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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지구시대 한국문학의 안과 밖
최근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에 관하여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현재 미국 블루밍턴 소재 인디애너대학 영문과 방문연구원. 주요 평론으로 「李箱과 식민지근대」 「“어느 것이 생시인가?”–헉 핀의 서부 회귀 이후」 등이 있음. jatw19@netian.com
1. 논쟁의 추이와 문제제기
임규찬(林奎燦)의 서평논문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둘러싼 세 꼭지점–최원식·윤지관·황종연을 통해 본 우리 비평의 현단계」(『창작과비평』 2001년 겨울호)로 촉발된 이른바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은 새로 등장한 논객과 쟁점의 신선함이 더해지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90년대 후반의 ‘불씨’가 되살아 번진 형국인 것 같다.1 좀더 넓은 문화적 맥락에서 이번 논쟁은 월드컵 개최와 함께 한층 신명난 ‘다이내믹 코리아’의 일면을 상기시키는 면도 있지 않은가 한다. 지금까지의 논쟁에서 역동적인 한국이 실감된다고 보기에는 아직 모자라지만, 아무튼 각자의 진지한 학구가 투여된 이번 토론 자체는 ‘살아 있음’의 한 징표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중 쟁론의 중간정리 성격을 띤 가장 최근 논의인 김명인(金明仁)의 「자명성의 감옥」은 촛점 내지 논점을 투명하게 부각하지는 못했다고 판단된다. 물론 “‘80년대적인 것과 90년대적인 것’의 변증법적 소통”을 바라는 심사에서 제시한 몇몇 제안들은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특히 장정일(蔣正一)이나 최인석(崔仁碩) 등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앞으로 다른 논자들도 나눔직한 생각거리를 던진 것은 생산적인 대화를 촉구한 좋은 예다. 하지만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으로 지칭되는 지상토론에 참여하면서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이라는 용어를 “역사적 한정 속에서는 사용하되 이제부터의 문학을 말하는 데에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어떤가 하는”(김명인, 352면) 제안을 내놓고 쟁점을 너무 자기식으로 예단한 것은 지나치지 않은가 싶다. 기왕에 벌어진 실제 논쟁의 알맹이보다는 자기만의 ‘간판’에 해당하는 대안을 제시하려는 집착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절에서는 김명인의 중간결산을 좀더 튼실히 한다는 뜻에서, 생산적인 토론마당을 성실하게 마련한 임규찬을 출발점으로 삼아 문학관이나 정치의식에서 대척점에 선 윤지관(尹志寬)과 황종연(黃鍾淵)을 대비하는 것으로 일단의 정리를 해보겠다.
황종연이 ‘루카치의 판례를 좇는 리얼리즘론의 법정’이라는 1절의 제목하에서 한국 리얼리즘 문단 전체를 피고인석에 세우다시피 한 데는 임규찬이나 윤지관의 어떤 편향이 강하게 작용한 듯하다. 서로에 대한 반론과 거리두기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나누는 공유점은 지외르지 루카치(György Lukács, 1885〜1971)로 표상되는 문학적·사상적 입장이다. 필자는 헝가리의 이 비평가에 관한 한, 19세기 말 유럽문학의 자연주의와 20세기 초 모더니즘의 본질적인 연속성을 19세기 리얼리즘 문학의 쇠퇴라는 관점에서 꿰뚫어본 혜안은 발전시켜봄직한 것이고, 근년 평단이 생산한 작품평가에도 하나의 준거로서의 효력을 아주 상실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실제로 자연주의 및 모더니즘과 구별되는 ‘진정한 리얼리즘’의 이론적 해명은 루카치의 필생 과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끈질겼다. 최근 완역된 그의 만년 역작 『미학』(Ästhetik, 1972)에서 실로 방대한 규모로 탐구되는 주제도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참다운 예술과 ‘코닥사진’식 기계적 반영이 양립할 수 없음을 논하면서 조야한 맑스주의와 거리를 두었다고는 해도, 그 과정에서 근대 생활세계의 불모성을 포착한 모더니즘 예술 특유의 면모에 대해 지나치게 냉담했을뿐더러 반영론에 내포된 제반 문제를 샅샅이 파고들지는 못한 루카치의 미흡함을 임규찬이나 윤지관이 지적해주고 80년대 평단 한편에서 오용된 그의 유산도 (자기비판을 겸해서!) 적시했더라면 불필요한 설전은 한결 줄지 않았을까 한다.
황종연 자신이 모더니즘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비중을 두고 옹호하는 마샬 버먼(Marshall Berman)부터가 루카치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잃지 않으면서 그의 정치적·문예비평적 과오를 신랄하게 헤집은 바 있기에 더욱 그렇다.2 임규찬·윤지관 모두가 철저한 검증을 생략한 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공인된 관점’을 수용·승인한다는 인상을 남김으로써 버먼의 유연한 모더니즘론을 우리 현실에 접목하려는 황종연에게 루카치의 ‘판례’ 모방이라는, 사실은 좀 때늦은3 빌미를 준 것이다. 윤지관의 ‘80년대 얼굴’을 적발한 임규찬에게서도 ‘그 시대의 낯익은 표정’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논쟁의 마당을 펼친 공은 공대로 인정할 만하지만, 근대극복을 지향하는 예술이념으로서의 리얼리즘을 “역사적 전개양상 속에서 비서양적인 주체적 책읽기를 좀더 밀고 나가 질적인 접근을 수행한다면”(임규찬, 23면) 얻을 수 있는 ‘물건’쯤으로 간주한다는 느낌을 남긴 것이다. “결국 황종연의 모더니즘론은 더 깊이 파고들어가야 할 깊이와 더 멀리 바라보아야 할 방향의 어느 지점에서 스스로 걸음을 멈추고 만다. 그런데 그곳에 리얼리즘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임규찬, 28면) 같은 단정도 그러하다.4
임규찬을 비판한 윤지관 자신이 루카치를 활용하는 방식은 일면 더 적극적이다. 그는 루카치를 “리얼리즘 정신으로 당대에 지배적이었던 모더니즘의 혁신을 도모한 모더니즘의 진정한 친구”(윤지관, 257면)로 논쟁상대에게 내세웠다. 이는 황종연도 따끔하게 책잡고 있듯이 루카치의 유산을 분별하여 현단계의 리얼리즘을 옹호하는 데서도 (그러지 않아도 불투명해진)‘전선’을 더 혼란스럽게 하는 책략이다. 더욱이 “어떤 특정한 작가나 작품은 작가의 성향이나 신원 즉 그 작가가 어느 ‘진영’에 속해 있느냐가 아니라 ‘기본적인 경향들’의 싸움이 벌어지는 루카치적인 현장으로서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윤지관, 259면)라는 주장에 이어 그런 잣대에 따라 장정일이나 백민석(白旻石)의 작품을 거론함으로써 사실상 80년대의 진영론적 수사를 표현만 바꿔서 되풀이한 것이다. 모더니즘 계열로 분류되는 국내 젊은 작가들의 평가가 일관되지 못하고 리얼리즘 계보의 작가에 대해서 재현주의에 입각해 고평하는 점도 미심쩍은 면이 많은데, 조이스(J. Joyce)나 프루스뜨(M. Proust), 포크너(W. Faulkner) 등 분명한 개성과 상이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서구 작가들을 “모더니즘의 민족문학적 발현”으로 처리하면서 아무런 따옴표나 단서를 붙이지 않고 이들을 민족문학으로 규정하는 것도 원론주의자의 아전인수로 꼬집히기 알맞다.
반면에 루카치주의로 일컬음직한 문제점을 안고 있기는 해도 양자의 주장에서 되새김질할 것은 적지 않다. 방현석이나 신경숙(申京淑) 등을 대할 때 윤지관이 드러낸 맹목을 적절하게 지적한 대목이나(임규찬, 18〜19면), “기존의 리얼리즘론에 대한 재평가와 재인식이 새롭게 이루어지면서 창조성과 재현의 문제 등이 진지하게 논의되었고, 논의되고 있는 현재의 고투”(임규찬, 24면)를 황종연에게 환기한 임규찬의 논지가 그러하다. 리얼리즘 내부에서 갱신의 노력을 어쨌든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도 임규찬의 미더운 점이다. 그런가 하면 변화된 시대에 맞서 리얼리즘의 원칙을 견지하려는 윤지관의 노력이 때로 푸대접을 받은 면도 있는 것 같다. 그중 하나가 1997년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은 투박한 가설”이라는 단서를 달고 거론했고(「민족문학에 떠도는 유령」, 『창작과비평』 1997년 가을호 266〜69면), 이번에도 “서구 모더니즘의 개화기에 본격화된 우리 근대문학이 모더니즘의 지배가 아니라 리얼리즘의 지향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사정의 ‘특수성’에 우선 주목하자”(윤지관, 256면)고 말한 (필자도 상당부분 동감하고픈) ‘가설’이다. 모더니즘을 옹호하는 편일수록 이에 대해 할말이 많을 줄 아는데, 다음과 같은 문장도 그 연장선에 있다.
