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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지구시대 한국문학의 안과 밖
우리 시대의 사랑·성·환경 이야기
신경숙과 공선옥의 작품들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지구화시대의 세계문학」 등이 있음. englhkwn@ijnc.inj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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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까지만 해도 소수였던 여성작가들이 90년대 문단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우리의 문학풍토가 상당히 달라졌다. 이는 여성작가들의 숫적인 증가만이 아니라 그들의 문학적 성향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현상을 낳는 데 그간의 서구 페미니즘 이론의 수용과 여성운동의 진전이 적잖이 기여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서사적 차원에서의 변화일 것이다. 흔히 ‘90년대 문학’의 특징으로 꼽는 현상, 즉 ‘역사’에서 ‘일상’으로, ‘거대서사’에서 ‘미시서사’로의 전환이 여성작가들의 득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가령 90년대 여성문학의 성격을 거론하면서 일상적 미시서사와 역사적 거대서사를 이항대립시키는 경향이 그렇다.1
이런 경향의 문제점은 이 이분법적인 틀에 잘 들어맞지 않는 남녀 작가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것은 이런 도식적인 사유틀이 일상적인 작은 이야기에서 역사적인 계기들을 추방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을 유포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 지점에서 무엇이 거대서사이고 무엇이 미시서사인지에 대해서도 좀더 발본적인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예컨대, 여성작가들이 흔히 다루는 사랑과 성에 관한 이야기는 항상 작은 이야기인가? 사랑과 성은 한 개인의 가장 내밀한 사적 영역이지만 역사적 계기로부터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계기와 맞물려서 형성되고 해체된다. 그렇기에 사랑과 성에 관한 이야기에는 그 시대의 주요한 모순과 갈등이 담기게 되고 그런만큼 큰 이야기와 섞이게 마련이다.
이 글은 이런 발상에서 90년대 이래 대표적인 여성작가로 꼽히는 신경숙(申京淑)과 공선옥(孔善玉)의 몇몇 작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시대의 사랑과 성의 이야기에는 남녀관계와 가족관계, (이성·동성) 성애/성차의 문제뿐 아니라, 계급과 환경의 문제가 깊이 스며 있다. 이런 문제들은 사실상 우리(특히 여성)의 삶이 어떻게 찢겨져왔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들이다. 두 작가의 작품을 이런 삶의 찢겨짐의 결을 따라 읽고 그 찢겨진 삶에 대처하는 각각의 생존/서사 방식을 짚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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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과 공선옥을 비교하고 싶은 충동을 처음 느낀 것은 「어떤 여자」를 읽었을 때이다. 실명으로 거론하진 않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신경숙이 그려내는 ‘어떤 여자’는 공선옥을 모델로 삼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두 여성소설가의 전화통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 소설은 일상적인 ‘사실’을 어느새 비범한 ‘픽션’으로 둔갑시키는 신경숙의 빼어난 솜씨를 보여줄 뿐 아니라 두 작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요긴한 단초를 제공한다. 소설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무엇보다 수화기 저편에서 터져나오는 거침없는 남도 사투리와 흙냄새 사람냄새 풀풀 나는 걸쭉한 시골 이야기인데, 그것이 영판 공선옥의 목소리요 화법이라서 마치 그녀의 소설에서 한 토막을 끊어낸 듯하다. 한편 신경숙 자신의 모습은 생생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전화통화에서는 주로 듣는 쪽인데다 공선옥과의 만남을 회고하는 작품의 서두에서도 자신보다는 상대방의 모습을 부각하는 데 몰두한다.
하지만 신경숙은 여기서도 자신의 삶에 관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또렷한 인상을 남기는 공선옥의 활기찬 목소리에 기대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리기 때문에 독자는 그 ‘희미한’ 이야기를 그냥 지나치기 쉬울 따름이다. 가령 공선옥과의 빈번해진 전화통화에 대한 소감을 밝히면서 “나는 내 태생지를 떠나온 뒤 여행자처럼 살고 있는 중이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늘 떠돌고 있는 기분으로. (…) 아직 부모님이 거기 살고 계시기에 가끔 그곳으로 가보지만 이제 그곳이 여기보다 더 낯설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유년 시절은 그리운 법. 그녀에게선 내 유년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말투와 음식의 냄새가 흘러나왔다”(『딸기밭』, 문학과지성사 2000, 211면)고 술회한다. 그러니까 공선옥이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시골 이야기는 신경숙에게는 유년에는 누렸으되 지금은 상실한 어떤 온전한 삶이다. 공선옥과의 긴 통화를 끝낸 후 “수화기 이편과 저편처럼 그녀와 나는 생판 다른 삶을 살고 있다”(220면, 강조는 인용자)고 하면서 그 의미를 곱씹는 대목에서 이런 대조는 더욱 두드러진다.
나는 이 도시에서 혼자, 그녀는 남도의 시골 마을에서 아이 셋과 함께. 내가 이 도시에서 빌딩에 걸린 희뿌연 달을 볼 때, 그녀는 마당에 내려서서 나뭇가지 끝에 걸린 맑은 달을 볼 것이다. 내가 주말에 영화관에 가서 심야 프로로 「식스 센스」를 보고 있을 때면 그녀는 아마도 이제 24개월 된 아이의 가슴에 이불을 당겨주며 뺨에다가 입을 맞추고 있겠지. (221면)
이 대목에서 나타나는 도시와 시골 마을, 홀로 된 삶과 가족과 함께하는 삶, 빌딩과 마당, 희뿌연 달과 맑은 달 등의 두드러진 대조는 신경숙 문학의 주된 모티프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이 신경숙 문학에서 원형적 경험은 어린 나이에 시골에서 도시로 갑자기 이주한 데서, 즉 유년의 따뜻한 삶을 상실하고 졸지에 삭막한 도시적 환경에 던져지는 가혹한 체험에서 비롯된다. 이런 이주의 경험은 이 작가에게 가장 고통스런 ‘찢겨짐’으로 체험되면서 내면에 깊은 상처를 아로새겨놓는다. 달리 말하면 이 ‘찢겨짐’ 이전과 이후의 삶이 ‘생판 다른’ 것으로 나타나며, ‘생판 다른 삶’을 이어붙여 찢겨진 삶을 재통합하려는 시도가 이 작가의 가장 특징적인 서사가 된다. 여기서 극적인 계기는 찢겨짐의 경험 전후 어딘가에 깊숙이 박혀 있는 깊은 상처를 어떻게 대면하고 다스리는가의 문제이다.
어떤 개인이 깊은 상처를 치유하자면 그 상처의 진상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용기가 필요한데, 문제의 개인이 작가라면 자신의 상처와 대면해야 할 뿐 아니라 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이중의 어려움에 봉착한다. 게다가 이 고통스런 경험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미 상처받은 자신과 타자에게 또다른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도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글쓰기란 상처를 치유할 수도 덧나게 할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기 때문이다. 장편 『외딴방』 1·2(문학동네 1995)는 이런 이중·삼중의 어려움을 글쓰기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돌파함으로써 산업화가 한창인 시기에 도시로 이주한 한 여성노동자의 고통스런 경험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2 상처의 한가운데는 ‘희재’ 언니의 비극적인 삶이 놓여 있지만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큰오빠를 비롯한 외딴방의 식구들, 공장과 산업체 부설학교의 인물들, 고향의 부모와 연인 ‘창’의 삶 역시 나름의 진실이 드러나도록 이야기되어야 하기 때문에 작품은 어느새 “가까운 한 시대를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증언록”3이 되었다. 요컨대 ‘생판 다른 삶’을 잇는 신경숙 소설에서 글쓰기에 대한 물음과 성찰은 중요한 서사전략이 된다. 『외딴방』의 성취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모여 있는 불빛」(『오래전 집을 떠날 때』, 창작과비평사 1996)과 같은 작품도 이 서사전략을 절묘하게 활용한 수작이다.
그러나 모든 소설에서 글쓰기에 대한 성찰의 전략을 도입하는 것은 힘든 노릇일뿐더러 서사의 소재적·기법적 다양성을 획득하려면 이것에만 의존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신경숙의 소설에서 글쓰기에 대한 성찰에 버금가는 서사전략은 시골 유년기에 경험한 자연친화적·공동체적 활력을 끌어들여 삭막한 도시생활의 허무와 메마름, 뒤틀림 등에 맞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종의 ‘생태적인 기획’이라 부름직한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어떤 여자」에서 보듯이 시골 유년의 세계가 도시적 삶의 양식을 진단하는 가치척도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신경숙의 초기부터 내재되어 있었지만, 『외딴방』 이후부터는 더욱 두드러진다. 따라서 신경숙의 소설은 상실된 유년의 세계를 ‘기억’을 통해 계속 재구성하는 반복적 양상을 드러내는데, 이것은 복고적이거나 낭만적인 취향만이 아니라, “늘 떠돌고 있는 기분으로” 살아가는 도시생활 속에서도 삶의 온전함이 무엇인가를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런 생태적 기획을 가능케 하는 신경숙의 자질, 즉 자연과 생명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감수성이다. 이런 감수성은 산업화 이전의 시골에서 자연과 맞닿은 삶을 살아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자질이며, 그런만큼 도시에서 태어난 젊은 작가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신경숙한테 이런 자질이 유독 강한 것은 그의 유년기가 산업화로 인한 생태적 환경이 급격하게 훼손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상실의 위기에 처한 자연친화적이고 혈연공동체적 삶이 이를 더욱 민감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신경숙의 소설에 묘사되는 갖가지 꽃과 나무, 동물 들을 실감나게 하는 원천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종종 ‘소녀적 감상성’이라는 비판의 빌미가 되는, 언제 소멸할지 모르는 생명체에 대한 유별난 애착과 연민도 바로 이런 생태적 감수성의 분출에서 연유한다.4 아프고 여린 생명에 대한 연민이 깊이 스며든 「깊은 숨을 쉴 때마다」 「감자 먹는 사람들」(이상 『오래전 집을 떠날 때』) 「부석사」(『창작과비평』 2000년 겨울호) 등은 이런 감수성이 빚어낸 수작들이다.
