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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기억의 힘
박형준론
강계숙 姜桂淑
문학평론가, 연세대 강사. 제9회 창비신인평론상으로 등단. 평론으로 「환(幻)의 순간, 초월의 문턱」 「‘쿨’의 시학」등이 있음. sumomo@empal.com
기억의 힘은 위대합니다. 오, 신이여. 그것은 두려운 것, 무한히 깊고 다양한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정신이며 나 자신입니다.오, 신이여. 그러면 나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나는 어떤 본성의 존재입니까?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신발
명절날 아버지가 사다주신 신발을 개울물에 떠내려보낸 뒤 생의 모든 신발은 처음 것의 대용품이었다고 서정주는 「신발」이라는 시편에서 술회한 바 있다. 잃어버려서는 안되나 상실의 운명에서 지켜내지 못한 이 최초의 신발은 어떤 보충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의 순결한 시원(始原)이자 기억 저편으로 넘길 수 없는 자기 기원의 상징일 것이다.그리고 예순이 되어도 대용품으로서만 신발을 사신는 습관은 시초의 신성함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대체된 이미지(바꿔신은 신발)를 통해 그것의 실제성을 회상하고 향유하는 일종의 기억술이자 기원을 향한 열망을 스스로 확인하고 지속하는 상징적 행위에 해당한다. 대용품을 통한 이러한 기억의 각인은 ‘첫’이라는 말에 포획된 시간이 거듭되는 상기를 필요로 할 만큼 자아 서사의 보고(寶庫)임을 암시하며, 동시에 순수한 과거를 망각하지 않는 한 존재의 결핍과 결여는 충족 가능하다는 전언을 품고 있다. 그런데 박형준(朴瑩浚)의 「묘비명(墓碑銘)」(『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7. 이하 『거울』로 표기)에 나오는 다음의 신발을 보라.
유별나게 긴 다리를 타고난 사내는
돌아다니느라 인생을 허비했다
걷지 않고서는 사는 게 무의미했던
사내가 신었던 신발들은 추상적이 되어
길 가장자리에 버려지곤 했다, 시간이 흘러
그 속에 흙이 채워지고 풀씨가 날아와
작은 무덤이 되어 가느다란 꽃을 피웠다
허공에 주인의 발바닥을 거꾸로 들어올려
이곳의 행적을 기록했다,
신발들은 그렇게 잊혀지곤 했다
기억이란 끔찍한 물질이다
망각되기 위해 버려진 신발들이
사실은 나를 신고 다녔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맨발은 금방 망각을 그리워한다
―「墓碑銘」 전문
삶의 행적을 기록한 기호로서의 신발, 그것은 시간이 집적된 퇴적물이라는 이유 때문에 길가에 버려져 있다. 무덤을 예시함으로써 죽음의 아우라마저 발산하는 이 신발은 망각의 심연으로 사라져야 할,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만 할 대상이다. 원본의 복사물일지라도 기억의 보존을 위해 전유되는 서정주의 신발과 달리 「묘비명」의 신발은 비정한 결말을 피할 도리가 없다. 대체 왜 그런가? 답은 다음 구절에 집약되어 있다.“기억이란 끔찍한 물질이다.” 신발이 기억의 저장고이고, 저장된 내용이 ‘끔찍한’ 것들이라면, 그것을 신고 다니는 일은 힘겨운 노역일 뿐이다. 그러니 사내의 신발은 보존될 이유도, 가치도 없다. 기억에 대한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저 음울한 부정이 계속되는 한 신발은 잊혀져야 할 봉분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또는, 신발들
기억에 대한 맹렬한 거부는 90년대 많은 젊은 시인들이 보여준 인식상의 공통된 특징이자 중심 화두였다.“추억을 버려야 살 것 같다”(이윤학 「沙金」, 『먼지의 집』, 문학과지성사 1992)는 절망적 토로나,“내 악몽의 산실, 저 처마 밑에서는 장대를 함부로 저어서는 안된다/기억의 방울들이 밤송이처럼 쏟아질지 모르니”(이선영 「기억의 방울」, 『평범에 바치다』, 문학과지성사 1999)라는 쓸쓸한 고백은, 박형준의 경우 “추억이란, 추억이란, 추억이란 크리스마스 캐럴이 어디선가 울렸다/추억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크리스마스 캐럴」,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문학과지성사 1994. 이하 『소멸』로 표기)라는 두려운 회의로,“나는 물방울 속 깊이 감춘 그 시절 내 이름을 결코 찾지 않으렵니다. 부르지 않으렵니다”(「물방울의 밑그림」, 『소멸』)라는 절박한 다짐으로 나타났다.
