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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평화체제와 평화운동(21세기의 한반도 구상 2)

 

한미 양국에 나부끼는 국기의 물결

안보, 민족주의, 여성에 관한 단상

 

 

캐서린 문 Katharine Hyung-Sun Moon

웰즐리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 저서 중에 Sex Among Allies(1997)가 국내에 『동맹 속의 섹스』란 제목으로 소개됨. 이 글의 원제는 “I wonder how the flag industry is faring in Korea and the United States”임. kmoon@wellesley.edu

ⓒ Katharine Hyung-Sun Moon 2003/한국어판 ⓒ 창작과비평사 2003

 

 

1

 

1년 전 7월, ‘반미주의’에 관한 새 책을 쓰기 위해 몇달간의 조사연구를 마치고 나는 서울을 떠났다. 수백만의 태극기와 붉은악마 티셔츠와 축구공이 거리와 사람들의 몸과 건물을 장식한 ‘월드컵 공화국’을 떠났던 것이다. 나 또한 한벌 장만한 붉은 티셔츠, FIFA의 공식 셔츠, 그리고 신문에 난 안정환 선수와 히딩크 감독의 사진을 갖고서였다.

미국의 집에 돌아왔더니 성조기가 거리와 자동차 그리고 ‘아름다운 나라, 미국’에 관한 아동도서 표지들에서 나부끼고 있었다. 심지어 엘리베이터와 백화점에서는 재즈와 팝으로 편곡된 미국 국가도 들을 수 있었다. 태평양 연안의 한 나라를 떠나 그 반대편에 도착했는데, 두 곳 모두에서 국기라든가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다른 상징들이 나를 맞은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국기 제작업자들은 분명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둘의 유사함은 여기서 끝난다. 내가 2002년 7월에 떠나온 한국은 무기력과 불안정 그리고 과거의 ‘한’을 마침내 떨치고 새로운 국가적 가능성에 대한 희망과 함께 국제 스포츠와 지역의 강화된 역량이라는 더 큰 세계로 진출하는 국민들의 나라였다. 나는 한국인들에게서 다음과 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만일 우리가 한 국민으로 한데 뭉쳐 축구의 세계에서 기적을 이뤄낼 수 있었다면, 더 나은 정치, 더 나은 사회를 이루는 일에서는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을지 상상해보라.” 한국의 지배적인 정서는 새로운 잠재력에 대한 기쁨과 흥분이었다. 기쁨에 찬 민족주의와 애국주의……

2002년 7월에 돌아와 만난 미국은 우울과 두려움에 싸여 있었다. 고된 노력과 상당한 운에 힘입어 쌓아올린 부와 힘과 안락한 생활방식을 잃을까 두려워했으며, 외국과 관련된 모든 것을 무서워했다. 우리 미국인들은 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일을 무서워하고 새로운 외국인을 이민자와 망명자로 이 나라에 받아들이는 일을 무서워한다. 심지어 기술이나 공헌할 다른 자질을 지니고 합법적으로 온 사람들조차 의심으로 대한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리고 정부로서, 우리는 프랑스와 독일 같은 오랜 동맹국이건 북한 같은 오랜 적이건 다른 국가들과 협력하는 일 자체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것은 기쁨과 잠재력이 아닌, 공포에 찬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이다.

공포의 민족주의는 우리의 사회적 삶과 정치적 삶에 스며들었으며 우리의 민주주의를 독살하고 있다. 9·11 이래, ‘유죄 판결 전까지는 무죄’라는 신성한 정치적 원칙이 짓밟혀왔다. 정부는 미국시민까지 포함하여 테러리즘과 관련된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수감할 수 있다. 정부의 투명성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대중에게 기밀을 숨기는 것이 새로운 정치적 미덕이 되었다.

그리고 국회와 대중언론 같은 민주주의의 필수 기구들은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와 중부유럽에서의 군사적 개입, 그리고 북한에 대한 완강한 자세 등등의 이슈들에 대해 백악관과 국방부에 문제제기하기를 꺼린다. 이라크 재건에 유엔과 나토를 개입시키고 이라크 관련 정보(백악관이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 정보)를 조사할 양당 합동위원회를 만들자는 상원 내 민주당원들의 최근의 제안들은 표결에서 패배했다. 공화당의 부시대통령 지지자들은 그와 같은 시도가 대통령 개인에 대한 공격이자 “대통령으로서의 권한”(presidential prerogative)에 대한 공격에 다름아니라고 비난했다(『워싱턴 포스트』 2003년 7월 17일자).