이런 생태적인 감수성이 이 작가의 중요한 자산임은 분명하지만, 이를 이용한 서사전략에 내포된 맹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어진 삶의 온전함을 재는 기준이 생명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연민의 행위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사회적 모순을 추궁하는 힘이 떨어지면서 현실적 갈등에서 비롯되는 소설 장르 특유의 박진감을 상실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이런 징후가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예는 『기차는 7시에 떠나네』(문학과지성사 1999)인데, 앞서 거론한 세 작품 역시 그 탁월한 묘사력과 서정적인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뭔가 나른한 느낌을 준다. 생명체에 대한 연민이 과도하게 분출된 나머지 찢겨진 현실에 대한 사유는 물러나고 불교적 연기(緣起)의 세계관에 입각한 위로와 진혼의 제의(祭儀)가 소설의 전면에 등장하는 예도 있다. 이를테면 「오래전 집을 떠날 때」나 「마당에 관한 짧은 얘기」(이상 『오래전 집을 떠날 때』)는 영혼의 집을 잃고 헤매는 귀신들을 위로하여 제자리를 찾게 하는 것을 주된 모티프로 삼고 있는데, 그 도덕적 의도는 사주고 싶지만 예술적으로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은 것 같다. 이런 모티프를 사용하더라도 「지금 우리 곁에 누가 있는 걸까요」(『딸기밭』)처럼 ‘귀신’ 요소를 살짝 가미할 때 가엾은 생명체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극적 긴박감과 종결의 훈훈함이 살아난다.
흥미로운 것은 신경숙 소설에서 사랑과 성애의 문제가, 유년의 기억으로써 도시의 피폐한 삶을 회복하려는 생태적인 기획과 종종 어긋난 관계로 설정된다는 점이다. 장편 『깊은 슬픔』 상·하(문학동네 1994)에서 ‘이슬어지’는 은서와 완과 세의 마음의 고향이지만 이들은 이곳에서 보낸 유년의 기억 때문에 오히려 서로간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모두 사랑에 실패한다. 유년의 기억이 가족간의 정과 유대를 다지는 데 밑거름이 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남녀간의 사랑에는 파괴적인 동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친화적이고 혈연공동체적인 유년의 세계가 사실은 결핍과 금기와 ‘기습’의 공간이기도 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가령, 장편 『바이올렛』(문학동네 2001)5에서 고향마을의 미나리군락지는 오산에게 도시생활의 허망함을 견디게 해주는 생태적 상상력의 원천이지만 유년기의 동성애 욕망이 거부되면서 원초적인 ‘고독’과 결핍이 시작된 지점이기도 하다. 오산의 이런 상처받은 내면이 그녀와 사진기자와의 관계를 편집증적인 짝사랑으로 몰아가면서 그녀의 사랑을 비극으로 치닫게 하는 요인이 된다.
『바이올렛』에서 눈여겨볼 것은 오산의 사진기자에 대한 사랑이 착각(‘오산’)이라는 점만이 아니라, 이 눈먼 사랑에서 촉발된 관능적 욕구가 생태적인 요구와 묘한 갈등관계에 놓인다는 점이다. 서울 도심의 한 화원에 취직한 오산은 사진기자와 만나기 전에 “식물이 주는 위로”(93면)와 화원에서 같이 일하는 수애와의 우정으로 도시의 무료하고 황량한 일상을 힘들게 견뎌나간다. 그러다가 어느날 바이올렛 꽃을 찍으러 화원에 찾아온 『꽃세상』의 사진기자와 만난다. 하지만 오산에게는 그와의 ‘재회’가 결정적이니, “어제 그 남자와 재회하기 이전의 시간과 어제 그 남자와 재회한 이후의 시간에 대해 분명히 금을 긋는다”(169면). 대체 그 남자와의 재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두번째 만남은 오산과 수애와 수애 친구가 찾아간 까페에서 사진기자 일행이 우연히 합석한 데서 시작되지만 문제의 사건은 그들 일행이 까페에서 나와 흩어진 후 사진기자가 그녀의 팔을 만질 때 일어난다. 그때 “그녀의 팔 위에 소름이 오소소 돋”고 이 소름을 남자가 쓸어내리는 “그 짧은 순간 그녀는 울 뻔한다”(159면). 남자의 한번의 터치에 그녀는 간단히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6 작가는 이런 사로잡힘이 온몸을 장악하는 현상–그의 환영이 “그녀 속으로 쏙 들어와버렸”(165면)던 것이다–일 뿐 아니라, 그 속에 두 가지 요소가 병존하고 있음을 분명히한다. 가령, 속으로 ‘쏙 들어온’ 남자의 환영이 그녀에게 관능을 일으키고 있을 때와 아닐 때 그녀의 모습이 천양지차로 달라지는 대목을 보라.
수영장에서 나와 그녀가 다시 빗속으로 나서려고 할 때, 비 맞지 마, 그 남자가 나직이 속삭인다. 찬비야, 감기들 거야. 그녀는 처마 밑에 우두커니 서 있다. 내내 그녀 속에서 일렁이던 관능은 이제 차가워져 있다. 그녀 속의 그 남자가 그녀의 뺨을 만지려고 하거나, 그녀의 이마에 쏟아져내려와 있는 앞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 남자는 다만 물끄러미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며 비를 맞아서는 안된다고, 샤워를 끝낸 뒤라 찬비를 맞으면 감기들 거라고 걱정해주고 있다. (…) 새벽에 거리로 뛰어나올 때의 여자와 지금 차분히 비닐 우산을 받쳐들고 걸어가고 있는 이 여자가, 분명히 한 여자인가? 두 얼굴은 너무나 다르다. (171~72면, 강조는 인용자 )
그녀의 몸속에는 “일렁이는 관능”과 그녀가 감기에 들까봐 “걱정해주는” 배려의 마음이 병존하되 한쪽이 나타나면 다른 쪽은 사라지는 형국인 것이다. 이 가운데 관능적 요소가 적극적이기 때문에 오산이 ‘식물의 위로’와 수애와의 친밀한 자매애에도 불구하고 화원을 떠나 사진기자를 만나러 가는 것은 필연적이다. 배려와 돌봄의 ‘생태적’인 요소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못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진기자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그 남자를 향해 부풀어만 가던 욕망이 한순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만다. 오산에게 실연은 무엇보다 관능욕구의 좌절을 뜻하기에, 실연의 ‘깊은 슬픔’ 후 자포자기 상태에서 오산이 호색한인 ‘최’를 전화로 불러내는 것은 우연만은 아니다. 그리고 최가 저녁을 함께 보내자고 제의하자 오산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배드민턴 치러 가야 돼요!”(266면)라는 엉뚱한 발언이나, ‘최’가 오산을 강간하면서 “니 얼굴에 씌어 있어. 난 죄 없어. 네가 말 못하는 걸 내가 알아서 해주는 것뿐이야”(269면)라는 잔인한 발언이 터무니없게 들리지는 않는다.
