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평론

 

오감도들

신예시인들의 시세계

 

 

이장욱 李章旭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이 있음. oblako@hanmail.net

 

 

까마귀의 눈

 

시인 이상(李箱)이,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년씩 떨어지고도 마음놓고 지낼 작정이냐”(1934년 9월, 「오감도」 작자의 말)고 일갈했던 것은 70여년 전이다. 우리는 이상의 우울한 한탄에서 멀리 떠나왔다. 그 70년 동안 많은 일이 지나갔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시를 쓰고, 여전히 시를 읽는다.

아방가르드의 문화적 전성기를 통과한 서구에서, 시 장르는 확실히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걸었던 것 같다. 20세기 초엽은 문화적·정치적으로 일종의 한계, 혹은 ‘임계점’이 설정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쏘비에트 체제는 전무후무한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산물이었으며, 문화적으로도 당시는 수많은 마니페스토(Manifesto)들이 쏟아진 전위들의 전성기였다. 지금도 여전히 다양한 ‘사조’들이 명멸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것들은 대부분 저 세기초 미학의 연장선상에 있거나, 그 당대적 변형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한계 체험으로서의 글쓰기’라는 크리스떼바(J.Kristeva)의 명제는, 이제 적어도 시에 직접 적용되기 어려운 것 같다. 하긴 그렇다. 체험해야 할 한계 자체가 이미 상투적인 것, 위반과 일탈 자체가 이미 하나의 관례인 것, 이 아이러니는 확실히 21세기 미학의 딜레마가 아닌가?

지금 우리 시는 서구의 어느 나라보다 적어도 양적으로 풍요로우며, 한국의 시인들은 일본이나 서구의 언어형식을 추종하거나 그에 대한 모종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전위적 실험과 강력한 실존, 무의미시와 정치적 에너지, 전통 미학의 리듬에서 기계인간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많은 것을 우리 자신의 모국어로 거쳐왔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덧 다른 세기를 맞이했다.

오늘의 젊은 시인들은 80년대의 정치적 초자아를 의식하거나, 그것을 무의식 안에 숨긴 채 초월적 해탈의 의지로 변형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른바 ‘씨니피앙의 축제’나 ‘내면으로의 회귀’라는 90년대적 반명제(反命題)에서도 자유로워 보인다. 전근대적 풍경에 대한 애착을 시적 진정성과 동일시하건, 반시(反詩)적 일탈만이 시의 본령이라고 생각하건, 현대 문명을 비판하는 것을 시의 임무로 삼건, 삶과 사물을 새롭게 보기 위해 집요하게 일상어를 변조하건, 이미 우리 시대의 시적 영토는 그리 좁지 않다. 아무도,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라고는 한탄하지 않는다. 이상이 느꼈던 저 문화적 불모는 흘러간 것일까. 하긴, 어쩌면 이제 ‘오감도’는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까마귀의 눈으로 가득한 이 분방한 시대에, 대체 누가 저 불길하고 매혹적이며 고독한 ‘까마귀의 눈’을 자칭할 수 있겠는가?

오늘 우리가 생산하는 텍스트들은 풍요롭고, 바로 그 풍요에 의해 또 한량없이 가난하다. 시는 풍성하고, ‘한계체험’의 향유는 빈곤하다. 이 풍요와 빈곤의 역설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궁극적으로, 그 역설은 언어의 것일 뿐 현실과 실재의 것은 아니다. 현실과 실재는 언어의 빈곤이나 사유의 한계 따위를 상관하지 않고 거기 있으며, 또 그 자체로 한량없이 변화한다. 모든 것과 무관하면서 또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는 나무가, 저 창밖에서 완강하게 흔들리고 있다.

이 글은 신예시인들의 미학을 비판적으로 살피기 위한 것이다. 나는 ‘신예시인’을 90년대 말 이후 등단한 시인들로 설정하고, 손에 닿는 대로 천천히 시편들을 읽었다. ‘비판적’이라고는 했지만, 같은 시공간을 통과하고 있는 그네들의 호흡을 따라갈 수 있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그 시편들을 단일한 논리적 맥락이나 몇개의 범주적 유형 안에 가둘 의향이 없다. 한 시인의 언어는 수많은 개념적 범주들 사이를 부유할 뿐, 일정한 유형 안에 갇히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비평적 개념어들로 포괄할 수 있는 시의 영토는 제한적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내가 적을 내용은 다분히 자의적이며, 또 어쩔 수 없이 파편적이다.

