 물었다. 독일에는 와본 일이 있지만 베를린은 처음이었다. 독일의 수도를 대표하는 공항치고 테겔은 몹시 초라했다. 가난한 나라의 수도, 외국 비행기라고 해봐야 사흘에 한번 들어오는 그런 도시의 공항 같았다. 이 도시에 있는 세 개나 되는 국제공항은 2차대전 후 분할 점령당한 베를린의 역사를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는 듯했다. 수명은 아직 나와 있지 않았다. 그동안 독일에 와서도 굳이 베를린에 들르지 않았던 이유야 많았다. 베를린은 그가 취재차 들르던 프랑크푸르트나 뒤쎌도르프에서 멀었던 것이다. 베를린은 옛 동독지역에 섬처럼 떠 있는 땅…… 아니, 벌써 통일 후 십년이 넘어가니 그도 의미없는 이야기다. 그 베를린에는 사촌형 수명이 살고 있었다.

 

수명을 못 본 지 이십년이 되어간다. 그가 대학에 들어가던 해 수명이 베를린으로 떠났으니까. 당시 그에게 베를린은 얼마나 아득하고 환상적인 이름이었던가. 전혜린류의 뮌헨도 아니고 베를린이라니. 공산주의 동독에 떠 있는 섬, 굵직한 씨가를 물고 트렌치코트의 깃을 세운 중절모의 잘생긴 사내가 술집에 들어가 조용히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스파이 영화가 어울릴 것 같은 도시. 그런 베를린으로 떠난 수명은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군대에 갔다온 후 그는 대학을 졸업했고, 수명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임수경의 방북을 주선해준 그는 수배된 채 베를린에 체류하고 있었다. 수명의 아내인 형수는 이혼한 후 서울로 돌아왔고, 아들 소식에 충격받아 쓰러진 큰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셨다. 외아들 수명이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자 그가 대신 큰아버지의 영정을 들었다. 쓰러진 큰아버지를 살리려다 가세가 기울어 큰어머니는 전셋집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평생 큰집과 큰어머니에 열등감을 가지고 살았을 그의 어머니는 장례식 내내 묘한 표정을 지었는데 만일 거기에 슬픔이 있었다면 늙어가는 여자가 인생 자체와 죽음에 대해 느끼는 그런 보편적 감정이었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젊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C일보에 입사했다. 그 무렵 광화문과 명동 일대에는 젊은이들이 날마다 몸을 던져 붉은 꽃잎처럼 보도에 누웠다. 페퍼포그와 최루탄으로 희뿌예진 거리를 뚫고 그는 노(老)시인에게 가서 원고를 받아왔다. 한복차림의 노시인은 안성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원고를 건네는 순간 젊은 수습기자인 그를 피해 시선을 얼른 내리깔았다. 아니,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을 긋느라 고개를 돌렸던가. 그 글은 신문에 게재되었고, 시인의 글대로 ‘분신의 잔치’는 갑자기 우스꽝스러워져버렸다. 노시인의 원고를 넘겼을 때 데스크의 눈가에 번쩍이던 것…… 그는 그때 몸을 던지는 학생들이나 데스크에게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뭐랄까, 순교자가 되고 싶은 광신도의 열기 같은 것,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는 다분히 사무라이적인 잔인하고 장엄하며 단호한 어떤 것…… 그것은 이미 죽고 사는 걸 초월해 있었다.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 안되는지도 모른다. 스무살 무렵의 퍽도 어수룩한 젊은이들은 죽고, 순교자 후보들은 살아남아 성인품에 오르는 것이다. 이상(理想)에 제 몸을 바친 괜찮은 인간 하나가 한 나라의 경찰 전체를 먹여살리기도 한다고, 체 게바라를 두고 어떤 작가가 그랬던가. 2004년, 이제 한국의 경찰을 먹여살리는 것은 반도체다. 한국 경찰은 이제 너무나 친절해서 때로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한다는 것을 수명은 알까. 수명이 알고 있는 것은 80년대 초반의 한국일 터이다. 그건 지난 20세기의 일이다.

서른아홉, 그는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그는 호텔방에 투숙시킨 수습기자들에게 룸쌀롱 계집애들을 배치한 후 단호하게 새벽 세시 로비에 집합시키는 해병대 하사 같은 호기를 부리기도 했고, 출판사의 골프접대로 필드에 나갈 때는 매너가 좋았고, 자기 신문에 반감을 가진 문인들과는 적당한 유머와 낭만을 섞어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연휴에도 제주로 가는 비행기표를 구할 수 있었으며 명절기간이라도 새마을호 특실을 구할 수 있었다. 졸업식날 택시를 잡을 수도 없어 가족들과 함께 초라하게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던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큰아이의 유치원 졸업식날 신형 쏘나타에 가족을 태우고 스키장으로 향하는 그는 소위 잘나가는 특급신문의 문화부 차장대우였다.

그런데 로마출장 후 피렌쩨나 밀라노를 돌아보지 않고 왜 굳이 베를린으로 오려고 했는지 그는 스스로를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송두율 선생 주변을 좀 취재해볼게요…… 데스크에게는 그렇게 말했지만 이미 송두율도 없는 베를린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그의 머릿속에는 수명이 떠올랐다. 자신이 실은 오래전부터 베를린에 있는 수명을 만나고 싶어했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었다. 굳이 해명하려고 하지 마라, 연리와 합정동 한 낡은 모텔에 들던 날 불을 끄면서 그는 말했다. 그 단발머리 여자가 신문사로 처음 찾아왔을 때 왜 그녀를 데리고 나가 커피를 사주었는지 알지 못했던 것처럼, 그렇게…… 무언가를 해명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그는 늘 생각했다. 하늘은 왜 하필 파란색인지, 사과는 왜 아래로 낙하하는지 묻는 게 바보스러운 것처럼, 이미 체념을 포함하고 있는 물음을 그는 그친 지 오래었다. 왜라고 묻기보다는 잠 안 오는 밤 포르노를 보며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편이 건강에도 좋았다. 아니, 만보기를 허리춤에 차고 걷는 편이 새벽 발기를 원활하게 할 것이다.

