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박민규 朴玟奎
1968년 울산 출생. 2003년 『지구영웅 전설』로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한겨레문학상 수상. kazuyajun@hanmail.net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나의 산수
화성인들은 좋겠다. 그해 여름은 너무 무더워, 나는 늘 그런 상념에 젖고는 했다. 상고(商高)의 여름방학은 생각보다 길어서, 그런 상념에라도 빠지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긴긴 여름, 게다가 나는 여러 일터를 전전했다. 오후엔 주유소에서, 또 밤에는 편의점에서. 있으나마나 한 여자애들이 일터마다 있긴 했지만, 있으나마나 했으므로 지루하긴 마찬가지였다. 비하자면 수성과 금성과, 있으나마나인 별들을 지나, 지구까지 오던 태양광선이 나 같은 기분이었을까? 덥지도 않고, 멀고 먼, 화성.
일터를 돌다 보면 별의별 일들을 겪게 마련인데, 모쪼록 그해의 여름이 그러했단 생각이다. 주유소에선 시간당 천오백원을, 편의점에선 천원을 받았으므로 나는 늘 불만이 가득했다. 그게 그러니까, 시작 때완 달리 불만이 생기는 것이다. 편의점 사장은, 이러면서 세상을 배운다― 라고 말했지만, 이천원씩 받고 배우면 어디가 덧나나? 뭐야, 그럼 당신 자식에겐 왜 팍팍 주는데?를 떠나서― 못해도 이천원 정도의 일은 하고 있다고 나는 늘 생각했다. 글쎄 천원이라니. 덥기만 덥고, 짜디짠, 지구.
코치 형이 가게를 찾아온 것은 그 무렵의 새벽이었다. 어떠냐? 좋아요. 편의점 알바 역시 코치 형의 소개로 얻은 것이므로, 좋다고밖에는 말할 도리가 없었다. 지역의 알바 정보를 한손에 쥐었다고 할까, 아무튼 그래서 후배들에게 일자릴 소개하고 요모조모 코치하길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이 얼마나 요긴한가, 나는 카프리썬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제 돈으로 사는 거예요. 웃으며 말은 했지만, 알고나 드세요. 제 인생의 이십오분이랍니다― 시계를 쳐다보며 나는 생각했다. 지금 일하는 덴 사장이 꼴통이라서 말야… 오늘도 여자애 허벅질 만졌지 뭐냐… 나 참… 그래도 되는 거냐? 되고 말고를 떠나 허벅지를 만지면 시간당 만원은 줘야 되는 게 아닌가, 나는 생각했다. 만지는 게 나쁜 게 아니다. 그러고 고작, 천원을 주는 게 나쁜 짓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너 푸시업 잘하냐? 푸시업이라뇨? 팔굽혀펴기 말이다. 무조건 잘한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래야 일자리가 생긴다는 건, 그때도 이미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페이가 세. 시간당 삼천원인데… 대신 몸이 좀 힘들어. 삼천원이요? 앞뒤 잴 것도 없이, 시간당 삼천원이란 말에 귀가 확 뚫리는 기분이었다. 내 주변에 그런 고부가가치산업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제의를 받은 사실만으로도, 갑자기 확, 고도산업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한 느낌이었다. 좋구말구요. 수성과 금성과 지구를 지나, 비로소 화성에 다다른 태양광선이 바로 나 같은 기분일까? 있으나마나에 받으나마나, 지구여 안녕.
그런 이유로, 나는 푸시맨이 되었다. 좋은 점은 전철을 공짜로 탄다는 것, 팔힘이 세진다는 것, 게다가 다른 알바에 전혀 지장을 안 준다는 거야. 이를테면 여기 일을 마친 다음 슬슬 역에 나가 ‘한딱가리’ 하면 그만이란 거지. 깔끔해. 공사 소속이니 지불 확실하지, 운동이 되니 밥맛도 좋아, 그러니 잠 잘 자고 주유소 일도 계속하고… 코치 형의 코치가 쉬지 않고 이어진 것도 까닭은 까닭이었지만― 다른 무엇보다 이유는 삼천원이었다. 요는 짧고 굵게 번다, 이거군요. 그런가? 뭐…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까 모르겠군. 코치 형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확실히 그런 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이 나의 산수(算數)다. 웃건 말건, 세상엔 그런 산수를 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 있게 마련이다.
미안하구나.
