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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낭만적 사랑은 어떻게 부정되는가

이만교와 정이현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이 있음. llauper@hananet.net

 

 

1. 사랑의 부재를 알리는 서사

 

낭만적 사랑의 유효성을 부정하는 냉소적인 나르시시스트는 근래 우리 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캐릭터 중의 하나이다. 이들은 수많은 물질적 기호와 상품 등이 넘쳐흐르는 대중문화 속에서 사랑의 환상이 쉽게 변질될 수 있음을 직시한다.“사랑은 아무런 장벽도, 아무런 계급도, 아무런 법도 알지 못한다”라는 낭만적 신념은 사랑의 이데올로기가 본질적으로 환상을 필요로 함을 알려준다. 문학 속의 나르시시스트들이 부정하는 것은 이 환상의 허구성이다. 온통 사랑의 상품으로 치장되어 있는 문화현실 속에서 낭만적 사랑에 대한 의심과 부정의 태도는 연약한 자아를 감정의 상처로부터 보호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만교(李萬敎)와 정이현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사랑의 담론 역시 냉소적 나르시시즘의 자기보호적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 이들의 소설은 자본주의사회의 결혼과 가족제도를 둘러싼 물신화 현상, 계층화 현상에 민감한 촉수를 들이민다. 낭만적 사랑의 유효성을 진단하는 나르시시스트들의 책략은 이미 은희경(殷熙耕)과 김영하(金英夏)의 소설에서 노출된 바 있다. 은희경의 소설이 거듭 천명하는 자조와 냉소는 타인으로부터의 상처를 예감하는 자들이 보여주는 자구의 방식이며, 김영하의 소설에서 보여주는 자기단절의 태도 역시 같은 맥락에 서 있다. 이들의 소설은 낭만적 사랑을 견제하는 자기보호의 전략을 만들어내지만 그것 자체가 사랑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단절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냉소적 나르시시즘은 오히려 타인과의 단절이 가져오는 고독의 공포를 암암리에 호소한다. 김영하의 소설에서 종종 드러나는 삶의 낭만성에 대한 감각이나, 은희경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자기연기술(自己演技術)의 허구성은 나르시시즘의 본질이 소통욕구에 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만교와 정이현의 소설이 이들 소설에 비해 한결 가볍게 다가온다면 그것은 나르시시즘에 덧씌워지기 쉬운 감정적 상처를 말끔히 지워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만교와 정이현 소설의 인물들은 어떤 부담감도 없이 사랑의 문화적 기호가 퍼뜨려놓은 이미지들을 적극적으로 포식한다. 경제적인 조건으로 결혼상대를 가늠하는 결혼시장의 풍속, 여성과 남성을 묶어두는 순결이데올로기의 강박, 연애의 기술 속에 스며들어 있는 물신화(物神化)된 기호들, 행복을 과시하는 가족의 내적인 분열 등등 소설 속에서 파헤쳐지는 사랑의 위선적인 행태는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낭만적 사랑이 포장해놓은 온갖 세속적인 가치들과 물신화된 욕망을 세세히 거론하고 분석하는 이들 소설은 통속적 세태묘사를 거침없이 동원한다. 결혼식장의 한 풍경 속으로, 맞선을 보는 남녀의 어색한 눈빛 사이로, 정결한 연인으로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여대생의 수줍은 미소 속으로 파고드는 작가의 시선은 그 자체로 경쾌하고 유연하다. 더이상 묘사에 대한 강박이나 윤리적 미의식에 얽매이지 않는 시대에 이들의 작품은 소비적 생산품으로서 소설이 지닌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무수한 기호 속에서 자기연기술마저도 철저한 쾌락행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 과정은 소비사회의 소설이 암시하는 새로운 특징을 내포한다.

 

 

2. 가족로망스의 몰락과 결혼제도의 세속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

 

이만교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민음사 2000)는 물질화된 결혼문화에 대한 직설적인 공격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자본주의적 결혼세태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관심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알고 싶다면 이후에 씌어진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문학동네 2001)를 먼저 읽어볼 필요가 있다.

