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분단극복을 위한 실천가의 증언

정경모 『이제 미국이 대답할 차례다』, 한겨레신문사 2001

 

 

임재경 任在慶

언론인

 

 

남한에 살면서 분단문제를 올바로 보며 거리낌없이 쓴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수월한 일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군사독재 시절에 비해서는 남용 사례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를 옥죄는 제도장치로서 국가보안법이 엄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올바로 보며 거리낌없이 쓰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거기에 따라야 할 공부가 남한 지식인들에게 턱없이 모자란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국제문제 및 한반도 관련 정보가 홍수처럼 넘쳐흐르고 컴퓨터와 인터넷의 보급이 구미 선진국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오늘에 이르러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표현의 자유가 신장되고 정보의 양이 증가하는 데 따라 저절로 국민의 식견이 높아진다는 기대는 빗나갔음이 분명하다.

『이제 미국이 대답할 차례다』의 저자 정경모(鄭敬謨)는 분단문제를 올바로 보고 거리낌없이 쓰려는 의지와 공부를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게을리하지 않은 면 한가지만으로도 남한의 논단 풍토에서는 훌륭한 사표(師表)가 되리라 믿는다. 일본에 거주하는 문필가 정경모는 작고한 문익환 목사와 더불어 1989년 북한을 방문하였던 까닭에 ‘통일 열정가’쯤으로 세상에는 알려져 있으나 『이제 미국이 대답할 차례다』를 읽고 난 독자들은 남한의 논객들 가운데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노력과 공부가 그의 열정을 지탱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흔히 망명 지식인들에게 배어 있는 숙주국(host country) 숭상을 그에게서 볼 수 없는 것도 특징인데, 그것은 단순한 복합심리의 결과가 아니라 일본 역사와 문화, 그리고 지금 이 시각에도 살아움직이고 있는 일본 현실을 깊이있게 연구하고 관찰한 산물이다. 이 점은 19세기초 프로이쎈의 숨막힐 듯한 억압정치에 견디다 못하여 프랑스로 망명한 뒤 모국과 망명국(독일과 프랑스) 사회뿐만 아니라 유럽 전반의 동향을 중엄한 필치로 비판했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를 연상케 한다.

7편의 에쎄이로 구성된 이 책은 한국이 지난 한 세기 동안 일본과 미국 두 강대국에 의하여 어떻게 멸시받았으며 어떻게 유린되어왔는가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이를테면 1853년 거포를 장착한 페리(Perry) 제독의 미국 함대가 일본에 무력으로 불평등조약을 강제한 지 20년 만에 일본은 자신이 당한 방법을 조선에 대하여 되풀이하는 ‘운요오호(雲揚號) 사건’이 책의 첫머리에 등장한다. 약 40년을 주기로 하여 일어나는 일본의 비약과 나락의 뒤켠에는 미국의 패권주의적 책략이 스며 있으며, 우리가 해방되던 1945년에 놀라운 사연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을 발견한다. 미국의 모스끄바 주재 대사를 역임한 외교관 조지 케넌(George Kennan)은 1949년 다음과 같은 정책 건의를 국무성 상부에 내놓았다.

“일본의 영향력과 그들의 활동이 또다시 조선과 만주 일대로 뻗어나가는 사태를 미국이 현실적으로 반대할 수 없게 될 날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다가올 것입니다. 그것은 이 지역에 대한 소련의 침투를 막아내는 수단이 이 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힘의 균형을 적절하게 이용한다는, 이와 같은 구상은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국제정세에 비추어볼 때, 미국이 위와 같은 정책의 타당성을 인정하고, 다시 한번 그와 같은 정책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바람직하다는 것이 우리 간부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82면)

해방되던 해 서울에 살던 21세의 청년 정경모는 집에서 아끼고 아끼던 옥양목을 몇필씩이나 끊어 “Welcome our Emancipators”(환영 해방자) “Apostles of Peace, U.S. Army”(평화의 사도, 미군)라는 현수막을 만들어 미군을 환영하였으나 미국이 갖다준 것은 해방이 아니라 분단과 질곡이었고 평화가 아니라 골육상잔의 처참한 전쟁이었다고 그는 술회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증거로서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덜레스(J.F. Dulles)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소개하였다.

“미국은 일본인이 중국인이나 조선인에 대해 품고 있는 민족적 우월감을 충분히 이용해야 할 것이다. 공산진영을 압도하고 있는 서방측 자유진영의 일원으로서 자기들이 동등한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일본인들에게 주지 않으면 안된다.”(85면)

112-4282001년초 봄 동아시아 전체를 발칵 뒤집어놓은 일본 문부성의 역사교과서 왜곡문제를 독립된 항목으로 취급하지는 않았으나 정경모의 책을 통독하고 나면 일본의 우익 지배자들이 뻔뻔스러워진 배후에 무엇이 있었는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오래 전에 나온 그의 저서 『일본의 본질을 묻는다』(창작과비평사 1988)에서 보았듯이 정경모의 글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특이한 힘이 있는데, 그것은 『이제는 미국이 대답할 차례다』에서 한층 더 빛을 발한다.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역사적인 6·15선언이 나온 감격이 그의 글발에 신바람을 몰고 온 게 분명하다.

책을 읽어보라는 것 이외에 더 친절한 소개의 말은 없겠으나 평자 자신 콧날이 시큰하여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었던 행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산을 덮은 눈이 숨은 물줄기가 되어 산기슭 마을의 샘물로 용솟음칠 때까지 오랜 세월이 걸리는 것처럼,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이번 남북회담도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맑은 샘물에 비유한다면 보이지 않는 땅 밑에서 오랜 세월 흘러내려온 물줄기가 있었다.”(175면) 앞에서 정경모를 하이네에 견준 것도 망명 문필가의 절절한 모국애라는 공통점 때문이다.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이루어보려고 해방직후부터 암살당할 때까지 네 차례나 북쪽 땅을 밟은 몽양 여운형, 다가오는 민족의 비극(한국전쟁)을 막아보려고 ‘38선을 베개삼아 쓰러질’ 비장한 각오로 평양행을 결심했던 백범 김구, 그리고 문익환, 임수경, 문규현신부 등 수많은 분단극복의 선지자들의 대열에 정경모 자신이 서 있음으로 해서 이 책은 모자람 없는 실천가의 증언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