 

“최, 영명, 기자?”

누군가 다가와 물었다. 그러고는 최영명 기자라고 말한 것이 쑥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활짝 펴고 웃었다. 누군가라고 한 것은, 그가 알던 사람과는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물이 적당히 빠진 청바지 차림에 낡은 갈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 사람은 유학을 떠나기 전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귀 뒤로 한줌의 흰머리가 있고, 약간 건조한 듯한 얼굴, 웃음 끝에는 잔주름이 입가에 선명했지만, 뭐랄까 냉동상태로 숙성이 정지된, 세월에 침식되지 않은 그런 모습이었다. 베를린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이라 해도 전혀 어색할 것 같지 않은 이 사람이 오십이 다 된 중년의 사촌형이란 말인가. 사촌형의 얼굴에는 수도승 같은 건조하고 맑은 기운이 있었다. 아마 나란히 서서 걸어간다면 십년이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구냐고 물어볼 것 같고, 재수가 없으면 그를 두고 선배냐고 할 것만 같았다. 그는 좀 작고 다부진 편인데 비해 수명은 키가 컸다. 그가 눈이 작고 얍삽해서 영리한 느낌이라면 수명은 검은 뿔테안경 속에 둥그런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사촌을 만나다니 촌스러운 짓을 했군, 이름 석자 중 두 글자가 같다고 해도 뭐 딱히 나눌 말도 없는 이 만남을 그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뒤져보면 베를린 교민 중에 동창놈도 두엇 있을 거고, 안면이 있는 타사 특파원에게 갈 수도 있었다.

둘은 비즈니스 파트너처럼 악수를 나누었다. 수명의 차는 낡은 오펠(Opel)이었다. 차는 신호에 걸려 정지하면 종종 시동이 꺼졌다. 수명이 싫어할까봐 말은 안했지만 차 안은 추웠다. 히터가 고장난 것일까. 주행거리계는 37만 킬로미터를 표시하고 있었다.

“한국담배 하나 드릴까요?”

그가 물었을 때 수명은 좋지, 하면서 담배를 받아들었다.

“통독 되고 많이 변했죠?”

그는 기자 경험으로 이렇게 어색한 자리를 어떻게 모면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뜻밖에도 수명은 웃었다. 입을 벙긋 벌리고 즐겁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미안해, 웃어서. 문득 어릴 때 생각이 나서……”

옆자리에 앉은 그는 약간 당황스러워져서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 놓으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어린시절을 떠올린다는 것은 형제간이거나 적어도 거기에 준한 우정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 어색한 만남에서 뜻밖에도 수명이 어린시절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회색빛이었다. 이제껏 와본 독일, 아니 유럽의 도시 중 가장 멋대가리 없었다. 1920년대에는 빠리와 견줄 만큼 화려했던 그 도시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외신 보니까 동베를린하고 서베를린이 아직도 소득격차가 많이 난다고 하던데, 동독지역 실업률도 심각하고 그래서 지난 선거에서는 동베를린 지역에서 공산당 후보가 당선되기도 했다던데요. 옛 동독지역에선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가 여전한가요? 아무래도 실업 때문이겠죠?”

수명은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면서 잠시 웃었다.

“사람 사는 거야 다 똑같지. 서베를린에서도 소득격차는 나니까. 한국에서 미국에서도 그렇듯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통계를 내느냐가 문제 아니겠어? 독일차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니듯이……”

수명은 자동차 시동을 다시 걸며 말했다. 그는 동의한다는 듯 잠시 수명을 따라 웃었지만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엔가 큰집 수명의 방에 들어갔을 때 수명이 이거 읽어볼래? 빠울루 프레이레 알아? 하며 책을 건네던 게 생각났다.

“도시가 영…… 서울 같아요. 뭐랄까, 독일 도시 같지 않고. 2차대전 때 하도 폭격을 맞아서 그런가요?”

그는 건조한 말투를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물었다. 연리와 처음 잠자리를 하고 출근하던 날 오후 그녀의 전화를 받으면서 그랬던 것처럼.

“그렇지. 그때 워낙 파괴되었으니까…… 그런데 베를린은 아주 묘한 도시야. 살수록 정이 떨어지지. 그런데 베를린 사람들은 다른 도시로 떠나지 못해. 다른 도시에 가면 견딜 수 없어하고 다시 돌아오거든…… 다른 도시에는 없는 어떤 게 여기엔 있어.”

“살수록 정이 떨어지는데 떠나지는 못한다…… 그게 어떤 건데요?”

“글쎄…… 그게 뭔지 취재 좀 해보지. 베를린 처음이지?”

수명은 핸들을 우측으로 돌렸다. 차가 들어선 곳은, 서울로 치자면 강동구 둔촌동 같은 곳으로 고층아파트 지역이었다. 슈판다우 바써베르크(Spandau Wasserwerk)가가 나왔다. 건물들은 높고 비슷비슷했으며, 삼십년 전쯤에는 현대적이었을, 그러나 이제는 그저 밀집해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 느낌도 없는 가난해 보이는 동네였다. 수명은 차를 멈추고, 내리지 여기가 우리집이네, 했다. 수명은 거기서 아내와, 이혼한 전처가 서울의 시댁에 맡긴 적이 있는, 이제는 고등학생이 된 아들과 함께 산다고 했다. 그는 얼결에 안전벨트를 풀었다.

