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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민족문학론과 90년대 이후의 한국소설
‘창비 비평’의 활성화를 기대하며
김명인 金明仁
문학평론가. 평론집 『희망의 문학』 『불을 찾아서』 등이 있음. CRITIKIM@chollian.net
1. 창비의 ‘문학’ 특집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에서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라는 제목으로 오랜만에 문학특집을 기획했다. ‘오랜만’이라는 말에서 어폐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근래에 들어서 대략 한해에 한번 정도 문학특집을 했기 때문에 ‘아주 오랜만’이라고는 할 수 없겠죠”(이 특집의 ‘편집자 대담’에서 임규찬이 한 말)라는 응답이 바로 따라나온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감 아니겠는가. 여기서 ‘오랜만’이라는 말 속에는 그 나름의 속내가 들어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를테면 ‘창비다운’이라거나 ‘본격적인’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비록 창비가 1년에 한번꼴로 문학특집을 기획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창비의’ 문학특집으로 간주하기 힘들었다는 뜻이 된다.
2003년 봄호(119호)의 ‘지구시대 한국문학의 안과 밖’, 2001년 겨울호(114호)의 ‘한국문학의 오늘, 민족문학의 새로운 구도’, 2000년 겨울호(110호)의 ‘21세기 문학의 향방’, 1999년 가을호(105호)의 ‘근대극복의 언어를 찾아서’ 등 큼지막한 제목들로 문학특집이 이루어졌지만 그 특집들이 2000년대 초반의 한국문학의 실상을 제대로 포착하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창비식’의 관습적 고담준론으로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더 많이 주었음을 어쩔 수 없다. 그 속에는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 지구화시대의 한국문학에 대한 고민, 이산(離散)문학에 대한 관심 등 나름대로 ‘창비’의 모색들이 반영되어 있기는 하지만 좋은 의미로건 나쁜 의미로건 1970년대와 80년대에 창비가 보여준 어떤 강력한 구심력이 느껴지지 않고 대신 변해가는 세상의 뒤꿈치를 간신히 쫓아가는 피로한 공룡의 뒷모습만이 어른거리는 형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번 특집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이전의 가장 가까운 기간 내에 ‘창비다운’ 문학특집의 마지막 모습이라면 만 5년 전의 1999년 여름호(104호) 특집 ‘세기의 갈림길에 선 우리 문학:90년대 비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최원식의 「문학의 귀환」, 이영진의 「90년대라는 가설, 황무지를 구원하는 견딤의 미학」, 신승엽의 「벗어날 수 없는 일탈, 머무를 수 없는 定住」, 윤지관의 「90년대 정신분석」 등 총론·시론·소설론·비평론 등의 꽉 짜인 구성으로 역사로부터 탈주하는 90년대 문학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감행한 이 특집은 80년대 이전 세대의 90년대 문학에 대한 본격적 문제제기로서 그 역사적 의미가 적지 않은 것이었다. 나도 이 특집을 읽고 이제 본격적으로 80년대와 90년대의 생산적 대화를 위한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기뻐했던 기억이 새롭다. 물론 이 특집의 예각적인 문제제기는 이미 그때부터 논쟁적 긴장 자체를 버거워하는 90년대 후반의 연질화될 대로 연질화된 문학풍토의 늪 속으로 실종되어버렸지만, 그 기획 자체는 창간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전통의 계간지 『창작과비평』의 여전한 건재를 알리는 모처럼의 귀중한 징표였다고 할 수 있다.
그후 5년, 다시 문학담론의 중심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창비 편집진의 고심의 결과로서 제출된 기획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는 편집인부터 편집자문위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7명의 창비 사람이 ‘올인’하다시피 참여한 90년대 문학에 대한 또 한번의 대응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5년 전의 특집이 ‘싸움걸기’쪽에 가까웠다면 이번 특집은 ‘말걸기’ 혹은 ‘이해하기’에 가깝다는 차이가 있다. 과연 그 ‘말걸기’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가. 여전히 7,80년대 민족문학론의 아성으로서의 지위를 자의건 타의건 포기하지 않고 있는 창비는 한사코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원심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90년대 이후의 문학에 대해서 이제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일까. 혹은 건네고 싶은 것일까.
하긴 1999년의 비판적 싸움걸기에도 불구하고 창비는 이미 90년대적인 것들과 깊이 ‘내통’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1990년부터 『소설 동의보감』을 1백만부 이상 찍어내면서 창비는 어쩔 수 없이 90년대적인 것들과 한배를 탈 수밖에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소설 동의보감』의 ‘문학사적’ 의미에 관해서는 이번 특집의 필자 중 한 사람인 최원식(崔元植)의 언급이 있지만,1 그러한 문학사적 의의는 그대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소설 동의보감』의 의도하지 않았던 베스트쎌러화는 소설이 백만부짜리 베스트쎌러가 되는 시대, 즉 90년대 특유의 현상인 문학작품의 히트상품화 추세를 열어젖힌 것이었다.