그러나 정치적 기회주의란 ‘고용차별을 않는 고용주’와 같다. 민주당원들은 부분적으로는 대통령의 책임을 요구하기 위해,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당의 세력을 확장할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 이라크의 우라늄 구입 기도에 관한 잘못된 정보를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사건이 터지고 난 다음에 권력을 문제삼고 책임있는 정치적 행동을 촉구하기란 훨씬 쉬운 법이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기 전에는 민주당원들과 다른 비판자들은 어디에 있었나? 그때는 이라크의 핵능력이나 알카에다와의 연계 여부와 관련된 정보의 신빙성을 둘러싸고 아무런 실질적인 정치적 논쟁도 없었다. 투표로 선출된 지도자들에서, 지식인과 평범한 시민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대중은 말 잘 듣는 개처럼 양순하게 굴었을 뿐이다. 우리는 백악관에 책임을 요구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친구, 이웃, 동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향해 침묵으로 공모한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다.

침묵과 복종은 민주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대립된다. 그런데 9·11 이래 미국사회는 딱히 백악관에라기보다 공포와 불확실성에 점점 더 침묵하고 복종하게 되었다. 국가안보, 군사력의 사용 그리고 대외정책의 처리와 관련하여 정부의 정책과 행위를 비판하는 것은 비미국적(un-American)이며 비애국적이란 딱지를 각오하는 일이 된다.

 

 

2

 

한국에서는 1980년대 후반 이래 새로운 민주화로 대외정책 및 국가안보에 관한 논의에 시민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되었다. NGO, 인터넷을 포함한 대안언론, 그리고 국적을 넘은 네트워크와 연합들의 확산이 활발한 논의에 한몫을 하며 정부에 압력과 억제력을 행사하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또한 반대세력을 합법화하고 (정부의) 투명성을 강화하는 법률을 시행하며 지방정부와 거주자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한 1990년대의 정부 조치들이 국가권력과 민중권력 간의 격차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됐다.

정부와 사회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이런 변화들이 2002년에서 2003년으로 이어지는 겨울, 수만명의 사람들이 한미관계의 변화를 요구하며 거리로 쏟아져나오는 환경을 조성했다. 한국과 미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같은 ‘민중의 힘’을 ‘반미주의’로 해석했다. 그러나 이 꼬리표는 너무 단순하고 오도할 소지가 많다. 그것은 30년간의 권위주의적 통치 이후에 일어난 한국사회의 기념비적 변화들을 담아내지는 못한다. 독재 치하에서 한미관계에 대한 민간의 독자적 평가와 미군에 대한 비판은 적극적이고도 체계적으로 금지당했다. 박정희정권과 전두환정권 모두 그와 같은 비판을 체제전복행위로 간주했던 것이다. 김진웅 교수에 따르면 “반미운동은 친공 내지 친북운동과 동일시”되었다.1 또한 1980년 개정된 국가보안법 제7조는 “남한정부나 주한미군 주둔을 비판하는 (…) 문건을 작성하거나 배포한 사람들을 감금”2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김영삼 문민정권 이래 정치적 기회와 제약에 변화가 일어났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정부와 사회가 “남한의 더 포괄적인 새로운 대외정책 및 안보정책의 의제로, 경제와 환경 차원의 안보에서부터 (…) 공동체와 사회 차원의 안보에 이르기까지 국가안보의 다양한 차원들을 강조하게 되었다.”3 ‘반미주의적’ 비판자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에는 환경 정화, 기지촌 주변지역의 발전, 여성과 아동의 안전, 미군 당국의 투명성과 책임성이라는, 새로이 다양화된 대외정책 의제들이 반영되어 있다.

 

 

3

 

대외정책과 국가안보 사안의 다각화는 1990년대 세계 도처에서 진행된 과정이었다. 그것은 유럽에서 냉전이 종식되고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들이 발흥한 데 따른 직접적 결과이자 반응이었다. 그리고 특히 미국의 학술기관들이 ‘인간의 안보’를 국가적·국제적 안보의 중요한 핵심요소로 삼는 지적·정책적 환경을 만들어내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평화 건설과 민주주의 건설, 시민사회의 발전, 인권, 환경의 지속가능성, 국제이주, 인신매매 같은 것들이 1990년대의 상당기간 동안 미국의 주된 정책적 관심사가 되었다. 그러나 9·11이 갑자기 이런 진보적 기세를 중단시키고 대외정책의 개념과 촛점을 군사적 지배와 통제로 축소시켰다.