 

 

오래된 미래를 넘어서

 

아마 우리 시대의 어느 문화영역도, 시단만큼 ‘오래된 미래’에 매혹되어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오래된 미래’라는 매력적인 모순어법은 오래전부터 강력한 시적 구심력을 형성해왔다. 그것은 이른바 ‘생태시’나 ‘선시(禪詩)’들과 이합집산하면서 인간의 문명계 바깥에 구축가능한 또다른 세계, 혹은 원형적 세계를 희망하였다. 하지만 저 라다크적 삶, 혹은 시적 라다크의 풍경에 이끌리는 시편들 가운데 일부는 때로 위태로워 보인다. 그 위태로움은 라다크가 대변하는 대안적 사유와 힘겨운 모색의 힘을 잃고 시적 관례에 투항하는 순간 나타난다. 이 경우 라다크는 일종의 ‘안전한 시적 퇴행’에 기여하는 것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꿈꾸는 저 ‘오래된 미래’는 정말 그것으로 괜찮은 것일까. 라다크적 삶이 전제로 삼고 있는 새롭고도 위험한 사유가 결여될 때, 라다크는 비만한 근대에 지친 이들의 정신적인 ‘휴양지’로 전락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전근대적 삶에 대한 애정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시적 정당성을 얻는 순간이 문제다. 신예시인들의 어떤, 혹은 많은 시편들 역시 이런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다음의 시는 이런 의문에 대해 하나의 답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뒷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뒷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손택수 「放心」(『작가세계』 2003년 여름호) 전문

 

손택수의 어떤 시들은 미묘한 곳에서 시적 긴장을 획득한다. 아마도 그의 가장 좋은 시 중 한편으로 등재될 이 시는 저 오래된 미래의 풍경과 정서를 끌어오되, 그에 대한 안이한 시적 예찬에 빠지지 않는다.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처럼 가볍게 얻어낸 시적 리듬 위에, 한 마리 제비가 문득 우리의 방심을 통과한다. 그 순간 저 제비는 오래된 미래의 풍경을 건너와서 순간적으로 우리의 숨구멍을 열어놓는다. 이 숨구멍은, 정적이며 느린 것에 대한 상투적인 예찬을 넘어서서, 문득 어떤 열림과 닫힘의 순간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정록과 문태준의 좋은 시들이 그러했듯이, 아마도 이 열림의 순간이야말로, 저 오래된 풍경을 새로운 것으로 만드는 마법의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느림을 찬양하고, 자연에 매혹되고, 여기에 ‘문명비판’의 뉘앙스를 덧붙이는 관습적인 방식으로는 저 열림의 순간이 포착되지 않는다. 열림의 순간은 어떤 아슬아슬함, 어떤 위태로움, 어떤 발견의 순간에만 온다.

다음의 시에서 안온한 목가는 기이하게도 ‘칼끝’의 세계 위에서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일종의 상징적 풍경이 될 수 있다.

 

심심하면 나는 칼끝을 보며 놀지

칼끝을 정면으로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흘러가는

뭉게구름이 보이지 그 위에

흰 양떼들이 노니는 게 보이지

더이상은 못 올라가지 나도 그냥 거기쯤

앉아서 놀지

(…)

물 길러 가는 흰 양떼들을 불러모아놓고

아슬아슬하게 놀고 있지

―이덕규 「칼끝에 맺힌 마지막 눈물」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문학동네 2003) 부분

 

 

나르시시즘과 실존의 감각

 

‘오래된 미래’에 대한 천착도 그 한 양상일 수 있겠지만, 90년대는 ‘과잉현실’로부터 탈출하려는 의지에 의해 설명될는지도 모른다.기형도가 대학 교정에서 ‘플라톤’을 읽었다고 쓴 것은 80년대지만, 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90년대다. 이 90년대의 우울한 ‘플라톤’을 규정하는 특징은 나르시시즘이다. 어떤 평자들은 기형도가 생래적으로 지닌 ‘우울의 포즈’를 비판하지만,이 비평은 지나치게 윤리적이며 건전한 것 같다. 기형도의 뛰어난 작품은 결코, 「위험한 가계」처럼 80년대적 자장을 의식적으로 노출하고 있는 시가 아니라, 「정거장에서의 충고」 같은 비관주의의 시편들이다. 그의 과잉우울이야말로, 실존의 감각을 우리에게 돌려줌으로써 당대의 표지가 된 것이다. ‘나르시시즘적 인간’이라는 라시(Ch. Lasch)의 표현은 사회학적 분석의 결과이지만, 한편으로는 실존의 감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자의 어쩔 수 없는 비애를 함축하기도 한다.좋은 시가 지닐 수 있는 당대성이란,당대의 현실을 뛰어나게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당대의 문학 인구들에게 강력한 ‘매혹’이나 ‘거부반응’을 일으킴으로써 성취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확실히,시의 역사성은 이 매혹과 거부의 양면성에 의지한다. 저 실존의 감각,혹은 나르시시즘적 비애는 가령 다음의 시에서도 읽을 수 있다.