90년대 모더니즘이 민족에 대한 사유를 기피하고 때로는 냉소하는 듯한 양태를 보이는 것은 90년대 문학의 문제성을 반증한다. 민족문제를 남의 일 보듯이 하는 자세로 모더니즘의 독자성이 확보되리라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다. 존재의 근저에 자리한 정체성의 몸체에는 계급과 뒤엉킨 민족의 요소들이 여기저기 끼여 있기 마련이며, 자아의 내면의식을 탐사하는 과정에서도 어두운 심리의 구렁에서 분단을 포함한 민족현실의 재현들과 부딪치는 체험이 일어나게 된다. 모더니즘이 굳이 민족문제를 괄호치고자 하는 이론적 관념에 얽매임 없이 곧바로 자기의 내면적 실체(혹은 환상) 속으로 직핍해 들어갈 때, 그리하여 해체를 통해서든 재구축을 통해서든 이 문제로의 통로를 뚫어나가는 순간, 모더니즘의 위력도 부활의 단초를 얻고 동시에 리얼리즘의 순간이 도래할 전망도 열리게 될 것이다. (윤지관, 270면)
지난 90년대 이후를 반추해보건대 민족에 대해 사유한다고 해서 리얼리즘이 반드시 더 낫다고 평하기 힘든 부분이 있고 모더니즘의 위력 부활이나 리얼리즘의 도래에 마치 정답을 제시하는 듯한 논법도 걸리지만, 문학다운 문학이 꽃피기 위해서는 리얼리즘론자든 모더니즘을 추구하는 작가든 한반도의 ‘현실’이라는 것과 씨름해야 한다는 충고만은 새겨들음직하다. 이같은 제안을 더 발전시킨 것 같지 않은 임규찬은 물론, 오해에 맞서는 과정에서 모더니즘에 대한 윤지관의 포용적 사고를 일부 인정해주면서 그의 원론주의가 갖는 한계를 정확하게 짚은 황종연도 자신의 입장에서 그 제안을 창의적으로 구체화하지는 못했다고 본다. 이는 윤지관이 기왕에 해온 작업에서 가장 힘주어 강조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인데(윤지관, 261〜62면과 268면 등), 그렇다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사이에 생산적인 교통로를 확보하면서 한국 모더니즘 문학이 이룩한 성취와 한계를 한반도 분단체제의 현실에서 직시하자는 윤지관의 주문에 대한 황종연의 응답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2. 황종연의 모더니즘 옹호
「모더니즘에 대한 오해에 맞서서」는 국문학도로서는 드물게 해박하고 정치한 현대비평 지식을 바탕으로 모더니즘에 대한 리얼리즘론자들의 오해에 정면으로 맞선 인상적인 글이다. 주로 임규찬과 윤지관을 겨누었지만 최종 목표는 백낙청(白樂晴)의 리얼리즘 입론에 맞춘 느낌이다. 먼저 ‘살아 있는 버먼’을 중후한 논리로 증언하는 2절부터 읽어보자.
버먼에 대한 황종연의 전폭적 공감은 『세계의 문학』 1994년 여름호에 발표된 「모더니즘의 망령을 찾아서」(『비루한 것의 카니발』, 문학동네 2001, 353〜81면)에 잘 나타나 있지만, 주로 소개에 치중한 당시와는 달리 이번에는 매우 공세적인 논조를 취하고 있다. “백낙청 이론의 지도 속에는 모더니즘이 그 고유의 영역과 형세를 유지하며 존립할 여지가 전혀 없다”면서 백낙청의 마샬 버먼 비판을 “결국 모더니즘의 업적을 리얼리즘의 이념으로 흡수하여 리얼리즘의 판도를 넓히는 일종의 제국주의적 팽창” 사례로 규정한(황종연, 245면) 것이다. 백낙청의 버먼 비판을 모더니즘으로부터 자주성을 박탈하는 리얼리즘 비평의 ‘횡포’로 못박는 그는 버먼을 아카데미씨즘으로 오염된 영·미 강단 모더니즘과는 거리가 먼, “급진적 개인주의와 맑스주의의 복합체”로 자리매긴다. 그 다음 버먼이 “근대의 근대다움을 설명하는 한가지 중요한 모델을 확립하는 데 공헌했음은 강조”(황종연, 250면)하고, 윤지관이나 임규찬이 시도하듯이 “루카치와 제임슨(F. Jameson)을 결합하여 한국에서는 리얼리즘이 다른 어떤 문학양식보다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론적 정합성이 부족한 입론”(황종연, 260면)임을 조목조목 밝힘으로써 모더니즘 옹호에 나름의 치밀한 논리를 부여한다.
예컨대 백낙청의 버먼 비판이 충분한 검증 및 평가를 생략한 주장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지적은 어느정도 납득할 만한 것이다. 또한 윤지관이 의지한 제임슨의 인식의 지도 그리기 및 총체성 범주를 탁월하게 체현하는 것이 바로 모더니스트인 조이스의 『율리씨즈』(Ulysses, 1922)임을 상기하고 리얼리즘론자들이 “서양이라는 권위를 리얼리즘의 정당화를 위해 편파적으로 이용”(같은 곳)한다는 말도 설득력이 상당하다.5 황종연 자신이 끌어들이는 서양이라는 권위가 얼마나 떳떳한가는 뒤에서 검증하겠지만, 어쨌든 버먼 옹호만은 진정석(陳正石) 등이 예전에 시도한 ‘버먼 내편 만들기’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면모가 적지 않음도 주목할 만하다. 그중 하나만 지적하자면, “아이러니를 모르는 해방의 논리가 얼마나 압제적인 체제를 낳게 되는가는 계몽이성의 변증법이 빚어낸 인류재앙의 역사를 통해 배울 만큼 배우지 않았는가”(황종연, 248면)라는 반문은 노동계급 출신인 미국 비평가의 유연한 모더니즘론에서 도출할 법한 인상적인 구절이다.
반면, 황종연 자신은 버먼의 관념적 시간관에 대한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 및 피터 오스본(Peter Osborne)의 문제제기를 감안하면서도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있지만, 문학사 기술에서는 모더니즘시대 정의 및 모더니티와 모더니즘의 역사적 변별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다. 오스본의 논법에 따라 모더니티 개념을 ① 역사적 시대구분 범주 ② 사회적 경험의 질 ③ (미완의) 기획으로 세분한다면6 버먼의 기여는 주로 ②번 항목에 집중되겠는데, “근대의 삶과 예술이 영구적인 자기비판과 자기쇄신 능력을 가지고 있다”7는 식의 심심치 않은 단언 때문에 그런 기여조차도 불충분한 인상을 줄 때가 많다. 맑스의 혁명적 대의에 충실하고자 하는 충정에도 불구하고 근대의 비판이나 극복보다는 예찬 쪽으로 기운 혐의마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단언의 함의가 간단치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정작 황종연 자신이 무게를 두는 20세기 본격 모더니스트(high modernist)들에 대해서 버먼은 관념의 상아탑에 안주하거나 냉소주의로 일관했다고 혹독하게 비판한 바 있기 때문이다.8
이런저런 사정을 고려해보면, 버먼이 “액체근대에 적응하는 방법과 함께 저항하는 방법을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제기했다”(황종연, 251면)는 주장에 마냥 손사래칠 것만은 아니다. 아니, 평면적 발전관에 사로잡혀 모더니즘 개념의 외연을 자의적으로 넓혔다는 의심을 떨치기 힘든 논의라도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고, 우리 문학의 진로모색에 거름으로 쓸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곳 현실에서의 쓸모를 제대로 가늠하여 높이는 길이다. 이는 황종연이 버먼 옹호의 연장선에서 ‘수입한’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액체근대(성)』(Liquid Modernity, 2000) 해제에도 고스란히 해당되는 원칙이다.
