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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지식교양만화의 새로운 가능성
박인하 朴仁河
만화평론가,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교수 enterani@yahoo.co.kr
한국만화의 장르로 지식교양만화라는 용어는 낯설다. 학습만화라 부르면 쉽게 이해되는데, 지식교양만화라 하면 도통 그 범위를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다. 학습(學習)이라 하면 한자어 그대로 ‘배워서 익힌다’는 뜻이고, 지식교양이라 하면 사회·과학·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전달한다는 뜻이다. 학습만화라 불리는 만화들이 배워서 익히는 용도보다는 폭넓은 교양적 지식을 전달하는 모양새니 지식교양만화라 정의하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90년대 초반 시장을 장악하고 주류로 등장한 만화잡지 중심의 만화전문출판사들은 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대여점’이라는 왜곡된 소비씨스템과 일본만화의 번역에 의존하는 물량 중심의 출판행태로 인해 서서히 불황의 길에 접어들었다. 만화출판계가 불황의 본격적인 골짜기에 빠져든 2000년대, 마이너리그쯤으로 여겨지던 지식교양만화가 수십만부를 훌쩍 넘는 히트작을 내며 일약 만화시장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지식교양만화는 만화출판계는 물론 극심한 불황에 시달리던 출판계의 대안으로 각광받으며 몇년 사이에 출판종수를 확대시키고 시장을 넓혀갔다. 여전히 함량미달로 아이들의 눈을 현혹시키는 만화도 많지만, 수억원대의 자본을 투자한 기획작품(혹은 상품)도 여러 종으로 늘어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여전히 이들 만화가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지 못하고 일반 교양출판물의 번안이나 유사한 패턴의 복제형 만화를 양산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자본의 투여가 시장의 변화를 끌어내기보다는 성공한 모델의 답습으로 그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지식교양만화는 한국 만화시장, 더 나아가 한국 출판시장을 구원할 것인가? 몇가지 구체적인 작품으로 이를 점검해보자.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홍은영 작, 가나출판사) 이후 최대의 히트작으로 평가받는 『마법천자문』(시리얼 작, 아울북)은 철저한 시장조사와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벤치마킹을 통해 태어난 작품이다. 서사구조는 간단하다. 귀엽지만 막무가내인 손오공이 마법을 익혀 예쁜 소녀 삼장과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구조다. 한자학습을 내세웠지만 1권에 나오는 한자는 21자뿐이고, 한자는 재미있는 마법의 재료로 등장한다. 한 100자나 아니면 500자를 익히게 하는 학습만화가 아니라 ‘학습’으로 부모를 안심시키고 마법격투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영리한 만화다. 계보를 따지자면 『드래곤 볼』(도리야마 아끼라 작, 서울문화사)의 조카쯤 되는 만화라는 말이다.‘시리얼’이라는 스튜디오 이름으로 출간되었지만 따져보면, 그 구성원에는 1998년 『주니어챔프』에 「대지옥전 진광대전」이라는 격투물을 발표한 작가도 있다.
‘만화로 보는 한국문학 대표작선’(이가서)은 이문열의 중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시작으로 박완서·이청준·전경린·하성란·전상국·황석영·이효석·최일남 등 소설가의 단편을 만화로 각색한 씨리즈다. 기획의 의도나 표지디자인, 광고의 콘鴉트 등을 살펴보면 이 만화의 방점은 ‘만화’가 아니라 ‘소설’이다.‘이문열 원작’이 중요하지 ‘이원희 그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작화(作畵)는 그야말로 무난한 수준에서 끝난다. 컬러링도 학습만화류에서 일반화된 그림자를 집어넣은 애니메이션 컬러링이고, 작화는 그 컬러링을 쉽고 편안하게 하기 위해 캐릭터 외곽선의 끊어짐이 없도록 하는 명료한 선이 대부분이다. 만화의 커다란 장점인 작화의 재미를 느낄 수 없는, 그림으로 보는 소설 정도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만화작가에 의해 새롭게 해석된 소설이 아니라 소설의 서사를 충실하게 옮긴 만화다. 이 씨리즈는 학습만화라는 장르 구분보다는 지식교양만화라는 장르구분이 훨씬 더 타당하다.
‘달궁’에서 펴낸 『아라비안나이트』는 한국문학 대표작선에 비해 만화가의 역할을 강조한 작품이다. 이미 전작 『에시리자르』(서울문화사)에서 아라비안나이트의 맛깔스러운 재해석을 보여준 ‘신일숙’이라는 작가를 전면에 내세웠고, 때문에 어느 기획만화보다 작가의 아우라가 살아 있다. 바로 신일숙 만화다운 만화라는 말이다. 흥미로운 원작을 빼어난 작가에 의해 재해석하는 기획은 대안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워도 작품의 완성도에 도달할 수 있는 안전한 방법이다. 이미 『이문열 이희재 만화 삼국지』(아이세움)에서 성공한 기획이기도 하다. 다만 작가가 얼마만큼 매너리즘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아라비안나이트』를 재해석할지는 조금 더 지켜볼 일이다. 이 기획에서 보여준 결정적인 문제는 성인용에 가까운 아라비안나이트의 텍스트 수위조절 문제이다. 현재 출간된 1·2·3권은 분명 청소년용인데, 기획교양만화시장은 아동층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으니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다.