 

강을 경계로 마을엔 늘 안개가 낀다

개들은 내 몸을 물고 사라지고

짖는 소리만 남아 축축이 떠돈다

친구의 손이 불쑥 나와 내 어깨를 치고

어떤 女子는 내 몸을 뚫고 지나갔다

안개 속에서 편지를 쓴다 낡은 의자에 앉아

문득, 내 生의 주석이 마르크스였다는,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

내가 사는 이 마을의 길은 모두 비스듬하다

라고 편지에 쓴다 동시상영관 같은 습습한

안개의 밤,

―우대식 「안개 편지」(『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천년의시작 2003) 부분

 

안개와 비릿한 강 내음과 낡은 의자와 동시상영관의 습한 분위기는 지나치게 낯익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에도 불구하고, 우대식의 이 구절들은 매력적이다. 특히 앞의 다섯 행은, 안개 속의 느낌에 대한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환상적인 묘사를 미묘하게 삶의 풍경에 겹쳐놓는다. 안개는 결국 생애의 모호함을 지시하는 익숙한 은유로 귀환하겠지만, 저 앞부분의 묘사에 힘입어 그것은 강력하고 생생한 실재로 시 안에 살아남는다. 정말이지 안개 속에서라면, 개들의 축축한 울음이 떠돌고, 친구의 손이 불쑥 나와 어깨를 치고, 또 여자들은 내 몸을 뚫고 사라질 것이다.

「안개 편지」의 저 우울한 화자는 플라톤이 아니라 문득 ‘마르크스’를 호명한다. ‘마르크스’가 지배하던 시대에 기형도의 플라톤은 어쩔 수 없이 우울한 단독자의 환유가 되었지만, 이제 그 우울의 자리에는 안개 사이로 출몰하는 마르크스가 놓인다. 놀랍게도,이 ‘마르크스’는 ‘후일담’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모호하고 불가해한 삶의 풍경에 소속되어 있다. 이 화자가 보여주는 우울은 자아의 강력함 대신 ‘그럴지도 모른다’ 같은 유보형 어미에 포위되어 있는데, 이럴 때 마치 그는, 정언명령으로 가득한 저 90년대적 나르시시즘의 감각에서 후퇴하려는 자처럼 보인다.

물론, 아마도, 나르시시즘의 향방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서정시의 발원지이면서, 또 그것 자체로 시의 괴로움이기도 하다. 미하일 바흐찐(Mikhail Bakhtin)이 시의 ‘독백성’을 비판한 것은 언어의 단일성 때문이지만, 결국 그 독백성은 심리적 용어로서의 나르시시즘과 근친관계일 터이다. 박정대의 낭만적 나르시시즘이 유희와 반복과 의도적 과잉언어를 통해 어떤 평원의 적요를 향하고 있을 때, 배용제의 화자가 음습한 동시상영관을 나와 현상 이면에 잠복한 무언가를 찾아헤맬 때, 그들은 과거의 나르시시즘에 결별을 고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시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적어도 그들은 전 시대의 나르시시즘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는다. 과거의 나르시시즘이 유폐된 자의 폐쇄성 안에서 불가해한 매혹을 생산했다면, 지금의 나르시시스트들은 더 명료하거나 지극한 실존, 혹은 어쩔 수 없이 혼탁하고 복합적인 존재론에 근접해가는 것 같다. 그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정언명령으로 가득한 내면적 나르시시즘이란, 이제 지겨울 때도 됐으니까. 때로 문학사란, 이 지겨움에 의해 진행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아진다, 작은 것들이 더 작아진다

작게 움직이는 것들은

먼 땅으로 향하는 눈을 갖는다

하나의 무늬를 만들려고 합쳐진다

죽지 않는다, 오래 오래

 

나는 서 있었다

큰 물결이 맨발 위로 작게 부서진다

버려진다, 참답게 슬퍼 보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그들은 떠나갔다

나는 바다 속으로 계속 걸어 들어간다

 

바다가 위험하다

죽지 않는다, 오래 오래

밀려온다

파도는 두 척으로 갈라지는 하얀 배처럼 뻗어 간다

네 크기는 이미 크기가 아니다

 

지금 바다 속에 있는 자

―김록 「작은 것들을 믿는다」(『광기의 다이아몬드』, 열림원 2003) 전문

 

위에 인용한 시는 김록의 과격한 시들 가운데 대단히 온건하고 정제된 것 중 하나이다. 이 온건한 시조차, ‘이것은 좋은 시인가’라고 누군가 내게 물으면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 시는 지나치게 관념적이며, ‘파도는 두 척으로 갈라지는 하얀 배처럼 뻗어 간다’ 같은 비유는 어딘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우회라고는 모르는 실존의 감각과 추상적 관념으로 과포화된 그녀의 시집은 ‘광기의 다이아몬드’라는 제목처럼 노골적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나의 멍청함은 포화되었다.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갓 짜낸 피를 핥는 정신의 난폭함이 내 피를 굶겼다. 달궈진 혀에서 하얀 가루들이 떨어진다. 무수한 주름살이 잘린 혀에서도 잡힌다.

순수성을 아낄 필요가 있었다. 황홀한 무호흡 상태. 부동의 능력. 그들은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김록 「궁핍함」(같은 책) 부분

 

언제나 그렇겠지만, 평범한 깨달음과 상식적인 리듬의 시는 지나치게 많다. 김록은 어이가 없을 만큼 거친 번역투의 문장과 비문(非文)에 가까운 사유를 가지고 있지만, ‘실존의 감각’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그 거칢에 의해 오히려 강력하고 독특한 자아를 보여준다.