아버진 그렇게 얘기했다. 또 그 소리. 내가 일만 한다 하면 늘 같은 소리였다. 처음엔 들을 만했는데, 결국 들으나마나가 돼버린 지 오래다. 나이 마흔다섯에 시간당 삼천오백원, 즉 그것이 아버지의 산수였다. 여하튼 무슨 상사(商社)에 다녔는데, 여하튼 ‘무슨 상사’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직장이었다. 딱 한번 나는 그곳을 찾아간 적이 있다. 중학생 때의 일인데 도시락을 갖다주는 심부름이었다. 약도가 틀렸나? 엄마가 그려준 약도를 몇번이고 확인하며 근처의 골목을 서성이고 서성였다. 간신히 찾아낸 아버지의 사무실은― 여하튼 그곳에 있기는 한, 그런 사무실이었다. 쥐들이 다닐 것 같은 어둑한 복도와, 형광등과, 칠이 벗겨진 목조의 문. 혹시 외국인가?라는 생각이 들 만큼이나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깜짝이야, 그런 단어가 머릿속에 있었다니. 넉넉한 환경은 아니어도, 제법 메탈리카 같은 걸 듣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세상은 뭔가 ESP 플라잉브이(‘메탈리카’가 사용한 기타의 모델명)와 같은 게 아닐까, 막연한 생각을 나는 했었다. 했는데, 해서 문을 열고 들어서자― 꼬박꼬박 도시락만 먹어온 얼굴의 아버지가 가냘픈 표정으로 사무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 저 왔어요.
원래 좀 노는 편이었는데 이상하게 그날 이후 나는 조용한 소년이 되어버렸다. 뭐랄까, 그때는 몰랐지만― 그 순간 마음속에 〈나의 산수〉와 같은 게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랬다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슬픈 일도 기쁜 일도 아니었으며, 누구를 원망할 성질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말 그대로 수(數)였던 것이다. 말수가 줄어든 대신, 나는 열심히 알바를 하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야, 세상은 한 방이야― 어울리던 친구들이 안쓰럽단 투로 말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결국 이들도 같은 산수를 할 수밖에 없단 사실을. 넌 뭘 할 건데? 나? 글쎄 요샌 연예계가 어떨까 싶어.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산수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물론 세상엔― 수학(數學) 정도가 필요한 인생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삶은 산수에서 끝장이다. 즉 높은 가지의 잎을 따먹듯― 균등하고 소소한 돈을 가까스로 더하고 빼다보면, 어느새 삶은 저물게 마련이다, 디 엔드다. 어쩌면 그날― 나는 ‘아버지의 산수’를 목격했거나, 그 연산(演算)의 답을 보았거나, 혹 그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즉 그런 셈이었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는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았다. 그리고 느낌만으로 〈아버지 돈 좀 줘〉와 같은 말을 두번 다시 하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참으로, 나의 산수란.
미안하구나.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지만, 아버지, 이건 나의 산수예요―라고 나는 생각했다. 정기적금 정기적금, 또 한통의 자유적금. 시급 천오백원과 천원이 따로따로 쌓여가는 통장들을 생각하면, 세상에 힘든 일은 없었다. 말할 것 같으면, 내 주변은 주로 그랬다. 코치 형만 해도 통장이 다섯개다. 코치 형네엔 아버지가 없지만, 우리집처럼 병든 할머니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쌤쌤이다. 코치형의 어머닌 식당일을, 누나는 서점일을, 그밖의 사정은 말을 안해 모르겠다. 들은 바, 중학생 때의 코치 형은 본드로 유명한 소년이었다, 한다. 무렵엔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래, 누구나 자신의 산수를 가지고 살아가는 거겠지. 그러니까
나의, 산수.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들은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주셔야겠지만, 그게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승객들은 모두 전철을 타야 하고, 전철엔 이미 탈 자리가 없다. 타지 않으면, 늦는다. 신체의 안전선은 이곳이지만, 삶의 안전선은 전철 속이다. 당신이라면, 어떤 곳을 택하겠는가.
처음 열차가 들어오던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열차라기보다는, 공포스러울 정도의 거대한 동물이 파아, 하아. 플랫폼에 기어와 마치 구토물을 쏟아내듯 옆구리를 찢고 사람들을 토해냈다. 아아, 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뭔가 댐 같은 것이 무너지는 광경이었고, 눈과 귀와 코를 통해 머릿속 가득 구토물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야! 코치 형이 고함을 질러주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도 놈의 먹이가 되었을 테지. 정신이 들고 보니, 놈의 옆구리가 흥건히 고여 있던 구토물을 다시금 빨아들이고 있었다. 발전(發電)이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힘! 그때 코치 형이 고함을 질렀다. 해서, 엉겁결에― 영차, 영차 무언가 물컹하거나 무언가 딱딱한 것들을 마구마구 밀어넣긴 했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어찌 내 입으로 그것이 인류(人類)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정신 차려. 열차가 출발하자 코치 형이 다가와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네. 심호흡을 크게 했지만 다리가 떨리긴 마찬가지였다. 저 사람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 화물이나, 뭐 그런 걸로 생각하란 말이야. 알겠니? 알겠지? 알겠지,에서 다시 열차가 들어왔으므로, 나는 새로이 전열을 가다듬었다. 파아, 하아. 의정부행이었던 두번째 열차는, 아마도 두배의 사람들이 쏟아져나오는 느낌이었다. 이건 마치, 전인류가 아닌가.
