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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성석제 成碩濟
1960년 경북 상주 출생. 1986년 『문학사상』에 시로 등단. 1995년부터 소설 창작. 소설집 『홀림』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등과 장편 『순정』 등이 있음. ssje@paran.com
잃어버린 인간
“아빠, 전화!”
거실에서 컴퓨터게임을 하고 있던 아이가 끈질기게 울어대는 전화를 마지못해 받았다가 마침 방에서 나오던 그에게 전화기를 집어던지듯 하며 말했다. 십여년 전부터 자신의 방에 전화를 따로 두고 주로 그 전화를 쓰다보니 삼십년 가까이 써온 거실 전화는 아내와 아이들 앞으로 걸려오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는 집에 있어도 거실에서 울리는 전화는 받지 않았다. 그 전화로 그를 찾는다면 나이든 친척들이거나, 전화 명의자이면서 두해 전 유명을 달리한 어머니와 관련된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그는 다소 조심스러운 어조로 “여보세요” 하고 전화를 받았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대는 “아, 이선대 작가십니까?” 하고 물어왔다. 그는 순간 방에 있는 전화로 걸려올 전화가 잘못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남들한테서 작가로 불리기 전부터 자신 명의의 전화를 따로 써왔고 그를 작가라고 호칭할 만한 사람에게는 그 전화나 휴대전화 번호를 가르쳐주었더랬다.
“그런데요. 누구십니까.”
“아, 나는 이선대 작가의 형님 되는 사람입니다. 그래, 요새 많이 바쁘십니까.”
그는 형님이라는 단어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존댓말에 곧 거실의 오래된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적어도 십년 이상 만나지 못한 친구 중 하나가 장난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누구냐. 나 지금 피곤하니까 빨리 누군지 말해.”
“이작가 형님 되는 사람이라니까요. 이작가 집안에서는 형님한테 반말을 쓰십니까.”
“어떤 자식이 끝까지 형님, 형님 하는 거야. 너 어떤 놈이야.”
“허허, 백주대낮부터 웬 욕을…… 제가 이선대 작가의 진짜 형님입니다, 형님.”
“지랄하고 자빠졌네. 전화 끊어, 짜샤.”
“이런 무지막지한 인사가 있나. 그래 선대 이놈아, 나다. 까막골 행님이다. 영제 애비라.”
그는 재종형의 갑자기 커진 목소리와 달라진 억양에 놀라 전화기를 놓칠 뻔했다.
“아이쿠, 명대 형님, 죄송합니다. 저는 친구놈이 장난치는 줄 알고.”
“야가 쪼매 유명해지더이마 나이를 스무살이나 더 잡순 형님하고 친구하자카나, 우얘 된 기라. 내가 노름판에서 환갑 진갑 딴 거 아이데이.”
재종형은 칠년 전 그의 아버지의 장례에 와서는 세번째 소설책을 낸 그를 붙들고 “네가 작가가 된 데는 다 내력이 있니라. 네 할부지, 그랜깨 우리 할부지의 막내아우님이 울마나 이야기를 좋아했는지, 저녁만 되마 아들을 방에다 모다놓고 그러키 이야기를 하고 또 해주고 했던 기라. 그때 이야기가 또 얼매나 재미있었는동 아직 한개도 잊아뿌린 기 없다”고 하면서 그 이야기들을 시시콜콜 주워섬긴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조부의 핏줄을 이은 사람이 재종형이기라도 하듯 무슨 이야기를 하든 시종이 없고 워낙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와 나이가 비슷한 조카 영제가 학교에 가기도 전에 윗목에서 무릎 꿇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다가 무릎에 굳은살이 다 박였는데, 군대에 가서야 그 굳은살이 없어지더라고 토로할 정도였다.
“뭐라 디릴 말씀이 없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어느새 그는 재종형의 말투를 따라 고향 사투리를 쓰기 시작했다.
“그래, 까잇거 알마 됐고. 너도 나가 쉰 다 됐을 틴께 같이 늙어가는데 쪼만한 아맨쿠로 나무랄 수만 있나. 그런데 야이, 너는 왜 우리 집안 이야기는 안 쓰는 기냐. 맨 남의 집안 사람, 남의 이야기만 쓰는 거 겉은데 사람이 근본을 잘 알아야 된다. 네 우리 십대조 부사공 만우당 할부지가 양양 겉은 데 목민관으로 가시서 얼매나 선정을 베푸싰는가 잘 알제. 그 어른 앞으로 된 송덕비가 여덟이나 된다. 그 아드님은 또 해동징자(海東曾子)라고, 지극하신 효도로 영조대왕이 직접 한양 도성으로 불러가이고……”
그는 전화기를 귀에서 슬쩍 뗐다. 수화기 안에서는 계속 재종형의 말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마루에다 발을 굴러 여전히 컴퓨터게임을 하고 있던 아이를 돌아보게 한 뒤 입시늉으로 끄라고 하면서 눈을 한껏 부라렸다. 아이가 골이 난 얼굴로 컴퓨터를 끄고 제 방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 전화기를 다시 귀에 가져다 댔다. 때마침 “안 그렇나?”라는 물음이 들려왔다.
“그게 아이고요, 형님. 지가 무슨 족보 쓰는 사람도 아이고 남사스럽게 집안어른 이야기를 우째 하겠습니까. 그거는 조상 빛내는 게 아이고 욕보여드리는 일입니다.”
“그라마 거 여 웃동네 고령 출신 장석철인가 뭔가 하는 사람은 뭐라. 그 사람은 자기 대고조 할무이 이야기를 잘도 썼더마. 내가 시골 산다고 눈코귀도 없는 줄 아나.”
“형님, 그분은 장씨가 아이고 성씹니다. 친가도 아닌 외가 조상 이야기를 좋게 쓰고도 문중 어른들한테 불려가서 혼구멍이 났답니다. 소설은 사실하고 다른 거라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야가 우째 이래 아래우 동서남북이 꽉 막힜을꼬. 어릴 때는 안 그래 비더마. 하이튼 긴 이야기는 얼굴 보고 하기로 하고 얼른 니리와라. 오늘 봉대 아지미 올라가싰응께.”
“봉대 아지미…… 봉대 아즈마이가 어데를 가셨습니까.”
“야가, 야가, 작가라는 기 우째…… 개떡겉이 말해도 찰떡겉이 알아들어야지. 극락 천당으로 가싰다 이 말이야. 퍼뜩 챙기입고 니리오라카이.”
그러고 나서 재종형은 그에게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가르쳐주었다. 그는 필기구를 찾아 전화번호를 받아적으면서 봉대 아주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연세는 얼마며 자손들은 어떻고 시신은 어디에 안치되어 있는지 등등 궁금한 점을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재종형은 고향에 도착하면 곧바로 자신에게 연락하라고 한 뒤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방으로 들어와 가방을 챙기고 옷을 갈아입은 뒤 가게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향에 초상이 나서 다녀오겠다, 돌아가신 분이 재당숙모라고 말했다. 그가 아내에게 언급한 재당숙은 한 사람밖에 없었으므로 그의 아내는 그 재당숙이 독립유공자임을 기억해냈다. 그는 아내의 말을 받아 재당숙모가 독립유공자 가족이니 정부에서도 무슨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하나마나한 말을 하면서 ‘옛날 같으면 아무리 재당숙모라도 부고가 오면 무조건 가봐야 하는 게 도리’라는 고리타분한 말이 목까지 치밀어올라오는 것을 꿀꺽 삼켰다.
현관을 나서면서부터 그는 재당숙모에 대해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칠촌이라는 촌수는 가까울 수도 있고 멀 수도 있는 촌수이다. 그는 재당숙모를 언제 봤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왔을 수도 있지만 그는 그 당시 왔던 재당숙이며 재당숙모의 숫자가 얼마인지도 잘 몰랐다. 기억할 게 별로 없고 희미한만큼 정리는 간단하게 되지 않았다. 그는 버스에서 지하철로 갈아탔으며 고속버스에 오르기 전 주간신문을 샀고 삶은 계란과 사이다를 먹었다. 그러는 틈틈이, 깜박 졸다 깨다 하는 사이 정리는 계속되었다.
