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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한국문학의 증상들 혹은 리얼리즘이라는 독법

 

 

김영찬 金永贊

문학평론가, 성균관대 강사. 평론으로 「김승옥 소설의 심상지리와 병리적 개인의식의 현상학」 「소설의 상처, 대중문화라는 증상」 등이 있고, 역서로 『근대성과 페미니즘』(공역)이 있다. youngmarx@freechal.com

 

 

1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라는 제목으로 지난 10년간 우리 문학의 성과를 총괄해보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의 특집은 여러모로 반가운 것이었다. 그것은 그동안 한국문학의 생생한 실제 현장과는 다소 거리를 두는 듯 보이던 창비가 이제는 더이상 개입과 발언을 미루지 않고 그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당대의 문학적 흐름에 동참하겠다는 의지의 산물로 읽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의 문학적 성과들을 “어설프게 분류하고 함부로 이름을 붙이기보다는”개별적인 작가나 작품에 대한 차분하고 치밀한 검토를 앞세우고 있다1는 데서도 그 신실함을 가늠할 수 있었다. 더욱이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과정에서, 최원식(崔元植)이 제안한 “작품의 실상으로 직핍”하는 “작품으로의 귀환”2이라는 명제에 값하는 창비의 본격적인 실천을 오랫동안 지루하게 기다려온 입장에서도 이 특집은 그 발걸음을 떼는 반가운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이 특집의 의미를 찾는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한국문학의 현재에 대한 창비측의 비판적 문제제기이자 그 문학적 성과를 읽는 독법에 대한 자기점검이라는 데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또다른 방향에서 인상적인 것은 그것을 통해 창비가 결과적으로 지금까지의 자족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비평적 시각과 담론의 적합성을 시험하면서 그 자체를 스스로 활발한 토론과 비평의 대상으로 방(放)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렇게 볼 경우 이미 그것의 의미는 단지 “창비 나름의 비평적 개입”이나 “창비 내부의 싸움”(『창비』 27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편집진의 표현대로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올인’하는 이 특집의 방식은 그 자체로 가진 패를 숨기지 않고 한꺼번에 모두 펼쳐보임으로써―그것이 한편으로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스스로는 알지 못할 수도 있는 ‘결여’까지도 외부를 향해 가시적으로 드러내어 비판적 대화를 촉발하는 비평적 모험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이 특집에서 리얼리즘의 입장에 서 있는 창비로서는 낯설고 불편할 수 있는 배수아, 김영하, 천운영, 김연수, 정이현, 이만교 같은 젊은 작가들을 읽고 있다는 데서 발생하는 효과라고 할 수도 있겠다. 편집자 대담에서 진정석(陳正石)은 적절하게도 창비의 보수성과 ‘비평적 모험’의 부재를 문제삼았지만,3 이 특집을 통해 창비는 이미 그 모험을 다른 방식으로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창비가 그간 보여왔던 보수적인 비평적 행보의 근본적 전환으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선뜻 긍정하기 힘들다. 무엇보다도 이 특집에서 “그간의 직무소홀을 일거에 만회해보자는 야심”(『창비』 20면)에 찬 ‘이벤트’를 벌인 이면에는 그 근본적 전환을 가로막는 창비 고유의 비평적 태도와 판단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편집자 대담에서 당대의 문학적 흐름과 함께하는 “과감한 비평적 모험”이 필요하다는 진정석의 자기비판적 발언에 대해 임규찬(林奎燦)은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응수하는데, 이는 임규찬 개인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창비 내부의 지배적인 한 경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치 실제 현실에 상당한 무엇이 있는데 창비가 그것을 못 따라가고 있다고 진단하는 것 같은데 정말 그런가 솔직히 반문하고 싶습니다. 근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학적 환경이 과연 그런 역사적 체계화를 자연스럽게 추동할 만큼의 긴장된 문학적 움직임을 담지하고 있는가, 정말 창비는 놓쳐서는 안될 어떤 문학적 흐름과 작가들로부터 뒤떨어져 있는 느림보인가? 저는 꼭 그렇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쉽게 규명할 수 없는 현실의 복잡성 속에서 다양한 질적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현실의 중요한 변화들을 제대로 감당할 만한 문학적 움직임이 활발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먼저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창비』 21면)

 

