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논단

 

대중의 눈을 통한 ‘근대’의 재발견

 

 

김백영 金白永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 rangzang@naver.com

 

 

1. 왜 ‘근대’인가

 

최근 몇년간 한국의 대중교양서 시장에 일고 있는 ‘근대’ 역사서의 바람은 몇가지 점에서 충분히 징후적이다. 우선 누구나 알고 있는 ‘뻔한’ 일제 식민지 시기, 그 암울했던 시대를 다룬 연구서들이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이며, 기성 학계에서 아직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그 시기의 ‘색다른’ 모습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서의 연구성과들이 대중독자들에 의해 먼저 전유되고 있다는 사실도 설명을 필요로 하는 이례적인 현상이다. 필자가 볼 때 이 현상은 일단 두 갈래로 해석된다. 하나는 이미 199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역사물의 붐이며, 다른 하나는 ‘지금 여기’ 우리 삶의 환경을 구성하고 있는 ‘근대’ 혹은 ‘현대’에 대한 자의식의 출현이다.

우선 역사물의 인기몰이는 특정 시대와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적 과거 일반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근대화’와 ‘초고속 성장’의 시대에 망각되어버린 역사와 전통에 대한 회고 정서가 투영된 것으로 읽히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의 문화적 소비욕구의 증가와 미디어시장의 확산과 함께 ‘이야깃거리’에 대한 항상적인 수요과잉과 소재빈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역사물이 개발되고 소비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1 하지만 그 저류에 놓여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흐름은 스테레오타입화된 기성 역사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사’를 알고 싶어하는 대중의 지적 욕구의 확산이다.2 그리고 이 새로움의 추구에는 서구중심주의적 보편사관에 짜맞추어 편성된 교과서적 역사의 ‘정통성’에 대한 회의적 시선이 깔려 있다. 어쩌면 ‘역사학의 위기’는, ‘포스트모던’ 역사학의 학문적 도전보다는, 이처럼 역사를 다채롭게 소비하고 싶은 대중의 욕망에 토대를 둔, 미시적 일상사의 잠식에 의한 소리없는 균열과 해체를 통해 현실화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고대’나 ‘중세’가 아니라, 식민지 시기를 핵심으로 하는 우리의 ‘근대’에 관한 것이라면 좀더 복잡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돌이켜보면, 지적 반성의 대상으로서 ‘근대성’(modernity)이란 용어가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년 전부터이다. 1990년대,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파산해버린 사회주의 변혁이론의 거대담론을 대체한 것은 ‘탈/후기/포스트(post)’ 담론―‘탈/후기’구조주의 철학, ‘포스트’(맑스주의/모더니즘/포드주의)론, ‘탈/후기’(산업사회/자본주의)론―이었다.이러한 ‘탈근대’적 보편이론의 유행은 그 현실도피적 경향성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확실하고도 중요한 공통인식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사회와 역사에 대한 근대적 가정, 즉 보편적이고 합법칙적인 역사의 ‘발전’에 대한 존재론적 신념과, 세계의 합리적 구조를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인식론적 확신에 대한 의심이다. 여기에 이른바 ‘68세대’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서양사 연구의 새로운 흐름들이 국내에도 급속히 번역·소개되었으니, 특히 ‘3대 근대성 비판의 역사가들’―푸꼬(M.Foucault), 엘리아스(N.Elias), 아리에스(P.Ariés)―의 저작들은 국내에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역사는 더이상 이성의 ‘카프카적 감옥’이 아니라, 역사가가 자신의 무한한 상상력을 투여할 수 있는 해방공간이 되었다.

한국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에야 걸음마를 시작한 ‘근대의 재발견’ 움직임은 이러한 외래 담론의 영향 아래에서 태동했다. 새로운 대상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접근, 그 ‘혁신’이 더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역사학의 자가발전의 논리적 귀결이 아니라, 역사학의 ‘외부’로부터 주어진 충격과 자극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자리잡기 시작한 그 일련의 새로운 흐름들의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방식도, 여전히 학계의 ‘강한 의지’에 기대고 있다기보다는 대중의 ‘자각과 욕망’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학은 역사 속의 ‘대중’을 발견하기 시작했고, 대중은 자신 속의 ‘역사’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랜 외면의 시간 끝에, 마침내 한국에서도 역사와 대중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만남의 장소와 대화의 구체적 내용을 확인할 차례다.

