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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부시의 세계와 코이즈미의 일본

 

 

개번 머코맥 Gavan McCormack

1974년 런던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음. 현재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 아시아태평양사학과 교수 , 토오꾜오 국제기독대학 방문교수, 오스트레일리아 학술원 회원. 1962년 이래 일본을 꾸준히 방문하였고 쿄오또대·코오베대·리쯔메이깐대 객원교수 역임. 본지에 「일본사회의 심층구조와 ‘국제화’」(84호) 「일본 ‘자유주의 사관’의 정체」(98호) 「일본의 ‘철의 삼각구조’」(116호) 등의 글을 발표한 바 있음. 최근에 Target North Korea(Nation Books 2004)를 출간했고, 그의 저서 중 『일본, 허울뿐인 풍요』(The Emptiness of Japanese Affluence, 창작과비평사 1998)가 번역, 소개됨. Gavan McCormack@anu.edu.au

ⓒ GavanMcCormack 2004 / 한국어판 ⓒ 창비 2004

*이 글은 Nation Institute의 웹진 TomDispatch.com(2004년 3월)에 실린 “Boots, Billions, and Blood”를 옮긴 것이며 최근에 쓴 필자의 후기를 덧붙였다. 필자는 이 글의 확장본을 New Left Review에 발표할 예정이다.―편집자

 

 

군대

 

코피 아난(Kofi Annan) 유엔 사무총장이 올 2월 일본을 방문하기 일주일 전, 코이즈미 쥰이찌로오(小泉純一郞) 수상은 일본이 미국에 얼마나 ‘믿음직한 동맹국’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선언했다. 그는 일본이 공격을 받게 되면 일본을 도우러 올 나라는 결국 미국이지 유엔이나 다른 나라가 아니라고 논평했다. 어떤 공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인지 그가 더 상세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북한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일본인은 모두 알고 있었다.2003년 3월 일본이 미국 주도의 이라크전을 지원하기로 선언했을 때, 그리고 올해 1월 미국의 이라크 점령을 돕기 위해 이라크 남부에 군대를 파견했을 때, 일본이 염두에 둔 것은 이라크의 수니파나 시아파가 아니라 최근 들어 일본국민이 첨예하게 두려움과 증오를 느끼고 있는 북한이었다.

아시아 이웃나라들로부터 심리적 거리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코이즈미의 일본은 지금까지 60년간 그랬듯이 미국의 품에 매달리는 것 외에 대안은 없는데,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압박을 더욱 강화시키고 일본이 아시아 각국과 화해·협력하는 것을 차단하도록 부추길 따름이다.2003년 11월 25일 코이즈미는 의회에서 “나는 부시 대통령이 옳으며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죠지 부시가 개인적인 정을 표시하는 몇 안되는 세계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에(부시의)‘우정어린’ 요구에 특히 약한 것 같다. 비록 일본경제의 규모가 독일·프랑스·영국의 그것을 합친 것과 거의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일본 수상이 주요 쟁점들에 관해 ‘프랑스식’ 또는 ‘독일식’ 자세를 취함으로써 감히 워싱턴의 심기를 건드리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는 부시행정부가 세계 어디서도 일본 수상보다 더 충실한 추종자를 찾아내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이 맞을 수도 있다.

9·11 공격 이후에 리차드 아미티지(Richard Armitage) 미 국무부 부장관이 고압적인 어조로 일본이 현실을 직시하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일장기를 선보이도록 해야 한다고 권고하자, 코이즈미는 즉각 이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일본은 평화헌법을 유지하고 있고 이전에는 중동지역의 그 어떤 분쟁에도 연루된 적이 없었는데도 동맹군에 대한 지원과 연료보급을 목적으로 이지스급 구축함을 포함하여 해상자위대의 상당한 병력을 인도양에 파견했다.

그후 이라크전 발발 직전인 2003년 3월 코이즈미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무조건적’ 지원을 약속했다. 이에 대해 ‘지상군’ 파견으로 지원하라는 압력을 받은 후 코이즈미는 역시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약속했고,2004년 1월 일본 육상자위대의 선발대가 출발했다.