이로써 창비는 그 ‘환멸의 90년대’에 대한민국의 주요 문학출판자본의 하나로 떠오르면서 90년대 문학시장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은희경 신경숙 하성란 김영하 성석제 등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소설계의 총아들은 문학과지성사나 문학동네만이 아니라 창비에서도 번갈아가며 장편소설이나 작품집을 내게 되는데 이는 7,80년대와는 현저하게 구별되는 현상으로서, 이를 종래 ‘민중적 민족문학’이라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여 발간작품을 준별하던 창비가 그 엄격성을 대폭 완화한 결과라고 하면 과언이 될까.
물론 이것을 상업주의와의 타협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는 상대적으로 ‘민중적 민족문학’작품 생산의 장기침체라는 요인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고, 앞서 거론된 작가들의 탈이념성은 90년대의 지배적 경향성의 노정일 뿐 그들의 작가적 역량 자체가 함량미달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제는 ‘창비 비평’에 있다. ‘민중적 민족문학’이 90년대 이후 이러저러한 모색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자기갱신을 하지 못함으로 해서 마치 7,80년대 진보적 문학이념의 기지라고 할 수 있는 창비가 90년대 문학을 무원칙적으로 수용한 것과 같은 결과를 낳은 것이다. 왜 은희경이고 왜 신경숙이고 왜 김영하인가를 ‘창비 비평’이 시원스럽게 해명해주지 못한다면 창비의 이런 곤혹스러움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과연 이 특집을 계기로 해서 창비는 90년대 이후와의 편의적 내통이라는 혐의(?)를 벗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최소한 창비 나름대로 90년대 이후를 수용하는 내적 논리를 계발해내고 있는가. 이 특집을 읽기 전, 나는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이 글은 이러한 관점에서 특집에 참여한 창비 진영의 비평가들의 글들을 따라가면서 궁금증도 풀고 공부도 하면서 일면 동업자적 차원에서의 잔소리도 곁들이는 정도로 읽혀지면 좋을 듯하다. 창비의 청탁의도도 이런저런 잔소리와, 경우에 따라서는 따끔한 쓴소리도 다 경청하면서 창비 나름의 당대 문학에 대한 담론의 물꼬를 터 나가겠다는 각오와 의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기에 할말을 아끼지 않을 작정이다.
2. 특집 기획의 문제점
이 특집엔 특이하게도 앞머리에 「왜 이 작가들인가」라는 제목으로 ‘편집자 대담’이라는 것이 실려 있다. 통상적인 경우라면 특집의 기획의도는 ‘책머리에’를 얼마간 할애해서 밝히는데 이렇게 따로 대담을 실어야 했다는 것은 좋게 보면 이 기획에 그만큼 공을 많이 들였다는 것이 되고, 나쁘게 보면 이 기획에는 필자들의 글을 그대로 싣는 것만으로는 무언가 성에 차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창비의 ‘편집위원’인 임규찬(林奎燦)과 ‘자문위원’인 진정석(陳正石)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는 흥미롭다.
진정석이 이번 특집을 두고 “2003년 봄호 이래 꽤 오랜만에 다시 맞이하는 문학특집”이라고 하자, 임규찬이 그런 말 속에는 “‘창비가 문학을 소홀히 한다’는 평소의 무의식적인 생각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런 것 아니냐고 받는다. 다시 진정석이 “‘창비 문학란에는 대체로 과감한 모험, 문학적 투기(投企)라고 할 만한 태도가 부족하지 않은가”라고 하자, 임규찬은 “정말 창비는 놓쳐서는 안될 어떤 문학적 흐름과 작가들로부터 뒤떨어져 있는 느림보인가” 하고 반문한다. 또 진정석이 지난 10년간은 ‘뛰어난 군소작가들의 시대’였다고나 할까보다고 하니까 임규찬은 아무래도 ‘뛰어난’ 보다는 ‘군소’라는 말에 더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고 아퀴를 짓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러한 약간의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금이 한국 소설의)“일정한 유형별·주제별 범주화를 손쉽게 허용치 않는 상황”(임규찬)이기 때문에 아직은 “개별적인 작품성과에 대한 분석작업”(임규찬), 혹은 “작품에 대한 분석적 읽기”(진정석)가 절실하다는 데에 동의하고 ‘분석적 읽기’를 이 특집의 기본성격으로 잡았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까지가 두 사람의 대담에서 이 특집의 기획의도와 관련된 부분이다. 정리를 해보자. 창비가 그동안 당대의 작품들을 성실히 읽고 비평하는 노력에 좀 소홀했다, 거기에는 그만큼 좋은 텍스트가 산출되지 못한 저간의 사정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읽는 노력은 필요하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당대 작품(작가)의 분석적 읽기 특집을 마련한 것이다. 대강 이렇게 알아들으면 될지 모르겠다. 이런 이해가 틀린 것이 아니라면 이번 창비 특집은 그 이벤트적 성격이나 규모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단 자세히 읽고 보자’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된다. 따라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괄호 속에 들어 있고 그것은 필자로 참여한 ‘창비식구’들 각자의 몫이 된다. 창비의 오랜만의 문학특집, 문학관련 편집·자문위원들이 거의 ‘올인’하다시피 한 특집으로는 왠지 허전하다.
