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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백무산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4년 『민중시』 1집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인간의 시간』 『길은 광야의 것이다』 등이 있음.
첫날
눈 오는 아침은
설날만 같아라
새신 신고 새옷 입고
따라나서던 눈길
어둠속 앞서가던 아버지 흰
두루막 자락 놓칠세라
종종걸음치던 다섯살
첫길 가던 새벽처럼
눈 오는 아침은
첫날만 같아라
눈에 젖은 대청마루
맨발로 나와
서늘하게 앉으니
가부좌가 아니라도
살아온 시간도 흔적도
흰 눈송이 위에 내리는
흰 눈송이 같은데
투둑, 이마를 치는
눈송이 몇
몸을 깨우는 천둥소리
아, 이대로 다시
살아볼 수 있으리라
이 몸 밖 어디서 무얼 구할까
천지사방 내리는 저 눈송이들은
누가 설하는 무량법문인가
눈 오는 아침은
한번도 살아보지 못한
첫날만 같아라
존재는 작게만 기억된다
계절이 지난 후에
지난 계절을 떠올리면
말하자면, 겨울날에 지난 여름을
그려보면 몇달 앞 계절이 아니라
먼 옛날 상처 깊던 여름날이 뭉클하고
지난 봄날이 아니라
열아홉 바닷가 봄날이 새롭고
첫사랑 붉은 가을이 불쑥 펼쳐진다
겨울을, 그런데 겨울을 떠올리면
기억을 넘어선다
한 삼백년은 지난 겨울이
기억의 영토 밖에서
의식의 지평 저 너머에서
솟아온다
산에 올라 겨울 벗은 산의 등허리가
굽이져 휘돌아가는 것을 볼 때면
의식이 분화되기 전에
기억이 발생되기 이전에
감각이 조직되기 한참 전에
원시진공에 각인된 불립문자
내 그리움의 원천은 그곳에서
그 혼돈의 영토에서 한 생각 몸을 얻는다
생애의 시간과 기억은
삶과 존재를 아주
작게만 담을 뿐이다
통일 이데아
그가 통일영웅이 되어 돌아왔다
평생 이윤만을 위해 영웅적으로 살아온 그가
일생을 오직 돈벌이만을 위해
투쟁적으로 살아온 장사꾼이
다만 자신과 가족의 재산 불리는 일을
과업으로 삼고 흔들림없이 살아온 그가
어느날 통일영웅이 되어 분단을 넘었다
십원이라도 이윤 남는 일이면 못할 짓이 없고
사람의 목숨값을 제하고 일원이라도 남으면
어떤 위험한 일에도 노동자를 밀어넣고
그동안 족히 수백은 넘을 주검값을 떼어먹고
남은 과부들의 눈물과 자식들의 불우함마저
팔아 돈 남기는 일이라면 꼭두새벽을 달리고
하면 되므로 짜면 된다는 이념무장에
철저했던 사람이
그는 정말 투사처럼 보였다
발걸음 뗄 기력마저 쇠잔하고
수족까지 떨며 혼자서는 거동을 못할 지경에도
분단을 넘어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철저히
조국에 바치려는 늙은 영웅처럼 보였다
아무도 그가 숨이 끊길 때까지
돈 되는 일이라면 지옥이라도 가겠다는
각오를 다시 하고 눈앞에 열리기 시작하는
저 엄청난 시장을 차지하겠다는
욕망을 불태우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조국을 찾겠다고 숱한 사람들이 피흘리던 때도
그는 돈버는 일만 생각했다
해방이 되었어도 전쟁이 터졌어도
돈버는 일에만 몰두했다
4·19가 일어나고 쿠데타가 터지고
총칼이 난무하고 남의 나라 전쟁통에 가서도
광주가 피로 물들어도
오직 돈버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가 재벌이 된 데에 일등공신은
단연 분단이었다
그가 분단을 밑천으로 삼지 않았다면
결코 재벌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돈벌어 분단을 생산하고
분단을 재생산하고 분단을 대량생산하고
분단을 과잉생산하고 분단을 포드화하고
그래서 더 큰 돈을 벌었고
분단은 철골 바벨탑처럼 견고했다
그런 그가 어느날 통일영웅이 되었다
반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일궈놓은
그 길을 피로 일궈놓은 그 길을 그는
돈벌이하러 돈보따리 들고
노동자의 피로 얼룩진 돈다발 들고
그 돈다발 앞에 국가보안법도 주눅들고
잠입탈출죄도 숨죽이고 ‘수괴’를 함부로 접촉하고
가족상봉도 특차로 하고
권력이 바뀔 때마다 뇌물로 주물러
더 큰 돈을 벌었듯이 돈다발 들고
시장 없는 나라에 시장터 닦아준 일로
생돈 가져다준 일 없이도
통일영웅이 되었다
그에게 통일 따위야 돈이 되지 않는다면
더 큰 이윤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얼어죽을
통일 따위야 개뼈다귀도 못된다
그런 그가 죽었다
얼빠진 시인이 그를 칭송하고
자신이 유명인사나 된 줄 알고
노조위원장이 무슨 벼슬이나 된 줄 알고
조문 가서 눈물 찔끔거리고
닭벼슬이라도 달린 자들 줄을 잇고
죽어서도 자본 앞에 줄을 세우고
욕망의 서열로 줄을 세우고
이 도시에는 검은 현수막이 거리를 뒤덮고
여기서 통일을 떠올리는 일은
속이 뒤집히고 온몸에 소름 돋는 일
그런 그가 원을 못 풀고 죽었다
그동안 모은 돈보따리 몽땅 챙기고 죽었다
단 한푼도 돌려주지 않고 영웅답게
통일에 써달라는 말 한마디 씨도 없이
자식들에게 변칙 이전 변태 상속하고
저들끼리 찢고 발기고 물고 뜯는 사이
그는 홀로 뒈졌다
(오, 누구의 죽음이든 죽음 앞에 고개 숙이지 못할까 그러나
그로 인해 죽어 개값도 못 받은
수많은 사람들 앞에 고개 한번
숙이지 않은 그가 어찌 돌아가실 수 있겠나)
…………………………
그리고 우리는 악몽을 꾼다
옛날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해방이 되어도
해방이 아니러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