그녀의 시편들은 고전적 형식미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잘 제어된 해체’라는 역설적 표현과도 무관하다. 저것은 그저 본능의 읊조림에 가까운 것 같다. 악마성에 귀의한 자아의 신화는 서구에서는 이미 하나의 정형처럼 되어버렸지만, 우리 시에서는 그리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로서는 그녀의 저 극단적인 언어들이 모종의 신성을 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앞서 인용한 「작은 것들을 믿는다」에서, 극도로 작은 것과 극도로 큰 것이 만나는 지점, 그것은 인간성에 대한 환멸과 신성에 대한 갈구, 혹은 그 역(逆)을 동시에 보여주는 희귀한 예가 될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언어과잉과 관념과잉 안에서, 나는 언젠가 그 과잉이 정교한 한국어 안에서 돌파력을 지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시들에 대해 나는 관념의 과잉을 단점인 것처럼 말했지만, 진이정의 좋은 시들이 그러했듯이, 실존 혹은 몸의 감각에 집요하게 뿌리박고 있는 관념은 이미 관념이 아니다. 극복해야 할 것은 시의 바깥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와 이미 완성되어 있는 해탈의 방식이지, 관념 자체가 아닌 것이다. 가령, 다음의 시는 ‘관념적’인가?

 

창밖의 뚜렷한 현실. 거대한 뿌리의

숨막힘 멀리 떨어져 있는. 언제나. 어둠.

은유의 시대는 끝났다. 여기

명확한 언어라는 모조품.

친구여. 혁명이 아름답던 은유의 날들을

내게 돌려줘. 청춘을. 부서진 내 청춘을. 꽃다운

우리 청춘 술잔 위에 떨어지는 불빛, 불빛.

불멸하는 이름. 사랑의 짝짜꿍으로.

낫과 해머. 핀란드역의 블라지미르.

역사의 기관차. 계급의 두뇌.

무너진 사랑탑에

 

눈이 내린다

 

너와 나 사이 폐허에

우리를 지켜보는 투명한 눈이

―장석원 「젊고, 어리석고, 가난했던」(『현대시학』 2002년 3월호) 부분

 

장석원의 시편들 역시 과잉의 언어를 지니고 있다. 그는 압축과 절제 같은 것에는 생래의 반항을 가졌다는 듯, 장황한 감각의 제국을 구축한다. 우대식의 ‘마르크스’가 그러했듯, 이 시 속의 ‘혁명’ 역시 후일담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곳의 실존 안에서 불연속적으로 점멸하는 현재형의 이야기이다. 80년대의 무력한 환유들은 이제 사랑의 짝짜꿍과 무너진 사랑탑의 우울한 아이러니 안에서 다시 태어난다. 이 복합적인 아이러니에 의해 ‘의미’와 ‘판단’의 영역은 모호해지고 또 풍요로워지겠지만, 실은 이 모호하면서 풍요로운 비애야말로 ‘젊고 어리석고 가난한’ 생애들의 정확한 반영일 것이다. 함성호의 과잉언어가 바로끄적 형이상학이라 할 만한 세계에 접근해갔던 자리, 혹은 김태동의 거칠고 과격한 의식의 흐름이 있던 자리에, 우리는 내면적 아라베스끄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시적 문양들을 만나는 것이다.

 

 

관찰과 변조, 그리고 성찰

 

이 시들의 풍경과는 또 전혀 다른 의지가 있다. 일인칭의 감각을 내세우기보다 가능한 한 지우는 것, 깨달음을 제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깨닫는 것, 반드시 구체적 관찰에서 출발하여 성찰에 이르는 것.

시적 관찰력이야말로, 현재 진행형인 우리 시의 가장 중요한 영토를 점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최승호의 사물 은유들이 지닌 지극한 허무, 김기택의 자연주의적 묘사력이 가닿는 신비, 그리고 최정례의 정교한 구어체가 재현하는 풍요로운 의미들 같은 것 말이다. 명징한 관찰력과 상투성에 빠지지 않는 묘사력이 그네들의 굳건한 자산이다. 그렇다면 지금 새로운 시인들의 관찰과 변조의 풍경은 어떤가.

 

몇번의 뒤척임으로 사내는 온몸에

잠을 골고루 바른다.

신선하고 맑은 힘이 온몸으로 퍼진다.

지지직거리는 몇마디의 잠꼬대가 몸 밖으로 버려지고

꿈과 꿈들 사이에 부드럽고 말랑한 연골이 채워진다.

피로와 힘겨움 같은 것들을 밤새 먹어치우는 거대한 짐승.

결국, 저 사내도 언젠가는 저 침대의 먹이가 될 것이다.

 

간혹, 삐걱이며 새어나오는 전류

버려진 꿈들의 폐기장

산더미처럼 쌓인 저 권태와 피곤함이 배어 있는 덩어리.

