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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성우 朴城佑
1971년 전북 정읍 출생.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거미』가 있음. ppp337@hanmail.net
도원경(桃源境)
뻘에 다녀온 며느리가 밥상을 내온다
아무리 부채질을 해도 가시지 않던 더위
막 끓여낸 조갯국 냄새가 시원하게 식혀낸다
툇마루로 나앉은 노인이 숟가락을 든다
남은 밥과 숭늉을 국그릇에 담은 노인이
주춤주춤 마루를 내려선다 그 그릇 들고
신발의 반도 안되는 보폭으로 걸음을 뗀다
화단에 닿은 노인이 손자에게 밥을 먹이듯
밥 한 숟갈씩 떠서 나무들에게 먹인다
느릿느릿 빨간 함지 쪽으로 향하던 노인이
파란 바가지 찰랑이게 물을 떠다가
식사 끝낸 나무들에게 기울여준다
손으로 땅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주는 노인,
부축하고 온 지팡이가 다시 앞장을 선다
어슬렁어슬렁 기어온
고양이 한마리가 나무 밑동으로 스며든다
툇마루로 돌아와 앉은 노인이 예끼, 웃는다
군산시 옥도면 대장도리 1-5번지에는
무릉도원에 닿아 있는 아흔의 노인이 산다
자귀꽃
게으름뱅이 자귀나무는
봄을 건넌 뒤에야 기지개 켠다
저거 잘라버리지, 쓱쓱 날 세우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연초록 눈을 치켜뜬다
허리춤에서 부챗살 꺼내 펼치듯
순식간에 푸르러져서는 애써 태연한 척,
송알송알 맺힌 식은땀 말린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쪼매 늦었죠, 니년은 그새
밀린 지각비가 얼만 줄이나 알어?
양지다방 김양은 허기만 더할 말대답 대신
스쿠터 엔진 소리로 콧방귀를 뀐다
확연한 빚만 켜켜이 쌓여 있는 여름,
자귀나무 연분홍 꽃잎이 헤프게 흩날린다
배알도 없이 헤프게 으응 자귀 자귀야
야들야들한 코맹맹이 꽃 입술
엉덩이 흔들어 날려보낸다 아찔한 속살
조마조마하게 내비치기도 하면서
(전 괜찮아요, 보는 놈만 속 타지)
오빠 냉커피 한잔 더 탈까, 지지배
지지배배 읍내 제비 앞세운 김양이 쌩쌩 달려나간다
연분홍 자귀꽃 흩뿌려진 땡볕 배달길,
따가운 빚이 신나게 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