 

 

2

 

형수는 70년대 중반 독일에 간호사로 일하러 온 사람이라고 했다. 아주 큰 눈에 짙은 속눈썹이 인상적인 고운 얼굴이었다. 수명의 아들은 체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겸연쩍게 인사를 했다. 아들은 수명을 전혀 닮지 않았다. 그는 수명의 결혼식에서 본 여자를 희미하게 기억해냈다. 얼굴이 좀 갸름하고 체격은 가냘픈 편이었다. 청바지에 점퍼를 걸친 젊은이들이 너무나 많았던 결혼식. 그 청바지들은 신의 왕국을 세우러 떠나는 십자군들처럼 오만한 얼굴이었다. 운동가요가 울려퍼지고 큰아버지는 손수건으로 연신 이마의 땀을 닦았고 큰어머니는 긴 목을 쳐들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식이 끝나고 신랑신부는 청바지 차림으로 인사를 다녔다. 지리산으로 떠난다고 했다. 그때 그 형수가 신고 있던 등산화가 지금 도미구이와 된장찌개를 식탁에 차리는 눈 큰 형수의 얼굴에 겹쳐졌다. 그들은 말없이 식사를 했다. 과거의 회상은 현재의 처지가 어떠냐에 따라 흐뭇하게도 남루하게도 다가오는 거니까. 수명이 그 결혼식 장면을 어떻게 회상할까, 그는 잠시 생각했다.

아파트는 28평 정도였다. 거실 겸 서재, 안방 그리고 아이가 쓰는 작은방이 있고 바닥에는 낡은 베이지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카펫은 양감(量感)이 전혀 없어 발이 좀 시렸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거실로 옮겨 포도주를 마셨다. 집은 추웠다. 그는 양복 속에 얇은 와이셔츠뿐이어서 어깨를 자주 움츠렸다.

“우리집 좀 춥지? 우린 이렇게 춥게 살아. 감기도 훨씬 덜 걸리고……”

그리고 이야기는 끊겼다. 그는 이 집에 묵게 된 것을 후회하면서 마치 인테리어에 흥미라도 있다는 듯이 방을 빙 둘러보았다.

“성당 다니나봐요.”

나무로 새긴, 커다란 십자가가 거실 벽 한가운데에 걸려 있었다. 수명은 계면쩍다는 듯 웃는다.

“지금 이이가 성당에서 일을 보고 있거든요.”

순천 출신이라는 형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무얼 하며 지내냐고 묻고 싶었는데 세 사람 공통의 화제가 생긴 게 다행이었다.

“잘됐네. 내가 지금 종교 담당하고 있거든. 그럼 독일 성당?”

“응, 장례식 하는 성당. 우리 동네 있는 거…… 거기서 잡역부로 일하고 있어.”

수명은 담담한 어투로 말하고는 포도주잔을 들어 한모금 마신다. 붉은 포도주가 그의 입가에 묻었는데 얼핏 피처럼 보였다. 눈이 큰 형수가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저기…… 이제 한국에 들어올 생각은 없어요? 요샌 조사만 간단하게 받으면 된다는데…… 한국도 예전 같지 않잖아요?”

그는 약간 더듬는 말투로 물었다.

“때가 되면 가게 되겠지……”

“한국에 높은 자리에 있는 친구 많잖아요? 예전에 다들 같이 일하던 사람들 아니었나요? 그러니까 여의도로 간 비밀결사 동지들……”

“동지 좋아하네!”

눈이 큰 형수가 소리쳤다. 뜻밖이었다. 그와 수명 그리고 무엇보다 형수 자신이 놀란 것 같았다. 죄송해요……라는 말을 웅얼거리면서 형수는 자리를 떴다. 일어나지도 못하고 앉아 있던 두 사람에게 그녀가 닫는 안방의 문소리가 쿵, 하고 들려왔다. 동지라니, 잘못 말한 거 같았다. 연리를 사랑한 경우처럼 잘못한 거 같았다.

그는 갑자기 혼자 있고 싶었다. 된장찌개 때문이었을까. 학창시절에는 말도 못 붙일 정도로 잘났던 친구의 집에 가니, 아내는 병들어 있고, 내가 이번에 꼭 천만원이 필요하거든…… 어떻게든 갚을 테니 한번만 좀 봐주라, 집사람이 보험을 하는데 그걸 좀 들어줘도 좋고…… 뭐 이런 중얼거림을 들은 경우처럼 그는 약간 쓰라린 심정이 되었다. 그러니 영락(零落)한 친구의 집에서처럼 이제 택시를 타고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호텔로 갈걸 그랬다는 후회가 다시 들었다. 싸우나로 몸을 풀고 맥주를 마신 후 마싸지 걸의 써비스를 받고 금발의 여자와 의미도 없는 정사를 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약간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피곤한 탓인지, 아니면 졸음을 쫓기 위해 난방을 넣지 않은 수험생 방처럼 서늘한 집 안의 기온 탓인지도 모른다. 그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수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좀 쉬라고 했다.

“저기, 집사람도 아침 일찍 나가야 하고…… 여기가 침대 겸용 소파니까 크게 불편하진 않을 거야. 한국에 전화할 일 있으면 이 번호를 쓰고.”

수명은 전화기 옆 포스트잇에 적힌 번호를 가리키며 담담하게 말했다. 019001982같이 긴 번호를 누르면 값이 싸니까 불편해하지 말고 쓰라는 말도 덧붙였다. 잠시 후 수명은 흰 시트를 가지고 와서 천천히 폈다. 그는 수명이 성당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걸 그려보았다. 저렇게 관 위에 흰 시트를 덮고 꽃바구니를 올리고 제대에 향을 준비하는 잡역부…… 가지가지의 이유로 죽었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제처럼 수명의 얼굴은 고통스러워 보였고 고독해 보였다.

 

잠은 오지 않았다. 로마에서 날아왔으니 시차가 있을 리도 없었다. 서울에서처럼 폭탄주도 위스키도 아닌 포도주를 어정쩡하게 마신 탓 같았다. 낡은 나무 창틀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창에 눈을 대고 컴컴한 밖을 바라보았다. 창이 차가워서 눈이 시렸다.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정지용의 시구가 얼핏 떠오르기도 했다. 멀리 아파트 창문에 두어 개 불빛이 희미했을 뿐 어두웠다. 너무도 낯선 어둠이었다. 그는 서울에는 밤이 없다고 생각했다. 서울에는 어둠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가지각색의 전깃불들이 하늘꼭대기까지 솟아 있으니까. 비는 계속해서 내리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창에 눈을 대고 있자니까 문득 명절날 엄마와 큰엄마가 어두운 마당에 알전구를 켜놓고 늦게까지 차례상에 올릴 나물을 씻던 풍경이 떠올랐다. 그는 큰집 마루 유리창에 눈을 대고, 엄마 언제 자, 언제 자? 하고 물었었다.