한 차례의 특집으로 90년대 이후 문학의 모든 것을 다 쓸어담을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다. 하지만 대상작가 선별방식과 그 결과는 아무리 생각해도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최종적으로 배수아 김영하 천운영 공선옥 성석제 김연수 이만교 정이현 등 8명으로 압축되었는데, 이렇게 해서는 이 특집의 목표로 내세운 ‘문학위기론’의 내용을 검증하는 일도, 우리 소설의 새로운 경향성을 짚어보는 일도 그다지 신통하게 잘될 것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90년대 이후 소설에 대한 총론이 없다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 문제이다. 이른바 ‘문학위기론’으로만 한정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이며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90년대 이후 문학의 어떠한 특성이 그러한 논의를 낳았는지 하는 최소한의 문제제기가 (굳이 민족문학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도) 있어야 했으며, 90년대 이후 소설문학의 실상에 대한 개관과 여러 경향성과 관련한 작가별 분류가 (정밀하게는 아니더라도) 있어야 했다. 이러한 성격의 총론이 왜 고려되지 않았을까. 두 사람의 대담에는 총론이 왜 씌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데 대한 설명도 없고, 그렇다고 총론을 대신할 만한 언급도 없다. 무엇보다 정론성이 강한 문학계간지인 창비로서 이 부분은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또한 90년대 이후 등단한 작가로서 최근 5년간 문제작을 산출한 작가라는 기준도 문제다. 하나의 역동적 전체로서의 90년대 이후 문학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기준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기계적이며 편의주의적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대담자들도 밝혔지만 은희경과 신경숙을 제외하고 90년대 이후의 문학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 아닌가. 그리고 1990년에 등단한 윤대녕이 아무런 언급도 없이 제외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90년대 이후의 여성주의적 가족 모럴과 관련하여 전경린과 권지예, 서하진 등이 누락된 것도 그렇고, 비록 80년대 등단작가들이라 할지라도 넓은 의미의 ‘후일담’의 세계를 감당하면서 90년대의 한 축을 담당해온 최인석과 방현석, 정도상, 공지영, 김인숙이 제외된 것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아쉬움을 확장하면 90년대에 의연하게 귀환한 황석영과, 또다른 의미에서 뒤늦게 창작열을 불태우고 있는 박범신과 김훈 그리고 최윤이 빠진 것도 그렇다. 이름은 거론이 되었으나 막판에 빠져버린 하성란, 백민석, 박민규, 정영문, 조경란, 한강 등의 자리도 작지 않다.
이렇게 누구누구는 왜 빠졌냐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또 하나의 자의성을 드러내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자의성이나 기계성을 극복하고 대상세계를 입체화해주는 것이 바로 90년대 이후 소설사를 바라보는 ‘관점’일 것이다. 나는 ‘창비 비평’에 바로 그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어느 글에서 나는 “‘민족문학론’과 관련하여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90년대의, 나아가 이천년대 초반의 우리 삶의 실감과 그것 속에서 생산되어 나오는 작품들이 형성하는 어떤 미지의 전체성의 본질에 대한 탐구의 과정에서 그 ‘민족문학론’과의 창조적 긴장과 비판적 관심을 유지하는 일일 것이다”라고 쓴 적이 있다.2 이런 의미에서라면 바로 이 특집이 그런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인데 과연 이 특집에는 작품들과 ‘민족문학론’ 간의 창조적 긴장이 유지되어 있는가, 혹은 처음부터 그 긴장을 염두에 두기는 했던 것인가 하는 회의적인 생각을 떨칠 수 없다.