그렇게 한시간이 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안전선 밖의, 그러니까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정도의 지점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세개의 넥타이핀과 두개의 단추, 더불어 부러진 안경다리가 부상병의 목발처럼 뒹굴고 있었다. 뿔테였다. 인류의 분실물들을 수거하며, 나는 비로소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화성인들은 좋겠다. 참, 좋겠다.
일주일이 그런 식으로 지나갔다. 아침이면 전인류의 참상을 목격하고, 오전의 짧은 잠, 이어지는 주유소의 알바와 밤의 편의점. 온종일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이 아프더니, 다음날엔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무릎이 아팠고, 그 다음날엔 머리 어깨 발 무릎 발 머리 어깨 무릎 귀 코 귀까지가 아프다고 할 정도로, 온몸이 아파왔다. 이건… 시간당 삼만원은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다시 불만에 사로잡혔지만, 지금 관두면 억울하지 않니? 코치 형의 코치도 과연 옳은 말이다 싶어 이를 악물고 출근을 계속했다. 어쩌면 피라미드의 건설 비결도 ‘억울함’이었는지 모른다. 지금 관두면 너무 억울해. 노예들의 산수란, 보다 그런 것이었겠지.
이상하게 이를 악물고 일을 하다보니, 그럭저럭 일에도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도 더이상 아프거나 쑤시지 않았고, 이거야 원, 나는 즐거웠다. 여름의 새벽은 신선했고, 개봉역의 입구에선 대개 코치 형이 담배를 물고 서 있었다. 그리고 큰형(매표소의 직원을 코치 형은 큰형이라 불렀다)에게서 무임권을 얻는다. 얻고, 플랫폼에 올라선 우리는 어떤 특권처럼 라인의 맨 앞쪽에서 열차를 기다린다. 예전의 나였다면, 아마도 어김없이 여덟번째 출구(집에서 최단거리여서 항상 서게 되는 위치)의 대기선에서 열차를 기다렸겠지만, 그해 여름 나는 분명히 ‘푸시맨’이었다. 코치 형을 따라 공손히 인사를 하면, 기관사들은 대개 기관사석이나 차장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이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사람들은 우리를 전설이라 부른다. 훈시랄까, 아니면 설교랄까― 숙직실에서 ‘감독’의 얘기를 듣는 것도 보통 재미가 아니었다. 나이와 경력, 팔뚝의 힘, 투철한 직업관, 그리고 개똥철학… 모든 면에서 최고참인 그를 우리는 감독이라 불렀다. 실제 푸시맨들의 조장 역을 맡고 있었으므로 감독의 말은 곧 빛이자 생명,까지는 아니고 아, 예예,였다. 그럼요 그럼요, 요지는 늘 우리가 국가경제의 중추라는 둥, 교통대란을 막는 네덜란드의 소년(거 왜, 댐을 막았다는)이라는 둥, 하물며 우리 업계의 신화라는 둥. 아, 예예.
시급 삼천원을 받으며 네덜란드의 소년이 되고 싶진 않았지만, 모두가 수긍하는 감독의 말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일당백’이라는 사실이었다. 정예, 정예, 감독은 늘 일당백의 정예가 아니고선 신도림역 푸시맨의 자격이 없다고 설교를 늘어놓았다. 해서 사람을 미는 요령, 틈 사이에 발이 빠진 사람의 구출요령, 또 열차 한 량의 정원이랄까 그런 것, 또 그런가 하면 갑자기 요새 ‘오 예스’란 과자가 나왔는데 맛있더라, 너는 ‘초코파이’와 ‘오 예스’ 중 어떤 게 맛있냐고 물어서 사람을 당황케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하하, 예예.
그리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른들 사이에 파묻혀 기절한 어린이가 있었고― 도대체 이 시간에 애를 태워보내는 부모가 어딨어! 흥분한 감독이 부모를 찾았지만, 그런 부모 따위가 열차에 탔을 리 없었다. 숙직실에서 눈을 뜬 어린이는 수학경시대회에 가야 하는데, 엄마에게 혼나는데,라며 눈물을 흘렸다. 감독은 부천에서 왔다는 그 어린이에게 자신의 돈으로 콜라와 오 예스를 사주었다. 막내가 좀 갔다와라. 감독의, 인생의 삼십분을 건네받으며― 나는 평소와 달리 아, 네,라고 짧게 끊어 대답했다.
제발… 지각이에요. 그런 여자도 있었다. 가능한 등이나 어깨를… 즉 여성의 몸을 함부로 밀기가 아직은 곤란했던 무렵이었다. 그래서 머뭇머뭇 그만 두대의 열차를 놓쳐버렸다. 눈앞에서 울음을 터트리는데, 난감해서 견딜 수 없었다. 해서 코치 형을 불렀다. 그리고 의정부행이 들어왔는데,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코치 형조차 여자를 넣는 데 실패했다. 결국 여자를 넣은 것은 감독이었다. 열차 쪽을 보지 마시고, 저를 보세요 저를. 그리고 척 보기에도 가슴 같은 곳을 막 눌러, 쑤욱 밀어넣었다. 잘 들어. 남자는 앞을 보게 해야 잘 들어가고, 여자는 돌아서게 해야 잘 들어가. 알았지? 왜 그런 겁니까? 하여튼 그래.