그가 재당숙을 의식하게 된 것은 사십년쯤 전 어린시절부터였다. 철들고 난 뒤 재당숙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고 재당숙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전해들은 것이었다. 어린시절 재당숙에 관한 말이 나올라치면 집안 어른들은 한결같이 문외(門外)의 사람은 없는지 살피는 눈빛이 되었다. 재당숙에 대해서는 “하던 일이사 우쨌든동 가가 그래도 성정은 괜찮았다” 같은 식으로 함축적이고 추상적인 언급만으로 그쳤다. 그러므로 재당숙이나 재당숙모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는 거의 없었고 정리할 것도 별로 없었다. 결국 그가 집에서 세 시간 가량 걸리는 고향에 닿을 때까지 생각해서 내린 결론은 나이 쉰이 다 돼가면서 집안 일가며 친구가 부쩍 더 중요해지는 것 같은데 그게 확실히 나이들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었다. 덤으로, 갈수록 감정의 껍질이 점점 박약해져서 슬픔이 생겨나고 노여움이 드러나는 게 사춘기 소년이나 다를 바 없는 듯하다는 전날 술자리의 잡담도 기억해냈다.
고속버스 터미널에 내려서야 그는 재종형의 전화번호를 집에 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일반전화와 달리 휴대전화의 번호를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을 듯했다. 그렇다고 다른 친척들의 연락처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할 수 없이 그가 나가자마자 다시 컴퓨터에 달라붙었을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방 책상으로 가서 메모지를 찾으라고 하고, 못 찾겠다고 하는 대답에 벌컥 화를 내며 컴퓨터를 없애버리겠다는 위협까지 하는 법석을 떤 끝에 재종형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형님, 저 선댑니다. 지금 내려왔습니다.”
“어데라?”
“터미널인데요. 고속터미널입니다.”
“그마 거서 한 삼십분만 기다리라. 아 참, 식사는 했는가? 안했으마 터미나루에서 구 소방서 자리로 한 오분쯤 니리가다 오른쪽에 삼수갑산집이라고 닭개장 잘하는 식당이 있응께 거 가서 한그릇 먹고 나서 만내든동. 병원 영안실이 아직 준비가 안돼가이고 가봐야 아무도 없을 기라. 나도 여 있는 아제들하고 이야기 마치고 병원으로 갈 낀께네.”
숨쉴 틈도 없이 시간을 보낼 때 할 일이며 식단까지 알려준 재종형은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전화 빨리 끊기 내기라도 하는 사람 같았다. 그는 잠시 난감한 기분으로 터미널 구내에 서 있었다. 어쩌다가 몇년 만에 걸려온 재종형의 전화 한통에 덜컥 꺼둘려 왔는지, 마치 초상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상가에서 준비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왔는지 후회되기도 했다.
터미널 바깥의 공중전화 곁에 플라타너스 잎이 떨어져내렸다. 그게 무슨 먹을 것이라도 되는 듯 찢어진 보자기 같은 날개를 접으며 비둘기들이 내려앉았다. 터미널에서 사방 삼백 미터 아무데로나 걸어가도 논밭이 나오는, 시골도 도회도 아닌 어정쩡한 곳에 살고 있는 비둘기의 몰골은 노숙자처럼 추레했다. 그는 사람이 다가가도 느긋하게 몇걸음을 옮길 뿐 날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비둘기 사이를 지나 예전에는 중심가였던 시내 관통도로로 되도록 천천히 걸어내려갔다. 재종형이 말한 식당이 나타나자 그는 허기를 느끼면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할 것도 없이 그는 고향 장안시의 특산인 닭개장, 예전에는 초상이나 혼례 같은 큰일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나오던 음식으로 ‘닭개장 없으면 초상(혼례)집에도 안 간다’는 말을 낳은 그 닭개장을 주문했다. 주문을 받으러 온, 대학생으로 보이는 처녀가 고개를 갸웃하고 갈 정도로 근래에는 닭개장은 흔치 않은 음식이 된 듯했고 나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그는 기다리는 동안 재당숙과 재당숙모 사이에 난 쌍둥이 아들을 떠올렸다.
촌수가 팔촌, 곧 삼종형제인 그들은 그보다 한살 위였다. 그가 열살 남짓 먹었을 때 서로 닮은 데라고는 별로 없는 이란성 쌍둥이가 그가 동경해 마지않던 대도시에서 왔다. 대도시에서 오는 친척들은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었다. 케이크나 고급과자, 쇠고기 몇근과 조부 몫의 담배를 사오곤 했다. 그래서 대도시 손님이 왔다는 말을 들은 즉시 다른 식구들이 케이크와 과자를 다 먹어치우기 전 집으로 달려오는 게 가마골 이씨 집안 아들딸들의 생활방식이었다. 그런데 이란성 쌍둥이들은 그냥 왔다. 열살 남짓 먹은 사내아이 둘이 그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멀고 먼, 어쩌면 위험한 길을 버스 타고 기차 타고 또 걸어서 왔던 것이다. 쌍둥이는 둘 다 키가 그보다 작았고 얼굴은 타서 거무데데했다. 대도시에 사는 아이들 같지 않게 몸에서 물비린내 같은 냄새가 났고 촌스럽게 눈만 댕그랗게 컸다. 그는 실망하다 못해 화가 나기까지 했다. 선물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쌍둥이에게서는 그가 선망해온 대도시의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어떤 것, 또는 문명과 과학의 흔적을 도대체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그들을 처음 봤을 때 둘은 커다란 양푼에 보리밥과 솎은 열무, 고추장을 넣고 벌겋게 비빈 것을 머리통과 숟가락을 부딪쳐가며 각자의 입에 퍼넣고 있었다. 식은 된장국을 가져다주면서 그의 어머니는 혀를 찼다. 그런데 그날 저녁, 오랜만에 사랑방에서 안방으로 건너온 그의 조부는 무릎 꿇고 앉은 쌍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 먼 길을 용케도 잘 왔다며 칭찬했다. 그러고 나서 식구들에게 그들이 당분간 집에 머물 것이라고 하고는 느닷없이 그만을 따로 호명하면서 “앞으로 잘 데리고 다니되 형님이라고 불러라”고 명령했다. 그는 당혹스러웠지만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 뒤에 쌍둥이를 형님이라고 부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쌍둥이는 언제나 붙어다녔다. 변소를 갈 때도 한 사람이 안에 들어가면 한 사람은 바깥에서 지키고 있었다. “다 눴나?” “안 눴다.” “거 있나?” “나 있다.” 밖에서는 안에 들어가 있는 쌍둥이가 변소 안에서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거듭 물었고 안에 있는 쌍둥이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질문이 정상적인 주기에서 벗어나면 즉시 소리를 질러서 바깥의 다른 쌍둥이가 잘 있는지 가버리지나 않았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행태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게 재미있지도 않았으며 되도록 그런 이상한 꼴을 안 보았으면 했다. 그렇지만 쌍둥이는 집안의 그 누구보다도 그를 쫓아다녔다. 심지어 방학중에 학교에서 학생을 소집하는 날, 쌍둥이도 그를 따라 읍내 학교까지 이십리 길을 오갔다. 학교에 가는 동안 그는 쌍둥이에게 학교 안에서 그를 따라다니지 말라고 경고했고 학교에서 나온 뒤에는 다른 아이들이 보는 곳에서 절대 알은체하지 말라고도 했다. 쌍둥이는 아무런 이의 없이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어찌 보면 강아지처럼 온순했다.
“너들은 어데 사나. 언제까지 여게 있을 끼가. 너들 아부지는 뭐하나.”
그날 그들이 그의 말에 잘 순종했다고 판단한 그는 보상이라도 해주듯 그들에게 처음으로 관심을 보였다. 동네 어귀의 까막고개〔玄峙〕에서였다. 쌍둥이는 서로를 마주보며 좋아하다가 다음 질문에는 똑같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았고 곧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다시 서로 마주보았다. 그는 그들이 이란성이라 생김새만 다를 뿐 생각하는 것이나 밥먹고 배설하는 것, 정서적인 측면에서는 천생 쌍둥이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한참 의논한 뒤에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지만 ‘산’이라는 말이 들어갔고 그들이 무슨 ‘산’이라는 그 동네에 돌아갈 날짜는 그들이 결정할 일이 아니라 그의 조부와 그들의 어머니가 결정할 문제라는 것,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는 뭘 하고 있지 않은데 돌아가시고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것들, 아부지도 없는 호로자슥, 순 거지새끼들 아이가.”