90년대 젊은 시인들이 조로(早老)·자폐·환멸·폐허·소멸·죽음에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그다지 새롭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경향이 혁명적 열기의 급격한 쇠락, 정보화사회로의 본격적 진입 및 소비문화의 확대재생산과 맞물리며 문학의 위기, 특히 시의 몰락을 말하게 된 정황과 연관된다는 진단 또한 익숙하다. 그러나 기억에 대한 강한 부정은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
기억이란 본질적으로 문화적 기억이다. 자신만의 개별적 체험에 바탕한 과거 인식일지라도 기억은 결코 개인적일 수 없다. 기억이 사회적 연관 속에 성립되고 집단 내의 상호작용을 통해 유지됨을 떠올린다면, 그것은 가장 사적일 때에도 공동체의 축적된 경험과 과거의 유산, 전래된 전통에 의지하여 형성된다. 기억에는 공동의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어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개인과 공동체는 스스로를 의미있는 존재로 정립한다. 그러므로 기억에 대한 탐색은 개인과 집단의 정체, 양자의 상호소통과 공동수행의 결과를 묻는 것이다.그렇다면 기억의 총체적 부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과거의 것, 전통적인 것, 역사적인 것, 민족적인 것 등 집단의 모든 문화적 산물을 향한 부정이자 자기동일성에 대한 주체의 심각한 회의를 뜻한다.
그런 점에서 기억을 향한 한결같은 부정에는 인간을 역사적으로만 감각하고 인식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반항하려는 무의식적 욕망이 담겨 있다. 역사적 감각을 중시하는 자는 현재를 과거의 전승 속에서 파악하고 기억을 돌이켜봄으로써 현재를 개선하려 한다. 현존의 의미도 그러한 과정을 통해 밝혀지리라 믿는다. 따라서 과거에 대한 사색과 기억의 반추, 망각의 방지가 중요하다. 이에 반해 과거의 기억을 불신하고 그것의 가치를 절하하는 비역사적 감각의 소유자는 과거의 무수한 기억을 현재를 억누르는 족쇄이자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여긴다. 역사에 대한 맹목적 신뢰가 개인의 삶을 무겁게 만들고 창조력을 소실시킨다는 점을 이들은 예민하게 지각한다.
따라서 기억의 망각을 적극 희망한 90년대 젊은 시인들의 등장은, 한국시의 역사에서 비역사적 감각으로 자기 정체성을 재창조하고자 한 새로운 인간형의 출현에 해당한다. 이들은 기억의 부정을 통해 근대 이후 점증해온 역사적 감각의 과잉을 문제시하고 개인의 개성이 억압되어온 상황에 의문을 제기한다. 스스로의 정체성에, 그리고 그것을 형성하는 모든 사회적 심급에 물음을 던짐으로써 진보를 맹목시하고 유토피아적 미래를 최우선의 가치로 여긴 근대의 담론을 뒤흔든다. 침울한 이들의 읊조림은 무거운 역사의 압력을 견딜 수 없었던 절박한 비명으로 들린다.