90년대 이후의 문학은 분명히 80년대적인 것, 혹은 ‘민중적 민족문학’의 자장으로부터 대규모의 탈주를 시도한 문학이다. 그 탈주는 한편으로는 일상성의 세계를 향해 이루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면성의 세계를 향해 이루어지며 때로 그 두 경향은 혼재하거나 중첩된다. 일상성의 세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부부의 문제를 포함해서) 가족의 해체에 관한 것이며 내면성의 세계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도시적 삶, 혹은 포스트모던한 생활조건 속에서의 개별자의 정체성의 문제, 좀더 고전적인 표현을 허락한다면 이른바 ‘소외’의 문제이다. 물론 두 세계에서 모두 역사나 사회 등 전체성에 대한 긴장이나 감각은 원경화되거나 아예 소멸되어버린다. 반면 역사나 사회에 대한 감각, 혹은 80년대적인 것의 그늘이 지속되는 세계도 있다. 하지만 그 세계 역시 80년대적 생동성, 혹은 조증(躁症)상태에서 멀리 비켜나 일상과 내면의 영역 속으로, 울증(鬱症) 상태 속으로 자폐해 들어간다. 그도 저도 아니고 소설이 ‘근대 부르주아 세계의 아이러니컬한 탐색의 양식’이라는 규정을 벗어던지고 소설적 서사의 세계를 다시 구성하려는 시도도 있다. 또한 2000년대도 중반으로 치닫고 있는 요즈음에는 90년대적‘탈주’나 ‘귀환’의 감각조차 낯선,무중력상태(?)의 신세대 인간들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매우 조잡하고 생뚱맞게 보이겠지만 이것이 내가 90년대 이후의 문학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은희경이 열어젖히고 전경린이 세속화시킨 일상성의 세계, 윤대녕과 신경숙이 개척한 내면성의 세계, 공지영이나 방현석이 지켜온 후일담의 세계, 성석제와 김영하, 혹은 김연수에게서 보이는 탈낭만적 서사의 세계, 요즈음 이를테면 『피터팬 죽이기』의 이주희, 『어느덧 일주일』의 전수찬 등 최신예들의 무중력의 세계, 그리고 공선옥, 한창훈, 전성태 등이 견지하고 있는 자연주의적 민중탐구의 세계 등이 가능한 분류항으로 떠오를 수 있다. 나는 이런 나의 관점이나 분류항목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창비 비평’에서 이와 같은 최소한의 거친 관점이라도 발견되기를 기대한 것이다. 그리하여 창비 비평진들이 이러한 분류의 세목들을 나누어 그 세목의 대표작가들을 한 사람씩 맡든지, 아니면 몇 작가씩을 모투어 주제비평을 시도하든지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인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기대는 전부 난망이 되어버렸으므로 이제 내가 할 일은 각기 다른 일곱 비평가가 각기 다른 작가(들)에 대해 시도한 ‘분석적 읽기’를 따라가면서 그 속에서 어떻게든 ‘창비적 정체성’을 추출해보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어려운 대로 이 일곱 편의 평론을 두 묶음으로 나누어보았다. 최원식, 임규찬, 한기욱(韓基煜)의 세 평론이 먼저 한 덩어리로 묶이는데, 이 글들에는 ‘창비적 정체성’의 흔적, 혹은 그것을 견지하려는 흔적이 짙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는 백낙청(白樂晴), 김영희(金英姬), 진정석 등의 세 평론이 묶이는데,3이 글들에는 좋은 의미로건 나쁜 의미로건 거의 ‘창비의 무게’가 실려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3. 창비적 정체성의 흔적들
아마도 창비 비평가들 중에서 90년대의 중심을 제대로 꿰뚫고 나오면서도 또 가장 90년대적인 것들의 영향을 덜 받은 비평가는 최원식일 것이다. 이번 특집의 글 「남과 북의 새로운 역사감각들」 역시 최근의 문학적 현상들을 그 내적 논리에 따라 섭수(攝受)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민족문학적 맥락에 위치짓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답다. 그는 김영하의 장편역사소설 『검은 꽃』과 재북 작가 홍석중의 장편역사소설 『황진이』를 함께 놓고 이 작품들을 하위자들의 반란이라는 최근 역사소설의 경향성을 남북한에서 공유하고 있는 사례로 놓고 이를 분단극복의 비전 속에서 아우르고 있다. 이러한 시각과 방법이야말로 좋은 의미에서의 ‘창비적인 것’ 아니겠는가.
최원식의 『검은 꽃』 읽기는 재미있다. 이 소설이 민족서사시를 꿈꾸지 않는다거나 루카치의 역사소설 모형에서 벗어나 ‘집합적 자서전’의 형식으로 씌어졌다거나 이야기의 선형성이 파괴된 “휘우뚱한 바로끄적 구성”(53면)으로 되어 있으며 그럼으로써 “리얼리즘 서사와 모더니즘 서사를 횡단”(54면)하고 있다는 등의 해석과 역사적 실증에서의 오류를 짚어내는 비판들은 명쾌하고도 정당하다. 하지만 이러한 반역사소설적 특징들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정사(正史)에서 침묵당한 소문자 역사의 파국을 드러냄으로써 거꾸로 역사의 꿈을 강렬히 환기”한다거나 “역사허무주의를 선전하는 것은 결코 아니”(같은 곳)라거나 “나라의 꿈을 강렬히 환기”(59면)한다거나 하는 최종적 평가에는 나로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다.
우선 적어도 작가 김영하가 이 소설을 통해 근대적 민족국가에의 꿈을 환기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이 소설에서 의도적으로 국가건설에의 꿈이 한갓 미망임을 되풀이하여 확인한다. 최원식의 말대로 이 소설에는 일관되게 ‘나라’의 존재가 화두로 따라다니지만 그 ‘나라’는 궁극적으로 늘 희화화되고 만다. 그가 왕가의 후예 이연수의 황폐한 노년의 후일담에 방점을 찍어 그녀의 삶이야말로 나라의 꿈을 강렬히 환기시키는 아픈 초상이라고 했지만, 그렇다면 예를 들어 이연수가 ‘살기 위해’ 에네켄 농장의 한국인 마름 권용준에게 몸을 허락한 후에 방귀를 뀌며 해방감을 느끼는, 그 웃을 수도 엄숙할 수도 없는 장면4의 설정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 ‘방귀’ 속에서 과거의 국가든 미래의 국가든 모두 연기처럼 녹아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이정 일행이 과떼말라의 밀림에서 ‘신대한’을 건설하려다 전멸하는 이야기 역시 ‘나라의 꿈’을 환기시키기에는 너무나 허망하고 또 희화적이다. 김영하는 분명히 근대적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한국 근대사의 꿈을 희롱하는 포스트모던 역사소설을 기획하고 실천한 것이다.