그는 그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열흘쯤 뒤에 그렇게 말했다. 거기에 덧붙여 “너들 집으로 꺼대가라, 이 거지새끼들아. 당장 안 가마 우리집 개를 풀어가이고 물어쥑이라 할 끼다”라고 했다. 한동네 사는 재종형의 집에 갔다가 집이 비어 있어 그와 그들은 건넌방에서 한 사람이 항복할 때까지 이불을 덮어씌우고 조여붙이는 놀이를 했는데 쌍둥이들은 당연히 합세해서 그를 공격했다. 그는 팔다리가 비쩍 마르고 얼굴에 마른버짐이 허옇게 핀 쌍둥이는 언제든 한주먹에 날려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합세한 그들은 둘이 아니라 서너 사람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진작에 “항복”이라고 외쳤음에도 그들은 승리의 기쁨을 나누느라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그들의 엉덩이와 이불에 깔려 생애 최대의 치욕감을 맛보았다. 그들이 이불을 젖히고 그를 꺼내주려는 순간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쌍둥이들을 깨물기 위해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쌍둥이들이 거미새끼들처럼 재빠르게 양쪽으로 도망쳤다. 그는 미친 소처럼 그들을 쫓았지만 둘 중 하나도 붙잡을 수 없었고 그것 때문에 더 분해서 눈물을 흘렸다. 결국 그는 수백 개의 돌을 던져 그들을 동네 바깥으로 몰아냈다.
그의 어머니나 조모처럼 살림하는 여자들은 쌍둥이를 귀찮아했다. 그런 감정은 아이들에게 쉽사리 전달되었다. 그의 조부처럼 핏줄끼리의 도리를 중시하고 의무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명분론적인 말에 그쳤을 뿐 쌍둥이들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것도 아이들에게 쉽게 감지되었다.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시절, 그러니까 그로부터 십여년 전에 쌍둥이의 아버지가 한두 달씩 그의 집에 와서 머물렀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보리를 베고 벼를 심는 농번기에, 농사일에 정신없는 식구들 대신 그를 돌보아야 했던 재당숙이 그의 울음소리가 유난히 커서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맸다는 이야기는 그도 여러번 들었다. 왜 혼자 대도시에서 궁벽한 시골 친척집에 와서 강보에 싸인 재종질을 돌보아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그 재당숙의 아들들에게 계속 돌을 던지며 까막고개로 몰아냈다. 이따금 겁먹은 눈으로 돌아보는 그들을 향해 땀에 젖은 머리를 흔들며 다시 돌아오면 미친 소를 풀어서 떠받혀죽게 할 거라고 목이 쉬도록 소리질렀다. 그들은 가버렸다. 까막골로 들고나는 까막고개 너머 어둑해지고 있는 길을 손을 맞잡고 타박타박 걸어갔다. 그는 유난히 벌겋고 맵고 짠, 고향의 닭개장을 떠먹으며 쌍둥이들이 머리를 처박다시피 하고 먹던 양푼을 다시 떠올렸다. 그와 함께 자신이 재당숙모의 부음에 망설임 없이 달려온 것이 쌍둥이에 대한 기억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확인했다.
그는 쌍둥이가 마을을 떠나고 난 지 얼마 안되어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사왔다. 그들이 그 다음에 그의 조부가 살고 있는 고향집에 다녀갔는지는 알지 못했다. 물론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도 몰랐다. 서울에서 이따금 접하는 친척들 사이에서도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일가친척의 온갖 소식이 들고나는, 정보터미널 같은 재종형만은 그들의 소식을 알고 있을 법했는데 그 재종형을 마주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나마 재당숙모의 존재를 환기하게 된 것도 그의 아버지의 초상 때 재종형이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묻지 않았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는데. 그때 재종형은 맏상주인 그를 붙들고 세상 곳곳에 살아 있는, 살아가는 친척들에 관한 이야기를 줄기차게 늘어놓았었다. 그가 닭개장을 먹고 트림을 하면서 병원이 있는 방향으로 내려가는 지금 재종형은 재당숙모의 맏상주를 붙들어 앉혀놓고 그나 삼종, 사종 친척들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기억에 장안에서 영안실을 운영하는 병원은 둘이었다. 한 곳은 그와 일가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병원이었고, 또 한 곳은 정부기관의 지원을 받아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만약 재종형이 이 상사(喪事)를 주관한다면 반드시 일가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갔을 것이었다. 순리대로라면 정부 지원을 받는 병원에 가는 게 옳았다. 재당숙은 보훈대상자였으므로 어떻든 정부와 관련있는 병원에 가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물론 재종형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느 병원 영안실이냐고 물어볼 수도 있지만 그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두 병원은 일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그는 우선 일가가 운영한다는 병원부터 가보기로 했다.
그가 걸어내려가는 시가지에는 갑작스럽게 도로가 나면서 드러나게 된 오래된 집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좁은 마루 한구석에 놓인 요강과 슬레이트 조각이 얹힌 굴뚝, 우물과 늙은 감나무들이 느닷없이 도회 사람들 시선 속에 끌려나온 시골 소년처럼, 병든 노인처럼 수줍고 누추해 보였다. ‘이건 권리도 책임도 아닌 것, 몹쓸 운명이다.’ 이런 생각과 느낌을 가지는 순간 그는 어깨에 찾아온 통증에 진저리를 쳤다. 두어 달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오십견 증세였지만 그냥 버티던 참이었다. 이참에 병원에서 진찰이나 받아볼까,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병원이 나타날 때까지 걸었다.
병원은 개축공사 중이어서 어수선했다. 건축 폐자재가 응급차 옆에 쌓여 있었고 건물 벽에는 ‘공사중이지만 진료에는 지장이 없다’는 요지의 안내문이 현수막에 씌어 있었다. 어수선한 것을 만회하기 위함인지 병원 입구에는 제복을 입고 화장을 한 젊은 안내원이 서 있었다. 그 안내원에게 그는 영안실이 어딘가 물었다. 안내원은 고속도로 톨게이트의 안내방송을 연상케 하는 어조로 사망자나 유족의 이름을 알려주면 컴퓨터로 영안실 몇호인지 확인해주겠다고 했는데 그가 아는 건 유족의 성밖에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안실에는 단 두 사람의 초상이 진행되고 있을 뿐이어서 이름 따위는 몰라도 좋았다. 그는 짙은 향내와 음식냄새를 맡으며 영안실로 들어섰다.
입구의 사람이 북적거리는 영안실에는 젊은 남자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는 망자의 친구들처럼 보이는 청년들이 입구에 서서 내뿜는 담배연기를 피해 잰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영안실 맨 안쪽 방에는 아무도 없었고 초와 향만 켜져 있었다. 그는 정면에 걸려 있는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 찍을 당시 대략 일흔쯤 되어 보이는 여성의 흑백사진이었다. “조옥남 마리아”라는 글자가 사진 곁에 늘어뜨려져 있을 뿐, 유족의 이름이 들어가야 할 안내판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다. 그는 문간에 걸터앉아 안을 살폈다. 화환 하나 와 있지 않았다. 부의금을 접수할 탁자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방명록과 싸인펜 하나가 놓여 있었다. 깨끗하다고 해야 할 정도로 텅 빈 공간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타오르는 향과 촛불뿐이었다. 기괴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사진을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어깨를 다시 움찔했다. 물고기처럼 눈두덩이 납작하고 속눈썹이 별로 없어서 눈망울이 더 커 보이는 눈, 그는 그 눈을 본 적이 있었다. 세상이 어항처럼 작던 어린시절, 그가 사는 집에 찾아온 쌍둥이의 눈이 그랬다. 그가 쫓아낸 쌍둥이, 나중에 쌍둥이가 어디로 갔느냐는 물음에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나는 쌍둥이의 심부름꾼이나 부하가 아니라고 부르짖어 대답하던 그때, 그들이 돌아와 일러바칠지도 몰라 불안해하며 떠올리던 그 눈. 눈망울이 워낙 두드러져 불안하게 움직일 때면 사팔뜨기처럼 보이기도 했던 그 눈.