어찌 보면 이는 정확한 사실 판단일 수 있겠으나, 여기에는 말해지지 않은 잉여가 있다. 비유컨대 이러한 발언에서 부득이하게 연상되는 것은 의처증 환자에 관한 라깡(J.Lacan)의 지적이다. 라깡에 따르면, 아내가 다른 남자와 놀아나고 있다는 의처증 환자의 주장이 설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질투는 여전히 병리적이다. 왜냐하면 그 주장은 주체와 관련된 어떤 진실을 억압하면서 제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 발언에서 억압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창비 스스로가 “현실의 중요한 변화들을 제대로 감당할 만한 문학적 움직임이 활발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직접 연루되어 있다는 것, 즉 바로 창비가 정확히 그 문제점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위 발언이 안고 있는 문제는 그렇게 주체(창비)의 책임을 회피하면서 그것을 대상의 문제로 떠넘기고 있다는 데 있다. 위 발언은 의도치 않게도 현재 창비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더 나아가 창비의 비평이 지금 ‘현실의 중요한 변화들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온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스스로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비평에 국한하여 볼 때, 그 문제점은 임규찬의 표현대로 “실제 현실에 상당한 무엇”이 있어야 비평이 개입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그 ‘상당한 무엇’이란 물론 민족문학의 입장에서 뛰어난 ‘리얼리즘적 성취’일 것이라 짐작된다. 그러나 비평이 미리 어떤 규범적 기준을 정해놓고 가까스로 거기에 도달하는 문학만을 ‘정선(精選)’해 다루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거나 그에 ‘미달한다고 생각하는’ 문학에 등을 돌린다면, 그것은 비평의 영역을 스스로 축소시켜 자족적인 폐쇄된 공간 안에 가두어버리는 것이다. 더욱이 현재 한국문학의 현장에 “아귀가 맞는”4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런 당대의 문학적 현상을 진단하고 그에 개입하여 대응할 수 있는 이론의 현실적 응전력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할 문제이지 작품의 탓으로 돌릴 일만은 아니다. 창비가 주장하는 리얼리즘론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시대와 호흡하면서 이 후기근대의 자질구레하고 복잡다기한 현실과 문학적 현상들 속에서 함께 살아가며 이론의 내성(耐性)과 적응력을 단련하려는 분투가 없다면 그것은 공소(空疎)한 밀실의 비평이 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창비가 주장하는 리얼리즘의 본뜻이 분명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난 『창비』 특집의 의미는 그 보수적 태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거두어들이고 확고하게 설정된 문학적 규범과는 거리가 있는 듯 보이는 ‘뛰어난 군소작가들’의 숲으로 들어가 그들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읽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그럼으로써 이 특집은 ‘리얼리즘’에 대한 변치 않는 믿음을 “속내로만 안다짐하는” 그간의 “증상”(『창비』 84면)에서 벗어나 창비 고유의 독법(讀法)을 동원해 젊은 작가들의 최근 소설과 벌이는 치열한 해석적 대결의 장이 되고 있다. 이때 문제의 중심에 놓이는 것은 물론 백낙청(白樂晴)과 최원식의 글이다. 이 글들의 공통점은 통상적인 의미에서 모더니즘에 더 가까운 소설들을 리얼리즘적 해석좌표 안에 옮겨놓고 그 문학적 성과를 심문(審問)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통해 거꾸로 리얼리즘적 독법의 효력과 생산성을 시험하는 흥미로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과연 얼마만큼 생산적인가, 그리고 그 독법은 실제 작품의 핵심을 제대로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을 안고 출발하는 이 글은 리얼리즘의 독법과 그에 저항하는 모더니즘의 작품이 맞서는 긴장된 무대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그 둘과 함께 나누는 비판적 대화의 형식이 될 것이다.

 

 

2

 

배수아(裵琇亞)의 『에세이스트의 책상』(문학동네 2003)을 검토하고 있는 백낙청의 「소설가의 책상, 에쎄이스트의 책상」은 ‘꼼꼼히 읽기’의 모범을 보여주는 글이다. 그리고 어떤 입장에서라도 이질적이고 낯설뿐더러 배수아의 다른 소설과 비교하더라도 더욱 ‘아리송한’ 이 모더니즘 소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유연성과 포용성은 이 글의 중요한 미덕이다. 백낙청은 이 글에서 소설의 곳곳에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사건’들을 추스려 언뜻 스토리가 없는 듯 보이는 이 소설의 ‘서사(敍事)’를 일목요연하게 재구성해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그는 “치밀한 운산과 정교한 복선”(『창비』 34면)을 깔고 소설을 복류(伏流)하는 서사가 작품의 표면에서 분출하는 강렬한 정신주의를 교정하는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는 주장을 치밀하게 논증한다. 이러한 백낙청의 소설 읽기는 소설을 읽을 당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여러 사실들을 새롭게 환기해주는 바 있어 개인적으로도 좋은 공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갖게 되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그렇게 읽는 것이 과연 작품에 대한 “충분한 대접”(『창비』 42면)인가?

『에세이스트의 책상』에 대한 백낙청의 논평의 핵심은 “작품 자체”는 ‘정신주의’라는 “수상쩍은 명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여러 계기를 담고 있다”(『창비』 43면)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분명 작가의 이데올로기에 반(反)하는 ‘리얼리즘의 승리’를 설파하는 엥겔스(F.Engels)의 그림자가 있지만, 백낙청의 독법은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가 말하게 한다”5라는 말로 요약되는 현대비평의 한 방법적 맥락과도 비스듬히 통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긴 해도 백낙청이 이 글에서 정교한 비평적 운산을 펼쳐가는 데 중요한 참조점으로 삼는 것은 역시 소설 속 인물과 사건의 객관적인 ‘재현’이다. 작품에서 인물들의 생생한 개성이 엮어가는 서사를 발굴해내 화자의 정신주의적 신조와 어긋나는 ‘경험적 사실’의 구체성을 부각시키는 것은 그런 맥락이다. 또 화자와 요아힘의 육체적 교섭 없는 동거생활에서 ‘정상적인’ 남자로서 요아힘이 느꼈을 법한 ‘긴장’이나 ‘감정의 기복’에 무관심한 재현방식에서 “흡족한 소설적 성취”에 미달하는 결함을 보는 것(『창비』 45면)도 마찬가지다. 더 나아가 “저자의 전면적 지지를 받는 사상의 개진”이 생경하게 노출되는 경우 그것을 ‘소설적’이라 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적용되고 있는 것(『창비』 44면) 또한 그런 기준이다.