점점 충전 속도가 떨어져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저 사내

어쩔 수 없이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저 사내.

―박해람 「낡은 침대」(『현대시학』 2002년 2월호) 부분

 

박해람의 좋은 시들은 대부분 설득력있는 관찰과, 그 관찰에 대한 아주 자연스러운 변조에 의해 씌어진다. 문장과 문장 사이를 가로지르는 시적 비약이 아니라, 견고한 묘사력이 그의 강점이다. 사내가 제 온몸에 바른 잠에 대해 ‘신선하고 맑은 힘이 온몸에 퍼진다’고 말할 때, 저 문장은 삶이 아니라 죽음의 편에서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내의 생애는 결국 잠/죽음에 의해서만 신선하고 맑을 것이다. ‘버려진 꿈들의 폐기장’ 같은 상식적인 표현에도 불구하고, 결국 낡은 침대의 배후로 전락해가는 사내의 풍경은 뛰어난 비유와 관찰력에 의해 재현된다.

유사한 모티프와 유사한 문장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다음의 시는 「낡은 침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제공한다. 이 상이한 느낌의 기원은 역시 정교한 관찰력과 묘사력이다. 형식의 반복과 관념의 반복은 금방 지루해지지만,관찰의 힘은 풍요롭고 강력하다.

 

한 남자가 밸브를 잠근다. 만찬을 차렸던 푸른 불꽃이 손 안에 수거된다.

 

남자는 풍경의 생살을 천천히 씹으며 창문을 본다. 입 안에 수거된 살점들과 한 몸이 되어가는 동안, 겨우내 나비떼처럼 달라붙었던 유리창의 성에가 텅 빈 눈 안에 고스란히 수거된다.

(…)

남자는 온몸을 엎드린 채 바닥에 밀착한다. 창틈에서 식칼 같은 달빛이 날아와 그의 등에 꽂힌다. 만삭의 피가 누출되기 시작하자, 벽에 걸려 있던 시간이 내려와 신속하게 남자를 잠근다.

 

그 집의 유일한 불꽃이었던 남자가 어둠속으로 안전하게 수거된다.

―이민하 「밸브」(『현대시』 2003년 3월호) 부분

 

남자는 밸브를 잠그고 조리된 음식을 차려먹고 창밖을 바라본 후 잠자리에 들었을 뿐이다. 이 일상적이며 인간적인 행위를 외계의 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곧 세계 전체가 바뀌어버린다. 고기를 씹는 행위는 ‘입 안에 수거된 살점들과 한 몸이 되어가는’ 것으로 변환되고, 잠자리에 드는 행위는 ‘온몸을 엎드린 채 바닥에 밀착’하는 것으로 바뀌며, 잠드는 것은 ‘벽에 걸려 있던 시간이 내려와 신속하게 남자를 잠근다’고 표현된다. 결국 남자는 어둠속으로 안전하게 수거된다. 당연하게도, 이 낯설게 하기는 말의 의미가 아니라 말의 존재방식에 의해 한 생애의 불모를 드러낸다. 이민하의 시들은 대체로 감각적인 은유 체계들에 의거하지만, 이렇게 차갑고 정교한 관찰과 변조의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위에 인용한 시들의 건조한 관찰은 유종인과 유홍준의 시편들에 스며 있는 따뜻하거나 곡진하다고 말해야 할 관찰력과 대비적으로 논의될 수 있을 것 같다.

 

 

모더니즘의 피로를 넘어서

 

엉뚱한 얘기지만, 진·선·미는 서로 조화를 이루는 개념이 아니다. 진리와 윤리와 아름다움은 서로 배제하고, 경쟁하고, 지배해왔다. 이 세 항목은 한때 중세적 종교성 안에서 융합한 적이 있지만, 내 생각에, 진리성의 압도적 지배에 의한 이 혼종이 그리 좋은 결과를 낳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근대 미학의 역사는 아름다움이 진과 선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해서, 근대 이후의 미학은 완강한 진리와 윤리적 가치론에서 스스로를 분리하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벌여왔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더니즘이라는 테제는 언어적 자의식이라든가 현대성에 대한 관심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몇몇 예외를 제외한다면 모더니즘의 정신이란,그의 언어가 구축하는 세계를, 진리나 윤리와 무관한 영토에 세우려는 의지에서 기원한다.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모더니즘의 피로’는 결국 이 분리와 미적 독립성에 대한 회의 혹은 의문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 피로감이 시의 바깥이 아니라 시의 내부로부터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못된 아이들은 이렇게 항상 머리 위에서 논다. 106호 고독한 남자는 갑자기 참을 수 없었다. 천장이 아니라 천둥 같잖아. 오늘밤은 조용해야 해.

 

오늘밤은 쉬어야 해. 106호 고독한 남자는 206호 고독한 여자가 된다. 우리집엔 애들이 없어요. 그리고 난 쭉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어요. 306호는 살인사건 이후 칼 한자루까지 사라졌잖아요.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집이 됐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좀더 올라가봐야 해요. 못된 아이들은 빠르게 기어올라요.