서문과 후기를 제외하고 다섯 장(해방, 개인성, 시간/공간, 노동, 공동체)으로 구성된 바우만의 저작이 후기근대에 속하는 (포스트모던 현실로 일컬어지는) 다양한 문화현상들을 참신하게 설명하고는 있지만 버먼과는 또다른 층위에서 그 근대관의 관념성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우리로서도 ‘통관절차’가 까다로울 필요가 있다. 그 관념성은 기본적으로 고체근대와 액체근대의 이분 논리가 갖는 한계라고 할 터다. 물론 바우만 자신이 “근대가 처음부터 액화(液化)의 과정이 아니었는가?”라는 식의 반론을 의식하고 맑스의 그 유명한–“모든 고정된 것이 연기처럼 사라진다”는–언명을 일깨우고는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최근 단계에 해당하는 액체근대가 “이탈과 회피, 손쉬운 도피 그리고 희망없는 추구의 시대”라면, 바우만과 그의 이분법을 무비판적으로 접수한 황종연처럼 고체(무거운) 근대 대 액체(가벼운) 근대의 대립구도에 집착하기보다는, 근대라는 그 유동성에서 무시 못할 편차가 존재하는 세계화시대의 지역적 현실에 합당한 유연성을 견지하면서 근대의 다면적인 양상을 구심적으로 파고드는 것이 선결과제일 것이다.9
다시 버먼으로 돌아가면, 황종연은 1994년 논문에서도 페리 앤더슨의 버먼 비판이 갖는 타당성을 십분 인정해주는 듯하다가 그런 타당성을 오히려 “서구적 맥락 안에서 파악하는 관점”으로 격하한 바 있다. 동시에 버먼의 모더니즘론이 “근대화의 양면성을 혹독하게 경험하고 있는 제3세계 국가들의 사정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면서(『비루한 것의 카니발』 380면) 그 유효성을 주장했다. 버먼의 맹점에 대한 지적을 이번에는 “대혁명의 이론밖엔 진정한 정치학이 없다고 생각하는” 태도나 “극소수 엘리뜨 지식인의 책상 위에 놓인 대혁명의 씨나리오”(황종연, 247면)쯤으로 몰아붙인다. 그러나 이런 왜장치는 수사에도 불구하고 근대화의 양면성을 분단체제의 현실에서 종합적으로 사유하여 지양하는 데서는 역시 쓸모의 한계가 뚜렷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는 다른 어디서보다 버먼의 ‘실제비평’에서 확인되는바, 필자는 버먼의 보들레르론을 다시 검토한 이 싯점에서도 그가 근대의 극복보다는 ‘파괴적 창조’라는 근대 특유의 이데올로기에 현혹되어 있다는 생각을 버리기 힘들다.10
버먼은 그렇다 쳐도 임규찬이나 윤지관이 안고 있는 뻣뻣한 사고의 한계를 지적하고 백민석의 작품을 언급한 3절도 경청할 대목이 많다. 자기비판 및 수정을 동반한 90년대 젊은 작가들에 대한 총평도 예리하고 온당하다고 본다. “90년대 한국 모더니즘에서는 새로운 유동성의 근대와 대결하려는 노력보다 그것을 영접하는 흥분이 우세했”고 거기서 나타난 자아는 “법률상(de jure) 개인이지 사실상(de facto) 개인은 아니다”라든가, “90년대 모더니즘 소설에 출현한 나르씨시즘 문화는 자유의 자랑스러운 명패가 아니라 곪아터진 상처”(황종연, 257면)라는 자평은 모더니즘을 진지하게 옹호하는 논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기에 더 큰 울림이 있다.
모더니즘에 대한 오해에 맞서면서 ‘자기 영토’의 부실함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자세가 있기에 이땅의 리얼리즘이라고 해서 역사적 시대구분에서 면제되라는 법은 없음을 우리도 냉철하게 따져보게 된다. 그의 지적대로 “한국 리얼리즘론은 단지 그 개념의 엄밀성을 추구한 학술담론이 아니라, 그때그때마다 전략적 사고가 필요한 정치운동의 일환이었다. 그럼에도 변화된 사회적·문화적 환경에 적합한 리얼리즘론의 모색을 위해서라도 지금쯤은 이론적 반성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황종연, 주16) 그렇다고 황종연의 모더니즘 옹호가 개념상 혼란스런 구석이 있고 자신의 비평적 깃발이 걸린 진정성이라는 비평 영토를 좀먹고 있다는 사실까지 눈감아줄 생각은 없다. 루카치의 공식을 답습한 임규찬이나 윤지관에 대한 그의 반론 및 모더니즘 옹호가 더 정당한 근거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근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현실에서 느끼는 매혹과 공포를 이해하고 현실과의 싸움을 지속하는 데에 필요한 용기와 영감을 제공”(황종연, 251면)하는 모더니즘을 역사적 시간성의 관점에서 재인식하고 통일시대가 한걸음 더 (위태롭게!) 다가온 2003년 싯점에서 그 가능성을 탐색해야 하겠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가 이 대목에서 제기하고 싶은 논점은 그가 버먼이나 제임슨, 모레띠 같은 서구의 비평가를 자신의 이론적 배경으로 얼마나 정확하게 끌어오는가 하는 것만은 아니다. 모더니즘 옹호든 리얼리즘 비판이든 그가 오늘의 한국문학에 어떤 포부와 희망을 걸고서 논쟁에 임하고 있으며 한반도의 위기상황에 비평가로서 과연 어떤 대응을 하고 있는가도 궁금해지는 것이다. 오해된 모더니즘을 바로잡기 위해 결연하게 맞서면서 내리는 그의 결론은 못내 불만스러웠다.
한국 리얼리즘론자들은 개인의 경험이 역사·계급·장소에 굳건히 뿌리박은 구체적 형상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요구하지만 그것은 작가 개인의 의지나 노력만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의 한국소설에서 우리는 어쩌면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칭송되는 수많은 삶의 표상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며 더불어 살아온 가난한 사람들의 체험, 민족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하는 개인과 집단의 연대기, 정직하게 노동하고 성실하게 살림하는 남녀의 위엄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새로운 리얼리즘을 표방하고 나온 신작소설에서 온갖 공허한 환상의 파노라마만을 접하게 될지도 모른다.(황종연, 263〜64면)
리얼리즘론자와 모더니즘론자를 막론하고 90년대 내내 이런저런 형태로 내쉰 이같은 탄식과 회의를, 용납할 수 없는 패배주의나 모더니즘에 의한 리얼리즘 흡수통일 술책쯤으로 몰아세우기 전에 이어지는 그 마지막 문장까지 덧붙여 읽어봄직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일찍이 맑스가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역사는 그 나쁜 측면을 따라 발전한다고.” 이는 분단의 질곡으로 인한 모더니즘의 불운이라는 윤지관의 진단을 자본주의의 난숙으로 초래된 리얼리즘의 필연적인 곤경으로 맞받아치려는 수사적 의도가 다분한 결론이다. 그가 시도하는 이런 반전은 시대의 ‘비루함’을 직시함으로써 아이러니와 역설로 충만한 근대현실을 천착하려는 비평가의 태도인지도 모른다. 앤더슨을 재비판한 데 끌어들인 버먼의 표현을 빌리면, ‘살아 있는 길거리의 징후들’을 읽어내려는 ‘리얼리스트’로서의 자세 말이다.
그런데 두루 감안해도 맑스를 그런 식의 아이러니 맥락으로 끌어들이는 것만은 맑스의 본디 뜻에 어긋나는 비맑스적 오용(誤用)에 가깝지 않을까? 프롤레타리아트의 본원적 혁명성 따위에 믿음을 주지 않았음에도 사회의 건설적 변혁을 담지하는 그런 ‘기본계급’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교육하기(80년대 용어로 하면 의식화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맑스의 계승도 ‘공식적·도식적 맑스주의’가 파산을 맞은 이 싯점에서는 뭔가 달라져야 하겠다. 물론 아이러니와 역설의 창조성도 결코 버릴 수 없는 근대문화의 핵심적 유산이다. 하지만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며 더불어 살아온 가난한 사람들의 체험, 민족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하는 개인과 집단의 연대기, 정직하게 노동하고 성실하게 살림하는 남녀의 위엄”을 민중들에게 되돌려주기 위한 맑스의 계급투쟁은 분단체제에서 대승적 싸움의 밑천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황종연의 모더니즘 옹호가 갖는 진짜 문제점에 비추어보면 필자의 이런 바람은 차라리 부질없는 설교요 훈계라는 느낌이다. 왜 그런가를 곡진하게 해명하기 위해서는 그의 현장비평도 간단하게나마 살펴보아야 하겠는데, 그가 지난 30년간 축적된 리얼리즘 비평의 값진 유산까지 무차별 도거리로 넘긴 까닭에 먼저 이론 차원에서의 검증을 좀더 해봐야 할 듯하다.