결국 화자나 작가 자신은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는 정신주의의 허위의식이 작품 자체에 숨어 있는 서사적 재현의 계기들에 의해 전복된다는 것, 『에세이스트의 책상』의 중요한 소설적 성취는 거기에 있다는 것이 백낙청의 주장이다. 그러나 치밀한 ‘소설적 교정장치’가 일깨워주는 것이 고작 작가가 알지 못하거나 회피하고 있는 정신주의의 허위성 혹은 “영·육(靈肉)이 쌍전(雙全)”한다는 정도의 일반적인 상식일 뿐이라면,6 그것은 소설로서도 그리 대단한 성취일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백낙청의 주장은 진의(眞意)는 그렇지 않을지언정 오히려 작품에 대한 너무 야박한 대접이다. 어쩌면 백낙청은 『에세이스트의 책상』의 성취를 그것이 모더니즘으로서는 드물게도 작가 특유의 ‘허위의식’을 교정하는 ‘리얼리즘의 승리’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본다면 “화자의 시야와 자기인식에 어떤 본질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할 경우에는 그 문제점의 개인적·사회적 뿌리를 규명하려는 자세가 바람직하다”(『창비』 46면)는 주문은,(백낙청의 지적대로라면) 그 ‘문제점’을 작가 대신 알고 있는 ‘작품 자체’라면 몰라도 화자와 똑같이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는 작가에게 건네는 요구로서는 부적절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평가는 백낙청이 『에세이스트의 책상』에서 표출되는 정신주의를 다분히 ‘허위의식’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파악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의(혹은 작가의) 정신주의가 허위의식인지 아닌지를 미리 규정해버리기 이전에, 배수아 소설의 맥락에서 그것이 갖는 의미와 효과를 먼저 밝히고 그것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작품의 문학적 성취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바른 순서겠다. 가령 백낙청은 제9장 끝머리를 예로 들며 그것을 “신비화와 도취의 언어”(『창비』 46면)라고 일축해버리지만, 사실 바로 그 부분이야말로 작품의 핵심적인 주제의식이 집약되어 있는 부분 중 하나다. 조금 과장해 말하면, 이 작품의 전체 의미망과 그 소설적 공과를 결정짓는 핵심은 백낙청이 가볍게 취급하는 “나쁜 의미의 에쎄이적 요소”(『창비』 42면)에 있다고도 할 수 있을 터이다. 물론 거기에 어느정도 허위의식이 가미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수아 소설을 ‘배수아 소설’이게끔 하는 결정인(決定因)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의도적으로 파괴되어 있는 목적론적·선형적(線形的) 서사를 굳이 선형적으로 재구성해내고 그 사이에 가로놓인 “뱀과 화염의 강물”7 이 소설을 조직하는 특수한 담론적 양상을 가벼이 넘겨버리는 한, 배수아 소설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에세이스트의 책상』이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반사하는 글쓰기에 대한 소설”8이라는 점이다.“글쓰기로 인해서 나는 미래 혹은 과거의 어느 순간에 다시 나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나는 M을 생각했다”(『에세이스트의 책상』 165면)와 같은 진술이 아니더라도, 소설에서 M과의 사랑과 글쓰기 의식은 정확히 일치한다. M에 관해서 말하자면, 우선 M이라는 명명 자체가 사회적으로 부여된 ‘이름’이라는 정체성을 의도적으로 흐려버리고자 하는 의식의 소산이려니와, M에게서 “국적이 없으며, 나라를 만들지 않”(같은 책 86~87면)는 “보편문법”(같은 책 134면)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런 측면에서 M은 주체 바깥의 모든 것을 증류해버린 ‘영혼의 삶’을 살고자 하는 화자의 자아 이상(ego ideal)이 투사된 인물이며, M과의 사랑은 모든 사회적 규범과 관계를 삭제해버린 순수한 ‘나’와의 절대적 일치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M이라는 인물과 M과의 사랑에 투사되고 있는 것은 물론 작가가 지향하는 글쓰기에 대한 관념적 이미지다.

이 사랑이 인상적인 것은, 한편으로는 모든 사회적 관습이나 커뮤니케이션, 기원과 목적, 환상과 명분 같은 것을 거부하고 주어진 삶의 궤도의 황량한 바깥으로 자신을 내던져 자발적으로 고립되고자 하는 허무주의적 충동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으면서도, 작가가 이전까지와는 달리 그 허무주의적인 개체적 고립의 충동을 ‘절대적 내면’이라는 고정점을 향해 수렴시키려는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그 사랑을 통해 반복적으로 확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화자의 말처럼, 그렇게 “M을 표현하는 것이 내가 궁극적으로 쓰고자 하는 의미가 되고 있었다.”(같은 책 166면) 그렇게 볼 때 M과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화자의 의식은, 새롭게 방향을 돌려잡은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그대로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M이 겉으로 재현된 스토리의 차원에서는 구체적인 실존인물일지 몰라도 담론의 차원에서는 하나의 추상적 상징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M은 이미 내 안에서 죽고 없었으나 그리고 그로 인해서 나는 더이상 슬퍼하거나 분노하지도 않으나 그럼으로 더욱 M은 내게 가까이 머물렀다”(같은 책 165면)는 역설적인 진술이 가능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때 화자에게 더욱 가까이 머물게 되는 M이란 결국 마음속에서 그 인물의 구체적인 실존을 지워버리고 그로 인한 정념(pathos)까지도 버린 후에야 획득할 수 있게 되는 추상적 보편이념(혹은 ‘소설’)으로서의 M인 셈이며, 그것은 결국 자아와 글쓰기가 동시에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그렇지만 어쩌면 불가능한 이상이라고 자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어떤 경지의 표지(標識)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론 M이 글쓰기에 의해 촉발된 독특한 기억의 서사에 의해 사후에 관념적으로 재창조되는 인물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효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소설에서 M과의 ‘완전한’ 사랑(혹은 그 자체로 자기충족적인 음악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작가가 생각하기에 주체성과 글쓰기가 지향하는 정신주의의 한계지점, 즉 도달해야 하지만 도달할 수 없는, 설혹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붙잡을 수 없이 찰나에 스쳐 지나가버리는 그 지점을 표상하는 것이다.9 그렇게 볼 때 “우리가 음악으로만 대화했다면 일은 다르게 진행되었을지도 몰랐다”(같은 책 144~45면)라는 화자의 발언은 그것이 그녀가 지향하는 이상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쩌면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는 M과의 사랑과 글쓰기가 동시에 똑같이 안고 있는 넘어설 수 없는 어떤 아포리아(aporia)에 대한 고통스런 자각이 뒤섞여 있는 진술이다.