일본은 비록 종속적이며 공식적으로는 ‘비전투적인’ 역할이긴 하지만,60년 만에 처음으로 불법적인 침략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는 논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 의회에서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1월 말 이라크 파병을 비준하기 위해 의회가 소집되었을 때 야당은 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 집단적으로 투표를 거부했으며, 심지어는 수상이 속한 자민당의 일부 중진들까지도(투표에) 불참했다. 한 보수적인 전직 장관은 정부의 행동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정부를 법원에 제소했으며, 한 고위 일본대사는 코이즈미의 정책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소환되어 파면당했다.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는 임무를 맡았던 미국의 이라크조사단(Iraq Survey Group) 단장인 데이비드 케이(David Kay)가 미 의회의 한 위원회에서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때에도 코이즈미는 전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워싱턴에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일본의 헌법이나 법률 또는 도덕보다 더 중요한 것 같았다.

일본의 군대 보유와 사용에 대한 제약, 즉 미국의 점령기간에 만들어진 전후 일본 헌법의 유명한 제9조를 이제 서양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그렇지만 아시아 나라들에서 이것은 전후 지역안전보장체제의 핵심요소로 여겨지고 있다. 북한을 적대시하고 두려워하는 국내의 분위기와 이라크에 ‘지상군’을 보내라는 미국의 압력이 결합되면서 코이즈미는 반세기를 이어온 헌법의 원칙을 무시하고 자위대를 정규군으로 바꿀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코이즈미의 자위대 파병 결정은 비록 강력한 대중적 반대에 직면했지만, 몇개월 만에 그는 애국심의 물결을 이용해서 헌법에 근거한 의구심을 압도하고 여론을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2003년 초·중반 파병 반대여론이 70〜80%에 달했던 것과 달리 2004년 초에 이르러서는 근소한 차이지만 과반수(53%)가 파병에 찬성했다. 코이즈미의 도박은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수지가 맞았다. 일본이 ‘현실주의적’으로 되어 ‘전세계적 책임을 떠안고’ ‘위선적인 도덕주의’를 버리고 미국의‘진정한 파트너’로 행동하고 있다고 미국뿐 아니라 유럽 일각에서도 보도되면서, 그의 과제는 훨씬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코이즈미는 국내와 국제사회의 인정을 한몸에 받게 된 것이다.

 

 

 

미국경제가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고 전지구적 제국을 관리하는 부담에 점점 짓눌리면서 토오꾜오(東京) 원조의 중요성은 날로 증대하고 있다. 냉전 종식 이래 일본은 자국 내(특히 오끼나와섬)의 미군기지들에 대한 ‘지원비용’ 명목으로 7백억 달러 이상을 제공했고,9·11 이후 반테러동맹에 대한 ‘후방지원’ 명목으로 또다시 9백억 달러를 제공하는 등 아메리카 제국을 위해 어마어마한 액수의 보조금을 내놓았다.

워싱턴이 이라크 재건을 위해 추가로 ‘수십억 달러’를 요구하자, 코이즈미는 다른 동맹국들이 약속한 액수를 훨씬 뛰어넘는 50억 달러를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워싱턴에서 더 큰 압력이 가해지자, 일본정부는 이라크정부가 일본에 지고 있는 막대한 채무 가운데 30억에서 70억 달러에 이르는 액수를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러한 일본의 협력은 세계 통화시장에 대대적인 정책적 개입을 해서 달러화 가치 하락이나 엔화 가치 상승을 방지한 데서도 명백히 드러났다.2003년 한해 동안 일본은행(the Bank of Japan)은달러화 가치를 유지함으로써 미국경제를 지탱하는 데에 20조엔(1800억 달러)을 쏟아부었다.2004년 1~2월에만 전년도 액수의 절반이 시장에 투입됨으로써 이 과정은 더욱 빨라졌다. 미국의 재무부증권, 채권, 주식에 대한 해외수요가 줄어들자, 일본은행은 기존 노선을 고수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2004년 초에 국제통화기금은 다음의 사실, 즉 미국의 대외부채 수준이 GDP의 40%에 육박함에 따라 미국의 적자가 세계에 ‘심각한 위험’이 되고 있지만, 미국에 대한 믿음이나 미국을 지원하겠다는 의사가 일본보다 더 강력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일본에 자금이 남아도는 것은 아니다. 일본이 1980년대 거품시대에 누리던 과잉유동성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일본은 대규모 정부지출 삭감 및 세금 인상, 공공복지 및 연금제도의 붕괴, 지속적인 노령화 현상에 직면해 있다.2004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세입은 42조엔에 약간 못 미치고 세출은 82조엔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시 말해(일본정부는) 거의 절반가량의 지출을 채권이나 차입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교육·복지·해외원조 비용은 삭감되고 있고, 중소기업은 지원이 끊겨 전적으로 혼자 힘으로 ‘시장의 힘’에 대처해야 한다. 거품시대가 끝난 이래 산더미처럼 쌓인 채무에 대한 보답은 단지 쥐꼬리만한 성장뿐이었다.