말미에서 오산이 포클레인에 몸을 부딪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은 작품의 사실적인 개연성을 반감시키지만 그럼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포클레인에는 어머니와 같은 자연을 무참히 짓밟고 훼손하는 남성적 폭력의 이미지가 뚜렷하지만, 관능과 생태의 갈등이라는 작품의 흐름 속에서는 마치 관능이 하나의 도구적 형태로 굳어져 생태를 짓밟는 듯한 여운도 주기 때문이다. ‘최’한테 능욕을 당한 후 관능은 생태와 적대적인 관계로 나타나는 것이다. 포클레인의 강철 몸체에 부딪쳐 만신창이가 된 몸을 그 아가리 속의 흙으로 덮으면서 오산이 “뭔가 안심이 된다는 표정”(273면)을 짓는 것은 결국 관능을 버리고 대지의 자연에 의탁하는 뜻이리라. 그러나 오산은 오로지 죽음 앞에서만 관능의 욕구를 포기할 수 있을 뿐이다. “입벌린 공룡처럼 우뚝 버티고 서 있”(176면)는 포클레인과 붉은 모자를 쓴 인부들 앞에서 “날씬한 다리”(177면)를 내놓고 배드민턴을 치는 여자들의 이미지는 관능이 도시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사랑을 떠받치는 또하나의 축인 생태적인 돌봄과 배려의 속성과 분리되어 노출증/관음증적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쯤 해서 단편 「배드민턴 치는 여자」를 『바이올렛』으로 다시 쓰면서 생겨난 몇몇 두드러진 차이와 그 예술적 효과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양자의 차이는 주로 작가가 기존의 모티프들을 심화·발전시키고 새로운 모티프를 덧붙이면서 발생하는데,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수애의 벙어리 삼촌이 서울 외곽에서 경영하는 농원의 존재이다. 작품의 공간적 구도에서 보면 서울 근교의 농원은 오산의 고향마을 미나리군락지와 서울 도심의 화원을 이어주는 녹색 삼각형의 꼭지점에 해당하며, 여기에 각별한 의미, 이를테면 ‘대안적 세계’의 의미가 주어지는 듯하다. 오산의 생태적 상상력의 원천인 ‘미나리지’는 실제로는 갈아엎어져 농지로 변한 지 오래고 화원은 도심의 소음과 피폐함에 찌든 사람들의 숨통을 잠깐 틔워주는 “거리의 비상구”에 불과한 데 반해서, 6천 그루의 가지마루가 푸르게 넘실거리는 농원은 “관용과 사랑, 자발적 복종과 연민, 그리고 본능의 자연스러움이 ‘상처’의 흔적을 지우는 재생의 공간”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인 것이다.7
이런 녹색공동체의 대안적 공간이 부각됨으로써 『바이올렛』은 전작에 비해 ‘생태적 기획’의 비중이 훨씬 커진다. 농원은 녹색의 공간이자 삼촌에 대한 수애의 근친애를 관용하고 (인도네시아 출신의) 외국노동자들까지 따뜻하게 품어주는 배려와 돌봄의 공간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작가가 제목을 ‘배드민턴 치는 여자’에서 ‘바이올렛’으로 바꾸면서 ‘관능/생태’의 갈등보다 ‘생태/폭력’의 대립을 강조하려는 것과도 맞아떨어진다. 장편에서 바이올렛과 관련된 설화가 소개되고, 바이올렛이 포클레인에 짓밟히는 이야기라든지 도시에 내재한 폭력의 이야기(주인집 남자의 여자에 대한 폭력, 오산을 능욕하려는 오토바이를 탄 교통순경 등)가 덧붙여지는 것도 이와 관련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핵심이 그렇게 바뀐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폭력적인 도시공간에서 생태적인 것의 중요성을 강조할수록 ‘관능/생태’의 분열과 대립에서 비롯되는 오산의 비극은 통렬해지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대안적인 녹색공간에 스며든 유토피아적인 색채로 말미암아 이런 비극의 생생함이 희석되는 효과도 있다.
오산의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와의 애증 병존적 관계도 주목할 만하다. 이것이 덧붙여짐으로써 어린 오산의 남애에 대한 동성애적 사랑이 한결 설득력을 획득하게 되고 죽음 앞에서 오산이 어머니와 화해를 이룬다는 암시–도시적 아버지에 대한 열망을 접고 대지적 모성으로 회귀한다는 암시–도 나름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밖에도 『바이올렛』에는 이런저런 일화들이 많이 흩어져 있는데, 이것들이 작품의 의미를 풍부하게 해주는 반면 극적 계기를 흩뜨리는 효과도 있다. 단편과 장편 모두에 등장하는 글쓰기의 모티프는 작품의 주제들과 긴밀하게 결합되지 못해 썩 성공적이진 못한 것 같다. 특히 장편의 경우 미나리군락지의 경험이 회고와 글쓰기를 통해 두 번 제시됨으로써 불필요한 반복이라는 느낌을 준다. 게다가 『외딴방』에서 보여준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복합적 사유와 대화적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작품의 성취를 제약하는 큰 요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저런 한계를 감안하고 난 후엔 신경숙 소설 가운데 『바이올렛』이 『외딴방』 이후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평하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이 작품이 여러 모티프와 서사전략을 대거 동원하여 씌어진 역작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여기서 우리 시대의 사랑과 성과 환경에 대한 값진 통찰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통찰의 주된 메씨지는 우리의 삶의 터와 우리 자신의 감수성을 좀더 생태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내면의 관능성과 생태적 공감력을 통합할 때만이 충만한 삶과 인간관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통찰을 낳은 『바이올렛』은 성과 환경에 관한 작은 이야기 모음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지난 수십년간의 도시화 과정에서 우리의 생태적인 공간이 파괴됨으로써 우리 내면의 감수성이 분열해온 은밀한 ‘역사’에 대한 작가 나름의 해석과, 이 위협적인 흐름에 맞서 분열된 세계와 감수성을 다시 온전하게 만들려는 열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8
우리 시대의 사랑과 성에 관한 이야기로서 『바이올렛』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작품은 중편 「딸기밭」(『딸기밭』)이다. “신경숙의 것으로는 놀랍게도 에로틱”9한 성애 묘사도 눈길을 끌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이런 생생하고 ‘에로틱’한 묘사를 통해 관능의 미묘한 작동방식과 발현양태에 대한 탐구를 용감하게 밀고 나간 점이다. 이 소설은 매우 복잡한 구조와 형식을 갖고 있다. 기억력을 상실해가는 40대 중반의 화자 ‘나’의 현재적 삶과 화자의 기억을 통해 제시되는 자신(‘처녀’)의 23세 대학시절의 성애 경험이 주된 서사이지만, 여기에 ‘유’의 어머니의 편지와 정태춘·박은옥의 노래와 사설이 불쑥불쑥 끼여든다. 이렇게 복잡한 서사구조를 취하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 혹시, 작가에게 사랑과 성의 경험이 ‘겁나게’ 살아 있어서 이를 ‘망각’하는 화자의 회고를 통해 이야기하게 하고 또 그 위에 여러 갈래의 액자형 서사를 덧씌운 것이 아닐까.
‘처녀’의 성 경험은 ‘범죄형’의 외모를 지닌 ‘그 남자’의 관계와 화사하고 자유분방한 대학친구 유와의 관계로 양분되어 있지만 양자는 아귀가 꽉 맞물려 있다. 처녀의 가족상황은 『바이올렛』의 오산의 경우와 유사하다. 처녀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끝간데 없는 결핍”(43면)에 시달리며 어머니와의 사이에는 “어떤 단절이 개입되어”(57면) 있다. 처녀는 이런 가족의 결손과 생활고로 인해 발육부진인데다, 가혹한 시대의 “사소한 일상에까지 스며 있던 억압”(51면)으로 인해 심히 위축되어 있다. 처녀의 욕망의 경험은 이런 ‘결핍’과 ‘억압’과 ‘위축’의 상황에서 일어난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처녀의 두 관계가 서로 맞물리는 과정을 추적해보자.
처녀가 그 남자와 사귀게 되는 연유는 “접근을 금하는 그 남자의 외모”가 처녀에게 “묘한 안도감”을 주기 때문인데(57면), 이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주는 느낌과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그 남자는 처녀에게 부재한 아버지의 대리자인 셈이고,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처녀의 ‘끝간데 없는 결핍’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은 가까워지면서 친밀한 ‘근친애’적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이들이 육체관계에 돌입하는 것은 이런 근친애적 사랑이 발전한 결과가 아니라, 유에 대한 처녀의 관능적 욕구에 의해 촉발된 결과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처녀가 유(‘너’)에게 매혹되는 것은 유가 최루탄 가스가 자욱한 그 시절에 “화사한 치마를 아랑곳없이 입고 다닐 수 있었던 사람”(51면)이기 때문이다. 유의 화사함과 자유로움은 금기로 옥죄인 처녀의 몸을 풀어주어 “서로의 등을 때리고 발등을 건드리고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는 “억압이 없는 장난기”(54면)를 나눌 수 있게 해준다. 동성간에 이처럼 거리낌없이 서로의 몸을 건드리는 행동에서 언뜻 동성애를 연상시키지만 이것은 동성애가 아니라 자매애에 대한 욕구이다(54면 참조). 하지만 이런 자매애의 욕구는 처녀가 마당이 있는 이층집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를 부러워하다가 그 집이 유의 집인 것을 알았을 때의 ‘경이’로 소멸되고 만다(“그 경이는 너를 향해 생성되고 있던 내 안의 자매애가 소멸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55면). 이때의 ‘경이’는 놀라움뿐 아니라 계층 차이에서 오는 위화감과 배신감을 뜻하기에 자매처럼 함께 나누고 돌보는 행위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처녀에게 유가 관능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바이올렛』에서 그랬듯이 여기서도 관능에의 욕구는 돌봄과 공감의 능력과 적대관계로 설정되는 것이다.
처녀가 그 남자와 육체관계를 맺기로 작정하는 것은 집앞의 공중전화 부스에서 남자와 통화를 하다가 우연히 “향기가 날 것 같은 목덜미를 쓰다듬으며”(66면) 걸어가고 있는 유의 모습과 이층집 창문에서 “옷을 벗은 유의 실루엣”(67면)을 본 다음이다. 그 순간 처녀는 온몸이 달아오르면서 황급히 택시를 타고 남자에게로 간다. 유에 대한 처녀의 관능적 욕구가 남자에게로 전이된 것이다. 처녀와 남자의 첫번째 정사장면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 남자의 옷을 벗긴다. 셔츠 속에서 드러나는 부드럽고 연한 속살. (…) 열일곱이란 나이로부터 성장이 멈춰버린 듯한 야윈 몸이 생존본능처럼 지닌 부드러움. 처녀는 그만 울어버린다. 그 남자가 가엾다. 마치 자신의 내부의 욕망이 그 남자를 겁탈하려는 것 같다. 그제서야 그 남자는 처녀를 끌어안는다. (…) 서로의 몸에 가시가 돋은 것처럼 차츰 몸이 따뜻해질수록 아프기까지 하다. 그 아픔이 서로를 더욱 끌어안게 한다. 아파하며 그들은 쾌락에 젖어든다. 몸에 돋은 가시는 서로의 몸 속으로 깊이 들어가 박힌다. 처녀는 자신이 하혈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제 몸의 가시를 남자의 피부 깊숙이 박고 있다. (69면,강조는 인용자)
이 대목은 뒤의 딸기밭에서의 처녀와 유의 동성애 장면과 더불어 신경숙 소설의, 어쩌면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성애묘사 장면인지도 모른다. 두 남녀가 서로의 몸에 가시를 박듯 끌어안는 고통스러운 정사에는 상대방의 결핍과 상처에 대한 뼈저린 연민이 깊이 스며 있는 한편, 처녀에게 남자의 몸이 유에 의해 촉발된 관능욕구의 해소 대상으로 쓰이는 섬뜩한 측면도 담겨 있다. 처녀가 “마치 자신의 내부의 욕망이 그 남자를 겁탈하려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처녀는 한동안 남자와의 정사에 사로잡히지만 이런 온전치 못한 관계가 오래갈 수는 없다. 어딘가에 균열이 가면서 처녀는 남자와의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고 대신 유를 찾아가 유의 가족 소유의 딸기밭으로 함께 가서 문제의 동성애를 나눈다.