‘머꼬네’ 식구들이 겪은 경제공황 속의 서민생활사를 세밀하게 그려낸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는 ‘IMF 시대의 가족로망스’라고 명명할 만하다. 복숭아밭으로 둘러싸인 마을 언덕 오르막에 자리한 아담한 단층집에 살던 식구들은 도시개발과 재건축 바람에 휩싸여 ‘지하로 내려앉고 있는 무덤’과도 같은 집에서 소시민의 삶을 이어나간다. 여유롭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던 식구들은 IMF 경제공황이 닥치면서 수난을 겪기 시작한다.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에서 그려지는 가족적 가치에 대한 신뢰는 경제적 궁핍의 생활 속에서도 여전히 서로를 아끼고 보듬는 화목한 식구들의 모습에서 발견된다. 식구들은 “꾀죄죄하니 차려입고는 다만 먹고살기 위해 다급하게 뛰어다니”(92면)지만 서로에 대한 우애와 사랑을 잃지 않는다. 이만교가 다른 소설들에서 보여주는 냉소적 시선과는 사뭇 다른 이 따뜻한 분위기는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가 지향하는 가족로망스가 다분히 과거지향적인 추억담임을 암시한다. 주인공에게는 귀여운 조카 머꼬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함께하는 가족의 공간만이 바깥 세계의 폭풍우를 막아줄 수 있는 행복한 곳이 된다.“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빠르게 자라나는 머꼬와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가장 매력적인 해연이 마루에서 노는 모습”(160면)에 황홀해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짐작되듯이 머꼬네를 감싸는 것은 소박한 소시민적 행복론이다.

추억의 가족로망스는 농담과 과장에 의해 힘을 얻는다. 이전 시대의 가족소설과 달리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가 보여주는 새로운 면모가 있다면 세밀한 풍속을 다루는 유머러스한 묘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나물을 다듬던 사돈할머니가 잠결에 칼로 자기 손을 다듬는 바람에 병원에 실려가는 장면이나 다세대주택으로 변모한 머꼬네 집에 유명인들이 머물다 갔다는 식의 과장된 해학은 이 소설을 움직이는 중요한 힘이다. 소설을 빛내는 밝고 명랑한 웃음의 화법은 머꼬네 식구들에게 닥쳐온 외부적 역경이 얼마나 불합리한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머꼬네 식구들은 가족공동체의 행복한 삶을 영위하려고 노력하지만 비정한 현실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들이 꿈꾸는 가족애의 가치는 비정한 자본주의사회에서 쉽게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경제적 불황을 견뎌나가는 식구에게 수해마저 닥치자 주인공은 탄식한다.“우리집을 지나간 그 어떤 정치경제사의 불운과도 무관하게 우리는 또 행복할 수 있었다!”(239면)라는 주인공의 자부심은 “우물 안 개구리의 안일한 자기만족이었을 뿐”(같은 곳)임이 드러난다. 가족공동체의 해체와 더불어 계층화 현상에 의해 소외되고 단절되기 시작한 서민층의 삶속에서 머꼬네 식구들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머꼬네 집’이 보여주는 가족의 붕괴과정은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배경으로 하는 황량한 가족현실과 맞물린다.‘머꼬네’에서 든든한 가장의 역할을 했던 어머니는 병약한 모습으로 아들의 결혼을 걱정하고, 낭만적 사랑의 신봉자였던 주인공은 실연(失戀) 이후 매사에 씨니컬하게 반응하는 자유주의 독신론자가 된다.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가 보여준 가족간의 따뜻한 사랑이나 낭만적 로맨스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자본주의적 삶의 프로그램 속에서 생기를 잃고 박제된 가족 일상으로 현현한다. 도시화와 핵가족의 시대에서 ‘머꼬네 집’은 물에 잠겨버린 ‘추억 속의 공간’이 된 것이다.

낭만적 사랑에 대한 담론을 냉소적으로 파헤친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결혼제도의 상투성과 통속성에 세부의 묘사를 집중시킨다. 자본주의사회의 결혼제도는 계층끼리의 물물교환 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결혼을 전제로 한 모든 연애는 물질적인 조건에 의해 계산되고 연출된다. 소설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연애와 결혼의 형태는 그래서 기만적이고 비극적이다. 준영의 친구인 규진의 결혼은 규진의 불륜으로 인해 파경에 이른다. 화려한 삶을 꿈꾸던 준영의 여동생은 유부남의 애인이 되어 ‘강남’의 아파트를 얻는다. 주인공인 준영과 연희 역시 불륜을 통해 그들의 로맨스를 실현하고자 한다.