이러한 문제에 관한 한 미국과 일본 정부는 둘 다 엄청난 채무를 안고 있으며, 각각의 채무는 대략 같은 액수로 거의 7조 달러에 달한다. 미국의 인구와 경제가 일본보다 배 이상 크기 때문에 일본의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하다. 일본의 채무문제는 어쩌면 근대 역사상 최악일 것이다. 일본체제의 병리현상은 코이즈미가 주창하고 유포한 ‘개혁주의’ 아래 반쯤 가려진 채로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이처럼 일본의 저축은 미국이라는 전지구적인 제국의 입지를 뒷받침하는 주요 자금줄이자 동시에 미국의 채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재정적 원천이 되어 전지구적 초강대국의 소비형태, 생활양식, 군사계획을 지원하고 있다. 세계체제는 미국과 일본이라는 쌍둥이 봉우리 위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데, 불치병에 걸린 일본경제가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는 미국경제를 지탱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는 형국이다.

 

 

 

2003~2004년에 걸쳐 일본은 일련의 역사적인 선택을 했다. 부시행정부에 자국의 운명을 건 일본은―지금까지 역사적인 분쟁에서 아무런 역할도 담당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 어떤 적(敵)도 없었던―세계의 분쟁지역에 미국의 군사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미국으로부터 쏟아지는 다양한 요구들에 부응하기 위한 일본의 분투를 지켜본 아미티지 부장관은, 일본이 “더이상 관중석에 앉아 있지” 않고 “경기장의 선수”로 등장한 것에 미국정부는 “짜릿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미국의 압력은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워싱턴에서 파견하는 총독들은 정기적으로 새로운 지침을 갖고 토오꾜오로 날아들고 있다. 일본은(2000년 10월의 ‘아미티지 보고서’에 적힌 대로) 헌법을 개정하고, 나토(NATO) 식의 완전한 파트너로서 ‘동맹군’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방위선을 넓히며 ‘극동의 영국’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있다. 이러한 관계는 전통적으로는 일본에 대한 미국의 ‘보호’ 정도로 표현되고 있는데, 워싱턴의 강조점은 사실 이와는 약간 다르다. 부시행정부로서는 일본이 “미국의 보호에 계속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여전히 근본적이고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이와 같은 ‘보호’를 중국과의 협약이나 일정 수준의 독립으로 대체하려는 그 어떠한 시도도, 랜드연구소(RAND corporation,미국의 외교전략을 중심으로 공공정책에 대한 분석과 연구를 하는 비영리 연구소―옮긴이)의 보고서에 적힌 대로“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정치적·군사적 영향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다. 일본이 언젠가 극동의 영국이 아니라 극동의 일본이 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제 발로 걷기” 시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워싱턴으로서는 9·11 공격보다 더 나쁘지는 않더라도 그에 못지않은 악몽이다.

한동안 일본이 미국의 경기에서 ‘선수’로 실제 뛰어왔다면, 팀의 감독과 코치가 누구인지 혼동하거나 그 경기의 치명적인 위험에 의혹을 품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라크전을 앞둔 2003년 2월 자민당 정책연구위원회 위원장 큐우마 후미오(久間章生)는 일본의 입장에 관한 질문을 받고 “나는 [일본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일본은 미국의 한 주나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조만간 코이즈미와 그의 정부는 이러한 참여에 따른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점을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이에 앞선 2001년 9월 아미티지는 비록 일본이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에 관해서이긴 하지만 이 점을 매우 명확하게 밝혔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청중 앞에서 연설하면서 ‘동맹’은 “오스트레일리아 젊은이들이 미국의 방위를 돕기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맹이 의미하는 바다”라고 주장했다. 아미티지와, 이 문제에 관한 한 코이즈미 역시 일본이 치러야 할 최악의 손실이 무엇인지 아직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군대와 돈에 이어 피에 대한 요구가 뒤따를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2004년 2월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토오꾜오를 방문해 일본 의회에서 연설을 했다.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공격으로 권위를 무시당하고 그후 일부라도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이라크에서 곧바로 복잡한 협상에 참여했던 아난에게 지난 일년은 시련으로 가득한 한해였다. 아난은 유엔 예산의 20%를 내고 있으면서도 안전보장이사회에 의석을 갖고 있지 않은 일본이야말로(진정한) 세계시민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그는 코이즈미의 정책에 대한 비판은 단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지만, 코이즈미의 의제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수상을 제쳐놓고 일본국민에게 직접 세계적 사안에서 한층 독립적이고 국제주의적인 역할을 담당해달라고 호소했다.