유의할 것은 딸기밭에서 처녀가 처음에 유의 몸을 만지게 된 동기가 “유가 지니고 있는 관능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살의였다는 것”(81면)이다. 처녀는 유의 흰 목덜미를 두 손아귀로 감싸고 점점 세게 졸랐지만 유는 “아름답고 맑고 순한 눈”으로 자신의 눈을 들여다볼 뿐 ‘비애’나 ‘고통’이나 ‘결핍’의 기미를 내비치지 않는다. 이런 불가해한 평온함 앞에서 처녀는 살의를 풀고 유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극적인 일이 일어난다.
처녀가 유의 약간 벌어진 입 속에 혀를 밀어넣을 때까지도 유는 저항하지 않는다. 나직하다. 평화롭다. 적의가 없다. 처녀가 유의 목구멍 깊숙이 혀를 집어넣었을 때다. 돌연 유가 처녀를 밀어젖힌다. “누워!” 돌연 유가 명령한다. 단호하다. 지금까지의 무저항은 “누워!” 그 명령어를 수행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듯. “나를 죽이려 했지!” 유가 돌연 거칠어진다. 처녀를 덮치고 웃옷을 젖히고 처녀의 젖가슴에 딸기를 쏟아붓는다. 유의 손길은 부드럽고 능란하다. 감미롭고 완벽하다. (…)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어떠한 찌꺼기도. (…) 그 남자와의 행위 뒤에 남겨지던 고독까지도. (82면, 강조는 인용자 )
이 대목을 보면 유가 처녀의 ‘살의’를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음에도 ‘무저항’으로 일관했음이 드러난다. 게다가 처녀의 동성애적 욕망의 수동적인 대상이 되기보다 자기가 한수 더 떠 “처녀를 덮치”면서 능란하게 상황을 이끌어간다. 유의 이런 숨겨진 면모가 놀라울 따름이다. 하여간 처녀가 “그 남자와의 행위 뒤에 남겨지던 고독까지도” 남지 않을 정도로 온전한 성애를 누리는 것은 분명하다. 정사 후의 두 여자가 서로의 몸을 씻겨주고 “자매들처럼 껴안고 긴 낮잠에 빠져”(83면)드는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이는 유에 대한 처녀의 소멸했던 자매애가 회복되었음을 일러줄 뿐 아니라, 드디어 관능적 욕구와 생태적 감성 간의 갈등과 분리가 해소되었다는 표시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나눔의 행위가 동반되기 때문에 으깨진 딸기의 농염한 이미지에 깃들였던 살의가 걷힌다. 신경숙은 「딸기밭」에서 드디어 관능과 생태의 분리를 극복하는 순간을 보여준 것이다. 문제는 유가 과연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인물인가 하는 점이다. 이 ‘애매한’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신경숙이 현실에서 불가능한 ‘소원’을 소설을 통해 ‘성취’한 것인지 아니면 동성애에서 온전한 사랑과 성의 가능성을 포착한 것인지가 엇갈리는 것이다.
3
「어떤 여자」의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처럼 공선옥의 서사는 생동감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생동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신경숙은 이 생동감을 시골집 마당의 나뭇가지에 걸린 맑은 달을 보면서 아이의 뺨에 입맞춤하는 어머니의 건강한 삶과 연관짓는다. 자연과 인간(여성) 본성에 따르는 순정한 삶의 이미지가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공선옥의 소설을 보면 시골에서의 이런 삶이란 것이 온갖 종류의 억압과 결핍에 맞서는 분투의 현장임을 절감하게 된다. 신경숙이 느낀 생동감은 그러니까 자연친화의 공간에서 누리는 어떤 온전한 삶뿐 아니라 그런 삶의 ‘분투’에서 생겨난 것인지 모른다.(신경숙이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신경숙 역시 자신의 유년의 세계가 결핍과 갈등의 공간이기도 함을 모르지 않거니와, 자기 나름의 ‘분투’를 겪은 바 있기 때문에 「어떤 여자」에서 공선옥 특유의 생동감을 잘 살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공선옥 서사의 생동감이 ‘분투’에서 나온다는 것은 기법은 조야하지만 치열한 삶의 내용 때문에 이런 생동감이 주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생동감을 구현해내려면 기법을 단련시키는 정련(精鍊)의 과정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 ‘공선옥을 위한 변명’이라는 항목 아래 “공선옥의 문학은 세련되고 장식된 문학이 아니다. 그의 문학은 세련과 장식 같은 기교 이전에 존재한다. 세련과 장식과 기교 등으로 현란하게 무장한 문학 속에서 공선옥의 문학은 재야의 활기와 활력을 보여준다”10라는 양진오의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해를 사기 쉽다. 이 주장에는 소재와 기법(기교)을 혼동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공선옥 문학의 소재는 ‘세련되고 장식된’ 것은 아니지만 그 기법은 ‘장식’적이지는 않아도 ‘세련(洗鍊)’된 바가 있으며, 그렇기에 ‘재야의 활기와 활력’ 혹은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함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공선옥 소설에서 성(sex/gender)은 성애의 문제보다 성별의 문제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 공선옥이 등단 이후 써온 ‘5월 광주’에 관한 이야기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작가에게 광주는 찢겨진 삶의 원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10년 이상 지난 ‘광주’를 소재로 작품을 쓴다는 것은 진부한 후일담 소설에서처럼 자칫 자기연민이나 신파에 빠질 우려가 다분한데, 공선옥의 광주 이야기는 지금도 생생함을 잃지 않는다. 그것은 광주항쟁에 참여하여 치명적인 내상을 입은 남자들과 그들과 인연을 맺은 여자들의 ‘현재적’ 삶이 리얼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지만, 등장인물의 목소리에 성별에 따른 ‘차이’가 있어 이것이 작품에 특별한 생기를 불어넣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공선옥은 ‘여성의 주체적인 목소리로 기층민중의 삶을 말하기’11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만 공선옥이 처음부터 ‘여성의 주체적인 목소리’로 말한 것은 아니다. 공선옥의 데뷔작 「씨앗불」(『피어라 수선화』, 창작과비평사 1994)은 광주의 상처를 안고 사는 밑바닥 남자들의 곤고한 삶을 ‘남자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이 작품에서 여자의 목소리는 미약하여 거의 들리지 않거니와 그다지 긍정적으로 그려지지도 않는다. 가령, “지 남편 몸 팔아 마음 팔아 받은 돈”(280면)을 챙겨서 날라버리는 기정의 아내, 위준한테 죄를 덮어씌우려는 창녀들, 그리고 위준의 아내 진예는 모두 조연급에도 못 미치는데다 ‘선한 인물’도 아니다. 진예는 남편 위준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남편의 삶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진예가 술 퍼먹는 남편에게 내뱉는 특징적인 소리, 가령 “오일팔 구신에 단단히 물려가지구서네 으이구”(274면)12를 새겨보면 밑바닥 남자들과는 또다른 밑바닥 여성의 딱한 처지가 배어 있는 듯하다. ‘으이구’ 뒤에 사뭇 다른 질감의 고초와 분투가 상상되는 것이다.
「씨앗불」 이후의 작품에서 공선옥은 단편화되어 있던 ‘진예’의 목소리를 온전하게 들려준다. 이제 ‘여성의 주체적인 목소리로 기층민중의 삶을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호프집 여주인 혜자의 한많고 설움많은 인생사를 담은 「목숨」(『피어라 수선화』)에도 광주 귀신에 단단히 씌어 있는 남자 재호가 등장하지만 재호와 혜자의 관계는 「씨앗불」의 위준과 진예의 관계와 현격한 차이가 있다. 혜자에게 재호는 “생명줄”(151면)의 의미를 지니지만 이야기의 주체는 혜자인 것이다. 혜자는 현재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이의 아버지 재호를 만나기까지의 역경을 회고조로 이야기하는데, 이 과정에서 공장노동자, 버스차장, 술집작부를 전전한 자신의 신산한 인생사뿐 아니라 자기 집안과 재호네 집안의 찢겨진 삶의 내력이 한데 엮이면서, 작품은 어느덧 기층여성의 입장에서 구술된 민중서사라고 부름직한 꼴이 된다.