3. 리얼리즘과 재현 및 기법의 문제
‘무기교의 기교’라는 말도 있듯이 분야를 막론하고 기법이나 형식을 완전히 벗어나서 성립되는 작품은 상상하기 어렵다. 재현(再現, representation)은 원론적으로 기법·형식을 포괄하는 상위개념이라고 해야 맞지만, (특히 창작과정에서는) 그 선후가 확연히 구분되지 않는 면도 있다. 소설 장르의 경우 사실적 재현의 비중이 더 커지는 것은 사실인데, 이를 예술의 본령이라고 한다면 또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꼴이다. 아무튼 기법·형식은 작품을 작품답게 만드는 과정에 따르는 ‘내용’의 본질적 이면(裏面)이라는 점에서 이를 도외시한 평론가라면 한마디로 함량미달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황종연의 리얼리즘 해체 주장도 바로 그 점, 즉 이념적인 내용을 앞세워 문학을 문학답게 하는 기법과 형식을 리얼리즘론자들이 무시하거나 편의적으로 왜곡했다는 데 맞춰져 있다. 그는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70년대 이후 한국의 리얼리즘론자들은 ‘리얼리즘의 승리’라는 원칙을 고수하는 가운데 리얼리즘 개념을 지나치게 확장해 혼란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그들은 리얼리즘을 문학양식(literary mode)의 차원에서보다 정치적·도덕적 실천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들의 리얼리즘론은 종종 전략론이나 수양론의 일종이 되곤 한다. 예컨대, “어디까지나 창조성이 먼저고 실사구시(實事求是) 지공무사(至公無私)가 먼저이며 ‘재현’은 그에 따라오는–각 분야마다 다른 방식과 비중으로 따라오는–성과임을 기꺼이 인정하는 리얼리즘론”을 말하는 백낙청의 생각은 그것이 루카치류의 반영론을 극복하기 위한 착상임을 감안하더라도 리얼리즘 논의를 결국 문학의 실질적인 문제들과 유리되게 만드는 것이다. 백낙청의 말은, 아주 무식하게 부연하면, 리얼리즘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다. 그것은 ‘근대의 성취와 극복’이라는 원대한 이중과제를 수행하느라 심신이 지친 리얼리즘제국의 사병들을 격려하는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문학 창작과 비평의 활로를 열어달라는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 감히 주장하건대, 리얼리즘의 개념은 다시 구성돼야 한다. 그것을 7,80년대 민족운동과 한바퀴를 이룬 문학운동 이념으로서 구비한 대역사, 대체제, 대문학의 관념에서 해방시켜 한국문학의 시대 조류와 함께 변천하는 개념으로, ‘리얼한 것’을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문학적 노력을 기술하기에 적합한 개념으로 다시 구성해야 한다. (황종연,262면)
서로 다른 현실적 맥락과 나름의 개념적 역사가 엄연한 용어들인 리얼리즘의 승리, 전략론 또는 수양론으로서의 리얼리즘, 근대의 성취와 극복, 대역사·대체제·대문학 등의 용어를 이렇게 묶어놓고 마구잡이로 논하는 것은 비판의 선명성을 높이는 길일지언정 논쟁의 온당한 자세가 아닐 것이다. ‘리얼리즘의 승리’의 원칙 고수 및 그에 따른 개념 확장이라는 비판은 무원칙하게 민족문학의 패권 장악을 시도한 과거 일부 급진적인 논객들에게나 적중되는 것이다. ‘리얼리즘의 승리’는 작품을 작품으로 읽자는 (80년대 평단에서 너무도 백안시된) 상식을 문학비평에서 엄밀하게 지키려는 노력 가운데 발굴하고 발전시킨 개념이다. 수양론으로서의 리얼리즘은, 짐작컨대 백낙청이 발의한 ‘지혜의 위계질서’를 문제삼는 듯하다. 만약 그랬다면,국내 비평계 및 사회과학계에서 정식으로 논의된 바 없는 이 제안이 억압적 위계질서의 답습이 아닌 좀더 구심력있는 변혁운동의 창발 의도에서 제기된 발상임을 기억해야 마땅하다. 대문학(大文學)으로서의 리얼리즘이라는 비판도 현재 국내 비평계의 실상을 직시했다기보다는 정전 해체 및 파괴라는 서구문학(문화) 연구의 흐름을 추종한 통념에 더 가깝다. 근대의 성취와 극복으로 말하자면, 그건 외부에서 떠맡겨진 ‘원대한 과제’라기보다는 차라리 생태학적 재앙에 직면한 생명체가 지속가능한 환경을 일구어내려는 노력에 비견할 만한 담론이라 해야 적절하겠다. 물론 이런 변호를 팔이 안으로 굽는 격이라고 나무랄지도 모를 일인데, 지난 민족문학의 도정을 조금이라도 눈여겨본 독자라면 충분히 수긍하시리라 믿는다. 하지만 나머지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인용문의 골자, 즉 한국문단의 실정에 맞는 리얼리즘의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쟁점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달라진 현실에 맞선 창조적 응전의 산물인 우리말 문학에 언제까지 리얼리즘이란 외래어를 붙일 것인가 하는 한숨이 새어나오는 한편 가상과 실재의 차이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촉발하는 과학기술의 도전이 더욱 거세어지고 있는 것이 요즈음 세계화 현실의 실상임을 생각할 때, 리얼리즘제국이니 원정대장이니 사병이니 하는 (그다지 적절하지도 않고 발랄하지도 않은) 군사주의적 비유들에도 불구하고 황종연의 패기에 공감하고픈 심정도 없지는 않다. 뿐만 아니라 선학들에게 후생가외(後生可畏)를 실행에 옮김으로써 아류(亞流)를 피하는 것은 차라리 후학의 도덕적 도리요 권리가 아니겠는가. 그간 리얼리즘론자들이 소홀히 취급하거나 외면해온 문학의 기법과 형식을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도 필자로서는 오히려 더 힘을 실어주고 싶은 논점이다. 그러나 백낙청의 지론, 즉 “어디까지나 창조성이 먼저고 (…) ‘재현’은 그에 따라오는–각 분야마다 다른 방식과 비중으로 따라오는–성과임을 기꺼이 인정하는 리얼리즘론”을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논자에 대해 동학으로서의 공감은 그 정도가 최대치다. “그것이 루카치류의 반영론을 극복하기 위한 착상임을 감안하더라도 리얼리즘 논의를 결국 문학의 실질적인 문제들과 유리되게 만드는 것이다”라는 판정은 사실상 극언이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이든 모더니즘이든 맹목적인 비판이나 줏대없는 추종을 다같이 경계하는 필자로서 허심한 논쟁풍토의 조성을 위해서라도 이런 극단적인 평설(評說)을 지나쳐버리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다.
반복컨대 그의 ‘탄핵’은 “문학작품을 다루면서 스타일이나 기법보다 사회적인 의식이 더욱 ‘근원적인’ 문제라고 보는 것은 동의하기 어려운 리얼리즘론의 편견”(황종연, 243면)이라는 인식에서 나온다. 딱히 80년대가 아니어도 리얼리즘론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형식 및 기법을 등한시하고 사회적인 의식을 더 근원적인 문제로 간주해온 관행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1960년 4·19부터 1987년 6·10항쟁에 이르기까지 길고도 힘겨운 민주화투쟁을 치러내는 가운데 생겨난 타성임을 참작하더라도 그런 바람직하지 못한 편향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점을 부인해서는 안된다고 본다.11 다른 한편, 대다수 리얼리즘론자들이 실제 작품평가에서 설령 재현주의나 내용중심주의에 기울었다고 하더라도 황종연의 문제제기가 기본적으로는 스타일 및 기법과 사회적 의식을 하나로 파악·통합하려는–사실주의와 그 반동(反動)으로서의 모더니즘(이념)의 극복을 당연히 포함하는–‘리얼리즘’의 노력 및 그 나름의 비평적 업적까지를 충분히 고려한 처사인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나는 대목이 너무도 많다.
실상 스타일과 기법의 쇄신 없이 사회적 의식이 제대로 발현될 리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양자를 종합하는 변증법적 실천은 지난 연대 민족문학이 지향한 바다. 모더니즘이든 리얼리즘이든 진정으로 고전에 값하는 작품이라면 기존 관습적 사고 및 상투적 언어의 쇄신이 동반되지 않을 리 없는데, “이것은 사실상 모더니즘 문학만이 아니라 근현대문학 전체에 따라붙는 조건”(황종연, 253면)임을 강조한 황종연이 리얼리즘론에도 해당되는 이런 (기초적인) 사실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는 왜 기법이나 형식을 내용과 분리하면서 전자로 기울어지는 것인가? 단지 모더니즘에 대한 부당한 오해에 맞서려다보니까 본의아니게 기우뚱해진 것일까? “‘리얼한 것’을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문학적 노력을 기술하기에 적합한 개념으로 다시 구성”해온 민족문학의 노력이 분명히 있었고 있거늘 애써 무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는 그가 자신에게 불리한 점을 슬쩍 눈감아버림으로써12–소화하기 힘들어서 아니면 불신이 너무 커서?–결과적으로 왜곡하는 ‘정치비평’의 폐단을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더니즘에 대한 오해에 맞서서」의 여러 훌륭한 비평가적 미덕과 멋지게 절제된 문장들이 빛을 바래는 것도 바로 그런 폐단에 기인한다고 본다. 예컨대, “어디까지나 창조성이 먼저고 실사구시(實事求是) 지공무사(至公無私)가 먼저이며 ‘재현’은 그에 따라오는” 리얼리즘론에 관해서도 실상은 황종연의 비판과 거리가 멀다.