이 소설에서 당면한 부조리한 사랑은 등장인물들이 왜 냉소적인 자기애의 방식으로 삶을 재단할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준다. 이들에게 낭만적 사랑은 추억 속의 ‘머꼬네 집’에서나 존재하는 환상의 감정이다. 위악과 거짓이 가득한 세계 속에서 버텨내려면 자기연기술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물들은 고의적으로 단답형의 대화와 농담을 통해 타인과의 감정적 마찰을 피하는데, 짧고 건조한 대화의 차용은 이만교 소설에서 종종 선보이는 씨나리오 기법을 넘어서 등장인물의 성격을 암시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보여주는 신선함 역시 낭만적 사랑의 세속화라는 주제의식을 표현하는 ‘가볍게 말하기’ 방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예로 준영과 연희가 나누는 건조하고 경쾌한 대화는 질투와 열등감을 포함한 복잡한 사랑의 감정을 담고 있다.

 

“선 봤어.”

“아하” 나는 상황을 이해했다.“어떤 사람이야?”

“의사야.형제가 모두 의사래.”

휘파람을 날리고 나서 말했다.

“나이스 히트! 드디어 찾았군.”

“그런데, 좀 못생겼어.”

“안성맞춤이군.”

“왜?”

“원래 옷을 고를 때는” 담배연기 속으로 한숨을 집어넣고 나서 말했다.“마음에 드는 물건일수록 오래 들여다보아야 해. 흠집이 없기를 바래서가 아니라 찾기 위해서지. 흥정할 때 유리해지거든.”(150~51면)

 

콤플렉스를 잔뜩 숨기고 있는 준영의 훈계는 연희와의 감정적 소통을 의도적으로 차단한다. 준영은 결혼상대 고르는 것을 물건 사는 일에 빗대는 신경질적인 어법을 통해 자신의 감정적 불만을 해소한다. 농담과 냉소를 통해 그는 연희의 세속적인 결혼관과 다른 자신의 ‘비판적’인 입지를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낭만적 사랑에 대한 신념을 비웃으면서 물적 가치에 좌우되지 않는 안전한 세계로 자기를 피신시키는 준영의 모습은 그렇게 당당해 보이지 않는다.‘독신으로 살고 싶어하는 신세대적 자유주의’를 구가하지만 정작 자신이 결혼시장에서 형편없는 존재임을 알고 있는 준영은 선본 남자들을 평가해달라는 연희에게 “일단 나를 비롯해서 (…) 가난한 자식들은 빼!”(170면)라고 일갈한다.“사랑은 세상에서 신축성이 가장 뛰어난 고무줄일 뿐”(187면)이라는 준영의 자조는 낭만적 사랑을 위악적으로 부정함으로써 현실을 견뎌내려는 태도이다.

준영의 자기연기술은 타인과의 교류나 스스로의 내적 변화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는 결혼이 상품화된 현실을 그대로 관망하고 냉소할 따름이다. 냉혹하게 이야기해서 준영이 독신으로 살고 싶어하는 중요한 이유는 결혼제도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 있지 않다. 그의 독신주의는 결혼시장에서 상품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초라한 자신의 환경에서 비롯된 열등감을 견디기 위한 위악적 방어전략에 불과한 것이다.

불안정한 직업을 지닌 준영에 비한다면 연희는 미모와 재력을 갖춘 나름대로 ‘상품가치’를 지닌 신붓감이다. 연희는 자신의 경제적 기대수준을 채울 수 있는 의사남편을 고를 수 있었으며, 자신의 성적 취향을 만족시켜주는 준영과 비밀스러운 동거생활도 꾸려간다. 연희가 보여주는 ‘사랑’과 ‘결혼’의 분리는 세속화된 자본주의 결혼제도를 보완하는 새로운 ‘대안’(!)인 셈이다. 그녀는 자신의 이중생활에 대해서 당당하게 변명한다.“날이 갈수록 아무런 죄책감도 느껴지지가 않아. 그냥 언젠가 네가 말한 것처럼 두 개의 드라마에 겹치기 출연을 하고 있는 것 같을 뿐이야. 그래서 남들보다 약간 바쁘게 살아가는 듯한 느낌뿐이야”(271면)라는 연희의 고백은 준영과는 다른 관점에서 행해진 결혼제도의 부정과 그것에 대한 냉소이다.