이 소설은 이렇듯 이야기하는 사람이 여성일 뿐 아니라, 여성의 ‘주체적’인 목소리도 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 점은 ‘광주’에 대한 재호와 혜자의 상이한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 재호는 오월이 오면 열병을 앓을 만큼 광주를 숙명처럼 대하고, 혜자는 재호로부터 광주의 비극을 전해듣고서 그것의 의미를 깨닫지만, 그렇다고 그 비극적 사건 앞에서 주눅드는 기색은 전혀 없다. 단지 담담하게 재호를 감싸안을 뿐이다. 혜자가 이렇게 대범하고 넉넉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직접 광주를 겪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그녀의 인생편력 자체가 광주의 비극적 경험 못지않게 험난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또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혜자가 낙태하려던 뱃속의 아이를 재호의 아이 ‘홍이’를 만나고 돌아온 후 낳아 기르기로 결심하는 대목이다. 공선옥 문학에서 주요한 논쟁거리가 되는 여성/모성의 갈등이 중요한 모티프의 하나로 등장한 것이다. 이 대목을 놓고도 ‘본질론적’인 모성성의 발현이냐 아니냐로 견해가 엇갈린다. 필자는 이 장면이 생명에 대한 본질적인 모성성의 발현에 굴복한 것이라기보다, 뱃속의 아이가 재호와 자신을 잇는 ‘생명줄’임을 깨닫는 과정에서 어미로서 아이의 생명을 지키려는 당연한 욕구를 수용키로 결정하는 “일종의 도덕적 결단”13이라고 본다.
「목마른 계절」(『피어라 수선화』)의 빼어남에 대해서는 여러 평자가 지적한 바 있다.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여기서도 광주 이야기는 등장하지만, 이제 그 이야기는 화자인 주인공 여자와 그녀의 이웃집 여자 현순씨의 ‘자매애’적 삶의 맥락 속에서 그 삶의 일부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현순씨의 술집에 일하는 미스 조가 광주항쟁에 참여한 자기 애인이 병으로 죽자 자신도 따라 죽은 참담한 사건 앞에서 두 여인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듯하다. 현순씨는 광주의 ‘현재진행형’을 강조하면서 “역사는 귀신이여. 귀신은 상관있는 놈도 물고늘어지지만 상관있는 놈하고 끈이 맺어진 상관없는 놈들도 끌고 가거든. 그것이 바로 역사귀신이거든. 상관없는 년이 어쩌다 상관있는 놈을 만나 덜커덕 물린 게라구……”(32면) 운운하자 주인공 여자는 참을 대로 참다가 냅다 큰소리로 “아니야, 그게 아니라 미스 조는 김대중이 대통령 안되었다고 죽은 거야. 단순한 걸 왜 그리 복잡하게 얘기해”(32면)라고 맞받아친다. 주인공 여자가 현순씨의 해석을 거세게 거부하는 것은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확신해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 여자 사이의 이런 언쟁이 죽은 미스 조에 대한 일종의 조의(弔意) 표시임과 동시에 자기들의 삶의 의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앞서의 입장과는 상관없이 언쟁은 현순씨가 “옘병, 죽을 각오로 살자 그거여. 누구 좋으라고 죽냐 죽기를”(33면) 하고 내뱉는 것으로 끝난다.
공선옥의 광주에 관한 소설들이 여전히 생동감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기법에서 착실한 쇄신이 이루어진 때문이지만,14 그 생동감의 일부는 광주에 대한 어떠한 신비화나 관념화도 거부하는 기층여성의 삶에의 투지가 작품에 깊이 스며 있는 데서 나온다. 이를테면 기층여성의 현재적 삶의 입장에서 ‘5월도 알맹이만 남고/껍데기는 가라’라고 소리치는 ‘분투’의 목소리가 깃들여 있다고 할까. 흔히 공선옥 문학을 ‘당당하다’고 할 때 이런 ‘분투’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분투’의 목소리만을 강조함으로써 이 작가의 감수성이 거칠고 투박하다는 암시를 준다면, 그것은 공선옥 문학의 전모를 왜곡하는 일일 것이다.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광주 이야기에서는 (「목마른 계절」의 주인공 여자가 소음에 무척 예민하게 반응하는 서두 장면을 제한다면) 잘 드러나진 않지만, 이 작가는 자연과 생명 그리고 주거환경에 대한 대단히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사실, 공선옥은 신경숙과 더불어 90년대에 활약한 젊은 여성작가들 가운데 가장 빼어난 생태적 감수성을 보여주는데, 이것이 광주 이야기 이후의 공선옥 문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녀의 산문집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창작과비평사 2000)의 한 대목을 보라.
한밤중에 깨어나서 텃밭 쪽으로 귀를 모으고 가만히 있으면 별빛과 달빛과 밤이슬과 어두움이 자두나무 주변에 엉겨서 내는 소리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시끄러웠다. 너무나 고요해서 그것들은 마냥 시끄러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문을 열고 툇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 그것들은 일제히 모든 소리를 뚝 그치고 말았다. 나는 그것들이 나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자기들끼리 부산해지기를 기다렸다. (55면)
공선옥의 청각이 「목마른 계절」의 주인공 여자처럼 무척이나 예민함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시골 밤의 투명하게 맑은 분위기를 그 웅얼거리는 생명의 소리와 함께 절묘하게 포착한 이 장면에서, 공선옥의 예민한 청각은 자기 소설의 주인공의 경우와는 달리 자연과 교감(交感)을 나누는 매체가 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자연과 사람이 모두 살아 있어서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는 듯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밑바탕에는 자연의 ‘살아 있음’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작가의 감수성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 생태적인 감수성은 이를테면 공선옥의 문장을 생동하게 하는 ‘바탕’인 셈이다. 공선옥의 이런 감수성이 살아 있는 사람, 특히 아이들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에서 「푸른 것들에의 꿈」 「바람 찬 생애에도 유년의 추억만은」은 이 작가의 생태적 감수성이 신경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프고 불쌍하고 여린 생명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 돌봄과 배려의 감수성을 지니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두 작가의 문장에서 느껴지는 질감이랄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신경숙의 생태적 감수성이 대체로 생명체의 상처와 상실과 죽음에 대한 애절한 ‘연민’을 특징으로 한다면 공선옥의 감수성은 가난하고 불쌍한 생명체를 살리기 위한 ‘돌봄’이 주된 정조를 이룬다. 이런 차이는 공선옥의 생태적 감수성이 가난에 맞서 아이를 키우는 분투의 과정에서 단련된다는 측면과도 무관하지 않다. 가령 공선옥은 아프거나 애처로운 아이에게 처연할 정도의 깊은 연민을 표하다가도 (생활고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 연민의 감정을 냉정하게 접어버리는 면이 있다. 이런 감정의 절제와 객관화에서 생겨나는 대범함의 경지가 공선옥의 문장과 목소리에 스며 있는 것이다. 신경숙이 「어떤 여자」에서 포착한 것은 이런 목소리에 가까울 것이다.
「한데서 울다」(『멋진 한세상』)는 공선옥이 생태주의 자체를 소설의 주요 모티프로 삼고 있어 눈길을 끈다. 화자인 정희는 노동자 남편과 함께 어렵사리 마련한 20평짜리 서민아파트로 이사하는데, “온통 소음의 도가니”(238면)이자 “콘크리트 닭장집”(243면) 같은 분위기가 끔찍하기만 하다. 소음에 시달리던 정희는 남편과 이웃들에게 이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해보지만 “도로 가까워서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단 소리”(239면)나 듣는다. 오로지 ‘경제’가 삶의 기준인 서민들에게는 정희의 하소연이 사치로 들리는 것이다. 텍스트는 이 대목에서 “부자는 아니지만 곤궁하지도 않은 ‘따뜻한 농가’ 출신”(242면)인 정희의 유별난 반응이 환경문제에 대한 계급간의 상이한 입장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정희의 예민한 청각이 개인적 특성일 수 있기에 이런 암시의 의미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정희의 ‘생태주의’는 상당히 실천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가령, 정희가 “나와 내 가족이 사는 곳을 더이상 돈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음에 의해서 선택하고 싶다”(241면)는 일념으로 차를 몰고 시골을 헤매고 다니면서 ‘재산으로서의 집’이 아닌 ‘집다운 집’을 찾는 장면이 그렇다.
마침내 정희는 제 마음에 꼭 드는 시골집을 발견하고 남편에게 이사가자고 조르지만 남편은 “‘호강에 초친’ 마누라 두었다고”(249면) 되레 섭섭해한다. 이들 부부가 옥신각신하다가 세놓고 이사가는 것으로 갈등이 해소되는 장면은 계급간의 차이와 도구적/생태주의적 환경론의 차이가 맞물리면서 환경문제의 복합성을 실감하게 한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정희가 막상 이사가서 살아보니 시골 역시 소음에서 면제된 공간이 아니라서 다시 도시를 헤매며 집 구하러 다니는 신세가 된다는 사실이다. 정희에게는 새벽부터 나타나 확성기를 틀어놓고는 “번개탄 있어요, 미원 있어요, 왜간장 있어요”(253면) 하고 끝도 없이 외치는 트럭운전사의 청승맞은 소리와 수렵금지 해제기간에 들려오는 총소리가 도시소음 못지않게 괴로운 것이다. 그럼에도 도시로 집 구하러 다니는 정희에게는 교통체증과 심각한 대기오염으로 삭막하고 위험해진 도시공간 자체가 역겨울 따름이다. 정희의 마음속의 갈등은 아이를 옆자리에 태우고 뒤늦게 나타난 트럭운전사의 인간적인 면모를 접하면서 해소되며, 정희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시골에 살기로, 그리고 “분수에 맞지도 않는 이놈의 차도 없애”(258면)기로 결심한다.
