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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쇠락하는 문화와 떠오르는 문화의 버석거림

I.A. 곤차로프 『오블로모프』 1·2, 문학과지성사 2002

 

 

이강은 李康殷

문학평론가·경북대 노문과 교수 kelee@knu.ac.kr

 

 

가야 할 길의 지도가 잘 그려져 있고, 탐험가의 신념과 영감이 불타고 있다고 해도 여행은 길을 떠나 한걸음씩 걷지 않고는 완성되지 못한다. 우리는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리얼리즘 문학이론을 가지고 있고 위엄있는 리얼리즘 문학정신도 있으며 풍부한 경험도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의 지도를 들고 전망을 품은 주인공이 길을 떠날 때 그에게는 이론과 전망 외에도 수없이 많은 덕목이 필요하다. 그점에서 곤차로프(I.A. Goncharov)의 『오블로모프』(Oblomov, 최윤락 옮김)가 리얼리즘 문학의 여정에서 보여준 덕목은 적지 않다.

우선 전형이라는 점에 주목해보면 오블로모프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성장하면서 몰락의 운명에 처한 지주계급의 행태와 심리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블로모프 기질(Oblomovshchina, 퇴보적·무의지적인 생활방식)이라는 보통명사를 만들어낸 인물로서,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뿌슈낀(A.S. Pushkin)의 『예브게니 오네긴』에서의 오네긴, 레르몬또프(M.Y. Lermontov)의 『우리 시대의 영웅』에서의 뻬초린, 뚜르게네프(I.S. Turgenev)의 『루진』에서의 루진 등과 같은 리슈니 첼로베끄(lishnii chelovek, 남아도는 사람·쓸데없는 사람·무용자·잉여인간 등으로 불린다)의 완결판과도 같다. 그가 처해 있는 상황 역시 러시아 사회에서 몰락의 운명에 처한 봉건 지주계층과 떠오르는 부르주아적 삶과 문화가 대비적으로 펼쳐지면서 역사적 전형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러나 『오블로모프』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더 큰 덕목은 일상의 축적을 통해 형상을 구축해내는 ‘아주 느린’ 리얼리즘,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는 ‘한걸음씩의 리얼리즘’이다.