그는 향이 들어 있는 갑에서 향 두 가닥을 꺼냈다. 성냥을 켜서 불을 붙이고 손바람으로 불을 끈 뒤 향합에 꽂았다. 그전에 꽂혀 있던 향이 쓰러졌다. 그는 뒤로 물러나 두번 절했다. 두번째 절을 하고 일어서면서 그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스무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는 재당숙과 비교적 친했던 아버지는 서울로 이사온 뒤로 몇번인가 재당숙과 관련된 일로 고향을 찾았다. 그러면서도 재당숙 이야기는 거의 꺼내지 않았다. 유신헌법이 발효되었을 무렵, 아버지는 술에 취해 중학생인 그와 남자 형제들을 불러앉혀 놓은 뒤 재당숙이 독립운동을 한 공로를 드디어 인정받았고, 유족들이 원호대상자가 되었다는 말을 하긴 했다. 그의 아버지가 재당숙에게 각별했던 것은, 그가 짐작하기로는 집안에서 재당숙에 이어 유학을 한 유일한 사람이 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시대가 달랐으므로 재당숙은 일제시대에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그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유학생활을 했지만 어떻든 유학과 대학이라는 것으로 그 두 사람은 남다른 공통점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어허이요. 야 좀 보래. 젤 먼데 사는 아가 멍석 깔아놓자마자 와서 머이 앉아 있네.”
큰 목소리만으로도 그는 재종형이 온 것을 알고 고개를 돌렸다. 재종형을 필두로 두루마기를 갖춰입은 노인 두어 사람과 재종형과 비슷한 연배의 중노인 서너 명이 서 있었다. 그는 누구에게 먼저, 어떤 호칭으로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 난처해하면서 일어섰다. 그런데 그중 갓을 쓴 노인이 그에게 “서울 아제, 빨리 오싰구만. 원로에 고맙소” 하고 허리를 굽히는 바람에 더욱 당황했다. 발목에 대님을 매고 검은 구두를 신은 노인이 갓 쓴 노인의 팔꿈치를 붙들고 “그랜께 저 대부님이 서울 수한 할배 아드님이십니까” 하고는 그에게 읍을 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는 황급히 허리를 굽히고 손을 모았다. 대님을 한 노인은 항렬이 그의 손자뻘인, 종손의 동생이었다. 그와 종손의 촌수는 십오륙촌 정도 되었다.
“우째 여자들도 아아들도 하나 없나. 잔심부름이고 음석 일이고 간에 아아들하고 여자들이 있어야 될 낀데…… 영구 조카, 질부는 우얘 몸이 좀 나으싰소?”
재종형이 방에 올라앉은 뒤 머리 짧은 노인에게 물었다. 적게 보아도 일흔살은 되어 보이는 그 노인의 부인이라도 징발할 태세였다. 노인은 그런 기미를 알아차렸는지 마누라가 자리보전하고 누운 지 스무해라고 재빨리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도 재종형의 질문을 받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하며 딴전을 피웠다.
“허허, 이거 클났네. 내가 봉대 아지미 친정이 어데 붙어 있는지 몰라서 안즉 연락도 못했는데, 뭐 그쪽에서라도 누가 좀 와서 일을 해야 되는 긴데. 이럴 때 우리 마누라는 꼭 어데 가고 없단 말이야. 첫날밤에 등창난다 카디마. 어제 불국산지 법주산지 하는 절에 간다고 나가가이고는 안즉 연락 한번 안했으이. 요새는 우예 젊은 아아들이 이키도 없노.”
마침내 재종형의 눈이 그에게 멎었다. 그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아무리 시골에 젊은 사람이 없다고 해도 그가 ‘젊은 애’에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가게 있는 아내에게 재당숙모 상가에 와서 음식일도 하고 치상하며 며칠 있다가 가라고 하면 하품도 하지 않을 터였다.
“니 와 웃노?”
“형님, 여기는 왜 상주가 하나도 안 보입니까. 봉대 아즈마이 손자라도 나이가 스물은 넘었을 건데 가들 오기 기다렸다가 심부름 시키시지요.”
재종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니가 정말 몰라도 뭘 모르고 사는구나. 집안어른들 일은 하나도 모르민서 무신 놈의 소설을 쓴다, 영화를 한다고 날뛰노. 그런 기 마카 근본없는 짓이라 카이.”
“영화라니요? 제가 언제 무슨 영화를 했다고 그러십니까.”
그는 억울해하면서도 노인들이 주시하는 것을 의식하며 작은 소리로 반문했다. 재종형은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자, 이랠 기 아이고 우리는 아까 하던 이야기도 마저 해야 하고 차차 올 사람도 있으이 여게는 영술이 조카하고 영배 조카 남고 우리는 나가서 목도 컬컬한데 막걸리나 한잔하입시다이. 영술이 조카, 술 못하지요? 조카한테 휴대폰 있으이 무신 일 나마 나한테 전화 착착 때리고.”
이로써 재종형은 정식으로 봉대 재당숙모의 호상을 맡은 셈이 되었고 그를 포함한 일행은 24시간 내내 문을 연다는 병원 앞 해장국집에 앉게 되었다. 두되들이 주전자에 막걸리 한되와 맥주 한병을 섞은 술이 탁자에 올려지고 술잔이 채워졌다. 노인들은 별다른 사양 없이 첫잔을 비웠다. 잔이 다시 채워지고 재종형의 술잔이 비워졌다. 그때부터 노인들은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는 전장의 병사들처럼 옷소매에 손을 찔러넣은 자세로 오두마니 앉아 있었다. 막걸리는 한두 잔으로 그만이었다. 계속 술잔을 비운 사람은 멋모르고 마시기 시작한 그와, 막걸리 칵테일 낮술이 몸에 밴 듯한 재종형이었다.
“사람이 옳기 살고도 올바른 대접을 못 받으이 올바른 세상은 아이지.”
이 말을 시작으로 재종형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바 그의 증종조부에서 재당숙에 이르는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 두 시간 넘도록 강연에 가깝게 이야기했다. 군대에 갔다온 것말고는 한번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재종형은 특히 일가들의 초상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었다. 도시로 나가서 살다 죽은 사람들은 화장하지 않고 매장을 하는 바에는 고향으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는데 그 뒤치다꺼리는 재종형의 몫이었다. 재종형은 그런 일을 좋아하기도 했다. 초상을 치르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정리, 종합한 뒤에 다시 들려주며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식으로 가문의 역사를 써나가는 게 재종형이었다. 그 역사는 글이 아닌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부족한 것도 부정확한 것도 더러 없진 않았지만 그런 부분은 한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거들어서 완성도를 높였다. 그는 낮술로 흐려오는 머리와 아픈 어깨를 가누면서 재종형의 이야기를 기억하려고 애썼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재당숙 이봉한의 생애는 이러하다.
이봉한은 1912년 장안의 장안이씨 집성촌인 북면 도원리(桃源里)에서 태어났다. 봄이 되면 하류로 이름모를 수많은 꽃을 떠내려보낸다는, 그리하여 꽃내골〔花川里〕로도 불리는 아름다운 산촌에서 자란 이봉한이 다섯살쯤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읍내로 이주했다. 도원은 아름답긴 했지만 사람 수에 비해 농토가 많이 부족했다. 꽃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그의 아버지는 일찍 깨달았다. 장안은 명주의 특산지였고 그 명주를 사러 온 일본인 상인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이 상인을 도와 명주를 사들이고 도시와 일본으로 운반, 보관한 뒤 이문을 붙여 파는 일을 계속했다. 일을 다 배우고 자본을 마련해 독립한 뒤로는 명주의 수요처인 어떤 대처(大處), 곧 대도시로 이사했고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그 재산 덕으로 이봉한은 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재산 덕을 본 건 이봉한뿐만이 아니었다. 유학을 가기 직전 그의 어머니가 병으로 숨지자 도원의 일가들이 장례에 떼로 몰려오다시피 했다. 장례가 끝나고도 그들은 그 집에 몇달 동안 눌러앉아 있었다. 그들을 나무랄 수만은 없는 것이 그 당시에는 각자의 집안에서 입이라도 하나 더는 게 긴요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을에 재실(齋室)을 새로 짓는 데 그의 아버지가 돈을 다 대기로 하고 나서야 도원의 일가들은 하나씩 둘씩 돌아갔다.