이 글은 그 ‘첫만남’으로 널리 알려진 김진송 『현대성의 형성: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현실문화연구 1999, 이하 『딴스홀』) 이래 만남이 이루어져온 여러 장소들 가운데 대표적인 여섯 개의 사례를 골라, 둘씩 짝을 지어 세 부류로 나누어 서평의 형식으로 다루어보고자 한다. 첫번째 부류는 만남의 초기적 특성을 드러내는, 자료집에 가까운 책이다. 『딴스홀』과 신명직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만문만화로 보는 근대의 얼굴』(현실문화연구 2003, 이하 『모던뽀이』)은 만 4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그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은 ‘자매편’으로 독자들에게 수용되었다. 두번째 부류는 철도나 도시 건조환경(建造環境, built environment)과 같은 물질적 요소를 직접적 대상으로 한 것으로, 박천홍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철도로 돌아본 근대의 풍경』(산처럼 2003, 이하 『매혹의 질주』)과 노형석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생각의 나무 2004, 이하 『모던의 눈물』)이 그것이다. 마지막 세번째 부류는 문학연구에 방법론적 토대를 둔 문화사적 연구이다. 권보드래 『연애의 시대:1920년대 초반의 문화와 유행』(현실문화연구 2003)과 천정환 『근대의 책읽기: 독자의 탄생과 한국 근대문학』(푸른역사 2003)이 이에 해당한다.

 

 

2. 낯선 ‘그들’에게서 낯익은 ‘우리’를 발견하다

 