그는 아마도 수명의 것일 책상에 앉았다. 푸른색의 맑스 레닌 전집이 주르르 꽂혀 있고, 해방전후사의 인식, 독일 공산주의 운동사…… 아직도 그런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을 그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무심히 둘러보았다. 성서,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네 마음에 평화가 있기를,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같은 책들도 있었다. 그는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C신문사 싸이트로 들어가 기사를 검색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메일을 체크했다. 받은 편지함에 수없이 쌓인 메일을 보다가 그는 그녀의 메일을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른아홉의 기혼남자가 한달 전 이별을 통보한 스물아홉의 독신녀에게서 받은 편지가 과연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정글에서 부상당한 전우를 찾는 것처럼 절박하게 수많은 메일들을 헤치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가 보낸 메일의 한토막을 그는 생각했다.

“이런 말들은 다 부질없어…… 그런 단어 없을까? 별처럼 빛나고 용광로처럼 뜨겁고 폭포수처럼 마르지 않는 그런 말, 사랑이란 말 대신.”

그녀가 그에게 보낸, 그가 그녀에게 보낸 모든 편지들은, 영원히 삭제하시겠습니까라는 물음에 예를 클릭하는 순간 모두 사라졌지만 그의 머릿속에 남은 기억은 삭제버튼을 눌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 편지를 읽던 그때 늑골 부위에서 새삼 세차게 뛰던 심장과 미친 듯이 부풀어올라 온몸을 돌아다니던 팽팽한 혈관의 기억도 아직 남아 있다. 감각의 기억…… 그는 인터넷을 끄고 무심히 바탕화면을 바라보다 한곳에 커서를 댔다. 베를린이라는 파일명이었다. 그는 베를린에 대해 정보를 알아두어서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20년 동안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한 남자, 수명의 일기였다. 일기는 1989년 가을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오늘도 비가 내렸다. 오늘도 전화벨은 한번도 울리지 않았다. 집세는 두달 밀려 있고 가진 돈은 이제 20마르크 10페니…… 식빵을 씹다가 곰팡이가 핀 것을 발견했을 때 갑자기 내 입에서 괴성이 튀어나왔다. 내가 아닌 어떤 사내가 내 안에서 비명을 지르는 듯한 착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대로 미친다면 아마도 나는 광부로 와서 살다 늙어버린 교민들처럼 죽은 지 한달 만에 구더기들과 쥐들과 함께 발견될까. 아니다, 그전에 늙은 집주인 할망구가 먼저 집세를 징수하기 위해 나찌 친위대처럼 보무도 당당히 경찰을 대동하고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니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겠지.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 테이프를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어학연수 시절 뮌스터에서 슈베르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본 일이 생각난다. 돈이 없던 슈베르트는 결국 악보를 쓰다가 쓰러진다. 너무 오래 굶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한 다락방에서 그렇게 청년 작곡가는 아사(餓死)한다. 그의 멍한 두 눈, 벌린 입으로 파리들이 윙윙거리던 그 장면…… 파리떼를 쫓을 힘도 남아 있지 않던 젊고 못생긴 작곡가의 얼굴 위로 이 곡이 울려퍼졌다.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 장면이 떠올라 끔찍했다. 내가 그렇게 될까봐, 아니 나는 이미 그렇게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수배를 받은 직후, 그러니까 한국 신문에 수명의 이름이 실린 얼마 후의 일기 같았다. 그 무렵 형수가 귀국해서 아이를 큰집에 맡겨놓고 떠나버렸다는 말을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는 그때 신문사 공채에 대비해 날마다 독서실에 박혀 있었다. 사촌형이 북한을 다녀오고 임수경 일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그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최수명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베를린에 유학하던 중 친북단체에 가입, 북한을 두 번이나 방문한 자로서 임수경을 테겔공항에서 픽업,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옷을 갈아입힌 후, 당시 동베를린 지역에 있던 쇠네펠트공항으로 데려가 북한행 비행기를 태웠다. 최수명은 이번 임수경의 방북사건에서 국내 학생운동권과 북한 사이의 긴밀한 연락책이었다.” 신문사 입사를 준비하면서 스크랩한 기사를 눈여겨본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비로소 그가 만난 사촌형이 어떤 인물인지가 구체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돌아왔다……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다시 돌아온 베를린은 내가 스위스로 떠날 때의 그 베를린과 어떻게 다른가? 돌아온 다음날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버린 것은 대체 신의 은총인가 저주인가? 1961년 하룻밤 사이에 쌓였던 벽이 28년 후인 며칠 전,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린 것은 역사의 비극인가 희극인가? 남의 나라 독일의 통일은 나에게 기쁨인가 절망인가?

남은 돈을 털어 편도 티켓을 들고 떠났던 스위스의 산악, 남에게 내 주검을 보이지 않을 곳, 구더기가 없고 전화가 없는 곳, 만년의 빙하 한구석으로 영원히 사라지고자 했던 나의 시도는 실패했다. 그 눈 덮인 산에 올라가, 더 깊숙한 골짜기 인적 없는 절벽을 찾아 모퉁이를 돌았을 때 믿을 수 없이 펼쳐진 산 정상의 흰 평원, 얼어 죽으려던 내 시도를 무산시킨 눈 속의 작은 꽃 한송이…… 그때 언덕에서 미끄러져 엎어진 채로 삐죽한 나뭇가지 하나를 붙들고 고작,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라고 부끄럽게 울며 외치던 그 대상은 신이였을까, 아니면 수배령이 내려지자마자 나를 떠난 아내였을까. 그도 아니면 간첩이라는 한국의 발표가 있자마자 약속처럼 일시에 전화 한통 걸지 않은, 죽는 날까지, 아니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개머리판으로 맞아 죽을지라도 동지임을 잊지 말자고 맹세한 친구들이었을까. 기차역 쓰레기통에서 빵을 주워먹으며 돌아오니 어머니의 편지가 와 있었다. 널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나도 기도했다. 신이시여 우리 어머니의 기도만은 들어주세요!