1990년대는 또한 국제관계를 페미니즘이나 젠더(gender)의 견지에서 분석하고자 한 학자들에게 활력 넘치는 성장과 발전의 시기였다. 그들은 ‘국제안보’ 개념을 다양화해서 개인적 안보까지 포괄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여기에는 가정폭력과 성폭력 그리고 전쟁의 폭력 등 온갖 종류의 폭력에 의한 신체적·심리적 피해를 방지하는 일이 들어간다. 가령 외국인 하녀를 고용한다거나 나이키 운동화를 사는 것 같은 개인적 선택들이 이민의 유형이나 경제적 힘과 지배의 구조라는 더 큰 범주와 무관할 수 없음을 그들은 보여주었다. 정부와 국제기구에 압력을 가하여 여러 다른 공동체에서 교육과 건강 및 그밖에 여성에게 필요한 다른 것들을 조사하도록 했으며, 국회·교육기구·전문직 그리고 다른 권력구조들에 진출하지 못하거나 진출했더라도 미미한 수준에 그치는 개개인들, 특히 여성과 아동의 권리와 복지를 보호할 정책적 조치들을 제안하는 일에 힘을 보탰다. 그리고 페미니즘의 분석은 서구의 통상적인 권력개념이 육체적 지배와 군사적 힘이라는 남성적 가치들에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연결되는 수많은 방식들을 드러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전쟁의 남자다움’에 관한 지적·사회적 관습들을 평가하고 비판하려 했기에 보수적 ‘반격’(backlash)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일례로, 1998년 프랜씨스 후쿠야마는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지에 쓴 글4에서 민주주의와 평화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으며 국제관계학 분야에서는 이것이 대개 ‘민주주의적 평화’(즉 민주주의국가는 다른 민주주의국가와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로 알려져 있다라고 썼다. 그는 민주주의국가가 다른 민주주의국가와 싸우기 힘든 제도상의 혹은 절차상의 이유들에 덧붙여, 젠더와 민주주의적 평화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으니, “여성의 참정권 확대와 정치적 의사결정에 대한 참여 확대라는 견지에서 볼 때 발전된 민주주의국가는 또한 권위주의국가들보다 더 여성화되는 경향이 있다”(36면)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저런 전쟁들에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하거나 무력을 대외정책의 한 도구로 활용하는 데 대한 미국여성들의 지지도가 미국남성에 비해 낮다는 통계자료를 증거로 제시했다.

그런데 여성의 정치참여 증대와 평화 가능성의 증대는 후쿠야마로 하여금 위기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는 ‘여성화된 민주주의국가’들이 나약해져서 사담 후쎄인이나 밀로셰비치(Milosevic,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고취해 유고에 유혈사태를 야기한 당시 신유고연방 대통령–옮긴이), 모부투(Mobutu, 1960년 쿠데타로 집권한 후 정권유지에만 급급하여 경제발전을 이루어내는 데 실패한 콩고공화국 대통령–옮긴이) 같은 남성적 지도자들의 공격적 정치에 맞서지 못할까봐 우려한다. 요즈음이라면 그는 아마 공격적이고 통제불가능한 남성들의 목록에 김정일의 이름을 덧붙였을 것이다. “딱히 남성적 지도자는 아니더라도 남성적인 정책은 앞으로도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달리 말하면, 미국의 민주주의를 세계의 지배적 민주주의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국여성들과 남성들은 공격적으로 되고 무력사용을 옹호하며 전쟁에 참가하도록 훈련되고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9·11 이후의 미국은 후쿠야마가 바라는 미국, 다시 남성화된(re-masculinized) 미국이 되고 있다.