이 소설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공선옥의 생태주의적 사유가 현실의 구체적인 삶과 동떨어져서 제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자가 남편과 거의 ‘사투’를 벌여가며 어렵게 시골로 이사갔다가 몇년 후엔 도로 도시로 이사하려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이를 입증한다. 그러나 이런 아이러니가 생태주의 사유와 생활방식의 타당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말미의 트럭운전사와의 화해를 통해 정희는 생태주의를 더욱 철저하게 실천하기로 다짐하는데, 이는 그간의 시달림이 정희의 생태주의에 내재한 관념을 걷어냈다는 뜻으로 읽힌다. 공선옥이 생태주의를 다루는 방식은 모성을 다루는 방식과 유사한 면이 있다. 공선옥의 소설에서 생태주의적 사유와 발맞추어 모성에 관한 이야기가 부쩍 눈에 띄면서 마침내 ‘억척어멈’의 씨리즈가 등장하는데, 양자가 모두 돌봄과 배려의 생태적 감수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만큼 전혀 우연이 아니다.
광주에 관한 공선옥의 소설들에 등장하는 여자도 대다수가 ‘억척어멈’이라 할 수 있지만 억척어멈 씨리즈의 특징적인 양상은 작가가 광주 이야기를 서서히 접고 난 후에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광주 이야기에서는 여성/남성 간의 관계에 촛점이 맞추어졌다면 억척어멈 씨리즈에 오면 여성/모성의 미묘한 관계 쪽으로 이동한다. 미묘함은 모성이 여성의 핵심적인 일부임에는 틀림없으나 여성의 타고난 본능이나 본질은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런데 공선옥의 서사가 ‘광주’라는 강력한 역사적 자장 바깥으로 나오면서 모성에 관한 이야기가 본성론의 경계 위에 서서 이쪽 저쪽으로 발걸음을 하는 듯한 ‘아슬아슬함’을 보여준다. 광주 이야기에서는 “공선옥은 모성을 여성의 타고난 본성으로 그리지 않는다”15는 판단이 타당하다고 믿어졌는데, 그녀의 서사에서 ‘생리’ ‘잉태’ ‘출산’ ‘양육’이 주요한 모티프로 자리잡으면서 그런 판단을 확신할 수 없는 발언들과 흐름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이다. 가령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멋진 한세상』)의 다음 구절은 소설의 문맥에서 떼어놓고 읽으면 모성을 여성의 타고난 본성으로 보는 전형적인 담론이다.
어미들이 그 아비들보다 자식으로 해서 더 큰 행복감을 맛본다고 한다면 그건 아마 출산의 고통을 겪어낸 때문이 아닐까. 남자는 쾌락 때문에 자의와는 다르게 아이를 만들지만 여자는 속 깊은 곳에서 좀더 근본적인 욕구, 어미이고 싶은 욕구에 의해 아이를 낳고 기르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성이란 무언가를 속에 품지 않으면, 키워내지 않으면 안되는 속성을 가진 것이 아닐까. (195면)
이 대목을 공선옥의 메씨지로 받아들이거나 작품의 진의로 파악하는 것은 작품의 구체적인 면면을 완전히 무시하는 꼴이다. 왜냐하면 이 대목은 소설의 화자인 경희가 자기 아이들과 조카들이 신나게 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얼핏 든 생각이며, 이 구절에 연이어 “자신이나 언니네나 그 아이들의 아비들이 부재하기 때문에 든 생각이리라”(195면)고 단서를 단다. 사실 이 소설에서 여성성의 정체에 관한 물음은 계속 아버지의 부재와 관련되어 설명된다. 가령, 자신과 딸의 생리경험도 그렇다. 경희가 아버지를 싫어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가 “불경스럽다는 듯, 무슨 망측한 일이냐는 듯, 딸의 생리거즈를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외로 돌렸던”(205면) 때부터이다. 경희는 “그날로부터 아버지는 정말로 완전 남이 되었다. (…) 네 사람의 여자로 이루어진 집에 아버지는 꼭 불순분자 같았다”(205면)고 회고한다. 경희의 생리경험에 얽힌 이야기에는 생물학적인 여성주의의 기미가 배어 있지만, 경희가 딸의 유사한 경험을 지켜보다가 그것이 사실은 아버지의 부재에서 기인함을 깨닫는 장면이 제시된다. 즉 그들이 “아버지 앞에서 부끄러웠던 건, 아버지가 그네의 성장과정을 지켜보지 않았기 때문”(206면)인 것이다.
이렇듯 여성성에 관한 물음이 남자의 부재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줄곧 해명되기 때문에 이 소설의 말미에 드러나는 아이러니는 묘한 여운을 준다. 경희는 남편의 존재를 그다지 반기지 않지만 그가 가족의 중요한 일원인데도 식구 가운데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는 분위기에 대해서는 강한 자의식을 갖고 있다. 아이러니는 경희가 이런 자의식 탓에 남편이 잠깐 화장실에 간 것을 또다시 집을 나간 줄로 착각한 데서 발생한다. 남편을 찾아나설 때의 다급한 마음과 막상 남편을 찾았을 때의 “맥이 풀리”는 반응은 모성성에 관한 경희의 본질론적인 사유에 제동을 거는 효과가 있는 반면, 경희에게 남편이 그리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아님을 재확인시켜주는 측면도 있다. 아버지나 남편이 이렇게 가족들한테 ‘왕따’당하는 모습이라든가 남성의 두드러진 부재현상이 우리 시대의 현실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임은 분명하나, 이를 빌미로 본질론적인 여성주의와 ‘모계제’를 정당화하는 일면이 없지 않다.
이에 반해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엄마」(『내 생의 알리바이』, 창작과비평사 1998) 「홀로어멈」(『멋진 한세상』)은 본질론적인 여성론에 경사되지 않고 여성으로서의 정당한 욕구와 어미로서의 책임의식 간의 구도 속에서 주인공 여자의 짧은 일탈에 담긴 의미를 생생하게 포착한다.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엄마」의 주인공은 아동일시보호소에 맡겨진 아이들을 만나러 광주로 가는 기찻간에서 떠돌이 노동자 신세의 털북숭이 사내와 함께 술을 먹고 ‘질퍽한’ 수작을 나눈다. 그런데 털북숭이가 “두꺼비 같은 손아귀”로 여자의 몸을 만지는 순간에는 ‘갈 데까지 가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지만 이는 어미로서의 책무와 그로부터 일탈하고픈 욕구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아니다. 남자가 “좋잖아, 따습고”라고 얼러대자 여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실제로 따습다. 그건 가짜가 아니다. 털북숭이의 불 같은 손길에 내 마음속의 얼음이 봄눈처럼 녹아내린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얼마나 허망한 짓거린 줄을 나는 안다. 나는 애기엄마인 것이다. (186면)
여자는 털북숭이와의 수작에서 따뜻함을 느끼지만 ‘애기엄마’의 책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작품의 감동은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 털북숭이의 ‘더러운 짓거리’조차도 아무런 선입견 없이 대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그녀의 절박한 처지가 반증되는 데서 온다. 달리 말하면 공선옥이 광주 이야기에서 그랬듯이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억척어멈의 눈(몸)으로 일체의 관념이나 신비화를 간단히 통과해버리는 무심의 경지가 감동스런 것이다. 특히 여자의 목소리를 ‘막가는 언행’의 털북숭이와 ‘서늘한 눈매’의 짐짓 진보적인 청년의 두 목소리 사이에 배치하여 다성적(多聲的) 효과를 빚어내는 장면은 감탄을 자아낸다. 털북숭이 사내의 따뜻함이 그가 노동하는 사람이라는 것과 무관하진 않고 그런만큼 그 따뜻함 속에는 밑바닥 인생간의 어떤 친밀함이 깃들여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 둘 사이의 “‘연대’ 관계에 대한 모색” 운운하는 것은 과도한 의미부여이다.16
공선옥의 세번째 장편 『수수밭으로 오세요』(여성신문사 2001)는 광주 이야기에서 거둔 성취를 바탕으로 생태주의적 사유와 실천, 계급간의 입장 차이, 남성/여성 그리고 여성/모성의 미묘한 차이와 갈등 등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공선옥 문학의 한 획을 긋는 역작이며,우리 시대 소설 가운데서 최상급의 성취를 이뤄낸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문학적 요소들과 극적 계기들이 편재하고 있지만, 형식적으로 따져보면 소설로서의 극적 골간은 뭐니뭐니해도 사랑 이야기에 놓여진다. 이 소설은 심이섭과 강필순의 사랑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소설을 곰곰이 생각할수록 사랑이야기는 껍데기처럼 느껴지고 ‘어미’ 강필순을 중심으로 하는 모계적 가족구성의 이야기가 알맹이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소설적 재미는 이 두 서사간의 팽팽한 대립과 갈등에서 나오는데, 이것이 어느 지점을 통과하면 모성이 거짓된 사랑을 물리치는 훈훈한 감동으로 대체되는 듯하다.
