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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파병·북핵 그리고 한미동맹

 

 

강태호 姜泰浩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원 역임. 현재 한겨레신문 정치부 차장(통일팀장). kankan1@hani.co.kr

 

 

 

동맹 50주년을 맞은 한미관계는 미국 쪽의 주한미군 재편추진과 반전평화운동의 이라크 파병반대 등 내외로부터 이중의 변화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노무현정부는 이라크 파병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동맹의 의무라는 것이다. 명분없는 전쟁은 거부해야 한다는 비판이 따랐다. 그러나 지난 50년 휴전협정 아래서 우리에게 동맹 없는 안전보장은 없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고도 말했다. 얄팍한 계산일 뿐 전쟁으로 평화를 사려는 것이라는 비난이 퍼부어졌다. 촛불시위에 이어 반전평화운동에 나섰고 노무현을 지지했던 이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노무현정부는 출범 전부터 부시 미행정부와 갈등 조짐을 보이던 터였다. 설상가상으로 3월초로 가면서 북핵위기는 예측불허의 국면으로 치달았다. 북핵해법을 둘러싸고 노무현 대통령은 군사적 수단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부시행정부와 정면으로 맞섰다. ‘전쟁은 안된다’였다. 그러나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론과 충돌위기까지 치달았던 핵위기 앞에서 노대통령은 ‘국익’을 선택했다. 새 정부가 강조했던 수평적 한미관계는 한미동맹 중시에 자리를 내준 듯했다. 노무현정부는 평화의 명분도 대등한 한미관계도 모두 잃은 것일까.

사실 어떻게 보면 전쟁을 반대하고 그래서 파병을 거부하는 일이 더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파리드 자카리아(Fareed Zakaria) 국제판 편집장은 「오만한 제국」(“The Arrogant Empire,” Newsweek 2003년 3월 24일자)에서 미국은 고립무원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동맹국들 중 이처럼 많은 나라가 단호하게 미국과 반대입장을 표명한 적도 없으며, 이처럼 많은 대중의 반대·분개·불신을 자아낸 적도 없다. 오늘날 미국을 지지한다는 것은 대다수 나라에서 정치적으로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후쎄인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자국 국민들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럼 왜 노무현정부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일’을 선택했을까? 노무현정부는 3월초 이라크 파병만이 아니라 북핵문제에서 다자대화 지지, 북한의 군사적 도발 가능성에 대한 경고 등 매우 중요한 결정들을 내렸다. 파병도 그렇고 다자대화 지지 또한 노대통령이 보였던 소신과는 다른 것이다. 국익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분명 고뇌가 수반됐을 그 결정들의 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시민단체의 반전·반미운동이 정부의 파병결정과 반드시 제로섬의 대립관계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노무현정부의 파병결정을 이라크 전후특수나 미국으로부터 무슨 특별한 큰 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미국의 파병요구를 거부할 경우 단순히 북핵문제의 악화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외교적 보복과 경제적 불이익이 불가피했다. 그런데 한국의 신용평가등급 전망 하락으로 촉발된 경제의 추락은 문제였다.

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 시절 중앙정보부(CIA) 고위관리를 지낸 케네스 폴락은 지난 3월 13일 멕시코 유력일간지와 회견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미국의 뜻을 거역하면 응분의 댓가를 지불할 것이다.” 폴락이 멕시코에 한 협박을 무디스가 한국에 했다면 지나친 비유일까.

3월초 한국경제에는 갑자기 적신호가 켜졌다. SK글로벌의 분식회계 파문과 함께 북폭론이 번지면서 경제에 대한 불안감 확산이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에 대한 투매로 이어진 것이다. 미국의 신용평가기관 무디스가 북핵문제의 악화와 이를 둘러싼 이견을 들어 한국에 대한 신용평가 전망을 2단계 하락시켰기 때문이다.

토머스 번 무디스 국가신용팀 부사장은 4월 2일 미국 뉴저지주 포트리의 한국상공회의소 초청 연설에서 노골적으로 북핵이 문제라고 말했다.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고려할 때 가장 중요한 요인은 북핵문제이며 노무현 대통령의 대중영합주의 선거공약이나 재벌개혁, SK글로벌의 분식회계 등은 큰 고려요인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미국 조야는 ‘비공식 북폭론’을 내세우며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시장을 개방할 것을 요구했다. 북폭론은 시간이 갈수록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한 한미동맹 강화론’으로 변질됐다. 한 ‘수구언론’에 실린 칼럼은 그런 점에서 정곡을 찔렀다. 경제부장이 쓴 이 칼럼은 노무현 대통령을 겨냥해 “한국경제를 살리는 방법은 한국이 전쟁을 반대한다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미국과 함께 간다며 한미간 공조를 재확인하는 길뿐”이라고 주장했다.

