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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미국을 불량국가로 가진 세계의 불행과 희망
E. 또드 『제국의 몰락』, 까치 2003
이삼성 李三星
한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sunglee@hallym.ac.kr
패권의 경제적 기초가 쇠퇴한 이후에도 미국이 국제적 협력과 평화를 위한 리더십을 행사할 수 있을지 여부에 관한 논란은, 로버트 코헤인의 『헤게모니 이후』라는 저작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헤게모니 이후의 헤게모니’의 가능성에 대한 논쟁이라고 보아 무방하다. 경제·군사적 헤게모니가 확고하던 시절 자신의 주도하에 구축된 유엔을 비롯한 국제적 제도와 국제규범들을 계속 뒷받침하는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할 때, 미국은 여전히 헤게모니 역할에 버금가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른바 연성권력(soft power)론이었다.
1994년에서 99년에 이르는 발칸반도의 인도적 위기의 상황에서 유럽국가들과 유엔은 무기력을 드러냈고, 미국의 정치군사적 리더십에 대한 의존 이외에 다른 현실적 대안은 없다는 인식과 무력감이 미국의 대서양 동맹국들을 짓눌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의 보편주의적 리더십에 공개적인 회의를 제기하는 동맹국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이나 대인지뢰협정 그리고 국제형사재판소 문제에서 기후협약에 이르기까지 국제 레짐(regime)의 형성을 미국이 지원하기는커녕 방해하는 세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특히 그러한 경향이 신 부시행정부의 출범으로 강화되는 양상을 띠면서, 미국의 ‘헤게모니 이후의 헤게모니’의 능력이 될 보편주의적인 정치 리더십에 대한 회의는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미국의 군사적 헤게모니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회의는 상대적으로 약했다. 러시아 군사예산의 5, 6배를 넘는 군사비 지출능력과 부단한 첨단군사무기체계 개발능력, 그리고 1991년 걸프전 이후 전지구적 차원에서 이른바 경찰국가적 군사행동 능력을 가진 유일한 국가라는 위치로 말미암아, 군사영역에서 탈냉전 이후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위상을 회의하기는 쉽지 않았다.
경제분야에서 미국의 헤게모니 상실여부 논란에 대한 엠마뉘엘 또드(Emmanuel Todd)의 얘기(APRÈS L’EMPIRE, 주경철 옮김)는 새롭다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미국의 보편주의 상실에 뒤따를 쏘프트 파워와 그에 바탕한 미국의 정치적 리더십 쇠퇴에 관한 얘기도 특별히 새롭다 할 것은 없다. 또드의 논지의 새로움은 미국의 보편주의 상실근거에 대한 독특한 논리에 있다. 그리고 거의 아무도 의문시하지 않는 미국의 군사적 헤게모니라는 가정에 대한 대담한 도전에 그 새로움이 있다.
미국의 보편주의 상실에 대한 또드의 논의는 크게 몇가지 중요한 얘기들을 담고 있는데, 이 모두에서 인류학적이고 인구학적인 그의 통찰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먼저 인종이나 민족마다의 전통적인 가족구조라는 차원을 주목한다. 형제간의 재산분배와 위계질서가 독일과 일본의 경우 불평등하고 권위주의적이며, 러시아는 평등하나 권위주의적이고, 앵글로쌕슨의 경우는 평등과 불평등, 차별과 포용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미국은 세계와 관계함에 있어서 보편주의와 차별주의 간에 불안정한 긴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미국은 차별주의의 국면으로 돌아서 있다는 것이다. 아랍권에 대한 차별주의의 확대와 미국 내부에서의 불평등 심화를 동전의 양면 같은 현상으로 그는 주목한다. 러시아가 보편주의에 오히려 더 친화적인 반면에 미국의 보편주의는 어떤 숙명적인 한계를 안고 있으며, 더욱이 현재의 미국은 차별주의로 후퇴하는 국면에 접어들어 있다는, 그래서 헤게모니의 중요한 차원의 하나인 쏘프트 파워를 미국이 상실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이 분야의 논의에 매우 흥미로운 하나의 앵글을 제공한다.
또하나, 또드는 미국이 강력한 민주주의국가로서 앞으로의 세계에서도 보편적 규범으로 남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가정을 근본적으로 회의한다. 그는 1980년대 이후 제3세계가 민주화의 물결에 합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그 원인을 제3세계가 전후에 겪어온 정신혁명, 즉 교육혁명에 의한 문자해독률의 급격한 상승, 그리고 그에 따른 여성들의 피임으로 그 사회들이 안정된 인구학적 수준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찾고 있다. 세계는 전지구적으로 민주화되고 있는데 미국은 오히려 ‘제국적 약탈체제’에 안주하고 그 내부의 정치질서까지도 과두정으로 변질되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미국은 민주주의라는 보편주의적 규범의 핵심원천이 아니라 이제 그 흐름에 역행하는 편에 서 있다는 진단이다. 2002년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좌파정권에 대한 군사쿠데타 직후 미국은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정권을 즉각 승인하였으나, 곧바로 베네수엘라 국민의 저항으로 쿠데타세력은 몰락하게 되었다. 그는 이 사건을 제3세계의 민주주의와 그 안에서 미국이 서 있는 위치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증거로 포착한다.
쌔뮤얼 헌팅턴은 민주주의와 인권은 문명적으로 서양의 전통에 속하는 것이어서 비서양세계에서는 이질적인 것이므로 비서양사회들의 민주화는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인류사 최대의 문명적 업적은 근본적으로 서양의 테두리 안에 제한된 채 남을 것이라고 했다. 이같은 서양중심주의 세계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논지의 한 예를 또드는 제공한다.
