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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류인서 柳璘徐
1960년 대구 출생. 2001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ryuksy@hanmail.net
그 남자의 방
몸에다 무수한 방을 가진 남자를 알고 있다
세상에, 남자의 몸에 무슨 그리도 많은 방을!
햇살방 구름방 바람방 풀꽃방, 자신이
한그루 풍요한 유실수이기라도 한 듯
온갖 환한 방들을 몸 안팎에다 주렁주렁, 과일처럼
향기롭게 익어가는, 둥싯 떠다니는
그 방 창가에다 망상의 식탁을 차린 적 있다
안개의 식탁보 위에 맹목의 주홍장미 곁에
내 앙가슴살 한접시 저며내고 싶은 날이 있었다
그의 방을 기웃대다가
내 침침한 방을 도리어 그에게 들키던 날
주름 깊은 커튼자락 펄럭, 따스한 불꽃의 방들 다 두고
물소리 자박대는 내 단칸방을 그가 탐냈으므로
내게도 어느결에
그의 것과 비슷한 빈방 하나 생겼다
살아 꿈틀대던, 나를 달뜨게 하던
그 많은 방들 실상, 빛이 죄 빠져나간 텅 빈 동공
눈알 하나씩과 맞바꾼
어둠의 가벼운 쭉정이였다니 오, 그는 대체
그동안 몇개의 눈을 빼주었던 것일까
그 방의 창이 나비의 겹눈을 닮아 있던 이유쯤
더이상 비밀이 아니구나, 저벅저벅 비의 골목을 짚어가던
먼 잠속의 물발자국 소리도 그의 것이었을지
어둠의 단애
저문다는 것, 날 저문다는 것은 마땅히 만상이 서서히 자신의 색을 지우며 서로의 속으로 스미는 일이라야 했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서로의 그림자에 물들어가는 일이라야 했다 그렇게 한 결로 풀어졌을 때, 흑암의 거대한 아궁이 속으로 함께 걸어들어가는 일이라야 했다
너를 바래주고 오는 먼 밤, 제 몫의 어둠을 족쇄처럼 차고 앉은 하늘과 땅을 보았다 개울은 개울의 어둠을 아카시아는 아카시아의 어둠을 틀어안고 바윗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누구도 제 어둠의 단애 밖으로는 한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한 어둠을 손잡아주는 다른 어두움의 손 같은 건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