몇년이 지난 지금의 싯점에서 다시 들춰보면, 『딴스홀』의 자문자답 구조는 의외로 단순하다. 김진송은 다음과 같이 묻고, 답한다. “우리 역사에서 ‘현대성이 형성된 곳’은 어디인가?…… 1930년대.”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간 당시 이 책이 큰 파장을 일으키며, 뒤이어 나올 여러 편의 ‘근대 씨리즈’의 신호탄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의 문제제기는 ‘현대성’에 대한 재정의에서 출발한다. 우선 그는 현대성을 논해왔던 학계의 지배적 방식들―사회과학계의 보편적 도식과 유형론이나 역사학계의 사건사를 통한 민족사 혹은 민중사적 서사의 전개―을 거부한다. 저자에게 ‘현대’는 이처럼 추상적이거나 거창한 것이 아니라 ‘현대인’에게 물과 공기처럼 일상에 널려 있어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그 무엇과 같은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소박하고 독창적인 ‘현대성’의 정의에 입각해 한국 근대사의 자료더미 속에서 그 흔적을 탐사한다. 그 결과, ‘민족사의 암흑기’ ‘병참기지화의 시대’로 알려진 1930년대의 대중잡지 속에서 ‘현대성’의 노다지를 발견한다. 그곳에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책의 제목이 ‘현대성의 형성’이 아니라 ‘딴스홀을 허하라’로 기억되었듯, 책은 참신한 문제제기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저자는 오늘에까지 이어지는 ‘현대성’이 1930년대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연속선상에 개재되어 있는 연속과 단절, 주름과 굴곡의 문제는 도외시하며, 그것이 경험적 현상의 허위적 연속성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별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유사한’ 현상의 이면에는 ‘뭔가 다른’ 힘이 작용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이를테면 식민지적 특성에서 비롯된 어떤 구조적 힘이 배후에 존재하지는 않았을까? 30년대의 오렌지족 ‘모뽀·모꺼’가 떠다닌 표층의 파도 밑에는 무수한 기아와 빈곤, 실업난과 생활고의 끝모를 심해가 요동치고 있지 않았던가? 예컨대 저자는 책제목이 된 ‘식민지 조선에 댄스홀을 허하라’라는 진정서를 자료로 실었지만, 왜 이 요구가 끝내 실현되지 못했는가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저자가 강조하듯, 30년대 댄스문화의 대중화는 분명 새로운 욕망의 출현과 육체에 대한 감수성의 ‘현대화’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퇴폐적 매춘의 확산은 허용하면서도 건전한 댄스홀 문화의 확산은 불허하는 식민권력의 이중적 통치전략이 작동하고 있다. 과연 그 권력마저도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부권력과 연속적인가? 저자가 가정하는 ‘현대문화의 연속성’의 간명한 가설 위에 ‘식민지적 근대’의 연속과 단절에 관한 난문이 들어설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저자가 대상 시기를 ‘근대’로 설정하고 있으면서도 계속 그곳이야말로 ‘현대성’의 형성지라고 주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딴스홀』 이후 4년, 누가 보더라도 그 후속작임이 분명해 보이는 한 권의 책이 같은 출판사를 통해 발간되었다. 하지만 『모던뽀이』는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 초에 걸쳐 석영(夕影) 안석주(安碩柱)가 그려낸 만문만화(漫文漫畵)를 분석한 신명직의 박사학위논문을 단행본으로 만들어 출간한 것이다. 저자의 연구성과는 일차적으로는 물론 석영의 작품자료를 수집·정리한 데 있겠지만, 더 나아가서는 석영의 ‘촌철살인’에 대한 분석, 즉 시대상을 포착하고 해석해내는 석영의 시각과 입장 및 독창적인 표현법에 대한 저자의 분석에 있다. 안석영이 ‘무엇을’ 보았나가 아니라 ‘어떻게’ 보았고 ‘어떻게’ 표현했나가 저자의 핵심적 문제의식인 셈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무엇을 보았나’와 ‘어떻게 보았나’의 문제가 뒤섞여 등장하며, 애초의 논문에 첫부분에 있었을 ‘산책자의 시선’에 대한 분석을 맨 뒤(제6장)로 돌려, 전체적으로 만문만화라는 독특한 장르를 통해 재현된 당시의 시대상을 소개하는 일종의 자료집으로 읽힌다. 저자는 석영의 작품들을 주제별로 다섯 가지로 분류해 분석하고 있지만, 산발적으로 나열된 자료들의 압도적인 시각성에 눌려 텍스트의 논리적 흐름에 집중하기는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텍스트가 충분히 분석적이라는 느낌을 주지 못하여, 석영이라는 인물 혹은 만문만화라는 장르의 성격에 대해 충분히 거리를 두지 못한다는 의구심이 든다. 저자가 지적하듯, 20년대 후반 카프(KAPF)활동 경력을 가진 석영은 계급모순이나 자본주의의 경제적 문제에 대해서는 탁월한 이해의 수준을 보여주지만(제5,6장), 구습을 타파하는 신여성들이나 새로운 결혼문화, 가족관계의 변화에 대해서는 다소 보수적인 입장에서 냉소적이고 혼란스런 태도를 노출하는데(제2,4장), 저자는 이러한 시선의 특징 내지 한계점에 대해 그다지 명확한 분석이나 비판을 내놓지 않는다.

저자가 강조하듯, 당대의 사회상을 바라보는 석영의 ‘산책자적 시선’은 분명 당대 군중의 통속적 시선을 초월하는 관찰자적 시점에 서 있다. 하지만 석영의 시선 또한 시대적·개인적 한계를 갖고 있으며, 더구나 그의 만문만화는 당대의 저널리즘이 갖고 있는 한계를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다. 이 책이 단순한 자료집의 수준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석영의 만문만화가 드러내는 저널리즘적 한계를 지적하고 그가 어쩔 수 없는 당대인으로서 보지 못한 이면의 진실을 규명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석영의 혜안이 담긴 만문만화를 해석하고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데 주력한다. 그래서 4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모던뽀이』는 좀더 시각적인 자료로 업그레이드된 『딴스홀』의 아류로 읽힌다. 이들 두 권의 선구적인 풍속지적 연구가 재차 강조하여 보여준 것은 식민지시대에 ‘과잉’이랄 정도로 명백히 실존했던 문화적인 ‘근대성’의 실체이다.

하지만 이 문화적 근대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도시성’(urbanism)의 부산물이다. 근대적 건조환경이 집적되어 있고 이질적인 문화적 존재와의 접촉 빈도와 밀도가 높아지는 도시공간이야말로 인간의 삶과 문화, 의식과 정서의 심오한 근대적 변화를 가져오는 일차적 요인이다. 여기에서 도시공간과 물질문명의 문제를 다루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두번째 부류의 책들은 도시와 철도를 다룬 책들이다. 우선 겉보기에 이들은 같은 주제를 다룬 이전의 연구서들에 비해 훨씬 더 가볍고 날렵한 스타일을 선보이며 대중 독자에게 성큼 다가서는 면모를 보인다.