푸시맨 하나가 열차 속에 딸려들어간 적도 있었다.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 떠밀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뿐이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승객 한사람이 시비를 걸며 머리를 쥐어박은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평소 이놈들이 싸가지없이 사람을 민다는 것이었다. 맞은 애도 보통 성질은 아니어서, 그만 사건이 커지고 말았다. 결과는 집단구타였다. 전치 3주. 도망친 승객들은 아무도 잡히지 않았고, 결국 그 친구는 자신의 돈으로 앞니를 해넣어야 했다. 그리고 아무도, 그 친구를 볼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여러 명의 변태를 볼 수 있었다. 또 보진 못해도, 여성의 비명이나 그런 걸 통해 차량의 어느 언저리에 변태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번은 여자의 치마에 정액을 묻히던 사십대가 현장에서 붙잡혔다. 손을 움직일 틈이 있었을까? 그 속에서 그런 짓을 한 것도, 그 와중에 그런 인간을 붙잡은 것도 모두가 대단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많아, 굉장히 많아. 코치 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형… 아무리 그게 좋다 쳐도… 과연 저 속에 타고 싶을까요? 그건 모르지. 변태의 속사정을 어떻게 알겠니? 갓 경찰로 부임한 친구가 있거든. 그 친구가 그러는데 하루는 알몸의 삼십대 남자가 화단에서 꽃을 먹고 있다는 신고를 받았다지 뭐냐? 꽃,이라구요? 응, 꽃.
사정(射精)을 하다 붙잡힌 남자는 상습범으로 밝혀졌다. 과묵한 인상에, 피부가 매우 흰, 점이 많은 얼굴이었다. 살이 찐 목과 근처의 주름을 따라 연신 땀이 흘러내렸다. 변태 주제에 하와이라도 다녀온 모양이지? 감독이 빈정댔지만 그는 결코 얼굴을 들지 않았다. 다른 이유는 없고, 그저 곁에 선 경찰의 제복에 비해 그의 꽃무늬 알로하셔츠가 지나치게 아름답기도 해서― 불현듯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와이에도 전철이 있을까? 하와이에도 화단에서 꽃을 먹는 알몸의 남자가 있을까? 그리고 하와이에도 푸시맨이 있을까?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그러니까 알로하, 오에.
결국 모든 인간은 상습범이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상습적으로 전철을 타고, 상습적으로 일을 하고, 상습적으로 밥을 먹고, 상습적으로 돈을 벌고, 상습적으로 놀고, 상습적으로 남을 괴롭히고, 상습적으로 착각을 하고, 상습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상습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상습적으로 회의를 열고, 상습적인 교육을 받고, 상습적으로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이 아프고, 상습적으로 외롭고, 상습적으로 섹스를 하고, 상습적으로 잠을 잔다. 그리고 상습적으로, 죽는다. 승일아, 온몸으로 밀어, 온몸으로! 나는 다시 사람들을 밀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상습적으로.
8월이 되면서 점점 이력이랄까, 그런 게 붙기 시작했다. 게다가 신참들이 늘어났다. 집단폭행의 여파도 여파였고, 몸이 힘든 만큼 일을 관두는 숫자도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전철의 중심 쪽으로 점점 위치를 옮겨야 했다. 갈수록 사람들은 많아지고, 밀수록 사람들은 밀려나왔다. 물론 대우가 좋아지고, 다들 나의 근성을 인정하는 분위기라 어려움은 덜했지만, 정작 어려운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물론
돈도 좋지만
아침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목격하는 일이 점점 하나의 스트레스로 변해갔다. 가까스로 문이 닫기면, 으레 유리창에 밀착된 누군가의 얼굴과 대면하기 일쑤였다. 이런 풍선을 봤나, 터질 듯 짓눌린 볼과 입술을, 또 납작해진 돼지코를 보고 처음엔 배를 잡고 웃었지만, 날이 갈수록 웃음은 사라져갔다. 좋아요, 다 좋은데 그러니까 당신이 기억하는 인류의 얼굴을 말해보란 얘기야. 화성의 누군가로부터 그런 추궁을 받는다면 나는 적잖이 고통스러울 것만 같았다. 다른 행성의 존재에게 알려주기엔, 인류의 몽따주는 얼마나 슬픈 것인가.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파아, 하아. 그래 전철만 다녀라, 은하철도 같은 건 아예 생각지도 말아야 한다. 지금 이대로의, 인류라면 말이다.
결국 또 한칸 신참에게 자리가 밀려, 나는 여덟번째 승강구를 맡게 되었다. 〈8〉. 노란색으로 박혀 있는 양각의 숫자를 내려다보다, 나는 문득 〈나의 산수〉를 떠올렸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얼핏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산수란 말 그대로 수에 불과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주었다. 유난히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이 무겁게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파아, 하아. 그리고 여전히 열차가 들어오고,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압력에 의해 튕겨나왔는데, 그런가 했는데
아버지였다.