 

 

4

 

한국의 민주주의가 성장함에 따라 시민들이 군사주의에서 벗어나 평화의 가능성을 탐구하기를 열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남성의 의무적 군복무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 한국과 전세계에 주둔한 미 군사력에 대한 반대, 그리고 북한과의 평화적 대화와 공존에 대한 지지가 늘어났다. 그에 더하여 수적으로나 사회적 인정이라는 면에서 여성의 정치활동 참여도 증대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가 오늘날 한국을 과거 권위주의시대보다 덜 남성적으로 만들었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양성평등을 향한 진보가 상당히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남성성은 여전히 지배적이며 진보적 지식인과 활동가 사이에서조차 그렇다. 이들은 자신이 참여하는 사회운동에서 종종 남성적 편향을 드러낸다. 한국의 민간인에 미치는 미군의 부정적 영향을 비판하는 NGO 활동가들에서도 이 점은 뚜렷이 드러난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여성활동가들은 가령 기지촌 술집여성들에 대한 강간과 살인, 그들 자녀들의 사회적 주변화와 같은 개인의 인간적 고통과 상실에 주의를 기울이고 바로잡을 필요를 자주 강조했다. 하지만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의 전(前) 회장 정유진이 쓴 바에 따르면, 많은 남성 활동가들은 주한미군 철수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며 강간과 살인, 성적 착취, 그리고 버려진 아이들의 문제는 ‘부차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라 주장한다고 한다. 그들은 또한 미군철수와 통일 같은 ‘큰’ 문제를 맨 위, 그리고 개인의 인권을 맨 아래 등급으로 분류하는 경향을 보였다. 정유진은 민족주의를 위해 개인의 인권을 도구화하는 경향을 날카롭게 비판했다.5 1992년 미군 병사에 의해 살해된 윤금이씨의 경우가 그같은 도구화의 가장 잘 알려진 사례이다. 그녀가 죽기 전 대다수 한국인은 그녀를(그리고 많은 다른 기지촌 여성을) 양갈보 혹은 양공주로 경멸했다. 그런데 죽고 난 후 그녀는 한미관계의 불평등에 대한 정치적 인식을 고취할 의도를 품은 다수 진보적 활동가와 학생들에 의해 순결한 한국의 딸로 추어올려졌다.

이것이 바로 ‘남성적 민족주의’로, 통일이나 나라의 주권 같은 ‘거대한’ 국가적 목표를 앞당기거나 그에 기여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갖는 집단적 소유물로 여성의 육체와 성을 포섭해들이려는 경향이다.

이제는 외국인 여성들(예를 들어 동유럽이나 필리핀 출신 여성들)이 미군기지 주변의 술집노동자와 성노동자의 대다수를 이룬다. 이들 대다수 역시 인권침해와 육체적·심리적 학대를 겪고 있다. 하지만 ‘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SOFA) 개정을 통해 한국시민들의 권리와 복지에 대한 보호를 확대하려는 지난 10년간 활동가들이 해온 요구는 미군기지 주변에 한국인과 미국인들만 살고 있다는, 그리고 한국 민간인들만이 미군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범죄와 비행의 희생자라는 그릇된 가정을 갖고 있다.

 

 

5

 

한국과 미국 모두에서 정치적 수사(修辭)에는 흔히 무시받고 침해받고 희생당하는 것이 집단으로서의 국가라는 전제가 당연한 듯 깔려 있다. 그러나 국가는 살과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개인만이 그런 것을 갖고 있다.

민주주의국가가 개인에 대한 차별과 개인들의 고통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민주주의국가가 천대받고 정치적으로 무력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인가? 그리고 ‘민족’ 바깥의 이질적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신장하려는 노력에 남성적 민족주의가 어떤 속박을 가해오는가? 한국인과 미국인 양쪽 다, 이유는 다르겠지만, 이런 질문들과 직면해야만 한다.

[黃靜雅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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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inwoung Kim, “Recent Anti-Americanism in South Korea,” Asian Survey 29:8 (1989. 8), 754면.
  2. Amnesty International, “The South Korea: Prisoners Held for National Security Reasons”(1991. 9), 6면.
  3. Hyuk-Rae Kim, “The State and Civil Society in Transition: The Role of Non-Governmental Organizaions in South Korea,” The Pacific Review 13:4 (2000), 603면.
  4. Francis Fukuyama, “Women and the Evolution of World Politics,” Foreign Affairs (1998.9/10).
  5. 정유진 「민족의 이름으로 순결해진 딸들?」(『당대비평』 11호, 2000년 여름)과 「평화를 만든다는 것」(한국인권재단 『일상의 억압과 소수자의 인권』, 사람생각 2000년).