M과의 결별을 둘러싼 사건과 감정 들의 사실적 재현의 양상은 정확히 소설의 이 내적 논리에 종속되는 것이다. 가령 백낙청은 화자와 M 사이에 돌연 불거져나오는 육체의 문제(에리히와의 육체관계)로 인해 그들의 평소 신념(정신주의)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국면을 작품이 보여준다고 하는데, 그것은 물론 어느정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리의 차원에서도 그보다 더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오히려 그 육체의 문제로 인해 일깨워지는 인간적인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면서 평소의 신념이 균열되는 지점을 고통스럽게 성찰하는 내면의 드라마다.

 

나는 질문하고 또 질문했다. M의 영혼이 나와 함께 있다면, 왜 에리히가 문제가 되는가, 유한하고 그토록 가변적인 육체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왜 M과 에리히의 일회적인 관계로 인해 내가 이토록 괴로움을 겪어야 하는가, 그것의 저열함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왜 충족되지 않는 소유욕을 버리지 못하는 것인가. 나는 나 자신을 위한 한 마디의 위안이나 변명의 말도 찾지 못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진정 역겹고 진정 용서할 수 없으며 정녕 천박한 것은 M도 아니고 에리히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같은 책 133~35면)

 

따라서 『에세이스트의 책상』의 소설적 성취는 ‘고립된 삶’을 예찬하는 정신주의의 설파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꾸로 육체적·경험적 현실이 그 정신주의의 허위성을 전복하는 장면에 있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에세이스트의 책상』에 나타나는 경향이 배수아의 소설로서는 썩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라는 생각이지만, 그래도 굳이 소설적 성취를 논한다면 그 가운데 하나는 이 소설이 개체적 고립의 정신주의를 동력으로 씌어지는 기억의 서사의 실험적 극단을 보여주면서도, 그 이면에서 그 자체의 한계로서 작용하는 격렬한 인간적 내면의 드라마를 통해 자기 자신의 글쓰기의 한계지점을 성찰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더라도, 배수아의 정신주의는 정신/육체라는 대쌍(對雙)의 한 항에만 집착하는 허위의식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그것은 일종의 체계적으로 정돈된 ‘사상’이나 ‘철학’이라기보다는 모든 관습적인 사회관계와 그것을 지탱하는 이념이나 명분 같은 것과 단절하면서 그 모든 것을 떨쳐버린 단독자로서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고립시키려는 (글쓰기의) 정신적 태도에 가깝다. 배수아에게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 일종의 포즈이기는 하나, 크게 보면 개인을 구속하는 모든 사회적인 굴레를 혐오하고 거부하는 급진적인 개인주의가 표현되는 한 형식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이러한 배수아 특유의 소설을 구조화하고 실제로 고유한 소설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글쓰기 의식의 실재적인 근원이다. 작품에서 다분히 모호하고 추상적이기는 해도 음악에 대한 에쎄이적 서술이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작품에 표현되는 그런 배수아 특유의 독특한 정신주의의 앞뒤 맥락을 가려읽기 전에 그것을 “신비화와 도치의 언어”로 치장한 허위의식의 차원으로 비판하는 데 그친다면 배수아의 소설에는 그야말로 ‘건질’ 것이 별로 없는 셈이다.

사실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그동안 오해되어왔던 배수아 소설의 ‘정체’를 작가 스스로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다. 즉 이 소설은 이전까지 배수아 소설의 인물들이 보이는 냉정한 무관심과 무욕주의(無慾主義)에 가까운 금욕적 태도, 또 그것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낯설고 황량한 소설의 분위기와 무국적적(無國籍的) 상상력 같은 것을 작동시키는 정신적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이전까지와는 달리 『에세이스트의 책상』에서 소설을 더욱 극단으로 밀고 나가려는 탈근대적인 허무주의적 실험의 충동을 스스로 절대적인 순수 코기토(cogito)라는 다분히 근대주의적인 고정점 안에 가두어버린 것은 자신의 소설이 발산하는 고유한 매력과 장점을 흐려버리는 패착(敗着)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문제는 배수아의 정신주의가 어떤 측면에서는 고립적인 금욕적 태도와 ‘취향’을 앞세워 자신을 남들과 차별화하는 구별짓기(distinction)의 정치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것은 크게 보아 모든 권위와 규범을 거부하고 절대적인 자기 자신을 하나의 이상으로 구축하는 후기자본주의 시대 개인주의의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의 맥락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배수아의 소설은 이 후기근대 자본주의의 국면을 나름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거부하면서도 또 그럼으로써 역설적으로 의도치 않게 그 안에 통합되어가는 개인주의의 한 운명을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소설적 증상(symptom)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소설적 공과와 한국문학 속에서 차지하게 되는 의미는 또 그것대로 다시 따져볼 일이지만, 이런 각도에서 읽더라도 배수아의 소설은 흥미롭다. 그런 맥락에서, 정신주의가 지니는 “문제점의 개인적·사회적 뿌리를 규명하려는 자세가 바람직하다”는 백낙청의 주문에 작가가 선뜻 응할 리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 역시 오히려 작가 배수아의 몫이 아니라 비평이 떠맡아야 할 몫이다.

 

 

3

 

백낙청의 비평은 모더니즘 소설을 읽는 창비의 고유한 독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모더니즘을 리얼리즘 쪽으로 끌어당기는 독법이다. 그것은 가령 『에세이스트의 책상』처럼 애초에 ‘소설’의 규범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소설에 오히려 미리 설정된 ‘소설적’이라는 기준을 적용하고 그 기준에 호응하는 요소를 가려내어 소설의 공과를 가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때 그 ‘소설적’이라는 기준도 리얼리즘적 재현이라는 규범의 영역 내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창비 고유의 독법은 말하자면 이질적이고 낯선 것을 익숙한 코드로 환원하는 방식이다. 그 과정에서 미리 설정된 규범에 쉽게 포섭되지 않는 것들은 간단히 처리되거나 일축되고 그렇지 않으면 해석의 잉여로 남겨진다. 무릇 모든 해석은 잉여를 남기게 마련이지만, 그 남겨진 견딜 수 없이 낯설고 불편한 것이 실제로 소설의 고유함과 성취를 결정하는 중핵에 해당한다면, 더욱이 그것이 한국문학의 장 속에서 소설이 자신만의 고유한 목소리로 한국의 근대와 맞닥뜨리는 장면에 해당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렇다면 최원식의 경우는 김영하(金英夏)의 『검은 꽃』(문학동네 2003)에서, 작가가 고유한 목소리로 그려내는 그 장면을 과연 어떻게 읽고 있는가?