시골 지주인 주인공 오블로모프는 뻬쩨르부르끄에서 하인과 함께 집을 얻어 살아가고 있다. 그는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 세상의 “냉기”에 부딪히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안온한 침실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않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미루고 잠을 자거나 먹는 일로 소일할 뿐이다. 그가 입고 있는 잠옷은 “부드럽고 신축성이 뛰어나서” “말 잘 듣는 하인처럼 미세한 몸의 움직임에도 전혀 거스름이 없다.” 그리고 실내화는 “쳐다보지도 않고 침대에서 마루로 발을 쭉 뻗으면 곧장 발이 빨려 들어가도록” 길쭉하고 널찍하다. 이렇게 게으르고 비활동적인 오블로모프에게 시급히 해결해야 할 두 가지 문제가 닥친다. 자기 영지에서 관리인의 횡령과 조작 때문에 자꾸 수입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직접 내려가서 영지 관리와 운영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과 벌써 몇달째 세를 내지 못해 이사를 요구받고 있는 집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두 가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나름대로 미래의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개혁자로서의 몽상을 즐기기도 하지만 그것을 현실화할 힘이 그에게는 전무하다.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의지하여  문제를 회피하려고만 할 뿐 정작 필요한 편지 한장을 쓰지 못한다. 가장 신뢰하는 친구 슈똘츠의 도움을 받아서 사태를 극복해보려고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모기에 물려 부풀어오른 입술’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 또한 올가라는 여인에게 사랑을 느끼면서 정말 새롭게 부활하고자 하는 의욕과 열정을 가져보지만 그것도 지속되지 못하고 그저 안락하고 나태한 삶을 떠받들어주는 과부를 부인으로 맞아들이고 살다가 영지와 재산을 다 날리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이렇게 요약해보면 오블로모프는 대단히 풍자적이고 희화화된 인물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곤차로프는 인물들에 대해 풍자나 냉소, 근엄한 어조 따위를 자제하고 일상생활과 그 속의 대화를 옮겨놓는 일에 열심이다. 일상의 세밀한 묘사는 각질화된 지주 문화의 산물인 오블로모프의 언어와 의식이 어떻게 새로운 환경과 어울리지 못하고 균열을 일으키는가를 보여줌으로써 한 사회 속에 존재하는 두 개의 문화, 다시 말해 쇠락하는 문화와 떠오르는 문화의 섞일 수 없는 갈등의 버석거림을 듣게 해주는 것이다. ‘소설을 서술해가는 작가’는 주인공을 ‘깊이 들여다보고’ 주변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까지 ‘다 알고’ 있으며, 그들에 대한 평가까지도 ‘다 내리고’ 있다. 또한 그는 사건의 추이와 결말까지 ‘다 알고 있는 작가’이다. 이러한 전지적 시점의 작가가 부정적인 인물에 대해 끝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바로 이 점에서 곤차로프의 리얼리즘을 ‘한걸음씩의 리얼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117-472곤차로프의 리얼리즘은 나아가 오블로모프를 부정의 파토스로만 휘어잡지 않는다. 또한 마찬가지로 슈똘츠를 새로운 사회활동가로 형상화하지도 않는다. 자하르나 농민계층을 이상화하여 미래의 주체로 끌어올리려는 ‘혁명적 의도’도 없다. 오블로모프가 꿈꾸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정지해버린 가운데 늘 “축제를 벌이는 것” 같은 부유한 지주 집안의 어린시절로서 그 속에는 선량하고 인간적인 요소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며, 그곳은 99%의 민중의 희생에 의해 보장되는 1%의 안락과 평온과 ‘인간성과 미덕’의 세계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슈똘츠의 부르주아적 활력과 사업적 능력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가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 그리하여 오블로모프를 구원해줄 이상으로 그려지는 것도 아니다. 슈똘츠와 번거로운 일상의 비인간성은 오히려 오블로모프에 의해 적절히 반박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곤차로프는 삶의 명확한 전망의 지도를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전망의 지도 대신 한걸음 한걸음씩 침착하게 걸어가는 꼼꼼한 여행 끝에 올가라는 여성상을 만나면서 오블로모프와 슈똘츠 모두를 넘어설 수 있는 ‘전망’을 형상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올가 형상은 미약한 추상일 뿐이고, 이 형상이 감당해야 할 구체적 역사적 현실은 곤차로프에게 아직 보이지 않는다. 혁명적 민주주의를 날카롭게 선동하던 성난 벨린스끼(V. Belinskii)나 사회주의적 신열에 몸을 떨던 한때의 도스또예프스끼(F.M. Dostoevskii),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순결무구한 혁명가의 상을 선취해내려던 영원한 혁명가 체르늬셰프스끼(N.G. Chernyshevskii), 자유주의적 이상에 목마른 뚜르게네프(I.S. Turgenev)의 주인공들, 이들은 곤차로프에게 ‘아직은 들르지 않은’ 행선지였을까, 혹은 지나쳐버린 ‘광장’이었을까.

이런 의문을 곤차로프가 다 풀어주지 못할 것 같다. 그는 너무나 과작의 작가여서 평생 세 편 정도의 손꼽힐 만한 소설을 남겼을 뿐이다. 그것도 편당 십여 년씩 걸려서 발표했으니 그의 공직생활을 감안하더라도 참으로 적은 작품을 남긴 작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곤차로프의 재능을 의심할 수는 없다. 적어도 『오블로모프』는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여러 정상급 작품들에 결코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의 명성에 비해 너무 늦게 소개된 이 소설을 읽는 재미는 남다르다. 우리는 오블로모프라는 인물에 대해 너무나 많은 문학사적 소문을 들어왔지만 이제야 직접 자신에 대해 말하는 그를 만나게 되었다. 더구나 번역자는 보기 드물게 빼어난 한글을 구사하고 있어 번역문학을 읽는 어려움을 한결 덜어주고 있다. 다만 하인 자하르의 말을 줄곧 충청도 사투리로 번역한 것은 생각해볼 점이다. 주인에 대해 깍듯이 존경을 표하면서도 함부로 덤비기도 하는 자하르의 이중적 성격(이 역시 하나의 시대적 징후가 아닐 수 없는)이 우리말 사투리가 주는 어떤 다른 상상력 때문에 충분히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