뭐랄까, 일이 끝나면― 옷을 전부 벗어던지고 근처의 화단으로 가 꽃이라도 뜯어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아버지… 그런 말을 했는지 안했는지에 대해선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신설역까지 가야 하는 아버지를, 마치 처음 여자의 몸을 밀 때처럼, 그래서 잘못 밀고, 그래도 좀 밀었는데, 잘, 안 들어가고, 그랬다. 열차의 문이 닫혔다. 파아, 하아. 상체를 구부려 무릎에 손을 얹고, 나는 제법 숨을 몰아쉬었다. 파아, 하아. 어색한 표정으로 아버지는 어색해진 넥타이를 고쳐매고 서 계셨다. 그리고 잠깐, 넥타이를 맬 만큼의 짧은 시간이― 그러나 절대 풀리지 않을 매듭으로, 우리 둘 사이를 엮으며 지나갔다. 그것은 무척 이상한 체험이었다. 매듭의 바깥은 더없이 소란스러운데 아버지와 나 사이엔 우주의 고요, 같은 것이 고여드는 기분이었다. 고요 속에서, 그러나 눈을 못 마주치는 우리의 결계를 넘어, 또다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 부근의 어느 지붕
정말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있다. 일을 끝내고, 코치 형과 나란히 역사의 벤치에 앉아 있을 때가 특히 그랬다. 다리를 길게 뻗고 머릴 젖히면,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약간의 현기증이 일기도 하지만, 즉 그래서 아, 지구가 돌고 있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느낌이 나는 좋았다. 그래서 자주, 나는 벤치에 몸을 뉘었다. 아버지를 만난 그날도 그랬다.
승일아… 이번엔 꼭 타야 한다. 그리고 세번째 열차가 들어왔는데, 흐름이 좋지 않음을 간파한 감독이 미는 것을 도와주었다. 힘! 힘! 물론 그 화물이 나의 아버지임을 알 리도 없었지만― 너무 거침없이 머릴 누르고, 막, 등을 팔굽으로 찧고, 밀고, 그랬다. 들어, 간다. 들어, 갔다. 들릴락말락, 그리고 그 순간 아버지의 흉곽에서 어떤 미약한 소리 같은 것이 새어나오는 듯했다. 파아, 하아. 하지만 흉곽을 닫아― 열차는 자신의 폐부 속에 아버지의 소릴 가두었고, 나는 더이상 그 소리의 정체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아무튼 고작, 러시아워 전철 따위의 폐부에 갇힌 소리나 호흡, 그런 기포와도 같이― 답답하고
길고, 이상한 여름이었다. 형, 지구가 돌고 있어요. 그러냐? 뭔가 아버지에 대한 얘길 하고 싶었는데, 전혀 뜻밖의 말들만 튀어나왔다. 뭐 좀 마실래? 그리고 코치 형이 뽑아준 미린다 한잔을 마시고 그걸로 끝이었다. 그후로 제법, 자주, 나는 아버지를 보게 되었다. 서서히 서로에게 어떤 면역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어떤 면역이 생겨도 자체가 즐거울 리 없는 만남이었다. 나는 때로, 제대로 아버지를 밀어넣기도 했고, 그건 방학이 끝나갈 무렵이었고,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음료수를 뽑아마셨다. 구름은 흘러가고, 나는 목이 말랐다.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다. 방학이 끝나면서 푸시맨 생활도 끝이 났고,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2학기가 시작된 학교는 몹시도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자리가 없어, 이구동성으로 선배들은 얘기했다. 이구동성이 아니어도, 세상의 불황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자격증도 소용없고, 또 정보산업고로 개명하면 취업률이 오를 거란 예상도, 그러나 모두 루머에 불과한 것이었다. 선배들은 낙심했고, 여전히 구름은 흘러갔고, 나는 목이 말랐다. 세상은 하나의 열차다. 한 량의 정원은 180명, 그러나 실은 400명이 타야만 한다― 답답하고
길고, 이상한 여름은 끝이 났지만― 대신 길고, 이상한 가을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구월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엄마가 쓰러졌다. 상가건물의 청소일을 오랫동안 해왔는데, 과로인지 뭔지 아무튼 쓰러졌다. 다행히 곧장 병원으로 옮겨졌고, 그러나 확실한 원인이 발견된 것은 아니었고, 일단은 신경인지 어딘지가 나빠질 만큼 나빠졌다는 얘기였다. 검사를 계속해봅시다. 의사란 사람이, 그렇게 얘기했다. 검사는 계속해야만 하겠지. 의사란 사람이, 그렇게 말했으니.