자신들의 세계에 대한 이들의 부정이 얼마나 치열했던가는 망각에 대한 갈망은 있으나 새로운 출발에의 욕망은 전무한, 과거와 미래 어느 쪽도 신뢰하지 않았던 이들의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갱신과 재생을 위해 필요한 의존대상을 이들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아니, 가질 수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인지 모른다. 낭만적 동일시를 거쳐 신성한 기원으로 창출된 위대한 과거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정주가 최초의 신발을 대신해 과거의 습속, 고대의 역사, 전통적 정서, 민족의 설화를 향유할 수 있었던 데 반해, 기억의 담지체인 신발을 끊임없이 버려야 했던 박형준은 그러한 적극적 동일화의 대상을 찾을 수 없었던 셈이다. 아마도 이 점이 90년대 많은 시인들의 작품활동을 극한의 한계점에서 시작하게 한 근본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향유대상의 소거는 필연적으로 소재의 부족, 리듬의 상실, 영감의 고갈이라는 불행한 결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 벗어날 수 있기는 한가? 박형준은 ‘끔찍한’ 기억 속으로 더 깊이 침잠하는 역설적 방법을 택한다. 그의 시세계가 갖는 독특함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장롱
박형준은 1991년에 등단한 이후 세 권의 시집(『소멸』 『거울』 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창작과비평사 2002. 이하 『잎사귀』로 표기)에서 소멸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쓸쓸하게 ‘늙어가는’ 사물들의 이미지를 통해 이 세계의 잔혹함을 간접적으로 표현해온 시인이다. 특히 기억에 대한 의식적 탐구는 파편화된 세계에 맞선 존재론적 대응방식이자 시쓰기의 동력이라는 점에서 그의 시세계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바탕이라 할 수 있다.
박형준의 시적 상상력은 상반된 두 가지 운동성을 띤다. 기억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강한 구심력과 기억의 바깥으로 나가려는 반작용의 원심력, 다시 말해 기억을 향한 집요한 접근과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줄기찬 시도가 그것이다. 이는 기억을 일깨우는 노력이 기억을 버리고 싶어하는 욕망과 함께 나타나거나, 기억을 끔찍하게 여기면서도 그것의 가치를 인정하는 모순된 태도로 현상된다. 가령 “희미해지는 추억을 안고 사는” 여인들은 “분노의 포도송이”(「과부들」, 『소멸』)가 되어간다고 하면서도 “미세한 추억을 나르는 모래들은 이 밤에 사구를 하나 만들 것”(「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소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신발은 버리지만 장롱은 버리지 않는다.
家具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나오는 오래 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家具가
고물이 된 금성 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法이다
家具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의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家具의 힘」(『소멸』) 부분
박형준의 장롱은 사물의 기억을 빌려 삶의 내력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려는 시인의 욕망이 투영된 텍스트이다. 생채기를 자신의 기호로 삼는 이 낡은 텍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압축해 생생하게 공간화함으로써 우리의 존재감이 한없이 흔들릴 때, 그래서 그것을 다시금 회복해야 할 때, 낱낱의 흔적을 읽게 하여 만족감과 안정감을 주는 아름다운 화석이다. 아구스티누스의 말처럼 기억이 곧 ‘나의 정신’이자 ‘나 자신’이라면 기억을 깊게 아로새긴 장롱은 나의 정체를 증거하는 ‘무한히 깊고 다양한’ 힘이 된다. 존재의 파지(把持)와 망실 사이에서 진동하는 나를 진정시키는 힘, 장롱은 그러한 힘을 내장한 텍스트이다.
그러나 그 힘은 정반대의 효과를 낳기도 한다. 장롱을 통한 자기 정체성의 확인은 위안의 한때를 선사하지만, ‘생채기는’ 상처의 흔적이며 상처의 원인은 가난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한다. 장롱이란 텍스트는 보잘것없는 현재와 비루한 과거를 함께 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구의 힘을 둘러싼 상호 모순적인 갈등이 생겨난다. 힘의 긍정성을 유지하고 싶은 욕망과 그것의 부정성을 없애고 싶은 욕망. 기억의 보존과 망각을 동시에 요구하는 이러한 이중의 욕구는 필연적으로 내면의 불화로 나아간다. 장롱에 바치려던 헌사는 결국 “서글픈 가구론”으로 끝난다.
박형준의 대표작 중 하나인 「가구의 힘」에는 기억과 관련된 시인의 의식과 무의식이 잘 집약되어 있다. 그의 내밀한 의식은 기억의 재생력을 인정하면서도 자주 망각의 강으로 이끌린다.기억의 심연으로 내려감에 따라 더욱 강렬해지는 망각에의 갈망은 시인의 의식을 과거에서 현재로, 먼 것에서 가까운 것으로 되튕겨낸다. 기억의 끝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있다.때문에 과거를 소재로 한 그의 많은 시는 현재적 경험으로 환기되거나 현재를 되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
그의 시는 망각의 바람과 기억의 상기가 역설적으로 결합된, 망각의 욕망을 품은 기억의 산물이다. 기억된 시간의 층으로 내려가면서 그 시간을 뛰어넘으려는 욕망의 흔적.‘서글픈’ 현재로 되돌아오는 시. 그러나 박형준은 기억의 재생이 지닌 가치를 정확히 감지하고 있다. 신발을 버린다고 ‘끔찍한 물질’에서 해방될 수는 없으며, 비록 해방되었다고 믿어도 우리의 존재는 여전히 기억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기억은 파편화된 경험세계에서 자아를 새롭게 조정하고 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무의미한 과거의 파편들을 의미심장한 형태로 재구성함으로써 자아 회복의 길을 열기 때문이다.