‘미국발 북폭론’에 대해 노대통령은 전쟁은 안된다며 맞섰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북핵문제로 인한 한미간의 갈등이 한국경제의 악재로 부메랑처럼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결국 정부는 3월 9일 반기문 외교보좌관, 권태신 재경부 국제금융국장 등을 미국에 보내 급한 불을 꺼야 했다.

그렇다면 노무현정부는 경제를 볼모로 한 미국의 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일까?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미국이 가해온 전방위 압박과 핵을 둘러싼 북미의 긴박한 대치상태가 노무현정부의 앞을 막았다. 2003년 한반도의 봄은 반전·평화의 열기 이면에 감춰졌던 냉엄한 현실을 되돌아보게 한다.

 

 

3월 7일의 다자대화 수용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이라크전에 대한 협력을 요청받았다고 공개한 것은 3월 7일이다. 정부당국자는 이날 기자들에게 미국 쪽의 요청이라는 표현은 쓰지 말아달라며 양국은 이라크전 지원을 협의하고 있다고 처음으로 언급했다. 이라크전에 대한 비전투병 파병결의는 이미 이때부터 준비되었다. 정부는 이날 북핵문제와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양자대화인가 다자대화인가라는 북핵해법을 둘러싼 대립 속에서 미국이 추진해온 북핵문제에 대한 다자대화 지지방침을 천명한 것이다. 또 북미대화의 중재에 나선 중국이 쳰 지쳔(錢其琛) 전 부총리를 북한에 보낸 싯점이 하루 뒤인 3월 8일이었다. 그는 특별기로 백두산의 삼지연까지 직접 찾아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났다.

왜 이런 긴박한 움직임이 이 시기에 집중되었을까. 4월 18일 ‘핵 재처리까지 마지막 단계’에 있다고 밝힌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발언은 그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다. 그는 이 사실을 “미국을 비롯한 유관국들에게 이미 중간통보를 했다”고 밝혔다. 그 싯점이 바로 3월초다. 한마디로 북한 핵문제가 매우 심각한 국면에 있었다. 북한은 핵 재처리로 위협했으며, 미국은 다자회담을 밀어붙였고, 중국은 본격적인 중재에 나섰다는 추론이 가능한 것이다.

이날 다자회담 수용을 밝히면서 외교부 당국자는 그 배경으로 미국이 양자대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이런 단호한 자세는 중국에도 전달됐다. 뻬이징 3자회담 개최를 가장 먼저 취재해 보도한 『뉴욕타임즈』의 토오꾜오특파원 데이비드 쌩어(David Sanger)에 따르면 미국이 다자회담 이외의 대화는 없다며 중국 쪽에 통고한 것 또한 3월 7일이었다. 윤영관 외교부장관이 밝혔듯이 3자회담은 중국의 역(逆)제안이었다. 중국이 이를 언제 미국 쪽에 제시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3월 8일의 쳰 지쳔-김정일 ‘담판’에서 중국은 3자회담을 놓고 북한과 절충 내지 타협을 시도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적어도 이 삼지연 담판이 있기 전까지 북핵문제에 대해 중국은 대북제재 반대와 북미 직접대화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3월 6일 뻬이징 인민대회장에서 있은 탕 쟈쉬안(唐家璇) 외교부장의 내외신 특별기자회견 때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그러나 3월 8일의 ‘담판’ 뒤 그리고 부시 미대통령이 쟝 쩌민(江澤民) 국가주석(당시)과 전화회담을 한 뒤인 11일 중국은 처음으로 북미 직접대화에서 한발 빼는 자세를 보였다. 쿵 취안(孔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의 쟝 쩌민과 부시의 전화통화를 설명하면서 “대화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며 관건은 북미 양쪽의 ‘성의’”라고 밝혔다.