“어디까지나 창조성이 먼저고……”라는 표현은 『창작과비평』 1992년 여름호에 발표된 백낙청의 「로렌스 소설의 전형성 재론–“연애하는 연인들”에 그려진 현대예술가상을 중심으로」의 결론부에 나온다.13 황종연이 이 대목을 딱 집어서 “루카치류의 반영론을 극복하기 위한 착상임을 감안하더라도 리얼리즘 논의를 결국 문학의 실질적인 문제들과 유리되게 만드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정리했으니, 일단 이 부분부터 살펴보자. 백낙청의 이 논문이 “루카치류의 반영론을 극복하기 위한 착상”에서 나온 것임에는 틀림없는데, 중요한 것은 극복의 함의가 결코 단순치 않다는 사실이다.
4. 백낙청의 로런스론과 모더니즘
루카치류의 반영론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붕괴 이후 숱한 포스트 사조의 범람에 대한 견제와 대안 지향의 분석을 로런스(D. H. Lawrence)의 작품에 대한 ‘실제비평’으로 수행한 백낙청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언어’나 ‘기호작용’과 무관하게 미리 주어진 어떤 ‘객관적 현실’을 설정하고 그것의 ‘올바른’ 전달·재현·해석 따위를 말하기가 그 어느때보다 힘들어졌음이 분명하다. 또한 ‘세계’나 ‘현실’로부터 뚜렷이 구별되는 ‘자아’ 내지 ‘주체’를 상정하기도 어려워졌다. 물론 변증법적 사고에 근거한 리얼리즘론은 애초부터 소박한 모사론과는 다른 차원이었고 ‘세계 대 자아’라는 식의 양분법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리얼리즘론이라면 의당 그래야 하듯이 ‘객관적 현실’의 존재를 어떤 의미로든 인정하고 그것의 비판과 극복을 포함한 ‘정당한 반영’을 중시하는 한, 스스로 또하나의 ‘형이상학적 사고’가 되고 반영과 재현 자체가 하나의 ‘언술적 실천’이요 ‘권력’의 행사임을 망각할 위험이 따르기 쉽다. 이런 위험 자체는 변증법을 표방한다고 해서 결코 근절될 수 없는 것인만큼, 그 위험에 대한 탈구조주의·탈현대주의자들의 진지한 경고는 고맙게 받아들임직하다. 그러나 경종 울리기도 상습화되다보면 경고효과 자체가 줄거니와, 그 끊임없는 경종이 결국 재현의 가능성 여부를 떠나 현실의 존재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역사를 부정하며 진리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으로 번질 때, 우리는 바로 이런 현상을 하나의 역사적 현실로 인식하고 ‘해체’해볼 필요를 문득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해체를 포함한 ‘올바른 반영’을 수행할 리얼리즘에 대한 요구가 새삼스러워지는 것이다. (같은 글 62면)
황종연이 “현실의 존재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역사를 부정하며 진리 자체를 부정하는” 논자는 물론 아니다. 말하자면 인용문에서 제시되는 차원의 ‘리얼리즘 운동’에 경종을 울려대면서 서양의 학식과 논자를 동원하여 반기를 든 ‘모범 케이스’라는 점에서 정중한 예우가 필요한 손님인 셈이다.
아무튼 사회주의세계의 붕괴 이후에 씌어진 백낙청의 로런스론만 하더라도 1992년 논문에 국한할 것은 아니다. 이어 『안과밖』 창간호(1996년 하반기)에 실린 「로렌스와 재현 및 (가상)현실 문제」는 로런스의 에쎄이에서 다뤄진 고흐, 쎄잔느 등에 관한 미술비평의 ‘소개’뿐만 아니라 루카치를 비롯해 하이데거, 데리다 등이 개진한 예술론 및 반영론은 물론이요 이른바 가상현실 시대의 삶과 예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성찰과 발본적인 재검토를 지속한 글이다. 최근 『안과밖』 13호(2002년 하반기)에 발표된 「소설 “쓴트모어”의 독창성」도 내용면에서의 탁월함이 어떤 연유로 섬세하고 독창적인 기법상의 성취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가를 상세하게 조명한 평문이다.
국문학도에게 특정 영문학 학술지에 실린 논문들을 따라읽지 않는다고 질책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황종연이 편의적으로 인용한 1992년의 백낙청 글만 보더라도 “스스로 또하나의 ‘형이상학적 사고’가 되고 반영과 재현 자체가 하나의 ‘언술적 실천’이요 ‘권력’의 행사임을 망각할 위험”이 딱히 리얼리즘론에만 해당되지 않음은 명백하다. 형이상학적 사고에 대한 경계가 집착으로 변하면서 엄연한 ‘실재’를 희롱하는 담론놀음에 빠져든 온갖 이론의 득세도 당연히 그 자체로 해체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실사구시·지공무사로서의 리얼리즘론이 “어디까지나 실제로 씌어진 시의 언어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에 기반하고 있음은 거듭 강조함직하다. “운문일 경우 당연히 그 운율 효과가 의미의 일부로서 감안되어야 할 것이다. 시의 율격과 가락·심상·수사법 등 형식상의 세목들에 대한 관심을 이른바 형식주의 비평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경향도 없지 않으나 이는 물론 편견이다. 형식주의자들이 형식주의적 편견 때문에 그런 세목에 집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세목들의 참뜻을 온전히 밝혀내는 일이야말로 유물론자의 몫이다.”14
이에 비추어보면, 고착된 관념을 드러낸 리얼리즘론자들을 정확하게 비판했을지언정 그 기계적 관성을 주밀하게 해체·재구성해온 민족문학의 내부작업을 간과한 황종연의 과실도 서구의 이론들과 ‘공모’하는 과정에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심증이 굳어진다. 앞서 3절에서 리얼리즘과 연관된 여러 논제들에 대한 분별없는 난타를 구분해서 황종연 자신에게 되돌려준 바 있고 그의 정치주의적 비판전략 및 형식과 내용의 해묵은 이분법을 지적했는데, 근래 북미 학계를 장악한–대문학이라는 관념을 타파하는 와중에 근대극복에 이바지할 수 있는 종요로운 유산까지 유실(遺失)하기 십상인 문화연구류의–다원주의적 사고를 제대로 떨치지 못한 것이 병통이라면 더 큰 병통이다.
그로 인해 초래된 왜곡은 한둘이 아니다. 그는 문학양식을 들먹이면서 형식과 기법의 중요성을 내세웠지만, 사회주의세계의 파산 이후까지 완고하게 버티던 민족문학의 내용중심주의 및 진영론적 사고를 내파(內破)한–그 때문에 내부불만도 꽤나 있었다고 알려진–「지구시대의 민족문학」에서도 백낙청이 재현의 연마와 기법의 중요성을 논한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한마디로 “형식에 대한 관심의 결핍이야말로 오히려 관념주의자의 태도”임을 사례를 들어 논한 것이다.15
황종연이 어떤 문학관을 근거로 백낙청의 리얼리즘론을 “문학의 실질적인 문제들과 유리되게 만든다”고 속단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반영과 기법 문제가 문학의 실질적인 사안 중 하나임은 누구나 인정할 법하다. 사회주의적·비판적 리얼리즘이 주름잡은 80년대 평단에서 재현의 성격 규정을 둘러싸고 숱한 논란이 있었고, 이에 뒤질세라 서구 학계에서는 ‘근대 이후 세계〓재현 불가’라는 등식을 세워놓고 무수한 반재현론을 수출한 바 있다.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위세가 등등하던 90년대에 들어서–일체의 반영론 해체 및 부정의 차원에서–텍스트, 상호텍스트성, 패러디, 패스티시(pastiche, 혼성모방) 등이 부각되면서 우리 문단에서 표절시비가 끊이지 않은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어지러운 시절을 돌이켜보건대, 90년대 말의 토론을 포함하여 현재 벌어지고 있는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의 직·간접 당사자들 가운데 과연 어느 누가 문학의 기법과 형식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같은 반영론 또는 반(反)반영론 이데올로기에 면역성 및 해독성을 온전히 갖추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이런 반문을 유발하는 한 대목만을 인용해본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듯이 루카치는 어디까지나 ‘객관적 현실’을 ‘재현’하는 일–물론 여기에 ‘전유(專有)’라는 주체의 작용이 개입하지만–을 예술의 본분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로렌스와는 기본적인 전제를 달리한다.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 다양한 중재를 통해 전달되는 것”(what is not directly visual but is transmitted through various mediations)이라는 구절도 쎄잔느가 “말하자면 사과를 자신으로부터 밀어버려서 그것 스스로 살게 놓아두”도록 했다는 로렌스의 진술과 대비할 때 단순히 표현상의 문제라고만 볼 수 없는 차이를 보인다. 로렌스는 ‘재현’을 말하든 않든, “인간과 그를 둘러싼 우주 사이의 관계를 그 살아 있는 순간에 드러내는 일”(171면)과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과 우리 둘레의 살아 있는 우주 사이의 순수한 관계를 성취하는 것을 바로 그 내용으로 삼고 있다”(172면)는 사실을 핵심에 두었고, ‘재현’은 경우에 따라 이런 성취의 한 동기일 수도 있고 그러한 관계가 작품에서 성취될 때 어떤 식으로든 따라오는 성과이기는 하지만 ‘삶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재현’보다는 ‘전유’의 개념이 이런 ‘관계의 성취’에 더 방불하기는 하다. 그러나 ‘전유’ 역시 ‘드러나면서 성취되는 관계’를 가장 ‘리얼한’ 삶 그 자체로,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근원적인 실재로 보는 입장과는 다르며, 로렌스처럼 ‘살아 있는 우주’를 강조하는 태도와 엄연히 거리가 있다. (수사학적 표현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우주가 살아 있다는 로렌스의 신념은 곳곳에 드러나지만 특히 그가 마지막으로 완성한 책 『묵시록』에 분명히 제시된다.) 한가지 유의할 점은, 로렌스의 이런 태도나 신념을 ‘물활론(物活論)’이든 ‘범신론(汎神論)’이든 또는 다른 무슨 이름이든 ‘우주’를 이미 대상화해놓고서 그것이 생명체냐 아니냐를 판별하는–그야말로 재현주의적이고 데리다와 하이데거가 공유하는 의미로 형이상학적인–학설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삶 자체’ 또는 ‘순수한 관계맺음’이 이룩되고 드러나면서 생물·무생물 모두가 존재할 가능성이 비로소 열린다는 발상이며, 그런 특수한 의미에서 ‘생명체’가 ‘죽은 물체’에 선행한다는 주장이 성립하는 것이다. (백낙청 「로렌스와 재현 및 (가상)현실 문제」, 『안과밖』 창간호, 1996년 하반기, 297〜98면)16