최원식의 「남과 북의 새로운 역사감각들」은 홍석중의 『황진이』와 함께 김영하의 『검은 꽃』을 검토하고 있는 글이다. 최원식은 『검은 꽃』을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타면서도 근본적 질문을 자제하지 않는 본격문학의 응전”(『창비』 52면)이라는 맥락에서 읽으면서, 작품의 구조를 분석하고 그 공과를 차분히 가려낸다. 이 글에서 먼저 돋보이는 것은 역시 작가가 소설에서 잘못 쓴 역사적 사실들의 문제를 치밀하게 교정해주는 부분이다. 특히 소설의 1부 제2장에 집중된 사실 재현의 부정확성에 대한 지적이나, 역사적 사실에 따른 인물설정의 개연성과 실존했던 인물의 정확한 이름, ‘태평양’의 최초 명명자 등등을 하나하나 바로잡는 꼼꼼하고 자상한 지적은 그 자체로 새겨들을 만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것은 작가와 독자들에게 모두 쉽게 접할 수 없는 좋은 공부가 된 듯하다. 그러나 상당한 노고가 배어 있는 그 자상한 검토가 “역사소설은 이래서 쓰기 어렵다”(『창비』 57면)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조금은 의외다. 특히 그것이 “생활이라는 육체성의 두터운 획득”(같은 곳)보다는 딴곳에 더 관심이 있는 듯 여겨지는 이 작품의 성취를 가늠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될 수 없는 사소한 것으로 보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잘못된 역사적 고증의 문제에 대한 최원식의 그같은 꼼꼼한 검토는 역사소설이라면 가져야 할 ‘기본’에 대한 강조에 그치는 것이 아닌 듯하다. 그것은 작품을 읽는 ‘관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최원식에 따르면, 『검은 꽃』은 20세기 초의 격동하는 “과거가 충실한 존재감으로 재현됨으로써 현재와 마주세워지는”, 역사가 “자신의 고유한 빛깔로 생생”(『창비』53면)하게 살아 있는 소설이다. 이때 적용되는 기준은 물론 과거의 생생한 재현이며, 그것을 통한 대문자 역사의 의미에 대한 확인이다. 농장으로 팔려간 이민들의 생활이나 농장주들의 개체적인 형상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 그리고 ‘멕시코 혁명이 부르주아적 재편으로 귀결되는 결정적 모퉁이’를 서늘하게 포착하는 것 등에서 최원식이 작품의 가치와 “진정한 새로움”(『창비』 57면)을 보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검은 꽃』에 대한 최원식의 그같은 이해와 그 의미에 대한 평가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진술에 집약되어 있다.

 

우선 제목이 수수께끼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제목에 대한 그 어떤 암시도 없다. ‘검은 꽃’, 이 불길한 제목은 이 작품의 성취와 어긋나는 일종의 뱀다리다. 정사(正史)에서 침묵당한 소문자 역사의 파국을 드러냄으로써 거꾸로 역사의 꿈을 강렬히 환기하는 이 작품은 물론 기존 역사소설의 틀에 비판적이지만, 그렇다고 역사허무주의를 선전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창비』 54면)

 

무엇보다 ‘검은 꽃’이라는 제목이 작품의 성취에 어긋나는 ‘뱀다리’라는 지적은 최원식이 이 작품을 받아들이는 관점을 다시 한번 선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설 첫머리의 제사(題詞)에 대해 플라톤의 원문을 인용하면서까지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거기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검은 꽃』이 소문자 역사의 파국을 통해 거꾸로 민족과 역사(대문자 역사)의 꿈을 환기해주는 전혀 불길하지 않은 작품이라는 확고한 판단이다. 그러나 하나의 작품을 관점에 따라 다르게 읽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그것이 작품의 이해를 풍성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작품 자체’의 생생한 실감과 동떨어진 경우라면 문제는 다르다. 위 진술에서 ‘검은 꽃’이라는 불길한 제목이 애초 작품의 실재와는 맞지 않는 부적절한 제목이라고 지적하는 것으로 보아, 최원식은 실제로 자신이 판단하는 ‘작품 자체’가 적어도 작품이 스스로 말해주는 바로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작품 자체’가 말해주는 것은 오히려 정반대다. 무엇보다 고작 열 줄밖에 안되는 다음과 같은 소설의 짤막한 서두(1부 제1장)는 왜 이 소설의 제목이 ‘검은 꽃’이라는 불길한 제목일 수밖에 없는지를 암시해준다.

 

물풀들로 흐느적거리는 늪에 고개를 처박은 이정의 눈앞엔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오래 전에 잊었다고 생각한 제물포의 풍경이었다. 사라진 것은 없었다. 피리 부는 내시와 도망중인 신부, 옹니박이 박수무당, 노루피 냄새의 소녀, 가난한 황족과 굶주린 제대 군인, 혁명가의 이발사까지, 모든 이들이 환한 얼굴로 제물포 언덕의 일본식 건물앞에 모여 이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감았는데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이 선명할까. 이정은 의아해하며 눈을 떴다. 그러자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의 폐 속으로 더러운 물과 플랑크톤이 밀려들어왔다. 군홧발이 목덜미를 눌러 그의 머리를 늪 바닥 깊숙이 처박았다.(『검은 꽃』 11면)

 