망각에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끔찍한 물질’ 속으로 들어가는 박형준의 시적 작업은 그런 점에서 매우 정직한 자기와의 대면이자 투명한 자기탐구이다. 그는 과거에 안주하는 퇴행적 시인이 아니다. 세계내 존재로서 자기의 현재를 직시하기 위해 그는 과거로 잠행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억을 상상력의 어머니로, 상상력을 추동하는 촉매제로 삼는다. 기억과 상상력의 종합을 꾀하고, 기억을 창조적 상상력으로 삼으려 한다는 점에서 박형준은 서정시의 본령에 충실한 시인이다.그는 ‘끔찍한 물질’을 창조적 상상력으로 변용함으로써 자기승화와 시적 성취를 동시에 이루고자 한다. 그래서일까?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던지는 아이는 기억의 심연으로 하강하는 시인의 자기 이미지(self-image)로 읽힌다.
두레박
여기 혼자 노는 아이가 있다. 아이는 우물 앞에 서서 미나리꽝을 내려다본다. 아이는 이제 뭔가 하려 하는데,
아이는 이제 뭘 하려는 걸까요
오이의 속을 파내 실로 묶네요 두레박을 만드네요
실꾸러미를 우물 아래로 풀고 있네요
우물의 빛살이 공동우물의 천장에 어른거립니다
희미하게 두레박 떨어지는 소리 들립니다
오이꽃이 천천히 시드는데
아이는 향내 가득한 빛 한모금을 마십니다
혼자 겨울 미나리꽝을 생각하며
깊은 곳에 오이 두레박을 내리고 있습니다
―「두레박」(『잎사귀』) 부분
박형준의 시에 종종 등장하는 ‘우물’ ‘구멍’ ‘연못’은 바닥 없는 기억의 둔중한 깊이를 상징한다. 그것은 시간을 수직적으로 공간화한 장소들로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내밀한 세계의 심연을 표상한다. 단순하고 기계적인 수평성과 규격화된 시공간만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아파트의 옥상, 고층빌딩의 층계, 인공정원의 폭포가 대신할 수 없는 근원적 수직성을 ‘우물’ ‘구멍’ ‘연못’은 수호한다. 그래서 그것은 ‘지금 여기’를 향해 뚫린 숨구멍이기도 하다. 아이가 우물 아래로 던지는 오이 두레박은 기억의 지층을 뚫는 작은 굴착기이자 건조하게 획일화된 세계에 ‘구멍’을 내는 조그만 드릴인 셈이다.
그러나 그가 던진 두레박에는 “향내 가득한 빛 한모금”(「두레박」)보다 “잊고 싶은 흉터”(「천변풍경」)가 더 자주 담겨 올라온다. 돌아가신 할머니, 공장에 다니는 누이와 형, 밭에서 일하는 어머니,“밥 타는 냄새 속에/둥글게 모여앉아 기다리는 家族들,/굴뚝에 오르는 연기를 따라가면/밥상처럼 차려져 있는 달/먼 집, 대답 없는 날들이 대문이 빼곰 열린 마당/서늘한 우물에 어지럽게 떠 있”(「이 저녁에」, 『소멸』)는 풍경이 두레박의 수면에 비친다. 과거의 회상으로부터 환기된 박형준의 유년은 존재의 시원이 아니라 고통의 근원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유년시절을 현존의 안온한 고향으로 기억하는 일반적인 경향으로부터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유년시절이 지나간 과거인 데 반해, 회상된 유년은 과거가 아니라는 점이다. 기억 행위는 본질적으로 현재의 사건이다. 기억은 과거의 표상들을 가지고 구성된 현재의 이야기이거나 표상들의 결합에 의해 지금 만들어진 지시체계이다. 기억된 내용은 따라서 이미 경험된 사실만이 아니라 기억 주체의 현재적 상황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유년을 회상하는 그의 시들은 현재의 무엇을 지시하는가?