일본에 가서 대학예비과정인 예과에 입학한 이봉한은 당시 청년지식인 사회에 유행처럼 성행하던 사회주의사상과 마주치게 된다. 스펀지처럼 새로운 사상을 흡수한 그는 젊은 나이임에도 사회주의사상을 전파하는 전도사가 되었고 유학생 사회에서 영향력을 넓혀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일본 경찰의 주목대상이 되었다. 물론 집에서는 그가 그렇게 된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세해 뒤 본과에 진학하여 대학생으로 금의환향했어야 할 그가 초췌한 몰골로 돌아왔을 때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무엇보다 고등경찰의 추적으로부터 도망다니느라 몸이 많이 상했고 사업에도 방해가 되던 터이라 아버지는 그를 도원으로 보내 정양하게 했다.
“사는 기 모도 비슷하이 가난했고 또 왜놈 무섭던 시절이라 누구 모실 만한 집이 있었어야지. 새 재실말고 옛날 재실 바로 밑에 산지기집이 있었는데 그 양반을 옛날 재실에 모시놓고 산지기집에서 밥을 해다 드맀지. 이 양반이 동경 유학까지 갔다왔으이 배운 거도 많고 신수가 훤해서 한두 달 있은께 딴사람은 몰라도 밥 나르던 산지기 딸부터 온 동네 처녀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 기라. 그때 상사병이 돌림병 겉앴지, 암매. 그래 있다보이 소문이 나고 순사들도 여개 일본유학 갔다온 학생이 있다고 아는 기라. 자꾸 찾아오고, 찾아오고, 찾아오고, 뭐하나 보니라고. 그때마다 숨고 도망하는 거도 한두 번이지, 아제가 나중에는 완전히 혓바닥이 서 발은 빠짔는갑대. 질국에는 중국으로 가실 수밖에 없었지. 지금 보마 꼭 하고 싶어서 독립운동을 했다 카기보다는, 그 지랄 겉은 시절이, 그놈들이 하게 만들었던 기지.”
중국으로 떠났다던 그는 서너 해 뒤에 다시 도원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헌병과 경찰에 붙잡히면 고문과 투옥, 형벌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정황이었다. 그럼에도 왜 그는 돌아왔는가.
“지금 생각하마 그기 독립운동인가는 몰라. 나중에 들은 말씀으로는 군자금을 가지러 왔다 카기도 하고 중요한 사람을 만나러 왔다 카기도 하는데 아, 당신도 숨어다니기 바쁜 판국에 무신 군자금을 모집하고 사람을 만날 수가 있는가. 요새겉이 돈을 온라인으로 부치는 것도 아이고. 하이당간 대부 어르신은 용키 한분도 안 붙들리고 빠지다니싰응께. 우리 동네에서는 숨가줄 수가 없는 기 그전부터 우리 어른들이 비협조적이라고 깅찰이고 헌빙이고 자전거에 말을 타고 와서 살무시 돌고 가고 살무시 돌고 가이 있을 데가 있는가. 할 수 없이 여 앉아 계신 젊은 서울할배 나신 까막골로 보내드맀지.”
“아이라. 당신이 먼저 가실라 캤대요. 가시고 난 뒤에 두 시간도 안돼서 도라꾸에 오도바이에 총을 차고 새카맣기 왜놈들하고 그놈들 종노릇하던 조선 종자 찌끄래기들이 모이드는데, 그때 생각하마 지금도 가슴이 다 떨리는구마. 우리야 그때 지우 여남은살 됐을까.”
종손 동생 이야기 말미에 갓 쓴 노인이 끼어들었다. 재종형과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그때 어른들이 잘하신 처사지요. 그때 까막골로 안 오시고 도원에 기양 있었어봐. 난리가 난리가 그런 생난리가 있었겠는가.”
재종형이 어색할 수도 있는 자리를 수습했다. 요컨대 노인들의 부형은 고향에 온 독립지사에게 군자금을 주기는커녕 보호하지도 못하고 자신들이 사는 곳보다 훨씬 궁벽하고 외진 곳으로 보냈다. 보내야만 했다. 까마귀가 많은 골짜기라 까막골이라고 하고, 신성하다는 의미의 검을 현(玄)을 써서 거먹골〔玄谷里〕이라고도 하며 옹기를 굽던 가마터가 있어 가마골이라고도 한다는 그 동네에는 이씨 일가붙이 네댓 가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는데 읍내 사람들은 그런 곳이 존재하는지도 잘 몰랐다. 당연히 그곳에는 일본 경찰과 헌병이 오지 않았지만 군자금은 모을 수 없었다. 뜻이 통하는 사람을 만날 수도 없었다. 그곳에서 나는 것은 군자금의 금이 아니라 보리, 옹기, 대추였다. 동네에 들어오는 사람은 동네에서 나갔던 사람뿐이었다. 그는 현곡에서 몇달을 눌러붙어 있었다. 하는 일 없이, 할 줄 아는 일도 없어 그냥 있었다. 다행인 것은 그가 머물고 있는 집의 가주(家主)가 혈족에 대해 비교적 강한 의무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그 가주의 도움으로 다시 중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이봉한이 중국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아버지로부터 부쳐오는 용돈을 받아쓰면서 중국에서 그냥 살았을 수도 있다. 재종형 역시 독립운동이라고만 알았지 이봉한이 어떤 단체에 속해 있었는지, 어떤 일을 맡았고 어떤 사람과 같이 일했는지 전혀 몰랐다.
임시정부는 1930년대에는 항져우(杭州)에서 꽝뚱(廣東) 일대를 전전했고 40년대에 츙칭(重慶) 등지로 청사를 옮기며 광복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봉한이 임시정부에서 일했던 흔적은 없다. 또 임시정부는 국내외 동포를 관할하기 위해 연락기관인 교통부를 두고 지부를 설치했으며 전국 각 군에 교통국을, 면에 교통소를 신설했다. 이런 기구에서는 군자금 모집, 국내 정보 수집, 정부문서 국내 전달, 인물 발굴과 무기 수송 등의 활동을 했다. 그러나 이봉한은 그 어느 곳의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임시정부에서는 군사활동도 병행했다. 40년대에는 광복군을 창설했고 45년에는 국내 진입작전의 일환으로 국내정진군 총지휘부를 설립하여 미군의 OSS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이봉한은 이런 행동의 주체가 아니었고 말단으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몰라도 기록이 없었다.
독립운동세력은 민족주의 그룹과 사회주의 그룹으로 대별할 수 있었는데 사회주의 그룹은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을 결성하고 사회운동을 전개했으며 국외에서는 만주나 연해주에서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동북항일연군, 재만조국광복회, 조선의용대 등과 아나키스트들, 해방 후 북한에서 연안파로 분류되는 옌안 지역의 조선독립동맹이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이봉한이라는 이름은 이 분야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일제에 잡히거나 고문받고 갇힌 사람들 역시 독립운동을 한 사람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봉한은 혈족들의 보호 덕분에 잡히지도 않았고 고문을 받지도 않았으며 갇히지도 않았다. 징용을 가거나 전향을 강요받은 것도 아니며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의 독립운동은 부작위적이며 피동적인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능동적으로 했던 가장 뚜렷한 일은 청년시절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것이었으나 청년기를 지나면서 사회주의자로서 이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고백도 증언도 없다. 당시 이봉한의 아버지가 살던 지역의 도경찰부가 경성의 경무청에 보고한 바에 의하면 그는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사상이 수상쩍은 조선인〔不逞鮮人〕으로 감시를 요하는〔要視察〕 인물 7백여명의 일원이었다. 그나마 그는 자신의 이름이 요시찰인물 명부에 올라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봉한의 자취와 이름이 기록에 나타나지 않고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해도 이국땅에서 겪었을 풍찬노숙의 고초가 어땠을지는 술자리에 있는 사람은 모두 다 알고 있었다. 해방되기 이태 전,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 유언은 ‘내 아들에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독립지사들이 부모의 장례를 위해 집으로 돌아오다가 일경에 붙잡혀 투옥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그 유언은 부작위적으로 이행되었다. 그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하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장례에 일가들이 다시 떼지어 몰려갔다. 이번에는 몇달을 그냥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인 없는 집에서 가져오고 얻을 수 있는 것을 찾았다. 그런데 이봉한의 아버지는 그런 사태를 예견이라도 한 듯 미리 재산을 정리해서 도원 안쪽 계곡에서 발원하는 화천의 하류, 읍에서 가까운 봉대(鳳臺)라는 곳에 적지 않은 땅을 사두었다. 살고 있던 집과 드넓은 집터는 딸들에게 물려졌다. 도원 사람들은 그나마 남아 있는 기둥시계며 재봉틀, 유성기 같은 것을 한두 개씩 들고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 해방이 되었다.