그렇게 볼 때 이 소설에서 낭만적 사랑의 신화에 도전장을 내미는 주체는 지식인적 언술로 사랑의 개념을 거론하는 준영이 아니라 사랑과 결혼을 분리시키는 연희라고 할 수 있다.1자본주의사회의 결혼문화가 만들어낸 욕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연희는 그 자체로 소비되어가는 사랑의 환상에 탐닉한다. 그녀에게는 결혼제도 속의 사랑이건, 불륜 속의 사랑이건 다같이 권태를 견디기 위한 한시적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세속적인 결혼신화 속에서 위장된 낭만적 사랑을 차갑게 떼어낸 후 불륜의 방법으로 자신의 사랑을 실현한다.

물론 사랑과 결혼을 분리시키려는 연희의 야심찬 기획은 출발지점이 갖고 있는 모순성으로 인해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낭만적인 사랑과 물질적 조건이 합치되는 결혼에 대한 환상이 암암리에 존재하는 한 그녀의 욕망은 늘 균열을 드러낸다. 그녀는 결혼관계에서는 가슴 두근거리는 사랑에 목말라하며, 연인인 준영과의 관계에서는 안락한 경제적 조건을 아쉬워한다. 그런 의미에서 냄비뚜껑과 국자를 든 채 ‘약간 부끄러움을 타는 듯한 표정’으로 웃어보이는 연희의 사진은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한 냉소와 경멸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사랑과 물질이 결합되는 결혼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연희가 탐색했던 자유로운 사랑의 환상은 위반과 정착의 경계에서 모호하게 멈춰서 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주는 아쉬움이 있다면 연희와 준영이 자각하는 결혼제도의 모순성을 평이한 교훈적 해석으로 마무리하는 데 있을 것이다. 연희와 준영이 감지하는 물신화된 욕망의 모호함이 계층적 환경의 차이 이상으로 탐구되지 못하는 것은 이 소설의 한계이다.“우리 역시 두 개의 길을 모두 가볼 수는 없는 거였어. 우리가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건 사랑 없이 의사와 결혼한 것보다 훨씬 더 치사한, 두 개의 길을 다 가보려는 욕심에 불과해”(273면)라는 준영의 고백은 결혼에 대한 이상적 기대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데 그치고 만다. 이 지점에서 작가가 투시하는 사랑의 담론은 지극히 평범한 발견에 머무른다. 결혼제도 속에 위장된 낭만적 사랑을 냉소하고 비웃던 이들의 연애행각은 결국 제도를 초월하는 또다른 사랑에 대한 아련한 동경을 드러내는 아이러니컬한 결과로 귀착되고 있는 것이다.

 

 

3. 소비 욕망을 연출하는 여성: 『낭만적 사랑과 사회』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Ulrich Beck)은 일상의 고통에서 빠져나와 일상성에 새로운 아우라(aura)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낭만적 사랑을 ‘세속적 종교’에 빗댄 바 있다. 그의 지적대로 “현대의 시민들은 계급적 연결망이 안락한 사회적 확실성과 사회적 지위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에게만 고유한 사귐을 생각해내야 한다”2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 이미 『낭만적 사랑과 사회』(Romantic Love and Society,1983)3라는 저서를 통해서 사랑의 개념을 명쾌하게 분석한 재클린 싸스비(Jacqueline Sarsby)는 낭만적 사랑이 근대사회에 이르러 관습적인 형태로 길들여지는 과정을 분석한다. 그녀에 따르면 남성의 구애가 중심을 이루던 중세시대에 비해 개인주의적 사회경제질서로 재편된 산업사회에서는 여성들이 적극적인 욕망과 감정을 드러내게 되었다. 결혼과 가족이 사적인 영역으로 분리되면서 낭만적인 사랑 역시 제도적인 결혼으로 흡수된다.