불우한 풍경이 대부분인 박형준의 유년 시편은 존재가 조화와 통일을 이루던 때란 없었으며 원초적 시원이 과거에 존재했으리라는 믿음이 미망에 불과함을 암암리에 드러낸다. 그리고 과거의 가치가 상실된 책임이 ‘지금 여기’의 현실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그의 시에 드리워져 있는 짙은 비애감은 현재나 미래로 눈을 돌릴 수 없는 자가 과거에 대한 기대 상실에도 불구하고 과거밖에 의지할 수 없다는 데서 생겨나는 감정이다. 그는 과거만을 생성하는, 언제나 ‘저녁’인 채 ‘소멸’만을 낳고 키우고 흩뿌리는 세계의 현실을 비애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천변의 소똥냄새 맡으며 순한 눈빛이 떠도는 개가
어슬렁어슬렁 낮아지는 저녁해에 나를 넣고
키 큰 옥수수밭 쪽으로 사라져간다
퇴근하는 한떼의 방위병이 부르는 군가소리에 맞춰
피멍울진 기억들을 잎으로 내민 사람을 닮은 풀들
낮게 어스름에 잠겨갈 때,
손자를 업고 나온 천변의 노인이 달걀껍질을 벗기어
먹여주는 갈퀴 같은 손끝이 두꺼운 마음을 조금씩 희고
부드러운 속살로 바꿔준다 저녁 공기에 익숙해질 때,
사람과 친해진다는 것은 서로가 내뿜는 숨결로
호흡을 나누는 일 나는 기다려본다
이제 사물의 말꼬리가 자꾸만 흐려져간다
이 세계는 잠깐 저음의 음계로 떠는 사물들로 가득 찬다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소멸』) 부분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라는 다짐 아닌 다짐은 그가 자신의 ‘시인됨’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여준다. 그것은 ‘저녁’으로 표상되는 향유 불가능한 세계의 본질이 ‘소멸’의 존재들―현재에서도 현존의 의의를 찾지 못하고 과거에서도 고유의 존재값을 얻지 못한 채 사라져가는 존재들―로 드러나는 광경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서 실존적 의의를 찾지 못하면서도 과거에 대한 기억을 창작의 원천으로 삼는 것은 시인으로 하여금 딜레마에 봉착하게 한다. 즉, 회상의 주체가 과거 및 기억된 내용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가치 부여가 망설여지고 지연되는 것이다. 『거울』에 실린 시들이 이미지의 긴밀성이 떨어지고 모호하고 산만한 예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들에도 불구하고 왜 ‘그것’이 씌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자의식이 분명치 않아 보이고, 그로 인해 시적 대상에 대한 장악력이 약화되어 있다.
가령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의 경우, 교실 풍경으로 시작된 시는 “유리창 곁에서/국수를 미친 듯이 먹고 있는 여자의 이미지”로부터 “올 봄은,//빵이 유일한 나의 친척”이라는 은유로 건너뛴다. 연이어 젖은 머리카락, 술 취한 사내, 유리창에 퍼붓는 눈동자, 미친 여자, 흘러내리는 국숫발, 작은 성냥불빛 등이 등장한다. 시의 마지막은 “유리창에 꽃잎을 피워낸/아이의 손가락 끝에서 꽃들은 상해 있고,/밑에 빵냄새를 풍기며/거울을 반짝이고 있네”라는 회상으로 끝난다. 어린시절의 교실을 비루하고 가난한 인간군상과 병치함으로써 불행했던 그때를 부각하려는 의도가 엿보이긴 하지만, 적합하게 의미화되지 못한 이미지들의 연속은 단순 나열에 머물러 시를 전체적으로 모호하게 만든다. 시인의 의식이 회상내용의 의미있는 선별보다 기억 그 자체에 과도하게 집중해서 생긴 문제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이러한 문제에서 어떻게 벗어나고 있을까?