도원의 일가들은 해방된 지 두달쯤 뒤 도원으로 돌아온 이봉한을 보고 처음에는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피골이 상접한 그의 등에 있는 상처에서는 구더기가 흘러나왔고 마을 어귀에서 개에게 정강이를 물리기까지 했다. 자신을 누구인지 증명하기 위해 그는 다 떨어진 옷에서 다 떨어진 수첩을 꺼냈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빛바랜 사진 한장을 꺼내놓았다. 사진에는 수려한 용모의 이봉한이 나무를 가득 실은 트럭 앞에서 운전사와 함께 서서 웃고 있는 모습이 들어 있었고 뒷면에는 ‘長白山嶺 風雲萬里 一心竭力 爲復靑山 壬午 春日 李長安’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일가들은 의논 끝에 그의 아버지가 지은 새 재실로 이봉한을 인도했고 그곳에서 그는 다시 정양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산지기의 딸이 음식을 나르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촛대라도 가져갔던 마을사람들이 저마다 그에게 음식을 가져가고 약을 가져다주었다. 몇달 뒤 그는 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회복되었다. 그에게는 봉대의 농토가 상속되게 되어 있었는데 그는 그 땅 대부분을 문중 땅으로 도로 내놓았다. 그를 돌보아준 마을 친척들의 두터운 정의에 보답하는 의미라는 해석도 있었고, 그 자신이 사회주의자로서 지주가 되어 농민을 착취하는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었다. 물론 두 가지를 다 겸했을 수도 있고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 수도 있다.
“뺄개이 소리를 들었거나 말았거나 그쪽 사람들이 그때는 좀 청(淸)했지. 나중에 들어온 인민군들도 작전인지 자기들 법이 무서워선지 몰라도 집에 있는 소나 여자들은 안 뺏아갔잖소.”
재종형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동의를 구하는 듯 말하자 갓 쓴 노인이 즉각적으로 받았다.
“아제 말씀이 과하신 거 겉소. 우리 봉대아제는 뺄개이가 절대 아이라요. 뺄개이가 우째 조상을 섬기고 문중을 알아서 백마지기나 되는 위토를 내놓는단 말입니까. 그것만 봐도 절대 봉대할배는 뺄개이가 아이라.”
“우리 아제가 언제 뺄개이라고 캤나. 뺄개이들도 그랬다 이 말이지. 조카가 생사람 잡겠소. 우리 아제가 무신 뺄개이라고, 그렇기 착하고 점잖은 양반이 뺄개이라만 우리나라 온 국민이 다 뺄개이겠다.”
재종형은 그들말고는 졸고 있는 주인여자밖에 없는 해장국집을 둘러보며 과장된 억양으로 말했다. 어떻든 살아 있는 동안 이봉한은 문중에 내놓은 땅에 대해 독점적인 경작권을 가질 것이었고 소작료를 문중에 내놓지 않는 바에야 먹고살기에는 충분한 땅을 가진 셈이었다. 그로부터 그는 부작위의 세월에서 벗어나 조금씩 자신을 찾아갔다.
그는 해방된 조국, 고향의 봉대 땅을 사랑했다. 그 땅에서 집을 얻었고 그 집을 빙 둘러가며 소나무와 대나무, 수십 종류의 꽃을 심었다. 아버지가 살았던 대처에는 가려 하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의 주선으로 몇군데와 혼담이 오고간 끝에 그는 혼례를 치르고 자신보다 열살 어린 조옥남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의 부인이 그를 위해 처음 한 일은 조선인민공화국 산하 지역 인민위원회에서 온 손님을 위해 닭을 잡은 것이었다.
“새색시가 닭을 어떻게 잡는 줄 알았어야지. 그냥 모가지를 비틀면 되는 줄 알고 죽어라 하고 비틀었더니 목만 축 늘어지고 닭은 죽지도 않고…… 사람도 닭도 못할 짓이었다 카시대. 두고두고 그때 말씀을 하시더란 말이요.”
이봉한의 부인이 저녁에 닭 모가지를 잡아늘이던 그 시절, 그가 짧은 새벽처럼 잠시 관여하게 된 인민위원회는 해방 직후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로 대별되는 정치세력 양자를 아우르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출범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의 건국이 선포되면서 건국준비위원회 지부를 개편한 것이었다. 미군정이 실시되자 인민위원회의 힘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우익 인사들은 이탈해나갔으며 넓지 않은 장안 읍내에 국민회, 대한독립촉성회, 한국민주당, 노동당, 농민회 등 각종 단체의 지부가 속속 설립되었다. 경향각지에서 각 단체의 주도권 장악과 노선대립, 좌우익 사상대립이 첨예화되고 있었는데 1945년 12월 모스끄바 삼상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를 결의함으로써 이에 찬성하는 좌익과 반대하는 우익은 합치지 못할 길로 갈라서고 말았다. 이봉한은 이 무렵부터 정치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장안이란 농촌에는 일본유학을 다녀온 사회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그 유학이며 사회주의며 독립운동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가보지도 해보지도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인, 그의 위상에 어울리는 자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봉한 스스로도 적극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에는 흥미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주변의 나이든 농사꾼들을 찾아다니며 농사일을 배웠고 일본인들이 두고 간 책으로 나름의 영농기술을 습득해 주변에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제시대에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도원에서 온 노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대로 이봉한은 사회주의자였을지는 몰라도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비록 그것이 기록이나 문서로 남아 있지 않다고 해도. 공산주의자였다는 것도 기록이나 문서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9년에 그는 좌익으로 분류되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해야 했다. 좌익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조직한 반공단체인 ‘보도연맹’은 대한민국정부 절대지지, 북한정권 절대반대, 공산주의 배격 분쇄, 남·북로당의 파괴정책 폭로 분쇄, 민족진영 각 정당·사회단체와 협력해 총력을 결집한다는 내용을 주요 강령으로 삼고 있었다. 강령이 이러하니 그 강령을 따르는 연맹원은 공산주의자일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바로 그 보도연맹 때문에 1950년 6월에 터진 한국동란 와중에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와 함께 생사의 기로에 선 장안 사람은 2백명이라고도 하고 5백명이라고도 한다. 전국적으로는 30여만의 보도연맹 가입자가 있었는데 국군과 우익세력은 후퇴하면서 이들을 마구잡이로 총살하고 파묻었는가 하면 수장까지 했다. 그는 자신의 봉대 집에서 저녁을 먹다가 전부터 자주 찾아와 상부에서 실적을 올리라고 하도 괴롭히니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시늉만 해달라고 종용하던 경찰에게 끌려갔다.