 

 

3. 빼앗긴 들에는 결코 봄이 오지 않는다?

 

『모던의 눈물』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풍성한 사진자료들이다. ‘사운(史芸) 이종학 선생이 평생에 걸쳐 수집한 수만점의 희귀 사진자료 가운데 엄선한 391장을 수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책은 자료를 탐내는 전공자들은 물론, 관심있는 독자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거기에다 저자 노형석은 서문에서 ‘정치·사회제도의 폭압성과 소비문화의 매혹이 뒤얽힌 근대생활의 파노라마’를 식민지 근대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기본전제로 놓고, 식민지 시대를 ‘일부 독립투사나 선각자들의 항쟁사, 정치·경제적 모순 등의 개념’ 중심으로 사고해온 기존 관점을 넘어서, 근대의 참모습, 즉 ‘전기와 전화, 신작로, 철도, 전차, 버스, 까페촌과 같은 근대문물들 앞에서 뒤바뀐 감수성과 인간관계, 일상생활양식의 다기한 양상들’을 살펴보겠다는 참신한 문제의식을 피력한다. 과연 본문은 이런 문제제기에 걸맞은 충실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을까?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철도·전기통신·도로·상가·탈것 등 다섯 가지의 대표적인 ‘뒤틀린 근대성의 상징들’을 통해 식민화에 의한 왜곡된 근대성의 도시적 양상을 그려내며, 제2부에서는 조선 8도의 주요 도시들이 식민지적 근대화 과정이라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들어가는 양상을 지역별·도시별로 개관한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손정목 선생이 밝혀낸 사실을 골조로 하여 몇몇 지방도시사의 내용을 덧붙여 가공해낸 텍스트는 새롭게 공개된 사진자료에 어울리지 않는 낡은 것으로 읽히며,이미 『딴스홀』과 『모던뽀이』의 세례를 받은 독자들의 감수성에 호소하기에는 진부해 보인다. 굳이 이 책이 상식적 수탈론에서 한발 더 나아간 점을 찾자면, 그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러한 상식적인 사실을 철도·전기·도로·상가·전차 등의 ‘근대문명의 이기’ 각 부문별로 재차 확인한 것이고(제1부), 다른 하나는 일제의 지배정책과 수탈전략이 조선 8도의 각 지방 주요도시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관철되었는지를 개관해주고 있다는 점이다(제2부).

하지만 여전히 ‘침략의 의도’와 ‘수탈의 목적’만이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가운데, 새로운 도시환경이 도시민들의 일상생활에 실제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의 문제는 수박 겉핥기로만 다루어지고 만다. 또 2부에서는 각 도시들의 주요한 사건사나 공간적 특징들이 포괄적으로 언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단편적인 사실의 나열에 그침으로써, 화보와의 유기적 연관을 통해 각 도시들의 인상적 특징을 드러내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다. 필자로는, 사진자료와 함께 주요도시의 지도를 첨부했더라면, 그리고 도시들을 유형별로 묶어서 예컨대 전통도시(경성·평양·대구·개성·진주 등), 항구도시(부산·인천·군산·목포·원산 등), 군사도시(용산·나남·진해 등) 들의 공간적 특징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논했더라면 시각적 자료의 가치가 좀더 잘 살아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또 한가지, 수록된 사진의 출처를 밝히지 않은 점도 이 책의 자료집으로서의 가치를 크게 떨어뜨리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식민지 시기 도시사 연구 자체가 이제 겨우 시작단계에 불과한 실정에서, 이 책의 텍스트가 노정하고 있는 결함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나마 『향토 서울』이나 『서울학 연구』와 같은 학술지를 통해 꾸준한 연구성과를 축적해왔고, 최근에는 정도(定都)6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학술연구에 대한 대대적 지원도 있었던 서울은 사정이 나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수도 경성의 ‘진실’을 밝히는 작업은 아직도 숱한 연구과제들을 남겨두고 있다. 연구가 새로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다르게 질문하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다루는 대상은 다르지만 『매혹의 질주』는 확실히 좋은 참고가 된다.

