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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안주철 安舟徹
1975년 강원도 원주 출생. 2002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rire010@empal.com
약력 없는 시인
약력 없는 시인은 백살까지 살아도
삶이 너무 짧다
백살까지 늙지 않고 글을 써도
좋은 시를 한편도 쓸 수 없다
새로 나온 시집을 펼쳐들고
중년 시인의 괴로움을 생각한다
그는 근 이십년 동안 자신의 시집
안쪽 표지에 한줄의 약력도 늘리지 못했다
출생과 한권의 시집
몇권의 시집이 더 있다는 것을 나는 알지만
애석하게도 그 시집들은
독자들이 잘 알지 못하는 출판사다
약력 없는 시인은 시집을 내기 전에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쓰지 못한 것이 무언지
왜 자신의 시가 서정적인지
국적
나의 국적은 가난이다
생이 다 벗겨진 나무의자에 앉아
마른 가을풀 그림자처럼
노인은 술을 빨고 있다
한모금 술을 마실 때마다
노인은 사과 문지르는 소리로 웃고
건너편 의자에 앉아
술병을 들고 있는 나에게
젖은 웃음을 건네기도 한다
나는 잠깐 웃는다
그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옆 빈자리를 가리키며
다시 웃는다
나도 웃는다
좀전의 웃음보다 짧고 단호하게
어깨를 한번 들썩이며 그가 술병을 잡는다
그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술이 길 건너에서도 선명하다
검은 목,
주름진
씻지 않은 목숨을 숨기고 있는 듯한
나도 술병을 든다
그가 또 웃는다
다시 자신의 옆 빈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그의 등뒤에서 내가 앉은 의자 옆으로
그의 빈자리가 바람을 타고 건너온다
그의 더러움, 그의 역겨움
그가 웃는다
몇몇 사람이 나를 내려다보며 멀찍이 서고
그가 웃는다
나의 국적이
내가 앉은 긴 의자 옆에 텅 비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