“별일 아닐 것이니 금방 갔다오겠네. 소죽 끓여줘야 하는데……”
그게 그가 끌려가기 전 그의 아내에게 한 말이었다. 대부분의 보도연맹 사람들도 비슷한 말을 하고는 다시 오지 못할 길을 갔다. 그는 읍내의 경찰서에 갇혔는데 그곳에는 이미 수백명이 끌려와 있었다. 갇힌 방에서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죽음의 공포와 흉흉한 소문이 커져갔다. 호명되어 나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경찰이나 군인 가족, 또는 뇌물을 쓴 사람들도 진작 빠져나갔다. 그렇게 일주일 가량 갇혀 있다 마침내 그는 밖으로 끌려나갔다. 보도연맹원들을 노끈으로 결박하고 서로서로 연결해서 트럭에 오르게 한 경찰은 한참 동안이나 달려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람들을 내리게 한 뒤에 일부의 묶은 끈을 풀어주고 구덩이를 파게 했다. 구덩이가 다 파지기도 전에 자신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짐작하게 된 사람들의 입에서 살려달라는 울음과 비명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경찰은 그런 사람들을 먼저 끌어내려 구덩이 앞에 세워놓고 총을 쏘았다. 총에 맞은 이들이 구덩이 속으로 넘어지자 다음 사람들이 그 자리에 세워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어 도망을 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한 사람이 동쪽으로 가려고 하면 한 사람은 북쪽으로 갔고 중간에 있던 사람들은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울어댔다. 지역별 할당제에 따라 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한 사람들도 있었고 아직 어린 소년들도 있었으며 가입하면 먹을 걸 준다는 말에 가입한 사람, 농투성이로 살다가 해방 직후 수많은 단체들이 세워지고 없어질 때 문서 심부름한 것만으로도 사상범이 되어 가입하게 된 사람도 있었다.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잡혀온 교사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울부짖으며 억울함을, 원통함을 호소했다. 그는 이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구덩이 앞에 서게 되었을 때에 그는 모든 일이 차라리 빨리 끝나주기를 바라며 가만히 있었다. 배에 뜨거운 창날이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뒤로 넘어졌을 때에도 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 총알이 머리에 박힌 사람의 비릿한 피가 흘러들었지만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 경찰은 사람으로 구덩이가 메워지자 이번에는 그냥 쏘아서 땅 위에 넘어뜨렸다. 그러고는 산 아래의 동네로 가서 사람들을 끌고 와 구덩이를 파서 시체를 묻게 하고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은 찾아내는 족족 쏴죽였다. 어떻게 그는 살아남았는가. 배에 총알을 맞을 때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던 끈이 끊어졌다. 손은 여전히 결박된 채였지만 그는 경찰이 가자마자 시체를 떠밀고 밖으로 나왔다. 경찰은 스스로가 저지른 일에 진저리가 쳐지는지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마을 뒷산에 숨어 있다가 경찰이 가고 난 뒤 반대편 마을로 내려갔다. 그 마을이 바로 가마골, 까막골, 현곡리 바로 그곳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죽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곧바로 피난민이 들끓는 대도시로 갔다. 사람 사이에 숨으면 오히려 안전할 것 같아서였다. 그는 대도시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많은 피난민 동네, 서로의 과거에 대해 알려고 하기보다는 한줌의 쌀을 얻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동네로 들어갔다. 생계는 그의 부인이 도맡았다. 그는 언제나 집에 죽은 듯 엎드려 이제는 이골이 난 정양을 했다. 배에 입은 총상은 깊지 않았지만 구멍이 난 채 좀처럼 아물지 않았고 시시로 고름이 흘러나왔다. 병원에 가서 치료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소독약을 바르고 붕대로 싸매는 게 처치의 전부였다. 그가 농사짓던 논밭은 문중 일가들이 나누어 경작했다. 물론 그에게 소작료 낼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죽은 사람이었고 죽은 사람은 권리 주장을 할 수 없으며 가난하지도 배고프지도 않을 터였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로부터 몇해 뒤, 아이들이 태어났다. 쌍둥이였다. 또 한두 해가 지나 딸을 얻었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그는 아이들 이름을 크게 불러보지도 못했다. 죽은 사람인데도 상처에서 고름은 여전히 흘러내려 아이들을 마음껏 안아주지도 못했다. 그런 일들을 견딜 수 없을 때 그는 아주 가끔 현곡으로 와서 한두 달씩 머물다 갔다. 현곡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거세게 울어대는 조카를 들여다보며 쩔쩔매는 게 고작이었다.
이승만정권 말기에 조봉암이 국가보안법으로 사형당했다. 그는 더 못살고 가난하고 복잡한 산동네로 이사를 갔다. 하루에도 판잣집이 몇채씩 세워지고 또 없어지는 동네였다. 주소도 전화도 있을 리 없었고 그나마 유지하던 친척들과의 연락도 모두 끊어졌다. 돈은 벌어도 소용이 없었다. 집을 살 수도 호의호식할 수도 없었다. 돈을 벌었던 건 물론 아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무너지고 난 뒤, 그는 조심스럽게 대명천지로 나왔다. 보도연맹의 억울한 희생자들이 재조명되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게 죽었던 그가 부활하는 데, 복권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 무렵 그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려면 죽어서 산 십년에 대해서 경찰이며 당국자에게 해명할 필요가 있었다. 가마골 출신인 그의 재종동생이 장안 읍사무소의 공무원이었다. 재종동생에게 그는 말했다. 독립운동을 했다고 대접을 받자거나 보답을 받자는 게 아니다. 남들처럼 살 수 있으면 족하다. 모심기에 좋은 저 햇빛 아래 물이 넘실대는 논에 떳떳하게 나가서 땀 흘려가며 일하고 싶다. 그러나 그의 재종동생은 재종형의 그런 말을 일일이 들어주고 불비한 제도를 쫓아다니며 청원하여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에는 지나치게 바빴다. 그해 농사철은 쉬 지나갔다. 사방에서 억울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소리치고 있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정작 죽지는 않았던 그는 자신은 순서가 좀 늦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고질이 된 총상을 완전히 치료할 수 있었던 것에 만족했다.
그러던 어느날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쿠데타의 우두머리는 혁명공약 6개항의 첫머리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또 숨고 죽지 않을 수 없었다. 애국지사나 참전용사, 그의 유족 등을 돕기 위해 정부조직 내에 군사원호청이 만들어진 것은 그해, 1961년이었다. 그는 원호를 받으러 간 적이 없었다. 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박정희가 어떤 인간인지 안다. 그 사람, 타까끼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자는 해방 전에 만주에서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 때리잡던 일본 관동군에 있다가 해방되고 나서는 여순사건 때 뺄개이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같은 뺄개이들을 일러바치고 살아남은 사람이다. 형인가 하는 사람도 뺄개이로 총에 맞아죽었다. 이런 인간이 정권을 잡으이 거꾸로 가는 기라. 나중에 와서 뺄개이 때리잡는다 카는데 그기 다 지가 뒤가 구린께 하는 수작 아이겠나. 제대로나 했나. 중앙정보부 맨들어가이고 간첩 잡는다고 억울한 사람을 얼매나 잡았나. 고분고분하마 놔두고 저한테 맞설 것 같다 싶으마 죽이고, 이기 그 인사가 해놓은 짓이다. 우리 장안이가들은 박정희 때 절대 표 안 찍었다. 그래이 군수고 뭐고 우리 이가가 사는 동네에는 뭔 혜택 줄 생각도 안하더라. 장안에서 전기가 젤 나중에 들어온 데가 까막골이다. 팔십 및년에 전기가 들어왔응께, 전국에서 기록 아인가 모를따.”
군정이 실시되면서 매일 사람을 붙들어들이고 반대파를 숙청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가 밖에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그로부터 두해 뒤 이봉한은 정말로 죽는다. 사인은 뇌졸중이었고 나이는 불과 쉰세살이었다. 유족들은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장안의 피붙이들에게 연락할 경황도 없이 장례를 치렀다.
“재종형제지간이마 사실 먼 것도 아이지. 할부지가 다른 거잖소. 안 보마 한없이 멀지. 아무리 핏줄이라 캐도 매일 보는 이웃보다 못한 기라. 나도 내 재종이 여덟인가 아홉인가 되는데 얼굴도 다 몰라. 시방 누가 서울 어데서 죽는다 캐도 알겠는가. 죽을 때는 시골이 났다 카이. 사람대접 받아가미 죽거든. 누가 죽었다 살았다 알기도 하고 찾아가서 보기도 하고.”
재종형의 바로 면전에 앉은 탓인지 내내 잠자코 있던 중노인이 한마디 거들었다. 어떻든 이봉한의 죽음이 장안의 일가권속들에게 알려지자 모두들 그를 애국지사로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 이봉한이 애국지사가 되는 것은 장안의 이씨들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그의 논밭이 문중 땅이 되는 것을 지켜보았던 사람들은 저마다 나서서 그의 욕심 없는 행동과 깨끗한 품성에 관해 증언했다. 이봉한의 피와 고름과 그의 등에 우글거리던 구더기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그를 잡으러 몰려온 헌병과 경찰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그러나 증언만으로는 그의 독립운동이 인정되지 않았다. 일제시대 고등경찰의 기록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었던 것이 방증은 되었다. 그리고 해방 직후 그의 수첩에서 나온 사진 한장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사진 속에서 그와 함께 웃고 있던 트럭 운전사는 그보다 몇해 전 독립운동가로 훈장을 받은, 장안에서 백리 정도 떨어진 고령 출신 인물이었다. 그 집안의 한 사람이 재종동생의 친구였다. 그 친구가 재종동생이 가지고 있던 사진 속의 한 인물이 일제 때 백두산과 만주 일대에서 벌목 수송트럭으로 위장하여 독립군의 군수품을 날랐다는, 해방되기 직전 죽은 자신의 삼촌임을 알아본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비로소 문중의 종손 집안에서 노인들이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이봉한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빚을 그 부인의 장례식을 통해서 털어내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 역시 쌍둥이에 대해 가지고 있던 죄책감 때문에 온 것이 아니었던가. 이제 쌍둥이를 만나면 전날의 잘못을 사과하고 그게 어색하다면 손이라도 따뜻하게 잡으려고 온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언제부터 봉대에 다시 사신 겁니까? 봉대 아즈마이 말이라요.”