일본의 ‘북한문제’가 미해결로 남아 있는 한, 미국에 대한 일본의 의존은 계속될 것이다. 다시 말해 북한과 남한의 관계는 물론 일본과 북한의 관계가 정상화되기 시작하고 이 나라들 사이에 긴장이 사라지면, 미국의 헤게모니 계획 안으로 일본을 광범위하게 편입시키는 것은 정당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평화가 정착되면 남한이나 일본에서의 미군주둔을 정당화하는 입장도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아시아 이웃나라들에 관심을 갖고 미국의 ‘믿음직한 동맹국’에서 장차 나타날 아시아 연방(Asian commonwealth)의 믿음직한 일원이 되는 것으로 정책의 우선순위를 옮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일본국민은 일본의 ‘자위’선을 이라크 남부로까지 확대한 코이즈미의 결정에 따른 피의 댓가를 언제쯤 치러야 하는 건지 궁금해하면서 초조하게 기다릴 것이다.

 

 

후기

 

2004년 봄 미국 주도의 이라크 점령은 점점 폭력의 수렁으로 빠져들었고 그 정당성은 누더기가 되었다. 팔루자에서 많은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한 수백명의 민간인 학살이 일어나고 이슬람 성지들에 대한 공격이 있은 뒤로 반발은 점차 국민적 저항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양측에서 폭력과 사상자가 늘어나는 가운데 이라크 무장세력은 외국인을 인질로 붙잡고 이를 활용해서 팔루자에서의 휴전과 함께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는 외국군대의 철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4월 7일에 일본 민간인 세 명이 붙잡혔고 4월 14일에 두 명이 더 붙잡혔다가, 각각 4월 15일과 17일에 무사히 풀려났다.

짧은 기간의 이 납치는 일본 전국을 경악의 도가니로 몰아가면서 이라크에서 일본이 담당하고 있는 공식적·비공식적 역할을 집중조명하도록 만들었다. 공식적으로 미국에 대한 코이즈미의 지원은 명확했다. 자위대는 비록 명목상으로는 인도주의적 임무를 띠었다고 해도 미국의 대의명분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군대였다. 그렇지만 4월에 폭력의 악순환이 일어나자 (몇명의 여성들이 포함된)550명의 병력은 대부분의 활동을 중단한 채 기지 안에 머무르면서 미국 보안요원과 이라크 지역수비대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도시 하나와 그 주변지역에 국한된 자위대 작전은 약 380억엔, 다시 말하면 NGO(비정부기구)와 유엔이 인도주의적 원조를 위해 이라크 전역에 투입한 예산보다 거의 50~100배나 많은 비용이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자위대원 가운데 실제로 수질정화와 같은 다양한 인도주의적 업무를 수행하는 인원은 120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보안업무와 행정에 충당되었다. 터무니없는 비용과 제한적인 효과는, 이 작전이 다른 지역에서 확대되거나 되풀이될 수 있는 모델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경제적 혹은 인도주의적 의미를 압도하는 것일 뿐이라는 점을 명백히 의미했다.