싸스비의 사회적 통찰을 문학적으로 빌려온 듯이 보이는 정이현의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문학과지성사 2003)는 낭만적 사랑이 결혼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여성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물질적 욕망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여성상의 등장은 한국소설의 새로운 면모라 할 만하다. 정이현 소설의 여성들은 낭만적 사랑을 덧씌우는 사회의 편견과 관습에서 자유롭다. 사랑이 연출될 수 있음을 과시하는 여성들의 출현은 이전의 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여성인물들은 자신의 소비욕망을 당당히 드러냄으로써 가부장제의 물신화된 사회가 여성의 육체와 정신에 씌운 허위의식을 가차없이 뒤집는다. 소비사회의 여성적 욕망을 충실하게 따른다는 점에서 정이현 소설의 인물들은 현대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소비의 욕망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주체들은 스스로 구상한 전략에 의해 사랑의 관습을 부숴나간다. 어린 소녀를 대상으로 하는 관음증과 화해로운 가정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여학생(「소녀 시대」), 일과 사랑을 동시에 성취하는 경쟁력있는 커리어우먼의 이미지에 탐닉하는 여성(「트렁크」), 순결하고 모범적인 부부로 가장하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연인들(「홈드라마」), 육체적인 고통을 감내하며 아름다운 신체의 이미지를 보존하려는 여성(「신식 키친」) 등 여성인물들은 욕망의 세속성을 직접적으로 찬탄하며 향유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표출하는 소비욕망이 때로는 애초에 추구했던 본질적인 대상으로부터 끊임없이 어긋나는 ‘불안정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계층화된 사회에서 풍부한 물질을 소유하고 자신이 상상하는 이상적인 연애, 결혼생활을 추구하고자 하는 여성들은 결정적인 지점에서 욕망의 균열을 드러낸다. 「트렁크」의 주인공이 “어딘가, 빛이 들어오지 않는 작고 캄캄한 공간에서 사지를 웅크리고 잠들고 싶었다”(61면)라는 피로감을 드러내는 장면이나, 「소녀시대」의 주인공이 “다음에 진짜로 집을 떠날 때는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돈은 꼭 필요했다”(94면)라고 하는 말은 그녀들이 사로잡혀 있는 소비욕망이 진정한 대상을 상실하는 점을 보여준다.

물질을 향유하는 여성의 욕망이 정체를 잃어버린 채 극단적인 자기몰입으로 향하는 것은 「순수」에서 잘 드러난다. 계획적인 결혼과 살인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여성에게 어느 순간 욕망은 경제적 안정이라는 지상목표를 벗어나 불안정한 형태로 일그러진다. 남편과 근친상간관계에 놓인 예민한 의붓딸을 자극하여 남편의 살인을 사주하는 그녀의 모습은 사악함 그 자체이다.그녀의 욕망은 남편을 살해하여 재산을 증식하려는 목표를 이미 벗어나 있다. 소비의 충동에서 비롯된 욕망이 자기증식을 거듭하여 도덕적 습속을 위반하며 나르시시즘으로 향해 간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여성인물을 주목하게 된다.“어디에 있든 나는 점점 더 강해지고 아름다워질 겁니다. 운명이 주는 어떤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겠어요”(120면)라는 그녀의 진술은 여성이 욕망하는 대상 그 자체를 넘어서 상상 속의 나르시시즘으로 향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정이현 소설의 여성인물이 보여주는 이러한 욕망의 불안정성은 물신화된 사회가 추동하는 사랑의 환상을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여성은 무제한으로 강해지고 사악해질 수 있으며, 또한 탐욕스러워질 수 있다. 리타 펠스키(Rita Felski)가 지적한 대로 이렇듯 소비하는 여성성,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여성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금기라든가 낭만적 사랑의 환상으로 둘러싸인 위선적 가족·결혼제도를 폭파하는 모종의 힘을 지닌다.4 그러나 한편 그 욕망은 더욱더 많은 상품과 기호 속으로 자아를 이끌고 가는 것이기도 하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에 의하면 소비하는 자아는 ‘사물에 의한 증명’ 없이는 견딜 수 없게 된다. 소비대상이 지위의 계층화를 만들어내며 소비에 의해 지위가 이동하는 사회 속에서 인물들은 계층상승을 위한 욕망에 휘둘리고 만다. 정이현 소설에서 낭만적 사랑이나 순결이데올로기에 대한 여성의 명민한 통찰은 계층의식의 물질적 기호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결국 자기소모적인 것이 된다.9억원대를 자랑하는 강남의 아파트, 은색 렉서스, 폴크스바겐 비틀, 타사키 지니아의 보석, 루이뷔똥 백 등등 소설 속 물신의 기호들은 그 자체로 쾌락성을 지시하며 소비된다.