『검은 꽃』이 “장과 부의 비대칭성을 의식적으로 조직한”(『창비』 54면)‘휘우뚱한 바로끄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최원식의 지적은 정확하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도 역시 열 줄밖에 안되는 주인공의 죽음 장면을 ‘의식적으로’ 굳이 따로 한 장으로 배치하여 맨 앞에 가져다놓은 작가의 의도, 그리고 그것이 소설 전체에 작용하게 되는 효과를 물어야 할 것이다. 최원식은 이 뒤에 제2장으로 바로 이어지는,11년 전의 “제물포항으로 플래시백하는 낯익은 영화적 전환”(『창비』 55면)을 잠깐 스치듯 언급하고는 가벼이 넘겨버리는데, 작가의 고유한 주제의식은 바로 이 소설의 첫머리에서부터 평자가 말하면서도 말하지 않는 이러한 형식적 장치들 속에 이미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핵심은 그 형식적 장치가 상징적이게도 소설 전체를 죽어가는 자의, 혹은 이미 죽고 없는 자의 플래시백(flash-back)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10 이때 죽어가는(죽고 없는) 자란 물론 주인공-근대 주체다. 그리고 그것은 이를테면 ‘개죽음’이다. 또 낯익은 사람들이 ‘근대’를 찾아 ‘근대 주체로 거듭나는’ 항해를 앞둔 장면에서 처음 포착하는 것은 하필 그 죽어가는 자(근대 주체)의 시선이다. 이렇게 소설의 탈(脫)오뒤쎄이아적 서사는 거꾸로 주인공–근대 주체가 허망하게 짓밟혀 죽은 다음에서야 시작되며, 게다가 그것은 눈을 감으면 선명히 떠오르나 눈을 뜨면 사라져버리는, 맹목(盲目) 속에서만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서사다.

따라서 최원식의 지적처럼 이 소설에서 “근대적 주체의 탄생이 끊임없이 유예”(『창비』 59면)된다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다. 이때 유예란 ‘탄생’이라는 최종 목적을 전제로 하는 것일 터이나, 소설의 구조상 근대 주체는 탄생을 향해 가기는커녕 그전에 이미 죽어 있는 것이고, 또 그 죽음도 서두에서 앞질러 보여주듯 아무런 비극적 아우라도 없는 ‘개죽음’인 이상 죽어도 아무 상관도 없고 의미도 가치도 없는, 우연히 역사에 휘말려 흔적 없이 흩어져버리면 그뿐인 허망한 것일 따름이다. 그것은 아무런 회한(悔恨)이나 기다림 없이, 또 불필요한 꿈도 인내도 없이 자본주의의 괴물로 변신해 살아가게 되는 이연수의 황량한 말년이 이 소설에서 결코 ‘비극’이 될 수 없는 것과 정확히 조응한다.

이는 이민들을 싣고 가는 일포드(Ilford)호가 근본적으로 그 의미상 “구질서의 강제적 해체”(『창비』 57면)가 일어나는 곳도, 그래서 ‘근대로 가는 배’11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일포드호의 그 이글거리는 지옥 같은 악다구니는 항해 끝에 그들이 닿게 되는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도, 그리고 아무런 명분이나 신념 없이 휘말리는 멕시코/과떼말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다른 형태로 똑같이 반복된다. 그런 측면에서 그것은 일포드호의 “신화 속 괴물의 내장 같은 선실”(『검은 꽃』 28면)과 본질적으로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작가가 소설의 기우뚱한 불균형을 감수하면서까지 일포드호 선상의 삽화를 그토록 장황하게 묘사한 것은 그 지옥 같은 일포드호의 선상이 바로 다름아닌 근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결국 소설에서 이민들이 사로잡히는 “멕시코라는 나라에 대한 단꿈”(『검은 꽃』 34면)이 애초에 말도 안되는 허황하고 허망한 것이었음이 드러나듯, 작가에 따르면 근대 혹은 역사라는 것도 처음부터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점에서라면 국가 또한 다르지 않다.

 

좋아, 그렇다고 쳐. 나라가 있든 없든 그게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지?

이정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있든 없든 상관없다면 있어도 된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하나쯤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 죽은 자는 무국적을 선택할 수 없어. 우리는 모두 어떤 국가의 국민으로 죽는 거야. 그러니 우리만의 나라가 필요해. 우리가 만든 나라의 국민으로 죽을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죽지 않을 수는 있어. 무국적이 되려고 해도 나라가 필요한 거라구.

이정의 논리는 어려웠다. 그들을 설득한 건 논리가 아니라 열정이었다. 그리고 그 열정은 기묘한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되지 않고자 하는 것이었다.(『검은 꽃』 306면)

 

주인공 김이정에 따르면, 국가란 있든 없든 아무래도 상관없는,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죽기 위해서라면 있어도 무방한, 따라서 산 자에게는 실제로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을 그런 허망한 것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무엇이 되지 않고자 하는 열정’이라는 기묘한 궤변 속에서만, 죽은 자만을 호명하는 죽은 자의 국가, 또는 무국적이 되려고 하는 자의 필요에 의해서만 역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혹은 존재해도 상관없는) 그런 국가일 뿐이다. 더 나아간다면, “그러나 그곳을 거쳐간 일단의 용병들과 그들이 세운 작고 초라한 나라의 흔적은 발굴되지 않았다”(『검은 꽃』 321면)라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알려주듯, 그 국가는 결국 죽은 자조차도 제대로 호명하지 못하는 것으로 밝혀지는 그런 것이다. 이러한 소설의 논리 속에 작동하고 있는 것은 물론 민족/국가주의(nationalism)의 환영(幻影)을 짐짓 슬쩍 발 걸어 뒤집어버리는 작가의 허무주의적 냉소다.