병실에 들어서자, 엄마의 손을 잡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들어왔다. 엄만 어때? 대답 대신 아버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초원의 복판에서 갑자기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된 타조처럼― 멍하고, 어두운 표정이었다. 실은 그동안― 그나마 아주 잘 걸어왔다는, 아니 달려왔다는 생각이 나도 들었다. 사라질 엄마의 봉급, 여전한 할머니의 약값, 발생할 엄마의 치료비… 아버지의 눈동자가 그토록 잿빛이었단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뭐랄까, 전지가 떨어진 계산기의 꺼진 액정과 같은 그런 잿빛이었다. 이제, 계산이 안 나온다. 나도, 계산이 서질 않았다. 병원의 불 꺼진 비상계단에서, 나는 코치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학을 했던 담임은 비교적 이해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힘 내거라. 내가 잘 처리해주마. 해서 나는 1교시를 빼먹는 학생이 되었고, 덕분에 다시금 푸시맨 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다시 전인류의 물결을 감당해야 했고, 그 속에서 마치 부유하는 미역줄기와도 같은 아버지를 대면하기 일쑤였다. 맞다, 내 정신 좀 봐. 아버진 그때 점심을 어떻게 했을까? 굶은 걸까? 즉, 도시락의 무게만큼 가벼워진 아버지를 나는 밀고, 또 밀었다. 그 가을의 찬바람 속에서 내 손에 밀리던 아버지는 때로 웅크렸고, 때로 늘어졌으며, 때로 파닥이는, 그런 느낌이었다. 문득, 아침바람 찬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코치 형은 이런저런 알바 자리들을, 서슴없이 나에게 인계해주었다. 고마워 형, 나는 목각(木刻)의 기러기인형처럼 딱딱하게 고마움을 표했지만, 실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새로 전지를 갈아끼운 계산기의 액정에서, 새롭고 소소한 액수의 숫자들이 깜박깜박 빠르게 점멸하는 나날이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어느날 거울을 보다가, 그런 잿빛의 눈동자를 나는 보았다. 아버지와 색이 같은 두개의 동심원… 나는 결국 아버지의 연산이었다. 3.1415926535897… 그리고
편의점의 사장과 트러블이 있었다. 돈을 안 줘서, 그래서 달라고 했는데, 점점 수작이 떼먹자는 심산이었다. 옥신각신하던 차에 그만 밀었는데, 나도 놀랄 만큼이나 한참을 날아갔다. 되레 허릴 다쳤다는 둥, 고소를 한다는 둥 난리를 쳤는데 이 역시 코치 형이 해결해주었다. 작은 소리로 잠시 얘길 했을 뿐인데, 사장이 나오더니 돈을 주었다. 아니, 뿌렸다. 줍자. 너무나 담담한 코치 형이 없었더라면, 또 한바탕 푸시를 할 뻔했다. 액수는 맞니? 천원이 모자라요. 저기, 천원 모자랍니다. 코치 형이 크게 소리 질렀다.
이상하게 그날 아침― 나는 아버지를 아주 거칠게, 그렇게, 밀었다. 부끄럽지만, 그런 기분이었다. 아마도 땅바닥에 떨어진 돈을 한장 한장 주워서겠지, 그래서겠지. 애써 자위를 해봤자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승일아, 잠깐만… 잠깐만. 아주 잠깐, 아버지의 신음이 내 귓속을 비집고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아버지, 잘 다녀오세요.
잘 다녀온 아버지는, 그러나 그날 밤 이런저런 사정들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요는, 산수에 관한 것이었다. 점점 회사가 힘들어진다. 지금 다른 곳을 알아보고 있다. 미안한데 당분간은 함께 좀 고생을 하자. 나는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얘기했다. 미안해하던 아버지를 다음날 또 마주쳤는데― 미안한 마음에 제대로 밀지 못했다. 아버지, 잘 다녀오세요.
다릴 뻗고 고갤 젖히고, 그래서 구름이 흘러가는 걸 쳐다보며― 나는 말했다. 형, 지구는 진짜 돌고 있어요. 그러냐? 이렇게 지구가 도는 게 느껴질 땐 말이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요. 뭐가? 그러니까… 정말 우주에서… 행성 위에서 살고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런 곳에서… 왜 고작 이따위로 사는 걸까,라고요. 잠시 침묵을 지키던 코치 형이 뭐 좀 마시자,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릴 당기고 고갤 세워, 그래서 지구가 정지하고 나자, 〈얼음 없음〉을 눌러 양이 더 많은 미린다 한잔이 눈앞에 떠 있었다. 정지한 지구 위에서, 또,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까?