 

 

3

 

그는 밤새 나쁜 꿈을 꾸었다. 누군가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는데 가다보니 늪을 만난 것 같기도 했다. 섬뜩한 기운에 몸서리치다가 깨어난 그는 방이 춥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듣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라이터를 켜서 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여섯시, 간호사로 일하는 형수가 출근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는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나 앉았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밭은기침이 나왔지만 습관처럼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담배연기를 깊이 빨아들이자 두통이 심하게 밀려왔다. 챙겨온 진통제나 감기약이 있을까 잠시 헤아리다가 담배를 껐다. 담배맛이 나쁘면 별로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그는 문득 아내에게 전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화기를 들고 어제 수명이 가르쳐준 대로 긴 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82라는 국가번호까지 눌렀을 때 그의 손가락은 무심히 31을 누르고 있었다. 그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손가락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김유신은 천관의 집으로 가는 애마의 목을 베었기에 삼국을 통일했다. 말하자면 슈베르트를 듣는, 눈 속에 핀 꽃 한송이를 보고 살기를 결심한 감상주의자가 아니라, 죄도 없는 애마를 베어버리는 그런 잔인무도한 놈이 조국통일의 과업을 이루는 것이다. 그는 아내에게 전화해야만 했다. 잘 있지? 애들은? 응, 여기 사촌형 집이야, 하면서 특히 사촌형수도 있는 집이라는 것을 은밀히 강조하면서, 아직도 자다가 화들짝 놀라 일어나, 당신 어떻게 다른 여자와 그럴 수 있어! 비명 지르는 아내를 안심시키는 것이 옳다. 미안해 여보, 그 여자가 자꾸 한번만 만나자고 해서……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어. 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뿐이야.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래! 제발 날 용서해줘.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그런 거짓말들을 해야만 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느냐고 묻는 건 사람의 다리가 왜 두 개냐고 묻는 것과 같은 질문이다. 그러나 지난 한달 동안 그는 연리를 만나서 그녀를 껴안고 그녀의 둥글고 부드러운 귓가에 아주 어리석고 달콤한 말을 해주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는 빵으로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수명을 따라나섰다. 하늘은 두꺼운 회색 뚜껑을 덮은 것처럼 흐렸다. 그는 밭은기침을 계속하면서도 담배를 연신 피워물었다.

“감기가 든 모양이네. 아까 집에서 커피 대신 카밀레 차를 줄걸 그랬네.”

“약 없어요? 먹으면 좀 괜찮을 거 같은데.”

“여기 사람들 약 잘 안 먹어. 비타민이라도 좀 구해줄까? 힘들면 병원에 가고.”

“아니에요, 됐어요. 근데 날씨가 맨날 이렇게 흐린 거예요?”

“오늘은 좀 낫네, 비도 안 오고. 그래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날씨가 지랄 같거든. 하루에도 우박이 내렸다가 해가 났다가 또 비가 오지. 어떤 때는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사계절이 지나갈 때도 있어. 로마제국이 프랑크푸르트까지 왔다가 그 이북은 점령할 가치도 없는 땅이라고 했다잖아!”

멀리 올림픽 경기장이 보였다. 베를린을 떠날 수 없다고? 살수록 정이 떨어지지만 그래도 떠나지 못하는 도시라고? 그는 당장이라도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다못해 서울행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낯익은 프랑크푸르트, 즐비한 고층빌딩과 화려한 부띠끄라도 보면 좀 살 것 같았다. 오른쪽 관자놀이께가 총알이라도 박힌 것처럼 지끈거렸다. 만일 날씨가 늘 이렇다면 히틀러가 그 모양이 된 데에는 날씨 탓도 있을 것이다. 그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저기가 1936년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우승했던 그 운동장이야.”

“그 당시 손기정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지운 기자들 다 해고되었다는 사실 알아요?”

수명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신문 친일했잖아요. 사주들 다 친일파였고.”

여전히 밭은기침을 하며 그가 말했다.

“그건 아는데, 그 신문사 차장님이 그런 말 해도 돼?”

“되죠. 나는 새로 입사한 후배들한테도 묻지요. 우리 신문이 친일했다고 생각하느냐고요. 아닙니다, 하는 놈은 나한테 반쯤 죽어요.”

거짓말이었다.

“기자는 하늘이 무너져도 사실에 충실해야 하거든요. 기사하고 기자는 다른 거니까요.”

물론 이 말도 거짓말이었다.

“그 신문이 아직도 왜 그렇게 번창하는지 알겠구나. 자연을 볼까 역사를 볼까, 아니면 왕궁을 볼까?”

수명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생각 같아서는 다 귀찮다고 대답할 만큼 그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무너진 장벽을 보죠,라고 말해버렸다. 송두율 선생 이야기를 꺼낼까 하다가 그는 오른쪽 관자놀이를 다시 눌렀다. 베를린을 떠나기 전까지 아직 시간이 있다. 수명의 자동차는 여전히 자주 시동이 꺼졌다. 차는 슈프레(Spree) 강가를 지나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가로 들어서고 있었다. ‘보리수 아래’라는 뜻의 거리였다. 성문 앞 우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꾸었네. 가지에 희망의 말 새겨놓고서…… 고등학교 때 음악시험이 생각났다. 그때 그는 ‘보리수’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기쁘나 슬플 때나 찾아온 나무 밑…… 슈베르트의 노래에는 모범생의 꾸미지 않은 애수 같은 게 있다. 모범생 같은 그 작곡가는 애수만 남기고 굶어 죽는다. 브란덴부르크 문과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천사상과 그리고 왕궁과 성당을 지나 그들은 장벽으로 갔다.