『검은 꽃』은 그런 과정을 통해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과 나라 만들기, 혹은 근대적 주체의 탄생이라는 일직선적인 역사주의적 서사(대문자 역사)를 탈구(脫臼)시키고 있는 소설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작품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대문자 역사와 소문자 역사의 비대칭성이며, 그것을 통해 작가는 대문자 역사에 우연히 휩쓸리기는 하면서도 또 그와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소문자 역사의 씁쓸한 소극(笑劇)과도 같은 허무한 운명을 보여줌으로써 다시 거꾸로 대문자 역사의 부질없는 허망함을 문제삼는다. 이 소설에서 죽음과 소멸의 원환으로 폐쇄된 재귀적(再歸的) 구조는 그러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소설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은 “냉소적 활력”(『검은 꽃』 35면)으로 약동하는 눈물 없는 허무주의다. 물론 이때 허무주의적 냉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정확히 최원식이 이 소설에서 환기하고 싶어하는 바로 그 대문자 역사의 꿈이다.

김영하의 『검은 꽃』이 그런 방식으로 역사, 국가, 민족, 근대 주체 등의 자명성을 유희적으로 뒤집어버리는 것은 작가가 현재 한국사회의 근대적 현실을 대면하는 인식과 태도와도 무관하지 않다. 가령 최근 출간된 김영하의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창비 2004)를 들여다보더라도 그 점은 분명하다. 이 소설집에 일관되게 흐르는 인식적 기조는 단순하게 정리하면 세상은 항상 개인의 진의와는 상관없이 그것을 배반하면서 굴러가게 마련이라는 생각이다. 김영하는 그가 생각하는 그런 세상의 무겁지 않은 진실을 시종 그 안도 바깥도 아닌 경계선상에서 짐짓 시치미 떼면서 무관심한 척 건드리고 지나간다. 이러한 태도가 갖는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대로 다시 따져보더라도, 적어도 그 ‘쿨(cool)함’이 한편으로는 현실과 역사에 지나치게 덧씌워진 엄숙한 환상을 탈각시키는 효과를 갖는 것만은 틀림없다.

『검은 꽃』에서 그 점은 소설에서 재현되는 역사적 소재의 무게에 의해 어느정도 견제되고 있기는 해도, 그 ‘쿨’한 탈(脫)환상의 태도는 여일(如一)하다. 그럼으로써 이 소설의 ‘질주하는 아이러니’12는 그동안 한국소설에서 의심할 수 없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온 역사주의와 국가(민족)주의를 상대화하여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리고 소설에서 그것은 역사소설에 대한 독자의 기대지평을 시종 교란하고 배반하는 서술전략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러나 『검은 꽃』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역사와 근대, 국가와 주체 등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상대화하는 아이러니의 유희 자체가 거꾸로 그에 대한 더이상의 집요한 사유와 성찰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작가가 그 아이러니의 질주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듯 보인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물론 그 활기찬 탐닉의 향유 속에서, 탈환상의 아이러니에서 유일하게 제외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작가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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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식의 글에서 발견되는 것 역시 모더니즘 소설이 보여주는 특정한 성취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민족문학’의 입장에서 결정적으로 낯설고 불편할 수 있는 요소에는 애써 무관심한 태도다. 어쩌면 그것은 민족문학의 유효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여전히 고수하는 데서 나오는 다분히 ‘전략적’인 태도라고 볼 수도 있겠다. 최원식의 비평이 작품의 핵심적인 내적 논리를 읽지 않고 『검은 꽃』에서 기어코 ‘역사허무주의의 선전’으로 떨어지지 않는 ‘나라의 꿈’에 대한 환기를 읽어내는 이면에는 그런 속내가 있을 법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것은 더욱 큰 문제다. 민족문학에 대한 믿음이 굳이 그처럼 작품의 실재를 애써 외면하고서야 비로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입론의 취약함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일 뿐이다. 더욱이 어떤 형식이 되었든 민족국가와 역사라는 범주의 자명성을 한번쯤 되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의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비록 불편할지라도) 정직하게 대면하고, 그것을 통해 혹 있을지도 모를 자기 자신의 결여까지도 반성적으로 돌아보는 성찰의 자세를 가다듬는 대신 선험적인 규범을 앞세워 작품이 던져놓은 근원적인 질문을 아예 봉쇄하고 해소해버리는 한, 최원식이 주장하는 민족문학론이란 이미 정체되어 굳어버린 주관적인 원망(願望)의 차원을 벗어나기 힘들다.

모더니즘 소설을 읽는 이같은 독법은 어떤 의미에서는 창비로서는 회피하기 힘든 고민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외면할 수 없는 최근 한국문학의 성과들을 민족문학과 리얼리즘의 좌표 안에서 어떻게든 해석하고 그에 대응해야 한다는 요구와 관련되어 있다. 민족에 대한 질문이나 재현의 관점에 촛점을 맞추어 모더니즘 소설의 성과를 부각하는 비평의 방향은 그런 맥락에 있다. 그러나 이는 작품의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비평의 입장에서도 썩 생산적인 방향이라 할 수는 없을 듯하다. 창비 고유의 독법이 최근의 모더니즘 소설을 대하면서 보여주는 유연성과 호의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그 소설이 리얼리즘과는 다른 각도에서 제기하는 나름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에 대한 섬세한 검토와 비판이 없다면 그것은 그에 대한 온당한 대접이라 하기 힘들다. 더욱이 모더니즘 소설이 펼쳐놓는 전체 포석(布石) 중 한두 국면의 성과를 애써 끌어당기면서도 정작 그 진짜 패와는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 한, 리얼리즘의 입장에서도 그것은 모더니즘과의 창조적 대결이 될 수 없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모더니즘 소설이 제기하는 그 핵심적인 문제의식이 현재 한국의 근대에 대한 소설적 대응이라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배수아와 김영하의 소설은 적어도 각기 고유한 나름의 방법으로 근대적 현실의 국면을 거부하거나 그에 대해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소설이다. 배수아 특유의 독특한 무국적적 상상력·감각이나 ‘나’를 구속하는 ‘나’ 바깥의 모든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려는 허무주의적 충동도 그렇지만, 국가나 민족 같은 근대적 삶의 범주들을 허무주의적 아이러니 속에서 교란하는 김영하의 소설전략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의 소설을 지배하는 강박적 정신주의와 허무주의 같은 글쓰기의 정신적 태도는, 자본의 지배가 더욱 위력을 더해가는 이 2000년대 한국사회의 모더니티(modernity) 속에서 기댈 수 있는 어떤 이념이나 가치를 상실한(혹은 스스로 버린) 세대의 특정한 문학적 정체성을 구축하는 핵심적인 요소의 하나다. 그들의 소설은 그렇게 이념과 명분, 의미와 가치 같은 ‘거치적거리는’ 덧씌워진 판타지(fantasy)와 단절하고 고립된 단독자로서 이 후기근대의 모더니티와 맞닥뜨리는 흥미로운 장면을 연출한다.