편리한 정리보다는 더욱 근원적인 물음을 촉구하는 이런 문장을 엄밀하게 논할라치면 하이데거의 예술관, 데리다의 텍스트와 ‘차연’ 및 바이만(R. Weimann)의 비재현적 미메씨스(mimesis) 등을 로런스의 에쎄이와 대비하여 점검한 부분들을 세밀하게 파고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독자 여러분이 앞뒤 문맥들을 성의껏 찾아 읽어주기를 부탁드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다만, 90년대 후반 논쟁에서 방민호(方珉昊)가 바로 이 대목을 두고 ‘리얼한 삶〓언어 저편의 것’이라는 등식을 세워놓고 ‘언어 저편의 것’을 작품과 대립시킨 바 있는데,17 그런 이분법적 구상으로는 “사과를 자신으로부터 밀어버려서 그것 스스로 살게” 한다거나 예술의 진정한 본성을 “인간과 그를 둘러싼 관계를 그 살아 있는 순간에 드러내는 일”로 정의한 로런스의 통찰과 그런 통찰을 민족문학운동에 새롭게 응용·접목해온 백낙청의 리얼리즘론을 감당키 어렵다는 점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사실 임규찬이나 윤지관 등이 역사적 운동과정에서 또하나의 형이상학으로 전락할 수 있는 리얼리즘의 항존하는 위험과 한계를 이론적 사고과정 및 작품평가에서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다거나 (그 필연적인 결과이겠지만) 리얼리즘을 ‘자명하게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는 경향을 왕왕 노출하는 고질도, 재현과 창조성의 상관관계 및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백낙청의 철저한 재검토를 숙지하지 못한 것과도 연관이 없지 않을 것이다.18
덧붙여 “우리 자신과 우리 둘레의 살아 있는 우주 사이의 순수한 관계를 성취하는” 것이 참다운 예술의 본성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리얼리즘이든 모더니즘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선진적 세계관 내지는 방법, 기법 등을 내세운다고 해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님도 재차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이는 오직–“경우에 따라 성취의 한 동기”로 작용할 수 있는 기법이나 방법, 재현 등에 대한 깊은 성찰과 혁신이 가세하는–개별 작품의 창조적 구현으로써만 ‘살아 있는 순간’을 드러내고 이룩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런 관계가 성취되는 순간’의 검증까지도 가능하다는 논리다.
또한 참다운 창조성에 값하는 작품이라면, 문학사조(文學思潮)적 경계를 벗어남은 물론이고, 삶이란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삶’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런 ‘한다’는 의식 및 목적 자체가 생활과 진리를 망각케 하고 삶답게 사는 매순간들을 왜곡케 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는 사실도 위 인용문에서 추론해볼 수 있겠다. 삶과 역사의 창조성에 대한 신념을 결한 세계관을 대변한 20세기 초 모더니즘의 ‘이념’과 그 실제 업적을 백낙청이 구분한 취지도 바로 그런 것이라 짐작된다. 그렇다면 이같은 실사구시적 자세는 리얼리즘의 제국주의적 팽창이기는커녕 모더니즘의 그런 이념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스트의 작품이 그 나름의 고유한 영역과 형세를 유지할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유지해야만 한다는 인식의 증좌라는 결론에까지 이르러야 마땅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이 우리 시대의 문학에서는 아직도 극복되지 않은 핵심적 쟁점이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모든 리얼리즘론과 모더니즘론이 결국 같은 이야기의 안팎을 이루기 마련”19이라는 백낙청 나름의 ‘회통론’은 시중을 떠도는 안이한 절충주의나 일방적인 흡수론과는 격을 달리하는 발상임이 한층 분명해질 것이다.
아무튼 위의 인용문이 던지는 암시만 생각해보아도, 스타일이나 기법을 내세워 리얼리즘의 사회적인 의식을 문제삼는 이데올로기의 정체는 분명하다. 뭐라 토를 달든 그것은 7,80년대 순수문학주의자들이 민족문학을 비난할 때 써먹은 수법에 서구비평의 이론적 세련을 가미한 재탕인바, 지공무사·실사구시로서의 리얼리즘론을 70년대의 리얼리즘적 사고 또는 태도가 90년대에 복권된 것으로 착각한 진정석의 모더니즘론 역시 그 수준에서 멀리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리얼리즘’을 아예 부정하고 나선 황종연의 경우는 이 정도로 문제를 끝낼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런 부정이나 형식 및 기법으로의 치우침은 실제 작품읽기와 구체적인 작품평가에 한계를 긋지 않을 수 없는데, 이를 하나의 물음으로 바꿔봄으로써 미흡하나마 논의를 마무리짓고자 한다.
5. 황종연의 『오래된 정원』 비판과 비평의 객관성
삶의 창조적 활력과 열린 가능성의 다른 표현인 이른바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 파괴되는 세계화시대 고유의 한계와 잠재력, 즉 나날의 일상 자체에서 퍼올린 모든 생동하는 사유들이 자본의 광고로 포획되는 것만큼이나 낡고 상투적인 정신의 해체와 새로운 인간다움의 가능성도 솟아나기 마련인 문화시장의 현장에서 황종연은 과연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가? 백낙청의 「소설 “쓴트모어”의 독창성」의 한 구절대로 표현한다면, “한편으로 볼셰비즘이 자본주의·자유주의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 아니었음이 밝혀졌고, 다른 한편 일체의 진리나 실재에 대한 불신을 가르치는 ‘포스트모던’한 가벼움이 전지구적 문화를 주도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발본적인” 인식을 그가 리얼리즘·민족문학 비판에서 얼마나 구체화하고 있는가?
이런 물음들을 염두에 두고 마지막으로 실질적인 작품평가 중 표본적 사례, 즉 「살아 있는 혼돈을 위하여」에서 그가 제기한 황석영(黃晳暎)의 『오래된 정원』 해석을 살펴보겠다. 최원식(崔元植) 평론집 『문학의 귀환』에 대한 서평논문 형식으로 씌어진 그 글에서 황종연은 최원식의 풀이에 상당부분 동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오현우의 이야기를 지배하는 자아의 위기와 그 극복이라는 테마가 90년대에 들어 난감한 처지에 놓이기 시작한 민족-민중운동의 주체와 관련하여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명백하다. 최원식은 그 “비결정적 시간 속으로 어지럽게 흩어져버린 삶의 분절들을 탐색하는 시간여행”이 “주체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강렬한 윤리적 충동에 기초하고 있”음을 관찰한다.(76쪽) 그렇다면 주체의 위기는 극복되었는가? 대답은 아니다,이다. 오현우는 그가 살아온 삶의 역정이 ‘희망’이라는 불굴의 인간 보편원리 속에 있음을 확인하고 혈육의 인정으로부터 다시 출발함으로써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것은 서사상으로 믿을 만한 행동과 절차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최원식의 논평은 정확하다. 한윤희가 실은 오현우의 분신적 주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 “한윤희의 주체가 성공적으로 분리되어 재구축되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오현우의 주체도 위기에서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78쪽) 정신적으로 오현우와 대립관계에 있는 생태주의자 이희수, 그리고 그와 사랑에 빠진–이 사랑은 최원식의 착상을 빌리면 오현우의 주체에 대한 “항명”이자 오현우의 자아분열의 징후에 해당하는 행동이다–한윤희를 모두 죽음으로 몰아가는 서술은 오현우의 주체성을 살리기 위한 난폭하고 조작적인, 이데올로기적 교조성을 느끼게 하는 처리방법이다.(황종연, 「살아 있는 혼돈을 위하여」, 『문학동네』 2001년 겨울호 457〜58면)20
상당부분 동조한다고 말했지만, 황종연이 『오래된 정원』을 읽을 때 최원식과 갈라지는 선은 분명하다. 황석영이 재개한 “새로운 서사의 도정이 충만한 운명의 시간 속에서 성숙하기를 기원한다”(『문학의 귀환』 78면)고 끝맺은 최원식의 비평가적 바람을 황종연의 글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바람의 유무 자체가 얼마나 정확한 평가인가를 가리는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 관건은 『오래된 정원』을 엄밀·정확하게 읽으면서 동시대 독자들과 더불어 숨쉬는 것이다. 그 점에서 작가가 오현우를 중심에 세우면서 한윤희와 이희수를 각기 병사와 횡사로 처리한 것을 어떻게 읽을 수 있는가도 중요하다. 하지만 윤희를 “남성 타자의 명령에 의해 주조된, 상상된 주체, 즉 소외된 주체”로 규정하는 최원식의 평가는 다소 과격하지 않은가 한다. 사실 감옥에 있는 남자를 그리워하면서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것 자체는 (내러티브의 ‘영원한 샘’인) 멜로드라마 공식이다. 이런 구도에도 단순히 남녀의 애정만이 아닌 이들을 감싼 ‘80년대의 무거움’과 혈육의 정이라는 공감이 실린지라 독자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대목은 적지 않다.