한때는 껌을 씹던 젊은 미군이었을 할아버지들과, 한때는 그 미군들의 지갑 속에서 원피스를 입고 웃던 처녀였을 할머니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관광버스가 몇대 서 있고 스타벅스 커피점과 미국식 쌘드위치를 파는 가게, 모조훈장을 파는 가게 들 앞에는 그런 할아버지와 할머니 들이 혈색 좋은 얼굴로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스스로를 해방자라고 생각하는 사람 특유의 자부심과 느긋함이 어려 있었다. 누군가가 살육당한 곳이 이제는 추억의 장소로 변해버린다, 세월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그것은 그러니까 마약이다,라고 그는 생각했다.

“여기 들어가봐.”

수명이 티켓을 끊어오더니 그에게 내밀었다.

“예전에 동독에서 목숨 걸고 서독으로 넘어온 사람들을 기념하는 박물관이야. 벽 박물관이라고도 부르고, 독일어로는 ‘Haus am Checkpoint Charlie’인데, 찰리 검문소에 있는 집이란 뜻이지. 극적으로 탈출한, 예를 들어 건물 4층에서 뛰어내린 어린아이부터 자동차 트렁크에 몸을 숨기고 탈출한 사람, 서독에 있던 애인이 만들어준 소련 군복을 입고 탈출한 청년…… 어쨌든 그때 이 장벽 넘다가 많이 죽었으니까…… 말하자면 이곳은 자본주의 만세, 그런 말을 하는 곳이야.”

 그는 수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묻고 싶었다. 그들은 꼭 그래야만 했을까요?

수명은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러고는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가끔 관광가이드 할 때 여기 오지. 국회의원이 된 동기들이나 교수가 된 유학 동창들……”

“김창수 장관이 동기시죠? 고등학교? 대학교?”

“둘 다.”

“………”

“여기는 그래도 생각 좀 하는 놈들이나 오자고 하지, 아니면 다 섹스숍이나 사창가 데려다줘. 그게 제일 편하거든, 군소리도 없고.”

“형은 안 들어가려고?”

그는 처음으로 형이라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수명과 자신 사이에 무언가가 일어난 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패장은 원래 얼굴을 들지 못하는 거잖아!”

그는 벽 박물관으로 들어가면서 얼핏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선 수명의 어깨 너머로 흰 담배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수명의 어깨는 굽어 있었다. 처음으로 그는 수명이 오십이 다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가끔 뒷모습은 얼굴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니까.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눈동자이기도 하고, 마주보며 이야기할 때의 손짓이기도 하고, 또 놀랍게도 뒷모습일 때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 뒷모습은 잊어지지 않는다. 출연자는 두 명이지만 한 사람만 그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온전히 그의 것이다.

 

어제 감옥에서 나온 친구의 편지가 왔다. 맞고 묶이고 잠 못 자고 거꾸로 매달리고…… 그 고문을 멈추게 할 수만 있다면 고문하는 놈의 똥구멍이라도 핥을 것 같았다고, 내 동지라는 놈이 그렇게 해서 고문을 모면하겠다면 동지를 밀쳐버리고서라도 잘 핥아줄 수 있을 거 같았다고…… 보안사에 들어가서 본 것은 파쇼의 폭압보다 자신의 치사하고 비열한 진실이었다,고 친구는 썼다. 수명아, 우리 선배 동건이형 미친 거 나 이해한다,라고 친구는 썼다. 나는 답장을 쓰다가 찢어버렸다. 누가 내게 1000마르크만 준다면, 아니 고정적으로 한달에 500마르크 준다면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쓸 뻔했던 것이다.

십년 전에는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일이 십년 후엔 구경거리가 된다. 그때는 죄가 되었던 것이 지금은 죄가 안되기도 하고, 여기서는 죄가 되는 일이 비행기 타고 한시간만 가면 죄가 되지 않기도 한다. 십년 전에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켜야 했던 진실이 이제는 지루해진다. 사명은 팔자가 되어버리고 운명은 개그로 바뀌어버린다.

 

베를린은 이상한 도시라는 수명의 말은 맞는 거 같았다. 그는 좁은 박물관을 이리저리 오르내리면서 밭은기침을 자꾸 했다. 무언가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 살던 도시, 고집을 부리고 버티던 인간들이 모여들어 죽어갔던 도시, ‘죽어도’라는 말을 자주 쓰는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도시…… 로자 룩셈부르크와 마를레네 디트리히, 반대편에 히틀러도 있고, 저 벽을 넘다 죽거나 산 사람들이 있다, 지금 살아 있든 죽었든 그들도 말끝마다 ‘죽어도’라고 했음에 틀림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살수록 정이 떨어지지만 그러나 떠나지는 못하는 도시, 지긋지긋해 다른 도시로 떠났다가 다시금 돌아오고야 마는 베를린…… 예정보다 조금 일찍 베를린을 떠나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관광객들 틈을 비집고 좁다란 층계를 천천히 올라갔다.

 

 

4

 

추석이다. 송선생 댁에 잠깐 인사를 다녀왔다. 사모님은 아직도 짱짱하시고 송선생은 여전히 과묵했다. 아마 이게 마지막 인사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와 나는 다르다. 이념도 북에 대한 입장도 그리고 지위도…… 다만 하나 같은 게 있다면……

돌아올 때 보니 베를린답지 않게 맑은 하늘에 달이 떠 있었다. 이맘때 교지편집 마치고 친구들하고 걸어내려가던 안국동 길…… 영배 엄마가 하던 곰보빈대떡집에서 먹던 빈대떡, 치잣물 들여서 노랗게 부쳐주던 그 빈대떡, 달은 그 빈대떡처럼 보였다. 교복을 입은 채 우르르 빈대떡집 뒷방에 몰래 들어가서 소주 먹다가 들킨 거, 그때의 친구들, 영배 엄마의 무지막지한 그 한국식 욕설까지 그립다. 가고 싶다, 가고 싶다. 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을 해서든 갈 수만 있다면…… 하지만 찾아간다 해도 가서 만난다 해도, 이미 그들은 예전의 그들은 아니라고…… 이미 우리 모두는 망명자이고 유배자일 뿐…… 조국에서든 독일에서든 각자 떠 있는 닿지 못할 섬일 뿐이라고 얼마 전 반성문과 전향서를 쓰고 한국에 돌아갔던 C가 전해왔다. 그러나 가고 싶다,고 나는 쓴다!