예컨대 배수아와 김영하의 소설에 각기 나타나는 정신주의와 허무주의 같은 글쓰기의 태도를 처음부터 문제가 있다 하여 무심하게 넘겨버릴 수 없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또 그것이 근대와 대면하는 작가의 핵심적인 문제의식과 서술전략, 소설적 특성 등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는 것이기에 더욱이나 그렇다. 이는 물론 비단 배수아와 김영하의 소설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창비의 비평에 요구되는 것은 현재 한국문학의 현장에서 한국사회 모더니티에 대한 응답으로 제출되는 이 모더니즘(들)의 문제의식과 현실적 맥락을 외면하기보다는 그 한가운데로 직핍해들어가 비판적으로 대화하고 응전하는 것이다. 창비의 입론대로 근대극복을 과제로 삼는 리얼리즘의 본뜻에 정말로 충실하고자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창비가 치러야 할 근대와의 또다른 대결의 현장은 거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한국문학과 모더니티의 생생한 진실은, 아직 오지 않은 리얼리즘의 ‘물건’이 아니라 비록 비루해 보이고 마뜩지 않을지는 몰라도 ‘문학의 위기’가 이야기되는 이 후기근대의 현장을 힘겹게 포복하고 있는 바로 그 문학들 속에, 그 문학들이 안고 있는 결여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창비에 거는 기대가 공연한 것이 아니라면, 이는 또 달리 말한다면 이론과 비평의 더욱 치열한 자기성찰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 그것은 물론 “‘이론비평’과 ‘실제비평’이 한몸이 되는”(『창비』 22면)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다. 그 자기성찰이란 곧 급격하게 변화하는 한국사회의 복잡다기한 모더니티의 양상은 물론이고 그와 한몸으로 살아가는 문학적 성과들의 한가운데서 자기 자신의 응전력과 결여까지도 끊임없이 되비추어보는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설혹 그 회피할 수 없는 바깥의 혼돈스런 몸체가 고통스럽게도 자신의 ‘이론’과 ‘비평’의 살을 찢고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그것까지도 감내하면서 바로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의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는 요청에 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헤겔(Hegel)은 그것을 일러 정신의 힘13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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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편집자 대담: 왜 이 작가들인가」,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 22면. 이하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는 『창비』로 표기한다.
  2. 최원식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 『문학의 귀환』, 창작과비평사 2001,57~58면.
  3. “오류나 판단착오, 허언(虛言)의 위험을 무릅쓰고 당대의 문학적 흐름과 함께 가는 진취적 태도, 좀더 과감한 비평적 모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창비』 21면)
  4. 임규찬 「공선옥 문학은 어느만큼 와 있는가」, 『창비』 84면.
  5. Terry Eagleton, Against the Grain: Essays 1975~1985, Verso: London·New York 1986, 15면.
  6. 백낙청은 ‘나는 육체적인 행위를 통해 더 가까워지거나 더 멀어지는 관계를 알지 못한다’는 진술이 “저자 스스로도 (…) 영·육(靈肉)이 쌍전(雙全)하는 삶에 대한 얼마만큼의 무지를 드러내는 주장인지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창비』 42~43면)라고 하지만, 실제로 저자가 그 정도의 일반 상식을 모르고 있지는 않을 성싶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세간의 상식을 거부하는 배수아의 정신주의의 맥락이다. 그리고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M을 더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가?”(『에세이스트의 책상』 136면)라는 진술의 정황까지도 함께 고려해볼 때, 그와 더불어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것은 그 선언적 진술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거의 강박적이라 할 수 있는 정신주의적 지향을 간섭하는 감정의 찌꺼기를 쉽게 뿌리칠 수 없는 데서 오는 심리적 고통이다.
  7. 배수아 「작가의 말」, 『에세이스트의 책상』, 문학동네 2003,198면.
  8. 김영찬 「자기의 테크놀로지와 글쓰기의 자의식」, 『에세이스트의 책상』, 문학동네 2003, 191면.
  9. 가령 제9장의 끝머리에서 “우리가 언어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우리의 관계에서 나는 점점 내가 아니었고 M은 점점 M에게서 멀어져갔다”(같은 책 144면)라는 화자의 진술은, 상징적인 의미에서 M과의 사랑(혹은 절대적인 ‘나’와의 일치)이 갖는 한계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글쓰기가 안고 있는 근원적인 한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때 언어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이상 주체 바깥의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순수한 ‘나’를 증류하려는 욕망을 근원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결코 떨쳐버릴 수 없는 인간조건의 하나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화자의 견결한 ‘자기세계’를 붕괴시키며 그녀를 수치심과 자기혐오에 휘말리게 만드는, 그래서 떨쳐버리고자 하지만 쉽게 떨쳐지지 않는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감정이나 정념(pathos)과 등가이기도 하다.
  10. 김영찬 「근대를 되돌아보는 소설」, 『작가들』 2004년 상반기호의 제3장 참조.
  11. 남진우 「무(無)를 향한 긴 여정」, 『검은 꽃』, 문학동네 2003, 327면.
  12. 서영채 「질주하는 아이러니」, 『문학동네』 2003년 겨울호.
  13. G.W.F. 헤겔 『정신형상학 I』(임석진 옮김), 지식산업사 1988, 9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