사랑 이야기에 처음 개입하는 것은 계급의 문제이다. 구로공단의 어느 단칸방에서 봉제일을 하는 밑바닥 출신의 강필순과 의사 심이섭의 첫만남이 이뤄지는 곳은 강필순의 절친한 친구 오은자가 경영하는 ‘소정까페’이다. 「목마른 계절」에서 등장한 두 여자처럼 필순과 은자의 관계는 보통의 친자매보다 더 깊다. 함께 역경을 헤쳐온 동지이자 피보다 진한 자매인 것이다. 이섭이 이런 끈끈한 자매애를 비집고 필순과 연애를 하게 된 것은 이섭에게 선량한 마음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정까페에 찾아온 필순의 허약하고 순박한 모습에 눈길을 던진 이섭과 자신의 건강을 걱정해주던 그의 배려에 감화를 받은 필순은 이 만남을 계기로 급속히 가까워진다. 필순은 이를 “이섭은 선물처럼 왔다. 올 때마다 그가 들고 오던 것만 선물이 아니라 그날은 그 사람 자체가 필순한테는 선물이었다”(68면)고 표현한다. 사람을 두고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여기서는 좋은 뜻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과도한 선물이 그렇듯 좋기만 한 것이 아님을 나중에 필순은 뼈저리게 깨닫는다. 따져보면 선의의 동정심에 이끌려 결혼한 심이섭의 내면에는 처음부터 뭔가 베푼다는 시혜의식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둘의 관계가 결혼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은 시혜와 동정이든 배려와 돌봄이든 그저 따뜻한 마음씨에 의해서 이끌린 때문만은 아니다. 필순에게는 아이 밥그릇을 짓밟아버리는 전남편인 조영식(한수 아비)의 ‘짐승만도 못한’ 행패를 당한 아픈 경험이 있고 또 관능적인 욕구도 없진 않았다.
그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한번 포개보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후끈 몸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지만 상상의 수위가 점점 올라가도 하나도 부끄러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나른하고 감미롭고 상쾌한 느낌이었다. (63면)
이 소설에서 성애의 욕구가 이 정도만큼이라도 표현되는 부분이 거의 없다는 것은 심히 유감이다. 이섭이 필순에 대해 ‘진지한’ 육체적인 욕망을 표현한 대목은 전혀 없다. 이 소설에서 관능의 지평이 거의 결여되어 있다는 점은 사랑 이야기가 껍데기처럼 보이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여기서도 ‘나른하고 감미롭고 상쾌한 느낌’이라는 것이 필순에 대한 공장장의 역겨운 추근거림과 대비됨으로써 관능욕구의 진정성이 의심되는 면이 없지 않다.
계급간의 사랑 이야기에서 중산층 세계의 허위의식을 까발리는 것은 문학의 해묵은 주제이기에 신선함을 보여주기 힘들고 자칫 도식적인 틀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엄마」에서 ‘노동해방문학’을 읽던 서늘한 눈매의 청년을 털북숭이와 대조시키면서 그의 현학성과 아울러 냉랭한 일면을 꼬집어내던 공선옥의 솜씨는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까발림의 주된 표적은 심이섭과 김영후·전병순 부부가 참여하는 중산층 지식인 생태주의 단체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필순이 은자의 연애를 돕기 위해 읽기로 하였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창작과비평』도 따가운 꼬집힘을 면치 못한다(가령 “글은 읽을 수 있는데 그 글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갔다”, 46면).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에 대한 비판은 이 소설의 또하나의 지평인 생태주의 문제와 관련되므로 논의가 더 필요한데, 여기서는 간단히 짚어보자.
주목할 것은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의 모임’ 회원 가운데는 「한데서 울다」의 정희만큼 진지한 생태주의적 사유와 실천욕구를 지닌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내세우는 명분과 실천의 괴리 그리고 위선을 비판하는 일은 극적 차원에서는 통쾌하지만 생태주의에 대한 탐구라는 차원에서는 그렇게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심이섭이 필순을 버리고 영란과 함께 서울로, 티베트로 가버린다든지 전병순네처럼 이웃과 어울리지 못해 이사가면서 ‘텃세’ 탓으로 돌리는 대목은 그다지 신선한 느낌을 주지 못한다. 만약 중산층 가운데 필순의 생태주의적 미덕과 겨룰 만한 미덕이나 매력을 지닌 인물이 있었다면 좀더 흥미진진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공선옥의 중산층 여인에 대한 감각이 돋보이는 것은 전병순의 ‘센스’ 있는 언행과 이섭 어머니의 끔찍할 만큼 양식화된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이섭의 숨겨진 허위의식을 특유의 빼어난 대사로 포착해내는 놀라운 솜씨 때문이다. 가령 이섭이 속으로 필순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술 먹고 담배 피우면서’ 필순에게 내심을 토로하는 장면을 보라.
“필순아.”
이섭이 난데없이 필순의 이름을 부른다.
“왜애?”
“강필순, 너, 너 불쌍해서 나 어떡하냐?”
“무, 무슨 소리야?”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내가 나쁜 놈이다, 내가.”
“내가 왜 불쌍해? 그리고 왜 당신이 나빠? 나 하나도 안 불쌍하고 당신 하나도 안 나빠아.”
“아니야, 그렇지 않아. 강필순. 넌 불쌍하고 난 나빠. 아니다. 그래, 넌 안 불쌍해…… 하지만 난 나빠.” (196〜97면)
필순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인 이 장면에서 이섭의 필순에 대한 측은지심과 자신을 질책하는 마음이 짧은 구어체로 제시되면서 어떤 처연함마저 자아낸다. 그러나 이섭이 자신이 나쁘다고 주장할수록 (특히 “아니다. 그래, 넌 안 불쌍해…… 하지만 난 나빠”라고 앞문장을 살짝 바꾸는 대목에서) 이것이 자책이자 동시에 자신의 양심을 달래는 행위일 수도 있음이 느껴진다. 이런 미묘한 지점까지 포착해내는 공선옥의 솜씨는 광주 이야기와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엄마」와 같은 작품을 통해 단련된 그녀의 기법이 이 소설에서도 매우 요긴하게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빼어난 기법 덕택에 아이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성취일뿐더러 이 소설의 전체적 구도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 부부의 관계가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산이의 돌잔치에 시어머니가 찾아왔을 때 필순이 술에 취해 깽판을 칠 때가 아닐까. 어쩌면 필순에게 이섭이 ‘선물’처럼 다가왔을 때 이미 두 사람의 관계는 파탄을 예고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필순의 술주정이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것이 무의식의 차원에서 시댁식구의 행태에 대한 거부감의 표출일 수 있고 이런 의미에서 단순한 실수는 아니다. 강필순이 결혼파탄의 주된 원인으로 이섭이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사랑해서 불쌍한 게 아니고 불쌍해서 사랑하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된 거야”, 249면) 이 항변에는 정곡을 찌르는 바가 있다.
필순측에는 무슨 문제가 없을까. 달리 묻는다면, 필순의 모성이 본능적인 충동으로 기울어져 이섭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는지의 문제이다. 앞서 언급한 단편에서처럼 여기서도 모성을 타고난 속성인 양 분출시키는 장면(“어미는 그런 것이다. 어미는 자고로 모질어야 하는 것이다. 모질지 않으면 그나마 자기 자식에게 내어줄 따스운 품 한뼘 남아나지 않을 것이기에. 그런 어미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진 아비가 있다면 그를 지아비 삼아 살아갈 수 있으련만”, 210면)이 나온다. 그러나 이런 충동이 불끈 치솟는 데는 자기와 자식들을 버리고 가버린 이섭에 대한 원망이 서려 있기 때문에 본질주의로 딱 규정하기 망설여진다. 그렇기에 이런 본성론적 충동의 언어적 표현보다 그 분위기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순이 친구 은자의 식구들을 불러들이고 동생 필례의 자식으로 추정되는 ‘봄’이까지 받아들이면서 집안에 아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고 게다가 필순과 은자의 끈끈한 자매애적 관계가 부부관계를 일부 대신하면서 심이섭의 설자리가 점점 쪼그라드는 듯한 상황이 파경의 한 원인이 아닌지는 숙고할 문제다. 물론 식구가 불어날 때마다 필순으로서는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 주어진다. 그리고 필순 나름으로 아이들 돌보느라 서방을 잃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고, 아이 돌보기의 부담으로부터 훌훌 벗어나 자유롭고 싶다는 열망도 엿보인다. 가령, 봄이를 여관방에 버리고 가자는 필례의 제안에 잠시 유혹당하고 이섭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산이를 시댁에 보내려는 노력이 그렇다. 그러나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엄마」의 경우처럼 여기서도 필순이 잠시의 일탈 후에 ‘어미’로서의 자리에 복귀할 것이 예정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작품의 훈훈한 감동은 더할지라도 여성/모성의 갈등이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의 경우처럼 필순도 아이들도 이섭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섭이 떠나는 장면에서 그토록 그를 원망했던 필순도 집에 돌아와서는 이섭의 떠남에 대해 아들 한수와 이야기하면서 “슬픈 건지 기쁜 건지 분간도 안된다”(222면).
이섭이 떠난 후 필순이 아들과 나누는 대화를 보라. 공선옥의 빼어난 언어감각을 보여주는 이런 구어체 대사들이, 작품에서 엿보이는 약간의 극적인 이완을 보완해낸다.
“내가 언제 웃겼다고 그래. 엄마가 괜히 혼자 웃으면서. 울고 싶으면 차라리 울어, 웃지 말고.”
“뭐라구?”
“아녜요, 아무것도.”
“야, 조한수. 너 정말 말 잘한다? 너 언제 그렇게 컸냐?”
“……놀리지 말아요, 강필순 아줌마.”