 

차는 반제(Wannsee) 호숫가를 달리고 있었다. 서울의 1.3배 크기인 거대도시 베를린 인구는 서울의 3분의 1, 아마도 나무는 서울의 30배…… 그는 베를린에 대해 기사를 쓴다면 무엇이라고 쓸까 생각하며 무심히 호숫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호수는 아주 넓었고 베를린의 하늘처럼 납빛이었다. 색깔에 무게가 있다면 아주 무거운 회색빛…… 독일인처럼 키가 큰 나무들이 독일인처럼 줄을 잘 맞추어 서서 끝도 없이 차창을 스쳐 지나갔다. 주택가에서 숲으로 들어선 지 오분도 안되었는데 이미 깊은 숲속이었다. 털모자를 눌러쓴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무심히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남의 인생을 돌아보듯 무심히…… 그리고 뜻밖에도 그것은 정직한 얼굴이었다.

“어디 빈대떡 파는 데 없을까요? 옛날식으로다 노랗게 치잣물 들인 거.”

그가 묻자 수명이 잠시 멈칫했다.

“여긴 한국이 아니니까…… 한국식당에 잘 가지 않는 편이어서 모르겠는데.”

“그래요? 맛이 없나요?”

“그것도 그렇고 한국사람을 만나야 하잖아. 가이드할 때는 사람들을 데려다만 주고 난 그냥 밖에서 걸어다녀.”

수명은 천천히 말했다. 한국사람을 만날까봐 한국식당에 가지 않는다는 수명은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는 수명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관자놀이가 다시 쑤시는 기분이었다. 무엇이든 대꾸해주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형.”

“응?”

“그럼 우리 회에다 쏘주 한잔할까?”

수명이 잠시 웃었다.

“그 말 들으니까 정말 한국에서 온 사촌동생 같다. 어떻게 하지? 아마 여기 한국식당은 이틀 전에 회를 주문해야 할 건데……”

“그거 한국사람이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 게 어딨어요. 전화 걸어보세요. 제가 말할게요.”

수명이 한국식당의 전화번호를 누른 다음 핸드폰을 건넸다.

“어, 거기 사장님 계시나? 오늘 회 좀 존 거 있나? 없다구? 사장님 바꿔보지. 예, 사장님 수고하십니다. 저는 C일보 최영명 기자라고 합니다. 오늘 좀 특별한 분을 모시고 가야 하는데 회 좀 존 거 없을까요? 비싸더라두 물 좋은 걸루다…… 그래요, 그래요.”

잠시 후 그는 전화를 끊고 말했다.

“거봐요, 된댔잖아요. 자기네들 먹으려고 했던 게 있다나? 거기로 가지요. 한국사람들 있는 곳인데 베를린이라고 다르겠어요? 기자라고 하면 다 넘어간다니까.”

 

그들이 술을 마시고 나왔을 때 날은 거짓말처럼 개고 손톱으로 긁어내면 벗겨질 것처럼 얇은 반달이 하늘에 떠 있었다. 잎이 진 가로수들이 검은 하늘에 가지를 박고 달빛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날은 아까보다 훨씬 추워졌다. 자연산이라고 했지만 회는 별로 맛이 없었다. 소주를 두 병이나 비웠지만 취기도 별로 오르지 않았다. 차가 있는 곳까지 걸으면서 그는 수명과 한국에서 이런 만남을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횟집에서 소주를 마시면서, 아니 포장마차에서 시린 발을 비비며 구운 곰장어를 먹으면서, 입가에 점점이 고추장이 묻은 줄도 모르고 한 손을 주머니에 깊이 찌른 채, 수명이 유학을 떠나기 전에, 그가 기자가 되기 전에, 아니 수명이 수배되기 전이나 그가 연리를 만나기 전, 아니 그도 아니면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기 전에, 아니 이렇게 나이를 먹어버리기 전에…… 술김에 뭐하나 물어봅시다, 도전적인 말투로, 술기운을 교묘하게 빌려 그는 수명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눈이 왜 두 개일까라는 물음과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잠깐 졸았다. 먼 불빛이 흐려졌다가 가까워졌다. 눈을 뜬 것은 노랫소리 때문이었다. 작고 낮게 흥얼거리는 소리,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그는 충혈된 눈동자로 수명을 바라보았다. 낮은 소리로 노래하던 수명이 그의 시선을 의식하고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가 고등학생일 때 가끔씩 불렀던 노래, 무슨 건전가요 같기도 하고 하염없이 불온한 것 같기도 했던 노래. 이상하게도 안온한 기분이 되어 느긋하게 뒷머리를 낡은 오펠 시트에 기대고 그도 아주 작은 소리로 수명을 따라 흥얼거렸다. 졸음이 다 달아나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마신 소주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이곳이 베를린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네게 강 같은 평화, 네게 강 같은 평화, 네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수명이 음을 높여 화음을 맞추었다. 그러자 강이 그들을 두둥실 실어 어떤 평화지대로 안내하는 것도 같았다. 잠시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내’인지 ‘네’인지 구별할 수 없는 한국말, 아마도 수명이 ‘네’라고 그가 ‘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베를린의 긴 하루가 지나갔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지난 이십년만큼 길었다. 피곤이 엄습했다.

 

신세 많이 졌습니다. 번거로우실까 두려워 인사 못하고 떠납니다. 형님 사시는 모습 큰어머니께 전하겠습니다. 두 분 모습 평화로워 보입니다. 형수님 된장찌개 잊지 못할 거구요. 베를린을 떠나기 전 한번 연락드리겠습니다. 빠른 시간 내에 형님이 다시 한국에 돌아오실 것을 믿습니다. 그땐 우리 치잣물 들인 노란 빈대떡에 소주 한잔 먹겠지요. 제가 사겠습니다!