『모던의 눈물』의 다소 무미건조한 텍스트에 비해 『매혹의 질주』의 화려한 텍스트는 확실히 첫눈에 독자를 사로잡는다. 저자 박천홍은 식민지 수탈의 주역이었던 철도의 어두운 역사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수탈론의 진부한 민족주의적 언어에서 벗어나, 유려한 문체와 스펙터클한 어휘들로 철도의 문화사를 그려낸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7부의 향연은 개항기부터 일제 말기까지를 종횡무진하며 철도가 근대적 삶과 접촉하는 모든 면면을 빠짐없이 매끄럽게 어루만진다. 이 맛깔스러움과 흥미진진함이, 저자가 서두에서 제기하는 우리 사회의 ‘근대성과 식민성의 횡단선들의 모양과 깊이’를 충실히 발굴해내는 학문적 성과와 균형을 이룰 수만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련만!

이 책은 우리에게 철도가 ‘근대문명의 축복’이자 ‘제도적 폭력의 서막’을 알리는 ‘양날의 칼’이었다고 규정하면서 시작된다. ‘유토피아’이자 ‘디스토피아’로서 철도의 이중성은 책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핵심적 테마이다. 하지만 서양의 ‘멋진 신세계’의 경험과는 대조적으로, 식민지 현실에 대한 분석에서 논의의 무게는 ‘오욕의 연대기’로서, ‘디스토피아’로서의 식민지 철도의 암흑면에 놓여 있다. 문제는 ‘근대성’으로 인한 디스토피아와 ‘식민성’으로 인한 디스토피아가 엄밀한 구분 없이 혼동되어 반복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제3부를 보면, 앤더슨(B.Anderson)의 인쇄자본주의론, 벡(U.Beck)의 위험사회론, 알튀쎄르(L.Althusser)의 호명이론 등 거장들의 근대사회 비판론이 총동원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것을 통해 저자가 분석하는 것은 우리 역사의 ‘근대성’이라기보단 ‘식민성’이며, 그나마도 분석내용이 너무나 빈약하다. 또 각각 철도와 결부된 도시공간의 변화, 시선의 변화, 시간질서의 변화를 다루는 제4~6부의 논의에서도, 오스망(B.Haussmann)의 빠리 건설, 런던의 수정궁 대박람회와 중세 유럽의 ‘장기지속의 시간’이 식민지 조선의 도시 건설과 조선물산공진회와 총독부가 선포한 ‘시(時)의 기념일’과 무슨 필연적 연관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이처럼 각 장은 서구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풍성한 소개로 막을 열지만, 막상 본격적 논의가 전개되리라 기대되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분석하는 뒷부분에 가서는 상대적으로 허전하고 빈약하다. 문제가 심각한 것은 그것이 단지 내용성의 불균형 문제가 아니라, 양자의 논의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못하고 병렬된 채 겉돌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보기에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서양열강과 식민지 조선의 매개고리가 되는 ‘일본의 근대’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철도에 대한 논의는 ‘제국의 폭력’을 논하는 제2부에서 약간 언급될 뿐, 이후의 모든 논의들은 철저히 서구의 근대 철도의 경험을 통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이 ‘일본을 건너뛴 채’ 식민지 조선의 경험과 직결된다.3 그밖에 개항기~일제 말기를 별다른 시기구분 없이 넘나들며 단편적인 에피소드 위주로 전개되는 구성도 작지 않은 결함으로 눈에 띄며, 철도노선도나 승객·화물량 등의 운수실태, 영업수지 등과 같은 수량적 자료가 전혀 제시되지 않은 것도 학술적 가치를 반감시킨다.

결국 도시적 삶의 세밀화를 담아낸 새로운 사진자료들이나, ‘근대문명의 총아’ 철도의 프리즘을 통해 재구성된 식민지 시기 한국의 지리풍속지는 다시 수탈론으로 결론맺는다. 두 책 모두 문제제기는 새롭지만, 결론은 진부하다.사실 그것은 대상 자체가 가진 속성에서 기인한다. 도시와 철도는 분명 ‘수탈’의 의도로 환원되지 않는 ‘근대성’의 효과를 발산하며, ‘효과’는 결코 ‘의도’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할 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에서 도시와 철도가 제아무리 ‘근대성’을 품어내고 실어나른다 해도 그것의 압도적인 수탈적 ‘본질’마저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진짜 문제는 도시나 철도와 같은 무대장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서 연기를 펼치는 사람들에게 있다. 마지막으로 다룰 두 책은 모두 근대적 주체의 탄생, 근대인의 내면세계 형성에 촛점을 맞춘 연구들이다.