“뭐라구? 이녀석이 점점, 후후후…… 아이구 배야.” (222면)
이 대목에 이섭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슬픔이 배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강필순 아줌마’는 이 슬픔을 넘어 희비극이 교차하는 달관의 경지에까지 가 있다. 한수의 어투에는 무거운 부담감을 걷어냈을 때의 여유로움까지 보인다. 필순이 자기 아이 둘, 친구 오은자의 딸 둘, 굴러들어온 봄이까지 혈연에 관계없이 나이순으로 자기한테 세배를 시키는 장면은 이제 이곳이 이섭의 압박에서 벗어난 일종의 ‘해방구’임을 보여준다. 신동엽에게 ‘4월의 알맹이’가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껍데기는 가라」)하는 것이라면 공선옥에게 ‘5월의 알맹이’는 시골집에서 불쌍한 새끼들 다 불러놓고 밥 먹이고 절 받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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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과 공선옥의 사랑과 성 이야기들에는 어떤 시대적인 징후가 담겨 있다. 신경숙의 『바이올렛』은 우리의 감수성 가운데 관능적인 것과 생태적인 것의 분열과 대립, 그리고 전자의 후자에 대한 폭력적인 지배형태를 보여준다. 「딸기밭」은 이 양자의 분열이 한순간이나마 통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데, 이것이 여성 동성애 속에서 이뤄진다는 것이 심상치 않다. 『바이올렛』에서 서울 외곽의 농원은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난개발로 갈아엎어지는 현실에서 대안적 공간을 일궈내려는 작가의 열망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무엇보다 큰 의미는 이런 녹색의 꿈이 내면의 감수성 분열로 빚어지는 오산의 비극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 데에 있다.
공선옥은 신경숙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하지만 통하는 바가 없지 않다. 공선옥에게 ‘생태적인 기획’이 있다면 그것은 도시에 시골의 생태적 활력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시골의 아직 살아 있는 자연환경과 여성의 모성적 바탕이라 할 생태적 요소를 결합하고 활성화하는 쪽이다. 『수수밭으로 오세요』의 말미에 엿보이는 필순의 모계적 가족구성은 오늘날 기층여성이 처한 긴박한 요구에 부응한 결과인 측면이 있다. 집 없이 유랑하는 밑바닥 아이들이나 어미 잃은 새끼들에게 자연친화적인 보살핌의 공동체를 마련해주려는 모성적·생태적 열망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공선옥이 이런 찢겨진 삶들을 보듬어안기 위해서 무엇보다 ‘어미 마음’(모성)의 세상을 건설해야 한다고 확신할 때, 이 강렬한 열망과 확신이 그녀의 서사를 관념화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묘하게도 두 작가의 소설들에는 제대로 된 성인남자가 부재한다. 「딸기밭」의 화자는 남자들이 필요없는 동성애와 자매애의 결합에서 관능과 생태의 통합감을 누린다. 화자가 사귄 범죄형 얼굴의 남자, 그리고 『바이올렛』의 사진기자나 ‘최’ 역시 결코 평가할 만한 남자가 아니다. 공선옥의 『수수밭으로 오세요』에서는 남자의 부재가 결핍이 아니라 해방감을 안겨준다. 그런데 두 작가에게서 나타나는 이런 남자 부재의 현상이 우리 시대 현실의 반영인지 아니면 여성작가의 열망이 낳은 결과인지 애매하다. 시대의 반영이라면 우리 시대에는 변변한 남자가 없다는 이야기일 텐데, 그렇다면 ‘남자다운 남자’가 정말 필요한 때가 아닌지, 그리고 이때 ‘남자’가 무엇인지도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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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종연·진정석·김동식·이광호 좌담 「90년대 문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90년대 문학 어떻게 볼 것인가』, 민음사 1999년)에서 신경숙 문학의 혁신성에 관한 황종연의 주된 논지가 그러하다. “90년대 문학의 새로운 조건을 이해하자면 역사철학 혹은 거대서사의 몰락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21면)라든지 “일상성의 영역에 대한 관심은 신경숙 소설에 뚜렷한 것이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90년대 소설 전체에 두드러진 것이기도 하지요. 신경숙 이후 많은 여성 작가들이 활약하기 시작하면서 일상의 미학, 도덕, 정치는 소설의 주류 테마가 되었으니까요”(40면). 그런데 신경숙 자신의 최고 걸작이자 90년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외딴방』(1995)이 과연 거대서사의 차원이 결여된 일상적 미시서사로 그치는 것인지 묻고 싶다.↩
- 『외딴방』의 성취를 글쓰기에 대한 성찰과 결부하여 탁월하게 논한 글로는 백낙청 「“외딴방”이 묻는 것과 이룬 것」(『창작과비평』 1997년 가을호) 참조.↩
- 남진우 「우물의 어둠에서 백로의 숲까지: 신경숙의 “외딴방”에 대한 몇개의 단상」, 『외딴방』 2권 292면.↩
- 이런 자질은 신경숙의 산문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가령, “꽃이나 식물이나 동물이나 사람이나 그들과 관계맺고 있는 한 순간에 찬란한 향기를 풍기다가도 또 한순간 그들은 죽음이나 그리움이나 부재나 상실로 돌아갔다”(「말해질 수 없는 것들」, 『아름다운 그늘』, 문학동네 1995, 47면)라는 구절을 보라.↩
- 신경숙은 단편 「배드민턴 치는 여자」(『풍금이 있던 자리』, 문학과지성사 1993)를 저본으로 삼아 『바이올렛』을 썼는데, 이 두 작품의 차이를 엄밀히 규명하면서 장단점을 비교하려면 또하나의 글이 필요하다. 필자는 『바이올렛』이 「배드민턴 치는 여자」의 여러 계기들을 발전시키고 개선함으로써 사랑과 성애의 문제를 확연하게 드러낸 점을 높이 사지만, 동명의 단편을 장편화한 『외딴방』의 경우와는 달리 그 핵심적인 대목에서는 큰 변화가 없고 또 그만큼 성공적이지는 않다고 본다. 여기서는 『바이올렛』의 텍스트를 기본으로 삼되 두 작품의 공통된 면을 먼저 논한 다음 양자의 차이와 그 예술적 효과에 관해서는 간단히 덧붙이기로 한다.↩
- 단편에서는 이 만짐으로 끝나지만 『바이올렛』에서는 남자가 “당신, 사랑해도 되겠소?”(161면)라는 도발적인 발언과 함께 그녀의 뺨에 입맞추는 장면이 더 있다. 또한 단편에서는 사진기자에게 예쁜 마누라가 있다는 암시가 『바이올렛』에서는 예쁜 애인들이 있는 것으로 바뀌어 있다. 뿐만 아니라 단편에서는 나중에 오산이 사진기자가 까페의 창밖에서 자기 쪽을 두 번씩이나 쳐다보고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데 좌절하지만, 『바이올렛』에서는 그런 실망을 겪은 후에도 오산이 전화로 그를 불러내어 마침내 두 사람이 대면하고 그 자리에서 그가 오산의 (머리를 자르고 눈썹을 밀어) 달라진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때 사랑의 최종적인 파탄이 일어나는 것으로 조정된다. 이런 디테일 상의 변동은 불가피한 면이 있고 또 사실적 개연성을 높이기도 하지만 단편에서 돋보였던 시적인 함축의 묘미를 반감시키기도 한다.↩
- 신수정 「다시, 씌어지는 이야기」, 『바이올렛』 295면.↩
- 이 소설에 대한 윤지관의 논의는 작품의 이런 핵심적인 면모를 놓치는 바람에 신경숙 문학에 대한 통념적인 비판에 그친 느낌이다. 가령, “작품 속에서 산견(散見)되는 사회적이거나 남성적인 폭력에 대한 묘사조차도 (…) 전체적으로 소멸의 미학이라고 칭할 만한 죽음에의 이끌림과 유령적 삶에 대한 숙명론적 암시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비평은 있다」, 『창작과비평』 2002년 겨울호 307면)는 구절이 그렇다.↩
- 김병익 「존재의 괴리, 그 슬픈 아름다움」, 『딸기밭』 296면.↩
- 양진오 「억척어미의 여성성, 가난과 마주하는 문학」, 『멋진 한세상』(창작과비평사 2002) 297면.↩
- 김영희는 공선옥의 의의에 대해 “우리 문학으로서도 드물게 기층민중의 주체적 목소리로 여성의 삶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점”(「근대체험과 여성」, 『창작과비평』 1995년 가을호 87면)을 지적했는데, 필자는 이야기의 내용보다 ‘주체’가 여성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뜻에서 표현을 바꾸었다.↩
- 진예의 이 소리에 대한 자세한 논평은 한수영 「여성, 역사의 타자(他者)」, 『문학동네』 1999년 겨울호 참조.↩
- 김영희, 앞의 글 90면 참조. 한수영은 앞의 글에서 ‘잉태’와 ‘출산’의 모티프를 정신분석적인 틀로만 해석하는 바람에 혜자가 “그 생명의 경외로움에 굴복하고 유산을 포기”(155면)한 것으로 읽는다. 공선옥이 이 대목에서 “서둘러 비역사적이고 무시간적인 ‘모성성’의 피안으로 내달려가고 있다”(152면)는 것인데, 여기서는 설득력이 없다.↩
- 「목마른 계절」의 예사롭지 않은 기법에 주목하여 작품을 분석한 글로는 백낙청 「지구시대의 민족문학」, 『창작과비평』 1993년 가을호 115면.↩
- 김영희, 앞의 글 89면.↩
- 신승엽 「벗어날 수 없는 일탈, 머무를 수 없는 定住」, 『창작과비평』 1999년 여름호 69면. 나아가 이 둘의 ‘연대’ 관계를 「목마른 계절」의 ‘나’와 현순씨의 단순한 ‘공감’ 관계보다 더 의미깊은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두 관계의 중요성과 성격을 거꾸로 읽는 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