최원식은 작가의 그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반(反)오뒤쎄이아적 탈향의 서사를 통해서 오뒤쎄이아에 대한 강한 향수를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역설”(같은 곳)이 일어났다고 본 모양이다. 말하자면 ‘리얼리즘의 승리’와 유사한 형국이다. 즉 작가 김영하의 포스트모더니즘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인물들과 사건들의 논리는 어쩔 수 없이 근대적 민족국가 건설의 비원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일면 이해가 되면서도 어느정도 견강부회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 필연과 인과의 서사를 가볍게 농단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김영하라는 작가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오히려 나는 이 작품을 서사충동과 반서사충동이 갈등하면서 실패한 텍스트로 읽는 쪽이다. 집합적 주인공이건 개인적 주인공이건 역사적 사실을 제재로 한 역사소설은 그 구조상 선형적 서사를 기본으로 하며 궁극적으로 로맨티씨즘을 생명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역사소설의 맥락 속에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선형적 서사성을 배제하려고 할 경우 필연적으로 서사체계의 불균형과 파탄이 오게 마련이다. 김영하가 그것까지 노렸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 때문에 이 소설은 역사소설로서도 실패하고 역사를 부정하는 데도 실패했다고 본다. 바로 거기서 최원식의 오해, 혹은 약간의 과잉평가가 나올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민족문학의 관점에서 근래의 하위자 주체 역사서사의 대두를 파악하고 그 맥락에서 『검은 꽃』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여 이를 새로운 민족문학적 자산의 일부로 수용하려는 의도는 이해되지만, 김영하를 비롯한 90년대 작가군의 영악한 탈주전략에 대해서 아직은 적절한 비판적 유보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임규찬의 「공선옥 문학은 어느만큼 와 있는가」에 대해서는 별달리 할 말이 없다. 공선옥의 『수수밭으로 오세요』가 지닌 극단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모성 본질주의를 올바로 지적하면서 이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외롭고 힘겹게 가난한 존재들의 몸부림치는 삶을 그려나가는 공선옥에게 애정어린 비판과 충고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만일 임규찬의 자리에 내가 섰다면 그가 ‘본질주의’라고 비판한 공선옥의 바로 그 ‘억척어멈’적인 모성적 전망이 상층계급 남성―상층계급 여성―하층계급 남성―하층계급 여성으로 위계화되어 있는 자본주의사회의 빈곤과 억압의 먹이사슬에서 갖는 의미를 조금 더 부감했을 터이고 그런 점에서 『수수밭으로 오세요』가 갖는 의미를 동시대 다른 여성작가들의 작품들과의 대비를 통해 좀더 적극적으로 평가했을 것이다. 또한 공선옥의 최근작들인 「영희는 언제 우는가」나 「연민」 같은 작품들에서 나타난 나락에 떨어진 존재들의 도저한 슬픔의 세계에 더욱더 강한 연대의 손길을 보낼 것이다. 어차피 잘나가는 작가들은 시장이 알아서 부풀려줄 것이지만 공선옥 같은 귀중한 작가들조차 시장논리에 내맡겨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게 ‘창비 비평’이 하는 일 중의 하나 아닐까.
한기욱의 김연수론 「형식실험의 역설」 역시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김연수의 전작품에 대한 면밀한 독서를 바탕으로 씌어진 주밀한 비평으로서 자세히, 제대로 읽기의 전범을 보여준 좋은 글이었다. 한기욱은 김연수의 독특한 세대의식에 주목함으로써 그의 작품세계의 양상과 변모의 비밀을 풀어내고 있다. 즉 “90년대를 살아가는 자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고 90년대가 오기 전에 죽은 자들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들이다”라는 그의 작품 속 화자를 통한 진술에 기대서 김연수의 작품세계가 텍스트에서 ‘세계’를 추방하는 데서 출발했지만 근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서 다시 ‘세계’를 끌어들이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는 이유를 추적하는 것이다.
80년대와 90년대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김연수의 세대적 특성이 그를 세계 없는 텍스트와 텍스트 밖의 세계 사이에서 방황(?)하게 한다는 평가는 대단히 날카로운 것이며, 이른바 ‘90년대 세대’의 문학적 취향을 가늠하는 훌륭한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90년대 작가들의 90년대 안에 들어 있는 80년대적인 것의 탐사는 마치 만리장성이라도 가로놓여 있는 것처럼 되어 있는 두 세대 사이의 대화와 소통을 위한 중요한 바탕작업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기욱은 외국문학 전공자답게 김연수 소설의 곳곳에 들어 있는 브로티건, 하루끼, 보르헤스, 에꼬, 핀천, 반즈 등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러한 영향관계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덧붙임으로써 우리의 90년대 문학들이 일종의 ‘세계적 현상’의 하나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줌으로써 좋은 평문을 읽는 재미를 배가시키고 있다.