미국의 군사적 헤게모니에 대한 또드의 비판은 매우 흥미로운 동시에 논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은 세계를 지배할 군사력을 갖고 있지 못하며, 이것은 중국, 러시아, 일본이나 독일과 같은 강대국과는 싸우지 않고 이라크나 북한과 같은 약한 나라들만을 상대로 전쟁을 하거나 위협하는 데에서 드러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것을 그는 ‘연극적인 마이크로 군사주의’라고 규정한다. 아마 이 책에서 가장 센세이셔널한 주장도, 그리고 가장 논리가 취약한 것도 이 부분이다. 상대적으로 강한 나라들이 전지구적 차원에서 행사되는 미국의 주도권에 도전하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이 그들을 위협하거나 싸움을 걸 이유는 없다. 국제적인 비판과 저항을 최소화하면서 중소국가들을 상대로 전쟁을 신속하게 수행하고 그 지역질서를 장악하고 주도하는 능력이 있다면, 그 나라가 패권을 가진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또드 자신이 영국의 패권시대라고 인정하는 기간에도 영국 패권의 군사적 증거는 유럽에 대한 영국의 지배가 아닌 주변부 식민지쟁탈전에서의 우위였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여러가지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을 포괄하는 유라시아대륙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을 관리한다는 명목을 앞세워 탈냉전 이후에도 이 대륙을 동맹의 사슬로 둘러싸고 있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러한 동맹의 체제에 안주해 있으며, 그로부터 특별한 이탈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그것 자체로 미국 패권을 드러내는 것임을 부인하기 또한 힘들다.
또드가 비판한 미국의 ‘연극적인 군사주의’에서 그 군사주의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 군사행동이 단순한 연극이 아니라, 해당 지역의 운명과 질서를 결정하는 패권자의 권력정치적 행위라는 점을 부정하기란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결코 쉬운 일일 수가 없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은 유럽의 방관자가 보기에 하나의 연극적 행위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이라크, 아니 아랍인들 전체가 숨을 죽이며 당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정치의 한 비극적 사건이었다. 유럽도 러시아도 비난의 제스처를 보였다 하나 미국의 행동을 막기 위한 어떤 공동의 행동도 효과적으로 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미국의 행동을 단순히 연극적 행위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 한반도에는 북한 핵문제를 둘러싸고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하여 세계가 미국의 군사행동 선택여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미국의 제한적 군사행동의 현실적 가능성 여부가 아니라 미국의 ‘선택’이 무엇이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이것은 또드가 미국 패권의 전성기라고 보는 냉전시대 전반부에는 오히려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이 미국의 패권자적 위치의 증좌라고 할 수 없다면 세상에 패권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아울러 이 책이 담고 있는 유럽중심주의적 편린들을 두 가지만 지적해두고 싶다. 또드는 1950〜65년 시기를 미국의 패권이 관대하였고 그래서 지극히 긍정적이었던 시기로 규정하고 있다. 이 시기는 미국이 유럽에 대해 마샬플랜을 펼쳐 유럽과 일본을 재건한 기간과 일치한다. 이같은 이야기를 중동과 라틴아메리카와 동아시아,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또하나, 또드는 미국과 세계의 관계에서 유독 유럽과 미국의 갈등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이라크 침략과 중동정책 전반에 대한 유럽의 태도가 기본적으로 갈등적이기보다는 협력적인 것은 아니었던가. 이라크전쟁이 발생했다는 것 자체가 미국과 유럽 간의 갈등을 드러낸 것이라기보다는 유럽이 기본적으로 미국의 투덜거리는 동맹자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드러낸 것은 아닐까.
또드는 책의 말미에서 미국이 보편주의를 상실한 현 상황에서 러시아에, 그리고 러시아와 유럽 사이의 협력과 연대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있음을 알수 있다. 그는 러시아의 경제회복과 민주주의 정착이 미국의 전횡을 견제할 건강한 균형으로 자리잡으리라는 낙관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유럽 또한 통합과 협력을 통해 세계평화와 보편주의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러시아와 협력해 함께 유엔을 강화함으로써, 미국의 일방주의적이고 퇴행적인 전횡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한다.
또드의 논의에서 희망의 중요한 근거는 러시아인의 DNA에 대한 인류학적인 평가다. 러시아의 전통적인 가족구조는 형제간의 평등을 내포한 것으로, 차별과 포용을 동시에 내포하는 앵글로쌕슨의 그것과 차이가 있어 러시아인들이 생래적으로 보편주의에 더 친화적이라는 얘기다. 먼 미래의 일로서나마 미국 패권의 전횡에 불안해하는 인류에 하나의 대안으로 위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얘기다. 그러나 그도 지적하고 있다시피 러시아인의 가족구조가 평등성과 함께 권위주의적 구조를 동시에 안고 있다면, 그리고 그가 여러차례 지적하듯이 러시아인의 생래적 구조에 높은 폭력성이 내포되어 있다면, 그래서 보편주의에 대한 친화성과 동시에 스딸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적 질서에 대한 친화성도 내포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미국이 탈냉전 이후에도 자신의 패권적 역할을 지속해야 할 정당성의 근거로 삼은, 러시아를 포함한 유라시아대륙의 내재적인 불확실성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또드가 제시하는 대안적 질서라는 것은 동아시아와 유럽의 미국 동맹국들이 보기에 매력과 함께 불안을 내포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드의 주장에서 긍정적 요소와 함께 그 근저에 있는 인류학적 설명이 내포한 모순의 일면을 유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