미국은 어땠는가. 미국의 양자대화 거부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2월말까지만 해도 부시 대통령은 북한과의 대화는 언급조차 하지 못하도록 했다. 3월 12일 상원 외교위원회 북핵청문회에 나온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이 다자회담의 틀 안에서나마 일부 변화를 보였다. 그는 모두발언에서 북한의 선택을 촉구하면서 ‘남북한과 미·중·일·러 등 6자가 참여하는 회담을 다자회담의 한 방안’으로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전까지 미국이 말한 다자회담은 ‘p5(안보리상임이사국 5개국)+5’였다. 앞의 p5는 ‘채찍(제재)’을, 뒤의 5는 ‘당근’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등한 관계에서의 대화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켈리 차관보가 처음으로 공식 언급한 6자회담은 북미, 북일 등 다양한 양자대화를 수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3월 16일이 되면 부시 대통령은 중국의 협조에 감사한다고 밝히고 있다.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은 부시 대통령이 후 진타오(胡錦濤) 신임 중국 국가주석과의 전화통화에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뻬이징 당국의 협조와 노력’에 감사를 표시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3월 26일 켈리 차관보는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우리는 북한이 기존의 입장을 일부 완화하고 있다는 징후를 포착했다”는 말로 북한이 3자회담을 받아들였음을 처음으로 암시했다. 4월 12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일문일답을 통해서 “미국이 대조선 정책을 전환할 용의가 있다면 대화형식에 구애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4월 18일 핵 재처리의 마지막 단계라는 발언이 파문을 불러왔지만 4월 23일의 3자회담에 참석하겠다고 밝혔다. 드디어 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핵 재처리 위협과 스텔스 전폭기

 

그러나 이는 동전의 한쪽 면만 본 것이다. 3월초 북한은 핵 재처리 착수 중간통보와 함께 3월 2일 미 정찰기에 대한 미그기의 위협비행을 시도함으로써 일전불사의 초강수를 던졌다. 따라서 첸 지쳔 전 부총리의 3월 8일 북한 방문은 북한과 미국의 힘겨루기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긴박한 상황으로 치닫는 싯점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실제로 2월부터 한반도 주변의 군사력 증강을 예고했던 미국은 3월 12일 F-117A 스텔스 전폭기를 남한에 배치해 위협수위를 한단계 더 높였다. 이는 3월 19일의 연합전시증원연습(RSOI)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영변 공격이라는 메씨지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북한)은 곧, 아마도 이라크에 처음 폭탄이 투하되는 날 재처리를 시작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는 게 부시행정부 매파들의 우려였다(Nicholas D. Kristof, “Secret, Scary Plans,” New York Times 2003년 2월 28일자 논평). 그런가 하면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미대사와 제이슨 샤플린 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정책자문관은 “워싱턴이 이라크를 공격하려고 하는 마당인데 북한에 대해서도 똑같이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다는 말인가”라는 말을 했다(“How to Deal With North Korea,” Foreign Affairs, March/April 2003). 북핵사태를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대치상황은 이라크전쟁으로 갈수록 예측불허의 국면으로 치달았다.

한마디로 북미는 마주보고 달리는 기관차였다. 북한은 미사일 발사 및 북방한계선 침범 등 군사적 도발로 위협했다. 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대변인이 2월 17일 담화를 발표, 정전협정 ‘의무이행 포기’를 경고한 데 이어 2월 20일엔 전투기가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왔으며, 나흘 뒤인 24일에는 개량형 지대함(씰크웜) 미사일을 시험 발사함으로써 추가 미사일 발사시험을 예고했다. 그리고 3월 2일 북한 전투기들의 미군 정찰기 위협까지 4〜6일 간격으로 계속된 이 북한의 위협은 다분히 의도된 것이다. 한 국방관련 전문가는 북한의 이런 대응은 “한반도가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임을 보여줌으로써 협상을 끌어내려는 양날의 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위협에 동원한 또다른 ‘칼’은 플루토늄 재처리 가능성이었다. 미국 정보기관들은 1월말부터 영변지역에서 트럭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음을 포착했다. 또 핵연료 재처리시설인 방사화학연구소 인근 열공급 보일러시설에 석탄을 운반하는 것이 목격됐다. 미·일의 주요언론들은 저장시설에 있던 사용후 연료봉이 재처리시설로 이동되고 있다며 재처리 착수 움직임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2월 하순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의 한·중·일 3국 방문을 전후해 미 정보기관은 북한이 5메가와트 실험용 원자로의 재가동에 들어간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2월말의 싯점에서 이제 남은 것은 사용후 연료봉의 재처리였으며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말대로라면 3월초 미국 등 유관국에 재처리를 ‘중간통보’했다.