일본의 NGO와 시민사회 공동체는 이와는 전혀 다른 입장, 즉 일본 당국과 마찬가지로 인도주의적이지만 점점 그것과는 상충되는 입장을 갖고 이라크에서 활동했다.4월 7일의 피랍자들은 이런 특징을 잘 보여주었다. 한 사람은 바그다드로 돌아가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활동을 재개했고, 다른 한 사람(18세 학생)은 열화우라늄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고 홍보했으며, 세번째 사람은 이라크 국민들의 투쟁과 고통을 사진에 담아 전세계에 알리는 활동을 펼쳤다. 두번째 피랍자 집단에 속한 한 사람은 고참 NGO 활동가였고, 다른 한 사람은 점령의 잔혹한 실상을 전세계에 알리는 일에 헌신하는 언론인이었다. 이 다섯 명의 일본 젊은이들은 일본의 전쟁지원과 자위대가 점령세력에 참여하는 것에 반대하는 일본사회의 폭넓은 영역을 대변했다.

이슬람성직자협회의 호의적인 주선으로 얼마 후에 풀려난 다섯 명의 인질들은 모두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풀려나기도 전에 그들과 그 가족들은 정부와 언론매체의 희생양이 되었다. 정부와 언론은 자위대의 공식적인 임무를 정당화하는 한편 그들을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사람들로 비난하는 선전활동을 벌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코이즈미가 그들을 납치한 사람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바람에 구출이 더 늦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정부는 NGO 임무와 자위대 임무 사이의 그 어떤 구별도 지워버리려고 애를 썼고, 이에 반해 가족들과 지원운동측은 양자가 성격상 정반대라는 주장까지 펼치면서 양자를 구별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 당국은 점령을 지원하고 있었고 NGO측은 이에 반대하며 그 영향을 완화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실제로는 (양자 사이에) 심각한 차이가 있었다.NGO의 대변인들은 (이라크인들이 자위대를 파악한 바로는) 일본군대의 파견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으며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로서 일본의 도덕적 입지가 유실되어버렸다고 보고했다.

구출작전이 계속되고 그 결과가 알려지지 않고 있던 동안 가족들과 지원단체들은 냉담하고도 의심쩍은 눈초리를 받았다. 코이즈미 수상은 심지어 그들을 만나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정부에 맡기라는 압력을 받았으며, 일시적으로라도 자위대를 철수해달라는 그들의 간청은 매몰차게 거부당했다. 정부장관들과 대변인들을 본받아서 언론매체들은 그들이 ‘무책임’하고 ‘무분별’하며 일본에 성가심과 손해를 끼치고 있다는 비난을 퍼부었고, 피랍자 가족들의 전화·팩스·홈페이지는 욕설과 협박의 메씨지로 가득했다.(한 인질의 웹페이지는 단 하루 만에 십만건이나 되는 악의적이고 적대적인 메씨지로 뒤덮였다.) 그들의 곤경에 대한 책임은 희생자들에게 떠넘겨졌으며, 사람들의 관심도 일본 당국이 지원한 점령세력에 의해 현재 자행되는 전쟁범죄에서 다른 곳으로 옮아갔다. 피랍자들이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 적대적인 비난공세 자체가 그들을 충격상태에 빠뜨린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런 상태를 조성한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미안해하고 지치고 수치스러워하며 혹은 조용히 귀국했다.

일본정부는, 비록 점령의 잔혹성이 국민적 저항을 촉발시키기 시작했고 사마와(Samawah)지역은 ‘전적으로 안전하다’는 코이즈미의 확언이 빈말임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에서의 군대주둔을 성공적으로 유지했다. 순수하고 이상주의적인 젊은이들과 그 가족들은 국제분쟁의 해결에 군대의 역할을 거부한 헌법과 일치하는 노선을 정당화하려고 독자적인 행동에 나섰으나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그들의 입장이 엄청난 자금과 조직을 지원받는 자위대의 노력보다 이라크인들 사이에서 더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 거의 분명한데도 말이다. 일본사회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타자’에 대한 증오와 분노의 기운이 최근 몇해 동안 북한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불길하게 팽창하더니 자국의 NGO와 독자적인 언론단체들을 향해 삽시간에 폭발했다. 반체제적 시각으로 엄청난 분노를 촉발시킨 이라크 피랍자 가족들의 경험은 북한 피랍자 가족들의 경험과 날카롭게 대비되었으니, 후자에 대한 지지운동은 애국적 가족의 전형으로서 공식적인 일본에 통합되었다.

처음 이라크에 군대를 파견했을 때, 코이즈미는 일본이 북한의 공격에 대해 보호를 요청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기 때문에 이러한 결정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그것이 일본의 시민사회와 더 넓게는 일본의 민주주의에 불길한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점이 점점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丁範鎭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