 

그는 수명의 책상에 메모를 써놓고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거짓말이라는 것은 수명도 알 것이다. 그는 트렁크를 들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가까운 곳에 택시정류장이 있는 것을 보아두었으니 한 오분 걸으면 택시를 타고 시내의 호텔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날은 춥고 어두웠지만 희미한 여명이 새벽의 기척을 내고 있었다. 달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캄캄했다. 그는 멀리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을 보며 걸었다. 그때 그는 길 저쪽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로렐라이의 노래를 들은 뱃사공처럼 끌리듯 길을 건넜다. 성당 뒤편은 묘지였다. 여기가 사촌형 수명이 잡역부로 일하는 그 성당인 모양이었다. 이곳을 다시는 찾지 않게 될 것이라는 걸 그는 예감했다. 망할 놈의 이념에, 잘나갈 수 있는 인생을 망쳐버린 수명을 그는 어쩌면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죽은 자는 잊혀지는 것이다. 잊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잊고자 한다고 다 잊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가방을 성당 입구에 세워두고 묘지로 들어갔다. 그는 죽어 있는 누군가를 잠시 추모하고 싶었다. 희미한 여명 속에서 꽃들과 나무가, 묘비가 잠들어 있다. 독일어로 묘지는 프리트호프(Friedhof), 평화로운 뜨락이라고 번역해야 하나. 호프는 말하자면 사생활이 보호되는 땅, 담장이 둘러쳐진 조용한 안뜰이다. 평화는 죽어서야 얻는다는 걸 게르만인들도 일찍이 알았던 것일까. 멀리 굵은 삼나무들이 두꺼운 구름을 육중한 몸으로 떠받치듯 서 있었다. 바람은 싸늘했다. 그는 베를린에 온 것을 후회하면서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러 개의 촛불이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환하게 밝혀진 묘지였다.

 

잉에 하트만(Inge Hatmann) 2002년 3월 6일 생. 2003년 11월 21일 죽음.

“하느님이 주신 아기 하느님이 도로 데려가시니 그저 감사할 뿐…… 너로 인해 1년 8개월 동안 행복했던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그리고 너를 너무나 사랑했던 프란츠 오빠가……

 

그는 촛불에 의지해 서투른 독일어로 천천히 번역하며 읽었다. 문투는 성명서처럼 단호했다. 감사하다니, 미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는 모양이다. 이들 가족은 지난밤 여기를 다녀간 모양이었다. 묘지 곁에는 푸른 눈을 가진 금발인형과 테디 베어(Teddy Bear)가 놓여 있었다. 촛불은 아이의 요람을 둘러싸듯 스무 개쯤 되었고 춥고 긴 밤을 지나 이미 그 형태가 이지러져 있었다.

 

다시 종소리가 울려왔다. 그는 성당의 종탑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서야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고운 빙수가루처럼 뿌옇게 흩날리는 눈발이었다. 아주 희미한 눈발, 그가 테겔공항에 도착했을 때 흩뿌리던 그 비가 얼면 이런 눈이 될 것 같았다. 이곳에 오기 전 경북의 어느 산골로 찾아가 만난 종지기 시인이 떠올랐다. 고속도로와 국도와 지방도로, 그리고 다시 이름없는 도로를 구불구불 한참이나 더 달려간 시골 성당에 종지기 시인은 살고 있었다. 밥상 하나와 모나미 볼펜, 그리고 이불 한채가 그가 가진 것의 전부였다. 아내도 애인도 돈도 자식도 집도 없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막걸리도 한잔하다가 미사시간이 되자 그는 서둘러 성당 뒤쪽으로 가서 종을 쳤다. 종을 치고 돌아온 그의 얼굴에는 뜻밖에도 이상한 빛이 어려 있었다. 그 시인의 검게 탄 이마에 새겨져 있던 굵은 주름자국이 종소리처럼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떠올라왔다.

“왜 종을 치며 사시나요?”

아내도 애인도 돈도 자식도 집도 있는 그는 물었었다.

“왜 종을 치냐고? 허어 참, 그런 질문 첨 들어보네. 집이 없어 여기 사니까 치고, 신부님이 치라고 해서 치고 시간이 되니까 치고…… 종을 치는 건 하늘이 왜 하늘이고 나무가 왜 나무냐고 묻는 거 같아서……”

종지기 시인은 누런 덧니를 드러내며 허허 웃었다. 시인에게는 순교자를 자청한 위선자들의 그 비장함 따위는 없었다. 시인은 그냥 무심했다. 나무처럼 바람처럼 종소리처럼…… 소리가 아니라 영상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처음으로 알았다. 베를린으로 가서 수명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굳힌 건 아마도 그때였을 것이다. 왜 그랬는지 그는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의 눈은 두 개고 모든 생명은 죽는 것이다. 누가 왜냐고 물을 것인가. 자기가 생각하는 게 진실이라는 걸…… 그게 아니면 죽겠다는데, 그럴 수밖에 없다는데, 거기서 어떻게 왜냐고 물어볼 수가 있는가 말이다.

한달 전 크리스마스 트리가 거리마다 반짝이던 날, 연리의 뱃속에서 휴지통으로 떨어져내렸을 그의 아이가 떠올랐다. 눈발은 더 짙어졌다. 안개가 가득한 것처럼 뿌옜다. 그는 난데없이 길을 잃은 것처럼 곤혹스러웠다. 한 발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에 둘러싸인 듯했던 것이다. 1년 8개월을 살고 죽은 아이의 묘비 주위에 켜져 있던 촛불들이 눈보라에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그는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이 눈은 반제호수에도 내릴 것이다. 벽 박물관에도 내리고 슈프레 강에도 내리고, 탈출에 성공한 자들에게도 실패해서 죽은 자들에게도 내릴 것이다. 두꺼운 회색 뚜껑이 덮인 베를린의 새벽하늘에서 끝없이 날리는 눈발, 펑펑 쏟아지지도 않는 그 가늘고 희미한 눈발……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언가 통쾌한 것 같기도 했고, 누군가를 붙들고 앞뒤 없는 말을 한없이 지껄이고 싶기도 했다.

 

그는 잠시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눈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 안할 수도 없는 어두운 새벽…… 이 어정쩡한 자세에서의 한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