당시 미국은 이라크 개전 준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일단 북핵문제는 이라크전 이후로 미뤄두려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북한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런 점에서 엄밀히 말해 군사적으로 먼저 ‘도발’한 것은 미국이었다. 『뉴욕타임즈』와 CBS, CNN 방송 등은 2월 1일 일제히 토머스 파고 태평양군사령관이 24대의 B-1, B-52 폭격기를 태평양상의 괌으로 증파하고 F-15 전투기 8대와 U-2 정찰기 등을 한국과 일본 기지에 보내줄 것을 상부에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1월말 미국의 정찰위성이 영변에서 핵 재처리를 위해 폐연료봉을 실어나르는 것으로 보이는 트럭들을 포착했다는 『뉴욕타임즈』 등의 보도가 나온 직후였다. 미 언론들은 또 항모 키티호크가 이라크침공을 위해 중동지역으로 갈 경우 국방부가 항모 칼빈슨을 이 지역에 배치하는 문제를 검토중이라고 전했다. 그뒤 실제로 미국은 이라크전 대비 등을 이유로 항모 칼빈슨을 한반도 해역으로 파견했으며, 24대의 B-52 폭격기 등을 괌에 배치했다. 미국은 이러한 군사력 증강배치가 공격용이라고 위협했다.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은 3월 5일 정례브리핑에서 괌 기지에 배치되는 폭격기들이 “공격을 위해 사용될 수도 있느냐”는 질문에 “그것이 그 임무의 목적”이라고 잘라말했다. 또 특수 항공기와 함정 들이 북한 인근으로 이동배치됐다. 미국은 북한의 핵실험 가능성에 대해서도 대비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이 가운데는 미사일 추적함 인빈써블 외에 핵실험을 감시하는 정찰기가 포함돼 있었다.

리처드 마이어스 미 합참의장은 2월 28일 NBC 방송에 출연해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여부를 검토하고 있음을 시사했고, 이를 두고 같은 날 『뉴욕타임즈』의 칼럼니스트 크리스토프는 지난 1993〜94년 북핵위기 때 검토됐던 미국의 북한 영변 핵시설 폭격계획이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검토되고 있다고 썼다. 정가와 증권가 등에서는 흉흉하게 북폭론이 나돌았고 청와대는 이를 부인하기에 바빴다. 급기야 『워싱턴포스트』는 3월 1일 ‘미·북 군사충돌 위험성 심화’라는 기사에서 “최근 북한과 미국이 취한 일련의 군사적 조치로 미뤄볼 때 북핵을 둘러싸고 계획적이든 우발적이든 미·북 군사대결 가능성이 확산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미 정찰기에 대한 북한 미그기의 근접위협비행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 다음날인 3월 2일이었다.

미국은 일본과 함께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 재처리 강행을 우려해 무엇보다도 정찰 첩보활동에 총력을 기울였다. 지난해 가을 일본 카데나(嘉手納) 공군기지에 배치한 RC-135S 코브라볼 정찰기도 그 일환이었다. 북한의 미그 23, 29 전투기 4대의 위협비행은 이 코브라볼에 불과 15m 거리까지 접근한 것이었다. RC-135S의 최대속도는 마하 0.84, 미그 29는 마하 2.3이다. 15m거리라면 그야말로 일촉즉발이었다. 게다가 미그기는 코브라볼의 강제착륙을 시도했던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미국은 이를 중대한 도발로 간주했다.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은 ‘북한이 저지른 무모한 행위’로 규탄했으며, 정찰기의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비행을 중단시킨 채 미 국방부 내에서는 군사적 대응책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미군 정찰기들을 보호하기 위한 ‘신중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애초 검토했던 미국 전투기의 정찰기 호위비행은 북한을 지나치게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배제됐다. 이라크와의 전쟁을 앞두고 북한과의 대결은 피하려 했다. 그렇다고 미국이 뒤로 물러선 것은 아니다. 3월 12일 F-117A 나이트호크 스텔스 전폭기 6대와 F-15E 전투기 20여대의 한반도 증파는 정찰기 위협에 대응한 계산된 무력시위였다. 스텔스 전폭기가 한국에 온 것은 공교롭게도 1차 북핵위기 때인 1993년 한미연합훈련(팀 스피리트)에 참가한 이후 처음이었다. 전략국제연구쎈터 태평양 포럼의장인 랠프 코싸(Ralph Cossa)는 북한에 대한 정밀폭격이 가능한 F-117A 스텔스 전폭기의 배치로 미국은 평양에 채찍을 휘두르겠다는 분명한 신호를 보냈다고 말했다.

