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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최정례 崔正禮
1955년 경기도 화성 출생.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숲』 『햇빛 속에 호랑이』 『붉은 밭』이 있음. ch2222@dreamwiz.com
폭탄에 숨다
그 많은 연기가 어디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 많은 먼지가 벽 뒤에 어떻게 숨었었는지
조그만 주먹 속에 조그만 폭탄 속에
눈먼 폭풍들
불꽃과 연기와 굉음들
네가 나를 버렸듯이
나도 나를 버릴 거야
폭탄을 안고 숨어들어
솟구치며 날아갈 거야
나의 뼈 너의 피를 안고
네 마천루를
관통할 거야
저것 봐
바다는 끓어 증발하고 벽들은 녹아내리지
지구가 태양에서 놓여난 듯 내동댕이쳐지고
불길은 하늘의 반을 가리지
작은 주먹이 연기로 바뀔 때
내뿜는 폭풍을
그후의 한없는 정적을
네가 폭파시킨 나
내 속에 함께 했던 너
내 몸속에 갇혔던
연기와 불꽃과 비명을
나물 캐는 아저씨
헤이, 아저씨, 계절이 바뀌었으니 또 슬슬 떠나볼까 하시는
음풍농월로 한 시절 잡으셨던 아저씨
그래도 역시 우리들은 신토불이의 서정주의가
심금을 울린단 말이야 하시며 나물 캐던 아저씨
드디어 나도 걸렸나봐요
재채기 콧물 기침을 뿜으며
누워 있어요 열이 나고
눈 속에 대들보가 박힌 듯 쑤셔서
안과에 가서 주사 맞고 안대를 하니
뿌연 황사를 뚫고 지붕지붕을 건너
강호죽림의 제현이 쳐들어오시는 게 보이네요
와호장룡들이 대나무 가지 위로 날아올라
장칼을 휘둘러대니
으으윽
드디어 나도 감염됐는지
기침을 할 때마다 쿡쿡
이불 위에 벽지 위에 목이 잘린 모란무늬가
푸르른 죽림을 날뛰는 검객인 듯 휘청거리고
드디어 허 허 헛것이 보이네요
음풍농월의 균이 강호 제현의 말씀들이
내 눈알 속으로 귓구멍으로 마구 쳐들어와요
고색창연의 산사로 무공해 나물채집으로 유람 다니시는 아저씨
나도 함께 으으으
또 한바탕 재채기가 에 에 엣취
달려가는 꽃나무
李箱의 「꽃나무」를 위하여
오토바이가 커다란 화환들을 싣고 가고 있었다. 달려가고 있었다.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었는데近處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었는데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熱心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었는데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었는데
갈 수 없던 꽃나무가
장미꽃나무가 백합꽃나무가 큰 삼각 받침대에 꽂혀서 달리고 있었다 축 결혼 축 개업 축 영전에 뒤덮인 바퀴 뒤덮인 배달부 뒤덮인 熱心이 막 달려가고 있었다 차들이 엉킨 사이를 비집고 꽃나무 일생일대의 소원으로 가고 있었다 전에는 꼼짝없이 서 있었던 꽃나무가 이상스러운 흉내였던 꽃나무가 외설스럽게 벌판 한복판을 가로질러
나 아닌 다른 사람만이 살고 있던 거리로 그와 나 사이에 사무쳤던 거리로 내가 닥지닥지 꽃을 피워놓고 꼼짝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거리로 막 달아나고 싶었던 거리로 아무런 짓을 하든 그와 나 사이 결국 좁혀지지 않았던 절해고도의 그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