다만 끝부분에 김연수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를 관류하는 “실감과 훈훈함은 값진 성취임에 틀림없지만 혹시 이것이 우리 삶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실험적인 도전과 모험을 저당잡히고 획득한 산물이 아닐까 하는 일말의 의구심이 생긴다”(117면)고 한 부분에서 과연 “우리 삶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실험적인 도전과 모험”이란 무엇을 말하는지, 만일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를 리얼리즘 예술에 가깝다고 한 것에 비추어 그 실감과 훈훈함을 낳은 리얼리즘이 그 ‘실험적인 도전과 모험’과는 어떤 관계에 놓인 것인지에 대한 모색과 해명이야말로 창비가, 아니 창비뿐만 아니라 우리 비평계가 시급히 도전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4. 자세히 읽는다는 것
『창작과비평』 편집인인 백낙청의 글에서 창비다운 체취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일견 기이한 일이다. 배수아의 경장편 『에세이스트의 책상』에 대한 자세히 읽기라고 할 수 있는 이 글은 특집 편집자들의 주문에 제대로 충실하여 마치 ‘자세히 읽기’란 이런 것임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세밀하고 차근차근하다.1장에서는 이 소설의 제목과 작가의 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에쎄이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이 소설이 “지식인의 사변적 언어를 작중인물의 실감나는 진술이자 이야기 진행의 유기적 요소로 포용했다는 점만으로도 한국소설에 흔치 않은 성취”(30~31면)라고 운을 뗀다. 2장에서는 언뜻 서사적 이음새가 흐트러진 듯한 이 작품이 “줄거리가 없기는커녕 거의 교활하다 싶을 정도로 치밀한 운산과 정교한 복선을 깔고 (…) 펼쳐지는 서사”(34면)라는 점을 자세히 입증하고 이 글의 번역투 문체 역시 작가의 의도된 장치라는 점 또한 언급한다. 3장에서는 이 소설의 화자와 함께 가장 주요한 인물인 M에 관한 언급으로 채워진다. M과의 만남과 관련된 서사의 줄기, M의 성별 혹은 성적 정체성에 대한 의문,5 M과 화자의 정신주의적 교감 등을 언급한 후 이와 관련하여 이 소설의 주된 성과로 “육체적인 관계를 초월한 어떤 절대의 세계에 대한 에쎄이스트적 탐구, 이를 위한 ‘고립된 삶’의 예찬 내지 그 비극성의 증언, 그리고 고립을 견디지 못하는 군중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발언”(42면) 등이 거론된다. 그 다음 4장에서는 이 소설이 단순히 정신주의적 사변으로만 된 작품이 아니라 “정신주의에 대한 소설적 교정장치를 풍부하게 내장하고”(같은 곳) 있음을 밝힌다. 에리히와 M의 관계에 대한 화자의 질투라든가 요아힘이라는 인물의 진술을 통해 은연중에 정신주의에 대한 인간육체의 ‘실제적인 위력’을 드러낸다거나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백낙청은 이런 ‘소설적 교정장치’가 바로 이 소설을 정신주의적 에쎄이가 아니라 소설로 존재하게 한다고 보지만, 그것이 충분치는 않다고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 대하여 “화자의 시야와 자기인식에 어떤 본질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할 경우에는 그 문제점의 개인적·사회적 뿌리를 규명하려는 자세가 바람직”한데 『에세이스트의 책상』에서는 그 규명보다는 “새로운 신비화와 도취의 언어가 시야를 가려버리곤 한다”(46면)고 진단하고 “책상에 대한 다분히 낯익은 집착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도 한결 폭넓고 예리한 소설적 탐사가 이루어지기를 주문하고 싶어진다”(47면)는 완곡한 부탁으로 이 자세히 읽기를 끝맺는다.