눈동자
나는 여기에서 멈춘다. 나는 파편만을 남긴다. 말의 파편, 감옥의 창살에 비유될 그 흔적들; 세월에 씻겨 어느날 나를 가두었다고 믿었던 그 흔적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놀랍게도 거기에 무섭도록 아름다운 하나의 눈동자가 열리고, 눈꺼풀의 나른함 속에서 깨어나는 물의 희디흰 떨림이 단풍나무 잎사귀를 빠르게 소용돌이치면 힘겹게 그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어떤 물체의 외침이 삭제된 채, 그 위로 가느다란 물방울이 올라온다. 어느 오후에 연못을 바라보는 일로 하루를 보내본 사람이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파편」(『거울』) 부분
박형준은 대상을 섬세하게 바라봄으로써 심미적 거리를 유지하고 성급한 동일시를 침착하게 방지하는 시인이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충격적 감응을 일으킨 ‘무섭도록 아름다운 눈동자’와의 대면은 범상히 지나칠 일이 아니다. 이 시에서 눈동자는 “감옥의 창살에 비유될” 말의 파편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열린다.‘너’에 대한 기억을 언어의 조합으로 복원하려는 노력이 무잡(蕪雜)한 흔적의 나열이었음을 깨닫는 찰나, ‘무섭도록 아름다운’ 눈은 떠진다. 이 새로운 개안(開眼)의 순간은 자아(ego) 속에 웅크리고 있던 시인에게 일대 전환을 가져온다.‘나의 기억’만이 고려되던 자폐성이 눈동자의 발견으로 균열을 일으킨다. 아니, 그것은 발견이라기보다 각성에 가깝다.‘무섭도록 아름다운 눈동자’는 시인의 내부에서 뜨인, 자기 본연의 것이기 때문이다.
육체의 눈과 별개인 이것은 ‘홀로 있던’ 시인의 기억을, 세계를 향한 능동적인 기억으로 형질전환시킨다. 바깥세계의 사물은 이제 ‘그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의 흔적으로, 다른 ‘무엇’의 자취로 보인다. 예컨대 ‘너’가 아님에도 ‘너’의 전부로 이미지화된 ‘물방울’이 언어의 파편들 너머에서 발견되거나, 봄밤의 “때늦은 눈발”이 “여우구슬을 물고 도망치는 아이들”(「봄밤」, 『잎사귀』)과 겹쳐진다. 때론 밤 강에 떠내려온 포도잎에서 “포도를 따던 여인들이” 목욕하는 장면을 보기도 한다(「목욕하는 즐거움」, 『잎사귀』). 시인은 ‘무섭도록 아름다운 눈동자’에 의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버드나무 가지에 매달려
오늘밤 흰달로 오시네
물가에 둥근 돌
빨래가 쌓였던 곳,
돌덩어리 가슴에 박혀 울던 사람들
물결에 씻겨가네
물살 아래
누워 있네
처녀들 모두 떠나가고
얼음 구멍에 손을 넣고
어머니 빨래를 끄집어내시네
죽은 처녀들 끄집어내시네
물에 잠겨 있는 어머니
오늘밤 흰달로 오시네
―「冬母冬月」(『잎사귀』) 전문
『잎사귀』에 실린 대부분의 시편들은 ‘지금 여기’의 사물을 그것과 인접한 다른 존재의 흔적으로 응시하거나 몽상한 기록들이다. 제유적 투시법으로 명명할 수 있는 이러한 시선의 형식은 포착된 대상을 어떤 미지의 존재가 총체적으로 내포된 자취로, 소멸된 존재들이 망각의 무덤에서 부활한 예로 상상케 한다. 「동모동월(冬母冬月)」은 박형준의 제유적 투시력과 유추적 상상력이 결합하여 환상의 공간을 만든 대표적 작품이다. 이 시의 전경(前景)은 의외로 단순해서 버드나무 가지 위에 달이 떠 있는 겨울밤의 풍경이 전부이다. 하지만 시를 자세히 보면, ‘흰달’은 어머니의 은유로 하늘에도 있고 물속에도 있다. 물속의 ‘달-어머니’는 물가의 ‘둥근 돌’ 곁을 흐르는데, 이곳은 처녀들이 빨랫감을 놓던 자리이기도 하고, 가슴의 ‘돌덩어리’ 때문에 사람들이 앉아 울던 자리이기도 하다. 시인은 둥근 돌이 품고 있는 이들에 대한 기억을 자신의 기억으로 회상한다. 사물의 기억이 ‘나’의 기억으로 삼투되면서 세계에 대한 인식 지평도 넓어져 둥근 돌을 거쳐간 이들의 슬픔과 설움, 눈물 나는 인생사까지 감지한다.