 

 

4. 대중과 만나기 위해서라면, 역사의 변신은 무죄?

 

『연애의 시대』는 국내 최초로 시도되는 ‘연애의 사회사’이다. 좀더 엄밀히 말하면 이 책은 1920년대 초의 5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연애의 탄생’을 다룬다. 3·1운동이라는 전민족적인 피의 희생이 끝난 지 불과 1,2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들이 너나 할것없이 연애에 몰두한, 이 기이한 ‘연애열’ 현상이 저자 권보드래의 연구대상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던지는 질문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이다.

그는 특유의 섬세하고 절제된 언어로 당시의 연애열이 표출된 구체적 양상―신조어·헤어스타일·패션·소설·편지·정사(情死)·육체관·정조관 등―을 세밀하고 꼼꼼하게 묘사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20년대 초의 ‘연애열’ 현상에 대한 한편의 보고서이다. 저자는 이 현상에 대한 ‘설명’을 유보한 채, 소설과 신문기사, 잡지의 삽화, 만화, 광고 등의 다양한 자료들을 동원하여 당대인들의 내면세계를 복원해내는 데 주력하며, 그 과정에서 소설 속의 인물과 실존 인물,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허물면서, ‘연애’라는 공통 관심사를 통해 당시 사람들과 현재 독자들의 은밀한 내면세계를 시공을 초월하여 접속시킨다. 이 점은 이 책이 대중을 불러모을 수 있게 만드는 가장 큰 장점이자, 역사에 무지한 독자조차도 순식간에 당시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만드는 크나큰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장점과 미덕은 곧 약점과 한계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신이 ‘연애의 시대’라고 이름붙인 이 시기를 사실은 ‘개조론의 시대’라 부르고 싶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느 쪽 이름을 붙이건, 그것은 저자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책을 통해 논증되는 것은 단지 ‘연애열’이라는 현상이 있었다는 사실뿐, 그것을 ‘○○의 시대’라고 해석할 수 있는 어떠한 이론적 정당성도 이 책은 제공하지 못한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무수한 질문들―‘개조론의 시대’를 구성한 거시적·구조적 요인들이 ‘연애’라는 현상의 출현에 어떤 변수로 작용했는지, 기생·여학생·구여성·신여성 등의 다양한 역사적 주체들이 당시의 국면에서 어떤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구습타파’를 부르짖던 개조론과 연애열이 1930년대 도시문화의 타락상과는 어떻게 연결되는지 등―에 대한 답변은 저자의 의무사항이 아니다.

따라서 이 책은 학술적 연구서로서의 성격도 띠고 있지만, 오히려 ‘연애 이야기’를 소재로 한 가벼운 대중적 읽을거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보여준다. 때문에 이 책은 학문적으로만 본다면 ‘설익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역사학의 대중화 혹은 퓨전화의 실험을 선도하고 있는 듯 보이는 ‘형식의 파괴’는 오히려 이 책만의 독특성이다. 그 점에서 이 책은, 그 실험이 성공적이든 실패로 끝나든, 역사와 대중의 만남에 있어서 새로운 하나의 방식을 창안해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의 책읽기』는 국내 최초의, 그것도 본격적인 ‘독서의 사회사’이다. 저자 천정환의 박사학위논문에 기초해 만들어진 이 책은, 문학사의 정통적 대상과 방법에서 일탈한, 새로운 방식의 문학사 연구이며, 엘리뜨가 아니라 대중을 중심에 놓고 본, 그리고 글쓰기가 아니라 글읽기를 통해 본 최초의 한국 근대문학사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근대의 책읽기』가 다루는 시기는 한국에서 근대적 독자가 출현하고 분화하고 정착한 시기, 문자문화의 헤게모니가 확립된 1920~30년대이다. 이 시기는 새로운 독자 형성의 문화적 조건들―소설의 대중화, 문맹과 이중 언어라는 식민지적 상황, 묵독과 시각문화의 형성, 글쓰기 문화의 성립―이 형성된 시기이자(제2장), 이에 기반해 문학 독자층의 분화가 이루어진 시기이다(제3장). 말하자면, ‘연애의 시대’가 기생과 여학생, 구여성과 신여성이 공존한 시기이듯, ‘독서의 시대’도 ‘전통적 독자’와 ‘대중독자’ ‘고급독자’가 공존한 시기였으며, 그 결과 이 시기는 각종 처세지침서(‘매뉴얼’)와 포르노그래피, ‘누벨바그’와 아동서, 족보와 『정감록』과 같은 ‘비동시대적’ 출판물들이 공존한 시대였다. 따라서 ‘독서의 사회사’는 문학사적 연구의 한계를 넘어서, 당시의 독서현상이 놓여 있는 사회적·문화적 조건들에 대한 탐구 혹은 다양한 역사적 주체들의 사회적 역관계에 관한 사회사적 문제제기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한다. 별다른 수입이론이나 선행연구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방대한 양의 자료에 대한 독자적인 수집과 정리 작업을 통해 식민지 시기 독서의 사회상을 온전히 재구성해낸 저자의 성실함과 뚝심은 실로 경이롭게 느껴진다.