소비의 주체를 자임하던 여성이 물적 욕망 자체에 포섭되는 아이러니컬한 결과는 표제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통해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소설은 순결이데올로기를 역이용하여 자신의 연애와 결혼을 규정짓는 대담한 여성화자의 목소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여러 남자친구 중에서 자신의 장밋빛 미래를 보장해줄 최고의 남자와 결혼하려는 그녀는 자신의 순결한 육체를 적극적인 상품가치로 내세운다. 여자의 몸이 마치 유리잔과도 같다는 어머니의 설교나 남자친구를 사랑해서 임신하게 되었다는 혜미의 고백은 그녀의 비웃음을 살 따름이다. 순결은 그렇게 쉽게 소모되어서는 안되는 귀중한 가치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순결’을 이용하여 결혼이라는 상품시장에서 승리하기 위해 세부적인 연애기술을 연마하고 신중하게 결혼상대를 고른다. 드디어 상대가 나타나고 첫날밤을 치르기 위한 주인공의 ‘십계명’ 실천이 진행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그토록 조심스럽게 준비해왔던 첫날밤의 환상은 ‘혈흔’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나타나지 않음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간다.

그녀는 자신의 육체를 담보로 하여 시장에 등장했으나 순결이데올로기와 낭만적 사랑이라는 환상을 떨치지 못했다. 그녀가 착각한 것이라면 결혼시장에서 ‘순결’이라는 가치가 (설사 그것이 위장된 관념일지라도) 본인이 상상한 것만큼 그다지 훌륭한 상품이 되지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순결이나 사랑을 논하기에 결혼시장은 지나치게 냉혹하다. 엄격히 계층화된 서열이 존재하는 결혼시장에서 연애와 순결을 무기삼아 덤벼든 그녀의 발상 자체가 너무 순진(?)했던 것은 아닌가. 그녀의 패배는 어떻게 보면 예상된 것이다.

결국 물신화된 욕망에 스스로 포박된 여성의 모습은 작가가 기도했던 전술이 체제의 감옥에 갇힐 수밖에 없는 소모적인 것임을 드러낸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나 「이십세기 모단걸」을 제외한 작품들에서 여성은 늘 ‘완벽하게’ 승리하거나, 혹은 변함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인물로 등장하지만 이들에게서 욕망의 씨스템을 벗어난 탈주의 행위는 기대할 수 없다. 물신화된 사회의 속성을 철저히 드러냄으로써 낭만적 사랑에 균열을 내려는 작가의 전략은 욕망이 달성되는 순간 유효성을 상실한다. 여성이 욕망을 증식시키는 주체라는 점을 인지하고 소비를 통해 새로운 수준의 욕망을 성취하려 한다는 인식하에서만 이들은 당당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여성은 유혹하고 소비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정의하지만 넘쳐흐르는 풍요의 기호 속에 어느새 유혹당하는 존재로 고착되고 만다. 낭만적 사랑을 의심하는 작가의 도발적인 질문에 우리가 되돌려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의구심이다. 물신화된 욕망이 여성을 압도하는 순간 낭만적 사랑은 다시금 기만적인 책략으로 여성의 욕망 속으로 파고든다. 이 순간 여성의 욕망은 어느 정도로 절실하게 읽힐 수 있는 것일까. 그 질문의 답은 앞으로 씌어질 작가의 작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4. 낭만적 사랑은 어떻게 부정되는가

 