그런데 3연에 이르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줄 알았던 처녀들과 사람들이 “물살 아래/누워 있”다. 어찌된 일일까? 실은 처녀들, 사람들이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 대한 물살의 기억이 누워 있는 것이다. 시의 절정은 ‘달-어머니’가 이들을 ‘빨래’로 끄집어내는 4연에 있다. 모두 떠나가고 없는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놀랍게도 이들을 건져내어 빨래한다. 그들의 아픔을 깨끗이 정화하려는 듯 차가운 “얼음 구멍에 손을 넣고”서. 그런데 이즈음에서 더 환한 광경이 펼쳐진다. 어머니의 빨래는 겨울강에 비친 하얀 달빛 그 자체인 것이다! 달-어머니-빨래로 이어지던 은유의 중첩이 빨래-어머니-달로 바뀌면서 어머니가 빨랫감이자 빨래하는 이가 되는 뜻밖의 상황이 전개된다. 어머니는 강물 속 달이 되어 다른 이들을 씻겨보내고 당신도 씻는다. 그러곤 또 누구를 빨래하려는지 여전히 물속에 잠겨 있다.
밤하늘의 달에서 ‘없는’ 존재들을 투시하는 박형준의 시적 상상력은 ‘지금 여기’의 시공간과 다른 곳의 시공간을 교차·통합하면서 어머니, 처녀, 사람들, 빨랫감, 둥근 돌을 현재의 세계에 돋을새김한다. 사물 각자, 존재 각각의 기억이 융합되고 더해지면서 망각되었던 것들의 귀환이 시인의 상상을 거쳐 달성된다. 이렇듯 저편에서 이편으로 출몰하는 비존재들의 4차원적 월경(越境)은 그의 시를 확고부동한 사실성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적인 제약을 벗어난 몽상의 세계로 만든다. 물리적 공간을 벗어난 제3의 공간에서 ‘시간 밖의 시간’이 창조되는 세계. 그래서 「동모동월」은 원형적 이미지가 가득한 설화적 세계로 다가온다.
흰 부처가 상류에 있다지
일년에 한번씩 흰 칠을 한다는
부처가 있다지
오늘밤이 그날이라지
불꽃을 문 연등이
자갈밭에서
떠내려온다지
냇가 위
내부간선도로
흰빛들이 꾸물거리며
교각 위로 떠오른다
누에들이 뽕나무 위로 쉼없이 올라가듯
잠시도 쉬지 않고
떠오른다
빛은 집착을 만든다지
여인들이 부처의 몸에 흰 칠을 하며
아이 낳는 꿈을 꾼다지
마른 냇가에
붉은 연등이 떠내려온다지
상류에서
오늘밤 흰 꿈이 내려온다지
―「눈 내리는 모래내의 밤」(『잎사귀』) 전문
「동모동월」과 비슷한 계열의 이 시는 어조의 변화를 통해 눈이 내리는 ‘지금 여기’의 사건이 시인의 몽상으로 미묘하게 전환되는 순간을 보여준다.2연이 평서법의 종결어미를 통해 현재의 시공간을 암시한다면, ‘~다지’로 끝나는 1연과 3연은 그 추측의 어감에 힘입어 지복(至福)을 바라는 여인들의 시공간을 과거-현재-미래의 구분을 넘어선 세계로 현현(顯現)한다.1,3연과 2연을 매개하는 ‘흰 눈’은 “흰 부처”와 겹쳐지면서 여인들의 사연을 담은 오래된 전설(혹은 전승될 이야기)이 되어 떠오른다. 그리고 ‘흰 부처-흰 빛-흰 꿈’으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중첩은 마른 냇가에선 볼 수 없는, 붉은 연등이 떠내려오는 광경을 투시하게 한다.‘눈 내리는 모래내의 밤’은 이제 현실도 비현실도 아닌 아득한 꿈의 세계가 된다.