하지만 저자는 연구주제의 확장이나 규명해낸 사실들에 대한 좀더 적극적인 이론적 해석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시급한 문학사적 쟁점을 향해 오히려 문제를 좁혀 들어간다. 그래서 저자는 뒷부분에서 근대적 소설읽기가 여성과 학생을 주독자층으로 하여 식민지 도시중간층의 문화로서 정착되는 과정을 분석한 다음(제4장), 근대문학의 정전이 구성되는 과정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제5장 2절)을 통해 문학사의 해체를 시도한다. 결국 문학·역사학·사회학의 학제간 경계를 허물며 출발한 그의 연구는, 다시 문학사로의 재영토화로 귀결되고 만다. 하지만 대중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저자가 자신의 학위논문을 변신시키는 데 투여한 노고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연애의 시대』와 『근대의 책읽기』는 『딴스홀』 이래 구체적 자료를 통한 일상사적 연구의 흐름이 주제별·계열별로 정착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본격적으로 ‘○○의 탄생’ 혹은 ‘○○의 사회사’를 지향한 역사 연구물이, 그것도 명백히 대중을 겨냥해 과감한 ‘변신’을 시도한 두 책이 모두 국문학 전공자들로부터 나왔다는 사실도 설명을 요하는 이채로운 현상인 듯싶다. 아마도 문학자료가 당시 사람들의 삶의 안팎을 읽어내기에 가장 적합한 자료이며, 또 문학연구자들이 그러한 자료를 가공하고 해석하는 데 탁월한 기량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리라.4 한가지 우려를 덧붙이자면, 이러한 성격의 글들이 1990년대 이후 일본에서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는 비슷한 성격의 ‘근대 씨리즈’의 모작이 될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적절한 참조와 적절한 거리두기가 필요할 것이다.

 

 

5. 새로운 ‘근대’를 찾아서

 

지금까지 ‘근대’를 매개로 한 역사와 대중의 세 가지 만남의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1990년대 학계의 독점어였던 ‘근대’가 대중에게 전유되는 몇가지 다른 양상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번째 만남이 생활사적 자료와 현대적 일상과의 직접적 대면을 통해 ‘근대의 대중화’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면, 이후의 만남 양상은 그것이 실현되는 두 가지 다른 형태를 보여준다. 그 하나는 식민지 시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근대적 문명의 이기들’을 수탈론의 목적론적 동어반복으로부터 해방해 도시적 일상의 근대화에 미친 효과에 대한 분석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고, 다른 하나는 식민지 시기에 출현하기 시작한 근대문화의 여러 제도적 장르들에 대한 계열사적 (재)구성 노력이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전자의 ‘구태의연함’과 후자의 ‘파격적 변신’이 이들 각각의 만남의 현주소를 지시하고 있다.