물론 순애보의 전형이면서도 당찬 성격을 가진 윤희가 어머니이자 연인으로서, 험난한 시대와 마주한 인간으로서 하나의 개별적 생명력을 부여받지 못했다고 비판할 수는 있겠다. 그런데 이때에도 윤희에게 스민 오현우의 분신적 성격만을 따질 일은 아닌데, 구체적으로 여주인공의 어떤 면모가 멜로물의 재판인가를 판별해야 한다.21 윤희는 말할 것도 없이 현우나 윤희의 모친이 한결같이 자식 혹은 남편의 ‘엇나간 길’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것으로 그려지면서, 생활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에 더 야멸차게 고무신을 거꾸로 신을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여성들의 삶이 작품 바깥으로 밀려나는 현상도 멜로물의 구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변혁의 시대에 대한 두 주인공의 추인과 최미경의 분신(焚身), 송영태의 ‘투신’ 등을 기록하는 도정에서–더욱이 베를린장벽 붕괴현장 및 이후 후유증의 재현까지 가세한 마당에–그와는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경우가 있을 법한데, 그런 인물 또는 상황의 부재도 작품이 지닌 한계의 이면으로 지적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악은 장사꾼에서 시작”(『오래된 정원』 하권, 창작과비평사 2000, 190면)되었다는 인식에 섬세한 균형감을 실어주면서 현우의 고뇌와 좀더 원만하게 결합할 수도 있었을 이희수도 ‘작가가 작가 자신으로부터 밀어버려서 그 스스로 살게 내버려두는 데’ 성공하지는 못한 경우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러나 오현우의 역정이 “서사상으로 믿을 만한 행동과 절차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라는 황종연의 단정은 이야기가 다르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인가? 만약 주인공의 서사적 논리가 결핍되어 있다면 작품 자체도 치명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는 말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정말 그런가? 설사 80년대를 기억하지 못하는 독자라도 『오래된 정원』에서 되살려진, 오현우의 고통스럽도록 생생한 수형생활로만 국한되지 않는 미물들의 생태는 물론이고 18년 만에 출소한 현우의 ‘과거 정리’와 사회적응 과정 등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면서 민족·민중운동의 주체로서만이 아닌 여리고 평범한 자연인인 주인공에 많은 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읽었다.
그런데 황종연은 오현우의 분신적 주체로 한윤희를 설정하는 최원식의 견해에 동조하면서 “주체의 위기는 극복되었는가?”라는 단선적인 질문을 던지고 “아니다”라고 스스로 답한다. 백보를 양보해서 오현우가 걸어온 길이 모두 오류요 허망한 일이고 그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미흡하다손치더라도, 또 ‘살아 있는 혼돈’의 의의를 주창하는 황종연의 패기를 십분 감안해도, 주체의 위기 극복이라는 화두를 앞에 두고 그렇다 아니다 식으로 답하는 것은 사려깊은 자세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작품읽기에서 더 근본적인 문제는, 윤희와 희수가 이야기에서 사라지는 것을 두고22 “오현우의 주체성을 살리기 위한 난폭하고 조작적인, 이데올로기적 교조성을 느끼게 하는 처리방법”으로 설명해치우는 논법이다.
혁명의 시대에 몸담은 작가의 상처투성이 기록과 회한, 반성, 원망(願望) 등을 그렇게 난폭하게 찢어 읽는 것은 단순히 부주의한 과독(過讀)만이 아닌 것 같다. “최원식이 말하는 ‘다른 세상’의 감각은 황석영이 말하는 ‘오래된 정원’의 기억과 동일하다”(같은 글 458면)라고 규정하는 그의 태도에는 민족·민중운동에 대한 뿌리깊은 의심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의심’이야말로 근대적 사유의 출발점이라 하겠지만, 황종연의 (불신에 더 가까운) 의심은 대부분 외래에서 빌려온 개념들로 구성·조작된 것이다. 그는 최원식의 비평과 황석영의 작품 모두를 서구의 흔해빠진 유토피아 담론으로 정리한다. 그러고 나서 “파시즘의 공포를 겪을 대로 겪은 지금 같은 시대에 건전한 정치의식은 ‘모든 분절을 넘어선 유기체적 공동체’라는 관념을 오히려 불신하는 데서 시작된다”(같은 글 459면)고 주장한다. 20세기 한반도의 근대사에서 우리가 집단적으로 겪은 파시즘적 체험은 일제식민지와 동족상잔, 그리고 군부독재다. 그 유산들의 어두움을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걷어낼 것 같은 찰나에 그런 불신을 건전한 정치의식으로 내세우는 것은 정치적으로 건전한 사고방식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논쟁에 임하면서 “나 자신이 수상쩍은 이데올로기적 구조에 갇혀 있음을 스스로 입증하는 꼴이 될지도”(황종연, 244면) 모른다고 ‘입막음’을 한 그에게 자유주의자니 어쩌니 하는 꼬리표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 다만, 「모더니즘에 대한 오해에 맞서서」가 그나마 갖는 설득력이 진리와 실재를 불신하는 서구 사조에 대한 지나친 의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볼 뿐이다. 모쪼록 논쟁의 열기가 창조적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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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과비평』에 글이 실린 순서는 임규찬에 이어 윤지관 「놋쇠하늘에 맞서는 몇가지 방법–리얼리즘·모더니즘·민족문학」(2002년 봄호); 황종연 「모더니즘에 대한 오해에 맞서서」(2002년 여름호); 김명인 「자명성의 감옥–최근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에 부쳐」(2002년 가을호)인데, 앞으로 인용은 괄호 안에 필자와 면수만 병기한다. 이번 논쟁의 범위는 최원식의 리얼리즘·모더니즘 회통론 및 그에 대한 백낙청의 비판적 논평까지 넣어야 하리라 본다. 최원식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會通)–작품으로의 귀환」(『한국현대문학 100년』, 민음사 1999) 및 백낙청 「2000년대의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창작과비평』 2000년 봄호) 참조. 하지만 더 거슬러올라간다면, 1996년 말경부터 『창작과비평』 『실천문학』 『내일을 여는 작가』를 비롯한 몇몇 지면에 김명환·방민호·신승엽·진정석·최인석·윤지관 등이 참여하여 벌인 논쟁의 연장인 셈이다. 최원식·윤지관·황종연 3인이 내놓은 비평집의 구체적인 성과를 두고 출발한 터라 거론되는 작가와 이론적 배경도 더 풍부해졌고, 각자가 주장하는 논점의 근거가 휠씬 탄탄해졌다는 것이 이번 논쟁의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 Marshall Berman, “Georg Lukács’s Cosmic Chutzpah”, Adventures in Marxism(London: Verso 1999) 181〜206면 참조.↩
- 루카치의 인식론적 반영론이 갖는 한계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논자들이 문제삼은 바 있다. 비교적 근래의 본격적인 논의는 강필중 「특수성의 새 위상: 루카치 리얼리즘론의 숙제」, 『안과밖』 2호(1997년 상반기) 219〜38면 참조.↩
- 이 문제에 관한 한 황종연의 임규찬 비판을 그대로 인용해볼 만하다. “나의 작품읽기에 대한 임규찬의 비판이 상기시키는 것은 선언의 차원에서는 매번 갱신을 다짐하고 있지만 사고의 차원에서는 줄곧 보수(保守)에 머물고 있는 한국 리얼리즘의 답답한 실정이다. 임규찬은 윤지관의 리얼리즘론이 80년대 리얼리즘론을 답습하고 있다는 요지의 비판을 하면서 ‘스스로 담지하고 있다는 리얼리즘론을 근원에서부터 재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이 지점에서도 다시 절감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 성실한 반성의 언명을 그대로 믿어도 좋을지 문득 망설이게 만드는, ‘이미 확립된’ 리얼리즘론에 의지한 비평적 사고를 그 자신이 하고 있다. 장정일과 윤대녕이 진짜 동일유형이라는 그의 판단은 너무나도 익숙한 루카치 공식이다.”(황종연, 243면) 이에 대한 필자의 논평으로는 다만 한가지, 임규찬 개인의 한계를 “한국 리얼리즘의 답답한 실정”과 동일시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 하지만 제임슨의 리얼리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단계론을 백낙청이 우리 문맥으로 풀면서 어떤 대목은 사실주의로 또 어떤 대목은 리얼리즘으로 옮긴 것을 두고 “동일인이, 그것도 엄밀한 이론체계 속에서 사용하는 동일 용어가 그렇게 의미가 판이하게 번역되어도 괜찮은지 모르겠다”(황종연, 주16)는 식으로 던진 의문은 의문에서 끝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참다운 리얼리즘’을 옹호하는 논자가 19세기 서구 리얼리즘 작품이 진정한 예술적 성취에 값하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사례를 식별하면서 그 식별의 방편으로 리얼리즘과 사실주의라는 용어를 붙이는 것은 오히려 나름의 지적 엄밀성을 추구하는 당연한 자세일 수 있으니 말이다. 