이만교와 정이현의 소설은 물신숭배로 가득한 현대의 사랑 담론을 경쾌한 어법으로 해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 소설이 보여주는 물질적 기호의 쾌락은 미학적 자의식으로 요구되어온 소설의 윤리적 덕목을 손쉽게 해체한다. 소설은 지극히 사소한 잡담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이들이 보여주는 언어유희는 전통적인 비유와 상징의 세계에서 벗어나 상품의 이미지에 바싹 다가서 있다. 문학적 규범마저도 가볍게 부정되는 의도적인 농담의 세계에서 자아의 심각한 고뇌는 의도적으로 탈색된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 자체를 촌스럽게 여기는 냉소적 인물들에게 진지한 사랑의 고백은 무엇보다도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이만교의 소설이 전통적인 가족공동체 정서가 사라진 현대의 도시공간을 배경으로 해 지식인의 화법을 동원하고 있다면, 정이현의 소설은 욕망을 적극적으로 지시하는 물질적 기호들 속에서 소비하는 여성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들 소설은 소비상품의 기호가 바로 계층 현실을 상징하는 것임을 냉혹하게 말한다. 특정 계층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선망은 결혼과 사랑의 세속화 과정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이만교와 정이현의 소설에서 인물들은 부조리한 세계를 견디기 위한 방식으로 적극적인 소비와 욕망을 선택한다. 낭만적 순애보의 초대장을 거절한 채 곧장 물신화된 세계에 뛰어드는 이들의 모험은 용감하고도 위태로워 보인다.

결혼시장에서 등장인물들은 소비적 쾌락을 적극적으로 실현함으로써 욕망의 주체로 나서고자 하지만 이들의 시도는 제도 자체에 포박되는 결과를 낳는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연희는 사랑과 결혼을 분리하는 대담한 모험을 시도하고 준영과의 관계 속에서 낭만적인 사랑을 시도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한다. 그녀가 꿈꾸는 이상적인 결혼은 사진 속에서나 존재하는 이미지일 따름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주인공은 정숙한 처녀 행세가 한순간에 무너지면서 순결마저 의심받는 지경에 이른다. 소설 속 인물들이 처한 이 아이러니의 정황은 물신화된 가치로 치장된 씨스템 안에 갇힌 자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우리는 현실을 견디는 치료제로서 사랑의 환상을 갈망하지만 그것은 자아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자아의 고립을 위무(慰撫)하는 것으로 등장하는 사랑의 이미지는 때때로 현실의 우리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이만교와 정이현의 소설이 씨니컬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 역시 사랑의 미망(迷妄)에 갇혀 있는 현대인의 불안한 삶일 것이다. 이들의 소설은 일상을 위무하는 아름다운 연애소설의 반대편에 서서 사랑의 명언들을 재해석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소비시대의 소설이 외면할 수 없는 자기해부의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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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만교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인 「결혼은, 미친 짓이다」(유하 감독, 싸이더스 2002)가 연희의 욕망을 전면에 부상시키고 있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소설과 영화의 세부적인 비교는 별도의 지면을 필요로 하지만 영화에서 연희의 욕망은 물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는 점에서 준영을 현실적으로 압박한다. 소설과 달리 준영의 자취방을 마련하는 데 연희의 경제력이 동원된다는 영화적 설정은 두 남녀의 심리적 신경전을 더욱 구체적인 것으로 만든다. 결혼과 사랑의 분리를 꿈꾸는 연희의 욕망이 본질적으로는 가부장적 결혼제도가 생산한 물신화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소설보다 영화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영화 속에서 연희는 결혼제도의 권태를 보완하는 비밀동거의 관계 속에서도 ‘이상적인 아내’의 모습을 연출한다. 준영의 옥탑방에서 분주하게 식사를 차리고 살림을 담당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꿈꾸는 사랑의 판타지가 사실은 결혼제도의 형식에 얽매여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2. 울리히 벡(Ulrich Beck), 엘리짜베트 벡-게른스하임(Elizabeth Beck-Gernsheim) 「사랑, 우리의 세속적 종교」,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강수영·권기돈·배은경 옮김), 새물결 1999,326면.
  3. 재클린 싸스비(Jacqueline Sarsby) 『낭만적 사랑과 사회』(박찬길 옮김), 민음사 1989.
  4. 리타 펠스키(Rita Felski) 「상상적 쾌락―소비의 성애학과 미학」, 『근대성과 페미니즘』(김영찬·심진경 옮김), 거름 1998,146~4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