그가 묻자 재종형은 술기운으로 붉어진 눈을 그에게로 돌리며 말했다.
“그랜께 아제가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서 연금이라도 쪼매 나오고 하이 모시왔지. 그기 쉽기 되지도 않아서 신청하고도 한 십년 걸맀다. 그래고 나온 연금이라는 기 꼭 찬값밖에 안돼. 친정으로는 안 들어가실라 캐서 봉대에다 집을 잡은 기라. 봉대에 원래 사시던 집을 찾아디리야 되는데 그기 맘대로 안됐다.”
한때는 남편의 소유였던 땅이며 한때는 자신이 신접살림을 차렸던 곳이 빤히 바라다보이는 마을 한귀퉁이 셋집에서 적은 액수의 연금을 받으며 봉대 아주머니는 여든세살까지 살아왔다. 그는 술김에, 문중에서 재당숙이 문중 명의로 바꾸었던 땅을 일부나마 부인이나 자식에게 돌려주어야 하지 않았느냐 묻고 싶었다. 연금이 반찬값밖에 되지 않는다면, 남은 몇 식구가 쌀을 지어먹을 만큼의 땅이라도 돌려주거나 최소한 경작권이라도 주어야 하지 않았느냐고도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묻지 못하고 확인하지 못한 것은 그의 재종형이 말할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자네한테 전화상으로도 깊이 이야기했지만 우리 집안에 잘난 조상도 많고 훌륭한 분도 많지만 그런 양반은 나중에라도 다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이, 옳은 일을 하고도 생전에 전혀 보상을 못 받은 이런 양반의 이야기를 멋있게 써라, 이 말이라. 안 그래요? 우리 아제가 나쁜 짓을 했어, 도둑질을 했어, 사기를 쳤어? 독립운동을 했다 말이라. 그런데 나라에서는 이런 분을 그래 돌봐줄 생각도 안하고, 아니 돌봐주지 않는 정도가 아이고 죄없는 사람을 쥑일라고 총으로 쏘고 산 사람이 송장겉이 숨어살기 만들었으니 이건 절대로 옳은 처사가 아이다. 이런 나라가 망하마 누가 다시 살릴라고 하겠냐고. 왜정 때 나쁜 짓 한 놈들은 뒤질 때까지 떵떵거리미 살고 독립운동 한다고 굶고 병들고 쫓기댕기던 사람은 죽는 것도 제명에 옳기 죽지도 못하고 말이라. 자네가 꼭 써라, 써. 만주에서 독립운동도 열심히 하고 폭탄도 펑펑 던지고 왜놈들도 마카 뚜디리잡는 걸로 해서 우리 아제를 멋있기 살리내봐라. 자네가 이런 이야기를 알고도 안 쓰마 소설 헛 쓰는 기다.”
그는 재종형에게 소설이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라고 대꾸하고 싶었다. 부당한 처사에 대해서는 정당한 절차를 거쳐 항의하여 바로잡게 하고 피해는 보상을 받고 억울하게 빼앗긴 건 돌려받아야 한다. 그런 게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면서 하는 일이다. 소설은 그런 일의 도구도 아니고 과정의 기록도 아니다. 소설은 그저 핍박받고 숨어살아야 했던 집안 인물의 전기가 아니다. 젊은 시절 선택한 사상에 끝까지 투철했던 것도 아니며 시속(時俗)을 철두철미 거스르는 치열함을 보여준 것도 아닌, 아무것도 하지 않은 불운했던 인물을 두고 과장과 허황한 거짓말을 보태어 소설이라고 꾸며댈 수는 없다고도 말하고 싶었다. 그때 재종형의 휴대폰에서 ‘오동추 타령’의 멜로디가 박력있게 울렸다. 노인들의 고개가 멜로디에 맞춰 한줄에 매달린 참새떼처럼 일제히 끄덕거려지고 있었다. 재종형은 벨이야 울리든 말든 자신이 하려는 말을 끝마친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
“그래. 왔나? 그래. 오이야. 간다.”
전화를 끊으면서 재종형은 벌써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 실실 가보입시다. 야들이 온 모양이네요.”
그는 일행의 뒤를 따르면서 마침내 쌍둥이를 보게 되는 것에 긴장했다. 그들은 여전히 마음이 잘 통할까.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개를 풀어서 물어뜯게 할 것이라던 소년의 증오어린 외침을, 부르쥔 주먹에 들어 있던 돌을, 자신들을 향한 영문모를 적의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소년기가, 청년기가, 또는 중년을 넘어서고 있는 현재가 그다지 밝지 않을 거라는 짐작은 갔다. 그렇다면 어린시절의 상처에 대해서 훨씬 더 자주 곱씹었을 것이고 그는 그들의 심중에 거악(巨惡)으로 자라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막 병원의 영안실로 들어서려는 재종형의 소매를 붙들었다.
“그 쌍둥이 있잖습니까.”
“누구?”
“아니, 봉대 아즈마이 아들들요, 저한테는 삼종 되는. 나이는 저보다 한두 살 많을 건데요.”
그는 스스로의 말이 길어지는 것이 싫었다.
“아, 아들? 쌍디?”
“예, 쌍둥이요. 둘이 어디 삽니까. 뭐하고 사나요. 잘살기는 합니까.”
또 말이 길어지고 있었다.
“야가, 참. 니 정말로 몰랐나.”
“뭘 말입니까.”
“가들 어리서 죽었다. 굶어죽었다 카더라.”
“뭐요?”
“그때 암매 여남은살 됐다 카던가.”
말을 마친 재종형은 영안실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는 얼이 빠진 채 서 있다가 뒤에서 들어오는 사람이 부딪치고 가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고 다리를 휘청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재종형은 파리한 낯빛의 중년여성과 마주앉아 있었다. 그는 즉각적으로 그 여자가 재당숙의 딸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굶어죽다니, 그럴 수가 있는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누이에게 알아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재종형은 그에게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전문가―어떤 분야의 전문가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모든 세상사를 언어로 치환하는 그런 분야는 없기 때문이다―다운, 익숙한 솜씨로 빠르게 무슨 말인가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그 뒤에 주저앉았다.
“그래 독립유공자 연금을 모아가이고 죽기 전에 백두산하고 만주에 가보신다 카디마 질국은 가보시지도 못하싰구마…… 하나 남은 딸내미 읍에서 치킨집 내는 데…… 그 돈을 또 당신 혼자 안 쓰고 꼬박꼬박 보내싰다 말이냐…… 어이구, 이 어른을 우째 보내드리나. 이 어른을, 이 어른을, 이 억울하게 살다 돌아가신 어른을, 우리가, 니가, 우리가 우예 보내드리야 되겠나. 우예, 우예, 이놈의 나라가, 우리가 이 불쌍한, 불쌍한, 불쌍한 우리 아제, 아지미를, 아제를, 아지미를……”
먼저 사실과 사례를 충분히 열거하고 나서, 어떤 동기를 맞아 상승하기 시작하는 재종형의 넋두리를 어깨 너머로 들으며 그는 울컥 하고 눈에서 무엇인가 솟구치려는 것을 느꼈다. 웃긴다. 이건 너무 상투적이다. 그는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그러나 자꾸만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쌍둥이들, 사나운 개에 쫓기는 거지아이들처럼 때로 뒤를 돌아보며 어두워가는 저녁에 손을 맞잡고 타박타박 걸어가던 쌍둥이, 그들의 눈, 그 크고 겁먹은 눈들.
“아이고, 아지미요, 아지미요, 아지미요, 아제요, 우리 불쌍한 아지미, 아지미, 아제요……”
재종형의 입에서 본격적으로 통곡이 터져나왔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도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솟아나왔다. 노인들이 몸을 숙인 채 나지막이 박자를 맞추듯 아이고, 어이고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영정 속의 큰 눈은 그런 그들을 ‘이제 와서 왜’ 하고 의아하게 바라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