 

 

전쟁위기의 한가운데

 

3월 7일 노무현정부는 전쟁위기의 한가운데 있었다. 북한의 재처리 위협과 미국의 군사적 수단을 동원한 대결의 틈바구니에서 노대통령은 다자대화를 받아들여 미국의 손을 들어줬다. 이라크 파병결정 또한 이때 이미 내려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다른 한손으로는 전쟁반대를 분명히했다. 미국의 편에 선 것은 사실이지만 굴복하지는 않았다. 또 할말은 했다. 정찰기에 대한 위협사건은 미국이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대통령은 3월 4일자 영국의 『더 타임즈』와의 회견에서 “미국이 북한의 핵시설 감시를 위해 최근 정찰활동을 부쩍 강화했기 때문에 공중에서의 조우는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서 “미국에 너무 심하게 하지 말 것(not to go too far)을 촉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또 북핵위기는 “궁극적으로 부시 미국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문제를 풀기 위해 직접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부시행정부는 격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3월 4일 백악관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실은 발칵 뒤집혔다. 북한 전투기와 공해상에서 마주쳤다는 것보다 미국을 더 긴장하게 만든 것은 그 사태를 바라보는 노대통령의 시각이었다(「<격동의 한미관계> 특파원 리포트: 부시가 보는 노무현」, 『월간중앙』 2003년 4월호 참조).

미국 쪽의 불만은 3월 6일 리언 라포트 주한미군사령관 초청으로 용산기지에서 있었던 국방부 출입기자단과의 간담회에 배석했던 주한미군 고위관계자들의 입을 통해서도 감지됐다. 한 고위관계자는 “우리는 한반도 평화와 안전을 위해 북한관련 정보를 수집할 합법적인 필요성이 있다”며 “북한에 대해 남한사람들이 관용하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노대통령의 발언을 겨냥한 것이다. 또 이날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은 주한미군 재편과 관련된 다양한 방안들을 검토하고 있다며 철수를 언급했다. ‘철수’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공개적으로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이 철수문제를 한국과 논의중이라고까지 이야기했다. 그의 발언은 또다른 협박이자 노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경고였다. 왜 3월 7일 국방부가 북한군에 의한 일련의 긴장조성 행위를 규탄하는 대북성명을 발표하고 외교통상부가 다자대화 지지를 밝혔는지 이제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마치며

 

4월 25일 뻬이징 3자회담은 다음 회담 일정을 잡지 못한 채 끝났다. 게다가 회담에선 북한의 ‘핵보유 시인’이라는 폭탄발언이 있었다. 북한은 모호하긴 하지만 핵무기 실험 임박과 수출, 추가 핵 재처리 강행,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등 모든 핵카드를 내건 승부수를 던진 듯하다. 미국이 지난 2월부터 우려해왔던 사항들이다.

이에 대해선 두 가지 시각이 존재한다. 긍정적인 측면이다. 이즈미 하지메(伊豆見元, 일본 시즈오까 현립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핵을 철폐하면서 양보를 얻어내려면 우선 핵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쎌리그 해리슨 미 국제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부정적 측면을 우려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북한이 핵무기 1, 2기를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과 실제로 북한이 핵보유를 공포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상황이 심각한 국면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4월 14일 『문화일보』와의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간에 미국은 자기의 계산대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별로 할 일이 없다. 이것은 결정론적 사고지요. 저는 철학, 정치, 사회운동, 모든 분야에서 결정론적 사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대통령도, 시민도 할 일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분명한 우리의 몫이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결정케 만드는 데는 우리 정부의 입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 물론 미국의 언론이 불편한 심기로 제목 몇개만 뽑아도 우리 한국의 정치·경제는 큰 파동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타격은 우리가 참고 감수하면 감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무력공격이나, 그 결과로서 전쟁이 생긴다는 것은 감수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미국만이 아니라 북한 역시 북한의 계산대로 움직인다. 지난 3월초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동맹과 북한이라는 칼날 사이에 있었던 듯싶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