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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양애경 梁愛卿
1956년 서울 출생.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불이 있는 몇개의 풍경』 『사랑의 예감』 『바닥이 나를 받아주네』 등이 있음. neve@kcac.ac.kr
내 어머니 파평 윤씨
아버지사 가진 것 없는 시골 선비였지만
어머니는 경기도 포천 천석꾼의 막내딸
그럼 뭐하나 외할아버지는
딸들에겐 땅 한뙈기 나눠주지 않은걸
기름기 흐르는 경기미 쌀밥과
그 지방에서만 나는 커다란 알밤도
어머니 이야기 속에서만 들은 기억
가난한 공무원의 아내라서
연탄 때고 구멍가게에 줄줄이 외상을 달면서도
어머니는 기가 안 죽었는데,
‘돈도 없는 것들이 도도하기는……’
구멍가게 주인마누라는 우리만 보면 입을 비쭉거렸다
돈 없으면 자존심도 웃음거리가 된다
그래서 우리 형제는 자라면서
월부로는 물건을 사지 않는 버릇이 들었다
칠순을 훨씬 넘어선 어머니
집안에선 제일 항렬이 높지만
종중(宗中)의 산이 관광지 개발로 수용되자
막대한 돈을 남자들끼리 나눠먹으며
시집간 여자는 그 집안 사람이 아니라고 그런다
아니 시집 안 간 여자까지도 그 집안 사람이 아니라고 그런다
서얼 자식도 있고
외지에서 들어와 같은 성이라고 하면서 머슴 살던 사람
손주의 손주까지 권리를 찾는데
그 산 사놓으신 내 아버지의 딸인 나는
왜 권리가 없느냐고
어머니 무릎 아파 절뚝거리며 다니시지만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돈 없고 빽 없기는
시 쓰는 나도 마찬가지
가진 것 없이 자존심 강한 것도 대물림일까
노한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나는 속으로 샐쭉 웃는다.
보통 골목길
한해의 마지막날
뺨에는 붉은 여드름이 몇개 붙었고(이 나이에!)
어제 감은 머리는
긴 누비코트 깃 아래에 감춰넣고서
코트 밑 체육복 바지에는 흰 강아지털을 숭숭 붙인 채로
연하장 한장 들고 우체국 가는데,
맞은편에서 남자 하나가 온다
에구, 쳐다보면 어쩌나
우스운 꼴일 텐데,
라고 걱정하다가
나는 대한민국의 보통 아줌마(?)
저 사람은 보통 아저씨
보통 여자와 보통 남자가 엇갈려 가는데
뭐 어때,
라고 생각하며 지나치고 나니
보통 여자와 보통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 지나가는 보통 골목길이
마악 좋아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배나무 밭의 동화
오랜 여정으로 몹시 목이 마르던 상인이, 배가 탐스럽게 익은 배나무를 보았다. 그는 배 한개를 땄다. 배는 물이 많았고 달았지만, 분노에 찬 배나무 임자가 나타났다. 그는 악마였다. 악마는 자기 배를 먹은 댓가로 상인이 목숨을 내놓든지, 아니면 ‘아직 가지지 않은 어떤 소중한 것’을 내놓아야 한다고 했다. 상인이 선택하기는 쉬웠다. ‘아직 가지지 않은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인이 집에 돌아가보니 딸이 태어나 있었다.
딸이 처녀가 되었을 때, 악마가 처녀를 데리러 왔다. 처녀는 악마의 배밭 모퉁이에 묶여 있었지만, 악마는 그녀가 너무 깨끗해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음에 처녀가 왔을 때는 물을 모두 없애버렸다. 처녀는 배나무 잎새에 맺힌 이슬을 모아 몸을 씻었다. 그래서 악마는 두번째 날에도 그녀를 데려가지 못했다. 분한 악마는 처녀의 두 손을 잘라버렸다.
세번째로 악마가 처녀를 데리러 왔을 때, 그녀에게는 몸을 깨끗이 할 물도 없었고 닦아낼 두 손도 없었다. 그러나 악마는 이번에도 처녀를 데려갈 수 없었다. 처녀는 팔뚝에 대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에 그녀의 팔이 하얗게 씻겼기 때문이다. 마침내 악마는 처녀를 데려갈 것을 포기했다.
지나가던 임금님이 그녀를 보았다. 임금님은 은으로 두 개의 하얀 손을 만들어주고 청혼했다. 그녀는 해 같은 아들과 달 같은 딸을 낳았다. 그러나 그녀를 질시하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숨기고 대신 쥐와 개의 태아를 내놓았다. 임금님은 그녀를 버렸고 그녀는 궁전을 떠나 숲에 가서 아이들과 만났다. 아이들 이마에는 왕의 아들딸답게 별 모양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아이들이 아름답게 장성한 후, 천사가 그녀에게 두 팔을 다시 자라나게 해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버지를 찾아가 외쳤다. “아버지, 어떻게 사람이 쥐와 개를 낳을 수 있다고 믿으셨어요?” 왕은 자기 아내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집안에서 두 개의 은으로 된 손을 가지고 나왔다. 왕은 그녀와 이렇게 해후했다.
나는 그 처녀에 대한 꿈을 꾼다
흥건한 눈물로
잘린 팔을 씻어내는 그녀를
그녀의 눈에서는 은하수가 솟아나고
밤새 눈물 흘려도 눈은 붉게 충혈되지 않는다
씻어낸다는 것
눈물이 맑다는 것
꿈이 밤새 불어난 물로 술렁거리는 개울에서
나는 잘린 내 두 손을 찾는다
하얗게, 순은으로 빛나는 손이
피가 도는 손으로 바뀌는 눈부신 순간을 본다
투명한 아침햇살 속에서
실핏줄이 살아나면서 따뜻한 피로 넘쳐오르는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