제임슨의 ‘realism’을 문맥에 따라 사실주의와 리얼리즘으로 옮긴 근본취지가 제임슨의 개념적 결격을 지적하려는 데 있음을 기억하면 더욱 그러하다. “앞서의 3단계 시대구분에서 첫번째인 realism을 필자가 ‘리얼리즘’이 아닌 ‘사실주의’로 옮길 수밖에 없었듯이 제임스의 이 글(“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인용자)에도 리얼리즘에 대한 인식에는 아쉬움이 많다. 우선 1848년 이전에 스땅달, 발자끄 등에서 여러 걸작을 낳았고 그 이후로도 비록 서구의 핵심부에서는 자연주의와 모더니즘이 득세하는 가운데서나마 곳곳에서 그 생명력을 이어온, 우리가 사실주의와 굳이 구별하는 리얼리즘 문학을 명시하는 용어부터가 없는 것이다.”(백낙청 「모더니즘 논의에 덧붙여」,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II』, 창작과비평사 1985, 460면)↩
- Peter Osborne, “Modernity is a Qualitative, Not a Chronological, Category,” New Left Review 1/192호(1992년 3-4월) 참조.↩
- Marshall Berman,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The Experience of Modernity(New York: Penguin Books 1988) 9면.↩
- 같은 책 24면.↩
- “이탈과 회피” 운운한 대목은 Zygmunt Bauman, Liquid Modernity(Polity Press 2000) 2~3면, “액체근대” 운운한 대목은 120면 참조. 바우만이 개인과 공동체의 유대가 느슨해지고 테크놀로지에 의해 변화무쌍하게 매개되는 ‘액체근대’의 현실을 긍정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세계화의 참상에 전통적인 우려를 표명하는 학자다. 하지만 1968년에 폴란드에서 추방되어 영국에 정착한 바우만이 분석 및 해석을 넘어서 세계화시대가 열어주는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찾아가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세계화의 제반 문제를 다룬 저작은 Zygmunt Bauman, Globalization: The Human Consequences(Columbia UP 1998) 특히 3,4장 참조.↩
- 보들레르의 「후광의 상실」에 대한 버먼 해석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졸고 「보들레르와 근대」(『창작과비평』 1997년 겨울호)에서 간략히 지적한 바 있다. 모레띠의 『근대의 서사시』(Modern Epic, 1996)를 비판적으로 소개한 졸고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근대성」(『안과밖』 4호, 1998년 상반기)에서는 페리 앤더슨의 지적에 대한 버먼의 반론이 ‘거리의 삶’에 대한 그 나름의 열정과 충정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라는 주문에는 미달했음을 적시했다. 충분한 논증은 못되었지만 최소한 미달의 근거만은 어느정도 제시했다고 믿는다. 차제에 버먼의 그러한 평면적 역사인식에는 에머슨(R. W. Emerson, 1803〜82) 이래 줄곧 미국 자유주의·개인주의의 저류를 형성한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가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생각해봄직도 하다.↩
- 반면에 서구 모더니즘의 평균에도 못 미치는 기법이나 스타일의 가치를 부풀리는 다른 쪽의 편향 또한 엄연하다.↩
- 가령 형식과 기법 문제를 두고 리얼리즘론자들을 제대로 공박하려면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외딴방』 개정판의 ‘해설’로 재수록하기도 한 (신경숙 소설의 형식과 기법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백낙청의 「“외딴방”이 묻는 것과 이룬 것」(『창작과비평』 1997년 가을호) 정도는 최소한 거론했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 같은 글 79면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오고, 『창작과비평』 1993년 가을호에 발표된 「지구시대의 민족문학」에 가서는 실제 국내 작가의 작품평가에 기법과 재현 문제를 좀더 의식적으로 적용하면서 바로 그 대목을 재인용하고 있다. 덧붙인다면, 황종연이 ‘대문학’의 수괴쯤으로 착각하는 리비스(F.R.Leavis)의 Nor shall My Sword(London: Chatto & Windus 1972) 12면 등에서도 비슷한 발상을 엿볼 수 있다.↩
- 백낙청 「시와 리얼리즘에 관한 단상」, 윤여탁 외 엮음 『시와 리얼리즘 논쟁』(소명출판 2001) 162면. 원래 이 짤막한 글은 『실천문학』 1991년 겨울호에 나와 이은봉 엮음 『시와 리얼리즘』(공동체 1993)에 재수록된 바 있다.↩
- 「지구시대의 민족문학」, 『창작과비평』 1993년 가을호 105면.↩
- 위 인용문에서 직접 인용된 로런스의 발언은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에서 간행중인 전집 가운데 Bruce Steel (ed.), Study of Thomas Hardy and Other Essays(1985)의 면수를 가리킨다.↩
- 방민호 「리얼리즘론의 비판적 재인식」, 『창작과비평』 1997년 겨울호 282〜83면.↩
- 이참에 최원식의 회통론에서 제사로 이용된 경구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의 구체적인 함의도 좀더 엄밀하게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이 제사는 4·19 이후 우리 문단의 두 중추적 ‘경향’인 리얼리즘 문학과 모더니즘 문학의 연기(緣起)적 상생을 적시하는 것으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반면에 양자의 지향점이 궁극적으로는 일치할지 어떨지도 작품으로 논해야 하겠지만, 상생이나 ‘작품으로의 귀환’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이것’과 ‘저것’을 분단체제의 총체적 현실 탐구로써 종합하려는 역사적 운동으로서의 ‘리얼리즘’을 견지하고 고양시키기에는 뭔가 허허로움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필자가 이상(李箱)론(『창작과비평』 2000년 봄호)에서 사용한 표현으로는 “극복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계승”이라는 문제의식은 상대적으로 희박해지지 않을까 한다.↩
- 백낙청 「모더니즘에 관하여」,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II』(창작과비평사 1985) 393면.↩
- 인용문에서 거론된 최원식의 발언은 『문학의 귀환』(창작과비평사 2001)의 면수를 가리킨다.↩
-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감옥생활을 체험한 현우가 황석영의 ‘다른 자아’(alter ego)에 가장 가깝다고 하겠고 화가로 등장하는 윤희 역시 독일체험을 분담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분신적 성격을 갖는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이때 윤희가 멜로드라마적 구도를 주도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또 그런 구도의 감상성이 충분히 절제되지 않음으로 해서–살아 있는 개인으로서 그 한계가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의 정체성을 ‘남성 타자의 명령’에 의해 구축된 것으로 몰아가는 것은 여성주의적 편향에 가까울 것이다.↩
- 임홍배의 경우 윤희와 희수의 관계가 돌발사로 마감되는 대목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이들의 관계가 그렇게 끝나는 것은 “희수가 제시하는 생태주의적 세계관의 미흡함에 관한 알리바이 혹은 현우로부터의 탈주에 대한 징벌이라기보다는, 베를린장벽 붕괴로 상징되는 거대한 역사적 필연의 불가항력에 부딪힌 개체의 운명에 관한 디스토피아적 서사의 일부일 뿐이다.”(임홍배 「주체의 위기와 서사의 회귀」, 『창작과비평』 2002년 가을호 369면) 납득할 만한 지적인데, 다만 이어 모성적 사랑과 역사의 파괴적인 힘을 대비하는 과정에서 그런 사랑이 인물의 피와 살로 극화되기보다는 하나의 개념에 가깝게 제시된다는 사실을 논자가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가는 다소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