아닌게아니라 한편의 길지 않은 경장편에 대해서 이만큼 자세히 읽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작품론을 자주 쓰지 않는, 혹은 못하는 데서 오는 부담감6을 이참에 떨쳐버리기라도 하려는 듯한 ‘몰아치기’의 형국이다. 그리고 그런만큼 배수아의 이 작품은 좀 과람(過濫)한 대접을 받은 폭도 된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남는다.글 말미에 사족같이 붙은 부분, “문제점의 개인적·사회적 뿌리를 규명하려는 자세가 바람직”하다거나 “책상에 대한 다분히 낯익은 집착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 예리한 소설적 탐사”를 당부한다거나 하는 부분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세히 읽기는 자세히 읽기대로 하면서 대상 작품의 주제며 양식이며 세계관이며 이런 것들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뿌리를 석명(釋明)하는 것, 그리고 “책상에 대한 다소 낯익은 집착”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발생론적 해명을 미루지 않는 것이 정당한 의미에서의 자세히 읽기로서의 비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읽으면서, 나는 그동안 배수아를 그저 90년대의 키치작가 중의 하나 정도로 여겨온 종래의 선입견을 교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에게 이런 속깊은 작가적 고독감이 존재했던가 하는 생각, 그리고 백낙청의 말대로 이 작품이 지식인의 사변적 언어를 유려하게 다룬 소설적 전통이 일천한 한국소설사에서 하나의 성취라고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변의 내용과 유래, 즉 “책상에 대한 다분히 낯익은 집착”의 유래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 소설은 사랑의 시작과 끝을 기록한 한편의 사랑 이야기의 틀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그 사랑을 가능하게 한 두 사람의 내면적 동력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 동력은 그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운명적 끌림이 아니라 일종의 ‘귀족적 정신주의’ 혹은 ‘정신적 귀족주의’라고 불릴 만한 세계관 상의 합치에서 얻어진다. 세상은 속물들과 불의로 가득 차 있고 학교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으며 오직 언어로 된 책(혹은 책을 읽고 책을 만드는 책상)과 음악만이 절대의 것들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이 소설의 화자도 그녀의 연인 M도 생활은 최소한으로 하고 독서와 음악감상과 글쓰기는 최대한으로 한다. 세상은 그저 불의하고 속물들로 가득 차 있을 뿐, 결국 무(無)와 마찬가지이다. 독일이라는 공간은 화자에게는 단지 여행지가 아니라 책이나 책상, 음악처럼 그런 세속과의 절연을 가능하게 해주는 절대공간의 다른 이름이다. 역사니 사회니 국가니 하는 것들은 물론이거니와 가족과 인간관계로부터도 탈주하여 달려가 이른 곳이 독일이고 음악이고 M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작품은 90년대적 탈주서사의 한 극점이라고 할 만하다. 자, 이 작품은 과연 ‘분단시대 민족문학’의 깊이와 넓이 안에 포괄될 수 있는 것일까. 백낙청의 이 글은 바로 이 점을 좀더 분명히 해주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아쉬움 때문에 이 글에서의 창비적 체취의 부재를 들추어 말한 것이다.
김영희의 「천운영을 읽는 한가지 방식」도 좋은 글이다. 이 글은 천운영이라는 작가의 돌올한 개성이 그녀 특유의 창작방법, 즉 “객관성과 주관성을 각각 극대화하면서 결합하는 듯한”(69~70면) 세밀묘사에서 대부분 기원한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세목에 대한 집중”과 그 “세목들을 전체적인 의미체계 속에 끌어들이는 작가의 장악력”이 두드러짐으로 해서 일종의 “양식화”에 가까워지는 특징을 갖는다고 본다(73면). 이 점은 천운영의 놀랄 만큼 생생한 묘사가 사실주의적 기율에 의한 것 같으면서도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부분에 대한 탁월한 해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정당하게도 “사실에의 추구와 양식성의 양립이 실재에 육박하려는 시도에 얼마나 부응하는지”(같은 곳)를 묻는다. 나아가 단편 「바늘」의 예를 들어 작가가 “파괴적 아름다움에 대한 탐닉이 지닌 진정성과 위험을 동시에 보아”냄으로써 “단순한 양식화에만 그치지 않는 추구”를 보여준다고 답한다(74면). 확실히 천운영을 읽는 아주 흥미로운 하나의 방식이며 ‘자세히 읽기’의 성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천운영의 “숨막히는 듯한 미학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생활현장의 실감”(75면)을 내세우는 데에는 조금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부분이 있다. 「숨」에서 보이는 그로테스크와 생활실감의 조화를 예로 든 것까지는 납득이 가지만, 그것을 일반화하는 것은 적절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전에 먼저 천운영의 미학주의의 본질이 무엇인가, 천운영에게 소설쓰기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그에 대한 대답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생활현장의 실감”이든 무엇이든 처방이나 충고가 가능할 것 아닌가 한다.
천운영의 미학주의는 천운영의 소설적 제재에 대한 인식이 산문적이 아니라 시적이라는 데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마치 시인이 시를 쓸 때처럼 한두 가지의 강렬한 상징적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고 그 이미지를 소설화한다. 따라서 소설 속의 사건이나 사람 들은 전부 그 이미지를 위해 사역하는 도구들에 불과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인생사가 아니라 인생사의 한 갈피에서 번뜩이는 어떤 시적인 순간이며 소설은 그 시적인 순간을 떠받드는 장치들인 것이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생활현장의 실감”이라는 전통적인 리얼리즘적 요구는 천운영의 소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보다 앞세대가 역사로부터 탈주해서 역사 없는 일상으로 내려왔다면 천운영은 그 일상으로부터 다시 탈주하여 시정(市井)의 양식인 소설을 가지고 시의 세계로 뛰어든 또하나의 초(超)탈주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또 어찌할 것인가.