지금 들어온 열차가 출발하고 나자, 코치 형이 불쑥 그런 말을 뱉는 것이었다. 2교시도 빠지지 뭐, 해서 그날따라, 나 역시 벤치에 눌러앉게 되었다. 그것은 재밌다기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이야기였다. 본드를 한창 하던 때의 일이야. 여느 때처럼 끝까지 갔다,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내가 지붕 위에 떠 있는 거야. 신기한 게 아래엔 머릴 처박은 내 모습이 보이고, 그걸 바라보는 나 자신은 이상한 빛이 나는 거야. 나 지금 죽은 건가,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지. 얼마나 무서웠나 몰라.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멀리 오류동 쪽에 아는 녀석 하나가 나처럼 떠 있는 거야. 진호라고, 그놈도 맨 본드하고 거기서 놀던 앤데… 그래서 저놈도 죽은 건가? 생각을 한 거지.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다시 정신이 들고 깨어났어. 아니, 살아났다고 그때는 생각했지. 휴 하고 가슴을 쓸었는데, 정말 놀랄 일은 오후에 일어났어. 글쎄 진호 그놈이 날 찾아온 거야. 그리고 혹시 어젯밤에 본드 했냐고. 그래서 했다 했지. 그러자 공중에 떠 있는 자길 보지 않았냐고, 자긴 날 봤다고 그러는 거야. 나 참 얼마나 놀랐던지.
어쨌거나 그 일이 있고 나서, 나 완전히 딴사람이 돼버렸어. 본드도 끊고, 이유는 잘 몰라. 혹 언제라도 빠져나가, 이 부근의 어느 지붕에 떠 있으면 어쩌지? 그래서 열심히 사는 거 외엔 달리 방법이 없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고. 이 부근의 어느 지붕요? 응,
이 부근의 어느 지붕.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금성인들은 좋겠다. 그해 겨울엔 혹한이 닥쳐, 나는 늘 그런 상념에 젖고는 했다. 정보산업고의 겨울방학은 생각보다 가혹해서, 그런 상념에라도 빠지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긴긴 겨울, 여전히 나는 여러 일터를 전전했다. 이른 아침의 전철역에서 늦은밤까지의 갈빗집 주방, 또 새벽엔 세 구역의 아파트를 돌며― 신문을 돌렸다. 파아, 하아. 펴오르는 입김과 옷 속의 땀. 돌이켜보면, 부근의 어느 지붕에서 그런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금성인의, 시각 같다.
새벽의 전철은 늘 은하철도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말해도 괜찮습니까? 금성의 누군가로부터 추궁을 받는다 해도, 과연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새벽은 광활하고 캄캄했으며, 혹한의 공기는 언제나 거칠었다. 말 그대로의 천자문, 집宇 집宙, 넓을洪 거칠荒. 그리고 나는, 혼자였다. 사람들은 모두 자고 있겠지, 사람들은 모두 무사하겠지. 구일과 구로를 지나 신도림으로 이어지는 선로의 어둠속에서, 나는 늘 흔들리며 생각했다. 조금씩, 열차는 흔들렸고 조금씩, 마음도 흔들렸다. 삶은, 세상은, 언제나 흔들리는 것이었다.
무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바를 정리한 코치 형은 떴다방의 직원이 되었는데, 불과 한달 만에 사람이 달라졌다. 비록 중고지만 승용차를 구입했고, 돈의 씀씀이가 예전과 사뭇 달랐다. 우연히 길에서 만났는데, 내가 알던 코치 형과 유사한 인물이란 느낌만 간간이 들 뿐이었다. 유사한 것을 무사하다고 말할 순 없는 거니까, 즉 그런 거니까. 감독은 여전했지만, 그 역시도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들리는 말로는 결혼사기를 당했다는데, 그후 열흘이나 무단결근을 했고, 그후 다시금 출근을 했다. 본인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우리 역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은 배워야 해. 언젠가 불쑥 그런 말을 하길래― 나는 아, 네,라고 짧게 끊어 대답해주었다. 또 그런가 했더니, 갑자기 요즘 ‘칙 촉’이란 게 나왔는데 먹어봤냐? 넌 ‘오 예스’와 ‘칙 촉’ 중 어떤 게 맛있냐고 묻길래― 아, 예예. 그리고
그 겨울의 어느날이었다.
아버지가 사라졌다.