이와 비슷한(안정적인 고전을 지명도 있는 작가가 새롭게 각색한) 사례가 이우일의 『호메로스가 간다: 이우일의 그리스 로마 신화』다. 김영사가 만화에 뛰어들어 출간한 첫번째 작품인데,4년 동안 이우일이 재해석한 그리스·로마 신화가 흥미롭다.‘호메로스’라는 화자를 통해 투영된 신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난다. 『아라비안나이트』와 『호메로스가 간다』는 지명도 있는 작가가 고전을 재해석한 사례로 학습만화에서 지식교양만화로 넘어가는 지점의 만화라 부를 만하다.
학습만화의 한계를 뛰어넘어 트렌디한 지식과 교양을 내세운 사례는 ‘서바이벌 만화 과학상식’(아이세움) 씨리즈가 있다. 『무인도에서 살아남기』를 시작으로 아마존·사막·빙하·초원·시베리아 등으로 무대를 옮기며 지리적 특징과 서바이벌 상식을 묶어 소개한 만화다. 어린이들이 흥미로워할 만한 지식과 교양의 현주소를 적확하게 포착한 이 씨리즈는 유사한 아류기획을 양산한 바 있다.
이러한 『마법천자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아라비안나이트』 『호메로스가 간다』 『무인도에서 살아남기』는 출판시장에서 성공했거나, 아니면 자본이 많이 들어간 만화들이다. 또 이 작품들은 2000년대 이후 새롭게 형성된 아동용 만화시장을 겨냥하고 있으며, 기존의 만화출판사가 아닌 일반 도서출판사의 만화사업 진출의 일환으로 출간되었다.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이미지 언어인 만화를 활용해 부모들과 타협할 수 있는 ‘지식교양’의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다.
답답한 점은 이 만화들이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다양한 지식교양을 전달해주기보다는 아주 판에 박힌 ‘정답에 가까운’ 모습만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한자공부, 문학작품 번안, 고전 재해석처럼 부모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혹은 무리하지 않고 일정한 완성도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에만 머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경제·인권 등 수많은 이야기들이 만화로 그려지고, 그 안에서 제대로된 지식과 교양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지식교양만화다.
그 가능성의 단초를 보여준 잡지로 『고래가 그랬어』(야간비행)을 꼽을 수 있다. 인권, 노동, 미디어, 역사의 재해석, 만화작법 등 독특한 기획을 보여준 이 잡지는 만화가 도달할 수 있는 지식교양의 스펙트럼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고래가 그랬어』의 도전은 아직 ‘도전’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단행본이 출간되지 못했고, 잡지의 운영이 아직은 녹록하지 못한 형편이다. 만약, 다양한 분야의 지식교양만화가 활성화한다면 한국만화는 그야말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현재 아동용으로 활발하게 기획되고 있는 지식교양만화를 청소년용, 성인용으로 확장할 사례가 필요하다.
그 성공사례의 단초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한 『십시일反』(창비), ‘길찾기’에서 출간된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와 오영진의 『남쪽손님: 보통시민 오씨의 548일 북한체류기(상)』 『빗장열기: 보통시민 오씨의 548일 북한체류기(하)』를 꼽을 만하다. 『십시일반』은 박재동·홍승우·이희재·이우일·유승하·최호철·조남준 등 열 명의 작가가 습관적인 차별의 문제에 대해 제기한 인권만화다.2003년 8월 출간된 이후 예상을 깨고 출판시장에서 수만부가 팔리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는 인터넷 웹진 ‘프레시안’에 연재된 후 단행본으로 출간된 지식교양만화로 십자군 원정의 추악한 본질을 부시의 이라크 공격과 맞물리게 묘사한 작품이다. 오영진의 『남쪽손님』과 『빗장열기』는 논픽션 만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만화가이면서 동시에 한국전력공사에 근무하는 오영진은 함경남도 금호원자력 건설본부에 자원해서 총 548일을 북한에서 체류하며 북한 경수로 공사에 참여했다. 이 사실적인 경험을 만화로 그려 묶은 작품이 바로 『남쪽손님』과 『빗장열기』다. 남과 북의 미묘한 차이와 닮아 있는 모습 등이 쉽게 만날 수 없는 굵고 독특한 필치로 묘사된다. 이 두 사례는 성인용 지식교양만화도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제 만화는 ‘책’이라는 본질을 회복하고 있다. 그 변화의 가능성을 지식교양만화를 통해 읽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