진정석의 「길 위의 소설, 소설의 길」 역시 또 하나의 두드러진 탈주자 성석제의 작품세계에 대한 자세히 읽기의 소산으로 대단히 흥미로운 글이다. ‘재미있는 소설’을 지향하는 성석제의 의뭉스러움은 사실상 “1980년대에 정점에 이른 계몽적 엄숙주의, 1990년대에 성행한 독백적 자아숭배라는, 상반된 지향성과 동일한 인식구조를 공유하는 쌍생아적 문학관”(119면)으로부터의 탈주이며 “소설이 진정한 가치를 찾아가는 여행이 아니라 정처없는 유랑이고, 엄숙한 계몽의 형식이 아니라 자유로운 즐김의 영역이라는 사실”(120면)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는, 문학적 관습으로부터의 탈피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석제 소설의 주인공들인 반(反)영웅들을 상대적 타자와 절대적 타자로 나누어 고찰하는 것도 대단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일종의 광기의 상태에 접근”(127면)하고 있는 절세미남, 도박사, 사회 부적응자 등이 과연 소설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 것, 그리고 “일탈과 탐닉, 위반과 전복의 삶에 대한 성석제 소설의 아낌없는 지지, 애호는 전통적인 이야기꾼, 유서깊은 거짓말쟁이라는 이미지에 가려진 이 작가의 또다른 얼굴, 예컨대 낭만적 탐미주의자, 급진적 개인주의자의 면모를 상기시킨다”(129면)고 진술하는 것에서 성석제의 소설세계에 이 평자가 전적으로 공감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역시 이것만으로는 아쉽다. 정말 평자는 소설이 ‘정처없는 유랑이고 자유로운 즐김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만일 그렇다면 한국에서 근대소설은 종말을 고한 것인지 하는 물음에 대한 책임있는 대답을 가지고 성석제 문학에 대한 평가에 임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5. 창비 비평의 활성화를 기대하며
백낙청은 2000년대 벽두에 진영개념의 해소를 말한 바 있다.7 지금까지 창비 비평진 여섯 사람의 90년대 이후 문학에 대한 평문들을 읽고 나니 확실히 이제 80년대와는 다르다는 금석지감을 느끼게 된다. 7,80년대로부터 신원상으로는 자유롭지만 문학적 경향으로는 완전히 자유롭다고 보기 힘든 90년대 작가들에 대해서 창비가 이만한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니 정말 진영개념은 해소된 것이라는 실감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마음속의 진영을 완전히 폐기처분하지 못한 나로서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드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앞서 편집자 대담에서 이 특집이 ‘문학위기론’의 진단과 우리 소설의 경향성의 확인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갖는다고 했는데 후자에 관해서라면 어느정도 성과를 인정할 수 있겠지만 전자에 관해서는 특집에 참여한 평자 누구도 언급조차 한 바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 점은 총론이 없었고 그 총론적 인식을 평자들이 공유하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것이다.
앞에서 창비가 90년대와 ‘내통’했다는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실은 나도 내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어떻게 내통하는가, 다시 말하면 어떻게 제대로 소통하는가일 것이다. 특집의 편집자 대담에서부터 여섯 사람의 평문에 이르기까지 다 읽은 결과, 창비가 90년대 작가들과 상업적 거래관계가 아니라 문학적 소통관계를 트기 위한 본격적인 말걸기를 시작한 것은 확실하고 그런 점에서는 고무적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기왕 말트기를 할 바에야 좀더 ‘본때있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창비답게’라는 것은 과거의 일부 경험처럼 작가들에게 고압적으로 입법비평이나 들이대고 좋은 의미로건 나쁜 의미로건 차별과 배제의 기제를 작동시키라는 말은 아니다. 창비가 아직 ‘민족문학’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 ‘민족문학’이란 것이 2000년대의 남한문학에서 무엇이며 어떻게 생동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합의를 먼저 이루고, 90년대 이후 작가들에게 그것을 납득시키는 노력을 기울이며 바로 그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당대 문학의 산물들을 평가하고 비판하고 견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의 특집과 이 글과 같은 ‘동반자적 국외자’의 비판적인 후속 기고의 자리를 마련한 것은 대단히 큰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침체된 21세기 한국의 평단에 창비 비평이 신선한 전기를 마련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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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식 「남과 북의 새로운 역사감각들」,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 50면. 앞으로 이 글에 나오는 면수 표기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 한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의 면수를 나타낸다.↩
- 졸고 「리얼리즘론과 민족문학론을 넘어서」, 평론집 『불을 찾아서』, 소명출판 2000, 271면.↩
- 마지막 백지연의 글 「낭만적 사랑은 어떻게 부정되는가」는 생각 끝에 그가 창비의 편집진의 한 사람도 아니고 일종의 초청 케이스이기 때문에 이 글의 성격상 혹 실례가 될까보아 제외하기로 했다.↩
- 김영하 『검은꽃』, 문학동네 2003, 220~21면.↩
- 백낙청은 M의 성별이 한번도 명시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고 하면서 에리히하고 육체관계를 맺었다는 고백이 있은 후인 135~36면에 가서야 그의 성별이 여성임을 알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그 이전 112면에 에리히가 M과 화자를 더불어서 “아가씨들”이라고 지칭하는 부분이 나온다. M의 첫인상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부터 M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설의 82면 “처음 만난 M은 키가 컸고 중성적이고 아름다웠으나 엄격하게 보였다”는 부분이다.↩
- 백낙청은 그것이 평론가로서 적지 않은 부담임을 고백한 바가 있다. 백낙청 「2000년대의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창작과비평』 2000년 봄호.↩
- 백낙청, 앞의 글(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