정말로 사라진 것이었다. 어떤 조짐도 보이지 않았고, 어떤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엔 사고가 아닌가 해서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사고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행적에 대해 말해줄 수 있습니까?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나였으므로, 당연히 나는 그에 대해 할 말이 있었다. 그날 아침 전철역에서 만났습니다. 전철역에서요? 네, 아버지는 출근을 하는 길이었고, 저는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종종 만나는 편인데, 늘 그랬듯 그날도 역시 아버지를 밀어드렸습니다. 뭐 특이한 점은 없었나요? 글쎄요… 그러고 보니 ‘잠깐만, 다음 걸 타자’ 하고 몸을 한번 뺐습니다. 그런 적은 처음이었나요? 네, 아마도.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힘드신가보다,라고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열차에 태워보냈습니다. 순순히 타시던가요? 그런,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회사에도 가지 않았고, 집으로도 오지 않았다. 말 그대로의, 실종. 경찰은 요즘 그런 사람들이 꽤 있다는 말로 나를 위로했지만, 그런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해서 위로가 될 리 없었다. 그후의 기억은… 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의 회사를 상대로 밀렸던 두달치 임금을 받아냈고, 이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고, 이런저런 서류를 마련해 할머니를 관인 ‘사랑의 집’에 보내고, 이 또한 정말 까다롭고 힘든 일이었으며, 경찰서와 병원을 꾸준히 오고, 가고, 또 여전히 일을 했다, 해야만 했다. 때로 새벽의 전철에 지친 몸을 실으면, 그래서 나는― 어둠속의 누군가에게 몸을 떠밀리는 기분이었다. 밀지 마, 그만 밀라니까. 왜 세상은 온통 ‘푸시’인가. 왜 세상엔 〈풀맨〉이 없는 것인가. 그리고 왜, 이 열차는
삶은, 세상은, 언제나 흔들리는가. 그렇게
흔들리던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봄은 금성인과 화성인이 모두 부러워할 만큼이나 근사한 계절이었다. 끝내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대신 어머니의 의식이 기적처럼 돌아왔다. 의식이 돌아왔다는 사실보다도, 퇴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뻐 나는 울었다. 글쎄 그 정도의 서러운 이유라면, 누구나 눈물이 나오지 않았을까? 이제 재활치료만 받으면 됩니다. 의사란 사람이, 그렇게 얘기했다. 재활치료만 받으면 되는 거겠지. 의사란 사람이, 그렇게 말했으니.
그렇게 우리집은 다시금 숨을 트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라졌지만 할머니란 짐을 덜게 된 까닭으로, 또 엄마가 스스로 자신의 병원비를 번 까닭으로― 그대로, 그렇게. 근처의 지붕에서 지켜본다면, 아마도 그것은 잔디의 작은 싹이 움을 튼 모습과 비슷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살아, 있다. 무사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유사한 산수를 할 수 있단 것은 얼마나 큰 삶의 축복인가. 사라지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말이다.
봄이 얼마쯤 완연한 날이었을까. 일을 마친 나는 잠깐 역사의 벤치에서 졸다가― 깊고, 완연한 잠을 자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목이 말랐다. 여느때처럼 미린다 한잔을 마시고 나자, 탄산수처럼 쏘는 느낌의 봄볕이 피부를 찔러왔다. 당연히 〈얼음 없음〉인 봄볕 속에는, 그래서 그만큼의 온기가 더 스며 있었다. 아아, 마치 기지개처럼 나는 다릴 뻗고 고갤 젖혔다. 여전히 구름은 흘러가고 지구는 돌고,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는데― 건너편 플랫폼의 지붕 부근에 떠 있는 이상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것은 설마
기린이 아닌가. 그것은 정말 한마리의 기린이었다. 기린은 단정한 차림새의 양복을 입고, 플랫폼의 이곳저곳을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오전의 역사는 한가했고, 아무리 한가해도 그렇지―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지 뭐,의 표정으로 그닥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거야 원, 누군가 한 사람은 긴장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으로 나는 기린을 예의, 주시했다. 끄덕끄덕 머리를 흔들며 걷던 기린이 코너 근처의 벤치 앞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앉았다. 그것은 그리고, 앉았다,라고 해야 할 만큼이나 분리되고, 모션이 큰 동작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는 기린이 아버지란 생각을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런 확신이 들었다. 나는 이미 통로를 뛰어가고 있었다. 사라지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다행히 기린은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주저주저 그 곁으로 다가간 나는, 주저주저 기린의 곁에 조심스레 앉았다. 막상 앉으니― 기린은 앉은키가 엄청났고, 전체적으로 다소곳하고 무신경한 느낌이었다. 기린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데, 나는 혼자 울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눈물이 나오는 것이었다. 아버지… 곧장 나는 가슴속의 말을 꺼냈고, 기린의 무릎 위에 내 손을 올려놓았다. 떨리는 손바닥을 통해, 손으로 밀어본 사람만이 기억하는 양복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져왔다. 구름의 그림자가 빠르게 지나갔다. 기린은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버지, 아버지 맞죠?
어떻게 된 거예요? 기린의 무릎을 흔들던 나는, 결국 반응을 포기하고 이런저런 집안의 근황을 들려주었다. 할머니의 소식과 어머니의 회복, 그리고 나는 부동산 일을 배울 수도 있다, 선배가 자꾸 함께 일을 하자고 한다, 자리가, 자리가 있다고 한다, 경제도 차차 좋아질 거라고 한다, 무디슨가 어디서 우리의 신용등급이 또 한 계단 올라섰대요, 좋아졌어요. 그러니 돌아오세요. 이제 걱정 안하셔도 된다니까요. 구름의 그림자가 또 빠르게 지나갔다. 아버지, 그럼 한마디만 해주세요, 네? 아버지 맞죠? 그것만 얘기해줘요.
무관심한, 그러나 잿빛의 눈동자가 이윽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기린은 자신의 앞발을 내 손위에 포개더니, 천천히, 이렇게 얘기했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