 

어디쯤에서 배꼽은 쑥 빠질까요? 옥상까지 올라온 우리들은 43명이다. 우리들은 일제히 하늘을 노려본다. 1206호 별빛같이 고독한 남자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김행숙 「오늘밤은 106호에서 시작되었다」(『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 전문

 

시인이 꽃의 이름과 나무의 습성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19세기적 고정관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살아가는 곳이 꽃의 세계와 나무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는 꽃과 나무에 있지만, 또 아스팔트와 키보드와 아파트에도 있다. 김행숙의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정말이지 저 1206호의 남자라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아주 먼 곳에서, 우리 시대의 인간적 진실에 가닿을 것이다.

이 시도 그렇지만, 김행숙의 시들은 대체로 구심적이다. 난해해 보이는 그녀의 시들에는 그녀가 재현하고 싶은 하나의 느낌이 들어 있으며, 시의 세부들은 그 느낌에서 멀어질 듯 멀어질 듯 끊임없이 집중한다. 이 느낌의 구심력은 때로 생산적이지 못한 오독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그 느낌이 애초에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일 때, 그녀의 언어들은 말의 의미가 아니라 말의 일탈과 비약으로 스스로의 관례를 지우고, 그 지움에 의해 새로운 시적 환기력을 얻어낸다. 요컨대 306호에서 일어난 살인사건과 사라진 칼 한자루가 저 천장의 소음과 어떤 관계인지 규정하거나 해석하려는 것은 부질없다. 306호의 살인사건은 1206호 남자의 울음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것은 끊임없이 위층의 소음에 시달리는 이 아파트를 통해 결국 그녀가 전하고 싶은 모종의 느낌, 어떤 적막의 느낌 안에서 서로 만날 뿐이다.

어울리지 않는 주어와 술어를 배치하거나, 혹은 문장과 문장을 간결하고 단속적으로 배열하는 것은 그녀의 장기이다. 그녀의 시는, 야콥슨(R.Jakobson) 식으로 말하면, ‘선택의 축’(잠언)이 아니라 ‘결합의 축’(사건)에서 주로 발생한다. 106호의 소음이 1206호까지 올라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한 남자의 느낌에 가닿는 것이다. 다음의 시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의 느낌에 도달하고 있다.

 

이 지도에는 비오는 날이 빠져 있다 두통이 심한 날도 빠져 있고 무엇보다 새벽이 빠져 있다 내가 걸어다니는 이 지도에는 어제까지 안개가 끼어 있었다 꽃이 피어 있었다 꽃이 피었다가 사라진 바로 그 지점에 어제까지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누워 있는 그로부터 이 지도는 유래한다 그의 이름은 이 지도 어딘가에 숨어 있고 안개가 끝나는 지점에서 또 한 사람의 핏줄이 자라고 있다 핏줄이 자라서 사람이 될 때까지 나머지는 걸으면서 생각하기로 했다 이 지도에는 지금 사람이 빠져 있다

―김언 「걸어다니는 지도」(『시와사상』 2002년 겨울호) 전문

 

김언의 언어는 어딘지 쉽게 씌어지는 것 같은데도, 굳건하게 시적인 지점 위에 세워져 있다. ‘이 지도에는 비오는 날이 빠져 있다’는 저 첫 문장만으로도, 이 시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 지도에 어제까지 안개가 끼어 있었으며, 그 지도에 꽃이 피어 있었으며, 그 지도에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 누워 있는 한 사람에게도 비오는 날과 두통이 심한 날이 있었을 테지만, 지금 그 한 사람의 지도는 내가 걸어다니는 지도가 된 후이다. 이제 우리 앞에서, 지도라는 시뮬레이션으로서의 세계와 그 시뮬레이션 바깥의 세계는 기묘하게 혼합된다. 우리는 지도 위를 걸어다니지만, 그 지도는 한 사람의 핏줄이 자라 또 한 사람의 내부로 한없이 이어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이다. 정말이지 우리 안에는, 우리 이전에 만들어진 수많은 지도들이 들끓고 있는 것이다. 김언은 문장들을 끊고 비약시키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잇닿아놓음으로써, 다른 말로 번역할 수 없는 어떤 시에 닿는다.

모더니즘의 피로는 이런 시편들에 의해 천천히, 오랫동안, 극복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조말선·이기인·이기성·정익진 등의 시편들이 이른바 시적 ‘자율성’을 통해 그 자율성의 바깥에 도달하는 풍경을 꼼꼼히 살피고 싶지만, 그것은 이 산만한 글의 용량을 넘어선다. 다만 이쯤에서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차이가 의미를 창출한다’는 모더니즘의 명제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차이가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명제의 역명제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차이를 지닌 모든 것이 유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의미를 창출하는 모든 텍스트는 반드시 차이를 지닌다. 바꾸어 말해서, 개성이 있는 모든 것이 유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유의미한 모든 것은 반드시 개성적이다. 이 글을 위해 새로운 시들을 읽어가면서, 나는 간혹 모더니즘의 피로한 얼굴을 보았던 것 같다. 개성은 시 안의 언어가 의식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이의 감각 깊은 곳에서야 겨우, 힘겹게, 완성되는 것이다.