이 노력들은, 과거 학계가 제도화된 경직성으로 인해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고 있던’ 우리 근대사의 다른 모습들을, ‘외부’로부터 주어진 대중의 자극에 힘입어 볼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마치 과거 아날학파가, 랑케(Ranke)사학이 ‘근대’를 영웅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암흑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뜨려버린 중세를 독창적인 ‘장기지속’의 언어를 통해 ‘아름다운 시절’로 재생해냈듯, 우리의 ‘근대’는 온통 일제의 총칼과 독립운동가들의 피비린내로 얼룩진 ‘오욕의 땅’ ‘암흑기’ 식민지시대로부터 그 부활의 몸짓을 시작하게 될지도 모른다. 해방 이후 반세기, 이제야 한국의 역사학이 대중의 성원을 등에 업고, ‘일제’와 ‘의병’과 ‘독립운동’, ‘친일파’와 ‘인텔리’와 ‘민족부르주아지’, ‘민중’과 ‘노동자’와 ‘빈민층’이 아닌, 당시 사람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에 다가가고자 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쯤 그들의 온기와 숨결, 그들의 ‘진실’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우리만의 언어를 가질 수 있을까?

하지만 변화는 금기에 도전하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과학’과 ‘가치중립’을 표방하는 역사의 논리와는 배치되는, 대중들의 새로운 ‘욕망’과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래서 역사와 대중의 만남은 언제나 ‘생산적’인 동시에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교조화되고 박제화되어 있는 우리의 ‘근대’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그럼으로써 우리가 ‘현대의 감옥’에서 한뼘이라도 더 자유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소간 지나친 ‘막대 구부리기’의 위험성을 감수하더라도, 적어도 당분간은 도전과 실험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대중은 역사를 통해 이름을 획득하지만, 결국 역사의 방향을 지시하는 것은 대중이므로.

 

 

__

  1. 전통적인 TV사극과는 성격과 시청자층을 달리하는 ‘퓨전사극’ 「허준」과 「대장금」의 폭발적 성공을 떠올릴 수 있다. 이런 유의 역사적 콘텐츠들은 영화, 소설, 만화, 컴퓨터게임, 그리고 캐릭터상품으로도 소비되고 있다.
  2. 1990년대 중반 선보인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2(청년사 1996)를 필두로 하여, 최근에 나온 조선시대의 생활사와 풍속사를 다룬 일련의 연구서들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하나의 흐름으로 정착된 적지 않은 양의 교양역사서들, 그리고 KBS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역사스페셜」은 모두 그 결과물로 볼 수 있다.
  3. 예컨대 철도여행의 제도화 과정을 다루는 제7부에서도 토마스 쿡에 의한 ‘관광의 발명’을 논하다가 난데없이 일제 식민자본에 의한 인천 월미도, 동래 온천, 금강산 전기철도 개발의 빈약상을 대비시키는 방식은, ‘충격효과’를 노린다면 모르지만, ‘근대성과 식민성의 횡단선들의 모양과 깊이’를 현실감있게 그려낼 수 있는 논의구도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차라리 일본의 칸사이사철(關西私鐵)에 의한 관광철도의 도입이나 식민지 시기 만주와 대만에서의 철도관광상품의 개발을 대비해보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더 나아가, 천황제와 함께 철도를 메이지(明治) 시기 이래 ‘근대화의 양대 상징’으로 하며 오늘날에도 그 전통을 변함없이 잇고 있는 일본에 비해, 해방 이후 자동차와 고속도로에 밀려 상대적인 정체·쇠퇴의 길을 걸어온 한국철도의 ‘식민 이후’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의 근현대사에 가로놓인 식민지 유산의 ‘연속’과 ‘단절’의 문제나, ‘일본식’ 근대화 모델과 ‘미국식’ 근대화 모델의 중첩·대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단초가 마련될 수 있지 않을까?
  4. 근대사 연구, 특히 식민지 시기 문화사 분야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서의 간학제적 연구를 문학 연구자들이 선도하고 있는 현상은 단지 우리 학계만의 현상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보편적인 경향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이미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의 ‘삼총사’―싸이드(Edward Said), 스피박(Gayatri Spivak), 바바(Homi Bhabha)―가 모두 영문학자들이라는 사실이나, 탈식민주의의 이론적 성과에 대한 찬탄과 동시에 그들에게 제기된 비판의 목소리들―‘문학 텍스트에의 함몰’ ‘현실 비판의식의 상실’ ‘포스트모더니즘에의 투항’ 등등―은 현 싯점의 우리 학계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