인용한 시 외에도 『잎사귀』에 실린 「백동백이 있는 집」 「새벽」 「봄밤」 「내 얼굴로 돌아오다」 등의 시는 과거를 숭고시하는 낭만적 신화성과 달리, 시간법칙을 이탈한 존재와 비존재들이 공시적 순간 속에 혼융되어 각자의 사연을 이야기하는 신비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존재/비존재의 구분이 붕괴하고,나/너의 배타적 경계도 사라지며, 주체/객체의 논리적 이분법도 의미를 잃는다.박형준 시의 설화적 성격이 전통적 토속성이나 이상화된 민족성 등과 거리가 먼 것은 이렇듯 시간의 역사화를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의 확장을 통한 세계의 열림, 혹은 근대적 시공간의 기계적 분절성을 넘어선, 통합된 순간으로서의 설화적 세계. 비역사적 감각을 바탕으로 기억에의 궁구(窮究)가 다다른 박형준 시의 최근 풍광을 우리는 이렇게 이름 붙일 수 있을 듯싶다. 서정주와의 친연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자기 기원의 창출이라는 역사적 욕구가 그의 시에는 삭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의미 부여를 위해 과거에 의존처를 세우고, 그것이 현재의 확실한 근거가 되지 못할 때 미래에다 지지대를 세우는 근대(성)의 전통과 비교할 때, 그의 시는 과거-현재-미래라는 단위를 기억과 흔적의 상호 텍스트성을 음미하고 몽상하는 가운데 해체하고 무화시킨다. 그의 시가 지닌 설화성은 머나먼 시초의 확인과 향유보다는 나와 타자의 현재적 공존을 환기시킴으로써 위축된 우리의 삶을 ‘지금 여기’의 무대에서 새롭게 생성하려는 의욕을 품고 있다.
산문집 『저녁의 무늬』에서 박형준은 “신화를 공부하고 싶”(73면)다는,“기억과 그러한 근원의 DNA들이 결합된 시를 쓰고 싶”(74면)다는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 『잎사귀』의 시들을 떠올릴 때 예사로 한 말은 아닌 듯하다. 비역사적 감각의 소유자가 그릴 근원의 풍경은 과연 어떤 것일까 자못 궁금해진다. 그간 꾸준히 계속된 그의 시적 행보로 짐작컨대 우리 시의 또다른 진경(進境)을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잎사귀
박형준의 시는 지금 변화의 문턱에 있는 듯하다. 비애의 어조에서 벗어나 차가운 불꽃의 의지를 자기갱신의 원동력으로 삼으려 한다든가, 버리고 싶었던 ‘끔찍한 물질’을 “현실과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굳건한 추억”(『저녁의 무늬』 84면)으로 전환하려는 것이 그렇다. 그래서 그의 시는 예전과 달리 ‘희망이 동반된 추억’으로 읽힌다.그리고 흔적에 대한 투시를 통해 존재의 잔영을 느끼고 시간의 두꺼운 지층을 더듬으면서 ‘고여 있던 기억’의 협소함을 벗어나 세계의 넓음과 다종다기함을 감각하고 싶어한다.
“조용히/나무에 올라 발자국을 낳고 싶다”(「봄밤」, 『잎사귀』)는 마음에는 ‘자국’의 태생적 가벼움으로 세계의 무거움을 들어올리려는 소망이 숨어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박형준은 더욱더 날개를 꿈꾼다.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잎사귀’의 날개를,“흐린 잎맥의 기억으로/폭풍을 예감”(「폭풍의 날개」, 『잎사귀』)하는 날개를. 그것은 세계의 심연을 향한, 존재의 뿌리를 향한, 추락하는 비상이자 하강하는 상승이다. 박형준은 날개가 일으킬 폭풍을 그의 시에 옮겨놓으려 스스로를 ‘잎사귀’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아직은 “심연을 잃고/물 밖에 떨어진 잎사귀”(같은 시)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그의 날개는 곧 그를
정점으로 인도하리라.
가볍게 공기를 호흡하게 하리라.(「냄새」, 『잎사귀』)
그리하여 우리의 세계를 그의 호흡으로 한껏 부풀릴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