 

 

잔혹극 시대의 언어들

 

시적 개성 따위와는 무관하게, 어떤 여자들에게 지금은 잔혹극 시대다. 그네들의 잔혹극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낡은 이분법 같은 것으로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들은 김선우의 여자들이 취했던 긍정적 도발의 어법보다는, 김언희의 여자들이 보여주었던 부정적 도발의 언어에 이끌리는 것 같다. 남자들의 제국, 혹은 완강한 구심력이 장악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적의가, 이 언어들의 궁극적인 동력이다. 이를 통해 이 시편들은 때로 남성적 비평언어를 돌파하여 새로운 시의 영토에 가닿기도 한다. 이 풍경들은, 여전히 가부장적인 우리 시의 가장 중요한 부면(部面)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 그네들의 잔혹극은 당연하게도 ‘아버지의 언어’에 대한 부정을 수반하며, 또 당연하게도 우리 시의 완고한 보수성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표명한다. 비시적이며 반시적인 언어의 채용이나 훼손된 신체에 대한 집요한 천착은 일종의 항수(恒數)이다. 때로 그 언어들은, 읽는이들의 온화하고 정상적인 표정을 일그러뜨리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1

그가 내 몸으로 쑥 들어왔다 와사비에 간수를 섞어 너의 귀두를 찍어먹을 테야 살짝 얼려 슬라이스한 그 살이 내 혀에 감길 때 몸은 태양을 향해 뒤로 돌아 너의 마지막 그림자가 봉합을 끝내고 부르르 떨고 있어

 

1

그래프의 수치를 믿지 마라 내 성기는 그의 위장 속에 있고 나는 씨를 보지 못해 아무런 꽃도 경매되지 않지 태양은 씨앗을 향해 고공 시위 중이시고 불꽃은 12월의 마지막 날만 빛나시고 효순이도 그녀의 친구도 다 이벤트의 오브제고 오브제는 변기라고 누군가는 그래

―최하연「요나의 고백」(『문학과사회』 2004년 봄호) 부분

 

이런 씨발, 아니,아니라고 했잖아요.참다 못한 내가 그녀의 알주머니를싹둑싹둑 가위질하자 김말이 속 당면처럼 빼곡히 들어찬 그녀들이 잘린 입 밖으로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 나는 콘택트렌즈와 치아교정기에 인조 속눈썹까지 자꾸만 벗고 또 벗어던졌다. 곤약같이 껍질 벗긴 흰 살점 덩어리, 이마저도 체증이 일어 나는 펄펄 끓는 기름 솥단지 안으로 다이빙해 들어갔다.

―김민정 「고등어 부인의 윙크」(『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 부분

 

하지만 「요나의 고백」에서 시적인 묘미를 주는 것은, 저 엽기적이며 노골적인 표현들이 아니다. ‘와사비에 간수를 섞어 귀두를 찍어먹겠다’는 진술은, 폭력과 잔혹과 자극적인 감각이 하나의 관례가 되어버린 지금 오히려 상투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효순이도 그녀의 친구도 다 이벤트의 오브제고 오브제는 변기’라는 진술에는 미묘한 아이러니가 깔려 있다. 그것은 효순이의 비극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이벤트로 만드는 상황과 뒤샹(M. Duchamp)의 ‘레디메이드 변기’까지 단숨에 치닫는다. 현실에서 전위예술에 이르는 이 이상한 말잇기 놀이는, ‘씨를 보지 못’하는 불임의 시간에 대한 환멸을 극적으로 강화한다.

마찬가지로, 김민정의 시에서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알주머니를 싹둑싹둑 가위질한다거나 흰 살점 덩어리가 기름솥 안으로 들어간다거나 부자연스러운 인체 부속품들을 벗어던지는 풍경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자극적이되 낯익은 풍경들을 떠받치고 있는 일상성의 언어가 중요하다. ‘이런 씨발, 아니, 아니라고 했잖아요’라고 말하는 화자는 이미 시적인 것 따위는 온전히 무시하고 있는 시 바깥의 화자다. ‘김말이 속 당면처럼’이라는 비유는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실소를 자아내고, 이 실소에 의해 오히려 모종의 그로테스크에 가닿는다. 다른 시에서 그녀는 ‘졸라’ 같은 노골적인 속어들을 그대로 시에 끌어들이는데, 이런 과격한 비시적(非詩的) 부사어에서 역설적으로 모종의 시적인 것이 흘러나올 수 있다면, 그것은 ‘다른 시’에 도달하는 하나의 과정이 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일상적이며 비속한 당대의 언어를 극단적으로 채용함으로써, 시의 언어와 거리의 언어 사이의 관례적 경계, 혹은 감각의 경계가 무화되는 풍경.

하긴, 권위적이며 구심적인 미학과는 전혀 다른 자리에서 출발하는데, 이미 승인된 가치의 언어나 점잖은 성찰의 언어가 개입할 여지가 있을 리 없다. 언어는 곧 그것이 반영하는 세계 자체를 ‘모델’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언어와 가치, 환상과 현실, 모더니즘의 의지와 리얼리즘의 의지는 자연스럽게 만난다. 하지만 어쩌면,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될는지도 모른다. 앞서 반복해서 적었던 것처럼, 지금은 반시적(反詩的) 전복 자체가 별다른 의미를 지닐 수 없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가장 비시적인 시들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민감하고 정교한 ‘시적 감각’을 필요로 한다. 그 감각은 시의 표층이 아니라 저 보이지 않는 심층에서 독자들의 감각을 규율하여 ‘다른 시’에 이르러야 한다. 혹시 그것이 가능하다면, 오래전 황지우의 구어·비어·속어 들 안에 자재롭게 내재하던 ‘시적인’ 감각과는 전혀 다른 지점에, 그 시편들의 자리가 마련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유리의 기술

 

위에 인용한 두 편의 시와는 무관한 얘기지만, 다른 하나의 문제는 선규정적인 코드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미 시의 바깥에 완성되어 있는 관념적 코드들이 시에 인입(引入)될 때, 그것은 시의 풍요로움을 결정적으로 훼손한다. 정신분석이 애용하는 상징과 도식에 오염된 대상들(가령 ‘아버지’, 혹은 남성 성기의 상징들)을 그 도식과 근접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 도식화의 위험에 결코 빠지지 않는 것, 그것이 시인의 감각이다. 당연하게도, 비평적 도식에 의해 온전히 번역이 가능한 시는, 이미 시가 아니다.

그러므로 미학은 혼탁해지면 혼탁해질수록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종류이건, 순수주의는 세계를 폐쇄하고 세계를 고립시키는 방식에 의해서만 존속한다. 그 순수주의가 사랑이건 해탈이건 종교이건 이데올로기이건 생태학이건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이건 말이다. 순수해질수록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관념에 의지하며, 관념에 근접할수록 그것은 개념과 도식에 굴복한다.

현실과 실재는 관념이 아니므로 언제나 혼탁하고, 언제나 규정 불가능하며, 언제나 도식에 종속되지 않는다. 개념에 의해 적절히 설명되는 시는 도식적인 비평의 대상이 되기에 좋을 뿐이다. 몸의 혼돈에 의해 순수한 관념을 탁하게 만든다는 것, 느끼는 것에 의해 판단을 모호하게 만든다는 것, 아예 판단이나 개념과는 무관한 어떤 지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것. 그러므로, 시의 기술이란, 다음의 시에 나오는 유리의 기술과 유사할 것이다.

 

유리창에 몸 베인 햇빛이

피 한 방울 없이 소파에 앉아 있다

(…)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풍경의 살을 떠내는

저 유리의 기술,

―정병근 「유리의 技術」(『현대시』 2003년 10월호) 부분

 

 

언어와 실재의 송과선

 

지금까지 나는 산만하고 파편적으로 생각을 나열했다. 환상과 서사 안에서 풍요로운 시편들, 디지털과 기계 미학의 시편들, 그리고 미니멀리즘의 의지를 지닌 시편들에 대해서도 더 말하고 싶지만, 지면상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다만 마지막으로 문학적 송과선(松果腺)에 대해서는 적어두고 싶다.

데까르뜨의 글을 읽다 보면 ‘송과선’이라는 해부학적인 용어가 나온다. 송과선은 척추동물의 간뇌에 있는 내분비선이라고 하는데, 데까르뜨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여기에서 만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하필이면 송과선인 이유는, 이 내분비선이 뇌의 여러 기관 중 유일하게 이원적 쌍을 이루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데까르뜨는 해부학이라는 당대의 유행을 빌려서, 영혼과 육체의 철학적 분리라는 근대철학의 딜레마를 해결하고 싶어했다. 데까르뜨에게 송과선은 비유가 아니었겠지만, 지금 우리에게 이 송과선은 강력한 암시이자 은유일 수 있다.

가령, 이 송과선을 나는 언어와 실재에 적용해보고 싶다.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이 서양 정신사의 오랜 폐습이듯이, 언어와 현실의 대립, 혹은 상호 배제는 근대 이후의 오래된 문학적 인습이다. 관례적 코드의 변환을 시의 임무로 이해하는 야콥슨의 후예들과, 궁극적으로 현실과 실재의 변환을 꿈꾸는 루카치의 후예들은 배타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날 이 배타성은 그 자체가 지겨울 만큼 상투적이 되어버렸다. 언어와 현실, 미학과 성찰, 시와 삶, 말과 사물의 ‘송과선’을 발견해내는 것, 그게 중요하다. 이 ‘발견’은 물론 시적 전략 따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시적 본능의 산물일 것이며, 이 송과선적 본능이야말로 ‘새로운 오감도’의 풍경을 구축하는 관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